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한반도의 비핵화·군축 그리고 통일」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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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1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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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한반도의 비핵화·군축 그리고 통일」(1993년 9월, 새는)


 


 


남북문제는 복안(複眼)적 시각으로 봐야

반 세기에 걸쳤던 비이성적인 냉전사상과 광적인 남한식 반공주의에 순치된 한국인의 의식형태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 ‘단안’(單眼)적 사물판단이다. 국제사회의 제반문제를 오로지 반공주의라는 하나의 시각으로 관찰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개개의 사물, 현상, 관계를 평면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그리고 비(非)원근법적인 단면적 시각으로 관찰하고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최소한의 균형 잡힌 관찰과 이해를 위해서도 두 눈(兩眼)의 원근법적 기능으로서의 각도와 거리의 파악이 필요하다. 하물며 많은 나라의 많은 이해관계가 얽힌, 다시 말해서 복합적 요소로 구성되고 변화하는 국제적 문제는 ‘양안’적 기능만으로도 부족하다. 문제를 구성하는 많은 요소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요인들을 다면적으로, 균형 있게, 그리고 자기의 이익만을 관찰의 중심에 설정하지 않고 종합적으로, 총체적으로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안’(複眼)적 인식능력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민주사회의 ‘지식인’에게는 국제적 생활에서 직면하는 제반 판단작용에서 ‘나’의 입장과 함께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사물을 관찰하는 ‘양안’적 능력은 ‘최저한’의 기본 자격조건이다. 하지만 21세기를 향하는 민주사회의 ‘지성인’들에게는 그 수준의 관찰능력에 그치지 않고 ‘복안’적 인식능력이 최소한의요건이 된다.
남한의 지식인들에게 이 같은 인식능력의 결핍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이 남북문제이며, 그중에서도 핵문제를 둘러싼 왈가왈부다. 지난 얼마 동안 우리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북한 핵’과 이를 둘러싼 제반 문제는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것이 북한 문제인 만큼 남한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 남한의 문제인 만큼 미국의문제이고 세계 각국의 문제다. 소위 ‘북한 핵’의 원인과 책임을 말하라면 북한ㆍ남한ㆍ미국이 각기 3분의 1씩의 원인과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에 덧붙여서 유엔기구와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그 ‘원인ㆍ결과ㆍ책임’의 구도 속에 연관되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왜 핵무기를 개발했는가

이 같은 복합적이고 다각적인 구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문제의 배경을 이루는 역사적 고찰에서 출발해야 한다. 현재 ‘북한핵문제’라고 불리는 문제의 원근법적 구도에서 ‘원점’(遠點)을 이루는 새로운 상황변화는 이른바 ‘닉슨 독트린’이다.
1973년 미국은 13년간에 걸친 인도차이나반도(베트남)전쟁에서 사실상 패전하여 철수했다. 그에 앞서 1970년,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전쟁을 베트남인에게 떠맡기는 이른바 ‘베트남전쟁의 베트남인화’결정을 선언했다. 이것은 그 후 ‘닉슨 독트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아시아 대륙의 미국 동맹국가들은 앞으로 군사적 분쟁이 발생할 경우 한국전쟁이나 베트남전쟁처럼 미국 군대의 직접 참전을 기대할 수 없으며, 미국은 다만 후방에서의 지원과 간접적 역할에 머물 것이라는 일대 정책ㆍ전략적 전환이다. 직접적 군사적 책임은 동맹국 당사국에게 떠맡겨진 것이다.
이 전략은 아시아 대륙의 전쟁에서 미국 젊은이들의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하겠다는 미국 국민의 강렬한 요구와 염원에 바탕한 결정이었다. ‘닉슨 독트린’은 베트남 사태의 재판을 우려하던 남한에게도 적용되었다. 닉슨 정부는 1971년 한국 주둔 미국 지상군 보병 제7사단을 철수했다. 북한과의 모든 군사적 상황에 대비한 책임은 한국(정부)에 떠넘겨진 것이다. 한국(국민ㆍ정부)은 이제 독자적 생존수단을 강구해야 할 정세변화에 직면했다. 미국에 의존하거나 기대를 걸 수 없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우리의 복안적 원근법의 시각에 두 번째 역사적 변화가 등장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정책이다. 당시 군사력에서 우월한 북한의 군사적 통일노선을 전환시키기 위해 박 대통령은 북한의 통일 슬로건인 “자주적ㆍ평화적ㆍ이념초월ㆍ외세간섭 배제ㆍ민족 대단결” 원칙을 수락했다. 1972년 7월 4일의 평화통일을 위한 ‘7ㆍ4 남북공동성명’이 그것이다. 바로 ‘닉슨 독트린’에 자극받아 다급한 나머지 취한 임기응변적 자위책이었다.
이 성명의 동기와 목적에서 분명하듯이 그 성명의 정신은 그 후 오래 지켜질 까닭이 없었다. 박정희 정권은 북한을 이 성명으로 제어해놓고 제3의 결정을 내렸다. 영구 분단체제의 강화와 종신 독재체제의 확립을 위한 ‘유신체제’(유신헌법) 선포다. 이어서 중공업화정책이 뒤따른다.
군사력증강(군사), 영구분단(남북관계), 종신통치(정치), 무기생산과 공업화(경제)의 네 분야에서 북한에 대한 대결체제를 굳히기 시작했다.
군사력증강(자주국방)의 핵심은 독자적 핵무기 생산계획이었다. 한국 정부는 1972년부터 프랑스에서 우라늄 재처리시설을 구입하는 교섭을 벌였다. 그리고 해외에 거주하는 남한의 핵물리학자들을 그 당시 국내 교수 월급의 10배에 가까운 보수를 주고 불러들이려 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1975년 이 구매계약이 조인단계에 들어가자 미국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압력을 가해 계약을 파기시켰다. 한국 정부는 그후 캐나다와 같은 계약을 추진했다. 이에 대해서도 미국은 캐나다와 박 정권에 압력을 넣어 백지화시켰다.
키신저 미국무장관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만약 핵무기 생산 계획을 고집하면 미국은 한국에 대한 모든 안전보장을 백지화하겠다”고 통고한 것이다.
그 후에도 박 대통령은 독자적 핵무기 생산 구상을 버리지 않았다. 결국 카터 대통령의 미국 정부와 다시 이 문제로 충돌했다. 박대통령은 1978년 “만약 미국이 남한 배치 핵무기를 철거하거나 핵보호를 주저한다면, 한국은 ‘핵확산금지조약’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에 동의한 조약의무를 거부하겠다”는 뜻을 비쳤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84년(전두환 정권)에 다시 캐나다로부터 플루토늄과 우라늄의 혼합연료 제조를 위한 재처리시설을 들여오려 했다. 캐나다ㆍ한국 공동연구 계획은 1982년에 시작하여 84년 초에는 제2단계에 들어간 상태였다. 이것 역시 미국의 압력으로 중지되었다.
이 같은 ‘핵무기 생산’ 그 자체에 대한 미국의 반대 때문에 우리나라의 구체적ㆍ독자적 핵무장은 중단된 상태다. 그러나 한국의 핵 잠재력은 독자적인 원자력 계획을 오랜 기간 추진한 결과, 그렇게 하기로 결정만 내리면 9개월 이내에 핵무기를 긴급 생산할 수 있는 경제ㆍ기술적 수준을 갖추고 있고, 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이것은 6개월로 평가되는 일본보다 크게 뒤지지 않는 잠재력이다(Peter Hayes,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Nuclear Issue, 1992).
한국 정부는 미국의 압력으로 1975년에 마침내 ‘핵확산금지조약’과 ‘국제 핵사찰에 관한 조약’에 조인했지만, 그 조인 이전이나 이후나 끊임없이 핵무기 생산 계획을 추진했고, 자발적으로 포기한 일이 없다.
현재 한국의 핵무기 잠재력은 인도, 파키스탄 등에 버금간다. 다만 구체적 핵폭발장치의 제조에 착수하지 않은 상태일 뿐이다. 북한에서 보면 핵잠재력에서 남한은 이 단계에서 이미 훨씬 앞서 있고 위협적이었다. 최근까지 남한에 배치돼 있던 미국 핵무기의 위력을 고려에서 제외해도 말이다.
이와 같은 상황의 제반 사실을 배경으로 북한의 ‘핵문제’를 보자. 이 고찰을 위해서는, 한 세트의 평가준거(評價準據)를 설정하는 것이 편리하다. 즉 남한(대통령)이 독자적 핵무기 제조 계획을 끈질기게 추진한 원인과 이유가 무엇인가?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미국의 핵무기 사용(보호)을 기대할 수 없다.
② 남한의 재래식 군사력(전쟁 능력)이 북한보다 열세다.
③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보다 열등하다.
④ 정치ㆍ사회적 정권안정기반이 취약하다.
⑤ 국제적 고립상태와(1970년대) 안보상의 위기감.
⑥ 북한의 흡수적 군사적 통일노선(불신감).
이 준거군을 오늘의 북한에 적용해서 평가해보자.

북한이 핵을 개발하는 이유

① 북한에는 구소련이나 현 러시아의, 그리고 중국의 핵무기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구소련의 붕괴 후인 1991년 9월 러시아는 북한과 1960년에 체결한 군사동맹조약에서 군사적 의무를 해제할 것을 북한에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북한은 러시아의 핵무기에 의한 안보는 물론 재래식 군사력에 의한 지원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남한에 대한 미국의 닉슨 독트린보다도 훨씬 가혹한 상태가 된 것이다.
② 미국 정부와 군이 남한에 미국의 “핵무기가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을 당시(1986 현재), 유력한 정보에 따르면 군산(群山) 공군기지에 핵폭탄 70발, 휴전선에 매설할 핵지뢰 21발이 있고, 그것들을 북한에 투하 또는 발사할 전폭기와미사일이 24시간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최근까지 남한에는 북한을 위협하는 미국의 핵무기가 있었고, 세계 최강의 주한미군이 아직도 남한에 존재하지만 북한에는 한국전쟁 중 들어와 있던 중국군이 전쟁이 끝난 5년 뒤인 1958년 10월 1일을 기준해서 완전히 철수했다. 전쟁 후에 남한이 서방세계에서 받은 유상ㆍ무상의 군사적ㆍ경제적 지원에 비해 북한은 그 동맹국들로부터 남한에 비해 훨씬 적은 군사적ㆍ경제적 원조밖에 못 받았다는 사실이 현재 북한의 위기감을 조성시킨 배경이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전쟁 중에 미국 공군의 폭격으로 완전히 황폐화됐던 북한에서 이러한 조건하에서도 전쟁이 끝난 6년 뒤에는 남한보다 높은 경제력을 재건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북한인민들이 그들의 지도자들과 합심하여 오로지인간의 육체적 노동으로 그들의 땅을 복구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동안 정부에서, 혹은 반공기관에서는 북한이 우리보다 월등히 많은 군사적 투자를 한다고 하여 국민들에게 위기감을 조성해왔다. 그렇게 해서 군사정권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을 국민들에게 강요해온 것이 사실이다. 군사정권을 유지하는 방패로 써먹어온 “북한의 군사적 우위”는 사실 그렇지 않음이 1988년 나의 논문「남북한 전쟁능력 비교연구」에 의해 밝혀졌다. 내 논문의 결론은 물량적으로는 남한의 전쟁능력이 북한보다 동일하거나 우월하고, 질적으로는 ‘월등히’ 우월하여, 총체적으로는 남한의 ‘전쟁능력’이 북한을 앞지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 북한의 ‘군사적 우위론’은 타당성이 없으므로 이를 볼모로 국민을 우롱하는 행위는 진정한 남북한 관계의 정상화 노력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이 논문 때문에 국방부에서는 논문이 발표된 지 3개월 만에 부랴부랴 처음으로『국방백서』라는 것을 펴내게 되었다. 군과 남ㆍ북군사관계의 현실을 국민에게 보고하는 정부의 공식 문서다.
전쟁 직후에 남한보다 10배 이상의 파괴를 당하면서도 남한을 앞지르는 경제성장을 이룩했던 북한이 그 당시에는 남한보다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1975년을 고비로 하여 이 상황은 역전된다. 65년 한일회담 이후 실질적으로 군사동맹적인 경제, 군사적 지원, 베트남전쟁 파병의 대가로 받은 외화, 중동 건설 붐, 그 결과인 국내 공업화 및 경제력 강화…… 등등으로 인하여 경제적ㆍ군사적 능력이 북한을 앞서게 된다.
지금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소위 ‘율곡계획’을 보더라도 1975년부터 군사비 증대가 시작됐다. 예로, 국방비가 공개된 것만도 1992년 107억 달러인데, 지난 수 년 동안 매년 평균 40억 달러 정도가 무기 구입비로 투입되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국방비의 약 3분의 1정도인 40억 달러의 현대무기 구입비만도 북한의 연간 총군사비보다 훨씬 크다.
정부의 주장대로 남한이 GNP의 6퍼센트, 북한이 GNP의 25퍼센트를 군사비로 투입한다고 가정해도 우리 정부가 자랑하는 경제성장에 기인한 GNP가 북한의 10배니까 남한의 군사비가 북한에 비해 60 대 25, 즉 2배 이상 월등한 것이다. 실지로 1992년도에 우리 국방비는 107억 달러였다. 전 세계의 중립적인 조사기관의 자료에 따르면 북한의 군사비는 35억~40억 달러라고 한다.
작년에 북한에서 발표한 국가예산을 역산하면, 그들은 군사비가 21억 달러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을 무시하여 2배로 잡아서 40억 달러라 하더라도 100억 달러가 넘는 남한 군사비의 2.5분의 1인 셈이다. 심지어 미국의 극우ㆍ반북한적 연구기관인 헤리티지재단(Heritage Foundation)조차 남ㆍ북한 1992년도 군사비를 100억 달러 대 22억 달러로 평가하고 있다. 구체적 전투력의 비교로서 주한미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인 리스카시 대장은 남한 공군 전투기 조종사의 연간 체공 훈련시간이 120~150시간(『국방백서』)인데 비하여 북한 공군 MIG-29 전투기 조종사의 체공 훈련시간이 연간 4시간에 불과하다고 밝힌 바 있다(120시간 대 4시간이다. 1991.6.6, 서울발『뉴욕 타임스』).



발언 인용의 신빙성을 위해서 서울 발신『뉴욕 타임스』기사의 그 구절을 원문대로 전재한다.
“North Korea’s economic troubles are believed to be creating serious problems. A U. S. official(in Seoul) said the pilots for North Korea’s Soviet built MIG-29 fighters, the most modern in Pyongyang’s inventory, are permitted to train in the air only four hours per year.” “Their fuel situation is very, very low.” said (Gen. Robert W.) RisCassi.




③ 국가의 총체적 경제력을 표시하는 1992년 GNP 비교에서 남ㆍ북한은 2,900억 달러 대 210억 달러로 평가되고 있다(한국은행, 『동아일보』, 1993.6.8). 러시아 정부기관의 평가도 대체로 비슷하다. 사회주의 경제와 자본주의 경제의 평가기준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그에 대한 수정을 하더라도 대개의 연구 결과는 남ㆍ북한경제력을 10 대 1로 보고 있다. 북한은 이제 경제면에서 남한의상대가 아니다(60년대와 70년대 중반까지, 남한 경제가 북한 경제의 몇 분의 1밖에 되지 못했던 우열관계의 완전한 역전이다).
④ 정치ㆍ사회적 안정에서 북한은 내외 조건의 지속적인 악화로 불안정 요소가 증대하고 있다. 군사독재화 남한의 만성적인 정치ㆍ사회적 불안상태가 80년대 말기부터 안정화되고 문민정부로서 확고한 기반에 올라선 것과는 대조적으로 북한의 경제ㆍ사회적 상황은 대체로 ‘위험수위’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⑤ 국제사회에서의 국가적 위상도 역전됐다. 60~70년대 북한은 국제적 우세를 지켰으나 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고립화되고 있다. 구소련의 국가적 해체와 사회주의 세계의 붕괴, 러시아와 중국의 자본주의화 및 국가이기주의…… 등으로 인해서 북한의 후원세력은 거의 소멸했다. 중국ㆍ러시아ㆍ구동구국가들은 남한과의 우호관계와 국교정상화로, 북한과는 차라리 비우호국으로 바뀌었다.
⑥ 위에서 확인된 제반 정세의 역전으로 말미암아 북한의 통일정책은 과거 남한이 그러했던 것처럼 수동적ㆍ소극적ㆍ지연적ㆍ평화적ㆍ비군사적ㆍ자체보위 우선적으로 바뀌었다. 적극적 통일보다는 북한체제와 국가의 보존이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60~70년대와는 반대로 남한이 동ㆍ서 독일 통합형식인 국력의 우열에 기초한 ‘흡수통합’을 사실상의 정책기조로 추진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준거군(準據群)의 전면적 역전으로 북한은 국가존립 그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몰린 북한의 당ㆍ정부ㆍ군 지도자와 지도집단이 택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같은 상황에서 남한의 박정희 대통령과 반공집단ㆍ군부ㆍ정부의 수뇌들이 60년대, 70년대에 선택했던 바로 그 길이다. 즉 ‘핵무기의 독자적 개발’이다.
이 국면에서 우리는 단안적 인식에서 벗어나 양안적 인식의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북한의 현실과 입장에서 정세변화와 자기보존의 논리를 평가해야 한다. 만약 같은 상황과 조건인 60~70년대에 남한의 ‘독자적 핵무기’ 지향이 남한 국민(우리)에게 정당한 것이었다면, 같은 논리로서 북한의 현재의 독자적 ‘핵전력화’ 구상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다른 길이 없는데서야 어찌할 것인가?
그리고 북한은 어째서 세계의 지탄을 받으면서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려 했는가? 한국의 신문들은 북한이 주장하는 그 법적근거인 ‘특수한 지위’를 글로 쓰기는 하면서도 알지는 못하고 있다.
핵금조약은 그 제10조에서 “이 조약과 관련하여 자국의 지고(至高)한 이익에 위협이 된다고 인정되는 이상사태가 발생했을 때는 국가주권의 행사로서 이 조약에서 탈퇴할 권리를 갖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이 북한이 조약탈퇴의 근거로 삼는 ‘특수 지위’의 논리다.
북한이 미국과 원자력기구에 대해서 요구하는 것은 미국의 분명한 군사적 위협으로 형성된 이 ‘특수한 지위’의 상태를 해소하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극우적 인사들은 물론, 상당한 양식과 보편적 국제교양이 있는 사람들 중에 “박 대통령이 미국의 반대를 뿌리치고 독자적 핵군사력을 건설했어야 했다”고 아쉬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같은 조건인데 북한에게는 그 논리가 ‘범죄’로 규정된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2중 기준’의 결과다. 물론이 논리는 북한의 핵무장을 정당화하거나 지지하는 뜻이 아니다. 진정한 정신은 그와는 정반대다.
한반도의 핵문제는 두 개의 눈으로도 정확하게 그리고 공정ㆍ공평하게 가누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다. 눈을 세 개로 해서 복안적인 원근법 속에 미국의 정책과 전략을 넣고 보자(일본을 포함할 필요도 있다).

북한 핵을 강요하는 미국의 군사정책

첫째, 미국과 일본은 중국과 소련(러시아)의 남한과의 우호관계ㆍ국교수립에 대응하는 북한과의 호혜적 조치를 거부해왔다(북한 핵과 미ㆍ일의 양해사항 불이행의 원인ㆍ결과 관계는 달걀과 닭의 선후관계와 같다).
둘째, 미국의 막강한 핵무기가 남한에서 철수된(주장된) 것은 겨우 1년 전의 일이다. 그때까지 북한에는 소련군도 중국군도 주둔해 있지 않았고 군사기지도 없었으며, 두 강대국의 핵무기는 더군다나 없었다. 북한은 일방적인 미국의 핵공격 위협하에서 생존을 강구해야 했다.
셋째, 한ㆍ미 3군 합동 ‘팀스피리트’ 훈련은 1991년의 경우, 그 규모가 27만 명이 참가한 세계 최대였다. ‘민족주체성’을 강조하는 북한은 소련이나 중국과의 이런 유형과 크기의 합동군사훈련을 거부해왔다.
단일 기동훈련에 세계 최대급 핵항공모함 두 척이 중심이 된 ‘팀스피리트’는 북한의 관점에서는 분명한 대북한 핵공격 전쟁연습으로 비쳤다. 그리고 그때마다 ‘준전시체제’로 대응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가령 소련의(또는 중국의) 최강 핵군사력과 북한군이 합동한 27만 명의 ‘소련-북한판 팀스피리트’ 훈련 상륙작전이 휴전선 바로 북쪽 해주(海州)에서 또는 고성(高城)에서 해마다 전개된다면 남한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군사력에서 ‘공격’용이냐 ‘방위’용이냐의 언쟁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리고 다분히 자의적 주장이고 흔히는 속임수다. 방어용만으로 제조된 탱크나 대포는 없다.
넷째, 남한의 핵 능력이 북한보다 월등하다는 사실 그리고 미국은 핵에너지 기술과 시설에 관한 한 남한에 대해서 거의 강제적으로 판매ㆍ지원하고 있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현재 9기의 원자력발전소가 가동 중이며, 총출력은 시간당 730만 킬로와트다. 한국은 이미 핵연료 순환체계의 설계, 제작, 운전율이 평균 75퍼센트 선에 도달한 상태다. 앞서 인용한 한국의 핵관계 전문가인 피터 헤이스(Peter Hayes)에 의하면, 남한은 핵무기의 직접원료가 되는 플루토늄 239를 현재 약 10톤 정도 비축했고, 2000년까지(원자력발전소 제10호기, 제11호기가 완공됨)는 약24톤이 될 것이라고 한다(〈그림 1〉과〈그림 2〉참조).

● [그림 1] 한국의 연간 플루토늄 239 생산량(1978~2000)


● [그림 2] 한국의 플루토늄 누적량(1978~2000)


이에 대해서 북한은 2000년까지 연구소 등을 전부 합쳐서 출력 300킬로와트라고 볼 때, 연간 플루토늄 생산이 약 70킬로그램으로 평가된다. 이것은 남한의 20분의 1이다.
다섯째, 북한의 정치ㆍ군사 지도자와 지도자 집단을 ‘예측불허의 광인(적 집단)’으로 단정ㆍ경멸하는 미국 군부와 한국인의 일반적 인식착오를 고려해야 한다. 1991년 이라크와의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정보ㆍ선전기관과 언론은 후세인 대통령을 “유아 식인종”으로 묘사하고 멸시ㆍ매도했다. 이어 대이라크전의승리에 도취한 미국 군부는 체니 국방장관의 1991년 보고서에서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당ㆍ정부ㆍ군 지도자들을 그렇게 묘사했다.
북한의 지도집단이 과연 남한 사람들이나 미국의 우익이 단정하는 것처럼 예측불허에 음흉하고, 충동적이며 타락한 비인간들일까? 그리고 미국과 남한의 지도집단, 특히 군과 준군부 지도집단은 북한보다 이성적이고 만사에 예측 가능하며, 개방적이고 신중하며, 평화애호적이고 인간에게 투철한 민족자주적인 성향인가? 이 물음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다.
앞뒤의 두 물음에 대해서 서슴없이 “그렇다”고 대답하기에는 미국과 한국의 그들이 여태까지 걸어온 행동궤적이 너무나 부정적이다. 그 증거를 열거하기에는 분량이 너무나 많다. 결국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는”격이 되고 말까 두려워진다. 베트남과 라틴아메리카에서 그리고 이라크와 아랍세계에서 미국의 대통령, 우익과 군 및 준군부의 도덕성 평가는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남한의 경우도 목하 문민정부하에서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드러난 일이지만!
위에서 복안적 시각으로 살펴본 결론은 미국과 남한에 대한 북한의 불안감 또는 차라리 ‘공포감’은 진실이거나 적어도 진실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1991년 미국 군부의 의지표명인 ‘국방성 91년 전략계획’(91, Joint Military Net Assessment)과 1993년 9월 1일에 발표된 1994~99년 종합적 군사계획(Force Structure Excerpts, Bottom-Up Review, 레스 애스핀 국방장관) 사이에는 한반도에 관해 중요한 차이가 한 가지 뚜렷하게 발견된다.
1991년의 이른바「대북한 120일 전쟁 시나리오」에서 북한은 이라크(후세인), 리비아(카다피), 쿠바(카스트로)와 함께 미국 군부가 ‘앞으로 처치해야 할’ 4개국(정권ㆍ지도자) 중의 하나로 거론됐다. 물론 김일성을 후세인으로 묘사하여 공격대상의 초점을 선명하게 돋보이기는 했지만 북한은 4개의 공격목표 중 하나였다.
그런데 바로 며칠 전 9월 1일에 발표한 앞으로 수년간의 미국 군사계획의 활동목표는 이라크와 북한만을 유달리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것이 미국 군부의 어떤 의지의 표시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진정한 인도주의는 군비경쟁의 중단

복안적 시각에서 보면 지난 수년간 미국과 남한이 북한에 대해서 강행한 소위 ‘북한 핵’정책은, 과거 80년대에 레이건 미국 정부가 경제ㆍ군사ㆍ정치ㆍ사회적으로 미국보다 열세인 소련에 대해 강행한 전략을 회상케 한다.
레이건의 미국은 군비경쟁의 공간적 무제한(‘우주전쟁’구상), 시간적 무제한(소련이 항복할 때까지), 금전적 무제한(군비예산의 사상최고 수준의 지속), 정치적 무제한(소련 및 사회주의 ‘악의제국’을 전 세계적으로 포위ㆍ타격 강화) 정책으로 그 목표를 달성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남ㆍ북 간의 진정한 평화ㆍ협력 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남한은 북한의 생존에 대한 위협적 요소들을 스스로 줄여나가야 할 것이다.
북한에서는 1991년 11월의 당 제6차 중앙위원회에서 온건 국제주의파가 강경 비타협파에 승리했다. 그 후 92년 2월 이래로 남ㆍ북한 간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합의사항이 조인되었다.
그런데도 북한 측이 가장 두려워하는 미국과 남한의 군사적 위협은, 그들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바로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1993년 9월 5일 현재 국회에서 진행 중인, 군비증강을 위한 이른바 ‘율곡사업’에 대한 국정감사에 따르면, 1990~99년의 10년 동안 군은 평균 매년 40~45억 달러의 거액을 신규 무기구입비로 투입하기로 되어 있다.
이 금액은 북한의 연간 총군사비보다도 훨씬 많다. 많은 중립적 외국 연구기관들의 북한 군사비 평가는 30억 달러(헤리티지 재단 연구소 평가는 22억 달러)다.
그러고 보면, 한국은 북한의 총군사비에 대해 매년 약 3배 내지 4배를 투입하고 있고, 그중 신규 무기구입비만도 북한의 총군사비의 거의 2배에 달한다. 이렇게 압도적으로 강력한 군비경쟁을 계속할 결심이면서 ‘이산가족 재회’니 ‘우편물 교환’ ‘휴전선 면회장소 설치’ ‘예술ㆍ문화행사 교환’ 등 소위 ‘인도적’ 행사가 얼마나큰 의미가 있을까?

● [표 1] ‘율곡’(군비증강)계획 예산


북한이 그들 전력의 핵심무기인 MIG-29 전투기의 조종사 체공훈련을 연간 4시간밖에 하지 못하는 형편일 때, 이상과 같은 우리 측의 거의 ‘무제한적’, 레이건식 군비증강 경쟁은 그밖의 다른 분야의 모든 화해노력을 상쇄할까 두렵다. 남한 측의 ‘인도적’ 교류나 ‘평화적’ 경제협력 제안들이 실제로는 평화적 ‘공영관계’의 추구가 아니라 북한의 국가적 파탄과 그 ‘붕괴통합’전략의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보여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북한은 그렇게 보는 것이다.
이산가족이 만나서, 얼싸안고 재회의 기쁨에 눈물 흘리는 것은 확실히 ‘인도주의’적이다. 두 예술단이 한 무대 위에서 “나의 소원은 통일……”을 소리 높이 합창하는 것은 틀림없이 ‘평화적’이다. 식량이 부족하다는 북한에 양곡을 몇천 톤 보내주는 것은 더욱 인도주의적이다.
하지만 경제력이 10배, 연간 군사비가 3~5배인 남한의 물질적ㆍ군사적 우월에 대항하기 위해 생살 같은 군사비를 뜯어내야할 북한 인민의 아픔을 생각한다면 진정한 ‘인도주의’는 군비경쟁을 중지하는 결단이 아닐까? 경제력(GNP)이 10 대 1일 경우, 남한이 GNP의 1퍼센트만을 군사비에 추가해도 북한은 그들의 총생산액의 자그마치 10퍼센트를 군사비에 추가 투입해야 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민족적 낭비인가? 남ㆍ북 간 전쟁의 조건이 거의 사라진 현실에서 이 같은 무제한의 낭비는 거의 ‘범죄적’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단안적 시각의 남ㆍ북관계 구조는 이 같은 결과에 이르렀다. 적어도 남ㆍ북한이 각기 자신을 객관화해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서로 상대방의 입지에서 문제를 평가하는 인식적 능력과 민족적 아량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양안적 문제의식이다. 그리고 미국, 일본, 국제원자력기구, 유엔 등이 관련된 북한의 핵문제라면 양안적 원근법조차 역부족이다. 복안적 시각이 요구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북한의 경제ㆍ사회적 파탄과 국가적 붕괴를 목적으로 하는 통일전략이 아니라면, 남ㆍ북 간 신뢰구축의 진정한 출발은 군비감축이라고 믿어진다. 북한의 핵무기 제조는 반드시 차단되어야 한다. 진정한 민족적 화해와 관계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북한 사회의 몇 가지 왜곡된 제도와 현상도 점차 바로잡혀야 한다. 이 필요성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북한의 변화를 무제한적인 ‘율곡사업’의 군비증강ㆍ경쟁정책이나 지난날의 군부독재식의 군사적 발상으로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대담한 발상과 현명한 정책전환 그리고 문민정부다운 정치적 지도력이 간절히 기다려지는 때다.

•19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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