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동북아지역 평화질서 구축을 위한 제언」

남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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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1-21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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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

4-4. 「동북아지역 평화질서 구축을 위한 제언」1)(1992년 서울대 강연, 신화)


 



서구의 산업국가들에서 이제 냉전은 끝났다고 하는 일반적인 동의가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를 포함한 다른 지역들에서 진정으로 동서갈등이 사라졌는지는 면밀히 검토되어야 할 문제로 아직 남아 있다. 한편,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동서대결의 종식과 다양한 지역들에서 장기간 지속되어온 냉전들 사이에는 명백한 차별성이 있다.
여기엔 시간적인 공백 이상의 것이 있다. 첫째, 그것은 서구의 국가들과 한국과 같은 비서구 국가들 사이의 구조적인 격차를 반영하는 것으로, 전자는 중심국이고 후자는 주변국이다. 냉전은 유럽에서 발생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유럽에서의 ‘평화’는 주변국들, 특히 한국과 베트남에서처럼 수천만 명의 희생자와 국토의 무참한 황폐화를 수반한 대리전쟁이 일어났던 아시아국가들의 희생을 대가로 유지되었다.
둘째, 이러한 시간상의 공백은, 비록 국제적인 동서갈등과 그 결과로 일어난 한반도의 분단이 한민족 외부에서 부과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갈등으로 말미암아 그 후 두 개의 한국이 서로 적대시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한반도에서 지역적으로 강화된 갈등구조는 그 자체의 동력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세계적 수준에서의 냉전의 종식과는 별도로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내면화된 독자적 갈등구조’(internalized independence)는 전 세계적인 이데올로기적 갈등에 의해 부과된 것임과 동시에 한반도가 주변국으로 종속된 결과다.
이러한 구조적 공백과 격차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 냉전의 종식은 분명히 두 개의 한국 사이에 지속되어온 갈등과 분단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들을 제공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날 세계에서 국가 간 갈등은 새로운 지역적 틀을 만들어 이전에 갈등하던 국가들이 한두 개의 틀 속에서 통합됨으로써만 해소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한반도의 분단은 단순히 두 개의 한국이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화해와 긴밀한 협조를 위한 새로운 틀거리를 만들려는 능동적 노력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을 것이란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사실, 1991년 12월 13일에 조인된 남북한 합의서에서 화해와 불가침에 대한 조항뿐만 아니라 상호 교환과 협력에 관한 조항을 담게 된 것은 이러한 요구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제 새로운 지역의 창조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아시아가 그 자체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아시아는 다양성과 복잡성 그리고 이질성의 정도가 매우 높은 지역이다. ‘아시아’라는 관념이 강력한 반식민주의적이고 반서구적인 민족주의의 상징적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정치적 정체성은 그 자체의 긍정적인 정치적 정체성의 명확한 상이 없어 대체로 부정적인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었다. 이러한 면은 동아시아에도 어느 정도 적용된다. 예를 들면, 최근에 과거의 ‘동아시아’는 일본에 대한 반식민주의적 상징이 아니라 반서구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반대로 그것은 일본 식민주의의 영향을 위장하는 가면으로도 사용되었다.
이것은 결코 동아시아를 한 지역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점은 아래와 같은 주장이 서구 지향적인 인사들에 의해 종종 주장되어왔기 때문에 강조되어야 한다. 그 주장이란, 유럽과는 달리 동아시아는 지역적 동질성이 매우 작기 때문에 유럽의 평화 정착 노력인 유럽안보협력회의(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CSCE)나, 지역적 틀로서 고르바초프가 말하는 “유럽인들의 집”(Europea home)과 같은 지역적 구조는 동아시아에서 동일하게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지역 사이에 어떠한 차별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지역에서의 새로운 질서를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주장은 보다 세밀히 검토되어야 한다.
유럽의 동질성은 종종 공통적인 문명, 즉 유대교–기독교 문명 때문으로 여겨진다. 동아시아가 그러한 공통적인 문명으로 특징지어질 수 없을지라도, 이 지역의 문화는 유교문명에서 연유하는 지배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동아시아가 사회주의 국가들인 중국, 북한 대 남한, 일본과 대만 등과 같이 쉽게 대별될 수 있는 상이한 정치적ㆍ경제적 체제를 가진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다양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CSCE도 처음에는 상이한 또는 심지어 반대되는 유형의 체제들을 망라하는 지역적 틀로서 만들어졌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유사한 착상이 동아시아에서는 취해질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만한 이유는 없다. 동아시아가 다양한 경제발전 수준의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대체로 지금 유럽이 당면하고 있는 것, 그리고 유럽공동체(EC)에서조차 유럽의 ‘남부’국가들과 관련되어 주된 이슈로 떠오른 것은 중심국들과 주변국들(또는 준주변국/반주변국들)을 어떻게 하나의 공통된 틀로 통합하느냐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유럽의 경험이 동아시아에 관련되지 않음이 자명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유럽의 경험들 중 지역적 특수성을 고려해서 동아시아적 지역 틀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과거의 유산이 문화적ㆍ인종적 유사성의 정도가 이 지역의 다양한 민족들로 하여금, 그들이 넓은 의미에서 공통된 지역적 정체성에 기반한 공통의 미래를 공유한다는 것을 납득시킬 만큼, 충분히 창조적이고 고무적인 전망을 제공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오늘날 우리는 긍정적인 지역적 정체성이 창조될 수 있다는 보편적 사고를 단지 참고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일 뿐이다. 지역주의는 만약 그것이 배타적인 민족주의라면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지역주의는, 그것이 만약 국수주의적인 과거의 유산에만 전적으로 의지한다면, 오히려 후퇴하는 요인이 되고 말 것이다. 지역적 정체성은 이미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이고 초국가적인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해 우호적ㆍ비우호적인 공통의 지역적 조건들의 공유를 통해 창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분명히 지역적ㆍ세계적 규모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새로운 지역적ㆍ세계적 틀이 몹시 필요하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 단일한 모델은 있지 않으며, 또 있을 수도 없다. 모델은 다양하고 모델의 다양성은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기회와 도전을 제공할 것이다. 우리는 아세안(ASEAN), 베트남, 캄보디아(인도차이나), 중국, 대만, 한반도 그리고 이 지역의 다른 영역들에서 파생되는 고무적인 발전상들을 목격하면서 기쁘게 생각한다. 이러한 모든 변화는 새로운 질서를 위한 지역적 틀의 몇몇 가능한 형태들을 나타낸다.
이러한 측면에서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에 종사하는 개인들과 조직들은 이 지역의 국민들 간의 상호이해를 낳을 수 있는 지속적인 협력 시스템과 네트워크를 설립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여기에 모인 이유다.
새로운 지역질서를 위한 이론 구성이나 이론의 실제적 적용에서 일본은 촉진제로 작용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전의 소련은 이제 초강대국이 아니며, 10개의 독립공화국으로 분열되었다. 그들은 민주주의, 평화, 비패권주의에 적합한 체제를 재구축 중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동북아시아의 안정, 평화와 발전에 어떠한 위협도 될 수 없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닫힌 사회인데도, 외부세계와 체제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중국 사회의 변화는 명백한 것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시아, 특히 동북아시아와 관련된 중국의 대외정책 또한 협조적이고 반패권주의적(또는 적어도 비패권주의적)이다.
이 지역의 다른 국가들도 지엽적인 규모에서 때때로 평화를 방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역적 패권의 추구자는 될 수 없다.
미국은 명백히 다른 범주다. 지리적 의미에서 과외 지역인 미국은 ‘세계경찰’임을 자임하며 지구의 어느 구석도 범(汎)미국주의 제국의 바깥에 놓아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소련이 붕괴된 지금, 미국은 국제적ㆍ지역적 삶의 유일한 조정자가 되기를 열망한다. 그것은 오랫동안 미국의 확고한 정책과 목표가 되어왔으며, 지난해(1991) 이라크와의 전쟁보다 이것을 보다 잘 설명해준 것은 없다.
소련 다음으로 중동의 작은 지역적 패권주의자가 굴복한 지금, 단일한 지배체제를 강화하려는 미국의 의도는 1994~2000년 회계연도의 방위계획 지침에서 마지막 남은 가면을 벗어 던졌다. 미국은 확실히 동아시아에서의 지역적 강대국으로 남아 있으며, 그것의 함의는 모든 관련 국가들에 잘 알려져 있다. 동북아지역의 국가와 민족의 일치된 노력은 아시아, 특히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주의적 역할과 경향을 감소시키기 위해 더욱 긴요한 것이 되고 있다.
이 지역이 초강대국들에 의해 지배되던 이전의 ‘냉전질서’와 구별되는 새로운 지역질서를 실현하고자 열망한다면, 미국의 영향력이 줄어들수록 그 가능성이 커진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시아지역의 국가들은 그들 지역 내의 새로운 위험요소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일본이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일본은 다른 아시아 민족들의 희생 위에서 줄곧 패권주의자로 자리해왔다. 일본에 대한 그들의 의심과 불신을 낳은 데에는 몇 가지 특별한 문제가 있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이 지역의 진보, 복지와 평화에 대한 일본의 기여는 부정적인 형태로 남을 것이다.
이전의 서독과는 뚜렷하게 대비되게, 일본의 지배 엘리트와 국민의 대부분은 결코 침략전쟁이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심각하게 책임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책임감의 회피를 조장하는 데에는 외부적 요인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일본은 반식민지 투쟁을 일으킨 식민지 민족들에게서 직접적으로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일본 제국은 그 스스로에게도 식민지 제국인 서방 강대국들(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게 자신의 식민지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이들 서방 강대국들, 특히 전후 일본에 대해 배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국은 소련을 포함한 제2차 세계대전 전승연합국 사이의 동의를 파기한 채, 즉시 일본을 이전의 적국이 아니라 냉전 동맹국으로 재생시켰다.
이러한 외부적 요인 외에 일본의 정신에 내재하는 더욱 근본적인 조건이 있다. 집단주의적인 일본의 정신과 정치적 문화에 따르면 전쟁과 식민지 착취에 대한 책임은 천황을 제외한 모든 일본인들에게 지워져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모든 일본인이 책임이 있다는 말은 실제로는 어떠한 일본인도 사실 책임이 없다는 의미다. 이러한 전쟁 책임에 대한 내부적 회피는 외부적 회피의 근원이다. 그것의 명백한 증거는 일본의 과거 성취를 찬미하는 것인데, 이것은 한국, 중국,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그리고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에서 일본에 의해 저질러진 국제적 범죄와 과오들의 중요성을 체계적으로 깎아내리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전후 젊은 세대들은 정치화된 민족주의에 민감하지 않으며, 보수 반동주의자들도 극적으로 진압되었지만, 그들 또한 일본의 전후 책임에 대해서는 똑같이 무관심하거나 잊어버린다.
여러분은 1985년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 40주기에 즈음해 독일 대통령 폰 바이츠재커(Von Veiszeckor)와 나까소네 일본 수상에 의해 발표된 정반대의 견해를 경험하고 받은 충격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할지 모른다. 독일 지도자가 모든 나치 잔악행위의 희생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독일 국민에게 독일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잘못을 잊지 말고 과거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자고 요청한 것에 반해, 일본의 지도자는 1985년을 관련 국가에 대한 일본 식민지와 전쟁의 정신적ㆍ물질적 빚의 ‘청산의 해’로 당당하게 선포했다.
일본은 지금 유엔 평화유지 활동이라는 이름하에, 그리고 다른 나라에 있는 일본인의 재산과 생명을 자위한다는 명분 아래 일본자위대의 해외 군사활동을 합법화했는데, 이는 일본 헌법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다.
이미 1990년에 460억 달러에 이르는 일본의 국방비 예산은 영국의 340억 달러, 서독의 350억 달러, 프랑스의 359억 달러를 훨씬 초과해 세계적 초강대국인 미국에 이어 두 번째가 되었다.
일본의 군사력은 이미 ‘방어적인 방어’(defensive defense)라는 자세로부터 훨씬 벗어났다. ‘강대국’(Big Power)의 위치로 부상하기 위한 주도면밀한 노력은 최근 유엔 안보리의 상임국에 대해 관심을 밝힌 일본 정부의 정책에 의해서도 보여졌다. 이러한 행동들은 일본의 “국제적 공동체에 대한 공헌”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어왔다. 또 이러한 정책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 특히 일본 식민주의와 침략전쟁의 주요한 희생국이었던 남ㆍ북한과 중국에 의해 표명된 반대나 주의에도 불구하고 채택되어왔다.
일본 정부의 주장에서 결정적인 점은 그들이 ‘국제적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에는 실제로 아시아 국가들이 제외된다는 점이다. 모든 지표로 판단하건대,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왜곡된 세계지도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국가적 공동체’가 부지불식간에 아시아 국가들과는 상관없이 미국이 주도하는 서구와 거의 동등하게 된 그런 지도다.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려는 노력의 성공 여부는 거의 숙명적으로 일본의 태도와 정책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의 국가들뿐 아니라 매스커뮤니케이션 미디어와 미디어 담당자와 같은 영향력 있는 대중교육 수단들은 그들의 모든 잠재력을 새로운 질서에 대한 건설적인 역할에 일본을 참여시키는 데 모아져야 할 것이다.
새로운 동아시아의 지역적 틀이 건설되어야 하는 첫 번째 차원은 한반도다. 한반도에 하나의 지역도 아니고, 동질성을 지닌 한민족이란 단일민족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말은 부적절한 것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국가적 통일에 대한 한민족의 강렬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적대적인 국가는 존재해왔다. 그리고 이들은 단순한 국가가 아니라 굴복하지 않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강력한 국가들’이다.
이것은 특히 두 개의 한국 사이의 관계에도 마찬가지인데, 이전의 두 개 독일의 경우와는 달리 이들 사이에는 우편, 상품, 사람 정보의 교환이 남한의 반공법과 국가보안법과 같은 지극히 가혹한 법 아래 국가에 의해 금지되어왔고,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다. 바꾸어 말하자면 국가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시민사회의 수준에서의 상호작용과 의사교환은 지난 반세기 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두 개의 독일의 경우에는 제한적이긴 하지만 교환과 상호작용이 국가와 사회 수준에서 여러 해 동안 진행되었다. 두 사회 사이의 상호작용은 마침내 국가와는 독립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두 국가 체제를 유지해왔던 제한된 상호작용을 압도하게 되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에 한반도에서는 각각이 다른 편을 소멸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오직 남ㆍ북한 사이의 군사적 관계만이 존재해왔다. 각각의 안보는 거의 전적으로 상대의 결정에 의존해왔으며, 각각은 ‘어리석은 국가’로 보일 만큼 소비적이고 비이성적인 정치 선전과 경제적ㆍ기술적 경쟁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또 각자의 발전 계획은 상대편의 발전 계획에 의존하게 되었다. 각 정권은 상대편에 의해 취해진 이데올로기적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각 정권의 정통성은 상대편의 대항적 정통성에 구속되고 종속되었다. 모든 가치는 부정적인 형태를 띠었다.
한국은 동질적인 민족, 즉 한(韓)민족의 나라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말의 미ㆍ소 대결의 산물로서 국가가 분단되기 이전까지 천 년 이상 단일국가로 지내왔다. 한국에서 40년간 지속된 일본식민지 지배(5년간의 보호국 상태를 포함하여)는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끝이 났다. 미국과 소련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 한국에서 정치적 기구를 재구축하기 위해 38도선에서 국토를 분단하는 데 합의했다. 그 결과 한반도에는 두 개의 전적으로 다르고 적대적인 정치적ㆍ경제적 질서가 출현해, 여태까지 지속되었다.
미국과 중국의 직접 개입을 초래한 두 질서 사이의 전쟁은 수백만의 한국인과 외국 참전군 사상자, 그리고 천만 이산가족과 국토의 황폐화라는 결과를 남겼다. 이 한국전쟁은 1953년 휴전(평화협정은 아직까지도 체결되지 않고 있다)으로 종결되었는데, 이러한 휴전은 양측으로 하여금 이전보다 서로를 더욱 적대적으로 만들었으며, 영속적인 분단을 남겼다. 남한과 북한 사이의 인위적 경계인 비무장지대는 40년 이상 봉쇄되어왔으며, 민간인들 사이의 어떠한 의사소통(편지, 전화,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방송, 여행)도 이 경계선을 지나가지 못한다.
비밀접촉으로 궁극적인 통일에 대한 선언을 조인하게 된 1972년 이후, 남한과 북한 사이에는 때때로 공식적인 대화가 전개되었다. 최근에는 국토의 분단과 관련된 다양한 이슈들에 관해 두 정부 간 직접적인 대화가 있었고, 주로 천만 이산가족과 관련된 남ㆍ북 적십자 간의 대화도 있었다. 이러한 대화에서 남한은 상품ㆍ무역ㆍ문화ㆍ인적 교류 형태의 신뢰 구축 수단에 대한 필요성을 주장해왔다. 반면에 북한은 미군의 철수, 특히 수백 개로 보고된 핵탄두를 남한에서 철수할 것을 포함해 즉각적인 정치적ㆍ군사적 이슈를 언급할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이렇게 상이한 접근과 계속된 깊은 불신은 실질적인 진전 없이, 계속적인 상호 비난 그리고 대화의 빈번한 중단을 야기시켰다.
남북 대화에서의 새로운 국면은 1990년 총리 차원으로 대화를 격상시키는 데 동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북한이 공식적인 정부대 정부 차원의 대화를 수용하는 것은 그들이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의 극적인 변화로 인한 심각한 정치적ㆍ경제적 압력을 경험하고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에 필요하게 되었다. 오랜 기간 북한의 동맹국이었던 이전의 소련은 남한의 동맹국인 미국과 일본의 편에 서서 북한과 교류하는 동시에, 남한과의 외교적 유대도 확고히 하고 있다. 중국도 남한과의 무역관계와 기술교류를 크게 확장시키고 있다.
동유럽의 정권들은 서방국들과 동맹을 맺자마자 곧 남한과의 전면적 수교도 확립했다. 그러므로 북한은 격변하는 세계질서에서 외교적 고립에 직면하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 북한은 소련과 중국 그리고 동유럽으로부터 석유와 몇몇 식량 그리고 다른 필수자원을 경화나 물물교환 협정을 통해 세계시장 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이것은 북한이 태환화폐를 벌어들일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었다. 지난해 초 소련은 석유, 군수품 그리고 다른 물품에 대해 경화로 그리고 세계시장 가격으로 지불해줄 것을 북한에 요구했다. 중국도 이와 같은 방향으로, 그러나 보다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북한과 남한이 통일이라는 민족 목표의 평화적 수단에 의한 달성에 합의했는데도, 어느 편도 완전한 통일국가에 대한 다른 쪽의 정치적ㆍ경제적 체제의 건설방안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현재의 남ㆍ북 협상 수준에서 북한은 현재의 사회적ㆍ정치적ㆍ경제적 체제 유지에 대한 남한의 보증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 남한의 1인당 수입(6,000달러)은 북한의 1인당 수입(대략 1,300~1,500달러)의 거의 네다섯 배에 달한다. 남한의 전체 국제교역량은 최소한 북한의 20배에 이른다. 경제적ㆍ사회적ㆍ정치적 영역뿐만 아니라 인권과 같은 영역에서도 정부의 간섭이 많은데도, 남한은 개방된 사회, 의회민주주의, 시장경제의 방식으로 운영된다. 반면에 북한은 여전히 모든 것에서 매우 빨리 사라져가고 있는 체제에 의해 완고하게 운영되고 있다.
북한에 대한 남한의 점증하는 자신감은 한반도에서의 새로운 질서를 위한 청사진에서도 반영되어 있다. 독일식의 민족통일, 다시 말해 남한이 북한을 흡수하는 방식이 머지않은 미래에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한은 너무 빠르고 갑작스럽게 통일한 독일의 교훈을 최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만일 그러한 일이 한반도에서 일어난다면 남한 정부만으로는 미리 예측될 수 있는 결과를 통제하기 힘들 것이다. 남한 정부가 북한을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 넣던 이전의 대결 정책을 새로운 정책으로 수정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남한 정부의 정책은 상대편과의 협조와 협력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원조이지만, 이것은 몇몇 북한 정책 입법자들이 2000년 이전까지 자립력을 갖춘 나라로 만들려고 하는 북한을 그 이전에 점진적으로 해체하려는 의도를 갖고 계획된 것이다.
남ㆍ북한 사이가 이처럼 불균형적인 상황으로 접어들면서, 지난 해부터 핵문제가 제기되었다. 1992년 봄에는 미국과 북한의 군사적 위기가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폭발할 것 같았다. 그 이전부터 북한의 핵시설에 대해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취하겠다는 미국의 계속된 위협이 있었는데, 이 핵시설의 ‘기폭제’(explosive) 취득능력은 1년에서 10년에 걸치는 것으로 다양한 미국 군사전문가들에 의해 추정되었다.
한국은 1970년에 핵무기 생산계획에 착수했으나, 한국이 미국의 핵계획에 참가하는 조건으로 미국에 의해 중지되었다. 만약 북한이 핵무기 생산능력을 추구한다면, 미국과 일본이 가만히 방관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들도 (매우 복잡한 핵에너지 계획에 기초한) 이에 대처하기 위한 독자적인 핵무기 계획을 세우거나, 남한 국방장관이 이미 경고한 것처럼, 북한의 핵시설을 공격할 것이다. 또한 북한이 걸프전에서 이라크가 당한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노골적인 위협도 있었다. 몇 주 전에 미국 군부는 ‘1개월 전쟁’이라는 평가서를 내놓기도 했다!

●[표 1] 남ㆍ북의 군사비 지출


표면적으로는 이 부분에서도 많은 진전이 있었다. 북한은 남한으로부터의 미국 핵무기 철수를 오랫동안 요구해왔고, 서울에서 지난(1991) 12월에 이 철수가 완료되었다고 발표했을 때, 평양은 이 소식을 환영했으며 국제원자력기구(IAEA)로 하여금 북한의 핵시설을 사찰할 수 있게 하는 ‘핵안전협정’에 서명했다(북한은 1985년에 핵확산금지조약에도 서명했다). 예정대로 올해(1992) 6월에 북한에서 IAEA의 사찰이 실시된다면, 아마 남–북한, 일본–북한, 미국–북한 관계의 완화도 낙관적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좀 덜 명백한 많은 이슈들이 아직까지 한국에서의 진정한 평화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으며, 기껏해야 조심스러운 낙관주의이고, 최악에는 더욱 심각한 대결국면의 가능성마저도 경고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을 번갈아가면서 갈등의 폭을 증폭시킨 핵문제와 공산주의의 몰락에 따른 북한의 취약성 등이 그것들이다.
한반도는 몇 세기 동안 이웃 강대국에 의한 침략전쟁의 장소가 되어왔는데, 최근에는 1950년 6월에서 53년까지 계속되어 수백만의 사상자와 막대한 재산 손실을 남긴 한국전쟁이 있었다. 한반도는 세기의 전환점에서 일본의 승리로 끝난 현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4각 갈등의 와중에서 한 세기 동안 ‘태풍의 눈’이었다. 이 승리는 일본 군국주의에게 중국 본토의 광대한 부분을 포함해 전체 아시아를 정복하는 모험의 도약대를 제공했다. 이러한 도식은 한반도에서 패권을 행사하려 한 중국과 영국, 미국, 러시아, 또는 구독일 제국에까지 동등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는 과거 그곳이 동북아시아와 서남아시아의 수억 민족에게 전쟁과 불행의 출발점이었다는 점에서 미래엔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그곳에 살아야만 하는 한민족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지역의 민족들과 국가들의 평화ㆍ협력ㆍ진보 그리고 행복을 위한 시험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국의 문제가 동북아시아 전체의 문제이고, 동북아시아에서의 새로운 지역질서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어떠한 시도도, 한반도에서 그리고 한반도에 대한 문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이 글은 서울대학교 신문연구소문화방송 공동 주최, “동북아 방송질서 변화와 대책국제 학술심포지엄(1992.4.7~4.9, 서울 신라호텔)에서 한국 측 기조강연의 하나로 발표했던 “A Contribution toward the Formation of New International Order in NorthEast Asia”라는 제목하에 영문으로 작성한 논문의 한국어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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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북방한계선’은 합법적 군사분계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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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남·북한 전쟁능력 비교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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