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수 김영희 부부의 토크쇼에 초대합니다.
[초대의 말]
김효순 리영희재단 이사장
리영희 선생은 2000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지자 모든 대외활동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후유증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아끼는 후배 후학들에게 서신을 보내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리 선생은 2007년 새해를 앞두고 오사카에 거주하는 어느 부부에게 이런 엽서를 보냈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두 사람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의 결과라고 생각해... 건강관리에 각별히 조심할 것.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으니까. 요 조심!”
정이 뚝뚝 배어나오는 이 글의 수취인은 유영수 김영희 부부입니다. 도대체 무슨 인연이 있는 걸까요? 리 선생이 1970년대 후반 이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일반 사회가 아니라 광주교도소였습니다. 두 사람은 당시 남한에서 천형이나 다름없는 ‘간첩’ 혐의를 뒤집어쓰고 수감중이었습니다.
온갖 고초를 이겨낸 두 사람은 감옥에서 출소한 뒤 백년가약을 맺고 오사카로 가서 샘터라는 식당을 열었습니다. 그곳은 조국을 찾았다가 날벼락을 맞았던 재일동포 정치범들에게 만남의 장소가 됐고 본국의 민주화운동 원로들에게도 잠시 쉴 수 있는 오아시스 구실을 했습니다. 리 선생 부부, 박형규 목사 부부가 머물렀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인 박용길 장로는 딸 문영금 (문익환 통일의 집 관장)과 손녀와 함께 다녀갔다고 합니다. 부부의 사연이 알음알음으로 알려지자 다양한 단체와 노조의 활동가들이 찾아오곤 합니다.
유영수, 김영희 부부가 리영희로부터 받은 엽서(유영수, 김영희 제공)
유영수님은 간사이지방의 와카야마현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지내던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 친구들과 운전면허 시험을 보러 갔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에게 일본인 주민표가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교토의 리쓰메이칸대학 이공학부 화학과에 진학했습니다. 리쓰메이칸대학은 일제때 교토제국대학에서 사상탄압을 받고 쫓겨났던 법학자들이 전후 총장 등 주요 보직을 맡아 대학을 개혁해 진보적 학풍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1973년 본국 유학의 길을 택해 3년간 머무른 뒤 일본에 귀환했다가 77년 봄 다시 입국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4월 광주포병학교장인 박승옥 육군 소장을 관사로 찾아가 남북한의 군 당국이 판문점에서 만나 협상해야 한다는 취지의 편지를 내밀었습니다. 박 소장은 그 자리에서 권총을 꺼내 머리에 겨눈 뒤 보안사로 신병을 넘겼습니다. 그후 그에게 닥친 고난은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가 박 장군을 찾아가기 약 8개월 전 판문점에서 유엔군과 북한군이 미루나무의 벌채를 둘러싸고 정면충돌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상자가 적지 않게 나왔고 미 본토에서 전폭기들이 무리지어 날아오는 등 준전시사태로 번졌습니다. 충돌사건의 여파가 그대로 남아 있던 시기에 그는 무엇이 그리 절박했길래 본국에서 자란 비슷한 연배의 젊은이라면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할 행위를 감행했던 걸까요?
그는 보안사에서 스스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럴 때면 다른 사람의 등에 업혀 구치소의 감방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늑막염을 앓았으나 효험이 있다는 일본의 신약 반입을 구치소가 허가해주지 않았습니다.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해 흉막에 고인 흉수를 주사기로 몇 차례 나눠서 뽑아내야 하는데 1.8리터 짜리 두 병분을 한번에 뽑았습니다. 그래서 바로 붙어버리는 유착이 생겨 지금도 완치를 못해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는 요양시설이 있는 마산교도소로 갔다가 광주교도소로 이감됐습니다. 그곳에서 기구한 사연을 지닌 김영희라는 ‘처녀 좌익수’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교도소는 남사와 여사가 엄격하게 나눠져 있고 남녀 수감자의 접촉도 극히 제한돼 있습니다. 그는 오랜 수감생활 끝에 감옥에서 풀려나자 먼저 석방된 김영희님을 찾아가 다짜고짜 구애공세를 펼칩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도 그는 무슨 심정으로 프로포즈를 하며 매달렸을까요?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을 올린 뒤 두 사람은 일본으로 가기 위해 여권을 신청했지만 한동안 발급을 거부당했습니다. 공안당국이 ‘위장결혼’이 아닐까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영희님은 판문점사건이 터진 그해에 발생한 거문도사건에 연루돼 의미조차 모르는 ‘사상범’이 됐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해 제대로 된 밥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고 합니다. 시레기죽, 바다에서 뜯어온 톳죽, 막걸리 찌꺼기로 만든 누룩죽, 옥수수 등이 일상적인 주식이었습니다. 그의 최종학력은 중학교 중퇴입니다. 수업료를 제때 내지 못하는 일이 반복돼 창피해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의 큰아버지 김재을은 연희전문 수물(數物)과를 나와 교토제대로 진학해 채광야금학 박사가 됐습니다. 1946년 10월 경성제국대에 재직하던 일본인 교수들이 대거 쫓겨난 뒤 김재을은 서울대 교수가 됐습니다. 당시 신문에는 좌익계열의 집회에 나가 ‘건국과 과학기술’ 등의 주제로 강연을 하는 그의 동정이 자주 실렸습니다.
식민지 시절 여수와 제주도의 중간 쯤에 있는 거문도에서 육지로 나오는 선박편은 아주 열악했습니다. 하물며 일본 유학까지 갔다면 상당한 재력이 있던 가문의 출신이라는 요인을 빼고서는 설명이 잘 되지 않습니다. 당대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던 김재을과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조카는 학벌면에서 너무나 비대칭적입니다.
김영희님은 어린 시절부터 친척과 동네 어른들로부터 큰아버지 애기를 ‘귀에 콩깍지가 낄 정도로’ 들으며 자랐습니다. 거문도에서 그 집안의 밥을 먹지 않고 사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부자였다는 얘기를 전설속의 얘기처럼 들었다고 합니다.
지방 현감 등의 벼슬을 지내다가 거문도로 귀양을 온 그의 선조들은 새 정착지에서 쟁쟁한 가문을 일궈냈습니다. 외딴 섬에 살면서도 유달리 자녀들의 교육환경에 애를 썼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영희님의 증조할아버지 뻘이 되는 김상순은 1905년 11월 거문도의 서도에 낙영학교를 세웠는데 근대교육기관으로서는 전라남도에서 세 번째, 여수에서는 첫 번째였다고 합니다. 낙영학교는 서도초등학교의 전신으로 현재는 거문초등학교로 통합됐습니다.
거문초등학교에는 김영희님의 고조할아버지가 1905년 근대식 학교를 세운 것을 기념해 2005년 백주년 기념비가 세워졌다. 유영수 김영희 부부가 기념비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일제 하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던 조선의 젊은이들 가운데 당시의 시대적 조류에 따라 혁명적 급진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1920년대 후반 광주 전남지역을 중심으로 신간회, 조선공산당 지하활동을 벌였던 김재명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1928년 체포돼 서대문감옥소에 수감됐다가 폐병에 걸려 보석으로 나와서 1930년 초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숨졌습니다. 사실상 옥사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배후 주역 중에는 그와 같이 활동했거나 그의 영향을 받았던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2006년 뒤늦게나마 독립유공자(건국훈장 애국장)로 인정받았습니다. 당초 그의 출생지는 광주로 알려졌다가 학자들의 최신 연구 결과 여수시 삼산면(거문도)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김재을과 같은 항렬의 친족으로 봐도 무방하겠지요.
김영희님은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할 뻔했습니다. 그의 부친은 사회운동의 최전선에 뛰어든 큰형 탓에 교육을 받을 기회를 놓쳤고 여순사건 때는 총살되기 직전에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토벌대가 좌익 혐의자들을 나무에 묶어놓고 총을 쏘려 할 때 김씨 가문의 도움을 받았던 한 주민이 나서 “저 사람은 빨갱이가 아니다”라고 호소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토벌대는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다며 다리에 총을 쏘아 평생 다리를 저는 불구가 됐습니다. 김영희님이 집안 어른들로부터 들은 얘기로는 공포 분위기에서 아버지를 구한 사람은 ‘멘발’이었다고 합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호칭이었을까요?
유영수 김영희 부부의 인생사는 말과 글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사연들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슬프고 고통스런 일이 되겠지만 우리 현대사의 아픈 속살을 함께 들여다보고 위로를 나누지 않겠습니까? 좌석이 한정돼 있으니 관심이 있는 분들은 신청을 서두르시는 게 좋습니다. 현장에서 얼굴을 보며 직접 물어보면 이야기의 내용이 훨씬 풍성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