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약이라고 슬픔은 조금씩 엷어졌지만, 가끔 뵙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선생님, 시계추가 저쪽으로 가더니 안 오네요. 언제나 이쪽으로 다시 올까요?”라고 질문도 하고 싶다.

든든하게 기댈 수 있었던 스승은 떠나시고, 긴 겨울은 추웠다.

그 뒷모습에서 리영희의 자존심을 느꼈다 / 김선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1-18 04:32
조회
2263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1년 전 남편과 병문안을 갔다. 복수가 차서 배가 불렀다. 나는 부른 배를 만지면서 "언제 만삭이 되셨어요? 이제 해산하세요"했더니 선생님은 "왜 남의 남자 배를 주무르느냐" 하고, 사모님은 "당신이 남자에요? 환자지" 이렇게 농담을 주고받다가 북한의 한 몰락한 인물에 관해 얘기했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그래도 나는 그렇게 자존심 있는 인간이 좋다"고 했다. 나는 이것을 유언으로 간직하고 있다.


선생님은 젊었을 때 까칠했고 여자후배 언론인들을 높게 치지 않아서 가깝게 가지 못했다. 그런데 4-5년 전 "나 리영희올시다" 라며 전화가 왔다. 그날 아침 신문에 실린 내 칼럼을 칭찬해주기 위한 거였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자존심을 지키고 살아야 한다'는 취지의 칼럼이었다. 전화를 받고' 아 선생님과 내가 서로 코드가 맞는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해직됐을 때 선생님은 3남매의 가장이었지만 글을 팔지 않았다. 전집을 들고 책외판으로 나섰다. 시청 앞 지하도가 가파른데 그것을 들고 다녔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얼어붙은 지하도를 오르내렸다. 이것이 선생의 자존심이었다.


또 기억나는게 있다. DJ,노무현정부 때였다. 산본에서 전철을 타고 언론재단 앞에서 열리는 집회나 모임에 참석했다. 당시 모임이 끝나면 저녁 9시,10시였다. 당시 장관들이나 의원들 중에 후배들이 많았다. 그들은 기사가 딸린 차를 타고 갔다.하지만 선생님은 혼자 절둑절둑 지팡이를 짚고 지하도로 내려갔다. 그 뒷모습에서 선생님의 자존심을 느꼈다.


김선주 언론인(조선일보 해직, 전 한겨레신문 논설주간, 리영희재단 이사)


※ 2011년 11월 30일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회관에서 열린 '리영희 선생 1주기 시민추도의 밤' 행사 중 김선주 선생 발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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