
반중/혐중의 시대에 다시 읽는 <8억인과의 대화> / 하남석
반중/혐중의 시대에 다시 읽는 <8억인과의 대화>

하남석(서울시립대 중국어문화학과)
바야흐로 반중, 혐중의 시대다. 최근에 다소 누그러지는 듯했지만, 내란 사태를 거치며 중국 혐오를 전면에 내건 극우집단이 출현했다. 이들은 한중관계에 대한 가짜뉴스를 퍼뜨리고 대림동이나 건대 앞 차이나타운에 가서 인종차별적 발언을 일삼으며 혐중집회를 열기도 한다. 이 극우집단의 행위는 일본의 극우혐한단체인 재특회가 일본의 코리아타운에 가서 벌이는 반한집회 및 혐한발언과 완전히 똑같이 닮았다. 뜻있는 이들이 중국 동포들, 재한 중국인 등과 연대활동에 나서서 이들에게 맞서고는 있지만 중국에 대한 비우호적 정서가 만연한 상황에서 극우적 흐름까지 나타났다는 점에서 많이 우려스럽다. 게다가 중국 국내 정세와 관련해서도 다른 나라와는 달리 시진핑 실각설과 같은 루머가 크게 확산되는 등 유독 한국에서 중국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깊이 쌓이는 중이다. 이렇듯 현재 “중국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큰 문제로 다가오는 시기에 리영희 선생의 <8억인과의 대화>를 다시 손에 들어본다. 당시 냉전이라는 큰 시대적 배경에서 반공주의의 이분법이라는 틀에 갇혀있던 한국에서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선생은 이 책을 통해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던 걸까? 그리고 현재 이 책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서문을 통해 읽는 <8억인과의 대화>
우선 리영희 선생이 1977년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책을 편역했는지 서문을 통해 알아보자.
“오늘날의 중국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세계의 모든 국민과 개인에게 있어 하나의 긴급한 시대적 과제처럼 되어있다. 우리도 국가적으로는 변모하는 국제사회를 슬기롭게 살아남기 위해서, 개인적으로는 20세기의 마지막 시대의 현실을 있는 대로 알고 그리고 지성적인 자세로 대처해나가기 위해서 중국에 관한 앎을 넓히고 깊게 할 필요가 있다.”
시기만 21세기로 바꾼다면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과도 다르지 않다. 지구적 차원의 경제 공황을 지나 세계질서가 격변하려 하는 시대적 전환기에 우리와 이웃한 대국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그 시기에 중요했듯 지금도 매우 중요한 시대적 과제임은 분명하다. 리영희 선생이 중국을 제대로 알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아래와 같다.
“여기에 수록한 24편의 글은, 한마디로 말해서 중국 민중의 나날을 살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데올로기, 권력, 정치, 혁명, 선전 등에 관한 것이나 특히 이론이라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저 기행문을 읽듯이 가볍게 읽으면 중국의 백성들 속에 들어가 목격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 그런 것이다...... 체제가 다르고 살아온 배경이 다르다 하더라도, 거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천국도 아닌 반면 지옥도 아니다. 우리 반도의 45배 넘는 넓은 땅에 살고 있는 8억이 넘는 인간은, 지구상의 어느 곳에 사는 어느 누구와도 다름없이 인간적인 희노애락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간들일 것이다. 그 속에서 정치도 전개되고, 이데올로기도 형성되고, 국제관계도 있는 것이지 인간을 취사해버린 곳에는 아무 것도 남지를 않는다. 우리가 여태까지 중국에 관한 것이라는 온갖 이론을 읽고 듣고 하였으면서도 읽고 들을수록 더 몰라지는 듯 느낀 것은 바로 그것들이 인간을 뺀 이론뿐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당시 한국에서는 중국에 대한 접근이 매우 어려웠기에 주로 서구와 일본의 저명인사 혹은 중국 전문가들이 중국에 가서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담은 글과 분석을 엄선해 번역함으로써 최대한 중국의 대중들의 일상을 가급적 있는 그대로 소개하려 한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주로 마오쩌둥 시기, 그중에서도 1970년대를 위주로 중국의 사회, 교육, 농촌, 도시, 노동 환경, 경제, 젠더 등을 폭넓고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거의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읽어봐도 매우 큰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감히 평가할 수 있는 글들이며, 저자들 역시 중국학 분야는 물론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긴 연구자들이 대부분이다. 중국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었던 한국의 당시 현실을 고려하면, 이 책 역시 죽의 장막 너머 대국의 일상과 사회 현실을 전함으로써 한국 사회가 공산주의 국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많은 편견과 오해를 깨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리영희 선생은 평소에 자신의 중국 연구를 중국의 혁명 역사 속에서 대안적 근대 추구의 사상과 실천을 발굴해 이를 한국에 소개하여 냉전적 반공주의에 찌들어 있던 한국 사회의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라고 종종 언급한 적이 있다. 즉, 한국의 권력자들이 통제하고 있거나 사람들이 눈감고 있는 세계 다른 지역의 현실과 진실을 한국에 알리고 투영함으로써 한국 사회 내부의 온갖 부조리와 왜곡을 깨닫게 할 수 있도록 의도했다고 회고했다. 선생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에 이은 편역서 <8억인과의 대화>는 중국과 관련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많은 편견을 깨고 중국에 대한 관심을 일깨움으로써 많은 지식청년들이 중국 연구에 나서게 되었다. 그렇기에 중국학계의 후학의 한 사람으로 필자는 선생의 이 작업을 한국의 비판적 중국연구의 출발점으로 여긴다.
마오쩌둥 시기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리영희 선생의 중국 연구에 대해 가장 흔한 비판은 선생이 항상 진실을 추구했던 다른 대상과는 달리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에 관해 진실을 누락했으며, 오히려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중국이 대외 개방에 나서며 문화대혁명의 여러 면모가 알려지게 되면서 선생 스스로도 일정하게 오류를 인정한 바가 있다. 하지만 당시와 현재 문혁에 대한 정보의 괴리는 리영희 선생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중국 연구자들 역시 맞닥뜨린 곤경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책 <8억인과의 대화>가 진실에 눈을 감았다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도 있다. 이 책에 실린 글 중에서는 당시 홍위병들이 저지른 파괴행위와 폭력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도 들어있고, 내전에 가까웠던 당시 상황을 비교적 객관적 입장에서 전하는 글도 있다. 마오쩌둥에 대한 지나친 1인 숭배의 분위기가 예전 소련의 스탈린 시기 1인 숭배에 대한 강압적 방식과는 달리 좀 더 대중의 자발적 지지에 기댄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상당한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는 내용도 몇 차례 나오기도 한다. 다른 무엇보다 지금까지도 세계의 중국학계에서 마오쩌둥 시기와 문화대혁명에 대한 재평가는 여전히 논쟁 중인 상황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어떤 입장들이 존재하고 있는지 <8억인과의 대화>에서 상당 부분을 할애해 소개했던 사회경제적 분야를 쟁점으로 해서 간략하게 정리해보자.
어떤 나라에서든 특정한 최고 지도자와 그 통치시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단을 오간다. 중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마오쩌둥과 그가 통치했던 시기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도 항상 논쟁적인 주제다. 특히 중국이 마오쩌둥 사후 1978년부터 개혁개방에 나서 숨가쁜 고속 성장을 기록하면서 마오쩌둥 시기는 낙후하고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화려한 성장 이면에 계급간, 지역간 빈부격차의 확대와 노동자의 실업문제, 경쟁 심화 등이 발생하자 상대적으로 평등하고 고용이 안정적이었던 마오쩌둥 시기에 대한 재평가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으며, 그 시기의 한계와 성과를 어떻게 평가할지가 대중과 지식인들 사이의 논쟁으로 격화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마오쩌둥 시기 중국의 경제와 사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룬다. 마오쩌둥 시기 중국 경제는 폐쇄적이고 비효율적이며 낙후했기에 마오쩌둥 사후 1978년부터 중국이 개혁개방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이후 국가 계획 외부에서, 개입과 규제가 없는 시장의 영역이 점진적으로 확대되자 인민들의 자발적인 시장 활동이 늘어나 경제성장으로 이어졌다는 서사가 중국 경제 평가에 대한 주류적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즉 마오쩌둥 시기는 실패했으나 덩샤오핑 이후 시기는 성공했다는 대비를 통해 중국 현대 사회경제사를 평가하는 것이다. 물론 이에 비해 소수이긴 하지만 그 역으로 덩샤오핑 시기에 들어 중국은 사회주의의 가치를 배신하고 자본주의를 수용해 중국을 불평등하고 불공평한 나라로 만들었기에 마오쩌둥 시기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목소리들도 있다. 혹은 보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마오쩌둥 시기에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이라는 혼란스러운 사건들이 있었지만 일정한 성장의 성과를 거두고 중국 산업화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공과를 따져봐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이렇듯 마오쩌둥 시기의 사회경제적 발전에 대한 평가는 그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분기한다. 이런 견해들을 몇 가지로 정리해보자면, 마오쩌둥 시기 중국이라는 체제가 붕괴 직전까지 갔다고 보는 “붕괴론”, 그와는 정반대 입장에서 그 시기 중국의 성취가 위대하다고 보는 “건설론”, 보다 절충적인 입장에서 전체적으로 심각한 손실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일부 발전한 부분이 있다고 보는 “부분적 성과론” 등이 있다.

붕괴론의 경우, 중국 외부의 반공주의적 입장과 중국 내부로부터의 여러 평가들이 있다. 이들이 주로 주목하는 것은 대약진과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으며, 중국 경제가 정체 혹은 퇴보했다는 점에 집중해서 마오쩌둥 시기의 발전 전략을 비판한다. 우선 중국 내부에서의 논의들을 살펴보면, 붕괴론을 주장하는 중국 내 논자들은 주로 덩샤오핑 이후 개혁개방 정책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마오쩌둥 시기 중국경제 구조의 불균형적 발전과 인민 생활수준의 저하를 그 논거로 삼으며, 심지어 일부 성장이나 발전의 통계치의 신빙성을 문제 삼기도 한다. 중국 외부의 반공주의적 입장에서는 마오쩌둥 시기 중국의 강압적인 독재 정치체제가 추진한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발전 전략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과 사회적 피해가 유발되었음을 강조하며, 반인권적인 정치사회적 상황 속에서 개인들이 처한 비극적인 상황들도 주목한다. 극단적인 평가로는 마오쩌둥을 인간이 만든 최악의 재앙을 주도한 통치자로까지 여긴다.
이와는 상반된 입장인 건설론은 붕괴론의 마오쩌둥 시기 중국이 후진적이었다는 주장을 기각하고 그 시기에 제3세계 국가로서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들은 주로 해외에서는 신마오쩌둥주의자(Neo-Maoist)라고 불리거나 중국 내에서는 신좌파 지식인들과 대비하여 구좌파(老左)라고 호명되기도 한다. 이들은 마오쩌둥 시기 중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개혁개방 이후 성장의 속도와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중국의 산업 생산은 1952년부터 1965년까지 연평균 12.3%, 1965년부터 1978년까지 연평균 10.2% 성장했다. 물론 중국은 1970년대 중반에도 여전히 상대적으로 가난한 저개발 국가였지만, 1949년보다 훨씬 더 발전했고 1949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다양한 현대 산업을 발전시켰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경제적 성과는 비록 일반 인민들의 소비는 상대적으로 적게 하여 그 잉여를 산업 투자에 투입하는 축적 체제를 통해 달성한 것이지만 사실상 도시 인구 전체를 고용했고 모든 사람에게 생활 소득을 보장했다고 판단한다. 당시 노동자들은 종신 고용을 누렸고 임금과 복리 후생이 상당히 평등했으며, 이들의 안정적인 지위는 개혁개방 이후 크게 무너졌다고 말한다. 이들은 대약진 시기 중국의 성장이 큰 타격을 입었고 대기근으로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는데 그 원인이 잘못된 정책에도 일부 있지만 당시 유례없었던 홍수와 가뭄 등 자연재해의 탓이 크다는 주장을 한다. 한편 이들은 마오쩌둥 시기에 대한 이후 서사들이 그 시기를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설명하고 있는 것은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 속에서 크게 탄압받았던 지식인들이 개혁 이후 복권되면서 담론장에서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실제로 노동자나 농민들은 마오쩌둥 시기에 대해 보다 긍정적인 기억을 갖고 있는 경우도 많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절충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부분적 성과론의 경우, 이 논리가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것은 일명 제2차 역사결의라고 불리는 중국 공산당의 공식적인 마오쩌둥 시기에 대한 공식 평가인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關於建國以來黨的若幹曆史問題的決議)”라고 할 수 있다. 2차 역사결의는 1981년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문건으로 마오쩌둥 시기의 생산력 발전의 여러 양적 지표들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은 당과 인민에게 엄중한 좌절과 손실을 안겨준 좌경적 오류로 평가했다. 이는 마오쩌둥 사상과 마오쩌둥 개인이 가진 역사적인 의의를 일정하게 긍정하면서도 한편으로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은 따로 분리해 그가 저지른 오류로 평가함으로써 공과를 정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중국 공산당은 일정하게 정치적 연속성은 역사적으로 이어가면서 경제 정책을 개혁개방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논리적 토대를 만들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중국연구자들의 경우에도 특정한 경향을 강조하는 측면들은 있을지 몰라도 일정하게 공과 과에 대해서 절충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마오쩌둥 시기가 개혁개방 시기와 대조적으로 비교되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산업에 대한 높은 투자율을 만들어내고 연해지역에서 내륙지역에 이르는 중국 전역에 산업화의 기초를 놓았기에 개혁개방 시기의 경제적 성과의 토대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문화대혁명 역시 대다수는 중국의 전통문화와 문명을 잔인하게 파괴한 것으로만 여기지만, 중국의 기층 인민들에게는 관료들을 통제하고 새로운 형태의 아래로부터의 민주를 발견하려는 정당한 시도로 여겨진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또한 동시기 중국에서 기초교육, 공중보건, 기대수명, 여성의 권리 신장 등 영역에서 상당한 개선이 있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약진 시기 대기근과 같은 마오쩌둥 시기 중국의 개발에 따른 인민들의 희생이 이 업적들을 능가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공과를 평가하기도 한다.
한국과 중국이 서로를 참조점으로 삼는 역사적 실천
마오쩌둥 시기에 대한 이러한 분기는 결국 현재의 중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그리고 앞으로 중국이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와 연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실제 20여 년 동안 중국을 오가며 만났던 다양한 중국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쉽게 정답을 내리기보다는 자신과 가족이 지나온 경험은 물론이고 현재 상황에 비춰 여러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자면, 홍위병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하나의 단일한 조직이 아니라 당시까지의 중국 사회와 사회주의에 대한 견해에 따라 때로 극단적으로 대립하기도 하는 여러 파로 갈렸었다. 혈통론을 앞세운 보수파 홍위병들에게 린치를 당해 가족을 잃었던 이들은 그 시기를 끔찍했던 시절로 회고하기도 했고, 사회주의의 이상을 가지고 중국을 더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로 바꾸려고 했던 조반파 홍위병 경험이 있던 이들은 당시를 기층 민중이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었던 대민주의 유일한 시기로 기억하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 중국 동북지역에서 만났던 국유기업 정리해고 노동자들은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들고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그들은 정리해고가 없고 비록 낮은 수준이라고 할지라도 안정적인 일자리와 복지를 제공했던 그 시기를 돌려달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덩샤오핑이 자신들을 자본주의라는 지옥으로 끌고 왔다며 큰 소리로 욕하기도 했다. 대도시에서 만났던 성공한 기업가나 일부 지식인들은 마오쩌둥을 국부로는 인정하지만, 문화대혁명은 중국에 엄중한 피해를 가져다준 대동란이었다는 중국 공산당의 공식 평가를 그대로 따라 읊기도 했다.
제일 흥미로웠던 대화는 2007년 무렵 중국의 노동문제를 다루는 한 대학원 수업 강의실에서였다. 담당 교수와는 종종 식사하며 나눈 대화를 통해 한국에서의 민주화 운동이나 노학연대 등에 관해 겪었던 경험을 전한 적이 있었다. 마침 그 중국인 교수는 중국인 대학원생들에게 한국의 대학생이나 지식인들이 노동 현장에 뛰어들어 결국 사회를 크게 바꿔냈다며 그런 점을 자신들이 배워야 하지 않겠냐고 얘기를 꺼냈다.
그때 내가 한 얘기는 한국의 학생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리영희라는 비판적 중국연구의 프리즘을 통해 중국의 ‘하방’이라는 마오쩌둥 시기의 역사적 경험이 일부 영향을 준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즈음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이나 노동NGO의 활동가들은 마침 중국어로 번역된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과 <전태일평전>을 읽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는 얘기를 전해주기도 했다. 이렇게 현재의 혹은 당시의 억압적인 정치권력, 자본권력에 맞서서 사회를 바꿔내려는 역사적 실천의 경험들은 서로가 서로를 참조점으로 삼는다.
지금도 그 연대의 끈은 이어지고 있다. 중국 온라인에서의 촘촘한 검열을 뚫고 많은 중국 친구들이 지난 내란 사태 당시 한국의 탄핵촉구집회에서 인상적이었던 집회의 자유발언 영상들을 중국어로 번역해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전해줬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로 비록 중국에서 강하게 탄압받고 검열받고 있지만 꾸준히 이뤄지고 있는 다양한 시위와 기층의 활동을 여러 매체를 통해 알리기도 했다. 이러한 서로의 공감과 연대만이 극우 집단의 혐오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을까? 리영희 선생은 2006년 중국의 시사 매체 <남방주말>이 노신 서거 70주기를 맞이해 기획한 긴 대담에서 한국이 미국식 자본주의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부조리와 오류들을 중국이 개혁개방 과정에서 반복하지 않기를 희망했다. 선생은 중국인들에게 한국의 부정적 경험을 거울삼아 중국이 좀 더 자신이 가진 덕성과 미풍양속을 키워나가기를 요청했으며, 나아가 노신이라는 공통의 참조점을 통해 동아시아가 연대할 수 있지 않을까 그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리영희 선생의 그 말씀들을 번역하며 중국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식인이자 저명한 노신 연구자인 첸리췬 선생의 좌우명이 떠올랐다. 한중 양국의 뜻있는 이들은 이렇게 서로 노력하고 공감하는 동시에 연대로 나아가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존재한다. 나는 노력한다. 우리는 또 이렇게 서로를 부축한다. 이것으로 충분하다(我存在着, 我努力着, 我们又这样搀扶着 - 这就够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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