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선생님과 나 / 김동춘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6-05-10 18:44
조회
519

리영희 선생님과 나



 


 


 





김동춘(성공회대 명예교수, 좋은세상연구소 대표)


1970년대에 대학을 다닌 주변의 동료 선후배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1977년 대학 입학 후 리영희 선생님의 글과 책을 읽었다. 당시는 학생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던 학생들도 교양 차원에서 리영희 선생님의 글을 많이 읽었지만, 리영희 선생의 글은 당시의 반독재 투쟁이나 학생운동 서클에 가담했던 대학생들에게 가장 큰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대 중반은 유신의 억압이 극에 달하기도 했지만, 다른 편으로는 한국에서 ‘제3세계’ 인식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아마 국제적인 데탕트의 분위기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산업화가 본격화되고 도시 빈민이나 노동자층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면서 1960년대 말까지 학생들이나 지식인들이 갖고 있었던 자유주의 분위기나 낭만 지향이 점차 사회과학적 문제의식으로 변화된 것도 리영희 선생의 저작이 널리 읽히게 된 하나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가끔씩 후배 학자들이나 외국인들로부터 왜 한국에서는 미국과 유럽에서 발생한 68혁명과 같은 것이 없었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그런 질문은 대체로 분단 한국이 처한 극우반공주의와 그리고 당시 한국이 경제적으로 후발국에 있었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질문이다. 일본에서까지 확산된 당시 청년들 주도의 68혁명, 특히 베트남전 반대운동은 기본적으로 서구 자본주의의 일정한 변화와 성숙, 그리고 대학이나 주류 보수 지식사회의 자기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한국은 후발 개발독재 국가이자 미국의 자유주의 정치 이데올로기의 직접 영향권 하에 있었기 때문에 서구 진보 지식인이나 학생들처럼 마오쩌둥의 중국도 호치민의 베트남도 낭만적 시각으로 바라볼 정신적 공간이 없었다.

1964년 이후 한국은 베트남 전쟁(월남전)에 수십만명의 군인을 파견했고, 학교나 마을에서 ‘월남 갔다 온’ 이웃집 아저씨들이 무용담 특히 한국 군인들이 공산주의 베트콩을 ‘동물’처럼 죽였다는 이야기(나중에 알고보니 사실상 한국군이 저지른 대량 학살)를 듣기도 했지만, 한국의 분단 상황과 베트남의 내전을 같은 국제정치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즉 ‘자유 진영’ 담론이 압도하던 박정희 군사정권 하의 한국에서 베트남 전쟁을 제대로 바라보거나 비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리영희 선생님이 <창작과 비평> 지면에 베트남 전쟁 관련 논문을 기고하고, 그것을 책으로 묶어서 <전환시대의 논리>를 펴냈을 때, 한국의 대학생들이 받은 충격은 정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를 비판했던 어떤 지식인들도 베트남 전쟁의 사례를 끌어와서 한국의 남북한 분단 상황, 냉전적 국제정치를 다르게 보자고 설파한 사람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섬나라’ 남한에서는 북한은 물론 남한 자체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리영희 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한국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허구적 ‘제1세계주의’에 일대 경종을 울린 저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리영희 선생의 평론들은 너무나 상식적인 접근이지만, ‘동토의 한국’에서는 상식이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었다.

이 이후에 나온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등의 저서도 학생들과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죽의 장막으로 알려진 사회주의 중국의 다른 모습을 드러낸 것도 상당히 위험한 시도였다.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에 반대하던 지식인과 청년들이 강고한 반공이데올로기 때문에 북한은 아예 거론할 수도 없었고, 중국에 대해서도 접근하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중국과 중국혁명을 소개하는 책자는 몇 권 있었지만, 그것은 약간의 학술적인 접근이었고, 사회주의 중국의 ‘다른 모습’을 거론하는 것은 금기에 속했다.

어쨌든 리영희 선생님은 한국의 분단 상황을 직접 거론하기 보다는 베트남과 중국을 끌어와서 한국이 처한 민족 현실, 그리고 냉전 국제정치 하에 처한 위상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촉구하였고, 그것은 군사정권의 강고한 반공이데올로기에 작지만 치명적인 균열을 일으킨 것이었다. 검사들의 기소장에 나타난 것처럼 공안당국은 그의 논문이나 논평이 당시의 베트남이나 중국의 실제 모습을 제대로 그려내기보다는 친중국, 친사회주의 지향을 은밀하게 드러내면서 젊은이들을 선동했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 식의 비판은 80년대 이후 공식 매체나 보수 지식인들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냉전체제가 허물어지고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이 시작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의 국제정치 인식이나 한국 현실 진단은 훨씬 더 진보적이고 선구적이었다.

1987년 민주화는 한국에서의 냉전 이데올로기의 도그마를 흔들었다. 정치적 민주화는 시민사회나 사회운동의 대폭발을 촉발했다. 그래서 1988년 이후 몇 년 동안 한국은 대학, 사회 각 영역, 그리고 노동현장에서 거의 전쟁과 유사한 폭력이 벌어졌다. 그런데 1989년 천안문 사태와 소련 동구 사회주의가 무너진 대충격이 발생했다. 그래서 한국의 진보적 학생 청년들이 막연하게 갖고 있던 사회주의에 대한 기대나 호기심이 크게 도전을 받게 되었다. 물론 당시 일부 반독재 투쟁에 투신한 한국 청년들이 친사회주의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한국 자본주의와 군사독재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것이 많았기 때문에 한국 사회 변혁은 이런 세계적 변화와 무관하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따라서 소련 동구 사회주의 실험, 그리고 중국 및 사회주의 일반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둘러싸고 운동진영 내에서 격렬한 논쟁이 진행되었다. 그와 동시에 정치 사회 각 영역에서 민주화가 진척되고 급진적인 사회운동 그룹의 활동이 가시화되자, 사회주의 붕괴라는 거대한 뒷배를 얻은 한국 보수언론과 기득권 세력은 진보적 지식인들에 대한 색깔 공세를 더욱 세차게 했다. 이런 조건에서 리영희 선생님의 중국론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1989년, 나는 역사문제연구소의 상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월간조선> 기자가 나를 찾아왔다. 대학 후배라고 하면서 나를 찾아온 이유는 리영희 선생님에 관한 생각을 듣자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나를 왜 인터뷰 대상으로 삼았는지는 알 수 없는데, 아마 내가 당시 리영희 선생님의 영향을 받는 세대의 소장 진보 학자로 알려졌기 때문에 내 발언을 통해서 리영희 선생님에 대한 사회적 존경 혹은 도덕적 위상을 무너뜨리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이 기자는 리영희 선생의 <8억인과의 대화> 등에 실린 중국 관련 평론 들을 문제 삼으면서 “리영희 선생의 글이 과연 사실에 부합하는가, 상당한 허점을 갖고 있지 않나”라고 거의 2시간 이상 꼬치꼬치 물으면서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당신들이 리영희를 까는 목적이 뭐냐? 누구나 자신이 쓴 평론이나 논문에서 사실을 틀리게 적시할 수도 있고, 논리에도 허점이 있을 수 있는데, 지금 리영희 선생의 평론을 난도질해서 밝히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고 소리 지르며 인터뷰를 중단했다.

순진했던 나는 그들이 그렇게 집요하게 리영희를 문제삼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지나고 보니 자신들이 보기에 지적 권위와 도덕성을 가진 운동진영의 지식인이나 지도자들의 허점을 까발리면서 민주화 세력이 실제로는 친북성향을 가지고 있는 ‘좌익’들이며, 그것은 민주화 운동 자체가 사실 사회주의 운동의 일환이라는 것을 들추어내서, 민주화 세력에게 큰 흠집을 내기 위한 음험한 정치적 기획이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곧 그것은 이미 민주화 이후 본격화된 조선일보의 ‘사상투쟁’의 일환이었고, 한국 수구세력의 위기감을 반영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아마 그가 취재한 내용, 나의 생각 일부가 이후 <월간조선>에 실렸겠지만, 나는 그것을 찾아보지 않았다. 이 무렵부터 나는 <조선일보>를 더 이상 보지 않았다. 그들이 집요하게 리영희 선생님을 물고 늘어진 정치적 이유를 명백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군사정권 시기는 공안기관이나 군대가 폭력적으로 반정부 세력을 진압했는데, 이게 민주화로 그런 보호막이 사라지자, <조선일보>가 반공체제 유지의 선봉장이 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당시 내가 겪었던 일련의 일들은 사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전 세계에서 발생한 현상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국의 반독재 민주화 세력 일반을 좌익, 혹은 친북 세력이라고 이데올로기적 흠집을 내면서 군사정권 혹은 반공자유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 무렵 리영희 선생님도 자신의 이론이나 사상, 특히 중국에 대한 일련의 평론에 대해 여러 가지 고민을 했을 것이다. 나는 월남자이자 군 장교 출신인 그가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평론 활동을 했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남한사회의 닫힌 이데올로기 지형을 참을 수 없어서 지적 자유를 외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다.

1991년인가 연대 장기원 기념관에서 열린 리영희 선생님의 자기반성적인 논문 발표 – 즉 인간의 이기주의적 속성에 대해 사회주의 사상이 제대로 천착하지 못한 점을 강조한 것으로 기억난다 – 자리에는 수많은 ‘운동권’ 젊은이들이 구름같이 몰려서 거의 설 자리도 없을 지경이었다. 나도 서서 그의 발표를 들었다. 당시 보수 매체에서는 리영희의 당시 발언에 대해 한국의 친사회주의적인 지식인의 자기반성이라고 그 발표회를 부각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한 지식인의 전향선언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리영희 선생님을 포함하여 한국의 민주화 운동 관련 청년들도 북한이나 중국 사회주의, 소련 동구 사회주의 체제를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도 없었고, 그럴 기회도 없었다. 단지 한국의 군사독재와 정치 경제체제에 대한 거부감이 오히려 그 반대편인 사회주의에 대한 우호적 감정으로 나갔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부모 세대인 리영희 선생님도 우리가 동시대인이었던 셈이다.

원래 나는 마르크스와 레닌도 좀 읽었고, 중국혁명에 대해서도 약간은 알고 있었으나 당시 운동진영의 주류라 할 수 있는 반미 민족해방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고, 사회주의에 대해 낭만적인 생각을 갖지는 않았기 때문에 리영희 선생의 발표가 그다지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의 부모들과 비슷한 연배인 리영희 선생님이 이런 점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았단 말인가 하는 생각까지도 가졌던 기억이 난다. 즉 사회주의가 붕괴했다고 해서 한국 자본주의 체제의 모든 모순이나 반공주의 지배체제가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었고, 한국의 지식인이나 사회운동 진영의 투쟁 과제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사회주의 이상을 바라보며 반독재 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았던가?

내가 리영희 선생님을 글과 책으로만 접하거나 먼발치에서만 보다가 직접 대면하게 된 것은 1995년 <역사비평> 대담에서였다. 당시 역사비평은 ‘나의 학문 나의 인생’이라는 난을 만들어서 원로 학자들의 이력과 학문적 업적과 고민들을 소개하였다. 주로 편집위원들이나 해당 분야 전공자들이 인터뷰어로 참가했다. 리영희 선생도 당연히 대상이 되었는데 누가 적당한 인터뷰어인지 좀 결정하기 어려워 서중석 편집장도 고심하였다. 그러다가 서중석 선생님이 결국 나보고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리영희 선생님은 신방과 소속이고 기자 출신인데다, 주로 국제정치 쪽 글을 써왔기 때문에 이 분야를 모두 포괄하는 인터뷰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지식인으로서 그의 활동을 부각한다면 언론, 국제정치 분야의 전문가보다는 지식인 일반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적절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나를 지목한 것 같다.

내가 리영희 선생님을 인터뷰하기에는 좀 역부족이라 속으로 생각했지만, 한번 해보겠다고 답했다. 그래서 그때가 리영희 선생님이 출간한 책과 글을 거의 다 읽으면서 인터뷰 준비를 했다. 특히 중국 쪽에 대해서는 내가 별로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특별히 이런 저런 자료들을 읽으면서 인터뷰 준비를 했다. 그것이 바로 <역사비평> 1995년 여름호에 실린 “'나의 학문 나의 인생: 리영희 - 냉전 이데올로기의 우상에 맞선 이성의 필봉”이다. 산본의 한양아파트 찾아가서 몇 시간 동안 대담을 했는데 사실 내가 오히려 배우는 것이 많았다. 이 인터뷰는 당시 지식인들에게 많이 읽혔고, 강준만 교수는 이후 <인물과 사상>에서 나 개인에 대한 서술을 하면서 이 인터뷰의 주요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인터뷰 석상에서 나는 여러 가지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많이 던졌다. 그러나 그는 성내지 않고 매우 성실하고 솔직하게 답변했다. 그가 군사정권 시절 그렇게 금기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점을 궁금하게 생각했다. 월남자인 그는 남한에서 자라서 군사정권에 대해 거의 입도 벙긋하지 못했던 나의 부모 세대 사람들과는 매우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래서 그의 용기는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죽고 죽이는 ‘톱질 학살’을 처절하게 겪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했다. 즉 월남자들은 흔히 맹목적 반공주의라고 알고 있지만, 리영희 선생처럼 향우회 등에 한 번도 나가지 않는 사람, 남한 사람들보다 유교적 권위주의에 덜 물들어 있고, 반공주의의 공포에 덜 찌들어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점들이 나로서는 다시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후 나는 새 책을 출간할 때마다 리영희 선생님께 보내드렸고, 리영희 선생님은 번번이 친절한 답신을 보내왔다. 답신에는 반드시 약간의 소감과 소회를 적었다. 나도 그런 성의에 느낀 바가 많아서 한동안 저자로부터 책을 선물받으면 반드시 편지나 엽서를 보냈고, 이메일이 활성화된 이후에는 메일로라도 책을 잘 받았다고 답을 보냈다.

2000년 제주인권회의에서 리영희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당시 조용환 변호사가 대한항공 등의 후원을 받아서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이던 1998년부터 매년 제주에서 여러 전문가들을 초청해서 인권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2000년 인권회의가 나에게 매우 특별했던 이유는 내가 주최 측에 요청해서 원래 프로그램에는 없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 특별 세션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내가 기조 발제를 했다. 특별히 이 모임에는 문경의 채의진 유족, 함평의 정근욱 유족도 참석하도록 권유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 일반을 공론장에 처음으로 올린 역사적 현장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앞자리에 앉아 계셨던 리영희 선생님은 내 발표를 매우 듣고 난 이후 조용히 내게 와서 소감을 전했다. “사람들이 심각하고 조용하게 듣고 있었고,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는 칭찬을 했다. 그런데 본인이 당시 11사단 통역장교로 일했지만 미군들과 함께 다녔기 때문에 거창사건 등 학살에 대해서는 전혀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마 이런 학살이 진행될 당시 군인으로 근무한 이력 때문에 계속 내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

나는 그의 기억과 진술이 진실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는 그가 자서전에서 전쟁기 군 비리를 폭로하고 한국군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에 비추어 볼 때 당시 민간인 학살이 이렇게 자행된 사실을 거의 몰랐을까에 대해 약간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그것은 아마도 전쟁을 겪은 리영희 선생 세대가 어느 정도 알면서도 건드리기가 가장 부담스러운 주제여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여튼 이후 내가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운동을 하고 이후 진실화해위원회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조사 활동을 하면서도 몇 번 더 만났지만, 이 일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본인이 당시 장교로 근무했던 사실 때문에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거나 입장을 갖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2000년 이후에는 자주 뵐 일이 없었다, 리영희 선생님도 몸이 불편하시고 공적 활동을 거의 하지 않으셨다. 내가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활동을 하고 진화위에 들어가서 가끔씩 안부 연락을 드렸다. 그리고 정무직 공무원으로 여러 원로분들의 자문을 얻을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 관련 이야기를 듣고, 점심이라도 대접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비서를 대동해서 산본에 몇 번 들렸다. 그래서 산본역 근처 인도 음식점, 그리고 안산 쪽으로 가다가 있는 큰 오리집 등에서 식사를 몇 번 한 기억이 난다.

2006년 무렵 리영희 전집을 만드는 모임이 만들어져, 나도 편집위원의 한 사람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작업에서 내가 한 역할은 별로 없었다. 그런 작업을 한 한길사에 대해서는 매우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진행 과정을 보면서 약간의 아쉬움도 있었다. 리영희 회고록 등에서 기록된 본인의 활동, 예를 들면 4.19 전후 합동통신 기자로서 쓴 기사나 이후 백승욱 교수가 탐문한 적도 있지만, <조선일보>에서 실명을 적지 않은 베트남전 관련 기사 등을 일일이 검색 확인하여 전체 리영희 관련 글을 찾아내는 작업을 함께 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외국의 예를 볼 때 한 지식인의 전집을 내려면 그런 정도의 정밀한 작업은 반드시 필요한 데 그런 공을 들이지 않은 채 서둘러 전집 출간을 한 인상이 있었다. 물론 주최 측에서 충분한 예산이나 인력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은 한다.

어쨌든 나는 리영희 선생을 용기 있는 지식인으로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문필가의 한 사람으로 본다, 그의 글은 힘이 있고, 정밀하다. 기자로서의 엄밀함과 학자로서의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열정이 글에 녹아 있다. 지식인으로서 리영희 선생님에 대한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논평은 이후에 본격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식의 흠집내기나, 다른 편의 일방적 숭배나 찬양도 배격하고, 분단된 한국에서 살았던 한 지식인의 삶의 궤적으로 충실하게 정리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리영희가 김동춘에게 보내는 서신(출처: 필자 제공) → 서신 전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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