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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리영희재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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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토론회] 북한? 조선? 뭐라고 불러야 할까?｜2026.06.23]]></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1014]]></link>
			<description><![CDATA[<p><iframe title="YouTube video player" src="https://www.youtube.com/embed/ZUGfYrbojAg?si=U7iTZzArC69BqZcm" width="560" height="315"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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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18 Jul 2026 12:25:0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28"><![CDATA[유튜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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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뉴스레터 제50호]]></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1013]]></link>
			<description><![CDATA[<p><iframe src="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4HcTccw2zbzu4dlLvyqfP3FjtJ8rgZw" width="100%" height="1500" allowfullscreen></iframe></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at, 18 Jul 2026 11:15:3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27"><![CDATA[뉴스레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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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북한의 자신감과 대내외 경제전략의 변화 / 최장호]]></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1012]]></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2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trong>북한의 자신감과 대내외 경제전략의 변화</strong> <br /></span><span style="font-size:2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 우리가 마주한 도전과 과제 </span></span></p>
<p><img class="alignright size-medium wp-image-5297"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7/%EC%B5%9C%EC%9E%A5%ED%98%B8_%EC%82%AC%EC%A7%842-248x300.jpg" alt="" width="248" height="300" /></p>
<p> </p>
<p> </p>
<p> </p>
<p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font-size:17px;color:#333333;"><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font-size:17px;"><br /><br /><br />최장호(대외경제정책연구원 한반도국제협력팀장)</span></span></span></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trong><br /></strong>2026년 북한은 제9차 당대회(2월), 최고인민회의(3월), 전원회의(6월)를 연이어 개최하였다. 당대회에서는 사회주의 전면적 발전을 위해 새로운 5개년 경제계획(2026~2030)을 확정하고 김정은 위원장이 천명한 ‘2035년 사회주의 강국 건설 실현’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재확인하였다. 최고인민회의에서는 헌법에 두 국가론을 명시하고 대남·대외 강경노선을 공식화하는 한편, 정부의 재정 여력이 제한적임을 인정하였는데, 이는 최근 대대적인 국책사업이 추진되면서 자금 소요가 많음을 보여준다. 전원회의에서는 핵무력 강화와 핵보유국 지위의 행사를 천명하고, 한국을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재확인하면서 남부국경 요새화 완결을 지시하였다. 경제 분야에서는 경제 안정을 공고화하고 점진적·질적 발전을 도모하며, 군사 분야에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국-이란 전쟁 후 핵 개발 일변도의 정책을 바꾸어 핵-재래식 무기의 병진노선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br /><br />이런 일련의 변화를 한마디로 ‘자신감’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외관계가 안정되고 경제가 바닥을 벗어났다는 판단, 그리고 핵 능력이 불가역적 수준에 도달하였다는 인식이 그 기저에 놓여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이 이러한 자신감을 갖게 된 배경과 그것이 대내외 정책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strong><br /><br /><br />러시아에 대한 군수협력의 효과</strong> <br /><br />북한이 갖는 자신감의 출발점은 러시아와의 군수협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북한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군수물자를 지원하고 병력을 파병하였으며, 그 대가로 유사시 러시아의 한반도 개입 가능성을 담은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조약'을 체결하였다. 매년 러시아와 북한의 정상이 정상회담을 하면서 협력을 공고히 하고 있다. 또한 러시아는 유엔 대북제재를 사실상 무력화하고 북한의 핵 보유를 기정사실로 만드는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북한으로서는 드론 중심의 현대전을 경험하고 자국 무기의 실전 성능을 검증하는 기회도 확보하였다. 북한이 안보의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br /><br />군수협력의 효과는 민간 경제로도 확산되고 있다. 2025년 4분기부터 러시아의 대북 지원이 민간 영역으로 파급되면서 북한 주민들의 구매력이 개선되는 듯한 조짐이 관찰되고 있다. 통상 40% 수준이던 소비재 수입 비중이 2026년 1~4월에는 47.2%로 상승하였다. 대두유, 가금류, 조제식품, 귤 등 상대적으로 고가인 품목의 수입이 증가하였다는 점에서 단순한 물량 확대가 아닌 소비 수준 자체의 변화로 해석된다. <br /><br />북한과 러시아는 친선의 상징인 두만강 하구에 자동차 교량의 완공을 목전에 두고 있으며, 러시아는 원산-갈마 지구의 병원 건설을 지원하고 있다. 다수의 전문가들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양측의 관계가 소원해질 것이라고 보았지만, 전쟁 종식 후 노동자 협력을 중심으로 한 재건 동맹으로 변화, 동해 석유 탐사와 희토류 개발을 매개로 한 자원개발협력 관계로의 변화를 시도하면서 북한과 러시아는 지속가능한 군사적·경제적 협력관계의 기반을 마련하려고 애쓰고 있다.<br /><br /><strong><br />중국과의 관계도 개선</strong> <br /><br />중국과의 관계도 북한에게 우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2025년 중순까지 중국은 북한과의 외교·정치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도 유엔 대북제재를 준수한다는 전략적 거리 두기를 하였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 북·러 관계가 급속히 강화되고 북·미 대화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이른바 'China Passing'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급기야 2025년 9월 북·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중국은 대북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였으며, 2026년 6월 시진핑 주석의 방북은 그 흐름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2026년 7월에는 박태성 내각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북한의 정부 대표단이 중국 텐진시의 자원순환집단유한공사 녹색저탄소 순환경제 시범기지를 방문했다. 북한의 지방 공업 공장들이 만성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원료 부족 문제를 재자원화 기술과 설비로 풀어보려는 조치로 이해된다. 중국에게는 제재에 저촉되지 않는 새로운 협력 분야이고, 북한에게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가능하게 해주는 중요 협력 분야이다. <br /><br />중국 중앙정부는 여전히 유엔 대북제재 준수를 공식 입장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지방정부 차원에서는 제재를 유연하게 해석하며 북한과의 경제협력 확대를 묵인하는 양상이 관찰된다. 팀내 북한 연구자는 주목할 만한 변화로 2026년 3월부터 텅스텐이 북한의 대중 수출 1위 품목으로 부상하였다는 점을 꼽았다. 텅스텐은 중국이 전략광물로 지정하여 국영기업만이 수출입할 수 있는 품목이다. 중국 내 생산이 충분함에도 북한으로부터 수입을 시작하였다는 것은, 중국 국영기업과 북한 간의 공식적 경제협력이 비공식적으로 재개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북한은 러시아와의 협력 강화를 지렛대 삼아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확보해가고 있다.<br /><br /><br /><strong>주민의 구매력 상승과 국가 통제 강화</strong> <br /><br />대내 경제 여건도 북한 당국에 일정한 자신감을 부여하고 있다. 북한 경제는 2022년 바닥을 찍은 이후 2025년까지 플러스 성장을 이어왔는데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2026년에도 이 흐름이 유지될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 당국은 이러한 회복세를 바탕으로 주민들의 구매력을 점진적으로 높이려고 2023년 10월부터 기업소 임금을 20~40배 인상하기 시작하였다. 이 조치는 2002년 이후 20년 만에 이뤄진 것이다. 그동안은 국영기업 노동자의 급여가 2,300원 수준에 머물던 데 반해 시장의 곡물 가격은 5,500원/kg(임금의 2.4배)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을 산업 부문 근로자의 임금을 2,300원에서 5만원으로, 특정 부문과 지역에서는 10만원으로 인상했다. 그 영향으로 2024년 2분기부터 곡물 가격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2025년에는 폭등하기 시작했다. DailyNK에 따르면 2023년 5,595원/kg 수준이던 곡물 가격이 2024년 6,273원/kg으로 전년 대비 12.1% 상승하였으며, 2025년 15,361원/kg(임금의 0.3배)으로 144.9% 상승하였다. 임금 인상 조치는 물가 상승과 변동성 확대라는 또 다른 문제를 초래하였지만, 주민의 생활을 어느 정도 개선한 것으로 판단된다. <br /><br />동시에 경제 전반에 대한 국가 통제도 강화하고 있다. 북한은 전통적으로 상품유통을 사회주의 발전과 함께 축소되어야 할 영역으로 간주하였으나, 2021년 상업법 개정을 통해 '상품유통'을 사회적 소유의 대상으로 재 정의하였다. 이후 양곡과 외환 유통에 대한 국가 독점을 단계적으로 완성하고, 민간 시장(장마당)을 억제하면서 국영상점을 통한 유통망을 확대하고 있다. 북한 주민의 국영상점 이용을 독려하려고 수입품도 가급적 국영상점을 통해 유통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한편에서는 지하경제의 양성화, 즉 비공식 경제의 공식화로 볼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경제에 대한 국가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수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br /><br /><br /><strong>대규모 국책사업 통한 경기 부양</strong> <br /><br />대규모 국책사업도 경기 부양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농촌과 도시의 살림집 건설, 그리고 지방발전 20×10정책이 대표적이다. 살림집을 건설한다면서 평양과 전국 각지에 수십만 호의 집을 새롭게 건설하였다. 또, 지방발전 20×10정책은 매년 20개의 경공업 공장을 10년에 걸쳐 건설하겠다는 구상으로 2025년 하반기부터는 약국·봉사소(소매점)·문화시설을 동일 단지에 종합 개발하는 방식으로 확대되었다. 과거 북한 당국이 경제정책을 발표하고도 부분적으로만 실행하거나 수년 내에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과 달리 이들 사업은 비교적 일관성 있게 추진되며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보인다.</span></span></span></span></span></p>
<p>[caption id="attachment_5299" align="aligncenter" width="720"]<img class="wp-image-5299 size-full"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7/20X10%EC%A0%95%EC%B1%85.png" alt="" width="720" height="511" /> 북한 '지방발전 20×10 정책' 선전화(출처: 38north)[/captio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이처럼 대외 여건의 개선과 내부 경제의 완만한 회복이 맞물리는 상황에서 북한은 2019년 하노이 회담 실패의 경험처럼 외부의 지원이나 협상에 의존하기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안보와 경제를 보장한다는 자신감을 굳혀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자신감은 대남·대미 정책에도 직접적으로 반영된다. 북한은 한국을 대화의 상대가 아닌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공식화하고 있다. 협상과 지원에 기대어 경제적 번영을 모색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는 남한을 자신감에 기반한 정책 추진의 장애물로 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헌법에 명시된 두 국가론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이러한 전략적 판단이 제도화된 결과로 읽힌다. 미국과도 비핵화 협상보다는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는 방식으로 협상의 의제를 바꾸고 있다.<br /><br /><br /><strong>폐쇄성 강화로 장기 발전할지 의문</strong> <br /><br />그렇다면 북한의 자신감은 지속 가능한가. 몇 가지 점에서 유보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선 규모의 문제다. 북한 경제는 회복세를 보이고 있으나, 그 규모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캄보디아나 베트남에 비해 부족한 수준이다. 북한이 UN 대북제재 강화(2016~17년)와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절명의 위기를 버텨낸 것은 사실이나 다른 나라에 비해서 현재의 회복 수준은 충분하지 않다. 경제 규모도 남한의 약 60분의 1, 즉 1.7%에 불과하다. 또한 북한이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국책사업을 통한 경기 부양도 탄탄한 재정이 지속될 때만 가능하다는 한계가 있다. 최고인민회의에서 재정 여력이 제한적이라고 공개 인정한 사실은 이 한계를 북한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br /><br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책 방향이다. 북한은 유리해진 대외 여건을 경제 구조 개선에 활용하는 대신, 유통과 생산 전반에 대한 국가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자급자족과 자력갱생의 강조, 민간 시장의 억제, 국영 유통망의 확대는 과거에도 수차례 시도된 바 있으나, 그 결과는 생산성 저하와 자원 배분의 왜곡으로 귀결된 경우가 많았다. 대외 여건이 호전되자 오히려 폐쇄성을 강화하는 이러한 경향이 과거의 경로를 반복하는 것은 아닌지 주목해야 한다. <br /><br />살림집 건설이나 지방발전 20×10정책처럼 주민 생활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사업들도 일관성 있게 추진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나, 구조적 개혁 없이 재정 투입만으로 지속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북한 경제의 회복력이 여전히 취약한 상황에서 유리해진 대외 여건을 지속 가능한 성장의 기반으로 전환하기보다 폐쇄적인 사회경제 구조를 강화하는 데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 북한이 가진 자신감은 정부의 재정 여건이 악화하면 유지될 수 없는 구조를 하고 있다. 경제 회복이 둔화하고 정부의 재정 구조가 악화하면 더 큰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 <br /><br />한편, 북한이 현재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국을 적대시하고 대화를 거부하는 방향을 선택하고 있으나, 그 자신감의 기반이 구조적으로 취약하다면 이는 재고되어야 할 부분이다. 한반도의 지속 가능한 평화는 대결과 단절이 아니라 대화를 통한 상호 관여에서 모색될 수밖에 없다. 북한이 현재의 자신감을 대화 거부의 근거로 삼기보다 안정적인 발전의 동력으로 전환할 수 있을지, 그리고 한국을 적대의 대상이 아닌 대화의 상대로 인식할 수 있을지가 향후 한반도 정세의 향방을 가르는 관건이 될 것이다.</span></span></span></span></span></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17 Jul 2026 20:16:3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11"><![CDATA[리영희다시읽기]]></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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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lt;대화&gt;와 ‘대화’하다 / 노혜경]]></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1011]]></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2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리영희의 책과 나</span><strong><span style="font-size:2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r />&lt;대화&gt;와 ‘대화’하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right;"><img class="alignright size-medium wp-image-5295"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7/%EB%85%B8%ED%98%9C%EA%B2%BD_%EC%82%AC%EC%A7%84-300x201.jpg" alt="" width="300" height="201" /></p>
<p> </p>
<p> </p>
<p> </p>
<p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font-size:17px;color:#333333;"><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노혜경 시인</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김종철 선생으로부터 ‘리영희와 나’ 라는 주제로 글을 쓰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죄송하게도 극구 사양을 했다. 내가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br /><br /></span></span></span><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나는 동시대의 어른인 리영희 선생을 가까이서 2005년이던가? &lt;대화&gt;가 발간된 뒤 세종문화회관에서 강연회가 있었는데 거기 가서 책에 사인을 받아온 일이 아마 선생을 실물로 본 유일한 경험일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엔 보기보다 소심한 나의 성격과 집에 처박히기 좋아하는 소위 대문자 I 경향도 한몫을 했겠지만, 그보다는 서울사람 아님의 영향이 컸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터넷을 통한 소통이 활발해지기 이전엔 문화도 저항도 서울사람 중심이었음을 무시하기 어렵다. 내가 서울로 완전히 이주한 것이 2004년이니 그때는 이미 선생이 편찮으셨다. </span></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trong>나의 숨은 스승 리영희<br /></strong> <br />리영희는 내게는 일종의 숨은 스승이었다. 숨은 스승이라 함은, 내가 책을 통해 그분을 스승으로 삼았을 뿐 실제로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없었던 먼 스승을 말한다. 모든 위대한 책의 저자가 다 그렇지 않은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작고한 저자들, 먼 나라 사람이어서 너남없이 실제로 만날 수는 없는 저자들 등은 적어도 한국의 청년에겐 공평하게 먼 스승일 뿐. 그러나 리영희 선생은 내가 서울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녔더라면 분명 어떤 계기로든 만나고 가까이 모셨을 가능성이 있다. 요는 나는 당대의 청년운동에서 동떨어져 성장했고 그랬던 이유 중 하나가 서울에서 태어나거나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는 것. 모든 것이 서울 또는 중앙 중심으로 흐른 지난 세기 우리 현대사가 내게서 앗아간 또는 베푼 그 무엇에 리영희도 있었다라고 내가 생각한다는 것이다. <br /><br />물론 ‘리영희와 나’라는 기획 의도를 내가 너무 편협하게 해석한 탓도 있다. ‘노신과 나’ ‘임화와 나’ ‘김수영과 나’ 같은 주제로 글을 쓰라고 했을 때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라서 못쓴다”라고 하면 내가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왠지, 이런 주제의 글이라면 그분의 인간적 면모를 익히 알고 경험한 사람들이 쓰는 게 맞다는 나 혼자만의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책과 기사 조금 읽은 주제에 그분의 인품이나 영향력 등을 안다고 또는 “배웠다” “영향입었다” 등으로 말하기엔 좀 부끄러웠다. <br /><br />전지구적인 안목으로 세계의 변방에 속한 민중의 삶과 혁명의 기운에 주목하면서 끊임없이 독재에 저항해온 선생을 추억하는 글의 서두치고는 한심한 이야기다. 하여간 그래서, 두어 달 사양한 끝에 ‘리영희의 책과 나’라는 좀 더 개방적인 주제로 쓰라고 하니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리영희의 책으로 말미암아 감옥살이를 한 사람들이 주변에 수두룩한데, 늘 구경꾼 비슷했던 내가 뭐라고 쓰려니 송구했다. 어떻든 나도 선생의 첫 저서인 &lt;전환시대의 논리&gt;가 인생 경로를 바꿔 버린 세대에 속한다. 그 이야기부터 하자.<br /><br /><strong>처음엔 덤덤했던 &lt;전환시대의 논리&gt;<br /></strong> <br />1977년 가을쯤이었던가? 나는 부산대학교 안의 부산중앙고/중앙여고 연합동아리인 영목회의 동기생 한 명으로부터 독서클럽을 하자는 제안을 들었다. 그즈음 나는 학교 후문 앞 책방 주인아저씨로부터 &lt;씨알의 소리&gt;와 &lt;8억인과의 대화&gt;를 소개받아 읽으려던 참이었다.(지금까지 그 책 이름을 &lt;5억인과의 대화&gt;라고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쓰면서 발견한다. 아 이런!) 그 동기생은 리영희의 첫 저서 &lt;전환시대의 논리&gt;부터 읽는 것이 좋겠고 그 책을 함께 읽는 모임을 결성중이니 같이 하자라고 매우 간곡하게 권유를 했다. 그러자고 했지만, 곧이어 우리 동아리에 불어닥친 모종의 어려운 일 때문에 나는 결국 그 독서모임에 끼지 못했다. 가끔 그 동기생을 만나면 &lt;전환시대의 논리&gt;에 이은 다른 책을 소개받기도 했지만, 함께 읽고 토론하는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다 보니 ‘읽었음’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br /><br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인생관이 확 바뀌는 경험을 했다고 토로하는 동기생과 달리 &lt;전환시대의 논리&gt;를 읽은 첫 소감은 참 어려운 책이라는 유치한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박정희가 독재자라는 인식에 겨우 도달한, 늦틔는 중인 한심한 대학생이었다. 정치의식도 없었고 소위 순수문학에 기울어진 문학도였으며, 단지 내가 여성이어서 그런지 여성이 당하는 차별과 폭력에 민감했던 정도? 그랬던 내게 &lt;전환시대의 논리&gt;는 의식을 깨워 주기보단 새로 심어준 책에 가까웠다. 아, 미국이 이런 나라구나! 라는 식의 깨달음은 미국이 우리의 구원자라고 생각했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과는 좀 다른 감각이었을 것이다. <br /><br /><strong>쇼킹했던 유인물 &lt;통닭구이가 만든 공산주의자&gt;<br /></strong> <br />이 책과 관련된 충격적 사건은 대학을 졸업하던 1981년에 일어났다. 지금은 부림사건이라 불리고 있는 부산지역 대학생들이 연루된 공안사건이 81년 벽두에 터진 것이다. 이 사건 연루자들 중에 영목회 출신들이 많았다. 아니 영목회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독서클럽이 문제의 조직이었다고 해야겠다. 나에게 독서클럽을 함께 하자고 권한 동기생을 비롯해서 우리 학번과 한 해 윗학번들이 모조리 쓸려들어갔다가 일부는 풀려나고 일부는 대공분실까지 끌려가 참혹한 고문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어버렸다. 당시 나는 대학원 진학에 실패하고 조부모님을 모시고 서울 큰삼촌댁에 놀러 가 있어서 검거 명단에서 빠지는 행운을 누렸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사건이 벌어진 줄도 몰랐다. 이들은 단지 불온하다는 딱지가 붙은 책을 읽은 죄로 끌려가서 혹독하게 당했던바, 나는 그 전말을 82년에 어떤 안기부 직원이 내게 가져다준 &lt;통닭구이가 만든 공산주의자&gt;라는 유인물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br /><br />나는 81년 서울 간 김에 출판사에 취직을 했다. 원래 내 목표는 동아일보사 기자가 되는 것이었지만 언론통폐합 와중에 시험도 못쳐보고 대학원으로 진로를 틀었던 것인데, 서울 간 김에 친구의 지도교수님댁에 함께 놀러갔다가 전격적으로 소개장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곳이 전예원과 실천문학사로 이중근무였다. 실천문학사에서 일한 지 반년 남짓 만에 폐결핵이 의심돼 부산으로 돌아가 다시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런데 나는 중앙에서 부산대 대학원 학생회에 파견된 사람으로 둔갑돼 있었다. 인즉슨, 내 본래 성향이나 여건과 다르게 단지 서울의 실천문학사에 근무했다는 이유만으로 중앙에 몹시 가까운 중요인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보당국이 주목하는 사람? 알고 보니 부림사건의 영목회 출신? 이런 이유로 82년 학기초에 내가 학비를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 삼아 천주교 교구청에 취업하자 안기부의 교구청 담당 직원이 수시로 내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살피러 온다는 것을 몰랐다. 대충 나를 파악했다 싶었는지 그 안기부 직원이 어느날 유인물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부림사건 피해자 가족들이 발표한 문건이었다. 이 전말은 영화 &lt;변호인&gt;에 상당 부분 나온다. 사람의 손발을 묶어 굵은 나무 기둥에 매달아놓고 코에 고춧가루 물을 붓거나 밑에 불을 피워 위협하는 등의 고문을 일명 통닭구이라 하는데 바로 그런 극심한 고문 끝에 부림사건의 피해자들로부터 공산주의자란 자백을 받아냈다고 폭로한 유인물이다. <br /><br />그 글을 읽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정부가 발표하는 공안사건의 허구성을 환하게 깨달았다. 그 유인물에 등장하는 이름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공산주의자라는 증거로 공안당국이 내민 책이 바로 &lt;전환시대의 논리&gt;와 &lt;8억인과의 대화&gt;였다. 저 책들을 읽고서 공산주의자가 된다고? 비록 그 독서클럽 회원들만큼 깊이 읽지는 않았어도 나도 열심히 읽은 독자에 속할 텐데? 내가 공산주의자인가? <br /><br />나이가 이만큼 먹어 생각해 보면 나는 공산주의자는 아니라도 상당한 정도로 좌파에 기울어진 사회민주주의자쯤 될 것이다. 맹할 정도의 보수적 ‘아가씨’로 성장하다가 이른바 ‘불온서적’들의 간접적 세례를 받으면서 진도를 나간 ‘의식화’는 속도가 상당히 느렸다. 나는 의식있는 젊은이였다기보다 보편성에 입각한 평등의식과 정의감이 조금 있는 편이었다. 공안당국의 눈에 걸려들었더라면 그게 그거였을 수도 있겠으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시야의 넓고 좁음 차이에 불과했지만 하여간 나는 시야가 좁았다. <br /><br />리영희의 책 중에 나와 가장 인연이 깊었던 초기의 두 권 &lt;전환시대의 논리&gt; 와 &lt;8억인과의 대화&gt;에 관해 쓸까 하다가 경로를 바꾸었다. 저 책들은 읽은 지 너무 오래되었다. 거의 50년? 가장 최근의 책인 &lt;대화&gt;조차 20년은 더 된 옛날 책이라 읽은 기억이 날 리가 만무하다. 이것 참, 큰 줄기만 남고 세부 기억은 몽땅 날아간 옛 책들을 가지고 ‘나’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도 쓰기로 했으니. <br /><br />그래서 유일하게 서명을 받은 책이자 어느 정도 사회학적 안목이 생긴 이후에 읽은 셈인 대화를 다시 읽기로 했다. 읽다 보면 ‘리영희의 책과 나’라는 주제에 걸맞은 추억 또는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정작 서명 받은 책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어 한참을 시간을 쓰다가 다시 샀다는 한심한 일도 털어놓아야 공정할 것 같다. <br /><br />이제부터는 리영희의 책 &lt;대화&gt;와 나에 관한 이야기다. &lt;대화&gt;를 다시 읽으면서 내 안에서 리영희 사상의 흔적을 조금씩 재발견해나가는 경험을 했다. 리영희 선생은 문학도인 내게 정치적 사고의 중요성을 알려준 스승 중 한 분이시고, 무엇보다 우리집에 밀가루와 가루우유를 주던 나라, 나중엔 다이알로그 매거진(미국에서 발행됐던 미술 잡지)을 펴내던 나라 정도로만 생각하던 미국의 실체를 깨닫게 해준 분이다. 물론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한국의 시인이 미국을 우호적으로 생각하기는 힘들어진다. 그러나 좀 더 비판적인 안목이 생겨난 것은 확실히 저 두 책(&lt;전환시대의 논리&gt;, &lt;8억인과의 대화&gt;)을 읽었던 덕분이다. <br /><br />&lt;대화&gt;는 임헌영 선생이 질문하고 리영희 선생이 답하는 형식으로 쓰인 리영희 자서전이다. 뇌경색의 후유증으로 오른팔을 쓸 수 없게 된 선생이 글쓰기가 어렵게 됐다는 것을 감안한 한길사 김언호 사장의 제안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 고마운 책이다. “리영희와 나” 같은 글은 임헌영 선생 같은 분이 써야 할 듯하다.</span></span></span></p>
<p>[caption id="attachment_5294" align="aligncenter" width="455"]<img class="size-full wp-image-5294"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7/%EB%8C%80%ED%99%94.png" alt="" width="455" height="672" /> &lt;대화&gt; 책 표지 (출처: 한길사)[/captio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r /></span></span></span><span style="font-size:17px;color:#333333;"><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trong>치열함 자체인 리영희는 ‘태도의 스승’<br /></strong> <br />그런데 나는 정작 &lt;대화&gt;에 서명까지 받아놓고도 한참 동안 읽지를 못했던 것 같다. 그 강연회 겸 사인회는 세종문화회관에서 2005년 4월15일 저녁에 열렸고, 그때 나는 청와대 비서관이었다. 물론 비서관 자격으로 거기 참석한 것은 아니고 그냥 소위 ‘팬심’으로 간 것이긴 하지만, 그때는 엄청나게 업무량이 많고 읽어야 할 자료와 보고서와 신문과 그때 막 활발해지던 인터넷 토론사이트들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48시간처럼 굴러가던 시절이었다. 즉, 제대로 책을 열어본 것은 그로부터 얼마간 지나서였다는 이야기다. 그때쯤엔 나는 근대적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역사의식과 정치의식을 상당히 갖춘, 즉 ‘각성한 개인’에 가까워진 사람이어서 &lt;대화&gt;를 읽으면서 새로운 시야가 열리는 놀라움보다는 근대사를 리영희의 입장에서 정리하는 정돈된 생각으로 받아들였다고 기억을 한다. <br /><br />이번에 다시 읽으며 나는 나 자신의 생애와 관련된 새로운 발견을 좀 했다. 나는 상당히 오랫동안 내가 정치의식이 부족했던 것을 일종의 시골사람콤플렉스로 설명해 왔었는데, 리영희의 생애에 견주어본 나의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치열함의 부족이었다. 취재하고 읽고 쓰고 조사하고 탐구하는 것으로 점철된 리영희의 일생을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면 “기자와 학자 사이에 걸쳐진 열정”이라고 쓰고 싶다. “사상의 스승” 같은 말로 그분을 부르는 후학들도 많은 줄은 알지만, 내게는 오히려 “태도의 스승”이라 불러야 할 듯하다. <br /><br />&lt;대화&gt;는 일종의 인물사여서 요약하기는 어렵다. 다만,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걸쳐진 선생의 투쟁이 선입견보다 훨씬 드라마틱해서 읽기 재미있었다. 글머리에 내가 의식부족의 얌전한 애기씨였던 이유가 부산에 살아 그렇다고 썼지만, 실은 이는 매우 반성이 필요한 말이다. 리영희 선생은 이북 출신에 공고를 나와 해양대학에 진학했으며 군 복무를 무려 7년을 한 바 있다. 요즘말로 하면 스펙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러나 본인의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는 탁월한 어학실력으로 스스로의 입지를 개척해 나갔고, 한국이 맞닥뜨리는 역사적 질곡의 고비고비에서 그 어학실력을 본인의 출세에 사용하지 않고 지식인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한 투쟁에 바쳤다. 얼버무리고 적당히 타협하는 태도를 지식인으로서는 절대 하면 안 되는 태도라고 다소간 분노 섞인 어조로—활자인데도 그게 보였다—설파하는 이 책의 행간을 읽다가 면구해서 잠시 커피 마시고 와야 했다. <br /><br />위에서 말한 부림사건 다음해 부산에서는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터졌다. 사람들은 이 사건에서 문부식과 김은숙을 기억하지만, 실은 저 영목회의 3~4기들이 많이 연루된 사건이다. 부림사건에 여학생들이 대개 일주일쯤 연행되었다가 풀려난 것에 비하면 부미방 사건에는 여학생들의 참여가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이 나중에 부산 6월항쟁의 실무적 기둥 노릇을 한 천주교사회문제협의회의 멤버들이 된다. 이들이 미국문화원에 불을 지르게 되기까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추동한 힘은 리영희의 저작과 기사에서도 나왔을 것이다. 우리 세대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든 존 바에즈나 밥 딜런 같은 베트남전쟁 반대 예술인들을 통해서도 영향을 받았지만 &lt;전환시대의 논리&gt;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단지 전쟁 반대를 넘어 베트남, 중국 등 사회주의 진영을 이데올로기적 편견없이 바라보는 힘을 주었다. 국제적 시야라고나 할까. <br /><br />말이 길어진다. &lt;대화&gt;를 다 읽고 나서 내가 한 생각은 약간의 후회다. 진작 읽었어야 했고, 옛날 책들은 거듭 읽었어야 했다. <br /><br />책 안의 콕 짚고 싶은 대목: 리영희는 동시대 시인인 김수영, 신동엽 등의 시를 높이 평가했지만 아쉽게도 직접 만나지 못한 채로 두 시인이 먼저 돌아가셨다. 요즘 김수영 연구에 빠져 살면서 &lt;대화&gt;를 읽다 보니, 60년대 지식인들 중엔 국제적 안목이 넓은 분들이 이렇게 총총했는데 요즘 우리는 어떨까. </span></span></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17 Jul 2026 19:47:2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11"><![CDATA[리영희다시읽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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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현장기록] 토론회 - 북한? 조선? 뭐라고 불러야 할까?]]></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1010]]></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font-size:17px;color:#333333;"><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font-size:17px;">리영희재단 사무국</span></span></span></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지난 6월 23일, 한겨레신문사 청암홀에서 '북한? 조선? 뭐라고 불러야 할까?'를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리영희재단과 평화네트워크, 한겨레평화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이번 행사는 공식 국호 사용 여부가 남북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조명하고자 마련되었다.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서는 다양한 시각이 교차하며 열띤 토론의 장이 펼쳐졌다.</span></span></span></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북한법 전문가이기도 한 권은민 변호사는 북한을 공식 국호인 '조선'으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는 실체가 있는 상대방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것이 대화와 협력의 올바른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과거 남북이 합의했던 특수관계가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으로 깨진 만큼, 상황 변화에 맞춰 호칭 문제를 새롭게 정립해야 할 때라고 진단했다. 아울러 '조선'이라는 호칭 사용이 현행 헌법이나 국가보안법상 법률적인 장애나 위배 사항이 없다는 점도 명확히 했다.<br /><br /><img class="aligncenter size-large wp-image-5292"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7/IMG_0566_%ED%8E%B8%EC%A7%91-1024x572.jpg" alt="" width="790" height="441" /><br /></span></span></span></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정일영 서강대 연구교수는 호칭 문제를 국제 관계, 남북 관계, 국내 논의라는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 유연하게 접근할 것을 주문했다. 국제 관례상으로는 북한의 국호(조선)를 부르는 것이 맞으며, 국내에서도 시대적 흐름에 따라 관용적으로 이를 용인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오랜 기간 '북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해 온 연구자로서 겪는 현실적인 고민을 공유하면서도, 호칭을 옳고 그름의 잣대로 단일하게 규정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 이면에는 내부 사회 통제를 위한 불안정성이 작용하고 있음을 입체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span></span></span></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홍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특정 호칭의 찬반을 넘어 상대를 타자화하고 대상화하는 프레임에서 '북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을 정전협정 체제의 모호성과 군사적 위협이라는 '예외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북한식 종전선언으로 해석했다. 나아가 이러한 상황 변화가 오히려 한국 사회에 오랫동안 고착화된 분단 체제의 폐습을 객관화하고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를 통해 기존과는 다른 방식의 유익한 평화적 공존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span></span></span></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정은경 선생은 이번 토론회를 위해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직접 여론조사를 실시해 그 결과를 공유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년 세대들은 호칭 문제를 이념적 잣대가 아닌 남북 간의 상호 존중과 관계 개선을 위한 실용적인 도구로 인식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정 선생은 군사 안보적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호칭 변화가 군사적 긴장을 낮추는 유의미한 신호로 작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향후 호칭 및 통일 담론을 논의할 때 이러한 청년 세대의 시각이 적극 반영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span></span></span></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이번 토론회는 평소 우리 사회에서 깊이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북한의 호칭 문제를 공론화하고, 그 이면에 담긴 남북관계의 본질을 여러 면에서 성찰해 보았다는 점에서 매우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분단과 적대의 관성을 넘어, 한반도의 평화적 공존을 위한 새로운 상상력과 지혜가 앞으로 더욱 활발히 논의되기를 기대해 본다.</span></span></span></span></span></p>
<p><iframe title="YouTube video player" src="https://www.youtube.com/embed/ZUGfYrbojAg?si=DqZm8fe-qBRi5Zs3" width="560" height="315"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strong><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 현장 음질이 고르지 않습니다. 원활한 시청을 위해 자막을 켜 주세요.</span></span></span></span></span></strong></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17 Jul 2026 18:03:0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23"><![CDATA[기타사업]]></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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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북토크] 시대와 세대를 잇다(7/14, 수원)]]></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1009]]></link>
			<description><![CDATA[<p><img class="aligncenter wp-image-5286 size-full"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7/260714_%EB%82%98%EC%99%80%EB%A6%AC%EC%98%81%ED%9D%AC%EB%B6%81%ED%86%A0%ED%81%AC_%EC%88%98%EC%9B%90.png" alt="" width="1080" height="1200" /></p>
<p><span style="color:#141414;"><span style="font-size:20px;">〈나와 리영희〉 이야기한마당<strong><br />시대와 세대를 잇다<br />- 리영희가 던진 질문을 오늘에 다시 새기다</strong><br /></span><span style="font-size:20px;"><br /></span><span style="font-size:20px;">■ 일시_ 2026년 7월 14일(화) 오후 7시<br />■ 장소_ 수원 팔달문화센터 예당마루홀<br />■ 주최_ 리영희재단, 경기사회포럼<br />■ 사회_ 김효순 리영희재단 이사장<br />■ 이야기 손님_ 김학민 경기사회포럼 자문위원, 모정하 전교조 경기지부 부지부장, 정용준 경기평화교육센터 청년활동가<br />■ 문의·전화 신청_ 031-253-2265 / 문자 신청: 010-7447-0286</span></span></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Thu, 02 Jul 2026 10:32:2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23"><![CDATA[기타사업]]></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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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긴급토론회] 북한? 조선? 뭐라고 불러야 할까?]]></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1008]]></link>
			<description><![CDATA[<p><img class="aligncenter wp-image-5283 size-full"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webposter.jpg" alt="" width="800" height="1200" /></p>
<p><span style="font-size:20px;"><strong>[긴급토론회] 북한? 조선? 뭐라고 불러야 할까?</strong><br /></span><span style="font-size:20px;"><br />조선(북한)이 ‘남조선’ 대신에 대한민국이나 한국으로 부르기 시작한 지 3년 가까이 지난 가운데, 한국 내에서도 호칭 문제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번 토론회에선 공식 국호 사용 여부가 남북관계(한조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우리 사회의 합리적인 선택이 무엇인지를 집중적으로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br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span></p>
<p><span style="font-size:20px;">-일시: 2026년 6월 23일(화) 오후 4시~5시 50분<br />-장소: 한겨레신문사 3층 청암홀<br />-주최: 리영희재단, 평화네트워크, 한겨레평화연구소<br />-사회: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장 겸 평화네트워크 대표<br />-패널(가나다순): 권은민 김앤장 변호사, 정은경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 정일영 서강대 연구교수, 홍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br />-참가신청: </span><span style="font-size:20px;"><a href="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cic5PftM7Frf--3czTBP4cAKbTQw1b5PupmUZS5BVJGqCLhw/viewform" target="_blank">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cic5PftM7Frf--3czTBP4cAKbTQw1b5PupmUZS5BVJGqCLhw/viewform</a></span></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Wed, 10 Jun 2026 18:17:3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23"><![CDATA[기타사업]]></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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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뉴스레터 제49호]]></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1007]]></link>
			<description><![CDATA[<p><iframe src="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swsr6qUQXg9pXGxGkdsCvnkDucKvXis" width="100%" height="1500" allowfullscreen></iframe></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05 Jun 2026 17:03:1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27"><![CDATA[뉴스레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리영희의 중국론을 다시 읽는다 - 사유의 축으로서 제3세계 / 백지운]]></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1006]]></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2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trong>리영희의 중국론을 다시 읽는다</strong> <br /></span><span style="font-size:2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 사유의 축으로서 제3세계 </span></span></p>
<p><img class="alignright size-full wp-image-5274"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B%B0%B1%EC%A7%80%EC%9A%B4_%EC%82%AC%EC%A7%842.png" alt="" width="248" height="310" /></p>
<p> </p>
<p> </p>
<p> </p>
<p> </p>
<p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font-size:17px;color:#333333;"><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font-size:17px;"><br />백지운(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교수)</span></span></span></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trong><br />1. 중국을 통해 한국을 보다</strong> <br /><br />외국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공통된 문제이겠지만, 특히 요즘 시대 한국의 학자로서 중국 연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번민이 그치지 않는다. 중국의 타고난 지리적 면적과 압도적 인구수, 그리고 그 경제 규모와 국제적 영향력을 생각하면, 아무리 학문의 본령이 가치중립에 있다 하더라도 현실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배제된다면 의미 있는 학문이 되기 어렵다. 정치, 경제, 역사 모든 면에서 우리와 긴밀히 관계되어 있는 만큼, 중국에 대한 분석과 판단에는 필경 우리 자신, 즉 한국 사회를 보는 시각이 내재될 수밖에 없다. 근자에 한국 사회가 정치적으로 양극화되면서 중국에 관한 담론이 과도하게 진영 논리로 소비되는 근심스런 현상도 어떤 면에서는 중국으로부터 떨어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우리 현실의 일그러진 반영일 것이다. <br /><br />리영희 선생의 중국 관련 논설은 중국과 그것을 둘러싼 국제 정세가 확연히 달라진 지금의 현실에 비추어 보아도 여전히 시사점이 많다. 선생이라면 오늘의 중국 문제를 어떻게 접근했을 것이며, 정치적으로 소비되기 급급한 중국 언설로부터 어떻게 우리의 문제를 사고하고 시대를 전망하는 사상적 길을 내었을까 궁금해진다. 그의 대표작 『전환시대의 논리』(1974, 창작과비평)와 『우상과 이성』(1977, 한길사)에는 모두 중국 관련 논설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냉전의 우상을 깨고 저변에 꿈틀대는 거대한 시대 전환의 논리를 읽어내는 데 중국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중심축으로 자리하고 있다. 외신부 기자 출신으로서 국제 정세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통해 객관적인 진실을 소구해 내는 데 온 힘을 기울였지만, 선생의 중국 논설의 근저에는 궁극적으로 한국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작동하고 있다. 스스로도 비유했던 것처럼 루쉰이 말한 ‘철방에 갇힌’ 한국 사회를 깨우고자 하는 외침이 그의 중국론에 투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br /><br /><strong><br />2. 냉전의 이분법을 흔드는 원심력의 축</strong> <br /><br />그 외침은 당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냉전의 우상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환시대의 논리』 첫머리에 수록된 글 「강요된 권위와 언론자유」는 냉전의 한가운데를 살아가던 한국 사회에 예고 없이 도래한 데탕트가 야기한 충격으로 시작한다. “닉슨의 중공 방문”이 “중공을 ‘영원한 적’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던 한국 국민”을 “하늘이 무너질 듯”한 충격으로 강타했던 것에 대해, 그는 냉전 체제에 안주하여 주어진 소임의 십분지일도 하지 못한 지식인과 언론의 타성을 일갈했다. <br /><br />선생이 볼 때, 미중 데탕트는 1970년대 들어 갑자기 발생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전후 25년의 세계정세의 변화, 특히 1960년 이래의 10여 년의 변화가 만든 필연적 귀결이었다. 스탈린 사후 미소 간에 맺어진 ‘평화공존체제’. 1969년 정점에 이른 중소 분열, 그리고 중립노선을 추구하는 제3세계 운동, 미국으로부터 독자노선을 추구하는 유럽 선진국의 흐름 등 냉전의 긴장이 드높았던 1950, 60년대에도 냉전의 논리를 이완하는 원심력이 국제사회 도처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국제사회의 끈질긴 정치적 다원화의 지향”이 미국이 놓은 냉전 궤도의 지반을 갉아먹고 있었으며, 그것이 1970년대 들어 데탕트라는 시대 전환의 추세로 가시화되었을 뿐이다. <br /><br />리영희 선생이 일깨우고자 했던 것은 냉전체제가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획일화된 이분법적 구조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가 볼 때, 미소 진영 대결이라는 냉전의 표층 논리가 그 저변에서 약동하는 다원화의 힘에 의해 흔들리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구조야말로 냉전의 실상이며, 후자에 의해 전자가 해체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 전환의 추세였다. 당시 한국 사회가 지구적 탈냉전은 물론 동아시아로 스며드는 데탕트의 흐름에서 기이할 정도로 단절되어 있었던 것은 냉전의 허위의식에 빠져 국제 정세의 표층에 감춰진 다원화의 힘을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br /><br />주목할 것은 당시 선생이 냉전의 우상에 가려진 시대 전환의 논리를 밝히는 시금석으로 중국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눈에 냉전 시대의 중국은 ‘죽의 장막’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국제무대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인공위성 발사 성공, 대외원조 사업으로 ‘탄자니아-잠비아 철도’ 건설, 런민비의 국제금융시장 진입에 더해, 1970년의 시점에서 전 세계 55개국과 수교를 달성했고 그중 42개국이 비공산권 국가들이었다. 게다가 머잖아 미국의 반공체제에 편입된 아시아 국가들과 NATO에 가입된 유럽의 미국 동맹국 대부분이 중국과 수교를 맺을 전망이었다. 미국의 대중국 고립정책의 실패는 강대국의 힘이 전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거센 역류가 국제사회에 존재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br /><br />냉전체제의 저변에서 냉전의 논리를 이반하는 원심력에 주목했던 리영희의 혜안은 미중세력경쟁 체제의 형성으로 또다시 이분법의 사고가 우리의 인식 체계를 지배하는 지금 깊은 시사점을 준다. 세계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강대국의 논리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이데올로기에 포장된 허상에 안주하지 말고 세계를 움직이는 다기한 동력에 실사구시적으로 착목함으로써 시대의 참된 논리를 읽어야 함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듯하다. <br /><br /><br /><strong>3. 중국혁명에 대한 이상과 오판</strong> <br /><br />리영희의 중국 관련 지적 작업들이 이후 한국 사회의 중국 인식과 중국 담론 형성에 어떻게 계승되었을까를 돌이켜 보면, 사실 그 흔적은 미미하다. 1990년대 초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중국 개혁개방의 본격화, 한중 수교 이후 중국을 직접 마주하게 되고 또 수많은 정보들이 밀려들면서 선생의 지적 성과들은 점차 잊혀져갔다. 무엇보다 마오(毛)와 중국 공산당에 대한 과도한 긍정, 특히 문화대혁명에 대한 낙관적 해석이 이후 드러난 중국의 실상과 부합하지 않으면서 선생의 입지가 급격히 좁아진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을 것이다. <br /><br />그러나 시야를 넓혀 보면, 당시 중국혁명에 대해 선생이 범했던 인식의 오류는 지구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마오주의는 20세기 중반 전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사상 중 하나였다. 그것은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제3세계 혁명의 교본이었고 프랑스 68혁명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신좌파 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전 세계 좌파 진영이 그러했듯, 리영희 선생은 중국혁명을 소련의 관료주의적 사회주의와 대비되는 대안적 혁명 모델로 바라보았다. 특히, 그가 중국혁명에 기대를 걸었던 측면은 인간해방이라는 지점이었다. 소련의 사회주의가 물질적·제도적 혁명에 그친 것과 달리 마오의 혁명은 인간의 사상혁명을 궁극의 목표로 추구했으며 문화대혁명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소련이 범한 사회주의의 역행을 방지하기 위한 계속혁명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br /><br />중국혁명에 대한 해석의 오류는 편견을 넘어 진실을 파헤치는 것을 무엇보다 중시했던 선생의 이력은 물론 그 자신에게도 깊은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1990년대 『사회주의의 실패를 보는 한 지식인의 고민과 갈등」이라는 글에서 그는 중국 사회주의의 변모가 가져다준 실망과 배신감을 토로하면서, 문화대혁명에 대한 자신의 경도가 해방 이후 좌우익의 극단적 대립 속에 인간의 윤리성이 땅에 떨어진 한국 사회를 살면서 품었던 인간해방에 대한 동경에서 연원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리영희의 중국 인식의 오류는 결코 그의 지적 나태함이나 이념적 편향 탓으로 간단히 정리될 일은 아니다. 그것은 냉전 시대 지구적 좌파 운동 진영에서 생산되었던 중국혁명에 대한 지식과 담론이 동아시아 반공 진영의 폐쇄된 사회에서 냉전의 우상을 깨기 위해 분투했던 지식인의 내면과 어떻게 서로 마주치며 녹아들어 갔는지에 대한 맥락을 살피는 복잡한 작업을 요한다. 또한, 중국혁명이 고정불변하는 추상적 대상이 아닌 만큼, 시기별·단계별 변모 양상에 대한 세밀한 분석으로부터 리영희의 판단 착오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판단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러한 기반 위에서 리영희의 중국론은 (비판을 포함하여) 정당한 재평가와 재해석을 얻게 될 것이며, 설령 그것이 모순적이고 한계를 보이더라도 그 자체로 냉전 시기 한국의 사상 계보 안으로 맥락화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br /><br /><br /><strong>4. 제3세계라는 원심력의 축</strong> <br /><br />그 모든 오류와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1970년대 리영희의 중국론에는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 시각에서 보더라도 요체를 찌르는 혜안이 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근원적인 힘은 선생에게 제3세계가 중국을 보는 시각의 축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영희를 함께 읽다』(2017)에서 구갑우는 리영희가 미국이나 소련과 동맹으로 연결되지 않은 제3세계적 시각에서 중국외교를 보고자 했다고 짚었는데, 선생에게 ‘제3세계’란 외교나 국제정치적 전략 분석을 위한 도구를 넘어 일종의 사고의 지남(指南)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백승욱이 말했던 “냉전시대 이분법적 구도에서 불가능한 제3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사유의 분투가 국제정세를 보는 시각에서 미소 대결이라는 냉전의 표면에 가려진 제3세계의 흐름에 주목하는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선생의 집요하고도 치밀한 작업들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베트남전쟁을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성전이라 생각하고 미국의 승리를 확신했던 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 선생만큼은 그에 정면으로 반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냉전의 논리를 이반하는 원심력으로서 제3세계가 세상을 보는 자리의 기준점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1979년 이란혁명 직후 미대사관 인질사건을 비롯한 중동 정세를 분석하면서 “이란 인민의 잠재적 반응을 형편없이 얕잡아본” 미국의 오만함을 비판했던 것도 강대국의 힘으로 좌우되지 않는 제3세계의 원심력에 대한 그의 일관된 관심과 모종의 기대에 기반한 것이었다. <br /><br />리영희가 당시 마오와 중국공산당을 높이 평가했던 것은 중국이 냉전의 논리를 해체하는 원심력을 읽어내고 그 편에 섰다는 데 있었다. 냉전 초기부터 마오쩌둥(毛澤東)은 미소 두 진영에 귀속하지 않으려는 제3의 장력이 지구상에 광범위하게 존재함을 간파하고 그것을 중국혁명의 이론으로 전유해왔다. 그것이 바로 1940년대에 제기된 ‘중간지대론(中間地帶論)’으로서 1960년대 ‘두 개의 중간지대론’을 거쳐 1970년대 중국판 제3세계론이라 할 ‘삼개세계론(三個世界論)’으로 정리되었던 것이다. ‘중간지대론’에서 ‘삼개세계론’으로 완성되는 중공의 세계인식은 리영희가 데탕트의 시대적 논리를 읽었던 방식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양자가 착목했던 것은 냉전의 한가운데에서 냉전의 논리를 이반하는 다원화의 힘이었다. 냉전의 논리로 중국을 옥죄었던 미국, 그리고 미국이 구축한 냉전 궤도의 지반을 흔드는 원심력에 기탁했던 중국의 긴 싸움은 결국 중국의 승리로 귀결되었으며, 그 결과가 바로 닉슨의 방중으로 상징되는 미중 데탕트였던 것이다. <br /><br />말하자면, 리영희는 냉전 시기 중국이 미국의 대중국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었던 힘의 기반은 바로 제3세계를 스스로에 내재화함으로써 가능했음을 파악하고 있었다. 『전환시대의 논리』에 이어 출간된 『우상과 이성』에 수록된 글에서 선생은 중국이 1950년대 이후 제3세계 신생국들과 관계를 구축하면서 중국혁명의 이론을 조정하고 자신의 세계 전략을 수립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짚어나간다. 1955년 반둥회의에서 저우언라이가 천명한 ‘평화공존 5원칙’이 1960년대 중국이 아시아·아랍·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신생국들과의 관계를 수립하는 기본 원칙이 되고 또 1970년대 제3세계 비공산주의권에 벌인 원조를 통해 제3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과정을 분석하면서, 놀랍게도 선생은 향후 중국경제가 발전할수록 중국식 원조모델이 서구의 제3세계 원조 방식에 대한 도전이 될 것이며 후진국과 중립주의 국가들의 정치적 노선을 좌우하는 열쇠가 될 가능성을 짚고 있었다(「중국평화5원칙의 안팎」). <br /><br />리영희의 안목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미국과 세력경쟁에 돌입한 지금 중국의 전략이 그 기본 기조에서는 냉전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미소 진영 구조에 귀속되기를 거부하는 중간지대와 연대하여 미국의 포위망을 서서히 무력화했던 것처럼, 지금 중국은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를 잇는 ‘일대일로’의 거대한 띠로 미국의 대중국 포위망을 바깥에서 에워싸고 있다. 비록 ‘제3세계’라는 말 자체는 1980년대 개혁개방이 본격화되면서 중국의 공적 담론장에서 사라졌지만, 최근 ‘글로벌 사우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전후(戰後) 미국 주도로 만들어진 국제질서와 규범에 도전하는 대항 담론으로 전격 부상하고 있다. 그 상징적인 예가 2023년 9월 15일 쿠바의 아바나에서 개최된 G-77과 중국 정상회담에 시진핑을 대신하여 참석한 중공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리시(李希)의 연설이다. 이 자리에서 그는 “더 강력한 연대로 위대한 발전을 향하는 ‘남남협력(南南協力)’의 새로운 장을 열 준비가 되었다”고 선포하면서 중국과 개발도상국이 협력하여 글로벌 거버넌스를 “더 정의롭고 평등하게 만들어야 할 소명”을 역설했다. 국제 규범체제의 개혁과 ‘남남협력’을 결합시키는 중국의 글로벌 사우스론은 역사적으로 70년 전 아시아·아프리카의 신생국들과 함께 UN체제의 개혁을 요구했던 반둥회의와 맞닿아 있다. 그런 점에서, 제3세계를 냉전 시대 중국을 분석하는 사고의 축으로 삼았던 리영희의 방법은 오늘의 강대국으로 떠오른 중국의 세계전략의 심층 논리를 분석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되는 것이다. <br /><br />중요한 사실은 리영희가 마오시대 중국의 제3세계론의 의미를 평가하면서도 그것이 직면했던 이율배반을 놓치지 않고 착목했다는 점이다. 그는 평화5원칙을 기조로 하는 중국외교의 약점으로서, 제3세계 혹은 중간지대 국가의 정부와 그 인민에 대한 양면적인 관계의 모순이라고 짚었다. 당시 제3세계 신흥국가들의 신생 정부는 대부분 우익적 성향의 민족부르주아 세력이 중심이었다면, 그들 내부에는 반제·반식민을 표방하는 반정부 혁명세력이 지하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중국으로서는 국교 수립이라는 제도적 관계를 맺은 보수 성향의 정부와 우호관계를 전제로 하면서도, 다른 한편, 세계혁명을 표방하는 입장에서 그들 국가 내부의 반정부 혁명세력과의 유대를 저버릴 수도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체제가 다른 정부 간의 평화공존과 세계혁명이라는 기치 아래 제3세계 인민과의 연대를 동시에 조절해야 하는 이율배반적 요구가 중국 외교의 아킬레스건임을, 선생은 또렷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예리한 시선은 선생 자신이 중국혁명의 핵심을 관료주의화된 소련혁명과 대비되는 인간해방에 두었던 것과 묘하게 어긋난다. 마치 중국의 외교가 국가 간 관계라는 제도 안으로 포섭되면서 전 세계 인민 간의 연대라는 혁명 본연의 사고가 형해화되는 미래를 예견했던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스스로 의식했든 아니든, 그는 중국에 대한 비판적 사유의 통로를 외부의 언어가 아닌 바로 중국 자신의 언어로부터 발견하고 있었다. <br /><br /><br /><strong>5. 오늘, 다시 리영희의 중국론을 묻는다</strong> <br /><br />다시 상기하면, 리영희 선생의 중국론은 지구적 데탕트의 기운을 좀처럼 감지하지 못하는 철방 속에 폐쇄된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과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고뇌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전환시대의 논리』로 옥고를 치렀던 그가 「상고이유서」에 적었던 바 “중국에 대한 정확하고 균형 잡힌 과학적 인식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국가와 민족의 안전 및 번영을 보장하는 중요한 길”이라는 인식은 21세기의 오늘의 현실에서도 더없이 적확하다. 오늘날, 선생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국 연구가 번성했지만, 한국 사회가 중국에 대한 ‘정확하고 균형 잡힌 과학적 인식 능력’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냉전 시대 진영과 이념으로 세계를 가르는 관성적 이분법이 한국 사회의 멘탈리티를 지배하는 우상이었다면, 현재 중국과 우리 자신, 그리고 세계를 인식하는 눈을 가리는 우상은 무엇일까. 혐중적 정서가 기층을 넘어 지성의 영역으로까지 확산되는 상황은, 어쩌면 중국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 능력’의 결여로 인해 정확한 비판의 언어를 찾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중국에 대한 비판이 비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되돌아오고 또 세계에 대한 수준 높은 인식으로 연결되는 그런 중국학과 중국 담론이 필요한 지금, 리영희 선생의 중국론이 특히 무겁게 다가온다.</span></span></span></span></span></p>
<p>[caption id="attachment_5268" align="aligncenter" width="472"]<a href="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1.png" target="_blank"><img class="alignnone wp-image-5268 size-large"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1-472x1024.png" alt="" width="472" height="1024" /></a> 리영희 선생이 조선일보 국제부 재직 시절 1965년 제2차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 대해 쓴 연속 특집 기사 '아아의 물결' 중 1편 (조선일보. 1965. 6. 6.)[/caption]</p>
<p>→ <a href="https://rheeyeunghui.or.kr/?page_id=3913&amp;uid=1005&amp;mod=document&amp;pageid=1" target="_blank">'아아(亞阿)의 물결' 1~5편 전문보기</a><br /><br /><br /></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Thu, 04 Jun 2026 23:27:4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11"><![CDATA[리영희다시읽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65.6. '아아(亞阿)의 물결' 1~5편]]></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1005]]></link>
			<description><![CDATA[<p><a href="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1.png" target="_blank"><img class="aligncenter wp-image-5268 size-full"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1.png" alt="" width="1048" height="1200" /></a> <br /><strong>아아의 물결 ①<br />조선일보 1965. 6. 6. <br />「반둥」에서 「알제이」까지<br /></strong><strong>「유색」만의 공동광장<br /></strong><strong>강렬한 저류… 반식민·비동맹</strong><br /><br />아세아와 「아프리카」의 72개 독립 및 독립예정국가가 한 자리에 모이는 제2차 아아회의가 10년 만에 「알제리」 공화국 수도 「알제이」 시에서 이달 29일부터 개최된다. 정부는 여태까지 친공적이라고 배격해오던 대(對) 아아회의관을 바꿔 적극적으로 이에 참석할 의사를 밝혔으나 초청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렇게 중요한 아아회의란 어떻게 탄생했으며, 어떤 성격의 회의인가, 앞으로의 국제정세변동에 적응하여 한국과 아아회의와의관계는 어떠해야할 것인가. 그리고 아아회의에 참석할 경우 한국은 어떤 입장에 서게 될 것인가. 대한민국의 국가적 지위와 대외정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제2차 아아회의를 5회로 나누어 여러모로 다루어본다. &lt;편집자 주&gt;<br /><br />아아회의는 아세아와 「아프리카」 양 대륙의 신생독립국가 인민들이 백인 지배권에 대하여 인간적, 정치적 지위를 향상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이는 유색인종 만의 정부급 공식회의이다.<br /><br />제1차 회의는 1955년 4월 18일부터 24일까지의 1주일 동안 「인도네시아」 공화국 「반둥」 시에서 개최되었다. 이것이 아아회의가 「반둥」 회의라고도 불리는 연유이다.<br /><br />세계 인구의 반을 점하면서도 2차 대전까지 구미 및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서 세계정치의 담당자가 못 되고그 희생물의 위치를 강요당했던 전후 신(新)독립국 29개국 대표가 구(舊) 식민지인민의 단결과 미해방민족의독립을 촉구하려는 목적으로 회합하여 유색인종에 의한 제3세력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br /><br />그러나 「반둥」 회의는 이에 앞서는 중간적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즉 1954년 4월 28일과 같은해 12월 19일의 두 차례에 걸쳐 「실론」국 수도 「콜롬보」에서 당시 미소군사진영의 중간에서 중립세력의 지도자로 인정됐던 인도 「버마」, 「파키스탄」, 「실론」, 「인도네시아」 등 5개국 수상이 「네루」 인도수상의 「이니시에이티브」에 의해 회의창설, 회의목적, 참가국을 결정했던 것이다.<br /><br />「반둥」 회의는 다음 4개 주요 목적을 위해 개최되었다. ① 아아국가의 친선·협력을 촉진하고, 공동이익의 조장을 위한 선린우호 관계의 수립. ② 참가국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공동으로 논의한다. ③ 이미 독립한 인민의국가적 주권 확립과 미해방민족의 독립을 지원한다. ④ 양 대륙국가의 단결의 힘으로써 세계평화에 기여한다.<br /><br />제1차 회의의 밑바닥을 흐르는 기본사상은 신생국 지도자들의 강렬한 「내셔널리즘」·반식민주의·반제국주의·전쟁반대로 표현된다.<br /><br />참가국대표의 자격은 원칙적으로 각료급으로 되어있었으나 대부분의 국가는 국가원수 또는 수상을 파견함으로써 인류사상 최초의 유색인종만의 모임에 의의를 부여했다.<br /><br />신생국가로서의 정치적 미숙과 정치·사회제도의 상이 때문에 구체적 문제의 해결이나 견해일치란 쉬운 일이아니었다. 따라서 회의는 기본사상에서 출발하는 아아국가사회의 원칙과 지침을 합의하는데 그쳤다. 참가국은주최국 정부의 초청에 의한다는 원칙에 따랐다.<br /><br />초청된 29개 국가가 모두 참석했다.<br /><br />「반둥」 회의가 열린 1955년의 「유엔」 가입국 수는 60, 이 가운데 아아회의의 대상이 되는 독립국가로서의「유엔」 가입국은 겨우 아세아 8개국(호주, 「뉴질랜드」 제외), 중동, 「아랍」 6개국, 「아프리카」 2개국에 불과했다.<br /><br />정치·사회제도의 차이에서 오는 참가국 간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반둥」 회의를 꿰뚫는 강렬한 반식민·중립·비동맹적 사상적 이유에서 남「아프리카」 연방은 인종격리정책 때문에, 중화민국(대만)과 대한민국은 그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대한 신흥국가들의 혐오감 때문에 처음부터 초청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북한은 몽고와 함께회의 속에 분쟁을 불러들이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초청되지 않았다.<br /><br />『회의 참가는 어느 특정국가가 딴 특정국가의 국가적 지위에 대한 견해를 변경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다국가회의의 원칙이 채택되었다.<br /><br />이것은 곧 앞으로 있을 제2차 회의에서의 남북한대표 동시참석에 따르는 대한민국정부의 대북괴 관계에 유리한 근거가 되어주는 것이다.<br /><br />아아회의의 성격으로서 결의의 구속력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이 회의에서 표명된 일부 참가국의 견해는 딴참가국이 희망하지 않는 한 딴 국가를 구속하거나, 딴 국가에 의해서 수락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양해로 해결된다.<br /><br />이것은 또 앞으로의 회의에서 있을 「외군철수」 등 한국에 불리한 의제나 결의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의 「면책」 조항적 역할을 해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공동의 광장」을 마련하는데 성공한 제1차 아아회의는 아아국가의 국제적 활동의 지침인 「10개 원칙」을 채택하였다. &lt;禧&gt;</p>
<p>제1차 회의 참가국(29)<br />인도, 실론, 중화인민공화국(중공), 네팔, 일본,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버마, 필리핀, 태국, 북월남(월맹), 남월남, 라오스, 캄보디아, 아프가니스탄(이상 아세아 15),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토이기, 애급, 시리아, 이디오피아, 레바논, 수단, 예멘, 요르단(이상 중동 및 아랍 11), 리베리아, 리비아, 황금해안(이상 아프리카 3)</p>
<p>「반둥」 평화 10개 원칙<br />① 기본인권 및 「유엔」 헌장 목적과 원칙의 존중<br />② 모든 국가의 주권과 영토의 보전<br />③ 모든 인종과 대소국가의 국가적 평등<br />④ 타국에 의한 내정 불간섭<br />⑤ 「유엔」 헌장에 의거한 단독 또는 집단적 방위의 권리<br />⑥ 집단방위협정을 대국의 특수이익을 위해 이용하지 말 것<br />⑦ 타국의 영토 및 정치적 독립을 침해하지 말 것<br />⑧ 모든 국제분쟁을 「유엔」 헌장과 평화적 수단으로 해결할 것<br />⑨ 상호이익과 협력의 증진<br />⑩ 정의와 국제의무의 존중<br /><br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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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a href="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2.png" target="_blank"><img class="aligncenter wp-image-5269 size-full"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2.png" alt="" width="987" height="1200" /></a><br /></strong><strong>아아의 물결 ②<br />조선일보 1965.6.8. <br />「반둥」에서 「알제이」까지<br />국제정세의 방향타 <br /></strong><strong>그 비중 </strong><br /><strong>열 살짜리 거동(巨童)... 약소민족방패로</strong><br /><strong>「맘모스」발언군... 「유엔」쥔 68개국</strong></p>
<p>「반둥」에서 탄생한 제1차 아아회의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아아회의를 통해서 결속한 아세아와 「아프리카」 국가는 국제정치의 담당자로서 어느만큼 강대해졌는가.<br /><br />고(故) 「하마슐드」 「유엔」 사무총장은 이미 1960년 9월 12일 제15회 「유엔」총회에 보낸 총장연차보고 제5항에서 이렇게 지적했다.</p>
<p>『아세아·「아프리카」 세력은 이제 세계의 5대국을 합친 세력에 대등한 힘이 되었다. 양대륙인민들의 要望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유엔」의 기능을 확장, 강화해야 한다.』</p>
<p>아아세력의 단결과 힘을 측정하는 가장 쉬운 척도는 「유엔」이다. 지난 10년 동안 아아지역내의 독립국은 60개국을 넘게 되었다. 더욱이 「아프리카」 신생구가수 16개국이 대량으로 가입한 60년도의 제19차 총회는 「아프리카 총회」라고까지 불렸다.<br /><br />양지역의 독립국은 아세아·중동지역 31개, 「아프리카」 지역 37개, 합계 68개국으로써 전세계독립국 백27개의 과반수를 제압하게 되었다. 「유엔」 내의 세력분포도 급속히 변모하였다. 전체 가입국 백14개국 가운데 금년 1월 탈퇴한 「인도네시아」를 제외하더라도 58개국은 과반수를 제압하고 있다.<br /><br />아아세력을 무시한 「유엔」의 운영이나 결의는 이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60년 12월 14일 제15회 총회는 아아 43개국 공동제안의 「식민지독립선언」을 찬성 89, 반대0, 기권9의 전회일치로 가결시켰다. 채택된 선언은 『모든 형태의 식민지제도를 조속히 그리고 무조건으로 해방·독립시킬 것』을 요구한 것으로, 역사적중요성으로 1948년 제3회 총회의 세계인권선언에 못지않은 것이었다.<br /><br />중국대표권 문제의 표결은 아아세력을 가장 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중공의 중국대표권(가입)을 반대하는 미국과 서방측 입장은 60년 제15회 총회에서 찬반의 차가 8표로 줄어들었다. 이에 당황한 미국은 중국대표권변경 문제를 「중요(실질)사항」으로 지정, 헌장 제18조에 의해 3분의2 다수법안을 제출하게 되어 부결시킬 수 있었으나, 63년도 제18회 총회에서는 찬성 41표, 반대 57표, 기권 12표로 3분의2의 선에 차츰 육박하여 유회(流會)한 작년도 제19회 총회에서는 3분의2선을 돌파할 것이라는 관착을 낳게까지 하였다.<br /><br />정치적독립의 전제인 경제적 자립을 위한 아아국가의 단합된 압력은 마침내 64년 3월부터 6월까지 「제네바」에서 후진국경제를 지원하기 위한 무역개발회를 실현시키고 선진공업국가들로 하여금 그것을 「유엔」의 상설기구로 하는 데 성공했다.<br /><br />그러나 아아세력의 토대와 역할은 「유엔」뿐이 아니다. 오히려 그밖에서의 국제정치에서 약소, 신생국가인민들의 권익을 수호하는 방패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br /><br />미소와 미소를 중심으로 하는 대립적인 냉전체제 사이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아아세력은 또다른 비동맹중립국가회의의 형태로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비동맹회의 참가국은 61년 9월 「베오그라드」 제1차 회의의 25개국에서, 제2회 「카이로」 회의에서는 57개국으로 증가했다. 이 가운데 「유고슬라비아」와 중남미 몇 나라를 제외하고서는 그 핵심은 아아회의 국가인 것이다.<br /><br />그밖에도 아아인민단결회담, 중립국경제회의, 아아경제협력기구 등 모든 분야서의 제3세력 활동은 아아회의국가와 「반둥」 10개원칙을 기본정신으로 하고 있다. 「알제리」를 비롯한 여러 식민지의 해방전쟁을 위한 지원, 전체 「유엔」회원국에 의한 군축회의, 63년 7월의 부분적핵금지협정의 실현, 「콩고」 내란의 중재, 외군기지 철수를 위한 압력, 그리고 최근에는 월남전쟁무조건협상을 위한 「베오그라드」 회의결의 등, 국제정세의 방향을 잡는 주요한 국제적 현상은 아아세력의 역할에 의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br /><br />60년에 「하마슐드」 「유엔」 사무총장이 예언한대로 금년에는 아아세력의 지역적 발언권을 반영하기 위해 「유엔」 안보이사회와 경제사회이사회의 이사국을 증가하는 「유엔」 헌장개정이 실현된다.<br /><br />지난 5일 「버마」 국회의 비준으로 이미 과반수인 76표에 가까운 75개국이 이를 비준했으며, 증가되는 이사국의 대부분은 대한민국을 아아지역국가로 보지 않으려는 아아회의에서 채우게 되어 있다.<br /><br />대한민국의 통일정책과 합법성주장의 유일한 근거가 되어온 「유엔」도 이같이 해서 점점 그 체질을 개선하는 단계에 놓여있다.<br /><br />성장하는 아아국가사회에서 고립했던 한국의 집권자들이 「알제리」회의에의 적극적 참가로 정책을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던 동기가 여기에 있다. &lt;禧&gt;<br /><br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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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 href="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3.png" target="_blank"><img class="aligncenter wp-image-5270 size-full"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3.png" alt="" width="1127" height="1200" /></a><br /><strong>아아의 물결 ③<br />조선일보 1965.6.11. <br />「반둥」에서 「알제이」까지</strong><br /><strong>세 분파 ... 강한 분열징조</strong><br /><strong>주목할 15개 불어사용국의 동태</strong></p>
<p>그러나 아아국가세력의 성장을 과시한 지난 10년은 아아사회의 분열과 고민의 10년이기도 했다. 해결해야만 할 과제도 많다. 「반둥」 회의로써 아아회의의 단결을 과시했던 아아세력에는 동서냉전체제의 해체 과정에 따라 내부적 단결에도 분해 현상이 일어났다. 「반둥」회의 때만 하더라도 신생독립의 정열이 반식민지와 반제국주의노선으로 반사(反射)적인 단결을 가져올 수 있었으나, 독립의 햇수를 거듭함에 따라 아아국가사회는 국가이익과 지도권 쟁탈의 갈등으로 세포분열을 하려는 징조를 드러내고 있다.<br /><br />지난 4월 17일부터 19일까지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열린 「반둥」회의 제10주년기념대회는 크게 나누어서 아아회의국의 세 갈래의 저류를 보여주었다.<br /><br />▲ 급진파 = 주로 중공, 「인도네시아」, 「가나」 등 사회주의 혁명세력으로서 평화공존을 부인하고 일부 신생국가의 「부르조아」적 정권을 「민족해방전선」 조직으로 전복하려는 세력이다. 북한, 월맹, 「말라위」. 「콩고」. 「모리타니아」 등이 이에 추종하여 총수 15개국에 미달하는 소수이지만, 중공의 2회의 핵실험은 아아세력의 유일한 핵국가로서 발언권은 가장 강하다.<br /><br />▲ 온건파 = 아아회의에 속하면서도 동서군사진영감에서 「적극적 중립」 노선을 표방하는 비동맹 국가들이다. 인도, 「실론」, 「유고슬라비아」, 「알제리」, 「아랍」 공화국 등을 중심한 평화공존정책으로 급진세력과 대립한다. 중소이념분쟁, 월남전쟁, 「말레이지아」 등 문제에서도 중공보다 훨씬 온건하며 아세아10개국, 「아프리카」 약30개국의 지지를 받아 아아회의의 주류를 이루는 세력을 구성하고 있다. 「네루」 수상이 없는 온건파는 국가수에 비해 통솔력은 약화된 형편이다.<br /><br />▲ 친서방파 = 아세아에서 일본, 「필리핀」, 태국,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촘베」 대통령의 「콩고」(레오폴드빌)를 비롯하여 합계 10개국 정도로서 우리 정부지도자들이 『이 회의에 나가 직접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한 것도 이 세력에 기대는 바 컸다. 그러나 미국과의 동맹관계에 있으면서도 토이기(土耳其), 「파키스탄」 등 자주의식이 강한 몇몇 국가들은 아아회의의 일반노선에서는 온건세력에 서 있다.<br /><br />지역내의 이해관계에 따르는 대립집단이 있다. 「아프리카」의 친중공적 기수인 「가나」의 「엔크루마」 대통령노선에 반발한 15개 불어사용국(「아프리카·마다가스카르」 공동기구=OCAM) 가운데 9개국은 5월 26일 「낫세르·은크루카」 영도하의 36개국 「아프리카」 통일기구(OAU)의 9월회의 불참을 결의하고, 나아가 아아회의의 「보이콧」으로써 친서방적감정을 밝혔다. 이 9개국은 대부분 한국과의 외교관계가 있는 국가로서 아아회의에 앞서는 우리 정부의 잠재적 지지국가들이다.<br /><br />또한 「이스라엘」 문제로 「튀니지」 「모로코」 「리베리아」 등 국가는 지난 5월 중순 「낫세르」 대통령을 비롯한 그밖의 중동14개 국가와 공개적으로 분열했다.<br /><br />한편 아세아에서는 「말레이지아」에 대해 억지에 가까운 적대정책을 취하는 중공 「인도네시아」 북한월맹 등과 일본 「파키스탄」 인도를 비롯한 대부분의 참가국가가 대립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말레이지아」 문제에서 협조하는 「파키스탄」과 인도는 영토 분쟁으로 「파키스탄」은 중공데, 인도는 일본과 더불어 아세아의 친서방, 반급진 진영을 구성하고 있다. 「수카르노」 주은래 김일성 호지명의 아세아 급진파가 주수상의 「아프리카」 순방을 통해 현재 「아프리카」 다수 국가를 회유하는 외교공작을 전개하고 있는 때를 같이해서 「알제리」의 「벤·벨라」 수상은 아아회의국가에 친서를 휴대한 특사를 파견하여 「티토」 「벤·벨라」 「낫세르」 「샤스트리」(인도)의 온건세력 구축에 분주하다.<br /><br />「알제리」 국회 외교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벤·벨라」 사절단이 7일 북평(北平) 경유 평양을 방문한 것도 이와같은 배경에서 「알제이」에서의 29일 제2차회의를 앞둔 아아회의의 고민을 말해주는 것이다.<br /><br />이렇게 해서 제2차회의는 「반제국, 반식민」의 혁명노선에 초점을 두는 급진세력과 「평화공존, 경제발전을 위한 협조」에 역점을 두는 온건 및 서방국가세력과의 대립이 적지않을 것으로 예상된다.<br /><br />그러나 이모든 대립에도 불구하고 회의의 세로운 의제인 월남전쟁에 관해서만은 미국정책 규탄을 통일노선으로 결속할 전망이 뚜렷하다. 9일에 끝난 15개국 대사급준비회의가 월남정부와 월남에 파군지원하는 한국을 초청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도 월남문제에 대한 아아회의의 강경한 태도를 반영한다. &lt;禧&gt;<br /><br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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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 href="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4.png" target="_blank"><img class="aligncenter wp-image-5271 size-full"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4.png" alt="" width="893" height="1200" /></a><br /><strong>아아의 물결 ④<br />조선일보. 1965.6.12. <br />「반둥」에서 「알제이」까지<br />한국의 좌표</strong><br /><strong>중요한건 「자세」</strong><br /><strong>「월남지원」 적극 설득해야</strong></p>
<p>「알제이」 회의에서 토의될 의제와 한국이 참가 또는 참가 못할 경우의 입장 그리고 아아회의(亞阿會議) 및아아사회(亞阿社會)와 한국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br /><br />작년 4월 「자카르타」 준비회의 결정에 따라 「알제이」 회의에서는 「반둥」회의 10개 원칙의 재확인이라는 일반의제와 구체적 의제로서 ①식민지(신식민지 문제 포함) ②인종차별 ③「유엔」 개편(신생국가회의 문제 포함) ④ 핵금, 군축, 외군기지 ⑤ 분단국가통일 ⑥ 선후진경제협력 ⑦ 아아회의 상설기구 설치 등 생각 할수 있는 거의 모든 문제가 논의 될 것이다. 더욱이 월남전쟁 문제는 「반둥」회의 이후 국제평화를 위협하는 새로운 중대 문제로서 중요시 될 것은 틀림없다.<br /><br />대한민국의 참석을 가상할 때, 위의 의제 가운데서 수세에 서게 될 것이 주로 외군기지, 통일방법, 신식민지, 월남파군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일반의제로서의 「방둥」 원칙과 그 밖의 의제에서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정부가 종전의 소극적인 고립정책에서 적극적인 정책으로 자세를 바꿨다면 찬성할 수 없을 만큼 국시나 대한민국 정치외교정책과 어긋나는 문제들은 아니다.<br /><br />정부로서는 외군기지가 미국의 침략적 군사기지가 아니라 「유엔」 결의에 의한 합법적 「유엔」군이라는 것통일방안에서도 역시 「유엔」 결의에 따르는 통일정책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유엔」의 이름으로 설득할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br /><br />다음 신식민지 문제에서 아아국가들을 지배하는 감정은 정치·경제·군사적인 면에서 외부국가의 간섭에 대해이것을 명목상의 정치적 독립과 구분하려는 경향이다. 「콩고」의 「촘베」 대통령을 이 상징으로 여기는 그들은 월남정부도 이 「카테고리」 속에 넣고 있는 것 같다.<br /><br />한국에 대한 태도는 무엇보다도 월남전에서의 군사적 개입을 비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이 참석할 경우,가장 치열한 공격이 이 문제에 집중될 수 있을 것이고 이 문제야말로 정부가 「자유진영국가의 의무」로서 적극적으로 해명하려던 것이었다. 효과야 있건 없건.<br /><br />15개국 대사급준비회의의 분위기대로 한국의 참석 없는 24일부터의 외상회의에서 유독 월남과 대한민국에 대한 초청문제가 거부된다면, 한국은 「결석재판」을 받는 격이 된다.<br /><br />아아회의를 둘러싸고 일어난 최근의 사태는 외교적 노력에는 해결할 수 있는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br /><br />정부는 「자카르타」 준비회의에 앞서 작년 2월부터 회의대책을 세우고 우방과의 협조, 정세진전의 분석, 작년12월의 구아, 아세아주재공관장회의, 그 결과에 따르는 지난2월 이수영, 최두선 씨를 단장으로 하는 「아프리카」 친선사절단 파견 등으로 약한 국력과 국가재원으로써는 할 것을 다했다고 본다.<br /><br />그러나 「아프리카」 국가를 순방하고 돌아온 양 대표는 6월 3일 국회외무분과위에서의 종합보고를 통해 『우리나라는 대(對) 「아프리카」 외교에서 북괴보다 우위에 서있으나 앞으로의 전망은 반드시 낙관할 수 없다』고 보고하고 명분외교의 지양』을 결론으로 지적했다. 이것은 모든 책임이 외교행위의 졸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외교적·사무적 기술로만은 해결 할 수 없는 아아국가사회의 여건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국은아세아에 있으면서도 월남·대만과 더불어 아세아국가가 아니라는 것이 많은 아아지역 국가의 한국관인 것이다.<br /><br />그렇다면 궁극적인 문제는 한국정치외교의 기본자세가 아아지역국가와 어울리기 힘들다는 데서 이번 아아회의파동의 교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외교전문가들의 말이다. 굳건한 반공노선을 지키면서도 한국은 아아지역 국가사회의 일원이지 서구국가가 아니라는 시대적·지역적 자각과 이 모순된 양 노선을 어떻게 조절하는가가 대한민국이 정면으로 부딪친 국가적 과제이다. &lt;禧&gt;<br /><br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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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 href="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5.png" target="_blank"><img class="aligncenter wp-image-5272 size-full"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5.png" alt="" width="952" height="1200" /></a><br /><strong>아아의 물결 ⑤<br />조선일보. 1965.6.13. <br />「반둥」에서 「알제이」까지<br />국제관례 외면당해</strong><br /><strong>한국초청문제</strong><br /><strong>그동안의 경위</strong><br /><strong>중공 등서 방해공작 「1년계산」에 맹랑한 차질(蹉跌)</strong></p>
<p>정부는 1년 가까이 검토한 끝에 지난 5월말께 「알제이회의」에 참석하는 방향으로 방침을 정하고 대표단인선까지도 구상하여 초청장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알제리」 정부는 초청장을 한국에 보냈다는 간접적인 이야기와 달리, 북괴를 포함한 다른 64개국가에는 초청장을 보냈으면서도 한국에는 아직껏 보내지 않고 있으며 지난 4일부터 닷새동안 열린 15개 상임준비국대사급회의에서 한국초청 문제를 제기하려는 인도 등의 노력을 『「반둥」회의에 참석시킬 수 없는 새롭고 중대한 요소』를 이유로 방해하여 이 문제를 外相회의에 넘김으로써 국제신의와 관례를 크게 깨뜨려 배신했다. 그러면 정부가 1년전에 착수했던 제2차 「반둥」회의 준비에 왜 이와 같은 차질이 생겼는가?<br /><br />외무부당국자는 『우리가 공산측의 방해공작을 예측못한 바는 아니지만 너무 과소평가했기 때문에 그 대책을 소홀히했고 또 이미 작년 4월 「자카르타」 외상회의에서 한국을 초청대상국가 C군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당연히 초청될 줄 알았으므로 「알제리」 정부가 그와같이 국제신의를 저버릴줄은 생각지 못했다』면서 외교적인 「미스」를 솔직하게 시인했다.<br /><br />그러나 외무당국의 실책도 이유가 되겠지만 이 아아회의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여건이 우리의 외교노선과 엇갈린데서 오는 작용도 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br />세계적으로 특히 아아지성(亞阿地城)에서 크게 말썽이 되고 있는 월남전쟁에 파병한 일이나 중동에서 「아랍」 제국과, 또 동남아에서 「인도네시아」와 견원지간인 「이스라엘」 및 「말레이지아」와 친교를 맺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인도네시아」의 방해공작도 예측할 수 있으며 「아랍」 공화국의 협조도 크게 기대할 수는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br /><br />외무부가 지난한햇 동안 해외전공관을 통하여 각국의 동태를 면밀히 지켜본 것도 이와 같은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당연한 일인 것이다.<br /><br />그 준비활동은 초청장이 오는 경우를 가상해서 참석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자료수집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 같으며 이 회의의 주최국인 「일제리」 정부나 우리의 대적 상대가 될 북괴의 동향에 대해서 지나치게 어두웠던 것이다.<br /><br />지난 5월 신현준(申鉉俊) 주 「모로코」 대사가 「알제이에 갔올때만 해도 몹시 우호적이라고 보고했을 뿐 「알제리」 정부의 속셈이나 북괴 및 중공대사관의 동향에 대해서는 거의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그 활동이 피상적이었던 것 같다.<br /><br />정부가 이 회의 참석 문제를 당면과제로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을 다녀올 무렵이나 한달도 안 되는 셈이다. 외무부당국자들은 부인하지만 정부는 이때 미측과 이 문제를 협의한 것 같으며, 이 무렵 우방 여러나라도 한국이 같이 참석할 것을 권고해와 외무부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br /><br />그동안 해외공관으로부터 받은 오백여통의 電文報告를 토대로 참석할 때와 불참할 때의 각각 이해득실을 따져 5월 28일 정일권(丁一權) 총리에게, 다음날에 박대통령에게 각각 보고했다.<br /><br />외무부 보고에 의하면 참석하는 경우 ① 불참으로 아아지역에서 고립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② 북괴나 중공측의 한국 문제에 관한 일방적인 제기나 공세를 막을 수 있다. ③ 친서방 및 온건파 여러나라와 제휴하여 아아회의의 좌선회를 막는 데 기여한다는 이점을 들 수 있고, 불리한 점으로는 ① 두 개의 한국관에 영향을 준다. ② 반식민, 제국주의 등 우방에 불리한 의제와 월남문제가 논의되기 쉽다는 점을 들어 큰 성과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불리한 영향은 막을 수 있다는 이유로 참석하는 쪽이 유리하다는 것이었으나 결국은 중공·북괴 등의 방해공작을 당한 것이다.<br /><br />외무부는 아직도 인도 「이란」 「이디오피아」 「아랍」 공화국 등 여러나라가 격분해서 한국초청을 위해 싸우고 있으므로 우리가 일방적으로 태도표명을 할 시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나 「아프리카」의 「오캄」(전 불령 식민국가) 10개국을 포함하여 11개국가가 불참을 선언했고, 앞으로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고 정세가 유동적이기 때문에 불참문제도 고려하면서도 태도표명을 보류하고 있는 상태인데 최종방침의 공식발표는 24일부터 있을 외상회의 직후가 될 것 같다. &lt;五&gt; 끝.<br /><br /></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Thu, 04 Jun 2026 22:39:1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30"><![CDATA[신문기사]]></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조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기자, 거기 누구 없소? / 정욱식]]></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1004]]></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color:#333333;"><strong><span style="font-size:2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조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기자, 거기 누구 없소?</span></strong></span><span style="color:#333333;"> </span></p>
<p><img class="alignright size-full wp-image-5160"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4/%EC%A0%95%EC%9A%B1%EC%8B%9D-248X310.png" alt="" width="248" height="31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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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font-size:17px;color:#333333;"><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r /><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font-size:17px;">정욱식(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span></span></span></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em> ‘내고향팀이 올 것 같아요?’</em> <br /><br />2025~2026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챔피언스리그(AWCL) 대회 준결승과 결승이 한국의 수원에서 열리고 조선(북한)의 내고향여자축구단이 4강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여러 사람들이 던진 질문이다. “안 온다고 하네요.” 나는 4월 중하순에 평양을 방문하고 서울로 돌아온 한 호주 동포로부터 들은 이 얘기로 답변을 대신했다. 이 동포는 조선축구협회 관계자로부터 ‘불참’ 의사를 확인했다고 했다. <br /><br />“정 선생, 올 것 같으니 공동응원을 준비하면 좋겠어요.” 또 다른 대북 소식통은 ‘윗선에선 다른 판단을 하고 있다’며 나에게 올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그 징후로 4월 말에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리는 국제축구연맹(FIFA) 평의회를 주목하라고 주문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여자축구의 선전은 아시아 대륙 전체를 환하게 밝히는 등불입니다.”<br /><br />살만 빈 이브라힘 알칼리파 아시아축구연맹(AFC) 회장이 밴쿠버에서 김일국 조선축구협회 회장에게 한 말이다. 인도의 시인인 타고르가 식민지 조선을 가리켜 ‘동방의 등불이 될 것’이라는 취지로 쓴 시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살만은 “조선 여자축구는 세계적인 모델이며, AFC는 앞으로도 조선축구협회의 포부를 지원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AFC가 내고향팀의 방한을 성사시키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br /><br />엇갈린 소식을 접하면서 반신반의하던 5월 4일에 뉴스 속보를 접했다. 내고향팀이 온다는 것이었다. 그 전에 나는 정부와 민간단체 관계자들에게 내고향팀이 오면 공동응원단을 구성하자고 제안했던 터였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한겨레통일문화재단과 평화네트워크는 지난 3월 호주에서 열린 아시안컵 여자축구 대회에 시민 응원단을 조직해 호주 동포들과 한국팀과 조선팀을 열띠게 응원한 바도 있었다. 민간단체들과 다양한 경로로 대화를 이어가면서 5월 11일과 5월 13일 두 차례의 회의를 갖고 ‘2026 AFC-AWCL 여자축구 공동응원단’을 결성하기로 했다. <br /><br />이 공동응원단에는 시민사회단체 연대기구들인 남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시민평화포럼, 자주평화통일연대 등과 한겨레통일문화재단 등 200여 개 단체들이 함께하기로 했다. 회의에 모인 관계자들은 빗발치는 언론의 취재 요청에 효과적으로 임해 달라며 필자를 단장으로 선출했다. 아울러 내고향팀만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수원FC도 응원한다는 취지로 준결승의 공식 응원 명칭도 ‘수원FC 위민과 내고향여자축구단 공동 응원’으로 정했다. 어느 팀이 올라가도 결승전 응원에도 나서기로 했다. <br /><br />하지만 ‘우리 국민 혈세 3억 원으로 북한 축구팀 응원’이라는 취지의 보도가 계속 쏟아졌다. 일부 언론은 ‘관제 응원’이라는 프레임까지 씌웠다. 그런데 이번 공동응원은 ‘선민후관’이었다. 민간이 먼저 공동응원단을 조직하겠다는 의사를 정부에 전하자 정부도 남북교류협력기금 등을 통해 협력하겠다고 응답하면서 이뤄진 것이었다. 물론 ‘민간단체의 공동응원을 세금으로 지원하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문제제기는 뼈아프게 다가왔다. 남북교류협력을 지원하는 데에 주목적이 있는 교류협력기금 사용이 공동응원에 부합한다고 판단했지만, 대의를 앞세운 나머지 여론의 반응을 미리 살펴보지 못한 점은 불찰이었다. <br /><br />‘하늘도 야속하지.’ 전날까지 쾌청했던 하늘은 수원FC와 내고향팀의 준결승이 열린 20일 저녁에는 거센 비바람에 자리를 내주었다. 경기 직전 나의 시선은 ‘이번에도 조선 선수들이 하이파이브를 거부할까’에 맞춰졌다. 열흘 전 중국 쑤저우에서 열린 17세 이하 여자대표팀 경기에서 조선대표팀은 한국 선수들의 악수도, 하이파이브도 받지 않았던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 선수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하이파이브도 했고 경기 중 넘어진 수원FC 선수의 팔을 두드리기도 했으며 경기 후에는 가벼운 손 인사도 나눴다. 공동응원단의 목표가 ‘평화’와 더불어 ‘페어플레이’였는데, 조금이나마 이 정신이 구현된 셈이다. <br /><br />‘어느 팀을 응원하세요?’ 많이 받은 질문이었다. 단장으로서 양 팀의 선전을 기원한다면서 ‘무승부’라고 말하다가 말끝을 흐리곤 했다. 이번 경기는 반드시 승부를 가려야 했고, 본 경기가 연장전을 거쳐 승부차기까지 가면, 어느 팀이 결승에 올라도 경기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공동응원단을 향한 후폭풍이 걱정된 탓인지, 수원FC가 올라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고향팀의 2 대 1 역전승으로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을 때에는 기쁨에 겨워 껑충껑충 뛰는 내고향 선수들과 얼굴을 감싸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수원FC 선수들의 모습이 교차되면서 내 눈가에도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이슬이 맺혔다. <br /><br />악천후 속에서도 약 2200명이 함께한 공동응원에 대한 언론의 평가는 인색했다. 일부 언론에선 ‘내고향팀 응원 소리가 더 컸다’거나 ‘지소연 선수가 페널티킥 실축을 했을 때 환호성이 나왔다’는 식의 보도를 내놨다. 하지만 수원FC가 우세할 때에는 내고향의 분발을, 내고향이 앞서갈 때엔 수원FC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더 높았다. 지소연의 실축에도 환호했다기보다는 ‘아〜’하는 탄식 소리가 더 컸다.</span></span></span></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사흘 후 뙤약볕이 내리쬔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열린 결승에선 내고향이 일본의 도쿄 베르디 벨레자를 1대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내고향 선수들은 기쁨에 겨워 인공기를 들고 손을 흔들면서 경기장을 돌았다. 선수들이 공동응원단 앞에 이르자 2천 명에 육박한 공동응원단은 열렬한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내고향’에서 왔다고 여겼는지 조선이 고향인 이산가족과 북향민의 환호가 더 컸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span></span></span></span></span></p>
<p>[caption id="attachment_5265" align="aligncenter" width="790"]<img class="size-large wp-image-5265"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A0%95%EC%9A%B1%EC%8B%9D-1024x768.jpg" alt="" width="790" height="593" /> 내고향여자축구단과 도쿄 베르디 벨레자의 결승전에서 응원 중인 필자(출처: 필자)[/captio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조선 선수들이 ‘적대국’이라고 배운 한국에 와서 일본팀을 꺾고 우승하고, 한국 시민들은 인공기를 펼쳐 들고 자축하는 조선 선수들을 열렬히 축하해주는 장면.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저 선수들은 우리를 보며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들을 수 없는 질문을 떠올리던 사이에 옆에 있던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가 소감을 물었다. “정치가 아직 하지 못한 일을 스포츠가 먼저 보여줬고, 응원단이 동포애로 이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답했다. <br /><br />이번 대회 나의 또 다른 관심은 ‘내고향 선수단이 기자회견에서 한국 기자의 질문에 어떻게 응할까’에 있었다. 내고향 감독인 리유일은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2023년 9월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여자축구 한국과의 8강전 이후 진행된 기자회견과 2024년 2월 ‘파리 올림픽’ 여자축구 아시아 최종예선 일본과의 경기를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국 기자가 ‘북측’이나 ‘북한’이라고 표현하면서 질문하자 공식 국호를 사용하지 않으면 답하지 않겠다고 말한 바 있었다. 두 달 전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한국을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공인하고 가장 명백한 언사와 행동으로 철저히 배척하고 무시하면서 다루어 나가겠다”고 밝혔던 터였다. <br /><br />그런데 결승에 앞서 여러 차례 있었던 공식 기자회견에서 내고향 선수단은 한국 기자들과도 일문일답에 응했다. ‘어? 배척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네.’ 기자회견장에 들어갈 수 없었던 나는 동영상을 살펴보고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에게 물어본 결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국 기자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조선’과 같은 공식 국호도 사용하지 않고 조선이 질색하는 ‘북한’이나 ‘북측’이라는 표현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질문하자, 리유일 감독과 김경영 선수도 하나하나 답을 이어갔던 것이다. 국가대항전이 아니라 클럽 간 경기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br /><br />이는 우승 기자회견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기자회견 막바지에 한 기자가 “북쪽, 북측 여자 축구가 과거부터 굉장히 수준이 높다”고 말하면서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리 감독은 “호칭을 좀 바로 해달라”고 했는데, 해당 기자는 “어떻게 해드릴까”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조선 축구단 통역사는 “국호를 바로 해달라”고 했고, 옆자리에 있던 최우수선수(MVP) 수상자이자 주장인 김경영 선수는 “우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질문을 던진 기자 입에선 끝내 공식 국호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이날 기자회견은 내고향 선수단이 항의의 뜻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기자회견장을 떠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br /><br />이를 두고 여러 언론은 조선 선수단이 ‘적대적 두 국가론’을 재확인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과연 이렇게만 해석할 수 있을까? 만약 해당 기자가 호칭을 ‘무음’으로 처리했다면 어땠을까? 더 나아가 공식 국호를 사용했으면 어땠을까? 한 단어의 차이가 빚어낸 결과가 너무나도 컸기에 던지는 탄식어린 질문이다. <br /><br />아마도 내고향 선수단은 한국 기자가 ‘북한’이나 ‘북측’이라고 부르면서 던지는 질문에는 일절 답하지 말고 항의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2023년 7월부터 조선은 ‘남조선’ 대신에 대한민국, 한국으로 표현하기 시작했고 ‘두 국가’를 선언한 이후에는 이러한 기조가 더욱 강해지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 언론은 공식 국호 사용을 여전히 꺼린다. 흔히 스포츠는 정치와 분리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적대적인 남북관계에서 스포츠마저도 정치에 종속되어 있는 현실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br /><br />그런데 호칭 문제를 둘러싸고 ‘차집합’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 기자가 이 부분을 무음으로 처리해 질문하면 내고향 선수단은 답변을 했다. 한국의 ‘특수관계론’과 조선의 ‘두 국가론’ 사이에 ‘기묘한 교집합’이 확인된 셈이다. 이는 조선이 두 국가론에 대한 입장은 확고한 반면에 적대성에 있어서는 가변적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성찰이 필요하다. 조선이 적대적이고 모욕적이라고 간주하는 표현을 고수하면서 적대성의 책임을 저쪽으로만 전가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를. <br /><br />기실 내고향팀의 방한 자체가 적대성이 완화되었다는 증표라고 할 수 있다. 불과 2년 전처럼 양측이 풍선을 날리고 확성기 방송을 틀어대면서 일촉즉발의 상태가 계속되었다면, 내고향팀의 방한은 성사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내고향 선수들이 수원FC와의 경기에서 보여준 페어플레이와 ‘국호 무음’ 질문에 답변을 한 기자회견을 떠올려 보면, 적대성을 조금씩 풀어갈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희망을 담아 묻게 된다. 다음 국제경기에서 조선 선수단에게 공식 국호를 사용해 질문해 볼 기자, 누구 없소? <br /><br />끝으로 이번 공동응원과 관련해 색다른 소회를 밝히고자 한다. 우리 응원단을 격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일부 한국 언론 및 축구팬과 내고향 선수단은 우리에게 공히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국내에선 ‘왜 우리팀이 아니라 공동응원을 했냐’는 핀잔이 나왔고, 내고향 선수단은 경기장에 모인 공동응원단을 없는 존재처럼 대했다. 나는 전자의 반응에는 동포애를 이해해달라고, 후자의 반응에는 동포애를 잊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싶다. <br /><br />동포애? 국내에선 분단이 장기화되고 남북 교류협력마저 끊기면서 동포애를 느끼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이번 공동응원을 통해 우리 국민의 마음속에 동포애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에선 김정은 위원장이 “한국을 동족에서 영원히 배제하겠다”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동족 개념 지우기에 바쁘다. 이러한 조선의 기조에는 같은 민족이라는 한국에 대한 배신감과 좌절감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을 게다. 그런데 이해와 존중과 사랑의 정신이 담긴 동포애는 다르다. 나는 우리의 이런 마음을 조선에 전하는 것이 ‘적대적 두 국가론’에 가장 우호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span></span></span><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r /></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p>
<p>[caption id="attachment_5266" align="aligncenter" width="790"]<img class="size-large wp-image-5266"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A0%95%EC%9A%B1%EC%8B%9D_%EC%99%B8%EA%B5%AD%EC%9D%B8%EC%82%AC%EC%A7%84-1024x768.jpg" alt="" width="790" height="593" /> 수원FC와 내고향여자축구단의 준결승 경기. 왜 왔냐는 질문에 특별한 기회 아니냐며 등을 돌려 'GROW TOGETHER SHINE FOREVER(함께 성장하며 영원히 빛나길)'라는 문구를 보여준 외국인 가족(출처: 재단)[/caption]</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Wed, 03 Jun 2026 19:14:2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11"><![CDATA[리영희다시읽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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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나와 리영희' 출간기념 광주·전남 북토크｜2026.04.21]]></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1003]]></link>
			<description><![CDATA[<p><iframe title="YouTube video player" src="https://www.youtube.com/embed/EMzsF9YnffI?si=2VfDZLRAVfu_ldKy" width="560" height="315"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Mon, 11 May 2026 15:00:33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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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유영수·김영희 부부 토크쇼｜2025.06.27]]></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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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iframe title="YouTube video player" src="https://www.youtube.com/embed/TbhvqFHidXA?si=PZ82Lg-COMs_B7Eu" width="560" height="315"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Mon, 11 May 2026 14:58:2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28"><![CDATA[유튜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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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뉴스레터 제48호]]></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1001]]></link>
			<description><![CDATA[<p><iframe src="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8pb2zEr7oU2cJD_JElr1we0uYchk3Bs" width="100%" height="1500" allowfullscreen></iframe></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un, 10 May 2026 12:05:0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27"><![CDATA[뉴스레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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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리영희가 김동춘에게 보내는 서신]]></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1000]]></link>
			<description><![CDATA[<p><img class="aligncenter wp-image-5245 size-large"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5/%EB%B4%89%ED%88%AC-512x1024.png" alt="" width="512" height="1024" /> <img class="aligncenter size-large wp-image-5246"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5/%ED%8E%B8%EC%A7%801-659x1024.png" alt="" width="659" height="1024" /> <img class="aligncenter size-large wp-image-5247"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5/%ED%8E%B8%EC%A7%802-659x1024.png" alt="" width="659" height="1024" /></p>
<p>김형, <br />안 표지에 서명하여 역사비평사를 통해서 우송해준 역저 &lt;한국사회노동자연구&gt;를 고맙게 받았습니다. 나의 딸이 연세대 생물학과에 들어가더니(82년) 2학년에 올라가면서 인천구로지역 공장에 들어가 6년간을 거의 소식도 없이 지내고 87 이후에는 복교와 제적을 거듭하다 93년에 졸업이라고 해요. 그래서 언제나 이른바 ‘학출노동자’에 관심이 깊어서, 김형의 책 363 페이지 “대학출신...”부터 읽어보았습니다. 도대체 얼나마 많은 학생들이 ‘학출’로 들어갔던 건지? 지금도 나에게는 그것이 궁금해요. 그 낭만적이고 희생적이고 정의심이 강했던 젊은이들! 그러면서 “혁명”의 꿈의 좌절에 눈물을 머금고 현장을 떠난 젊은이들. 김형의 책 서문에 그들의 일부가 현재의 노동운동의 주요 지도자층을 이루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는데, 이탈했거나 남아있거나 나는 나의 딸을 통해서 그들의 “순정”을 고귀하게 여기는 거지요. 궁금해서 러시아 혁명 전시기의 “브나로드”와 “나로드니키”의 수량적 동태를 알고 싶어서 사놓고 30년이 되는 E. H. 카의 &lt;볼셰비키 혁명&gt;을 다시 한번 훑어볼 기회가 되었습니다. 목적과 초지를 달성했느냐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리고 또 학출들의 전술과 행동상의 문제점들을 숙지하면서도 그 시기 노동의 현장으로 꿈을 품고 뛰어들어갔던 학생들을 나는 눈물겹도록 사랑하는 거지요. 대학출신 노동자의 형성과 활동이 좀 더 많은 내용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보내준 배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몇 줄 적어서 보내는 바올시다.</p>
<p>뜻깊은 추석이 되기를 바라면서 1995년 9월 000 리영희</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un, 10 May 2026 10:04:0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7"><![CDATA[편지글]]></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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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리영희 선생님과 나 / 김동춘]]></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999]]></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color:#333333;"><strong><span style="font-size:2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리영희 선생님과 나</span></strong><br /></span></p>
<p><img class="alignright size-medium wp-image-5250"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5/%EA%B9%80%EB%8F%99%EC%B6%98_248X310238X300-240x300.png" alt="" width="240" height="300" /></p>
<p> </p>
<p> </p>
<p> </p>
<p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font-size:17px;color:#333333;"><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r /><br /><br />김동춘(성공회대 명예교수, 좋은세상연구소 대표)</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1970년대에 대학을 다닌 주변의 동료 선후배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1977년 대학 입학 후 리영희 선생님의 글과 책을 읽었다. 당시는 학생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던 학생들도 교양 차원에서 리영희 선생님의 글을 많이 읽었지만, 리영희 선생의 글은 당시의 반독재 투쟁이나 학생운동 서클에 가담했던 대학생들에게 가장 큰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대 중반은 유신의 억압이 극에 달하기도 했지만, 다른 편으로는 한국에서 ‘제3세계’ 인식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아마 국제적인 데탕트의 분위기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산업화가 본격화되고 도시 빈민이나 노동자층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면서 1960년대 말까지 학생들이나 지식인들이 갖고 있었던 자유주의 분위기나 낭만 지향이 점차 사회과학적 문제의식으로 변화된 것도 리영희 선생의 저작이 널리 읽히게 된 하나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br /><br />나는 가끔씩 후배 학자들이나 외국인들로부터 왜 한국에서는 미국과 유럽에서 발생한 68혁명과 같은 것이 없었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그런 질문은 대체로 분단 한국이 처한 극우반공주의와 그리고 당시 한국이 경제적으로 후발국에 있었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질문이다. 일본에서까지 확산된 당시 청년들 주도의 68혁명, 특히 베트남전 반대운동은 기본적으로 서구 자본주의의 일정한 변화와 성숙, 그리고 대학이나 주류 보수 지식사회의 자기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한국은 후발 개발독재 국가이자 미국의 자유주의 정치 이데올로기의 직접 영향권 하에 있었기 때문에 서구 진보 지식인이나 학생들처럼 마오쩌둥의 중국도 호치민의 베트남도 낭만적 시각으로 바라볼 정신적 공간이 없었다.<br /><br />1964년 이후 한국은 베트남 전쟁(월남전)에 수십만명의 군인을 파견했고, 학교나 마을에서 ‘월남 갔다 온’ 이웃집 아저씨들이 무용담 특히 한국 군인들이 공산주의 베트콩을 ‘동물’처럼 죽였다는 이야기(나중에 알고보니 사실상 한국군이 저지른 대량 학살)를 듣기도 했지만, 한국의 분단 상황과 베트남의 내전을 같은 국제정치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즉 ‘자유 진영’ 담론이 압도하던 박정희 군사정권 하의 한국에서 베트남 전쟁을 제대로 바라보거나 비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br /><br />이런 상황에서 리영희 선생님이 &lt;창작과 비평&gt; 지면에 베트남 전쟁 관련 논문을 기고하고, 그것을 책으로 묶어서 &lt;전환시대의 논리&gt;를 펴냈을 때, 한국의 대학생들이 받은 충격은 정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를 비판했던 어떤 지식인들도 베트남 전쟁의 사례를 끌어와서 한국의 남북한 분단 상황, 냉전적 국제정치를 다르게 보자고 설파한 사람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섬나라’ 남한에서는 북한은 물론 남한 자체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리영희 선생님의 &lt;전환시대의 논리&gt;는 한국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허구적 ‘제1세계주의’에 일대 경종을 울린 저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리영희 선생의 평론들은 너무나 상식적인 접근이지만, ‘동토의 한국’에서는 상식이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었다. <br /><br />이 이후에 나온 &lt;우상과 이성&gt;, &lt;8억인과의 대화&gt; 등의 저서도 학생들과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죽의 장막으로 알려진 사회주의 중국의 다른 모습을 드러낸 것도 상당히 위험한 시도였다.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에 반대하던 지식인과 청년들이 강고한 반공이데올로기 때문에 북한은 아예 거론할 수도 없었고, 중국에 대해서도 접근하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중국과 중국혁명을 소개하는 책자는 몇 권 있었지만, 그것은 약간의 학술적인 접근이었고, 사회주의 중국의 ‘다른 모습’을 거론하는 것은 금기에 속했다. <br /><br />어쨌든 리영희 선생님은 한국의 분단 상황을 직접 거론하기 보다는 베트남과 중국을 끌어와서 한국이 처한 민족 현실, 그리고 냉전 국제정치 하에 처한 위상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촉구하였고, 그것은 군사정권의 강고한 반공이데올로기에 작지만 치명적인 균열을 일으킨 것이었다. 검사들의 기소장에 나타난 것처럼 공안당국은 그의 논문이나 논평이 당시의 베트남이나 중국의 실제 모습을 제대로 그려내기보다는 친중국, 친사회주의 지향을 은밀하게 드러내면서 젊은이들을 선동했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 식의 비판은 80년대 이후 공식 매체나 보수 지식인들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냉전체제가 허물어지고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이 시작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의 국제정치 인식이나 한국 현실 진단은 훨씬 더 진보적이고 선구적이었다. <br /><br />1987년 민주화는 한국에서의 냉전 이데올로기의 도그마를 흔들었다. 정치적 민주화는 시민사회나 사회운동의 대폭발을 촉발했다. 그래서 1988년 이후 몇 년 동안 한국은 대학, 사회 각 영역, 그리고 노동현장에서 거의 전쟁과 유사한 폭력이 벌어졌다. 그런데 1989년 천안문 사태와 소련 동구 사회주의가 무너진 대충격이 발생했다. 그래서 한국의 진보적 학생 청년들이 막연하게 갖고 있던 사회주의에 대한 기대나 호기심이 크게 도전을 받게 되었다. 물론 당시 일부 반독재 투쟁에 투신한 한국 청년들이 친사회주의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한국 자본주의와 군사독재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것이 많았기 때문에 한국 사회 변혁은 이런 세계적 변화와 무관하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br /><br />따라서 소련 동구 사회주의 실험, 그리고 중국 및 사회주의 일반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둘러싸고 운동진영 내에서 격렬한 논쟁이 진행되었다. 그와 동시에 정치 사회 각 영역에서 민주화가 진척되고 급진적인 사회운동 그룹의 활동이 가시화되자, 사회주의 붕괴라는 거대한 뒷배를 얻은 한국 보수언론과 기득권 세력은 진보적 지식인들에 대한 색깔 공세를 더욱 세차게 했다. 이런 조건에서 리영희 선생님의 중국론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br /><br />1989년, 나는 역사문제연구소의 상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lt;월간조선&gt; 기자가 나를 찾아왔다. 대학 후배라고 하면서 나를 찾아온 이유는 리영희 선생님에 관한 생각을 듣자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나를 왜 인터뷰 대상으로 삼았는지는 알 수 없는데, 아마 내가 당시 리영희 선생님의 영향을 받는 세대의 소장 진보 학자로 알려졌기 때문에 내 발언을 통해서 리영희 선생님에 대한 사회적 존경 혹은 도덕적 위상을 무너뜨리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이 기자는 리영희 선생의 &lt;8억인과의 대화&gt; 등에 실린 중국 관련 평론 들을 문제 삼으면서 “리영희 선생의 글이 과연 사실에 부합하는가, 상당한 허점을 갖고 있지 않나”라고 거의 2시간 이상 꼬치꼬치 물으면서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당신들이 리영희를 까는 목적이 뭐냐? 누구나 자신이 쓴 평론이나 논문에서 사실을 틀리게 적시할 수도 있고, 논리에도 허점이 있을 수 있는데, 지금 리영희 선생의 평론을 난도질해서 밝히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고 소리 지르며 인터뷰를 중단했다. <br /><br />순진했던 나는 그들이 그렇게 집요하게 리영희를 문제삼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지나고 보니 자신들이 보기에 지적 권위와 도덕성을 가진 운동진영의 지식인이나 지도자들의 허점을 까발리면서 민주화 세력이 실제로는 친북성향을 가지고 있는 ‘좌익’들이며, 그것은 민주화 운동 자체가 사실 사회주의 운동의 일환이라는 것을 들추어내서, 민주화 세력에게 큰 흠집을 내기 위한 음험한 정치적 기획이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곧 그것은 이미 민주화 이후 본격화된 조선일보의 ‘사상투쟁’의 일환이었고, 한국 수구세력의 위기감을 반영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아마 그가 취재한 내용, 나의 생각 일부가 이후 &lt;월간조선&gt;에 실렸겠지만, 나는 그것을 찾아보지 않았다. 이 무렵부터 나는 &lt;조선일보&gt;를 더 이상 보지 않았다. 그들이 집요하게 리영희 선생님을 물고 늘어진 정치적 이유를 명백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군사정권 시기는 공안기관이나 군대가 폭력적으로 반정부 세력을 진압했는데, 이게 민주화로 그런 보호막이 사라지자, &lt;조선일보&gt;가 반공체제 유지의 선봉장이 된 것이다. <br /><br />그런데 사실 당시 내가 겪었던 일련의 일들은 사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전 세계에서 발생한 현상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국의 반독재 민주화 세력 일반을 좌익, 혹은 친북 세력이라고 이데올로기적 흠집을 내면서 군사정권 혹은 반공자유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 무렵 리영희 선생님도 자신의 이론이나 사상, 특히 중국에 대한 일련의 평론에 대해 여러 가지 고민을 했을 것이다. 나는 월남자이자 군 장교 출신인 그가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평론 활동을 했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남한사회의 닫힌 이데올로기 지형을 참을 수 없어서 지적 자유를 외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다. <br /><br />1991년인가 연대 장기원 기념관에서 열린 리영희 선생님의 자기반성적인 논문 발표 – 즉 인간의 이기주의적 속성에 대해 사회주의 사상이 제대로 천착하지 못한 점을 강조한 것으로 기억난다 – 자리에는 수많은 ‘운동권’ 젊은이들이 구름같이 몰려서 거의 설 자리도 없을 지경이었다. 나도 서서 그의 발표를 들었다. 당시 보수 매체에서는 리영희의 당시 발언에 대해 한국의 친사회주의적인 지식인의 자기반성이라고 그 발표회를 부각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한 지식인의 전향선언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리영희 선생님을 포함하여 한국의 민주화 운동 관련 청년들도 북한이나 중국 사회주의, 소련 동구 사회주의 체제를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도 없었고, 그럴 기회도 없었다. 단지 한국의 군사독재와 정치 경제체제에 대한 거부감이 오히려 그 반대편인 사회주의에 대한 우호적 감정으로 나갔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부모 세대인 리영희 선생님도 우리가 동시대인이었던 셈이다. <br /><br />원래 나는 마르크스와 레닌도 좀 읽었고, 중국혁명에 대해서도 약간은 알고 있었으나 당시 운동진영의 주류라 할 수 있는 반미 민족해방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고, 사회주의에 대해 낭만적인 생각을 갖지는 않았기 때문에 리영희 선생의 발표가 그다지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의 부모들과 비슷한 연배인 리영희 선생님이 이런 점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았단 말인가 하는 생각까지도 가졌던 기억이 난다. 즉 사회주의가 붕괴했다고 해서 한국 자본주의 체제의 모든 모순이나 반공주의 지배체제가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었고, 한국의 지식인이나 사회운동 진영의 투쟁 과제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사회주의 이상을 바라보며 반독재 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았던가? <br /><br />내가 리영희 선생님을 글과 책으로만 접하거나 먼발치에서만 보다가 직접 대면하게 된 것은 1995년 &lt;역사비평&gt; 대담에서였다. 당시 역사비평은 ‘나의 학문 나의 인생’이라는 난을 만들어서 원로 학자들의 이력과 학문적 업적과 고민들을 소개하였다. 주로 편집위원들이나 해당 분야 전공자들이 인터뷰어로 참가했다. 리영희 선생도 당연히 대상이 되었는데 누가 적당한 인터뷰어인지 좀 결정하기 어려워 서중석 편집장도 고심하였다. 그러다가 서중석 선생님이 결국 나보고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리영희 선생님은 신방과 소속이고 기자 출신인데다, 주로 국제정치 쪽 글을 써왔기 때문에 이 분야를 모두 포괄하는 인터뷰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지식인으로서 그의 활동을 부각한다면 언론, 국제정치 분야의 전문가보다는 지식인 일반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적절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나를 지목한 것 같다. <br /><br />내가 리영희 선생님을 인터뷰하기에는 좀 역부족이라 속으로 생각했지만, 한번 해보겠다고 답했다. 그래서 그때가 리영희 선생님이 출간한 책과 글을 거의 다 읽으면서 인터뷰 준비를 했다. 특히 중국 쪽에 대해서는 내가 별로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특별히 이런 저런 자료들을 읽으면서 인터뷰 준비를 했다. 그것이 바로 &lt;역사비평&gt; 1995년 여름호에 실린 “'나의 학문 나의 인생: 리영희 - 냉전 이데올로기의 우상에 맞선 이성의 필봉”이다. 산본의 한양아파트 찾아가서 몇 시간 동안 대담을 했는데 사실 내가 오히려 배우는 것이 많았다. 이 인터뷰는 당시 지식인들에게 많이 읽혔고, 강준만 교수는 이후 &lt;인물과 사상&gt;에서 나 개인에 대한 서술을 하면서 이 인터뷰의 주요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br /><br />인터뷰 석상에서 나는 여러 가지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많이 던졌다. 그러나 그는 성내지 않고 매우 성실하고 솔직하게 답변했다. 그가 군사정권 시절 그렇게 금기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점을 궁금하게 생각했다. 월남자인 그는 남한에서 자라서 군사정권에 대해 거의 입도 벙긋하지 못했던 나의 부모 세대 사람들과는 매우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래서 그의 용기는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죽고 죽이는 ‘톱질 학살’을 처절하게 겪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했다. 즉 월남자들은 흔히 맹목적 반공주의라고 알고 있지만, 리영희 선생처럼 향우회 등에 한 번도 나가지 않는 사람, 남한 사람들보다 유교적 권위주의에 덜 물들어 있고, 반공주의의 공포에 덜 찌들어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점들이 나로서는 다시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br /><br />이후 나는 새 책을 출간할 때마다 리영희 선생님께 보내드렸고, 리영희 선생님은 번번이 친절한 답신을 보내왔다. 답신에는 반드시 약간의 소감과 소회를 적었다. 나도 그런 성의에 느낀 바가 많아서 한동안 저자로부터 책을 선물받으면 반드시 편지나 엽서를 보냈고, 이메일이 활성화된 이후에는 메일로라도 책을 잘 받았다고 답을 보냈다. <br /><br />2000년 제주인권회의에서 리영희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당시 조용환 변호사가 대한항공 등의 후원을 받아서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이던 1998년부터 매년 제주에서 여러 전문가들을 초청해서 인권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2000년 인권회의가 나에게 매우 특별했던 이유는 내가 주최 측에 요청해서 원래 프로그램에는 없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 특별 세션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내가 기조 발제를 했다. 특별히 이 모임에는 문경의 채의진 유족, 함평의 정근욱 유족도 참석하도록 권유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 일반을 공론장에 처음으로 올린 역사적 현장이었다고 생각한다. <br /><br />당시 앞자리에 앉아 계셨던 리영희 선생님은 내 발표를 매우 듣고 난 이후 조용히 내게 와서 소감을 전했다. “사람들이 심각하고 조용하게 듣고 있었고,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는 칭찬을 했다. 그런데 본인이 당시 11사단 통역장교로 일했지만 미군들과 함께 다녔기 때문에 거창사건 등 학살에 대해서는 전혀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마 이런 학살이 진행될 당시 군인으로 근무한 이력 때문에 계속 내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 <br /><br />나는 그의 기억과 진술이 진실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는 그가 자서전에서 전쟁기 군 비리를 폭로하고 한국군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에 비추어 볼 때 당시 민간인 학살이 이렇게 자행된 사실을 거의 몰랐을까에 대해 약간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그것은 아마도 전쟁을 겪은 리영희 선생 세대가 어느 정도 알면서도 건드리기가 가장 부담스러운 주제여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여튼 이후 내가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운동을 하고 이후 진실화해위원회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조사 활동을 하면서도 몇 번 더 만났지만, 이 일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본인이 당시 장교로 근무했던 사실 때문에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거나 입장을 갖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br /><br />2000년 이후에는 자주 뵐 일이 없었다, 리영희 선생님도 몸이 불편하시고 공적 활동을 거의 하지 않으셨다. 내가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활동을 하고 진화위에 들어가서 가끔씩 안부 연락을 드렸다. 그리고 정무직 공무원으로 여러 원로분들의 자문을 얻을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 관련 이야기를 듣고, 점심이라도 대접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비서를 대동해서 산본에 몇 번 들렸다. 그래서 산본역 근처 인도 음식점, 그리고 안산 쪽으로 가다가 있는 큰 오리집 등에서 식사를 몇 번 한 기억이 난다. <br /><br />2006년 무렵 리영희 전집을 만드는 모임이 만들어져, 나도 편집위원의 한 사람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작업에서 내가 한 역할은 별로 없었다. 그런 작업을 한 한길사에 대해서는 매우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진행 과정을 보면서 약간의 아쉬움도 있었다. 리영희 회고록 등에서 기록된 본인의 활동, 예를 들면 4.19 전후 합동통신 기자로서 쓴 기사나 이후 백승욱 교수가 탐문한 적도 있지만, &lt;조선일보&gt;에서 실명을 적지 않은 베트남전 관련 기사 등을 일일이 검색 확인하여 전체 리영희 관련 글을 찾아내는 작업을 함께 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외국의 예를 볼 때 한 지식인의 전집을 내려면 그런 정도의 정밀한 작업은 반드시 필요한 데 그런 공을 들이지 않은 채 서둘러 전집 출간을 한 인상이 있었다. 물론 주최 측에서 충분한 예산이나 인력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은 한다.<br /><br />어쨌든 나는 리영희 선생을 용기 있는 지식인으로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문필가의 한 사람으로 본다, 그의 글은 힘이 있고, 정밀하다. 기자로서의 엄밀함과 학자로서의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열정이 글에 녹아 있다. 지식인으로서 리영희 선생님에 대한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논평은 이후에 본격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식의 흠집내기나, 다른 편의 일방적 숭배나 찬양도 배격하고, 분단된 한국에서 살았던 한 지식인의 삶의 궤적으로 충실하게 정리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span></span></span><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r /></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p>
<p>[caption id="attachment_5251" align="aligncenter" width="790"]<a href="https://rheeyeunghui.or.kr/?page_id=70&amp;mod=document&amp;pageid=1&amp;uid=1000&amp;execute_uid=1000"><img class="size-large wp-image-5251"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5/%ED%8E%B8%EC%A7%8012-1024x692.png" alt="" width="790" height="534" /></a> 리영희가 김동춘에게 보내는 서신(출처: 필자 제공) → <a href="https://rheeyeunghui.or.kr/?page_id=70&amp;mod=document&amp;pageid=1&amp;uid=1000&amp;execute_uid=1000" target="_blank">서신 전문보기</a><br /><br /><br /><br /></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un, 10 May 2026 09:44:2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11"><![CDATA[리영희다시읽기]]></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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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lt;나와 리영희&gt; 출간례를 가다 / 황광우]]></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998]]></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color:#333333;"><strong><span style="font-size:2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lt;나와 리영희&gt; 출간례를 가다</span></strong><br /></span></p>
<p><img class="alignright size-medium wp-image-5249"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5/%ED%99%A9%EA%B4%91%EC%9A%B0_248X310238X300-240x300.png" alt="" width="240" height="30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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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font-size:17px;color:#333333;"><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r />황광우(&lt;철학콘서트&gt; 저자, 인문연구원동고송 이사)</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해마다 오월이 오면 서울에서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광주의 망월동 묘역으로 리영희 선생을 찾아오는 이가 있다. 이규이다. 그는 1975년 광주일고 재학시절 유신철폐 시위를 모의하다 제적된 ‘문제학생’이었다. 검정고시를 거쳐 한양대학교에 들어갔다. <br /><br />1977년 그 무렵 한양대학교는 학생운동의 불모지였다. 이규는 외롭지만 열정적으로 한양대학교 학생운동의 밭을 일구어갔다. 긴급조치 9호 시절이었다. 이규는 박정희를 몰아내는 싸움에 젊음을 걸었다. 신림동 B지구 꼭대기를 오르내리며 겨레터 야학을 이끌었고, 1978년 10월 17일 광화문 시위를 기획하였던 ‘6개대학연합시위팀’의 일원으로 뛰었으며, 1979년 11월에는 남영동에 끌려가 남민전 관련으로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1980년 ‘서울의 봄’이 되자 한양대에서도 ‘학원민주화의 꽃’이 피어났다. 이후 한양대학교는 전국의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강성 운동권 대학으로 변모하였다. 이규는 한양대 학생운동의 원조였다. <br /><br />이규의 배후에 리영희가 있었다. 이규는 1978년 2학년이 되어 전공 수업은 내팽개치고 리영희 선생을 쫒아다녔다. 경제학과 학생이 신방과 수업을 들었다. 수업만 끝나면 교수 연구실로 따라가 묻고 따졌다. 사찰 대상이었던 리영희 선생은 이규로 하여금 집으로 와서 이야기하자며 ‘자유 방문’ 티켓을 주었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방문하였고, 밤 깊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철부지 학생이 사모님 눈치도 살피지 않고 선생을 괴롭혔다. <br /><br />리영희 선생의 훈화를 들으며 자란 이규였으나 나는 선생의 육성을 듣는 훈자(薰炙)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다만 박현채 선생으로부터 리영희의 일화를 들었을 뿐이다. <br /><br /><em>리영희: 어이, 현채, 딸이 가출했나 봐. 집에 들어오질 않네. 큰일 났어. </em><br /><em>박현채: 공장에 들어갔겠지. </em><br /><em>리영희: 그럼, 어떻게 해야지? </em><br /><em>박현채: 영희, 너, 지금 딸 자랑하는 거지? 걱정은 무슨 걱정? 방값이나 두 둑하게 줘. 연탄가스 마시는 일은 없어야 할 것 아니야?</em> <br /><br />오늘은 리영희 선생을 만나는 날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여 리영희 선생을 회고하는 책, 『나의 리영희』의 출간례가 열리는 날이다. 245빌딩 4층에서 오후 7시 30분에 열릴 예정이었다. 리영희 선생을 회고하는 영상물이 방영되었다. 김민기의 노래가 우리들로 하여금 1970년대로 빨아들였다. 네 분의 연사가 앉아 있었다. 제일 왼편에 박병기 교수가 자리를 잡았고, 오른편에 황석영 선생이 자리를 잡았다. <br /><br />박병기 교수는 전남대 철학과에서 젊음을 보낸 연구자이다. 그곳에서 삶의 대미를 장식하고 지금은 은퇴 학자로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역시 오늘 향연의 주역은 황석영 선생이었다. 노구를 이끌고 군산에서 이곳까지 와 주셨다.</span></span></span></span></span></p>
<p>[caption id="attachment_5253" align="aligncenter" width="790"]<img class="size-large wp-image-5253"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5/%ED%8C%A8%EB%84%90-1024x683.png" alt="" width="790" height="527" /> 패널로 참여한 (왼쪽부터) 박병기 전 전남대 교수, 박장수 전대민동 부회장, 전진희 광주시 인권옴부즈맨, 황석영 작가와 사회를 맡은 김효순 리영희재단 이사장[/captio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마이크를 잡은 황석영은 『객지』와 『전환시대의 논리』 두 권의 책이 맺은 인연에서부터 포문을 열었다. 『객지』가 창비신서 3권이었고, 『전환시대의 논리』가 창비신서 4권이었다. 그러니까 1974도에 문제작 두 권이 동시에 연이어 출간되었던 것다. &lt;창작과 비평사&gt;의 백낙청과 염무웅은 수시로 작가들에게 연회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사회과학자와 소설가가 동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두 분의 배려 덕택에 황석영은 리영희와 함께 자리를 하였다. 리영희 선생은 1929년생이고, 황석영은 1943년생이니, 나이로만 보아도 동석하기 힘든 사이였다. <br /><br />글만 보아선 ‘날카로운 눈매의 꼬장꼬장한 지식인’일 것이 틀림없는 리영희 선생이었는데, 자리를 함께 할수록 ‘농담도 잘하는 따뜻한 분’이 리영희 선생이었다고 황석영은 회고하였다. <br /><br /><em>“그때 함께 놀았던 친구들 다 갔어. 8할이 갔지. 뭐, 이부영, 김정남, 박석무, 요 정도 남았어.”</em> <br /><br />그것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사람이 살아 있다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활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설령 60의 초로일지라도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창작활동은 못 하더라도 봉사활동은 해야 한다. 봉사도 못 하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 84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쓰는 사람이 있다. 그가 황석영이다. 창작을 향한 그의 열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br /><br /><em>“내가 리영희 선생의 자택을 출입할 때 조그만 딸이 있었지. 초등학교 4,5학년 다니던 때였을 거야. 아, 근데 그 딸이 커서 노동운동하다가 영등포교도소에 들어갔잖아. 1986년이었을 거야. 딸 면회를 하고 나온 리영희 선생이 우는소리를 하더라고. 그래서 우리가 한 방 먹였지. ‘아니, 수천 명 어머니의 애가슴을 타게 만든 장본인이 정작 딸자식이 교도소에 갔다고 우는 소릴 하면 어떡하는 겁니까?’”</em> <br /><br />마이크가 박병기 교수에게 넘어갔다. 솔직히 말해 나는 박병기 교수와 리영희 선생이 무슨 인연을 맺었던지 몰랐다. 1996년의 일이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참신한 기획을 하였다. 현대사에서 한국인들에게 커다란 정신적 영향을 미친 몇 분을 선정하여 논문을 쓰고 논의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때 박병기가 선정한 인물이 리영희 선생이었다. <br /><br />박병기는 왜 리영희를 가슴에 묻어두었던 것일까? 이야기는 1979년 12월로 넘어간다. 그때 박병기는 전남대 학생운동에 몸을 담고 있었고, 한 차례 유인물을 뿌린 일이 뒤늦게 발각되어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윤한봉이 서광주 경찰서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것도 박병기 때문이었다. <br /><br />그때 광주교도소의 정치범을 이끌던 이는 김병곤이었다. 리영희 선생이 반성문을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안대 중사에게 고초를 당하고 있었다. 보안대 중사는 리영희 선생의 식사를 중단하였다. 이틀을 굶게 한 후, 곰탕을 시켜 회유하였다. 그래도 끝까지 버텼다. <br /><br />이런 식으로 리영희 선생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안 김병곤이 투쟁에 나섰다. 정치범들은 식판을 엎어버렸다. 식판을 두들기며 “리영희 선생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라!”고 샤우팅을 벌였다. 그때 미결사에 들어온 이세천, 장석웅까지 싸움에 합류했다. 리영희 선생에 대한 고문에 가까운 괴롭힘은 중지되었다. 김병곤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김병곤은 형법의 모든 조항을 꼼꼼하게 확인하여 교도소의 문제점들을 찾아냈다. 규정된 돼지고기 함량의 절반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소내 처우 개선 투쟁에 돌입하였다. <br /><br />박병기의 담담한 회고는 10년의 시간을 훌쩍 넘어 1989년 11월로 넘어갔다. 대구에서 연합 학술대회가 열렸고, 리영희 선생이 기조 발제를 하였다. 박병기는 그날 밤 리영희 선생과 한방에서 잠을 자는 룸메이트가 되었다. <br /><br />학술대회에서 리영희 선생은 여러 후배 연구자들 앞에서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8억인과의 대화』에서 펼친 중국 문화대혁명 예찬에 대해 자기비판을 하였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에서 문화대혁명을 예찬하였으나, 문화대혁명의 부정적 측면을 간과한 일면적 견해였음을 고백하였다. 더불어 리영희 선생은 사회주의에 관한 자신의 견식이 짧았음을 시인하였다. 마르크스의 인간관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음을 몰랐다고 자기의 한계를 공개적으로 반성하였다.<sup>1)</sup><br /><br />삼삼오오 다들 뒷풀이 자리로 가는데, 그날 리영희 선생은 혼자 숙소로 향하였다. 박병기는 리영희를 따라 숙소로 갔다. 밤 11시 즈음이었다. TV를 켜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br /><br />이때 황석영이 우스개 이야기를 앞세워 리영희를 옹호하는 발언을 이어 갔다. <br /><br /><em>“그때 버스가 다 만원이었잖아. 손님들은 버스를 타려고 하고 틈은 없고, 그러면 어떻게 하죠? 운전대를 획 돌려버려요. 그러면 사람들이 한쪽으로 밀려버리잖아. 그런 거죠. 나도 북한을 방문하고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글을 썼잖아. 북을 미화하는 글이었죠. 제가 그 글을 쓴 이유는 반공주의, 반북주의에 대한 전회였어요. 루이제 린저도 그런 심경에서 북을 옹호하는 글을 썼다고 봐요. 내가 『무기의 그늘』에서 노린 것도 그래요. 반공 소설을 뛰어넘는 작품을 쓰자는 거였죠. 사회가 극우로, 오른쪽으로 치달리고 있으니 작가는 왼쪽으로 치우치는 글을 쓴 겁니다. 『전환시대의 논리』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뭐였습니까? 베트남전쟁의 비리, 모순을 파헤치는 이 글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것은 그것이었죠. 베트남전쟁은 한국전쟁이다. 남의 슬픔으로 내 울음을 한 거였어요.”</em> <br /><br />많이들 왔다. 1970년대 광주 청년운동의 일꾼이었던 조봉훈도 왔고, 민청학련으로 옥고를 치르고 이후 김남주의 도발이를 도맡아 도와준 최권행도 왔고, 1980년 오월 마지막 날까지 싸운 채영선과 전용호와 김선출도 왔다. 전남대 학생운동의 주역 81학번 김영집도 왔고, 광주지역 독립운동사의 연구자 안종철도 왔고, 5.18 언론상을 탄 정대하 기자도 왔다.</span></span></span></span></span></p>
<p>[caption id="attachment_5252" align="aligncenter" width="790"]<img class="wp-image-5252 size-large"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5/%EC%B2%AD%EC%A4%91-1024x645.png" alt="" width="790" height="498" /> 이날 북토크에는 4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하여 좌석을 가득 채웠다. [/captio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오늘의 출간례는 요란한 빈 깡통으로 그치는 정치인들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리영희 선생을 회고하는 자리여서 좋았기도 하였고, 노익장을 과시한 황석영의 구수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가끔 우리의 젊은 시절을, 그 시절의 열정을 상기하는 이런 자리가 열리면 좋을 것 같았다. <br /><br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운 밤이었다. 다들 BHC 호프집으로 이동하길래 나도 쫄랑쫄랑 따라갔다. 서울에서는 찾기 힘든 곳, BHC 호프집은 술집이 아니라 광장이다. 정대하 기자가 나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김용희, 기민도, 최예린 한겨레의 젊은 기자들도 자리를 함께 하였다. 한겨레신문의 원로 박화강 선배가 동석하였다. 박화강은 리영희에 얽힌 에피소드를 풀어놓았다. <br /><br /><em>“한번은 고은 선생이 리영희 선생과 함께 광주에 오셨어. 지원동 쪽에 있던 허름한 술집이었지. 거 있잖아, 애꾸눈 양주 말이야. 그래 캡틴큐였지. 고은 선생이 잔을 잡드니만 ‘언더라꾸’로 따르라고 하는 것이야. 얼음을 가득 채우고 그 위에 양주를 붓는 것이지. 고은 선생을 따라 나도 ‘언더라꾸’로 마실려고 했어. 그때 리영희 선생이 그러시는 거야. ‘박 군, 기자는 그렇게 마시는 것이 아니네. 기자는 스트레이트야. 독한 술이 혀를 지나 목구멍을 지나 위장으로 내려가는 그 짜릿함을 느끼면서 마시는 거야.’”</em> <br /><br />옆에 앉아 있던 최예린 기자가 눈을 반짝이며 박화강 선배 곁으로 다가 앉았다. <br /><br /><em>“선배님, 멋져요. 누군가 저를 ‘최 군’이라고 불러주면 좋겠어요. ‘최 양’이 아니고 ‘최 군’ 말이예요. 저도 ‘스트레이트’로 마실래요. 맨날 쓰는 박스기사 그만 쓰고 ‘스트레이트 기사’를 쓸래요.”</em> <br /><br />밤은 깊어 갔고, 술자리도 익어갔다. 황석영이 광주에 오면 뒷바라지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박형선이었다. 박형선의 형 박화강은 그렇게 말했다. <br /><br />“동생이 죽고 없으니 이 자리는 내가 감당해야제.” <br /><br />리영희 선생을 회고하는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2010년 12월이었을까? 리영희 선생이 망월동에 묻히던 날, 하늘은 갑자기 흑색으로 돌변했다. 선생의 몸이 흙 속으로 들어가던 그 순간, 폭우가 쏟아졌다. 기상의 이변과 한 인간의 죽음은 아무 연관이 없는 독립 사건이었지만, 그날의 영험한 일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br /><br />2026년 4월 23일 <br />황광우 씀 <br /></span></span></span></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r />---<br />1)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사회가 되면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는데, 마르크스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lt;고타강령비판&gt;의 핵심 논점이 이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사회가 되어도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lt;낮은 단계의 사회주의사회&gt;를 경유하여 &lt;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gt;로 이행할 것이라고 보았다.</span></span></span><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r /></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un, 10 May 2026 09:23:2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11"><![CDATA[리영희다시읽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5년 연간 기부금 모금액 및 사용실적 공개]]></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995]]></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재단 정관 제29조 3항에 따라 2023년 연간 기부금 모금액 및 사용실적을 공개합니다.(첨부문서 참조). <br />법인의 공익 위반 사항이 있을  경우 다음의 기관으로 제보할 수 있습니다. <br />-국세청    https://www.nts.go.kr <br />-국민권익위원회     https://www.acrc.go.kr/ <br />-서울특별시 (대변인실)  https://www.seoul.go.kr/main/index.jsp</span></span></span></span></p>
<p> </p>
<ul>
<li style="list-style-type:none;"> </li>
</ul>]]></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Thu, 30 Apr 2026 10:50:0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2"><![CDATA[공지사항]]></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 지역언론 기후보도 취재지원 사업 최종 선정 결과 발표]]></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968]]></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color:#333333;"><strong><span style="font-size:2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2026 지역언론 기후보도 취재지원 사업 최종 선정 결과 발표</span></strong><br /></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제2회를 맞은 ‘지역언론 기후보도 취재지원 사업’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보내주신 모든 언론사에 감사드립니다. <br /><br />이번 공모에는 다양한 지역과 언론사에서 기후위기를 지역의 정책과 삶의 문제로 풀어내려는 다채로운 기획들이 접수되었습니다. <br /><br />리영희재단과 녹색전환연구소는 전문가 심사를 통해 기획의 방향성, 지역성, 실행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였습니다. <br /><br />그 결과, <strong>①거제신문 ②뉴스민 ③충청리뷰 ④홍주신문</strong> 4곳을 취재지원 대상 언론사로 최종 선정하였습니다. <br /><br />아쉽게도 제한된 선정 규모로 인해 함께하지 못한 언론사에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특히 6월 3일 지방선거를 앞둔 바쁜 일정 속에서도 기후문제를 다루는 기획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해주신 모든 언론사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br /><br />선정된 언론사들은 오는 6월 3일 지방선거를 전후로 지역의 기후문제를 지역 정책과 연결하는 기획보도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br /><br />이번 지원사업을 통해 지역의 기후위기가 어떤 보도로 확장될지,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span></span></span></span></span></p>
<p> </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17 Apr 2026 17:03:2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2"><![CDATA[공지사항]]></category>
		</item>
				<item>
			<title><![CDATA[&lt;나와 리영희&gt; 출간기념 광주·전남 북토크]]></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959]]></link>
			<description><![CDATA[<p><img class="aligncenter size-large wp-image-5192"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4/260421_%EB%82%98%EC%99%80%EB%A6%AC%EC%98%81%ED%9D%AC%EB%B6%81%ED%86%A0%ED%81%AC_%EA%B4%91%EC%A3%BC%EC%A0%84%EB%82%A8_%EC%B5%9C%EC%A2%852-737x1024.png" alt="" width="737" height="1024" /></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Wed, 15 Apr 2026 12:44:0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23"><![CDATA[기타사업]]></category>
		</item>
			</chan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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