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의 현재적 의미 / 박우정 (2013년 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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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3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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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신 지 2년이 지나도록 그 분에 대한 학문적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물론 그동안 김삼웅의 <리영희 평전>과 김동춘 교수 등의 에세이적 글들이 발표됐지만 리 선생에 관한 본격적인 평가 작업은 거의 없었던 듯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리선생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강연회가 최영묵 교수 등 그의 제자들에 의해 마련된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학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어서 리 선생에 대한 학문적 평가 작업은 학자들에게 맡기고 기자 출신의 한 지식인으로서 리영희의 현재적 의미에 대해 주목하고자 합니다. 리영희의 현재적 의미는 곧 "리영희의 정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리영희 선생이 생전에 남긴 방대한 지적 작업의 결과물에 대한 학문적 평가에 못지않게 그러한 지적 작업을 추동한 근본적인 '정신'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은 리영희의 현재적 의미를 성찰하는데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리영희 선생의 지적 작업을 관통한 것은 투철한 기자정신과 시대의 도그마를 온몸으로 거부·비판하는 지식인의 사명감이었다고 봅니다. 리선생은 현직 기자로 활동할 때는 물론이고 해직돼 교수가 된 이후의 저술활동에서도 일관되게 기자정신에 충실했습니다. 리선생은 길지 않은 현역기자 시절에 비범한 특종기사를 많이 썼습니다. 또 언론사에서 해직돼 교수가 된 뒤 발표한 모든 글들이 딱딱한 관념이 아니라 생생한 사실들(fact)과 그 사실들의 합리적 해석에 기초해 치밀하게 작성되었다는 사실도 이러한 기자정신을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리영희 선생의 지적인 작업이 한 시대에 막강한 울림을 일으킨 데는 이러한 투철한 기자정신보다 한 차원 높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의식(감)이 치열했기에 가능했습니다. 리 선생은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외면하거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던 냉전시대의 도그마들과 정면으로 대결했고 그 도그마적 '우상들'을 가차 없이 파괴하고 '진실'을 드러내려 했습니다. 베트남전쟁, 중국, 남북문제 등에 대한 지배적인 담론이 바로 리선생의 비판대상이 된 우상들이었습니다. 이 우상파괴작업은 당시 냉전의식에 갇혀있던 학생 지식인들에게는 강력한 사상적 해방으로 이끈 반면 냉전수구세력들에게는 자신의 사상적·체제적 기반을 위협하는 위험하고 불온한 범죄로 비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리선생의 문제적 저작들이 나올 때마다 권력의 사나운 탄압이 뒤따랐고 리선생은 해직과 투옥의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리 선생 자신도 남북이 날카롭게 대치하고 혹독한 냉전사상이 지배하는 한국에서 그러한 우상파괴작업이 어떤 수난을 불러올지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지적인 작업을 한평생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는 것, 바로 이것이 '리영희 정신', 즉 투철한 기자정신과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치열한 사명감이 탁월하게 결합된 리영희 정신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난과 핍박을 무릅쓴 우상파괴의 실천적 지적작업 그 자체가 사상·양심의 자유와 언론·표현의 자유의 지평을 확대하는데 크게 기여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오늘의 상황 역시 지식인들에게 이러한 헌신적인 '리영희 정신'을 배우고 실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것이 바로 리영희의 '현재적 의미'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려 봅니다.

 

"내가 종교처럼 숭앙하는 것은 국가나 애국이 아니라 진실이야!" 지금은 너무나 유명한 리 선생의 이 말씀은 바로 '리영희 정신'을 스스로 정의한 경구가 아닐까요?

 

- 박우정 (리영희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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