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선생의 슬기로운 감옥 생활 2 / 김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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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01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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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의 슬기로운 감옥 생활 2


-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 필화 사건



 


 


 


 


 


김학민(경기아트센터 이사장)


리영희 선생의 필화 사건은 어떻게 일어났나


리영희 선생은 생애 다섯 번의 감옥살이를 했다. 2024년 12월, 윤석열의 느닷없는 계엄령 실행계획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선생은 다섯 번 ‘수거(收去)’를 당한 것이다. 선생의 감옥살이는 대부분 어떤 행위를 한 결과이기보다는 자기의 생각과 그 생각을 글로 표현한 인쇄물이 형법에 저촉되었다는 재판의 결과였다. 곧 ‘구체적 행위’가 아니라 한 개인의 ‘관념과 그 관념의 표현물’이 단죄된다는 사실 자체가 문명사회에서는 어불성설이지만, 어쩌랴, 그 시대는 전 국민이 고통을 받았던 야만의 세월이었으니.


리영희 선생은 1977년 11월 23일 자택에서 정보 경찰에 체포된 후(공교롭게도 1964년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시절 리 선생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날도 11월 23일이었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0일간 조사를 받고, 또 검찰에서 다시 20여 일 조사를 받은 후, 12월 27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되었다.(백낙청 <창작과비평> 발행인은 불구속·기소)


검찰은, 『8억인과의 대화』는 중국 문화대혁명의 필요성과 모택동의 혁명 수행에서의 지도역량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공산혁명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인정하고, 중공의 활동을 찬양 고무하였고, 『우상과 이성』은 우리나라의 지도적 인사들은 일본인과의 대화에서 일본어를 사용하는데 유엔 총회에서 북한 대표는 우리 말로 연설하였다면서 북한을 찬양, 고무, 동조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용공 혐의를 받은 글들은 과거 10여 년간 <세대>, <대화>, <창작과비평> 등의 잡지에 게재되었던 것으로, 그 당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이 사건으로 리영희 선생은 1978년 5월 19일 1심에서 징역 3년(판사 유경희), 1978년 9월 29일 항소심에서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았다(판사 한정진, 이기영, 조용무). 리 선생은 이에 불복,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979년 1월 16일 기각되어 최종 2년 징역형이 확정되어(대법관 김윤행, 이영섭, 김용철, 유태흥), 2월 3일 광주교도소로 이감, 복역하다가, 1980년 1월 9일 형 만료로 출소하였다.


리영희 선생은 ‘두 번째 수거’ 2년을 어떻게 지냈을까? 선생과 이런저런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중 양성우 시인은, 1970년대 중반 본인과 리 선생 사이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회고하면서, 1977년 이 필화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그 전개 과정을 풀어 놓았다. 양성우는, 검찰이 두리뭉실하게 제기한 ‘해외 공산계열 고무 찬양’ 혐의는 한마디로 허울일 뿐이고, 핵심은 『우상과 이성』에 실린 <농사꾼 임군에게 띄우는 편지>(전문보기)로, 검찰은 그 글이 “노동자, 농민, 영세민들에게 현 정치·경제·사회·문화 제도와 이를 이끈 현 정치인, 기업가, 지식인들을 타도하고 공산혁명을 해야 한다고 선동했다”고 본 것이다.


<농사꾼 임군에게 띄우는 편지>


광주 중앙여고 교사 양성우는, 1975년 2월 광주 YWCA에서 열린 민청학련사건 관련 구속자 석방 환영회에서 자작시 <겨울공화국>을 낭독한 것이 빌미가 되어 해직되었다. 그는 학교에서 쫓겨난 후 구례경찰서 정보과 형사의 감시 아래 지리산 천은사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광주에 내려온 고은 시인과 연락이 닿아 둘이 구례구역에서 만나 열차를 타고 서울로 와버렸다. 양성우는 서울의 여러 사람과 교유하면서 리영희 선생과도 안면을 트게 되고, 선생이 주선하여 한양대학교 부설 ‘중국문제연구소’의 촉탁 직원으로 ‘취업’하게 되었다.


‘중국문제연구소’에서 그가 맡은 업무는, 『중국문제연구』에 게재할 논문들을 편집, 교열, 발간하는 일이었다. 당시 유신독재에 비판적이었던 사회과학 서적들은 대부분 조태일 시인이 운영하던 창제인쇄공사에서 조판을 해주었는데, 연구소의 『중국문제연구』 발간도 창제인쇄소의 도움을 받았다.


그 시절 공안 기관의 항시적 감시와 탄압을 무릅쓰고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들의 ‘불온서적’ 발간에 절대적 도움을 준 조태일 시인의 창제인쇄공사, 비밀리에 민주화운동 단체들의 ‘불온유인물’을 도맡아 인쇄해준 세진인쇄(강은기 운영), 그리고 해직과 구속을 무릅쓰고 양심수들의 인권유린을 알리고 그들의 법정투쟁을 도왔던 전병용 등 여러 ‘민주 교도관’의 역할과 활동은 한국 민주화 운동사의 미시사(微視史)로 마땅히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양성우는 ‘중국문제연구소’에서 6개월가량 일하다가, ‘신구교성서번역공동위원회’의 개신교 측 공동위원장이던 문익환 목사의 추천으로 위원회의 성서 교정위원으로 옮겨 일하게 되었다. 그 일은 종로2가 성서공회 건물에 소재한 위원회 사무실에서, 신구교 성직자와 신학자들이 번역한 성서 초고를 30여 명의 교정위원과 함께 ‘현대 민중어’로 다듬는 작업이었다. 성서 교열작업은 일거리가 듬성듬성 들어와 시간적 여유가 있는데다가, 해외 선교 기관의 지원을 받아서인지 보수도 좋았다.


그러던 중에 양성우에게 가나안농군학교로부터 기관지 <가나안 농군>의 편집·발간 작업을 맡아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교통이 열악한,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에 있었던 가나안농군학교까지 출근할 필요 없이 공동번역위원회 사무실에서 발간작업을 해도 되기 때문에 양성우는 일종의 ‘투 잡’으로 생각하고 그 일을 맡게 되었다. 잡지의 교정·교열·편집은 물론, 원고 청탁까지도 양성우가 혼자 알아서 했다.


1976년 어느 날, 양성우는 리영희 선생을 찾아가 “우리 농민들을 위한 글을 하나 써달라”고 원고를 청탁했는데, 리 선생의 그 글이 <농사꾼 임군에게 띄우는 편지>였다. 천하의 중앙정보부라 해도, 광주군 시골구석의 이름도 모르는 ‘학교’라는 데서 발간한 팸플릿 수준의 인쇄물의 ‘이적성’을 파악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편지’가 1977년 11월에 발간된 『우상과 이성』에 수록되자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이 재빨리 그 ‘이적성’을 발견하고 리영희 선생을 ‘수거’한 것이다.(『우상과 이성』 초판은 ‘편지’가 문제가 되어 판매금지 되었다가, 1980년 계엄령하에서 두 편의 글을 넣고 ‘편지’ 등 두 편의 글을 뺀 증보판이 검열에 통과되어 3월 10일 재발간 되었다)


한편, 1977년 6월 13일, 양성우는 한창 공동번역 성서 원고의 마지막 교정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쳐 남산으로 끌려갔다. 중앙정보부는 양성우의 장시 <노예 수첩>이 일본의 월간지 『세카이(世界)』 6월호에 게재되자 그를 연행, 국가모독죄와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한 것이다. 양성우의 회고다.



중앙정보부에 들어가자마자 빨갱이라며 무작정 두들겨 팼다. <노예 수첩> 한 구절, 한 글자 모두가 공산혁명을 선동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러 장의 사진도 보여주었는데, 중국문제연구소 시절 리영희 교수 등과 함께한 사진도 몇 장 있었다. 한마디로 중정은 나의 일거수일투족 모두를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거기에서 조사받을 때, ‘중국문제연구소’의 타이피스트 ‘미스 박’도 잡혀 들어와 새파랗게 질려서 조사받는 것도 얼핏 보았다. 연구소 시절, ‘미스 박’은 나의 <노예 수첩> 원고를 타이프로 쳐 준 적이 있었다.


내가 서울구치소 4사상 19방에 갇혀 있었던 그해 11월 말, 리영희 선생이 5사상 18방에 들어오셔서 깜짝 놀랐다. 사동은 달랐지만, 4사상 19방과 5사상 18방은 거의 직선으로 마주 보고 있어, 리 선생과 나는 손가락으로 글자를 써가며 서로의 소식을 나누었다. 그해 6월, 내가 <노예 수첩>으로 조사받을 때 선생께서도 참고인으로 중앙정보부에 소환되었었다는 사실도 그 통방으로 알 수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에 밀려 존재감을 잃고 있었던 남영동 대공분실의 박처원이 호시탐탐 한탕을 치려고 준비하다가 <농사꾼 임군에게 띄우는 편지>를 보고는 사건을 만들었다는 전말도 리 선생으로부터 들었다.


어느 날은 나의 시집 『겨울공화국』의 출판 문제로 구속된 고은 시인과 조태일 시인이 내가 수감된 사동 아래로 지나가는 모습도 목격했다. 리 선생은 감옥에서도 항상 느긋하였고 낙관적이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생과 나는 일상사부터 시국 문제, 국제정세까지 손가락 글자로 의견을 나눴다. 리 선생으로부터 전해들은 낙관과 희망의 말씀으로 나는 좌절과 절망 속으로 빠질 뻔했던 감옥살이를 버틸 수 있었다.



양성우는,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이 확정되고 나서, 서대문구치소에 갇힌 대학생 등 다른 긴급조치 위반자들과 집단으로 민주화와 유신철폐를 외친 ‘죄’로 청주교도소로 이감되고, 거기서 그는 다시 재판에 넘겨져 2년 징역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이후 양성우는 국제펜클럽,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등 나라 안팎 작가 단체들의 거센 항의와 석방 운동 끝에 감옥살이 3년째인 1979년에 제헌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8,268: 글자 수와 내용이 똑같은 공소장과 판결문


1978년의 리영희 선생 관련 재판은, 1975년 김지하 시인의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재판에서처럼 감옥 안의 피고인과 감옥 밖의 변호인, 지식인, 민주인사들이 긴밀히 소통·대처하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리 선생은, 자신의 지식과 언어, 의지로 재판을 받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선생은, 검찰의 공소사실을 반박하기 위해, 재판정에서 변소(辨訴)하기 위해, 또 상고이유서를 작성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부탁했다. 감옥 밖 인사들은 유인호 교수 등으로부터 농업 관련 통계 등 자료를 수집하여 감옥 안으로 전달했다. 여러 사람을 위험에 빠트릴지도 모를 이 ‘비밀작업’의 연결은 김정남이 맡았고, 함경도 북청 출신 교도관 전병용이 구치소 내 인맥을 동원하여 리 선생께 전했다. 김정남의 회고다.(김정남, ‘리영희 선생과의 50년’)



재판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재판부는 피고인(변호인) 측의 증인 신청도 거의 모두 선선히 받아들였다.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송건호, 가나안농군학교의 김기석 편집장이 증인으로 나와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언을 했다. …학계, 언론계, 문화계, 그리고 외국의 지성과 언론인 등 많은 사람이 연명으로 리영희 선생의 변소와 함께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진정서도 제출하였다. …법정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115호 법정에서 열렸는데, 어떤 때는 리영희 선생이 ‘재판’을 강의로 착각, “지난 시간에는…”으로 진술을 시작해서 법정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기대와 희망과는 달리 1심의 재판 결과는 허망했다. 판사는 “이 사건은 그 성격이 김지하 사건, 한승헌 사건과 같아서 대법원이 이미 유죄를 판결하고 있으므로, 그 판례에 따라 유죄를 선고하니 두 분은 앞으로 항소해서 잘되도록 하시라”는 ‘조언’을 하고는 리 선생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그런데 판사의 그 1심 판결문은 공소장에 씌어 있는 검사 이름을 지우고 그 공백에 판사 이름을 써넣은 것밖에는 글자 하나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리영희 선생은 대법원에 제출한 상고이유서에서 그 사실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검사의 기소장은 길이가 14매, 자수로서 8,268자의 장문입니다. …그런데 웃지 못할 일은 제1심 판결문의 ‘판결 이유’ 부분의 길이가 어쩌면 그렇게도 정확하게 14매, 자수로서 8,268자입니다. 십 수 회의 공판에서 7명의 변호인과 2명의 피고인이 변호하고, 6개월간의 법정투쟁에서 피고인 측이 자신에게 유리한 단 한 가지의 사실도 제시하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법정 안에 있는 무생물을 묘사하라 해도 검사와 판사의 글짓기는 길이, 표현, 자수가 꼭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판결 이유’는 검사의 기소장과 글자 하나, 구두점 하나, 말 순서 하나 틀림없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진실로 경이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8,268자의 그 복잡하고 많은 내용의 기소장을 한 자의 고침도 없이 제럭스 복사한 것입니다.



리영희 자신이 “내가 오십년 가까이 글을 써왔는데 나에게 가장 소중한 글이 뭐냐 돌이켜 볼때 바로 이 <상고이유서>라고 생각해(<대화>490면) 라고 아낀 <상고하는 이유>


어떤 이유와 배경에서 이 필화 사건이 시작되었고, 그리고 그 재판과정이 어떠했는지를 굳이 자세히 알 필요가 있겠는가? 1심 판결을 받고 리영희 선생이 감옥 안에서 한 일은, 검사의 기소장과 판사의 판결문의 글자 수를 세는 것이었다. 8,268! 기소장 8,268, 판결문 8,268은 이 사건의 본질을 명료하게 폭로하고 있다. 그 재판정에서 벌어졌던 검사, 판사, 변호인, 피고인, 증인들의 언설(言說)은 희극 속 광대들의 독백이 되었고, 시대의 아픔에 고뇌하고 행동했던 한 지식인의 비극은 이렇게 희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한 광대의 이름만은 기억해 두자. 판사 유경희!


1977년 12월 27일, 리영희 선생이 기소되던 날, 선생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리 선생은 바로 그날 검찰청에서 아내로부터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유족과 친지들은 장례를 오일장으로 정해놓고, 홍성우·황인철 변호사가 나서서 정부 요로에 리 선생이 장례식에 참례할 수 있도록 귀휴를 허용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상주 없이 어머니의 시신을 발인하던 날, 리 선생은 교도소에서 배식한 ‘가다밥’과 오경찬, 멀건 콩나물국 한 사발, 사과 한 알, 김지하가 몰래 전해준 알사탕 한 봉지를 감옥 마룻바닥에 펼쳐놓고 제사를 올렸다.


리영희 선생은 장례식 전에 배달되기를 염원하며 어머니를 추모하는 내용의 우편엽서를 집으로 보냈다. 이 우편엽서에는 광화문우체국의 12월 30일 자 소인이 찍혀 있었는데, 아마도 장례식이 지난 후에 배달된 것으로 보인다. 엽서에는 여기저기 선생의 눈물 자국이 번져 있었다.



어머님 영전에 바칩니다.


평소에 불효자식이더니 끝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자리에서 임종도 못 한 죄인이 되었으니 한만이 앞섭니다. 어디로 간다고 말씀도 드리지 못한 채 집을 나와, 지금 이곳 몸의 자유를 잃고 있는 그동안, 늘 어머니가 아들을 찾는 소리를 듣고, 몸부림을 치고만 있습니다. 좁은 방 안에 지금, 주어진 음식과 과일을 괴어놓고 멀리서 하루 세 번 어머니의 명복을 비오니 부디 극락 가셔서 먼저 가신 아버지를 만나 영원히 행복하옵소서.


죄 많은 불효자 영희 올림.



서대문구치소에서 리영희와 부인 윤영자의 접견기록 중
리영희(재 로 표기): 그래 기소는 안되었지만 이번에는 길어질것 같은데요. 어머니 잘 돌봐드려야겠어요
윤영자(면 으로 표기): 괜찮을것도 같은데요 모르겠어요 (왼쪽) (출처: 재단 제공)
서대문형무소의 감방에서 집필 특별허가를 얻어 어머니의 영전에 바친 엽서 (오른쪽) (출처: 재단 제공)


1978년 10월 말, 정연주 등 동아투위 해직 기자 10여 명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리영희 선생은 정연주 기자와 같은 사동에 갇혀 있어, 리 선생이 세면장에라도 갈라치면 꼭 정연주의 방 앞을 지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최소 하루 한 번은 안부 인사를 묻곤 했다. 정연주의 회고다.



내 방 앞에는 담당 교도관이 사용하는 조그만 의자와 책상이 하나 있었다.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아 기결수가 되면 머리를 깎게 되는데 바로 머리 깎는 자리가 내 방 앞 교도관 의자였다. 그날, 79년 1월 몹시도 춥던 날, 교도관 의자에 선생님이 앉아계셨고, 그리고 선생님의 머리카락이 깎이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목격하게 되었다. …선생님의 짙은 검은 머리카락이 속절없이 복도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는 순간, 가슴에 치밀어 오는 분노와 슬픔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슬기로운 감옥 생활


성종대는 1977년 6월, 성균관대 2학년 재학 중 유신반대 시위로 서대문구치소에 구속·수감 되었다. 어느 날, 성종대는 호송 버스에서 빨간 딱지를 앞가슴에 붙인 리영희 선생을 만났다.(당시 서대문구치소는, 긴급조치 위반범은 노란 딱지, 반공법 위반범은 빨간 딱지를 윗옷 앞에 붙여 관리했다) 성종대는 1심 재판 중이었고, 리 선생은 검찰 조사를 받고 있었다. 성종대는 대학에 입학해 선배들이 추천한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크게 깨친 터라, 의외의 장소에서 존경하는 그 저자를 만나니 신기하기도 하고, 흥분도 되었다고 한다.


리영희 선생은 하얀 한복 차림에, 수갑을 찬 손으로 성종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동승 교도관들의 저지로 “교수님, 건강은 괜찮으십니까?”라는 짧은 ‘인사’와 “자네들 고생하네”라는 짧은 ‘위로’ 외에 긴 이야기는 나눌 수 없었고, 리 선생은 내내 수갑을 찬 손으로 두툼한 서류 뭉치를 뒤적여 보고 있었다. 선생은 검찰 측의 주장을 반박, 반론, 또는 해명하는 논리를 명확히 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공부’하는 것 같았다. “논리 하나 문장 하나 허투루 대답하지 않겠다”는 선생의 말씀을 듣고, 성종대는 더욱 깊은 감탄과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서강대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1977년 11월의 유신반대 시위로 구속되었던 장정수(전 한겨레신문 기자)는 재판을 받고 기결수가 되어 광주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출옥했다. 그는 서대문구치소에 있을 때 처음 리영희 선생을 만났다고 한다. 장정수의 회고다.



1977년 말, 내가 처음 리영희 선생을 만난 것은 검찰행 호송 버스에서였다. 나는 공범 한승동, 김용진과 함께 검찰에 송치되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리 선생과 배기선(국민대)도 검찰에 송치되어 동행한 것이다, 선생은 호송 버스 안에서도 우리 학생들에게 “책을 열심히 읽 고,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 격려해 주셨다. 우리로서는 연세도 많고, 한 집안의 가장인 선생이 더 애틋하고 걱정스러웠는데, 그분은 매번 학생들 걱정이었다. 검찰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선생은 꼿꼿하게 앉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계셨다.


나는 1년 6개월 징역형이 확정되어 전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가, 거기에서 ‘서대문구치소 집단 유신반대 투쟁’ 사건으로 추가 기소되어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당시 광주교도소에는 전남대 송기숙 교수, 민청학련 이강철·김병곤, 장기수 권낙기 선생 등도 수감되어 있었는데, 어느날인가 리영희 선생이 광주교도소로 이감 오신다는 소식이 들렸다. 송기숙 교수는 1주일 전부터 리영희 선생이 계실 감방의 ‘뼁끼통(화장실)’을 청소하시는 등 광주교도소 수감자 모두가 리 선생을 ‘환영하는’ 분위기로 들떠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



1979년 2월 리영희 선생이 이감 왔을 즈음, 광주교도소의 터줏대감은 이강철이었다. 이강철은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1975년 2월 관련 학생들이 일괄 석방될 때 이현배·유인태·김효순 등과 함께 ‘대학을 졸업해 학생이 아니’라는 황당한 이유로 풀려나지 못했다. ‘민청학련사건의 인질’이었던 이현배와 유인태는 서대문구치소에서, 김효순과 이강철은 안양교도소에서 광주교도소로 이감을 왔다. 이후 이현배·유인태·김효순은 1978년 8.15 특사로 출옥하였으나, 이강철은 3년 징역을 더 살고 대구교도소에서 1981년에야 석방되었다. 이강철의 회고다.



광주교도소에는 비전향 장기수들을 수용하는 특사가 있었는데, 긴급조치 9호 위반자 등 양심수들도 특사에 함께 수용했다. 장기수들은 양심수에게 우호적이어서, 나는 특사 전체의 ‘소지(감옥에서 배식, 청소 등을 맡아 하는 기결수)’ 역할을 맡게 되었다. 리영희 선생이 광주교도소로 이감 올 무렵, 특사에는 송기숙 전남대 교수,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다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들어온 김병곤(서울대) 등이 있었다. 나는 특사 내이지만 비교적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어 양심수들의 편의를 많이 도울 수 있었다.


교도소 측과도 ‘투쟁’ 또는 ‘감옥 정치’로 ‘감옥 복지’를 쟁취해냈다. 감방문을 여닫는 키도 낮에는 내가 관리하고 있었고, 20분이었던 실외 운동도 1시간으로 늘렸다. 송기숙, 리영희 두 분에게는 연로하시다는 이유를 들어 오전 오후 각 1시간의 운동시간을 받아 냈다. 가끔은 어렵게 라디오 뉴스도 들을 수 있었고, 약주 좋아하시는 두 분께 ‘범칙’으로 소주도 확보해 목을 축이시게 했다. 나는 교도소에서는 귀하기 짝이 없는 볼펜과 종이도 구해 두 분께 드렸다. 송기숙 선생의 소설 『녹두장군』은 그때 거기서 얼개가 짜였다.


중앙정보부원이 교도소를 점검하는 날이면 이 모두를 깨끗이 ‘정리’하고 책을 읽는 체했 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광주교도소 특사는 일종의 해방구처럼 운영되었다. 양심수들의 끊임없는 투쟁이 큰 역할을 했고, 감옥 밖 가족들의 응원도 힘이 되었다. 그러나 호남 출신 교도관이 대부분인 교도소라는 점도 많이 작용했다. 교도소 측은 웬만한 요구는 들어주고, 규정에 어긋난 요구, 심지어 ‘범칙’도 못 본 척해 주었다. 내가 요구사항을 갖고 ‘싸움’을 시작하면, 김병곤이 교도소 측과 ‘협상’해 문제를 해결했다.



전향 파동


1970년대 중반 민청학련사건 관련자와 긴급조치 9호 위반 ‘양심수’들이 이감 오기 전까지의 광주교도소 특사는, 신인영, 박종린, 권낙기 등 동족상잔 이래 용공 혐의로 장기형을 받은 수인들을 격리 수용하는 곳이었는데, 가끔은 여수의 밀수 왕 허봉용, 서방파 우두머리 김태촌처럼 일반 사범들과 함께하기에는 부담되는 기결수들도 특사에 수용되었다.


권낙기는 1972년 2월, 소위 ‘통혁당(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1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대전교도소를 거쳐 1974년 광주교도소 특사로 옮겨 왔다. 권낙기는 광주교도소 시절, 끝없는 폭력, 협박, 회유를 받으며 전향할 것을 압박받았으나, 끝내 이를 거부해 1982년 형 종료로 출소하자 곧바로 ‘청주보안감호소’에 수용되었다. 결국, 권낙기는 10년 징역을 마치고 다시 8년을 보안감호소에서 갇혀 있다가 1989년에야 가족의 품에 돌아올 수 있었다.


리영희 선생이 광주교도소로 이감을 왔던 1979년 2월, 권낙기는 전향 공작에 시달리며 특사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징역 7년 차에 광주교도소 5년 차 ‘빵잽이’(수인들끼리 쓰는 죄수의 멸칭)로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리영희 선생이 배정받은 감방은 권낙기의 감방과 대각선으로 마주하고 있어서 두 사람은 ‘식구통’(감방 밖에서 밥이나 반찬, 또는 간단한 물건들을 감방문을 열지 않고도 넣을 수 있도록 정사각형으로 벽에 뚫어놓은 공간)을 통해 간단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장기수’라 하지만, 1946년생으로 나이가 어렸다. 대학생 사건인 민청학련의 이현배가 1945년생, 이강철이 1947년생, 유인태가 1948년생이었으니, 그들과 비슷한 나이에 산전수전 다 이겨내고 의젓하게 장기수 생활을 하고 있으니, 리 선생은 나를 기특하게 생각하셨다. 처음에는 내 나름의 유물변증법, 정치경제학 ‘학습’으로 대학교수라면 분명 인텔리의 한계가 있을 것이라 선입관을 가졌지만, 그에게서는 넘을 수 없는 지식에 깐깐하면서도 우직함이 몸에 배어있는 서민의 풍모가 바로 드러났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광주에 계시는 동안 리 선생으로부터 많이 깨우치고 대화를 나눴다.



1979년 10월 27일 아침, 박정희의 피살 소식을 들은 것도 리 선생의 관찰력과 직관력 덕분이었다. 리영희 선생은 운동장에서 오전 운동을 마치고 들어오자마자 식구통을 통해 권낙기에게 “박정희가 죽은 것 같다!”고 소리쳤다. 그 근거를 물으니 “운동하면서 건너편 교도소 본부 건물을 보았는데, 태극기가 조기로 걸려 있었어. 대통령 아니고는 관공서에 조기가 걸릴 리가 없지!” 했다. 권낙기가 놀라 외부 접촉이 잦은 병사에 알아보니 모두가 사실이었다. 지난밤, 박정희가 김재규의 권총에 맞아 ‘피살!’되었다는 것이다.


그다음 날인가, 특사의 모든 감방에 김치 한 봉지씩이 들어왔다. 리 선생이 ‘10.26 기념’으로 구매하여 나눠준 것이다. 특사의 장기수나 양심수 모두 조기 석방의 희망에 부풀었지만, 리 선생은 차분하고 냉정했다. 리 선생은 “박정희가 죽었다고 바로 석방되지는 않을 것이다. 민중의 역량이 모여 박정희가 끌려나가야 하는데, 이 사태 뒤에는 미국이 있다”고 단언했다. 리 선생의 ‘예지’대로 여느 혁명처럼 반체제 죄수들이 감옥 문을 쏟아져 나온 일도 없었고, 리 선생도 형을 다 채우고 1980년 1월 9일에야 감옥을 나왔다.


광주교도소의 전향 공작은 집요했다. 대부분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수감된 사람들과 이후 이승만·박정희 정권에 의해 구속된 혁신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공작을 폈지만, 간혹 양심수 중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이 적용된 사람에게도 전향 공작을 폈다. 나중에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권낙기는 광주교도소 측이 리 선생에게도 전향 공작을 했다고 주장했다.



어느 날 오후, 통방 중에 리 선생이 “오늘 교무과에 가서 전향서를 썼다”고 하셨다. 느닷없는 말씀에 어리둥절하고는,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그날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오전, 리 선생이 교무과를 다녀오면서 “평생 시험에서 떨어지기는 처음이네” 하셨다. 무슨 말인가 하니, 전향서를 써서 제출한 후 이를 심사받아 통과하면 ‘전향’된 것으로 간주하는데, 그 심사에서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리 선생이 쓴 ‘전향서’는 ‘반성하고 새사람이 되겠다’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박정희를 욕하고 규탄하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를 심사한 교무과 직원이 볼멘소리로 “많이 배웠다는 분이 그렇게 대통령 욕이나 하면 되냐?”고 투덜투덜하는 것을 들었다.



리영희 선생의 만기 석방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잡범 전과도 있는 30대 ‘막걸리반공법’ 기결수가 특사에 들어왔다. 그는 교무과의 끈질긴 권유에도 전향서를 쓰지 않았다. 어느 날 운동을 하다가 그가 리 선생에게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매달렸다. 리 선생은 1시간 운동시간에서 15분을 할애해 자기가 보고 있었던 영문법 책으로 그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다가 리영희 선생이 출옥할 날이 다가왔다. 그는 리 선생에게 자기가 배우던 영문법 책을 달라고 요청했는데, 특사 규정에 반입된 책은 그대로 갖고 나가게 되어 있어 남에게 줄 수가 없었다. 리 선생은 밖에 나가면 ‘바로’ 같은 문법책과 학습지를 보내주겠다고 달랬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한 약속이 지켜지는 일은 거의 없다. 리 선생이 출소하고 이제나저제나 기다렸지만, 영어 문법책은 오지 않아 ‘역시 그렇지!’ 체념하는 순간, 영문법 책과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는 영어 학습지 등 두둑한 소포 뭉치가 들어왔다.


국가기록원으로 부터 받은 리영희의 재소자신분기록. 리영희는 만기출소를 얼마 안 남긴 때 박정희가 죽었다는 얘기를 알렸다하여 곱징역이라는 징벌방에 20여일 처해진다.


민주 교도관고재윤


고재윤은 1973년에 교도관으로 임용되어 1981년 퇴직할 때까지 대부분 광주교도소의 특사(특별사동)에서 근무했다. 당시 특사에는 한국전쟁 시기부터 수용된 미전향 장기수가 다수여서 특사 근무자는 일반 교도관들보다 더 엄격하게 신원조회를 했던바, 고재윤의 신원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또한, 특사는 ‘감옥 안의 감옥’으로 여겨져 교도관들이 다소 기피하는 근무처였기 때문에 고재윤은 초임에 특사에 배치되었다가 결국은 퇴직 때까지 ‘말뚝 특사 담당’이 된 것이다. 고재윤의 회고다.



광주교도소의 특사 72개 감방에는 사상범이나 형기가 많은 기결수를 수용했다. 1974년 긴급조치 위반 사범들이 대거 이감을 오기 시작하자, 광주교도소 당국은 일반범들과의 접촉을 차단하기 위해 이들을 특사에 수용했다. 민청학련사건의 김효순·이강철을 필두로 이현배·유인태, 인혁당 사건의 이성재, 긴급조치 9호 위반의 고영근·강신석 목사, 함세웅 신부, 재일교포 간첩 사건의 유영수·유성삼·김정사·이철, 그리고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의 전남대 송기숙 교수, 『우상과 이성』 필화 사건의 리영희 선생 등이 특사를 거쳐 갔다. 일찍부터 특사에 있었던 권낙기 등 사상범들은 장기수였기 때문에 슬기롭게 처신하여 근무하기가 편했는데, 긴급조치 위반 사범들이 이감을 오자 끊임없이 ‘사건’이 터졌다.


툭하면 요구조건을 내걸고 집단으로 단식을 벌였다. 하루 10분이던 운동시간을 1시간으로 늘려달라, 식사시간에 함께 먹게 해달라는 일상의 요구를 넘어, 낮에는 사방 키를 이강철에게 맡겨(임치하여) 특사 내에서 자유로이 돌아다니게 해달라는 등 교도소 측으로서는 허용할 수 없는 요구도 있었다. 또한, 단식 등 집단행동이 일어나면 곧 밖으로 소식이 전해져 가족들이 내려와 야단법석이 벌어졌다. 그러나 당시 주병두 광주교도소장은 비교적 융통성을 갖고 대처했다. 교도소장 재량으로 운동시간도 1시간으로 늘려주었다. 내가 사방 키 임치 문제를 보고하자, “관에서 어떻게 그렇게 조치하라고 할 수 있는가? 담당이 알아서 해라”고 했다. 주 교도소장은 우리 ‘업계’에서는 인격자로 알려진 분이었다. 나는 그분의 말을, 나중에 문제가 되더라도 나를 보호해 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러하니 광주교도소 특사는 과거 사상범이 대부분이었던 때와는 달리 분위기가 확 풀려버렸다. 리영희 선생에게 차입되는 도서도 교무과에서 설렁설렁 허가 도장을 찍게 하여 모두 받아보시게 했다. 근무 날이면 나는 집에서 도시락을 싸 오곤 했는데, 아내에게 멸치볶음 등 반찬을 많이 넣으라고 하여 양심수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끔은 내 도시락의 쌀밥을 리 선생의 ‘가다밥’과 바꿔 먹기도 했다. 국가 공무원인, 더구나 범법자를 감시·관리하는 교도관인 내가 그런 ‘범칙’을 해도 되나, 주저도 하고 고민도 많았지만, 나는 그분들이 우리사회가 올바로 나아가도록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한정된 공간과 일정한 시간 안에서 가장 효율적인 운동은 탁구였다. 양심수 50여 명 모두가 탁구로 운동시간을 보냈다. 그중 몸이 날렵한 이강철이 탁구를 제일 잘 쳐 나와 겨루기도 했는데, 한 번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리영희 선생도 열심히 탁구를 하셨다. 당연히 탁구는 단식이든 복식이든 편을 짜 경기했으므로, 어느 날 리 선생에게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반타작’이라고 하셨다. 한참 젊은 학생들을 상대로 한 ‘반타작’이니, 리 선생의 탁구 실력은 꽤 양호한 편이라 할 수 있었다.


리영희 선생이 만기로 석방된 후인 1980년 5월 17일, 나는 그때까지도 석방되지 못한 이강철의 ‘비둘기’(감옥 안에서 비밀리에 밖으로 내보내는 쪽지)를 지참하고 화양동 리영희 선생 댁을 찾아갔다. 리 선생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는 택시로 보문동의 친구 집으로 가 잠을 잤다. 일요일인 이튿날, 친구와 등산 가는 길에 신문에서 리영희 선생이 합동수사본부에 체포된 사실을 확인했다. 그 도중에 우연히 황석영도 만났으나, 그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리영희 선생께 전달해드린 이강철의 ‘비둘기’가 압수되었을까 보아 무척 걱정되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생각하고 광주로 내려왔다.



법무부는 매년 12월 10일 ‘세계인권의 날’을 기려 ‘우수인권 법무·검찰 공무원’을 표창해 왔는데, 1979년 가을 광주교도소로 표창 교도관 1인을 추천하라는 공문을 보내왔다. 교도소 간부들이 회의를 열어 2인을 선발하고, 교도소장이 그중 1인을 찍어 법무부에 올리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주병두 교도소장은 간부 회의에서 추천한 두 사람의 이름을 찍찍 긋고는, 거기에 ‘고재윤’이라는 이름을 적어넣었다.


박정희 유신독재가 극한의 폭압으로 치닫던 그 시절, 유신독재의 첨병으로 숱한 양심수들을 구속하고, 기소하고, 형벌을 집행했던 그 법무부가, 감옥의 규율을 무시하고, 자신의 징계와 해직, 구속을 무릅쓰고 리영희 선생 등 광주교도소 특사 양심수들을 도왔던 한 말단 교도관을 ‘표창’한 이 아이러니! 역사가 하는 일이란 참 흥미롭기도 하다.


김학민 선생이 리영희 발병 후 받은 엽서 (출처: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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