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역사갈등과 리영희 / 김효순 (2019년 10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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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1-01-06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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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

한일 역사갈등과 리영희



김효순  (언론인 / 전 한겨레 편집인 / <조국이 버린 사람들>, <간도특설대> 저자)


1960년대부터 30여년간 한국의 지성계에서 리영희 선생만큼 현실의 문제를 붙잡고 치열하게 싸운 이는 드물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오랜 기간 타부의 대상이었던 베트남전쟁과 중국혁명을 정면으로 다뤄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단선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베트남전쟁과 중국혁명에 관한 저술 활동에 다소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위험성과 우리 사회 내부의 친일파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글도 많이 남겼다.


조선일보 외신부장으로 재직하던 1966년 9월 방한중인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를 인터뷰한 기사가 상징적이다. 기시는 패전후 A급전범 혐의로 스가모형무소에 3년여 수감됐다가 미국의 비호로 기소되지 않고 풀려나 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현 일본 총리 아베 신조는 그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기시를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공언한다. 리영희는 기시와의 인터뷰를 통해 일본 자위대가 1963년 한반도의 유사시를 상정해 일본군이 주일미군을 따라 한반도로 출동하는 극비 도상훈련인 ‘미쓰야 군사계획’을 폭로했다. 북한의 붕괴를 포함한 한반도의 유사를 대비하는 자위대의 훈련은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라는 명분 아래 형태를 달리해 계속되고 있다.


일제의 고위 장성이었다가 패전후 반전평화운동에 앞장섰던 엔도 사부로란 일본인이 있다.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프랑스 육군대학에서 수학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는 항공사관학교 교장, 군수성 항공병기총국 장관을 지냈다. 전후 향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각성한’ 그는 군비재무장론자들을 비판하고 호헌운동, 일·중평화운동에 적극 참여해 옛 전우들로부터 ‘붉은 장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가 1956년 헌법옹호국민연합 대표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해 마오저둥을 접견했을 때의 일이다. 그가 두 번 다시 중국과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고 과거의 전쟁행위를 사죄하자, 마오저둥은 “사죄할 필요 없다. 당신들 일본군은 우리의 교사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들은 이 전쟁에서 중국 국민을 교육해주어서 흩어진 모래 같았던 중국 국민을 단결시킬 수가 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마도 사회주의국가의 최고통치자였으니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경우는 전혀 다르지만 아베 총리는 적어도 일본 지배층의 사고가 예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한국인들에게 다시 상기시켜주었다. 전후 일본은 단 한 사람의 전범도 자기 손으로 처벌한 적이 없다. 1955년 자민당이 출범한 이래 수년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정권교체가 없는 나라다. 일본 정부는 전후 미국의 배려로 전후배상을 거의 하지 않았고, 하더라도 헐값으로 때웠다. 중국은 1972년 일본과 수교를 하면서 ‘일본 인민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아예 배상요구를 하지도 않았다. 일본 사법부는 식민통치나 침략을 당한 아시아의 피해자들이 제기한 피해배상소송을 대부분 각하해버렸다. 일본 사법부가 양식 있는 판결을 했다면 한국인 피해자들이 대법원에 제소하는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일본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매도하고 있으니 기가 찰 판이다.


아베가 걸어온 싸움은 쉽게 결판이 나지 않을 것이다. 설사 봉합이 되더라도 근본적 해결은 요원하다고 봐야 한다. 리영희는 수십년 전에 우리 내부의 친일파 문제를 끈질기게 거론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위에 힘들게 민주화를 쟁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처에 토착 친일파가 우글거리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안팎의 후안무치한 수구세력과 단호히 맞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동시에 아베 정권과 일본 시민사회를 분리해서 슬기롭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온라인은 우리로 치면 일베 같은 극우세력이 장악하고 있다. 만일 한국의 인터넷 광장이 일베의 주장으로 도배돼 있다면 얼마나 숨이 막힐 것인가. 그런 상황에서 의연하게 행동하고 있는 일본의 깨어 있는 시민들과 어떻게 연대하는 게 좋은지 각자의 위치에서 고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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