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관기] 유영수·김영희 부부 토크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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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5-07-01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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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관기] 유영수·김영희 부부 토크쇼


리영희재단 사무국


초여름날의 스케치


재일교포 3세로 모국에 유학왔다가 ‘간첩’ 혐의로 복역한 유영수, 거문도 섬마을 소녀였다가 졸지에 ‘좌익 사범’이 된 김영희. 광주교도서에서 그저 그런 조우와 출소 이후 운명 같은 사랑으로 부부의 연을 맺은 두 분.


이 분들과의 토크쇼가 6월 27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서울 연희동 ‘하노이의 아침’ 3층에서 열렸다. 김효순 리영희재단 이사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토크쇼에는 리영희재단 회원들 및 유영수·김영희 부부와 여러 인연을 맺어온 분들이 참석했다.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아 장마가 걱정되었는데, 이날 토크쇼는 화창한 초여름 날씨가 맞이해주었다.


유영수·김영희 두 분이 보여준 가슴 뭉클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따뜻한 배려는 이미 KBS의 다큐멘터리인 <스파이>(2021)와 <간첩과 섬소녀>(2022)를 통해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 가수로 활동하다가 최근에는 독립영화 제작에 몰두하고 있는 노영심씨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다큐를 보고 일본 오사카에서 부부가 운영하는 ‘샘터’ 식당에 찾아간 것이다. 그는 부부 토크쇼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에도 부랴부랴 달려왔다.



토크쇼는 유영수씨의 예상하지 못한 눈물과 김영희씨의 예견된 눈물 속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진행됐다. <한겨레> 신문 퇴직 이후 집필활동을 하면서 부부의 사연을 글과 다큐로 전한 바 있는 김효순 이사장은 “예전에 김영희씨를 인터뷰할 때 5초 마다 우셔서 무지하게 고생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작 이번에는 유영수씨가 마이크를 잡을 때마다 말을 잘 잇지 못했다. 특히 한국에 오게 된 계기를 회고할 때에는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쏟았다. 참석자 한 분이 손수건을 건네자 “이거 냄새 나는데. 내건 깨끗해”라고 우스갯 소리를 해 폭소를 자아냈다.


어떻게 부부의 연을 맺은 걸일까? 영수는 출소하자마자 영희를 찾아가 청혼했다. “나사가 하나 빠졌나, 암튼 무지하게 불쌍해 보였어요.” 그 다음날부터 영수는 영희가 일하는 옷 가게 인근 다방으로 매일 출근했다. 가끔은 집까지 걸어가다가 벤치에 앉아 불러주는 “노래가 좋긴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영수는 집에 가기 싫다고 오늘밤 같이 있고 싶다고 졸랐다. 영수의 노래가 좋았던 영희도 싫지는 않았다. 근처 여관방에 나란히 누운 두 사람. 영수는 손만 잡고 자자고 했는데, 진짜 손만 잡고 잤다고 한다. ‘이 사람, 고문을 심하게 당했다고 하더니만 신체에 무슨 문제가 있나?’ 코를 골면서 자던 영수 옆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샌 영희는 ‘이렇게 절제할 줄 아는 사람’에 믿음에 생겼다고 했다. 영수는 “평생 후회하는 밤”이라고 했지만, 그의 소원은 그렇게 이뤄졌다.



김효순: 유영수 선생은 와카야마라는 곳에서 자라셨는데,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내셨나. ‘와카야마에도 조선인 부락이 있었나.


유영수: 내가 태어난 곳은 ‘와카야마’인데, 그 중에서도 재일동포들과 오키나와 사람만 사는 부락 지역에서 살았다. 일본말로 ‘나가야(長屋)’라고 하는 판잣집이 많이 있는 곳이다. 할머니는 돼지도 키우고, 막걸리 장사도 해서 나는 국민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돼지 키우고 막걸리 파는 것을 도와드리면서 지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1920년 초반에 일본에 가셨고 아버지를 낳으셔서 나는 재일교포 3세이다. 대학 들어갈 때까지 우리말을 집에서 들어본 적 없이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운전면허증을 따려고 아주 친한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주민등록증을 받으러 갔던 적이 있다. 친구들은 모두 바로 주민등록증이 나왔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내 건 안 나왔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문의를 했더니, 국적이 어디냐고 묻더라. 내가 ‘일본’밖에 안 떠올라서 가만히 있었더니 이쪽으로 오라고 안내하더라. 따라갔더니 외국인등록과였다. 그때 처음으로 일본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옆에 주민등록증명서를 받고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한테 너무 부끄러워서 말도 못 꺼냈다. 외국인등록과는 현관에서부터 제일 구석 전기도 제대로 안 들어오는 어두운 곳에 있었다. 그 곳으로 가면서 형무소에 가는 기분이 들었다.


김효순: 아마 고등학생 때까지 내가 조선인이라는 의식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리쓰메이칸대학 화학과로 진학을 하시고 3년 정도 후에 모국 유학을 결심하셨는데, 처음에 화학과에 들어가신 이유가 궁금하다. 그리고 그 당시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대한 비판이 일본에서 엄청 보도됐었는데, 그 시절에 왜 한국 유학을 결심하셨는지도 듣고 싶다.


유영수: 60년 후반, 70년 초반에 리쓰메이칸대를 다녔는데, 그때 들어가자마자 학교 정문에 ‘군사 정권 타도하라’, ‘박정희 물러가라’ 이런 간판들이 크게 걸려있는 게 눈에 띄었다. 4.19혁명 다큐영화제 이런 것도 상영했다. 나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주민등록증 사건으로 충격을 받았었는데, 대학에 들어가서 보니 한국에 대한 학생들의 함성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때 나 자신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청, 조선문화연구회, 한국문화연구회와 같은 서클을 찾아다녔는데, 한국말이 안 되는 게 너무 부끄러웠다. 이런 걸 부모님께 말하는 건 너무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복잡한 일이었다. 결국은 독학으로 책이라도 볼 수 있게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대학 공부는 거의 안 하고 한국어 공부를 제일 중요한 과제로 여기며 대학을 다녔다. 3학년 때도 여러 가지 영화제, 북에 대한 강연, 행사 등에 많이 참여했다. 그리고 내가 직접 한국에 가서 빼앗긴 글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생각과 언젠가 한국 사람으로서 떳떳하게 살고 싶단 생각에 유학을 결심하게 됐다.


원래 일본에서 의대를 지망했었지만 떨어져서 할 수 없이 이공계에 들어갔었던 거고, 한국 유학을 갈 때도 의대를 지망했다. 1년간 한국말을 배우고 의대에 들어갔는데, 교무과 선생이 1년 전에 벌써 경북대 의대에 들어가게 돼있는데 왜 안 갔냐고 물어보더라. 그 전에 한국에 친척이나 돌봐줄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들의 주소를 적으라고 했었고 경북대 앞에서 여인숙을 하던 외가 친척 아저씨가 보호자로 보증을 서주실 수 있을 것 같아서 솔직하게 썼던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그 명단을 통해 한국 관계기관에 보고가 됐던 거고 바로 경북대 입학으로 배정이 됐던 것이다. 나는 서울에 살고 싶었지만 변경도 안 돼서 일단 경북대에 들었가긴 했는데, 문제가 더 있었다. 원래 리쓰메이칸 3학년에 다니면 한국 3학년으로 편입도 가능했는데 나에게는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 결국 고민하다가 의대 1학년부터 인턴까지 하면 몇 년이나 걸리니까 그럴 바에 리쓰메이칸을 1년만 더 해서 졸업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독일어만 이수하면 졸업할 수 있었기에 독일어를 마치고 졸업한 후, 대학원을 택했다. (그는 1975년 부산대 대학원 화학과에 입학했다.)


학교에서 한 친구를 사귀었고, 그 친구의 숙부인 육군 준장을 알게 됐다. 그는 군인이었지만 나는 그에게서 아주 좋은 인상을 받았다. 정치적인 이야기는 못해도 가족들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그는 재일교포에 대한 이해심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던 대학원 시절, 그 장군이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광주의 육군포병학교 교장이 됐는데 친구가 같이 축하하러 가자고 했다. 같이 가기로 했는데 그때 옛날 생각이 났다. 경북대나 부산대를 다녔을 때 데모도 많이 참가했었고 친구들이 기동대에게 쫒기다가 내가 지내던 하숙집에 도망쳐 와서 같이 잔 날들이 매일같이 있었다. 많이 잡혀가기도 했다. 그걸 떠올리다보니 이렇게 사회인이 될 바에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으로 편지를 준비했고, 장군에게 갔다. (그는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힘써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그 장군에게 건넸고, 편지를 읽은 장군은 그 자리에서 권총을 꺼내 꼼짝 못하게 한 뒤 헌병을 불러 유영수씨를 인계했다.) 난 나만 잡혀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구치소에서 신문을 통해 내 동생과 동생 친구도 잡혀간 걸 알게 됐다. 더군다나 그 동생 친구는 반국가단체와 접촉을 했고, 김대중씨를 한통련의 수괴인 것처럼 신문에서 크게 발표했다. 마치 우리가 한통련과 반국가단체 활동을 하거나 군사정권을 타도하려고 하거나 북과 연결돼 있다고 날조한 거였다. (동생 친구인 재일동포 유학생 김정사는 시인 김지하의 법정 최후 진술을 보도한 <민족시보>를 소지한 혐의로 잡혔지만, 고문으로 역시 간첩으로 조작됐다. 또한 중앙정보부는 일본에서 반박정희 운동에 앞장선 한민통(한통련)을 김정사의 배후로 조작하면서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만들었다. 한민통의 초대 의장으로 추대됐던 김대중은 이 때문에 1980년 반국가단체 수괴 혐의 등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나의 행동을 최대한으로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그것이 내 평생의 후회이고, 반성하고 사는 게 내 의무다. 그런데 이렇게 김영희씨와 알게 되고, 거문도 사람들의 서러움을 알게 돼서 나는 지금 행복하다.


김효순: 유 선생님이 광주교도소에 있는 동안 우연히 김승효라는 리쓰메이칸대 동창생도 수감돼 있었고, 그의 상태를 보고 많이 괴로우셨다고 하셨다. 그 당시 김승효 씨는 어떤 상황에 처해있었나.


유영수: 특별사동에서 나와서 목공예 노역을 나갔는데 같은 방에 승효가 있었다. 근데 승효는 그때 벌써 정신분열로 말도 안하고 혼자 웃고 방에 들어가면 소변 대변을 못 가리고 완전히 왕따 당해서 냄새나는 변기통 옆에 혼자 자고 있었다. 그때 그를 리쓰메이칸대 써클에서 봤던 기억이 나서 돌봐주게 됐다. 돌봐주지 않으면 생활을 못하는 상황이었다. 왜 그런 사람을 병보석으로 밖에 내보내지 않고 저렇게 놔두는지 의문이었다. 심지어 감옥 바깥 사람들은 그런 상태도 잘 모르는 상황이었다. 목공장이 이 방의 3배나 되는 큰 시설이었는데 거기서 5~60명이 작업을 했다. 거기 작업 테이블이 10개 정도 있고 복도에서 간수가 왔다 갔다 하면서 감시를 했다. 그리고 승효만 칼같은 도구에 접근 못 하게 간수가 보는 앞에서 매일을 혼자서 왔다 갔다 하도록 했다. 그런 상태였고 면회 와서도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게까지 승효가 병보석으로 못 나갔던 게 지금도 후회스럽다. 재심할 때 그를 봤더니 더 심한 상태였다. 승효와 같이 석방된 다른 이 역시 정신적으로 고문당하고 교도소 안에서 아무 치료도 못 받아서 밖에서도 폐인처럼 살았다. 그 당시에는 한두 사람의 일이 아니었을 거다.


김효순: 김영희 선생은 769월에 거문도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야말로 인생이 바뀌고 고생을 엄청 많이 하셨다. 사건이 터지기 전 어렸을 때는 어떤 환경에서 사셨는지부터 먼저 이야기 해달라.


김영희: 거문도라는 섬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에 밥을 제대로 못 먹고 살았다. 밥이라고 해봤자 술 찌꺼기로 죽을 쑤어서 먹는다거나 바다에 가서 톳을 뜯어 와서 쌀 한 톨 두 톨 보일 듯 말 듯 한 죽을 끓여 먹는 거다. 친구들은 다 중학교를 갔는데, 난 중학교 갈 형편도 못 돼서 1년을 쉬었고, 그나마 사촌오빠가 조합을 다니면서 중학교 납부금을 내줘서 학교를 보내줬었다. 그 당시에 중학교 납부금을 1년에 네 번쯤 나눠서 냈는데 그 납부금을 제때 못 내면 운동장 조회단에 납부금 못 낸 한두 명 아이들 이름을 붙여놓고 그랬다. 그래서 내가 맨날 울면서 학교 안 간다고 했고, 한 학기 남기고 창피하다고 중학교를 그만뒀다. 그래서 거문도 시골에서 엄마 아버지와 마늘이나 고구마 농사를 하면서 지냈다. 큰아버지 이야기나 우리 집이 옛날에 잘 살았다는 이야기는 엄마, 아버지로부터 어렸을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자랐다. 하지만 내 어렸을 적 기억은 늘 가난했고 배고팠던 것뿐이다. 그러다 사촌 오빠가 북에서 내려와서 나도 그를 보게 됐다. 북에서 세 사람이 내려와서 우리 오빠라는 사람을 죽이고 한 사람이 자수를 했다. 신고를 못해서 우리 가족 일가가 전부 잡혀갔다. 그렇게 교도소에 가서 유영수씨를 만났다.


김효순: 김영희 선생은 형이 확정되고 나서 광주로 이감을 가셨는데, 거기서의 생활은 어땠나.


김영희: 광주에 가서는 민향숙 언니가 출소할 때까지 함께 한방을 썼다. 나에게는 면회 오는 사람도 없고, 영치금도 없었는데 언니가 나를 많이 보살펴줬다. 우리는 다 감방에 있었지만 언니는 지도를 맡고 있어서 감방 밖에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 당시에 교도소 앞에서 사식 같은 걸 팔았는데 한번은 언니가 통닭 한 마리를 사서는 10분 남짓한 일광욕 시간에 간수복을 쌓아놓은 한 사람 앉을까 말까한 작은 창고에 통닭 한 마리와 나를 밀어넣고는 먹고 나오라고 했다. 물도 없이 왜 그렇게 맛있는지. 오열하면서 눈물과 함께 먹었다.


청중: 유영수 씨는 장군에게 편지를 전달하고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는데, (결혼식 때)김영희씨 아버님께도 편지를 써서 읽어드렸다. 편지로 망하고, 편지로 행복해진 인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유영수: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나는 책을 보기 위해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독학을 해서 책은 읽을 수 있었지만, 그 후엔 회화를 배우고 싶었다. (서울서 생활할 때) 우리 하숙집 주인에게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네 명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이 학교 갔다 오거나 수업이 없는 날, 청량리에서 생긴 지 얼마 안 된 어린이대공원에 데리고 가서 그들에게서 회화를 배웠다. 말은 어려워서 잘 안 나오지만, 글은 자신감이 없긴 해도 차분하게 쓸 수 있었다. 영희씨 부모님께 드린 편지는 진짜 재일교포로서 마음을 담아서 썼다. 진실한 마음을 담으려고 했더니 저절로 나오더라.


김효순: 김영희 선생님은 808월에 나오셨는데, 그때 부모님은 계속 감옥에 계실 때지 않나. 면회 오는 친척들도 거의 없었을 것 같고. 먼저 나오셨지만 부모님께 면회를 다녀야하고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들었을 것 같은데 옥바라지는 어떻게 하셨나.


김영희: 민향숙 언니를 먼저 알았고, 언니가 출소하면서 한명숙 언니와 같은 방에서 지내게 됐다. 민향숙 언니가 먼저 나가면서 나중에 나오면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를 주고 갔었다. 한명숙 언니보다 내가 먼저 출소를 했는데, 한명숙 언니도 나가면 자기 집에 찾아가라면서 언니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가르쳐줬다. 가족이 데리러 오지 않으면 출소가 안 되지 않나. 그래서 그 당시에 순천에 살고 있던 큰오빠가 데리러 와서 일단은 큰오빠 집으로 갔다. 우리 형제들이 모두 힘들게 살아서 거기 며칠 있다가 서울의 민향숙 언니를 찾아갔다. 거기서 몇 달 지내면서 언니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한명숙 언니 집에서도 머물렀다. 언니가 출소하기 전인데도 언니가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해놓았는지 언니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참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안암동의 민향숙 언니 집에 가서 같이 살았는데, 언니 어머니가 아는 동생이 노량진 쪽에서 여관을 하고 작은 아동복 가게도 하고 있었다. 그 분을 소개받아서, 속된 말로 식모를 하면서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시간이 남으면 낮에는 아동복 가게 일도 도왔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면 아침식사 준비 전에 요구르트와 우유 배달을 했었다. 그러면서 수입이 생기면 그걸 가지고 엄마 아버지 면회를 갔다. 아버지는 내가 감옥에서 나왔던 당시부터 이미 위암 말기였다. 처음에는 면회도 안 됐었고 나중에 위암 말기라서 거동을 하실 수 없으니까 내가 아버지가 누워계신 감방까지 면회를 다녔다. 그때 아버지 연세가 칠십이었는데, 칠십이 된 노인네가 밖에 가서 뭘 할 수 있겠냐고, 밖에 나가서 자식들 손이라도 잡고 돌아가시게 해달라고 정부에 구구절절 탄원서를 썼다. 그래서 아버지가 병보석으로 나오셔서 순천 큰오빠 집에 계셨고, 나는 서울 상도동에서 아동복 가게를 인수받아서 운영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언제나 옷을 살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설이나 추석, 어린이날 같은 대목이 되면 진짜 장사가 잘 됐다. 그렇게 방도 하나 얻었다. 같이 교도소 가있던 오빠가 있는데, 지금 80세이지만 지능이 초등학생 3-4학년밖에 안 된다. 그 오빠가 당시에 순천 큰오빠 집에 있으면서 시멘트 공장을 다니고 계셨을 땐데, 내가 서울에 방을 얻고 오빠를 데려와서 같이 살았다. 리어카에다 밀감 장사를 시켰는데 잘 안 되더라. 천원 어치는 팔 수 있는데, 만원 어치를 팔 땐 계산을 못해서 계속 밑지는 장사가 됐다.


아버지가 병보석으로 나와서 순천 큰오빠 집에 계실 때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를 보러 내려갔다. 그 당시에 팔달산에 있는 약수가 암에 좋다고 하더라. 금요일에 가게 문을 닫고 밤 열차를 타고 새벽에 대구에 가서, 팔달산에서 큰 물통에 약수를 받아서 고속버스를 타고 아버지 계신 순천으로 갔다. 그리고 월요일엔 새벽 열차로 서울에 올라오는 생활을 3주를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마지막 주 그날은 어린이날 대목이라서 문을 닫을 수 없었다. 당시에 한명숙 언니 후배가 약사를 하고 있어서 암 환자에게 좋다는 주사를 소개받았다. 고속버스터미널에 가서 그 주사랑 케이크를 운전사에게 주고 올케 언니에게 찾아가라고 했는데 그날 밤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연락을 받아서 내려갔는데 아버지가 눈을 못 감고 계시더라. 올케언니가 눈을 감겨드려도 계속 뜨신다고 했다. 내가 가서 눈을 감겨드렸는데 다시 안 뜨고 가셨다. 그렇게 아버지를 보내드렸다.


그 후에 향숙 언니가 노량진 어느 다방으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유영수 씨와 향숙 언니 엄마, 향숙 언니 셋이 앉아 있었다. 그동안 잘 지냈는지 인사말을 하다가, 느닷없이 유영수 씨가 자기하고 결혼해달라고 했다. 진짜 이 아저씨 나사가 어디 하나 빠졌나 했다. 교도소 안에서 나는 언니만 졸졸 따라다녔고 교무과에서 만날 때도 유영수 씨가 나에게 눈길 한번 준 적이 없었는데, 나를 얼마나 안다고 보자마자 결혼 이야기를 하나 생각했다. 그는 그날부터 하루도 안 빠지고 내가 장사하는 곳 근처 우리다방으로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머리도 빡빡 깎고 얼굴도 허연 게 너무 불쌍해보였다. 민향숙 언니 엄마가 영수는 고문으로 생긴 복막염 수술도 했고 돈도 없는데 너는 그래도 돈을 벌고 있으니까 네가 밥도 사고 차도 좀 사주라고 그러셨다. 진짜 불쌍해보였다. 결혼한다고 대답을 안 했는데 매일같이 와서 같이 점심도 먹고, 저녁 8시쯤 문을 닫으면 그때부터 노량진까지 같이 걸었다. 근데 노래를 좀 잘하더라. 노량진에 가면 벤치가 있는데, 거기서 뜻도 모르는 일본 노래를 불러줬었다.


그렇게 늘 기차타면서 헤어졌는데, 어느 날 나에게 오늘은 돌아가기 싫은데 같이 지내면 안 되겠냐 하더라. 바로 그 앞에 여관 간판이 보였다. 이 나이가 되니까 부끄럼 없이 말씀드린다. 그래서 여관을 갔는데 이불이 한 채 있더라. 유영수 씨가 주인을 불러 한 채를 더 부탁해서 두 채를 깔았다. 그러더니 나에게 부탁이 있다면서 손만 잡고 자게 해달라고 하더라. 그렇게 손만 잡고 있는데 나는 긴장을 해서 잘 수가 없었다. 근데 보니까 유영수 씨는 잠을 진짜 잘 자더라. 교도소에서 오래 살더니 신체적으로 문제가 있나 생각을 하면서 뜬눈으로 밤을 새고 헤어졌다. 그리고 생각해보니까 이 정도로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괜찮겠다 싶었다. 그리고 나도 이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승낙을 했다. 그렇게 결혼하고 싶은 아가씨가 있다고 일본의 부모님들께 바로 연락했고 부모님들이 오셔서 허락을 하셨다. 그때 2주 여행 비자로 오셨는데 그동안 결혼 날짜를 잡고, 신혼여행으로 산소 성묘를 다녔다. 지금도 결혼 앨범을 보면 둘이서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고 모두 시어머니, 시아버지와 넷이 찍은 사진뿐이다. 그 후로 내 아버지께 편지 썼던 내용처럼 변함없이 아껴주고 잘 살고 있다.


유영수: 나는 여관 갔던 그날이 평생을 계속 후회하는 날이다.


김효순: 리영희 선생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리영희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 부부에게 엽서를 여러 장 보내셨다. 거기에 보면 이 부부에 대해서 광주교도소 동창인이런 표현이 나온다. 김영희 선생이 서울구치소에서 광주로 이감갈 때 리영희 선생과 같이 가셨다고 하셨는데.


김영희: 이감 갈 때 모두 간수들이 지켜보는 상태로 포승줄에 묶여서 기차타고 가는데, 간수들이 남자 영희, 여자 영희라면서 막 놀렸다. 그때는 리영희 교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몰랐다. 그러다가 유영수 씨가 나와서 일본에서 행사를 하면 교수님과 관광도 하고 안내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녔던 기억이 있다.


김효순: 유영수 선생은 광주교도소에서 어떻게 리영희 선생과 친분을 맺게 되셨나.


유영수: 리영희 교수님과는 굉장히 이야기가 많다. 교수님 독방이 내 옆방이었다. 매일 12시 넘어서 모두 잠이 들면 조금씩 소리가 들렸는데 간수가 순찰을 와서는 리영희 교수님께 많은 바깥 정세 이야기를 해주는 듯했다. 그런데 아마 정보부에서 이상한 사기꾼 한 사람을 나와 리영희 교수님 방 사이에 집어넣었는지, 리 교수님이 밤에 전해들은 그 내용을 다음날이 되면 보안과에 가서 밀고하더라. 리 교수님이 이것 때문에 징벌도 받으셨다.


또 하나 이야기가 있다. 보통 깡패 오야붕이 감옥에 들어오고 시다바리가 먼저 나가면, 몇 시에 담배 보따리를 어디에 던질지 약속하고 나간다. 한번은 내 방과 리 교수님 방 사이의 운동장에서 쿵 소리가 나서 봤더니 담배 한 보따리가 떨어져 있었다. 처음엔 그게 뭔지 몰라서 못이랑 나무로 도구를 만들어 당겨봤더니 담배였다. 그런데 리영희 교수님이 그걸 처리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먼저 특사에 있던 권낙기 선생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사건 때문에 수배당하고 기차에서 뛰어내려서 다리를 다쳤었고 의족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의족 안에 공간이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했다. 권낙기 선생이 일반수 특히 소지들과 친해서 그들을 통해 담배를 권 선생에게 전달했고, 권 선생이 재소자들에게 팔았다. 그래서 그때 담배 판 돈으로 특사에 계시는 장기수 선생님들께 새로운 내의도 사드리고 그렇게 사용했다.


리영희 선생과의 또 다른 인연 중 하나는, 박정희가 죽은 79년 10월 26일과 관련된 거다. 보통 관에서 나오는 김치는 냄새도 나고 맛이 없는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누군가 아주 맛있는 사식 김치를 온 사동에 넣어줬다. 리영희 선생이었다. 왜 그러셨는지 궁금하지 않나. 일설은 광주교도소 옥상에 대한민국 국기가 반기로 게양돼 있어서 리영희 선생이 그걸 통해 박정희가 죽었구나라고 아시고 김치를 나누셨다는 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박정희가 죽기 전부터 굉장히 여러 사건이 있지 않았나. 그래서 아마 26일 소식을 간수한테서 들으셨을 것이다. 밤에만 근무하면서 매일 바깥 소식을 전해주는 간수들이 몇 명 있었다.


김효순: 리영희 선생이 그때 김치를 쫙 돌린 걸 보고, 도대체 정보의 출처가 어디냐 이런 얘기가 나왔고, 리영희 선생이 누구한테 그걸 들었다고 얘기할 수는 없어서 징벌 방에 다시 들어가셨다고 한다.


청중: 아들, 딸을 얻고 손주들도 얻으셨을 텐데, 조국의 분단과 부모의 사정 때문에 자식들을 키우면서 문제는 없었는지. 그리고 한국에 와서 살고 싶다고 얘기하셨던 것을 기억하는데, 그런 생각을 아직도 갖고 계신지 궁금하다.


김영희: 나는 6남매 중에 막내로 자랐고, 일본에 가서 살면서도 늘 그리워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시부모님은 한국이라고 하면 학을 떼셨다. 그래서 시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는 한 6년을 한국을 못 왔다. 그러다가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한국에는 1년에 한 번씩 왔다 갔다 하면서 지낸다. 언니와 조카도 지금 여기 와있다. 내가 1년에 친정이라고 한 번씩 오면, 언니들이 유 서방 왔다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그렇게 내 기를 펴게 해준다.


김효순: 자녀가 몇남몇녀고 손주는 어떻게 두셨는가.


김영희: 아들과 딸이 있다. 아들은 85년에 한국에서 태어났는데, 아이가 10개월 될 때까지 정부에서 위장결혼이라면서 여권을 안 내줬었다. 그래서 유영수씨가 정부에 탄원서도 썼고 여러 노력을 했었다. 지금 이 아들한테서는 손자와 손녀가 있다. 둘째는 딸이고 일본에서 태어났다. 우리가 결혼을 늦게 했고 자식들한테 사촌들이 많았다. 한국에 오면 사촌 형들, 누나들이 예뻐하고 그러니까 우리가 억지로 만든 게 아니라 자식들 스스로가 대학은 한국으로 가고 싶어했다. 그래서 둘 다 한국에서 연세대를 다녔다. 딸은 연대 다니면서 어느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 스위스 사람이 여행 왔다가 둘이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됐고 지금은 결혼해서 같이 스위스에 살고 있다. 딸에게서는 손녀가 셋, 손자가 하나. 그렇게 해서 지금 손주가 총 여섯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됐다.


피아니스트 허경자 님은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조작 사건으로 감옥에 갇힌 오빠 허경조를 그리워하며 1976년 노래 '재회'를 만들었다. 이날 토크쇼의 마지막에는 그의 동생 허경민 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또 다른 피해자인 이철 님이 노래 ‘재회’를 불러 감동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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