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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리영희재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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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뉴스레터 제49호]]></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1007]]></link>
			<description><![CDATA[<p><iframe src="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swsr6qUQXg9pXGxGkdsCvnkDucKvXis" width="100%" height="1500" allowfullscreen></iframe></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05 Jun 2026 17:03:1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27"><![CDATA[뉴스레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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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리영희의 중국론을 다시 읽는다 - 사유의 축으로서 제3세계 / 백지운]]></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1006]]></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2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trong>리영희의 중국론을 다시 읽는다</strong> <br /></span><span style="font-size:2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 사유의 축으로서 제3세계 </span></span></p>
<p><img class="alignright size-full wp-image-5274"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B%B0%B1%EC%A7%80%EC%9A%B4_%EC%82%AC%EC%A7%842.png" alt="" width="248" height="31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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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font-size:17px;color:#333333;"><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font-size:17px;"><br />백지운(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교수)</span></span></span></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trong><br />1. 중국을 통해 한국을 보다</strong> <br /><br />외국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공통된 문제이겠지만, 특히 요즘 시대 한국의 학자로서 중국 연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번민이 그치지 않는다. 중국의 타고난 지리적 면적과 압도적 인구수, 그리고 그 경제 규모와 국제적 영향력을 생각하면, 아무리 학문의 본령이 가치중립에 있다 하더라도 현실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배제된다면 의미 있는 학문이 되기 어렵다. 정치, 경제, 역사 모든 면에서 우리와 긴밀히 관계되어 있는 만큼, 중국에 대한 분석과 판단에는 필경 우리 자신, 즉 한국 사회를 보는 시각이 내재될 수밖에 없다. 근자에 한국 사회가 정치적으로 양극화되면서 중국에 관한 담론이 과도하게 진영 논리로 소비되는 근심스런 현상도 어떤 면에서는 중국으로부터 떨어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우리 현실의 일그러진 반영일 것이다. <br /><br />리영희 선생의 중국 관련 논설은 중국과 그것을 둘러싼 국제 정세가 확연히 달라진 지금의 현실에 비추어 보아도 여전히 시사점이 많다. 선생이라면 오늘의 중국 문제를 어떻게 접근했을 것이며, 정치적으로 소비되기 급급한 중국 언설로부터 어떻게 우리의 문제를 사고하고 시대를 전망하는 사상적 길을 내었을까 궁금해진다. 그의 대표작 『전환시대의 논리』(1974, 창작과비평)와 『우상과 이성』(1977, 한길사)에는 모두 중국 관련 논설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냉전의 우상을 깨고 저변에 꿈틀대는 거대한 시대 전환의 논리를 읽어내는 데 중국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중심축으로 자리하고 있다. 외신부 기자 출신으로서 국제 정세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통해 객관적인 진실을 소구해 내는 데 온 힘을 기울였지만, 선생의 중국 논설의 근저에는 궁극적으로 한국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작동하고 있다. 스스로도 비유했던 것처럼 루쉰이 말한 ‘철방에 갇힌’ 한국 사회를 깨우고자 하는 외침이 그의 중국론에 투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br /><br /><strong><br />2. 냉전의 이분법을 흔드는 원심력의 축</strong> <br /><br />그 외침은 당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냉전의 우상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환시대의 논리』 첫머리에 수록된 글 「강요된 권위와 언론자유」는 냉전의 한가운데를 살아가던 한국 사회에 예고 없이 도래한 데탕트가 야기한 충격으로 시작한다. “닉슨의 중공 방문”이 “중공을 ‘영원한 적’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던 한국 국민”을 “하늘이 무너질 듯”한 충격으로 강타했던 것에 대해, 그는 냉전 체제에 안주하여 주어진 소임의 십분지일도 하지 못한 지식인과 언론의 타성을 일갈했다. <br /><br />선생이 볼 때, 미중 데탕트는 1970년대 들어 갑자기 발생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전후 25년의 세계정세의 변화, 특히 1960년 이래의 10여 년의 변화가 만든 필연적 귀결이었다. 스탈린 사후 미소 간에 맺어진 ‘평화공존체제’. 1969년 정점에 이른 중소 분열, 그리고 중립노선을 추구하는 제3세계 운동, 미국으로부터 독자노선을 추구하는 유럽 선진국의 흐름 등 냉전의 긴장이 드높았던 1950, 60년대에도 냉전의 논리를 이완하는 원심력이 국제사회 도처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국제사회의 끈질긴 정치적 다원화의 지향”이 미국이 놓은 냉전 궤도의 지반을 갉아먹고 있었으며, 그것이 1970년대 들어 데탕트라는 시대 전환의 추세로 가시화되었을 뿐이다. <br /><br />리영희 선생이 일깨우고자 했던 것은 냉전체제가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획일화된 이분법적 구조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가 볼 때, 미소 진영 대결이라는 냉전의 표층 논리가 그 저변에서 약동하는 다원화의 힘에 의해 흔들리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구조야말로 냉전의 실상이며, 후자에 의해 전자가 해체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 전환의 추세였다. 당시 한국 사회가 지구적 탈냉전은 물론 동아시아로 스며드는 데탕트의 흐름에서 기이할 정도로 단절되어 있었던 것은 냉전의 허위의식에 빠져 국제 정세의 표층에 감춰진 다원화의 힘을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br /><br />주목할 것은 당시 선생이 냉전의 우상에 가려진 시대 전환의 논리를 밝히는 시금석으로 중국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눈에 냉전 시대의 중국은 ‘죽의 장막’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국제무대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인공위성 발사 성공, 대외원조 사업으로 ‘탄자니아-잠비아 철도’ 건설, 런민비의 국제금융시장 진입에 더해, 1970년의 시점에서 전 세계 55개국과 수교를 달성했고 그중 42개국이 비공산권 국가들이었다. 게다가 머잖아 미국의 반공체제에 편입된 아시아 국가들과 NATO에 가입된 유럽의 미국 동맹국 대부분이 중국과 수교를 맺을 전망이었다. 미국의 대중국 고립정책의 실패는 강대국의 힘이 전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거센 역류가 국제사회에 존재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br /><br />냉전체제의 저변에서 냉전의 논리를 이반하는 원심력에 주목했던 리영희의 혜안은 미중세력경쟁 체제의 형성으로 또다시 이분법의 사고가 우리의 인식 체계를 지배하는 지금 깊은 시사점을 준다. 세계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강대국의 논리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이데올로기에 포장된 허상에 안주하지 말고 세계를 움직이는 다기한 동력에 실사구시적으로 착목함으로써 시대의 참된 논리를 읽어야 함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듯하다. <br /><br /><br /><strong>3. 중국혁명에 대한 이상과 오판</strong> <br /><br />리영희의 중국 관련 지적 작업들이 이후 한국 사회의 중국 인식과 중국 담론 형성에 어떻게 계승되었을까를 돌이켜 보면, 사실 그 흔적은 미미하다. 1990년대 초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중국 개혁개방의 본격화, 한중 수교 이후 중국을 직접 마주하게 되고 또 수많은 정보들이 밀려들면서 선생의 지적 성과들은 점차 잊혀져갔다. 무엇보다 마오(毛)와 중국 공산당에 대한 과도한 긍정, 특히 문화대혁명에 대한 낙관적 해석이 이후 드러난 중국의 실상과 부합하지 않으면서 선생의 입지가 급격히 좁아진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을 것이다. <br /><br />그러나 시야를 넓혀 보면, 당시 중국혁명에 대해 선생이 범했던 인식의 오류는 지구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마오주의는 20세기 중반 전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사상 중 하나였다. 그것은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제3세계 혁명의 교본이었고 프랑스 68혁명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신좌파 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전 세계 좌파 진영이 그러했듯, 리영희 선생은 중국혁명을 소련의 관료주의적 사회주의와 대비되는 대안적 혁명 모델로 바라보았다. 특히, 그가 중국혁명에 기대를 걸었던 측면은 인간해방이라는 지점이었다. 소련의 사회주의가 물질적·제도적 혁명에 그친 것과 달리 마오의 혁명은 인간의 사상혁명을 궁극의 목표로 추구했으며 문화대혁명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소련이 범한 사회주의의 역행을 방지하기 위한 계속혁명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br /><br />중국혁명에 대한 해석의 오류는 편견을 넘어 진실을 파헤치는 것을 무엇보다 중시했던 선생의 이력은 물론 그 자신에게도 깊은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1990년대 『사회주의의 실패를 보는 한 지식인의 고민과 갈등」이라는 글에서 그는 중국 사회주의의 변모가 가져다준 실망과 배신감을 토로하면서, 문화대혁명에 대한 자신의 경도가 해방 이후 좌우익의 극단적 대립 속에 인간의 윤리성이 땅에 떨어진 한국 사회를 살면서 품었던 인간해방에 대한 동경에서 연원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리영희의 중국 인식의 오류는 결코 그의 지적 나태함이나 이념적 편향 탓으로 간단히 정리될 일은 아니다. 그것은 냉전 시대 지구적 좌파 운동 진영에서 생산되었던 중국혁명에 대한 지식과 담론이 동아시아 반공 진영의 폐쇄된 사회에서 냉전의 우상을 깨기 위해 분투했던 지식인의 내면과 어떻게 서로 마주치며 녹아들어 갔는지에 대한 맥락을 살피는 복잡한 작업을 요한다. 또한, 중국혁명이 고정불변하는 추상적 대상이 아닌 만큼, 시기별·단계별 변모 양상에 대한 세밀한 분석으로부터 리영희의 판단 착오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판단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러한 기반 위에서 리영희의 중국론은 (비판을 포함하여) 정당한 재평가와 재해석을 얻게 될 것이며, 설령 그것이 모순적이고 한계를 보이더라도 그 자체로 냉전 시기 한국의 사상 계보 안으로 맥락화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br /><br /><br /><strong>4. 제3세계라는 원심력의 축</strong> <br /><br />그 모든 오류와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1970년대 리영희의 중국론에는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 시각에서 보더라도 요체를 찌르는 혜안이 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근원적인 힘은 선생에게 제3세계가 중국을 보는 시각의 축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영희를 함께 읽다』(2017)에서 구갑우는 리영희가 미국이나 소련과 동맹으로 연결되지 않은 제3세계적 시각에서 중국외교를 보고자 했다고 짚었는데, 선생에게 ‘제3세계’란 외교나 국제정치적 전략 분석을 위한 도구를 넘어 일종의 사고의 지남(指南)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백승욱이 말했던 “냉전시대 이분법적 구도에서 불가능한 제3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사유의 분투가 국제정세를 보는 시각에서 미소 대결이라는 냉전의 표면에 가려진 제3세계의 흐름에 주목하는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선생의 집요하고도 치밀한 작업들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베트남전쟁을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성전이라 생각하고 미국의 승리를 확신했던 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 선생만큼은 그에 정면으로 반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냉전의 논리를 이반하는 원심력으로서 제3세계가 세상을 보는 자리의 기준점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1979년 이란혁명 직후 미대사관 인질사건을 비롯한 중동 정세를 분석하면서 “이란 인민의 잠재적 반응을 형편없이 얕잡아본” 미국의 오만함을 비판했던 것도 강대국의 힘으로 좌우되지 않는 제3세계의 원심력에 대한 그의 일관된 관심과 모종의 기대에 기반한 것이었다. <br /><br />리영희가 당시 마오와 중국공산당을 높이 평가했던 것은 중국이 냉전의 논리를 해체하는 원심력을 읽어내고 그 편에 섰다는 데 있었다. 냉전 초기부터 마오쩌둥(毛澤東)은 미소 두 진영에 귀속하지 않으려는 제3의 장력이 지구상에 광범위하게 존재함을 간파하고 그것을 중국혁명의 이론으로 전유해왔다. 그것이 바로 1940년대에 제기된 ‘중간지대론(中間地帶論)’으로서 1960년대 ‘두 개의 중간지대론’을 거쳐 1970년대 중국판 제3세계론이라 할 ‘삼개세계론(三個世界論)’으로 정리되었던 것이다. ‘중간지대론’에서 ‘삼개세계론’으로 완성되는 중공의 세계인식은 리영희가 데탕트의 시대적 논리를 읽었던 방식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양자가 착목했던 것은 냉전의 한가운데에서 냉전의 논리를 이반하는 다원화의 힘이었다. 냉전의 논리로 중국을 옥죄었던 미국, 그리고 미국이 구축한 냉전 궤도의 지반을 흔드는 원심력에 기탁했던 중국의 긴 싸움은 결국 중국의 승리로 귀결되었으며, 그 결과가 바로 닉슨의 방중으로 상징되는 미중 데탕트였던 것이다. <br /><br />말하자면, 리영희는 냉전 시기 중국이 미국의 대중국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었던 힘의 기반은 바로 제3세계를 스스로에 내재화함으로써 가능했음을 파악하고 있었다. 『전환시대의 논리』에 이어 출간된 『우상과 이성』에 수록된 글에서 선생은 중국이 1950년대 이후 제3세계 신생국들과 관계를 구축하면서 중국혁명의 이론을 조정하고 자신의 세계 전략을 수립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짚어나간다. 1955년 반둥회의에서 저우언라이가 천명한 ‘평화공존 5원칙’이 1960년대 중국이 아시아·아랍·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신생국들과의 관계를 수립하는 기본 원칙이 되고 또 1970년대 제3세계 비공산주의권에 벌인 원조를 통해 제3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과정을 분석하면서, 놀랍게도 선생은 향후 중국경제가 발전할수록 중국식 원조모델이 서구의 제3세계 원조 방식에 대한 도전이 될 것이며 후진국과 중립주의 국가들의 정치적 노선을 좌우하는 열쇠가 될 가능성을 짚고 있었다(「중국평화5원칙의 안팎」). <br /><br />리영희의 안목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미국과 세력경쟁에 돌입한 지금 중국의 전략이 그 기본 기조에서는 냉전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미소 진영 구조에 귀속되기를 거부하는 중간지대와 연대하여 미국의 포위망을 서서히 무력화했던 것처럼, 지금 중국은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를 잇는 ‘일대일로’의 거대한 띠로 미국의 대중국 포위망을 바깥에서 에워싸고 있다. 비록 ‘제3세계’라는 말 자체는 1980년대 개혁개방이 본격화되면서 중국의 공적 담론장에서 사라졌지만, 최근 ‘글로벌 사우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전후(戰後) 미국 주도로 만들어진 국제질서와 규범에 도전하는 대항 담론으로 전격 부상하고 있다. 그 상징적인 예가 2023년 9월 15일 쿠바의 아바나에서 개최된 G-77과 중국 정상회담에 시진핑을 대신하여 참석한 중공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리시(李希)의 연설이다. 이 자리에서 그는 “더 강력한 연대로 위대한 발전을 향하는 ‘남남협력(南南協力)’의 새로운 장을 열 준비가 되었다”고 선포하면서 중국과 개발도상국이 협력하여 글로벌 거버넌스를 “더 정의롭고 평등하게 만들어야 할 소명”을 역설했다. 국제 규범체제의 개혁과 ‘남남협력’을 결합시키는 중국의 글로벌 사우스론은 역사적으로 70년 전 아시아·아프리카의 신생국들과 함께 UN체제의 개혁을 요구했던 반둥회의와 맞닿아 있다. 그런 점에서, 제3세계를 냉전 시대 중국을 분석하는 사고의 축으로 삼았던 리영희의 방법은 오늘의 강대국으로 떠오른 중국의 세계전략의 심층 논리를 분석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되는 것이다. <br /><br />중요한 사실은 리영희가 마오시대 중국의 제3세계론의 의미를 평가하면서도 그것이 직면했던 이율배반을 놓치지 않고 착목했다는 점이다. 그는 평화5원칙을 기조로 하는 중국외교의 약점으로서, 제3세계 혹은 중간지대 국가의 정부와 그 인민에 대한 양면적인 관계의 모순이라고 짚었다. 당시 제3세계 신흥국가들의 신생 정부는 대부분 우익적 성향의 민족부르주아 세력이 중심이었다면, 그들 내부에는 반제·반식민을 표방하는 반정부 혁명세력이 지하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중국으로서는 국교 수립이라는 제도적 관계를 맺은 보수 성향의 정부와 우호관계를 전제로 하면서도, 다른 한편, 세계혁명을 표방하는 입장에서 그들 국가 내부의 반정부 혁명세력과의 유대를 저버릴 수도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체제가 다른 정부 간의 평화공존과 세계혁명이라는 기치 아래 제3세계 인민과의 연대를 동시에 조절해야 하는 이율배반적 요구가 중국 외교의 아킬레스건임을, 선생은 또렷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예리한 시선은 선생 자신이 중국혁명의 핵심을 관료주의화된 소련혁명과 대비되는 인간해방에 두었던 것과 묘하게 어긋난다. 마치 중국의 외교가 국가 간 관계라는 제도 안으로 포섭되면서 전 세계 인민 간의 연대라는 혁명 본연의 사고가 형해화되는 미래를 예견했던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스스로 의식했든 아니든, 그는 중국에 대한 비판적 사유의 통로를 외부의 언어가 아닌 바로 중국 자신의 언어로부터 발견하고 있었다. <br /><br /><br /><strong>5. 오늘, 다시 리영희의 중국론을 묻는다</strong> <br /><br />다시 상기하면, 리영희 선생의 중국론은 지구적 데탕트의 기운을 좀처럼 감지하지 못하는 철방 속에 폐쇄된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과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고뇌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전환시대의 논리』로 옥고를 치렀던 그가 「상고이유서」에 적었던 바 “중국에 대한 정확하고 균형 잡힌 과학적 인식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국가와 민족의 안전 및 번영을 보장하는 중요한 길”이라는 인식은 21세기의 오늘의 현실에서도 더없이 적확하다. 오늘날, 선생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국 연구가 번성했지만, 한국 사회가 중국에 대한 ‘정확하고 균형 잡힌 과학적 인식 능력’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냉전 시대 진영과 이념으로 세계를 가르는 관성적 이분법이 한국 사회의 멘탈리티를 지배하는 우상이었다면, 현재 중국과 우리 자신, 그리고 세계를 인식하는 눈을 가리는 우상은 무엇일까. 혐중적 정서가 기층을 넘어 지성의 영역으로까지 확산되는 상황은, 어쩌면 중국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 능력’의 결여로 인해 정확한 비판의 언어를 찾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중국에 대한 비판이 비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되돌아오고 또 세계에 대한 수준 높은 인식으로 연결되는 그런 중국학과 중국 담론이 필요한 지금, 리영희 선생의 중국론이 특히 무겁게 다가온다.</span></span></span></span></span></p>
<p>[caption id="attachment_5268" align="aligncenter" width="472"]<a href="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1.png" target="_blank"><img class="alignnone wp-image-5268 size-large"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1-472x1024.png" alt="" width="472" height="1024" /></a> 리영희 선생이 조선일보 국제부 재직 시절 1965년 제2차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 대해 쓴 연속 특집 기사 '아아의 물결' 중 1편 (조선일보. 1965. 6. 6.)[/caption]</p>
<p>→ <a href="https://rheeyeunghui.or.kr/?page_id=3913&amp;uid=1005&amp;mod=document&amp;pageid=1" target="_blank">'아아(亞阿)의 물결' 1~5편 전문보기</a><br /><br /><br /></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Thu, 04 Jun 2026 23:27:4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11"><![CDATA[리영희다시읽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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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65.6. '아아(亞阿)의 물결' 1~5편]]></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1005]]></link>
			<description><![CDATA[<p><a href="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1.png" target="_blank"><img class="aligncenter wp-image-5268 size-full"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1.png" alt="" width="1048" height="1200" /></a> <br /><strong>아아의 물결 ①<br />조선일보 1965. 6. 6. <br />「반둥」에서 「알제이」까지<br /></strong><strong>「유색」만의 공동광장<br /></strong><strong>강렬한 저류… 반식민·비동맹</strong><br /><br />아세아와 「아프리카」의 72개 독립 및 독립예정국가가 한 자리에 모이는 제2차 아아회의가 10년 만에 「알제리」 공화국 수도 「알제이」 시에서 이달 29일부터 개최된다. 정부는 여태까지 친공적이라고 배격해오던 대(對) 아아회의관을 바꿔 적극적으로 이에 참석할 의사를 밝혔으나 초청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렇게 중요한 아아회의란 어떻게 탄생했으며, 어떤 성격의 회의인가, 앞으로의 국제정세변동에 적응하여 한국과 아아회의와의관계는 어떠해야할 것인가. 그리고 아아회의에 참석할 경우 한국은 어떤 입장에 서게 될 것인가. 대한민국의 국가적 지위와 대외정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제2차 아아회의를 5회로 나누어 여러모로 다루어본다. &lt;편집자 주&gt;<br /><br />아아회의는 아세아와 「아프리카」 양 대륙의 신생독립국가 인민들이 백인 지배권에 대하여 인간적, 정치적 지위를 향상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이는 유색인종 만의 정부급 공식회의이다.<br /><br />제1차 회의는 1955년 4월 18일부터 24일까지의 1주일 동안 「인도네시아」 공화국 「반둥」 시에서 개최되었다. 이것이 아아회의가 「반둥」 회의라고도 불리는 연유이다.<br /><br />세계 인구의 반을 점하면서도 2차 대전까지 구미 및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서 세계정치의 담당자가 못 되고그 희생물의 위치를 강요당했던 전후 신(新)독립국 29개국 대표가 구(舊) 식민지인민의 단결과 미해방민족의독립을 촉구하려는 목적으로 회합하여 유색인종에 의한 제3세력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br /><br />그러나 「반둥」 회의는 이에 앞서는 중간적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즉 1954년 4월 28일과 같은해 12월 19일의 두 차례에 걸쳐 「실론」국 수도 「콜롬보」에서 당시 미소군사진영의 중간에서 중립세력의 지도자로 인정됐던 인도 「버마」, 「파키스탄」, 「실론」, 「인도네시아」 등 5개국 수상이 「네루」 인도수상의 「이니시에이티브」에 의해 회의창설, 회의목적, 참가국을 결정했던 것이다.<br /><br />「반둥」 회의는 다음 4개 주요 목적을 위해 개최되었다. ① 아아국가의 친선·협력을 촉진하고, 공동이익의 조장을 위한 선린우호 관계의 수립. ② 참가국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공동으로 논의한다. ③ 이미 독립한 인민의국가적 주권 확립과 미해방민족의 독립을 지원한다. ④ 양 대륙국가의 단결의 힘으로써 세계평화에 기여한다.<br /><br />제1차 회의의 밑바닥을 흐르는 기본사상은 신생국 지도자들의 강렬한 「내셔널리즘」·반식민주의·반제국주의·전쟁반대로 표현된다.<br /><br />참가국대표의 자격은 원칙적으로 각료급으로 되어있었으나 대부분의 국가는 국가원수 또는 수상을 파견함으로써 인류사상 최초의 유색인종만의 모임에 의의를 부여했다.<br /><br />신생국가로서의 정치적 미숙과 정치·사회제도의 상이 때문에 구체적 문제의 해결이나 견해일치란 쉬운 일이아니었다. 따라서 회의는 기본사상에서 출발하는 아아국가사회의 원칙과 지침을 합의하는데 그쳤다. 참가국은주최국 정부의 초청에 의한다는 원칙에 따랐다.<br /><br />초청된 29개 국가가 모두 참석했다.<br /><br />「반둥」 회의가 열린 1955년의 「유엔」 가입국 수는 60, 이 가운데 아아회의의 대상이 되는 독립국가로서의「유엔」 가입국은 겨우 아세아 8개국(호주, 「뉴질랜드」 제외), 중동, 「아랍」 6개국, 「아프리카」 2개국에 불과했다.<br /><br />정치·사회제도의 차이에서 오는 참가국 간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반둥」 회의를 꿰뚫는 강렬한 반식민·중립·비동맹적 사상적 이유에서 남「아프리카」 연방은 인종격리정책 때문에, 중화민국(대만)과 대한민국은 그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대한 신흥국가들의 혐오감 때문에 처음부터 초청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북한은 몽고와 함께회의 속에 분쟁을 불러들이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초청되지 않았다.<br /><br />『회의 참가는 어느 특정국가가 딴 특정국가의 국가적 지위에 대한 견해를 변경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다국가회의의 원칙이 채택되었다.<br /><br />이것은 곧 앞으로 있을 제2차 회의에서의 남북한대표 동시참석에 따르는 대한민국정부의 대북괴 관계에 유리한 근거가 되어주는 것이다.<br /><br />아아회의의 성격으로서 결의의 구속력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이 회의에서 표명된 일부 참가국의 견해는 딴참가국이 희망하지 않는 한 딴 국가를 구속하거나, 딴 국가에 의해서 수락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양해로 해결된다.<br /><br />이것은 또 앞으로의 회의에서 있을 「외군철수」 등 한국에 불리한 의제나 결의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의 「면책」 조항적 역할을 해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공동의 광장」을 마련하는데 성공한 제1차 아아회의는 아아국가의 국제적 활동의 지침인 「10개 원칙」을 채택하였다. &lt;禧&gt;</p>
<p>제1차 회의 참가국(29)<br />인도, 실론, 중화인민공화국(중공), 네팔, 일본,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버마, 필리핀, 태국, 북월남(월맹), 남월남, 라오스, 캄보디아, 아프가니스탄(이상 아세아 15),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토이기, 애급, 시리아, 이디오피아, 레바논, 수단, 예멘, 요르단(이상 중동 및 아랍 11), 리베리아, 리비아, 황금해안(이상 아프리카 3)</p>
<p>「반둥」 평화 10개 원칙<br />① 기본인권 및 「유엔」 헌장 목적과 원칙의 존중<br />② 모든 국가의 주권과 영토의 보전<br />③ 모든 인종과 대소국가의 국가적 평등<br />④ 타국에 의한 내정 불간섭<br />⑤ 「유엔」 헌장에 의거한 단독 또는 집단적 방위의 권리<br />⑥ 집단방위협정을 대국의 특수이익을 위해 이용하지 말 것<br />⑦ 타국의 영토 및 정치적 독립을 침해하지 말 것<br />⑧ 모든 국제분쟁을 「유엔」 헌장과 평화적 수단으로 해결할 것<br />⑨ 상호이익과 협력의 증진<br />⑩ 정의와 국제의무의 존중<br /><br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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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a href="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2.png" target="_blank"><img class="aligncenter wp-image-5269 size-full"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2.png" alt="" width="987" height="1200" /></a><br /></strong><strong>아아의 물결 ②<br />조선일보 1965.6.8. <br />「반둥」에서 「알제이」까지<br />국제정세의 방향타 <br /></strong><strong>그 비중 </strong><br /><strong>열 살짜리 거동(巨童)... 약소민족방패로</strong><br /><strong>「맘모스」발언군... 「유엔」쥔 68개국</strong></p>
<p>「반둥」에서 탄생한 제1차 아아회의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아아회의를 통해서 결속한 아세아와 「아프리카」 국가는 국제정치의 담당자로서 어느만큼 강대해졌는가.<br /><br />고(故) 「하마슐드」 「유엔」 사무총장은 이미 1960년 9월 12일 제15회 「유엔」총회에 보낸 총장연차보고 제5항에서 이렇게 지적했다.</p>
<p>『아세아·「아프리카」 세력은 이제 세계의 5대국을 합친 세력에 대등한 힘이 되었다. 양대륙인민들의 要望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유엔」의 기능을 확장, 강화해야 한다.』</p>
<p>아아세력의 단결과 힘을 측정하는 가장 쉬운 척도는 「유엔」이다. 지난 10년 동안 아아지역내의 독립국은 60개국을 넘게 되었다. 더욱이 「아프리카」 신생구가수 16개국이 대량으로 가입한 60년도의 제19차 총회는 「아프리카 총회」라고까지 불렸다.<br /><br />양지역의 독립국은 아세아·중동지역 31개, 「아프리카」 지역 37개, 합계 68개국으로써 전세계독립국 백27개의 과반수를 제압하게 되었다. 「유엔」 내의 세력분포도 급속히 변모하였다. 전체 가입국 백14개국 가운데 금년 1월 탈퇴한 「인도네시아」를 제외하더라도 58개국은 과반수를 제압하고 있다.<br /><br />아아세력을 무시한 「유엔」의 운영이나 결의는 이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60년 12월 14일 제15회 총회는 아아 43개국 공동제안의 「식민지독립선언」을 찬성 89, 반대0, 기권9의 전회일치로 가결시켰다. 채택된 선언은 『모든 형태의 식민지제도를 조속히 그리고 무조건으로 해방·독립시킬 것』을 요구한 것으로, 역사적중요성으로 1948년 제3회 총회의 세계인권선언에 못지않은 것이었다.<br /><br />중국대표권 문제의 표결은 아아세력을 가장 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중공의 중국대표권(가입)을 반대하는 미국과 서방측 입장은 60년 제15회 총회에서 찬반의 차가 8표로 줄어들었다. 이에 당황한 미국은 중국대표권변경 문제를 「중요(실질)사항」으로 지정, 헌장 제18조에 의해 3분의2 다수법안을 제출하게 되어 부결시킬 수 있었으나, 63년도 제18회 총회에서는 찬성 41표, 반대 57표, 기권 12표로 3분의2의 선에 차츰 육박하여 유회(流會)한 작년도 제19회 총회에서는 3분의2선을 돌파할 것이라는 관착을 낳게까지 하였다.<br /><br />정치적독립의 전제인 경제적 자립을 위한 아아국가의 단합된 압력은 마침내 64년 3월부터 6월까지 「제네바」에서 후진국경제를 지원하기 위한 무역개발회를 실현시키고 선진공업국가들로 하여금 그것을 「유엔」의 상설기구로 하는 데 성공했다.<br /><br />그러나 아아세력의 토대와 역할은 「유엔」뿐이 아니다. 오히려 그밖에서의 국제정치에서 약소, 신생국가인민들의 권익을 수호하는 방패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br /><br />미소와 미소를 중심으로 하는 대립적인 냉전체제 사이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아아세력은 또다른 비동맹중립국가회의의 형태로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비동맹회의 참가국은 61년 9월 「베오그라드」 제1차 회의의 25개국에서, 제2회 「카이로」 회의에서는 57개국으로 증가했다. 이 가운데 「유고슬라비아」와 중남미 몇 나라를 제외하고서는 그 핵심은 아아회의 국가인 것이다.<br /><br />그밖에도 아아인민단결회담, 중립국경제회의, 아아경제협력기구 등 모든 분야서의 제3세력 활동은 아아회의국가와 「반둥」 10개원칙을 기본정신으로 하고 있다. 「알제리」를 비롯한 여러 식민지의 해방전쟁을 위한 지원, 전체 「유엔」회원국에 의한 군축회의, 63년 7월의 부분적핵금지협정의 실현, 「콩고」 내란의 중재, 외군기지 철수를 위한 압력, 그리고 최근에는 월남전쟁무조건협상을 위한 「베오그라드」 회의결의 등, 국제정세의 방향을 잡는 주요한 국제적 현상은 아아세력의 역할에 의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br /><br />60년에 「하마슐드」 「유엔」 사무총장이 예언한대로 금년에는 아아세력의 지역적 발언권을 반영하기 위해 「유엔」 안보이사회와 경제사회이사회의 이사국을 증가하는 「유엔」 헌장개정이 실현된다.<br /><br />지난 5일 「버마」 국회의 비준으로 이미 과반수인 76표에 가까운 75개국이 이를 비준했으며, 증가되는 이사국의 대부분은 대한민국을 아아지역국가로 보지 않으려는 아아회의에서 채우게 되어 있다.<br /><br />대한민국의 통일정책과 합법성주장의 유일한 근거가 되어온 「유엔」도 이같이 해서 점점 그 체질을 개선하는 단계에 놓여있다.<br /><br />성장하는 아아국가사회에서 고립했던 한국의 집권자들이 「알제리」회의에의 적극적 참가로 정책을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던 동기가 여기에 있다. &lt;禧&gt;<br /><br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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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 href="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3.png" target="_blank"><img class="aligncenter wp-image-5270 size-full"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3.png" alt="" width="1127" height="1200" /></a><br /><strong>아아의 물결 ③<br />조선일보 1965.6.11. <br />「반둥」에서 「알제이」까지</strong><br /><strong>세 분파 ... 강한 분열징조</strong><br /><strong>주목할 15개 불어사용국의 동태</strong></p>
<p>그러나 아아국가세력의 성장을 과시한 지난 10년은 아아사회의 분열과 고민의 10년이기도 했다. 해결해야만 할 과제도 많다. 「반둥」 회의로써 아아회의의 단결을 과시했던 아아세력에는 동서냉전체제의 해체 과정에 따라 내부적 단결에도 분해 현상이 일어났다. 「반둥」회의 때만 하더라도 신생독립의 정열이 반식민지와 반제국주의노선으로 반사(反射)적인 단결을 가져올 수 있었으나, 독립의 햇수를 거듭함에 따라 아아국가사회는 국가이익과 지도권 쟁탈의 갈등으로 세포분열을 하려는 징조를 드러내고 있다.<br /><br />지난 4월 17일부터 19일까지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열린 「반둥」회의 제10주년기념대회는 크게 나누어서 아아회의국의 세 갈래의 저류를 보여주었다.<br /><br />▲ 급진파 = 주로 중공, 「인도네시아」, 「가나」 등 사회주의 혁명세력으로서 평화공존을 부인하고 일부 신생국가의 「부르조아」적 정권을 「민족해방전선」 조직으로 전복하려는 세력이다. 북한, 월맹, 「말라위」. 「콩고」. 「모리타니아」 등이 이에 추종하여 총수 15개국에 미달하는 소수이지만, 중공의 2회의 핵실험은 아아세력의 유일한 핵국가로서 발언권은 가장 강하다.<br /><br />▲ 온건파 = 아아회의에 속하면서도 동서군사진영감에서 「적극적 중립」 노선을 표방하는 비동맹 국가들이다. 인도, 「실론」, 「유고슬라비아」, 「알제리」, 「아랍」 공화국 등을 중심한 평화공존정책으로 급진세력과 대립한다. 중소이념분쟁, 월남전쟁, 「말레이지아」 등 문제에서도 중공보다 훨씬 온건하며 아세아10개국, 「아프리카」 약30개국의 지지를 받아 아아회의의 주류를 이루는 세력을 구성하고 있다. 「네루」 수상이 없는 온건파는 국가수에 비해 통솔력은 약화된 형편이다.<br /><br />▲ 친서방파 = 아세아에서 일본, 「필리핀」, 태국,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촘베」 대통령의 「콩고」(레오폴드빌)를 비롯하여 합계 10개국 정도로서 우리 정부지도자들이 『이 회의에 나가 직접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한 것도 이 세력에 기대는 바 컸다. 그러나 미국과의 동맹관계에 있으면서도 토이기(土耳其), 「파키스탄」 등 자주의식이 강한 몇몇 국가들은 아아회의의 일반노선에서는 온건세력에 서 있다.<br /><br />지역내의 이해관계에 따르는 대립집단이 있다. 「아프리카」의 친중공적 기수인 「가나」의 「엔크루마」 대통령노선에 반발한 15개 불어사용국(「아프리카·마다가스카르」 공동기구=OCAM) 가운데 9개국은 5월 26일 「낫세르·은크루카」 영도하의 36개국 「아프리카」 통일기구(OAU)의 9월회의 불참을 결의하고, 나아가 아아회의의 「보이콧」으로써 친서방적감정을 밝혔다. 이 9개국은 대부분 한국과의 외교관계가 있는 국가로서 아아회의에 앞서는 우리 정부의 잠재적 지지국가들이다.<br /><br />또한 「이스라엘」 문제로 「튀니지」 「모로코」 「리베리아」 등 국가는 지난 5월 중순 「낫세르」 대통령을 비롯한 그밖의 중동14개 국가와 공개적으로 분열했다.<br /><br />한편 아세아에서는 「말레이지아」에 대해 억지에 가까운 적대정책을 취하는 중공 「인도네시아」 북한월맹 등과 일본 「파키스탄」 인도를 비롯한 대부분의 참가국가가 대립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말레이지아」 문제에서 협조하는 「파키스탄」과 인도는 영토 분쟁으로 「파키스탄」은 중공데, 인도는 일본과 더불어 아세아의 친서방, 반급진 진영을 구성하고 있다. 「수카르노」 주은래 김일성 호지명의 아세아 급진파가 주수상의 「아프리카」 순방을 통해 현재 「아프리카」 다수 국가를 회유하는 외교공작을 전개하고 있는 때를 같이해서 「알제리」의 「벤·벨라」 수상은 아아회의국가에 친서를 휴대한 특사를 파견하여 「티토」 「벤·벨라」 「낫세르」 「샤스트리」(인도)의 온건세력 구축에 분주하다.<br /><br />「알제리」 국회 외교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벤·벨라」 사절단이 7일 북평(北平) 경유 평양을 방문한 것도 이와같은 배경에서 「알제이」에서의 29일 제2차회의를 앞둔 아아회의의 고민을 말해주는 것이다.<br /><br />이렇게 해서 제2차회의는 「반제국, 반식민」의 혁명노선에 초점을 두는 급진세력과 「평화공존, 경제발전을 위한 협조」에 역점을 두는 온건 및 서방국가세력과의 대립이 적지않을 것으로 예상된다.<br /><br />그러나 이모든 대립에도 불구하고 회의의 세로운 의제인 월남전쟁에 관해서만은 미국정책 규탄을 통일노선으로 결속할 전망이 뚜렷하다. 9일에 끝난 15개국 대사급준비회의가 월남정부와 월남에 파군지원하는 한국을 초청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도 월남문제에 대한 아아회의의 강경한 태도를 반영한다. &lt;禧&gt;<br /><br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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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 href="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4.png" target="_blank"><img class="aligncenter wp-image-5271 size-full"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4.png" alt="" width="893" height="1200" /></a><br /><strong>아아의 물결 ④<br />조선일보. 1965.6.12. <br />「반둥」에서 「알제이」까지<br />한국의 좌표</strong><br /><strong>중요한건 「자세」</strong><br /><strong>「월남지원」 적극 설득해야</strong></p>
<p>「알제이」 회의에서 토의될 의제와 한국이 참가 또는 참가 못할 경우의 입장 그리고 아아회의(亞阿會議) 및아아사회(亞阿社會)와 한국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br /><br />작년 4월 「자카르타」 준비회의 결정에 따라 「알제이」 회의에서는 「반둥」회의 10개 원칙의 재확인이라는 일반의제와 구체적 의제로서 ①식민지(신식민지 문제 포함) ②인종차별 ③「유엔」 개편(신생국가회의 문제 포함) ④ 핵금, 군축, 외군기지 ⑤ 분단국가통일 ⑥ 선후진경제협력 ⑦ 아아회의 상설기구 설치 등 생각 할수 있는 거의 모든 문제가 논의 될 것이다. 더욱이 월남전쟁 문제는 「반둥」회의 이후 국제평화를 위협하는 새로운 중대 문제로서 중요시 될 것은 틀림없다.<br /><br />대한민국의 참석을 가상할 때, 위의 의제 가운데서 수세에 서게 될 것이 주로 외군기지, 통일방법, 신식민지, 월남파군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일반의제로서의 「방둥」 원칙과 그 밖의 의제에서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정부가 종전의 소극적인 고립정책에서 적극적인 정책으로 자세를 바꿨다면 찬성할 수 없을 만큼 국시나 대한민국 정치외교정책과 어긋나는 문제들은 아니다.<br /><br />정부로서는 외군기지가 미국의 침략적 군사기지가 아니라 「유엔」 결의에 의한 합법적 「유엔」군이라는 것통일방안에서도 역시 「유엔」 결의에 따르는 통일정책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유엔」의 이름으로 설득할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br /><br />다음 신식민지 문제에서 아아국가들을 지배하는 감정은 정치·경제·군사적인 면에서 외부국가의 간섭에 대해이것을 명목상의 정치적 독립과 구분하려는 경향이다. 「콩고」의 「촘베」 대통령을 이 상징으로 여기는 그들은 월남정부도 이 「카테고리」 속에 넣고 있는 것 같다.<br /><br />한국에 대한 태도는 무엇보다도 월남전에서의 군사적 개입을 비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이 참석할 경우,가장 치열한 공격이 이 문제에 집중될 수 있을 것이고 이 문제야말로 정부가 「자유진영국가의 의무」로서 적극적으로 해명하려던 것이었다. 효과야 있건 없건.<br /><br />15개국 대사급준비회의의 분위기대로 한국의 참석 없는 24일부터의 외상회의에서 유독 월남과 대한민국에 대한 초청문제가 거부된다면, 한국은 「결석재판」을 받는 격이 된다.<br /><br />아아회의를 둘러싸고 일어난 최근의 사태는 외교적 노력에는 해결할 수 있는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br /><br />정부는 「자카르타」 준비회의에 앞서 작년 2월부터 회의대책을 세우고 우방과의 협조, 정세진전의 분석, 작년12월의 구아, 아세아주재공관장회의, 그 결과에 따르는 지난2월 이수영, 최두선 씨를 단장으로 하는 「아프리카」 친선사절단 파견 등으로 약한 국력과 국가재원으로써는 할 것을 다했다고 본다.<br /><br />그러나 「아프리카」 국가를 순방하고 돌아온 양 대표는 6월 3일 국회외무분과위에서의 종합보고를 통해 『우리나라는 대(對) 「아프리카」 외교에서 북괴보다 우위에 서있으나 앞으로의 전망은 반드시 낙관할 수 없다』고 보고하고 명분외교의 지양』을 결론으로 지적했다. 이것은 모든 책임이 외교행위의 졸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외교적·사무적 기술로만은 해결 할 수 없는 아아국가사회의 여건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국은아세아에 있으면서도 월남·대만과 더불어 아세아국가가 아니라는 것이 많은 아아지역 국가의 한국관인 것이다.<br /><br />그렇다면 궁극적인 문제는 한국정치외교의 기본자세가 아아지역국가와 어울리기 힘들다는 데서 이번 아아회의파동의 교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외교전문가들의 말이다. 굳건한 반공노선을 지키면서도 한국은 아아지역 국가사회의 일원이지 서구국가가 아니라는 시대적·지역적 자각과 이 모순된 양 노선을 어떻게 조절하는가가 대한민국이 정면으로 부딪친 국가적 과제이다. &lt;禧&gt;<br /><br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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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 href="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5.png" target="_blank"><img class="aligncenter wp-image-5272 size-full"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95%84%EC%95%845.png" alt="" width="952" height="1200" /></a><br /><strong>아아의 물결 ⑤<br />조선일보. 1965.6.13. <br />「반둥」에서 「알제이」까지<br />국제관례 외면당해</strong><br /><strong>한국초청문제</strong><br /><strong>그동안의 경위</strong><br /><strong>중공 등서 방해공작 「1년계산」에 맹랑한 차질(蹉跌)</strong></p>
<p>정부는 1년 가까이 검토한 끝에 지난 5월말께 「알제이회의」에 참석하는 방향으로 방침을 정하고 대표단인선까지도 구상하여 초청장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알제리」 정부는 초청장을 한국에 보냈다는 간접적인 이야기와 달리, 북괴를 포함한 다른 64개국가에는 초청장을 보냈으면서도 한국에는 아직껏 보내지 않고 있으며 지난 4일부터 닷새동안 열린 15개 상임준비국대사급회의에서 한국초청 문제를 제기하려는 인도 등의 노력을 『「반둥」회의에 참석시킬 수 없는 새롭고 중대한 요소』를 이유로 방해하여 이 문제를 外相회의에 넘김으로써 국제신의와 관례를 크게 깨뜨려 배신했다. 그러면 정부가 1년전에 착수했던 제2차 「반둥」회의 준비에 왜 이와 같은 차질이 생겼는가?<br /><br />외무부당국자는 『우리가 공산측의 방해공작을 예측못한 바는 아니지만 너무 과소평가했기 때문에 그 대책을 소홀히했고 또 이미 작년 4월 「자카르타」 외상회의에서 한국을 초청대상국가 C군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당연히 초청될 줄 알았으므로 「알제리」 정부가 그와같이 국제신의를 저버릴줄은 생각지 못했다』면서 외교적인 「미스」를 솔직하게 시인했다.<br /><br />그러나 외무당국의 실책도 이유가 되겠지만 이 아아회의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여건이 우리의 외교노선과 엇갈린데서 오는 작용도 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br />세계적으로 특히 아아지성(亞阿地城)에서 크게 말썽이 되고 있는 월남전쟁에 파병한 일이나 중동에서 「아랍」 제국과, 또 동남아에서 「인도네시아」와 견원지간인 「이스라엘」 및 「말레이지아」와 친교를 맺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인도네시아」의 방해공작도 예측할 수 있으며 「아랍」 공화국의 협조도 크게 기대할 수는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br /><br />외무부가 지난한햇 동안 해외전공관을 통하여 각국의 동태를 면밀히 지켜본 것도 이와 같은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당연한 일인 것이다.<br /><br />그 준비활동은 초청장이 오는 경우를 가상해서 참석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자료수집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 같으며 이 회의의 주최국인 「일제리」 정부나 우리의 대적 상대가 될 북괴의 동향에 대해서 지나치게 어두웠던 것이다.<br /><br />지난 5월 신현준(申鉉俊) 주 「모로코」 대사가 「알제이에 갔올때만 해도 몹시 우호적이라고 보고했을 뿐 「알제리」 정부의 속셈이나 북괴 및 중공대사관의 동향에 대해서는 거의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그 활동이 피상적이었던 것 같다.<br /><br />정부가 이 회의 참석 문제를 당면과제로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을 다녀올 무렵이나 한달도 안 되는 셈이다. 외무부당국자들은 부인하지만 정부는 이때 미측과 이 문제를 협의한 것 같으며, 이 무렵 우방 여러나라도 한국이 같이 참석할 것을 권고해와 외무부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br /><br />그동안 해외공관으로부터 받은 오백여통의 電文報告를 토대로 참석할 때와 불참할 때의 각각 이해득실을 따져 5월 28일 정일권(丁一權) 총리에게, 다음날에 박대통령에게 각각 보고했다.<br /><br />외무부 보고에 의하면 참석하는 경우 ① 불참으로 아아지역에서 고립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② 북괴나 중공측의 한국 문제에 관한 일방적인 제기나 공세를 막을 수 있다. ③ 친서방 및 온건파 여러나라와 제휴하여 아아회의의 좌선회를 막는 데 기여한다는 이점을 들 수 있고, 불리한 점으로는 ① 두 개의 한국관에 영향을 준다. ② 반식민, 제국주의 등 우방에 불리한 의제와 월남문제가 논의되기 쉽다는 점을 들어 큰 성과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불리한 영향은 막을 수 있다는 이유로 참석하는 쪽이 유리하다는 것이었으나 결국은 중공·북괴 등의 방해공작을 당한 것이다.<br /><br />외무부는 아직도 인도 「이란」 「이디오피아」 「아랍」 공화국 등 여러나라가 격분해서 한국초청을 위해 싸우고 있으므로 우리가 일방적으로 태도표명을 할 시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나 「아프리카」의 「오캄」(전 불령 식민국가) 10개국을 포함하여 11개국가가 불참을 선언했고, 앞으로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고 정세가 유동적이기 때문에 불참문제도 고려하면서도 태도표명을 보류하고 있는 상태인데 최종방침의 공식발표는 24일부터 있을 외상회의 직후가 될 것 같다. &lt;五&gt; 끝.<br /><br /></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Thu, 04 Jun 2026 22:39:1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30"><![CDATA[신문기사]]></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조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기자, 거기 누구 없소? / 정욱식]]></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1004]]></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color:#333333;"><strong><span style="font-size:2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조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기자, 거기 누구 없소?</span></strong></span><span style="color:#333333;"> </span></p>
<p><img class="alignright size-full wp-image-5160"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4/%EC%A0%95%EC%9A%B1%EC%8B%9D-248X310.png" alt="" width="248" height="31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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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font-size:17px;color:#333333;"><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r /><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font-size:17px;">정욱식(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span></span></span></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em> ‘내고향팀이 올 것 같아요?’</em> <br /><br />2025~2026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챔피언스리그(AWCL) 대회 준결승과 결승이 한국의 수원에서 열리고 조선(북한)의 내고향여자축구단이 4강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여러 사람들이 던진 질문이다. “안 온다고 하네요.” 나는 4월 중하순에 평양을 방문하고 서울로 돌아온 한 호주 동포로부터 들은 이 얘기로 답변을 대신했다. 이 동포는 조선축구협회 관계자로부터 ‘불참’ 의사를 확인했다고 했다. <br /><br />“정 선생, 올 것 같으니 공동응원을 준비하면 좋겠어요.” 또 다른 대북 소식통은 ‘윗선에선 다른 판단을 하고 있다’며 나에게 올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그 징후로 4월 말에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리는 국제축구연맹(FIFA) 평의회를 주목하라고 주문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여자축구의 선전은 아시아 대륙 전체를 환하게 밝히는 등불입니다.”<br /><br />살만 빈 이브라힘 알칼리파 아시아축구연맹(AFC) 회장이 밴쿠버에서 김일국 조선축구협회 회장에게 한 말이다. 인도의 시인인 타고르가 식민지 조선을 가리켜 ‘동방의 등불이 될 것’이라는 취지로 쓴 시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살만은 “조선 여자축구는 세계적인 모델이며, AFC는 앞으로도 조선축구협회의 포부를 지원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AFC가 내고향팀의 방한을 성사시키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br /><br />엇갈린 소식을 접하면서 반신반의하던 5월 4일에 뉴스 속보를 접했다. 내고향팀이 온다는 것이었다. 그 전에 나는 정부와 민간단체 관계자들에게 내고향팀이 오면 공동응원단을 구성하자고 제안했던 터였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한겨레통일문화재단과 평화네트워크는 지난 3월 호주에서 열린 아시안컵 여자축구 대회에 시민 응원단을 조직해 호주 동포들과 한국팀과 조선팀을 열띠게 응원한 바도 있었다. 민간단체들과 다양한 경로로 대화를 이어가면서 5월 11일과 5월 13일 두 차례의 회의를 갖고 ‘2026 AFC-AWCL 여자축구 공동응원단’을 결성하기로 했다. <br /><br />이 공동응원단에는 시민사회단체 연대기구들인 남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시민평화포럼, 자주평화통일연대 등과 한겨레통일문화재단 등 200여 개 단체들이 함께하기로 했다. 회의에 모인 관계자들은 빗발치는 언론의 취재 요청에 효과적으로 임해 달라며 필자를 단장으로 선출했다. 아울러 내고향팀만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수원FC도 응원한다는 취지로 준결승의 공식 응원 명칭도 ‘수원FC 위민과 내고향여자축구단 공동 응원’으로 정했다. 어느 팀이 올라가도 결승전 응원에도 나서기로 했다. <br /><br />하지만 ‘우리 국민 혈세 3억 원으로 북한 축구팀 응원’이라는 취지의 보도가 계속 쏟아졌다. 일부 언론은 ‘관제 응원’이라는 프레임까지 씌웠다. 그런데 이번 공동응원은 ‘선민후관’이었다. 민간이 먼저 공동응원단을 조직하겠다는 의사를 정부에 전하자 정부도 남북교류협력기금 등을 통해 협력하겠다고 응답하면서 이뤄진 것이었다. 물론 ‘민간단체의 공동응원을 세금으로 지원하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문제제기는 뼈아프게 다가왔다. 남북교류협력을 지원하는 데에 주목적이 있는 교류협력기금 사용이 공동응원에 부합한다고 판단했지만, 대의를 앞세운 나머지 여론의 반응을 미리 살펴보지 못한 점은 불찰이었다. <br /><br />‘하늘도 야속하지.’ 전날까지 쾌청했던 하늘은 수원FC와 내고향팀의 준결승이 열린 20일 저녁에는 거센 비바람에 자리를 내주었다. 경기 직전 나의 시선은 ‘이번에도 조선 선수들이 하이파이브를 거부할까’에 맞춰졌다. 열흘 전 중국 쑤저우에서 열린 17세 이하 여자대표팀 경기에서 조선대표팀은 한국 선수들의 악수도, 하이파이브도 받지 않았던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 선수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하이파이브도 했고 경기 중 넘어진 수원FC 선수의 팔을 두드리기도 했으며 경기 후에는 가벼운 손 인사도 나눴다. 공동응원단의 목표가 ‘평화’와 더불어 ‘페어플레이’였는데, 조금이나마 이 정신이 구현된 셈이다. <br /><br />‘어느 팀을 응원하세요?’ 많이 받은 질문이었다. 단장으로서 양 팀의 선전을 기원한다면서 ‘무승부’라고 말하다가 말끝을 흐리곤 했다. 이번 경기는 반드시 승부를 가려야 했고, 본 경기가 연장전을 거쳐 승부차기까지 가면, 어느 팀이 결승에 올라도 경기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공동응원단을 향한 후폭풍이 걱정된 탓인지, 수원FC가 올라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고향팀의 2 대 1 역전승으로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을 때에는 기쁨에 겨워 껑충껑충 뛰는 내고향 선수들과 얼굴을 감싸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수원FC 선수들의 모습이 교차되면서 내 눈가에도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이슬이 맺혔다. <br /><br />악천후 속에서도 약 2200명이 함께한 공동응원에 대한 언론의 평가는 인색했다. 일부 언론에선 ‘내고향팀 응원 소리가 더 컸다’거나 ‘지소연 선수가 페널티킥 실축을 했을 때 환호성이 나왔다’는 식의 보도를 내놨다. 하지만 수원FC가 우세할 때에는 내고향의 분발을, 내고향이 앞서갈 때엔 수원FC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더 높았다. 지소연의 실축에도 환호했다기보다는 ‘아〜’하는 탄식 소리가 더 컸다.</span></span></span></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사흘 후 뙤약볕이 내리쬔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열린 결승에선 내고향이 일본의 도쿄 베르디 벨레자를 1대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내고향 선수들은 기쁨에 겨워 인공기를 들고 손을 흔들면서 경기장을 돌았다. 선수들이 공동응원단 앞에 이르자 2천 명에 육박한 공동응원단은 열렬한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내고향’에서 왔다고 여겼는지 조선이 고향인 이산가족과 북향민의 환호가 더 컸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span></span></span></span></span></p>
<p>[caption id="attachment_5265" align="aligncenter" width="790"]<img class="size-large wp-image-5265"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A0%95%EC%9A%B1%EC%8B%9D-1024x768.jpg" alt="" width="790" height="593" /> 내고향여자축구단과 도쿄 베르디 벨레자의 결승전에서 응원 중인 필자(출처: 필자)[/captio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조선 선수들이 ‘적대국’이라고 배운 한국에 와서 일본팀을 꺾고 우승하고, 한국 시민들은 인공기를 펼쳐 들고 자축하는 조선 선수들을 열렬히 축하해주는 장면.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저 선수들은 우리를 보며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들을 수 없는 질문을 떠올리던 사이에 옆에 있던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가 소감을 물었다. “정치가 아직 하지 못한 일을 스포츠가 먼저 보여줬고, 응원단이 동포애로 이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답했다. <br /><br />이번 대회 나의 또 다른 관심은 ‘내고향 선수단이 기자회견에서 한국 기자의 질문에 어떻게 응할까’에 있었다. 내고향 감독인 리유일은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2023년 9월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여자축구 한국과의 8강전 이후 진행된 기자회견과 2024년 2월 ‘파리 올림픽’ 여자축구 아시아 최종예선 일본과의 경기를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국 기자가 ‘북측’이나 ‘북한’이라고 표현하면서 질문하자 공식 국호를 사용하지 않으면 답하지 않겠다고 말한 바 있었다. 두 달 전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한국을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공인하고 가장 명백한 언사와 행동으로 철저히 배척하고 무시하면서 다루어 나가겠다”고 밝혔던 터였다. <br /><br />그런데 결승에 앞서 여러 차례 있었던 공식 기자회견에서 내고향 선수단은 한국 기자들과도 일문일답에 응했다. ‘어? 배척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네.’ 기자회견장에 들어갈 수 없었던 나는 동영상을 살펴보고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에게 물어본 결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국 기자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조선’과 같은 공식 국호도 사용하지 않고 조선이 질색하는 ‘북한’이나 ‘북측’이라는 표현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질문하자, 리유일 감독과 김경영 선수도 하나하나 답을 이어갔던 것이다. 국가대항전이 아니라 클럽 간 경기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br /><br />이는 우승 기자회견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기자회견 막바지에 한 기자가 “북쪽, 북측 여자 축구가 과거부터 굉장히 수준이 높다”고 말하면서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리 감독은 “호칭을 좀 바로 해달라”고 했는데, 해당 기자는 “어떻게 해드릴까”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조선 축구단 통역사는 “국호를 바로 해달라”고 했고, 옆자리에 있던 최우수선수(MVP) 수상자이자 주장인 김경영 선수는 “우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질문을 던진 기자 입에선 끝내 공식 국호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이날 기자회견은 내고향 선수단이 항의의 뜻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기자회견장을 떠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br /><br />이를 두고 여러 언론은 조선 선수단이 ‘적대적 두 국가론’을 재확인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과연 이렇게만 해석할 수 있을까? 만약 해당 기자가 호칭을 ‘무음’으로 처리했다면 어땠을까? 더 나아가 공식 국호를 사용했으면 어땠을까? 한 단어의 차이가 빚어낸 결과가 너무나도 컸기에 던지는 탄식어린 질문이다. <br /><br />아마도 내고향 선수단은 한국 기자가 ‘북한’이나 ‘북측’이라고 부르면서 던지는 질문에는 일절 답하지 말고 항의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2023년 7월부터 조선은 ‘남조선’ 대신에 대한민국, 한국으로 표현하기 시작했고 ‘두 국가’를 선언한 이후에는 이러한 기조가 더욱 강해지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 언론은 공식 국호 사용을 여전히 꺼린다. 흔히 스포츠는 정치와 분리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적대적인 남북관계에서 스포츠마저도 정치에 종속되어 있는 현실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br /><br />그런데 호칭 문제를 둘러싸고 ‘차집합’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 기자가 이 부분을 무음으로 처리해 질문하면 내고향 선수단은 답변을 했다. 한국의 ‘특수관계론’과 조선의 ‘두 국가론’ 사이에 ‘기묘한 교집합’이 확인된 셈이다. 이는 조선이 두 국가론에 대한 입장은 확고한 반면에 적대성에 있어서는 가변적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성찰이 필요하다. 조선이 적대적이고 모욕적이라고 간주하는 표현을 고수하면서 적대성의 책임을 저쪽으로만 전가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를. <br /><br />기실 내고향팀의 방한 자체가 적대성이 완화되었다는 증표라고 할 수 있다. 불과 2년 전처럼 양측이 풍선을 날리고 확성기 방송을 틀어대면서 일촉즉발의 상태가 계속되었다면, 내고향팀의 방한은 성사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내고향 선수들이 수원FC와의 경기에서 보여준 페어플레이와 ‘국호 무음’ 질문에 답변을 한 기자회견을 떠올려 보면, 적대성을 조금씩 풀어갈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희망을 담아 묻게 된다. 다음 국제경기에서 조선 선수단에게 공식 국호를 사용해 질문해 볼 기자, 누구 없소? <br /><br />끝으로 이번 공동응원과 관련해 색다른 소회를 밝히고자 한다. 우리 응원단을 격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일부 한국 언론 및 축구팬과 내고향 선수단은 우리에게 공히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국내에선 ‘왜 우리팀이 아니라 공동응원을 했냐’는 핀잔이 나왔고, 내고향 선수단은 경기장에 모인 공동응원단을 없는 존재처럼 대했다. 나는 전자의 반응에는 동포애를 이해해달라고, 후자의 반응에는 동포애를 잊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싶다. <br /><br />동포애? 국내에선 분단이 장기화되고 남북 교류협력마저 끊기면서 동포애를 느끼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이번 공동응원을 통해 우리 국민의 마음속에 동포애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에선 김정은 위원장이 “한국을 동족에서 영원히 배제하겠다”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동족 개념 지우기에 바쁘다. 이러한 조선의 기조에는 같은 민족이라는 한국에 대한 배신감과 좌절감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을 게다. 그런데 이해와 존중과 사랑의 정신이 담긴 동포애는 다르다. 나는 우리의 이런 마음을 조선에 전하는 것이 ‘적대적 두 국가론’에 가장 우호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span></span></span><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r /></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p>
<p>[caption id="attachment_5266" align="aligncenter" width="790"]<img class="size-large wp-image-5266"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6/%EC%A0%95%EC%9A%B1%EC%8B%9D_%EC%99%B8%EA%B5%AD%EC%9D%B8%EC%82%AC%EC%A7%84-1024x768.jpg" alt="" width="790" height="593" /> 수원FC와 내고향여자축구단의 준결승 경기. 왜 왔냐는 질문에 특별한 기회 아니냐며 등을 돌려 'GROW TOGETHER SHINE FOREVER(함께 성장하며 영원히 빛나길)'라는 문구를 보여준 외국인 가족(출처: 재단)[/caption]</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Wed, 03 Jun 2026 19:14:2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11"><![CDATA[리영희다시읽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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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나와 리영희' 출간기념 광주·전남 북토크｜2026.04.21]]></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1003]]></link>
			<description><![CDATA[<p><iframe title="YouTube video player" src="https://www.youtube.com/embed/EMzsF9YnffI?si=2VfDZLRAVfu_ldKy" width="560" height="315"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Mon, 11 May 2026 15:00:33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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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유영수·김영희 부부 토크쇼｜2025.06.27]]></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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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iframe title="YouTube video player" src="https://www.youtube.com/embed/TbhvqFHidXA?si=PZ82Lg-COMs_B7Eu" width="560" height="315"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Mon, 11 May 2026 14:58:2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28"><![CDATA[유튜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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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뉴스레터 제48호]]></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1001]]></link>
			<description><![CDATA[<p><iframe src="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8pb2zEr7oU2cJD_JElr1we0uYchk3Bs" width="100%" height="1500" allowfullscreen></iframe></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un, 10 May 2026 12:05:0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27"><![CDATA[뉴스레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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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리영희가 김동춘에게 보내는 서신]]></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1000]]></link>
			<description><![CDATA[<p><img class="aligncenter wp-image-5245 size-large"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5/%EB%B4%89%ED%88%AC-512x1024.png" alt="" width="512" height="1024" /> <img class="aligncenter size-large wp-image-5246"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5/%ED%8E%B8%EC%A7%801-659x1024.png" alt="" width="659" height="1024" /> <img class="aligncenter size-large wp-image-5247"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5/%ED%8E%B8%EC%A7%802-659x1024.png" alt="" width="659" height="1024" /></p>
<p>김형, <br />안 표지에 서명하여 역사비평사를 통해서 우송해준 역저 &lt;한국사회노동자연구&gt;를 고맙게 받았습니다. 나의 딸이 연세대 생물학과에 들어가더니(82년) 2학년에 올라가면서 인천구로지역 공장에 들어가 6년간을 거의 소식도 없이 지내고 87 이후에는 복교와 제적을 거듭하다 93년에 졸업이라고 해요. 그래서 언제나 이른바 ‘학출노동자’에 관심이 깊어서, 김형의 책 363 페이지 “대학출신...”부터 읽어보았습니다. 도대체 얼나마 많은 학생들이 ‘학출’로 들어갔던 건지? 지금도 나에게는 그것이 궁금해요. 그 낭만적이고 희생적이고 정의심이 강했던 젊은이들! 그러면서 “혁명”의 꿈의 좌절에 눈물을 머금고 현장을 떠난 젊은이들. 김형의 책 서문에 그들의 일부가 현재의 노동운동의 주요 지도자층을 이루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는데, 이탈했거나 남아있거나 나는 나의 딸을 통해서 그들의 “순정”을 고귀하게 여기는 거지요. 궁금해서 러시아 혁명 전시기의 “브나로드”와 “나로드니키”의 수량적 동태를 알고 싶어서 사놓고 30년이 되는 E. H. 카의 &lt;볼셰비키 혁명&gt;을 다시 한번 훑어볼 기회가 되었습니다. 목적과 초지를 달성했느냐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리고 또 학출들의 전술과 행동상의 문제점들을 숙지하면서도 그 시기 노동의 현장으로 꿈을 품고 뛰어들어갔던 학생들을 나는 눈물겹도록 사랑하는 거지요. 대학출신 노동자의 형성과 활동이 좀 더 많은 내용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보내준 배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몇 줄 적어서 보내는 바올시다.</p>
<p>뜻깊은 추석이 되기를 바라면서 1995년 9월 000 리영희</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un, 10 May 2026 10:04:0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7"><![CDATA[편지글]]></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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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리영희 선생님과 나 / 김동춘]]></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999]]></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color:#333333;"><strong><span style="font-size:2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리영희 선생님과 나</span></strong><br /></span></p>
<p><img class="alignright size-medium wp-image-5250"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5/%EA%B9%80%EB%8F%99%EC%B6%98_248X310238X300-240x300.png" alt="" width="240" height="300" /></p>
<p> </p>
<p> </p>
<p> </p>
<p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font-size:17px;color:#333333;"><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r /><br /><br />김동춘(성공회대 명예교수, 좋은세상연구소 대표)</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1970년대에 대학을 다닌 주변의 동료 선후배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1977년 대학 입학 후 리영희 선생님의 글과 책을 읽었다. 당시는 학생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던 학생들도 교양 차원에서 리영희 선생님의 글을 많이 읽었지만, 리영희 선생의 글은 당시의 반독재 투쟁이나 학생운동 서클에 가담했던 대학생들에게 가장 큰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대 중반은 유신의 억압이 극에 달하기도 했지만, 다른 편으로는 한국에서 ‘제3세계’ 인식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아마 국제적인 데탕트의 분위기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산업화가 본격화되고 도시 빈민이나 노동자층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면서 1960년대 말까지 학생들이나 지식인들이 갖고 있었던 자유주의 분위기나 낭만 지향이 점차 사회과학적 문제의식으로 변화된 것도 리영희 선생의 저작이 널리 읽히게 된 하나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br /><br />나는 가끔씩 후배 학자들이나 외국인들로부터 왜 한국에서는 미국과 유럽에서 발생한 68혁명과 같은 것이 없었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그런 질문은 대체로 분단 한국이 처한 극우반공주의와 그리고 당시 한국이 경제적으로 후발국에 있었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질문이다. 일본에서까지 확산된 당시 청년들 주도의 68혁명, 특히 베트남전 반대운동은 기본적으로 서구 자본주의의 일정한 변화와 성숙, 그리고 대학이나 주류 보수 지식사회의 자기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한국은 후발 개발독재 국가이자 미국의 자유주의 정치 이데올로기의 직접 영향권 하에 있었기 때문에 서구 진보 지식인이나 학생들처럼 마오쩌둥의 중국도 호치민의 베트남도 낭만적 시각으로 바라볼 정신적 공간이 없었다.<br /><br />1964년 이후 한국은 베트남 전쟁(월남전)에 수십만명의 군인을 파견했고, 학교나 마을에서 ‘월남 갔다 온’ 이웃집 아저씨들이 무용담 특히 한국 군인들이 공산주의 베트콩을 ‘동물’처럼 죽였다는 이야기(나중에 알고보니 사실상 한국군이 저지른 대량 학살)를 듣기도 했지만, 한국의 분단 상황과 베트남의 내전을 같은 국제정치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즉 ‘자유 진영’ 담론이 압도하던 박정희 군사정권 하의 한국에서 베트남 전쟁을 제대로 바라보거나 비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br /><br />이런 상황에서 리영희 선생님이 &lt;창작과 비평&gt; 지면에 베트남 전쟁 관련 논문을 기고하고, 그것을 책으로 묶어서 &lt;전환시대의 논리&gt;를 펴냈을 때, 한국의 대학생들이 받은 충격은 정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를 비판했던 어떤 지식인들도 베트남 전쟁의 사례를 끌어와서 한국의 남북한 분단 상황, 냉전적 국제정치를 다르게 보자고 설파한 사람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섬나라’ 남한에서는 북한은 물론 남한 자체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리영희 선생님의 &lt;전환시대의 논리&gt;는 한국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허구적 ‘제1세계주의’에 일대 경종을 울린 저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리영희 선생의 평론들은 너무나 상식적인 접근이지만, ‘동토의 한국’에서는 상식이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었다. <br /><br />이 이후에 나온 &lt;우상과 이성&gt;, &lt;8억인과의 대화&gt; 등의 저서도 학생들과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죽의 장막으로 알려진 사회주의 중국의 다른 모습을 드러낸 것도 상당히 위험한 시도였다.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에 반대하던 지식인과 청년들이 강고한 반공이데올로기 때문에 북한은 아예 거론할 수도 없었고, 중국에 대해서도 접근하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중국과 중국혁명을 소개하는 책자는 몇 권 있었지만, 그것은 약간의 학술적인 접근이었고, 사회주의 중국의 ‘다른 모습’을 거론하는 것은 금기에 속했다. <br /><br />어쨌든 리영희 선생님은 한국의 분단 상황을 직접 거론하기 보다는 베트남과 중국을 끌어와서 한국이 처한 민족 현실, 그리고 냉전 국제정치 하에 처한 위상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촉구하였고, 그것은 군사정권의 강고한 반공이데올로기에 작지만 치명적인 균열을 일으킨 것이었다. 검사들의 기소장에 나타난 것처럼 공안당국은 그의 논문이나 논평이 당시의 베트남이나 중국의 실제 모습을 제대로 그려내기보다는 친중국, 친사회주의 지향을 은밀하게 드러내면서 젊은이들을 선동했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 식의 비판은 80년대 이후 공식 매체나 보수 지식인들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냉전체제가 허물어지고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이 시작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의 국제정치 인식이나 한국 현실 진단은 훨씬 더 진보적이고 선구적이었다. <br /><br />1987년 민주화는 한국에서의 냉전 이데올로기의 도그마를 흔들었다. 정치적 민주화는 시민사회나 사회운동의 대폭발을 촉발했다. 그래서 1988년 이후 몇 년 동안 한국은 대학, 사회 각 영역, 그리고 노동현장에서 거의 전쟁과 유사한 폭력이 벌어졌다. 그런데 1989년 천안문 사태와 소련 동구 사회주의가 무너진 대충격이 발생했다. 그래서 한국의 진보적 학생 청년들이 막연하게 갖고 있던 사회주의에 대한 기대나 호기심이 크게 도전을 받게 되었다. 물론 당시 일부 반독재 투쟁에 투신한 한국 청년들이 친사회주의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한국 자본주의와 군사독재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것이 많았기 때문에 한국 사회 변혁은 이런 세계적 변화와 무관하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br /><br />따라서 소련 동구 사회주의 실험, 그리고 중국 및 사회주의 일반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둘러싸고 운동진영 내에서 격렬한 논쟁이 진행되었다. 그와 동시에 정치 사회 각 영역에서 민주화가 진척되고 급진적인 사회운동 그룹의 활동이 가시화되자, 사회주의 붕괴라는 거대한 뒷배를 얻은 한국 보수언론과 기득권 세력은 진보적 지식인들에 대한 색깔 공세를 더욱 세차게 했다. 이런 조건에서 리영희 선생님의 중국론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br /><br />1989년, 나는 역사문제연구소의 상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lt;월간조선&gt; 기자가 나를 찾아왔다. 대학 후배라고 하면서 나를 찾아온 이유는 리영희 선생님에 관한 생각을 듣자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나를 왜 인터뷰 대상으로 삼았는지는 알 수 없는데, 아마 내가 당시 리영희 선생님의 영향을 받는 세대의 소장 진보 학자로 알려졌기 때문에 내 발언을 통해서 리영희 선생님에 대한 사회적 존경 혹은 도덕적 위상을 무너뜨리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이 기자는 리영희 선생의 &lt;8억인과의 대화&gt; 등에 실린 중국 관련 평론 들을 문제 삼으면서 “리영희 선생의 글이 과연 사실에 부합하는가, 상당한 허점을 갖고 있지 않나”라고 거의 2시간 이상 꼬치꼬치 물으면서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당신들이 리영희를 까는 목적이 뭐냐? 누구나 자신이 쓴 평론이나 논문에서 사실을 틀리게 적시할 수도 있고, 논리에도 허점이 있을 수 있는데, 지금 리영희 선생의 평론을 난도질해서 밝히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고 소리 지르며 인터뷰를 중단했다. <br /><br />순진했던 나는 그들이 그렇게 집요하게 리영희를 문제삼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지나고 보니 자신들이 보기에 지적 권위와 도덕성을 가진 운동진영의 지식인이나 지도자들의 허점을 까발리면서 민주화 세력이 실제로는 친북성향을 가지고 있는 ‘좌익’들이며, 그것은 민주화 운동 자체가 사실 사회주의 운동의 일환이라는 것을 들추어내서, 민주화 세력에게 큰 흠집을 내기 위한 음험한 정치적 기획이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곧 그것은 이미 민주화 이후 본격화된 조선일보의 ‘사상투쟁’의 일환이었고, 한국 수구세력의 위기감을 반영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아마 그가 취재한 내용, 나의 생각 일부가 이후 &lt;월간조선&gt;에 실렸겠지만, 나는 그것을 찾아보지 않았다. 이 무렵부터 나는 &lt;조선일보&gt;를 더 이상 보지 않았다. 그들이 집요하게 리영희 선생님을 물고 늘어진 정치적 이유를 명백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군사정권 시기는 공안기관이나 군대가 폭력적으로 반정부 세력을 진압했는데, 이게 민주화로 그런 보호막이 사라지자, &lt;조선일보&gt;가 반공체제 유지의 선봉장이 된 것이다. <br /><br />그런데 사실 당시 내가 겪었던 일련의 일들은 사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전 세계에서 발생한 현상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국의 반독재 민주화 세력 일반을 좌익, 혹은 친북 세력이라고 이데올로기적 흠집을 내면서 군사정권 혹은 반공자유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 무렵 리영희 선생님도 자신의 이론이나 사상, 특히 중국에 대한 일련의 평론에 대해 여러 가지 고민을 했을 것이다. 나는 월남자이자 군 장교 출신인 그가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평론 활동을 했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남한사회의 닫힌 이데올로기 지형을 참을 수 없어서 지적 자유를 외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다. <br /><br />1991년인가 연대 장기원 기념관에서 열린 리영희 선생님의 자기반성적인 논문 발표 – 즉 인간의 이기주의적 속성에 대해 사회주의 사상이 제대로 천착하지 못한 점을 강조한 것으로 기억난다 – 자리에는 수많은 ‘운동권’ 젊은이들이 구름같이 몰려서 거의 설 자리도 없을 지경이었다. 나도 서서 그의 발표를 들었다. 당시 보수 매체에서는 리영희의 당시 발언에 대해 한국의 친사회주의적인 지식인의 자기반성이라고 그 발표회를 부각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한 지식인의 전향선언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리영희 선생님을 포함하여 한국의 민주화 운동 관련 청년들도 북한이나 중국 사회주의, 소련 동구 사회주의 체제를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도 없었고, 그럴 기회도 없었다. 단지 한국의 군사독재와 정치 경제체제에 대한 거부감이 오히려 그 반대편인 사회주의에 대한 우호적 감정으로 나갔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부모 세대인 리영희 선생님도 우리가 동시대인이었던 셈이다. <br /><br />원래 나는 마르크스와 레닌도 좀 읽었고, 중국혁명에 대해서도 약간은 알고 있었으나 당시 운동진영의 주류라 할 수 있는 반미 민족해방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고, 사회주의에 대해 낭만적인 생각을 갖지는 않았기 때문에 리영희 선생의 발표가 그다지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의 부모들과 비슷한 연배인 리영희 선생님이 이런 점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았단 말인가 하는 생각까지도 가졌던 기억이 난다. 즉 사회주의가 붕괴했다고 해서 한국 자본주의 체제의 모든 모순이나 반공주의 지배체제가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었고, 한국의 지식인이나 사회운동 진영의 투쟁 과제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사회주의 이상을 바라보며 반독재 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았던가? <br /><br />내가 리영희 선생님을 글과 책으로만 접하거나 먼발치에서만 보다가 직접 대면하게 된 것은 1995년 &lt;역사비평&gt; 대담에서였다. 당시 역사비평은 ‘나의 학문 나의 인생’이라는 난을 만들어서 원로 학자들의 이력과 학문적 업적과 고민들을 소개하였다. 주로 편집위원들이나 해당 분야 전공자들이 인터뷰어로 참가했다. 리영희 선생도 당연히 대상이 되었는데 누가 적당한 인터뷰어인지 좀 결정하기 어려워 서중석 편집장도 고심하였다. 그러다가 서중석 선생님이 결국 나보고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리영희 선생님은 신방과 소속이고 기자 출신인데다, 주로 국제정치 쪽 글을 써왔기 때문에 이 분야를 모두 포괄하는 인터뷰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지식인으로서 그의 활동을 부각한다면 언론, 국제정치 분야의 전문가보다는 지식인 일반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적절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나를 지목한 것 같다. <br /><br />내가 리영희 선생님을 인터뷰하기에는 좀 역부족이라 속으로 생각했지만, 한번 해보겠다고 답했다. 그래서 그때가 리영희 선생님이 출간한 책과 글을 거의 다 읽으면서 인터뷰 준비를 했다. 특히 중국 쪽에 대해서는 내가 별로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특별히 이런 저런 자료들을 읽으면서 인터뷰 준비를 했다. 그것이 바로 &lt;역사비평&gt; 1995년 여름호에 실린 “'나의 학문 나의 인생: 리영희 - 냉전 이데올로기의 우상에 맞선 이성의 필봉”이다. 산본의 한양아파트 찾아가서 몇 시간 동안 대담을 했는데 사실 내가 오히려 배우는 것이 많았다. 이 인터뷰는 당시 지식인들에게 많이 읽혔고, 강준만 교수는 이후 &lt;인물과 사상&gt;에서 나 개인에 대한 서술을 하면서 이 인터뷰의 주요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br /><br />인터뷰 석상에서 나는 여러 가지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많이 던졌다. 그러나 그는 성내지 않고 매우 성실하고 솔직하게 답변했다. 그가 군사정권 시절 그렇게 금기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점을 궁금하게 생각했다. 월남자인 그는 남한에서 자라서 군사정권에 대해 거의 입도 벙긋하지 못했던 나의 부모 세대 사람들과는 매우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래서 그의 용기는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죽고 죽이는 ‘톱질 학살’을 처절하게 겪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했다. 즉 월남자들은 흔히 맹목적 반공주의라고 알고 있지만, 리영희 선생처럼 향우회 등에 한 번도 나가지 않는 사람, 남한 사람들보다 유교적 권위주의에 덜 물들어 있고, 반공주의의 공포에 덜 찌들어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점들이 나로서는 다시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br /><br />이후 나는 새 책을 출간할 때마다 리영희 선생님께 보내드렸고, 리영희 선생님은 번번이 친절한 답신을 보내왔다. 답신에는 반드시 약간의 소감과 소회를 적었다. 나도 그런 성의에 느낀 바가 많아서 한동안 저자로부터 책을 선물받으면 반드시 편지나 엽서를 보냈고, 이메일이 활성화된 이후에는 메일로라도 책을 잘 받았다고 답을 보냈다. <br /><br />2000년 제주인권회의에서 리영희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당시 조용환 변호사가 대한항공 등의 후원을 받아서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이던 1998년부터 매년 제주에서 여러 전문가들을 초청해서 인권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2000년 인권회의가 나에게 매우 특별했던 이유는 내가 주최 측에 요청해서 원래 프로그램에는 없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 특별 세션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내가 기조 발제를 했다. 특별히 이 모임에는 문경의 채의진 유족, 함평의 정근욱 유족도 참석하도록 권유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 일반을 공론장에 처음으로 올린 역사적 현장이었다고 생각한다. <br /><br />당시 앞자리에 앉아 계셨던 리영희 선생님은 내 발표를 매우 듣고 난 이후 조용히 내게 와서 소감을 전했다. “사람들이 심각하고 조용하게 듣고 있었고,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는 칭찬을 했다. 그런데 본인이 당시 11사단 통역장교로 일했지만 미군들과 함께 다녔기 때문에 거창사건 등 학살에 대해서는 전혀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마 이런 학살이 진행될 당시 군인으로 근무한 이력 때문에 계속 내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 <br /><br />나는 그의 기억과 진술이 진실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는 그가 자서전에서 전쟁기 군 비리를 폭로하고 한국군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에 비추어 볼 때 당시 민간인 학살이 이렇게 자행된 사실을 거의 몰랐을까에 대해 약간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그것은 아마도 전쟁을 겪은 리영희 선생 세대가 어느 정도 알면서도 건드리기가 가장 부담스러운 주제여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여튼 이후 내가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운동을 하고 이후 진실화해위원회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조사 활동을 하면서도 몇 번 더 만났지만, 이 일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본인이 당시 장교로 근무했던 사실 때문에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거나 입장을 갖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br /><br />2000년 이후에는 자주 뵐 일이 없었다, 리영희 선생님도 몸이 불편하시고 공적 활동을 거의 하지 않으셨다. 내가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활동을 하고 진화위에 들어가서 가끔씩 안부 연락을 드렸다. 그리고 정무직 공무원으로 여러 원로분들의 자문을 얻을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 관련 이야기를 듣고, 점심이라도 대접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비서를 대동해서 산본에 몇 번 들렸다. 그래서 산본역 근처 인도 음식점, 그리고 안산 쪽으로 가다가 있는 큰 오리집 등에서 식사를 몇 번 한 기억이 난다. <br /><br />2006년 무렵 리영희 전집을 만드는 모임이 만들어져, 나도 편집위원의 한 사람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작업에서 내가 한 역할은 별로 없었다. 그런 작업을 한 한길사에 대해서는 매우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진행 과정을 보면서 약간의 아쉬움도 있었다. 리영희 회고록 등에서 기록된 본인의 활동, 예를 들면 4.19 전후 합동통신 기자로서 쓴 기사나 이후 백승욱 교수가 탐문한 적도 있지만, &lt;조선일보&gt;에서 실명을 적지 않은 베트남전 관련 기사 등을 일일이 검색 확인하여 전체 리영희 관련 글을 찾아내는 작업을 함께 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외국의 예를 볼 때 한 지식인의 전집을 내려면 그런 정도의 정밀한 작업은 반드시 필요한 데 그런 공을 들이지 않은 채 서둘러 전집 출간을 한 인상이 있었다. 물론 주최 측에서 충분한 예산이나 인력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은 한다.<br /><br />어쨌든 나는 리영희 선생을 용기 있는 지식인으로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문필가의 한 사람으로 본다, 그의 글은 힘이 있고, 정밀하다. 기자로서의 엄밀함과 학자로서의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열정이 글에 녹아 있다. 지식인으로서 리영희 선생님에 대한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논평은 이후에 본격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식의 흠집내기나, 다른 편의 일방적 숭배나 찬양도 배격하고, 분단된 한국에서 살았던 한 지식인의 삶의 궤적으로 충실하게 정리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span></span></span><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r /></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p>
<p>[caption id="attachment_5251" align="aligncenter" width="790"]<a href="https://rheeyeunghui.or.kr/?page_id=70&amp;mod=document&amp;pageid=1&amp;uid=1000&amp;execute_uid=1000"><img class="size-large wp-image-5251"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5/%ED%8E%B8%EC%A7%8012-1024x692.png" alt="" width="790" height="534" /></a> 리영희가 김동춘에게 보내는 서신(출처: 필자 제공) → <a href="https://rheeyeunghui.or.kr/?page_id=70&amp;mod=document&amp;pageid=1&amp;uid=1000&amp;execute_uid=1000" target="_blank">서신 전문보기</a><br /><br /><br /><br /></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un, 10 May 2026 09:44:2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11"><![CDATA[리영희다시읽기]]></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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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lt;나와 리영희&gt; 출간례를 가다 / 황광우]]></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998]]></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color:#333333;"><strong><span style="font-size:2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lt;나와 리영희&gt; 출간례를 가다</span></strong><br /></span></p>
<p><img class="alignright size-medium wp-image-5249"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5/%ED%99%A9%EA%B4%91%EC%9A%B0_248X310238X300-240x300.png" alt="" width="240" height="30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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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font-size:17px;color:#333333;"><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r />황광우(&lt;철학콘서트&gt; 저자, 인문연구원동고송 이사)</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해마다 오월이 오면 서울에서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광주의 망월동 묘역으로 리영희 선생을 찾아오는 이가 있다. 이규이다. 그는 1975년 광주일고 재학시절 유신철폐 시위를 모의하다 제적된 ‘문제학생’이었다. 검정고시를 거쳐 한양대학교에 들어갔다. <br /><br />1977년 그 무렵 한양대학교는 학생운동의 불모지였다. 이규는 외롭지만 열정적으로 한양대학교 학생운동의 밭을 일구어갔다. 긴급조치 9호 시절이었다. 이규는 박정희를 몰아내는 싸움에 젊음을 걸었다. 신림동 B지구 꼭대기를 오르내리며 겨레터 야학을 이끌었고, 1978년 10월 17일 광화문 시위를 기획하였던 ‘6개대학연합시위팀’의 일원으로 뛰었으며, 1979년 11월에는 남영동에 끌려가 남민전 관련으로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1980년 ‘서울의 봄’이 되자 한양대에서도 ‘학원민주화의 꽃’이 피어났다. 이후 한양대학교는 전국의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강성 운동권 대학으로 변모하였다. 이규는 한양대 학생운동의 원조였다. <br /><br />이규의 배후에 리영희가 있었다. 이규는 1978년 2학년이 되어 전공 수업은 내팽개치고 리영희 선생을 쫒아다녔다. 경제학과 학생이 신방과 수업을 들었다. 수업만 끝나면 교수 연구실로 따라가 묻고 따졌다. 사찰 대상이었던 리영희 선생은 이규로 하여금 집으로 와서 이야기하자며 ‘자유 방문’ 티켓을 주었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방문하였고, 밤 깊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철부지 학생이 사모님 눈치도 살피지 않고 선생을 괴롭혔다. <br /><br />리영희 선생의 훈화를 들으며 자란 이규였으나 나는 선생의 육성을 듣는 훈자(薰炙)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다만 박현채 선생으로부터 리영희의 일화를 들었을 뿐이다. <br /><br /><em>리영희: 어이, 현채, 딸이 가출했나 봐. 집에 들어오질 않네. 큰일 났어. </em><br /><em>박현채: 공장에 들어갔겠지. </em><br /><em>리영희: 그럼, 어떻게 해야지? </em><br /><em>박현채: 영희, 너, 지금 딸 자랑하는 거지? 걱정은 무슨 걱정? 방값이나 두 둑하게 줘. 연탄가스 마시는 일은 없어야 할 것 아니야?</em> <br /><br />오늘은 리영희 선생을 만나는 날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여 리영희 선생을 회고하는 책, 『나의 리영희』의 출간례가 열리는 날이다. 245빌딩 4층에서 오후 7시 30분에 열릴 예정이었다. 리영희 선생을 회고하는 영상물이 방영되었다. 김민기의 노래가 우리들로 하여금 1970년대로 빨아들였다. 네 분의 연사가 앉아 있었다. 제일 왼편에 박병기 교수가 자리를 잡았고, 오른편에 황석영 선생이 자리를 잡았다. <br /><br />박병기 교수는 전남대 철학과에서 젊음을 보낸 연구자이다. 그곳에서 삶의 대미를 장식하고 지금은 은퇴 학자로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역시 오늘 향연의 주역은 황석영 선생이었다. 노구를 이끌고 군산에서 이곳까지 와 주셨다.</span></span></span></span></span></p>
<p>[caption id="attachment_5253" align="aligncenter" width="790"]<img class="size-large wp-image-5253"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5/%ED%8C%A8%EB%84%90-1024x683.png" alt="" width="790" height="527" /> 패널로 참여한 (왼쪽부터) 박병기 전 전남대 교수, 박장수 전대민동 부회장, 전진희 광주시 인권옴부즈맨, 황석영 작가와 사회를 맡은 김효순 리영희재단 이사장[/captio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마이크를 잡은 황석영은 『객지』와 『전환시대의 논리』 두 권의 책이 맺은 인연에서부터 포문을 열었다. 『객지』가 창비신서 3권이었고, 『전환시대의 논리』가 창비신서 4권이었다. 그러니까 1974도에 문제작 두 권이 동시에 연이어 출간되었던 것다. &lt;창작과 비평사&gt;의 백낙청과 염무웅은 수시로 작가들에게 연회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사회과학자와 소설가가 동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두 분의 배려 덕택에 황석영은 리영희와 함께 자리를 하였다. 리영희 선생은 1929년생이고, 황석영은 1943년생이니, 나이로만 보아도 동석하기 힘든 사이였다. <br /><br />글만 보아선 ‘날카로운 눈매의 꼬장꼬장한 지식인’일 것이 틀림없는 리영희 선생이었는데, 자리를 함께 할수록 ‘농담도 잘하는 따뜻한 분’이 리영희 선생이었다고 황석영은 회고하였다. <br /><br /><em>“그때 함께 놀았던 친구들 다 갔어. 8할이 갔지. 뭐, 이부영, 김정남, 박석무, 요 정도 남았어.”</em> <br /><br />그것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사람이 살아 있다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활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설령 60의 초로일지라도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창작활동은 못 하더라도 봉사활동은 해야 한다. 봉사도 못 하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 84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쓰는 사람이 있다. 그가 황석영이다. 창작을 향한 그의 열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br /><br /><em>“내가 리영희 선생의 자택을 출입할 때 조그만 딸이 있었지. 초등학교 4,5학년 다니던 때였을 거야. 아, 근데 그 딸이 커서 노동운동하다가 영등포교도소에 들어갔잖아. 1986년이었을 거야. 딸 면회를 하고 나온 리영희 선생이 우는소리를 하더라고. 그래서 우리가 한 방 먹였지. ‘아니, 수천 명 어머니의 애가슴을 타게 만든 장본인이 정작 딸자식이 교도소에 갔다고 우는 소릴 하면 어떡하는 겁니까?’”</em> <br /><br />마이크가 박병기 교수에게 넘어갔다. 솔직히 말해 나는 박병기 교수와 리영희 선생이 무슨 인연을 맺었던지 몰랐다. 1996년의 일이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참신한 기획을 하였다. 현대사에서 한국인들에게 커다란 정신적 영향을 미친 몇 분을 선정하여 논문을 쓰고 논의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때 박병기가 선정한 인물이 리영희 선생이었다. <br /><br />박병기는 왜 리영희를 가슴에 묻어두었던 것일까? 이야기는 1979년 12월로 넘어간다. 그때 박병기는 전남대 학생운동에 몸을 담고 있었고, 한 차례 유인물을 뿌린 일이 뒤늦게 발각되어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윤한봉이 서광주 경찰서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것도 박병기 때문이었다. <br /><br />그때 광주교도소의 정치범을 이끌던 이는 김병곤이었다. 리영희 선생이 반성문을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안대 중사에게 고초를 당하고 있었다. 보안대 중사는 리영희 선생의 식사를 중단하였다. 이틀을 굶게 한 후, 곰탕을 시켜 회유하였다. 그래도 끝까지 버텼다. <br /><br />이런 식으로 리영희 선생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안 김병곤이 투쟁에 나섰다. 정치범들은 식판을 엎어버렸다. 식판을 두들기며 “리영희 선생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라!”고 샤우팅을 벌였다. 그때 미결사에 들어온 이세천, 장석웅까지 싸움에 합류했다. 리영희 선생에 대한 고문에 가까운 괴롭힘은 중지되었다. 김병곤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김병곤은 형법의 모든 조항을 꼼꼼하게 확인하여 교도소의 문제점들을 찾아냈다. 규정된 돼지고기 함량의 절반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소내 처우 개선 투쟁에 돌입하였다. <br /><br />박병기의 담담한 회고는 10년의 시간을 훌쩍 넘어 1989년 11월로 넘어갔다. 대구에서 연합 학술대회가 열렸고, 리영희 선생이 기조 발제를 하였다. 박병기는 그날 밤 리영희 선생과 한방에서 잠을 자는 룸메이트가 되었다. <br /><br />학술대회에서 리영희 선생은 여러 후배 연구자들 앞에서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8억인과의 대화』에서 펼친 중국 문화대혁명 예찬에 대해 자기비판을 하였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에서 문화대혁명을 예찬하였으나, 문화대혁명의 부정적 측면을 간과한 일면적 견해였음을 고백하였다. 더불어 리영희 선생은 사회주의에 관한 자신의 견식이 짧았음을 시인하였다. 마르크스의 인간관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음을 몰랐다고 자기의 한계를 공개적으로 반성하였다.<sup>1)</sup><br /><br />삼삼오오 다들 뒷풀이 자리로 가는데, 그날 리영희 선생은 혼자 숙소로 향하였다. 박병기는 리영희를 따라 숙소로 갔다. 밤 11시 즈음이었다. TV를 켜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br /><br />이때 황석영이 우스개 이야기를 앞세워 리영희를 옹호하는 발언을 이어 갔다. <br /><br /><em>“그때 버스가 다 만원이었잖아. 손님들은 버스를 타려고 하고 틈은 없고, 그러면 어떻게 하죠? 운전대를 획 돌려버려요. 그러면 사람들이 한쪽으로 밀려버리잖아. 그런 거죠. 나도 북한을 방문하고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글을 썼잖아. 북을 미화하는 글이었죠. 제가 그 글을 쓴 이유는 반공주의, 반북주의에 대한 전회였어요. 루이제 린저도 그런 심경에서 북을 옹호하는 글을 썼다고 봐요. 내가 『무기의 그늘』에서 노린 것도 그래요. 반공 소설을 뛰어넘는 작품을 쓰자는 거였죠. 사회가 극우로, 오른쪽으로 치달리고 있으니 작가는 왼쪽으로 치우치는 글을 쓴 겁니다. 『전환시대의 논리』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뭐였습니까? 베트남전쟁의 비리, 모순을 파헤치는 이 글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것은 그것이었죠. 베트남전쟁은 한국전쟁이다. 남의 슬픔으로 내 울음을 한 거였어요.”</em> <br /><br />많이들 왔다. 1970년대 광주 청년운동의 일꾼이었던 조봉훈도 왔고, 민청학련으로 옥고를 치르고 이후 김남주의 도발이를 도맡아 도와준 최권행도 왔고, 1980년 오월 마지막 날까지 싸운 채영선과 전용호와 김선출도 왔다. 전남대 학생운동의 주역 81학번 김영집도 왔고, 광주지역 독립운동사의 연구자 안종철도 왔고, 5.18 언론상을 탄 정대하 기자도 왔다.</span></span></span></span></span></p>
<p>[caption id="attachment_5252" align="aligncenter" width="790"]<img class="wp-image-5252 size-large"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5/%EC%B2%AD%EC%A4%91-1024x645.png" alt="" width="790" height="498" /> 이날 북토크에는 4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하여 좌석을 가득 채웠다. [/captio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오늘의 출간례는 요란한 빈 깡통으로 그치는 정치인들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리영희 선생을 회고하는 자리여서 좋았기도 하였고, 노익장을 과시한 황석영의 구수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가끔 우리의 젊은 시절을, 그 시절의 열정을 상기하는 이런 자리가 열리면 좋을 것 같았다. <br /><br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운 밤이었다. 다들 BHC 호프집으로 이동하길래 나도 쫄랑쫄랑 따라갔다. 서울에서는 찾기 힘든 곳, BHC 호프집은 술집이 아니라 광장이다. 정대하 기자가 나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김용희, 기민도, 최예린 한겨레의 젊은 기자들도 자리를 함께 하였다. 한겨레신문의 원로 박화강 선배가 동석하였다. 박화강은 리영희에 얽힌 에피소드를 풀어놓았다. <br /><br /><em>“한번은 고은 선생이 리영희 선생과 함께 광주에 오셨어. 지원동 쪽에 있던 허름한 술집이었지. 거 있잖아, 애꾸눈 양주 말이야. 그래 캡틴큐였지. 고은 선생이 잔을 잡드니만 ‘언더라꾸’로 따르라고 하는 것이야. 얼음을 가득 채우고 그 위에 양주를 붓는 것이지. 고은 선생을 따라 나도 ‘언더라꾸’로 마실려고 했어. 그때 리영희 선생이 그러시는 거야. ‘박 군, 기자는 그렇게 마시는 것이 아니네. 기자는 스트레이트야. 독한 술이 혀를 지나 목구멍을 지나 위장으로 내려가는 그 짜릿함을 느끼면서 마시는 거야.’”</em> <br /><br />옆에 앉아 있던 최예린 기자가 눈을 반짝이며 박화강 선배 곁으로 다가 앉았다. <br /><br /><em>“선배님, 멋져요. 누군가 저를 ‘최 군’이라고 불러주면 좋겠어요. ‘최 양’이 아니고 ‘최 군’ 말이예요. 저도 ‘스트레이트’로 마실래요. 맨날 쓰는 박스기사 그만 쓰고 ‘스트레이트 기사’를 쓸래요.”</em> <br /><br />밤은 깊어 갔고, 술자리도 익어갔다. 황석영이 광주에 오면 뒷바라지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박형선이었다. 박형선의 형 박화강은 그렇게 말했다. <br /><br />“동생이 죽고 없으니 이 자리는 내가 감당해야제.” <br /><br />리영희 선생을 회고하는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2010년 12월이었을까? 리영희 선생이 망월동에 묻히던 날, 하늘은 갑자기 흑색으로 돌변했다. 선생의 몸이 흙 속으로 들어가던 그 순간, 폭우가 쏟아졌다. 기상의 이변과 한 인간의 죽음은 아무 연관이 없는 독립 사건이었지만, 그날의 영험한 일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br /><br />2026년 4월 23일 <br />황광우 씀 <br /></span></span></span></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r />---<br />1)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사회가 되면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는데, 마르크스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lt;고타강령비판&gt;의 핵심 논점이 이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사회가 되어도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lt;낮은 단계의 사회주의사회&gt;를 경유하여 &lt;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gt;로 이행할 것이라고 보았다.</span></span></span><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r /></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Sun, 10 May 2026 09:23:2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11"><![CDATA[리영희다시읽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5년 연간 기부금 모금액 및 사용실적 공개]]></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995]]></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재단 정관 제29조 3항에 따라 2023년 연간 기부금 모금액 및 사용실적을 공개합니다.(첨부문서 참조). <br />법인의 공익 위반 사항이 있을  경우 다음의 기관으로 제보할 수 있습니다. <br />-국세청    https://www.nts.go.kr <br />-국민권익위원회     https://www.acrc.go.kr/ <br />-서울특별시 (대변인실)  https://www.seoul.go.kr/main/index.jsp</span></span></span></span></p>
<p> </p>
<ul>
<li style="list-style-type:none;"> </li>
</ul>]]></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Thu, 30 Apr 2026 10:50:0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2"><![CDATA[공지사항]]></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 지역언론 기후보도 취재지원 사업 최종 선정 결과 발표]]></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968]]></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color:#333333;"><strong><span style="font-size:2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2026 지역언론 기후보도 취재지원 사업 최종 선정 결과 발표</span></strong><br /></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제2회를 맞은 ‘지역언론 기후보도 취재지원 사업’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보내주신 모든 언론사에 감사드립니다. <br /><br />이번 공모에는 다양한 지역과 언론사에서 기후위기를 지역의 정책과 삶의 문제로 풀어내려는 다채로운 기획들이 접수되었습니다. <br /><br />리영희재단과 녹색전환연구소는 전문가 심사를 통해 기획의 방향성, 지역성, 실행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였습니다. <br /><br />그 결과, <strong>①거제신문 ②뉴스민 ③충청리뷰 ④홍주신문</strong> 4곳을 취재지원 대상 언론사로 최종 선정하였습니다. <br /><br />아쉽게도 제한된 선정 규모로 인해 함께하지 못한 언론사에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특히 6월 3일 지방선거를 앞둔 바쁜 일정 속에서도 기후문제를 다루는 기획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해주신 모든 언론사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br /><br />선정된 언론사들은 오는 6월 3일 지방선거를 전후로 지역의 기후문제를 지역 정책과 연결하는 기획보도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br /><br />이번 지원사업을 통해 지역의 기후위기가 어떤 보도로 확장될지,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span></span></span></span></span></p>
<p> </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17 Apr 2026 17:03:2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2"><![CDATA[공지사항]]></category>
		</item>
				<item>
			<title><![CDATA[&lt;나와 리영희&gt; 출간기념 광주·전남 북토크]]></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959]]></link>
			<description><![CDATA[<p><img class="aligncenter size-large wp-image-5192"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4/260421_%EB%82%98%EC%99%80%EB%A6%AC%EC%98%81%ED%9D%AC%EB%B6%81%ED%86%A0%ED%81%AC_%EA%B4%91%EC%A3%BC%EC%A0%84%EB%82%A8_%EC%B5%9C%EC%A2%852-737x1024.png" alt="" width="737" height="1024" /></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Wed, 15 Apr 2026 12:44:0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23"><![CDATA[기타사업]]></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뉴스레터 제47호]]></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939]]></link>
			<description><![CDATA[<p><iframe src="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ceW2ESywyw-qTyoiTrrNCsSzFsra5as" width="100%" height="1500" allowfullscreen></iframe></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Wed, 01 Apr 2026 14:45:4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27"><![CDATA[뉴스레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기계의 속도로 죽이고, 인간의 언어로 부인한다 / 강성현]]></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938]]></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color:#333333;"><strong><span style="font-size:2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기계의 속도로 죽이고, 인간의 언어로 부인한다<br /></span></strong><span style="font-size:2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 AI 전쟁 운영체제, 가자에서 이란까지, 그리고 한반도</span><br /></span></p>
<p><img class="size-full wp-image-5161 alignright"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4/%EA%B0%95%EC%84%B1%ED%98%84-248X310.png" alt="" width="248" height="310" /></p>
<p> </p>
<p> </p>
<p> </p>
<p> </p>
<p> </p>
<p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font-size:17px;color:#333333;"><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r />강성현(성공회대 평화월딩연구소 소장)</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알고리즘에게 그것은 표적이었다. 이란혁명수비대 해군 기지에 인접한 군사 관련 시설. 데이터베이스가 그렇게 분류하고 있었다. 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 합동 작전 ‘장대한 분노’(Epic Fury)의 첫날, 이 좌표가 타격 목록에 올랐고, ‘처리’되었다. 현실에서 그것은 여자 초등학교였다. 2015년 개교. 인접 기지는 공습 수년 전 이미 폐쇄. 2016년 학교와 기지 사이에 담장이 세워져 별도 출입구까지 설치된 상태였다. 약 170명이 사망했고, 대다수는 어린이였다. 알고리즘은 갱신되지 않은 데이터를 현재의 표적으로 처리했다. ‘오폭’이 아니었다. 시스템은 설계대로 작동하여 학교를 ‘정밀 폭격’했다. 같은 날 24시간 동안 1,000개 이상의 표적이 이런 식으로 ‘처리’되었다. 이 속도는 인간의 판단 능력이 아니다. 기계의 처리 능력이다.<br /><br />리영희 선생은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베트남전의 “정밀 폭격”이라는 공식 언어를 해체하여 그 아래의 민간인 학살을 드러냈다. 반세기 후, 같은 단어가 알고리즘의 언어로 돌아왔다. 다만 이제 그 언어를 인간이 아니라 기계가 생성하고, 속도가 인간의 검증 능력을 초과한다. 이 글은 그 언어의 구조를 해부한다. 어떻게 AI가 전쟁의 운영체제가 되었는가. 그것이 한반도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br /></span></span></span></span></span></p>
<p>[caption id="attachment_5166" align="alignnone" width="790"]<img class="wp-image-5166 size-large"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4/jtbc-1024x557.png" alt="" width="790" height="430" /> 2016년 이후, 초등학교와 기지가 분리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위성 사진 (출처: JTBC 뉴스 캡쳐)[/captio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trong><br />가자 ― 알고리즘이 사람 죽이는 법을 학습한 곳<br /><br /></strong>미나브의 어린이들이 어떻게 죽었는가를 이해하려면 가자지구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란 전쟁에서 사용된 AI 전쟁 운영체제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가자지구의 폐허에서 학습되었다.<br /><br />이스라엘군은 가자에서 일련의 AI 시스템을 가동했다. 하브소라(The Gospel)는 건물을 표적으로 생성했다. 라벤더(Lavender)는 사람을 표적으로 생성했다. 가자 주민 230만 명의 통신 패턴, 이동 경로, 소셜미디어 활동, 사회적 관계망을 분석하여 하마스 등 무장 조직과의 연계 확률을 1점에서 100점으로 점수화했다. 37,000명이 이 알고리즘에 의해 표적으로 분류되었다. 아빠는 어디에(Where's Daddy?)는 표적으로 분류된 인물이 귀가하는 순간을 포착했다. 가장 안전해야 할 ‘집’이 폭격의 최적 시점이 되었다. 가족과 함께 있을 때 타격하면 표적이 확실히 제거되기 때문이다. 파이어 팩토리(Fire Factory)는 이 모든 표적에 적합한 무장 드론과 탄약을 자동으로 매칭했다.<br /><br />이 체인에서 인간은 어디에 있었는가. AI가 생성한 각 표적을 정보 장교가 검토하는 데 소요한 시간은 평균 20초였다. 저급 무장세력 1인당 민간인 15~20명의 사망이 ‘허용 가능한 손실’로 사전 설정되었다. 인간은 개입했다. 그러나 통제한 것은 최종 승인 버튼이었을 뿐, "누가 표적인가"를 결정한 알고리즘 자체가 아니었다.<br /><br />여기서 일어난 것은 개별 무기의 자율화가 아니다. 전쟁 자체의 인공지능 운영체제화다. 위성·드론·통신 감청 등 이질적인 데이터가 하나의 플랫폼에 통합되고, 알고리즘이 표적을 생성하며, 타격 자산이 자동 배정되고, 결과가 다시 알고리즘에 환류되어 다음 표적의 정확도를 높인다. 이 순환 전체가 기계의 속도로 돌아간다. 개별 드론이나 미사일이 자율적인가 아닌가는 부차적 질문이다. 본질적 질문은 이것이다. 전쟁의 논리 자체가 소프트웨어에 의해 운영될 때, 인간은 무엇을 통제하고 있는가.<br /><br />가자에서 AI는 사람 죽이는 법을 학습했다.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하고, 민간인 피해를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파라미터 값으로 처리하는 법을 배웠다. 이 학습은 가자에 머물지 않았다.<br /><br /><strong><br />우크라이나 ― 전장이 실험실이 된 곳<br /><br /></strong>가자에서 학습된 알고리즘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러시아의 침략을 받은 우크라이나였다. 다만 환경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가자는 봉쇄된 식민 공간에서의 비대칭 전쟁이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고강도 국가 간 전면전이었다. AI 전쟁 운영체제는 이 전혀 다른 환경에서 새로운 것을 학습해야 했다.<br /><br />미국 AI 방산기업 팔란티어의 데이터 통합 플랫폼이 위성·신호정보·드론 영상을 하나로 연결하여 실시간 전장 인식을 제공했다. 정찰에서 타격까지의 시간이 수 시간에서 수 분으로 단축되었다. 우크라이나 자체 개발 시스템(델타, 크로피바)도 전장에서 진화했지만, 팔란티어 CEO 알렉스 카프는 자사 소프트웨어가 “우크라이나 표적화의 대부분을 담당한다”고 주장했다(TIME, 2024.2.8). 미 제18공수사단장은 "우크라이나가 우리의 실험실이 되었다"고 말했다(에어워즈, 2026.3.18.).<br /><br />기술은 완성된 채 투입되지 않았다. 전장 자체가 기술을 검증하고 데이터를 학습하는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작전의 실패와 인명 피해는 윤리적 중단의 계기가 아니라 다음 알고리즘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피드백 데이터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그 데이터는 우크라이나 병사의 것이 아니라 팔란티어 등 미국 방산테크 기업의 AI 학습 자산이 되었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분석이 정확하다. “우크라이나는 시험장인 동시에 마케팅 기회다. 전투 조건에서 제품을 시연하고, '실전 검증'이라는 라벨을 붙여 광고하는 장소”다(카네기 국제평화재단, 2025.12).<br /><br />가자에서 AI는 사람을 표적으로 분류하고 제거하는 알고리즘을 학습했다. 우크라이나에서 AI는 대규모 전면전에서의 데이터 통합과 킬체인 가속을 학습했다. 두 축의 학습이 합류한 곳이 있다.<br /><br /><strong><br />베네수엘라 ― 인공지능 운영체제의 첫 실전<br /><br /></strong>2026년 1월 3일, 미군은 ‘확고한 결의 작전’(Operation Absolute Resolve)을 개시했다. 새벽 2시, 150대의 항공기가 20개 발진지에서 동시에 이륙하여 베네수엘라 전역의 방공망과 군사 인프라를 타격했다.<br /><br />작전은 두 층위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첫째, 전자전에 의한 감각 박탈. 레이더가 마비되고, 통신이 차단되며, 전력이 끊겼다. 트럼프 대통령이 “카라카스의 불이 특정한 전문기술에 의해 꺼졌다”고 말한 것은 군사 통신과 레이더에 의존하는 전력 인프라에 대한 사이버 공격을 시사한다. 베네수엘라 군은 싸울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싸울 수 있는 감각과 수단을 박탈당했기에 무력화되었다. 총격전이 벌어지기 전에 상대의 대응 능력 자체를 소거하는 비운동성 제압이었다. 둘째, 정밀 생포 작전. CIA가 수개월 전부터 베네수엘라에 침투하여 마두로의 이동 패턴, 수면 장소, 식사 습관, 경호 동선을 추적했다(NBC, 2026.1.15). 이 ‘삶의 패턴’ 데이터가 팔란티어의 메이븐 스마트 시스템(MSS)에 유입되었다. MSS에 앤트로픽의 AI 모델 ‘클로드’가 통합되어 위성 영상, 레이더 감청, 소셜미디어 데이터를 융합하여 마두로의 위치뿐 아니라 이동 예측까지 수행했다. 이것이 메이븐 스마트 시스템의 첫 실전 투입이었다(월스트리트저널, 2026.2.15).<br /><br />작전 시간(새벽 2시)은 지휘관의 직관이 아니라 AI가 수천 번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도출한 최적해였을 가능성이 높다. 미 전쟁부 AI 전략 문서에 등장하는 ‘디지털 트윈’(Digital Twin) 개념이 여기서 작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디지털 트윈이란 현실의 대상(건물, 공간, 인간의 행동 패턴)을 디지털 공간에 실시간으로 동기화하여 재현한 운영 모델이다. 특수부대원들은 낯선 적진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이미 디지털 트윈 속에서 수백 번 성공한 시나리오를 물리적 공간에서 한 번 더 재생했을 뿐이다. 훈련과 실전의 경계가 붕괴된 지점에서, 전쟁의 불확실성은 기술적으로 소거된다.<br /><br />특수부대가 요새화된 군사 기지에 진입하여 현직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를 침실에서 생포했다. 32명의 쿠바 군사 및 정보 요원이 사살되었다. 마두로 대통령 부부는 미 해군 함정 이오지마호로 이송되어 뉴욕 맨해튼 연방법원에 섰다. 마두로는 법정에서 “나는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며, 나 자신을 전쟁포로로 간주한다”고 말했다.<br /><br />가자에서 ‘대량 처리 모드’로 작동하던 시스템이, 베네수엘라에서는 ‘초정밀 생포 모드’로 전환되었다.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우 구테흐스는 "위험한 선례"라고 경고했다(유엔뉴스, 2026.1.3). 그러나 이 작전이 증명한 것은 외교적 선례만이 아니었다. 현직 국가원수가 자국 영토의 요새 안에서 수 시간 만에 생포되어 적국의 법정에 선 사건, AI 전쟁 운영체제가 완전한 주권 국가를 상대로 실전에서 작동한다는 것이 처음으로 입증되었다.<br /><br /><strong><br />이란 ― 통합판<br /><br /></strong>베네수엘라에서 검증된 시스템이 두 달 후 이란에서 가동되었다. 규모가 완전히 달랐다.<br /><br />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 합동 작전 ‘장대한 분노’가 개시되었다. 첫 12시간에 약 900회의 공습이 수행되었고, 첫 24시간에 1,000개 이상의 표적이 타격되었다. 10일째에는 5,000개를 넘었다. 최고지도자 하메네이가 첫날 사살되었고, 수십 명의 고위 관료가 동시에 제거되었다. 해군 전력은 사실상 전멸했다.<br /><br />이 속도를 가능하게 한 것이 메이븐 스마트 시스템이었다. 미 중부사령부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20명의 표적 분석팀이 2003년 이라크 침공 당시 2,000명이 수행한 작업을 처리했다(에어워즈, 2026.3.18). 수십 시간이 걸리던 표적 식별-검증-승인 과정이 수 분으로 단축되었다. 팔란티어 CEO 알렉스 카프는 “미국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치명적 역량, 전쟁을 수행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다(CNBC, 2026.3.12).<br /><br />미나브의 여자 초등학교는 이 시스템의 산출물 중 하나였다. 알고리즘이 갱신되지 않은 데이터 위에서 작동했고, 폐쇄된 기지를 현재의 표적으로 처리했으며, 인접한 학교는 ‘부수적 피해’ 범주 안에서 허용되었다. 시스템은 오작동한 것이 아니다. 설계대로 작동했다.<br /><br />여기서 계보가 완성된다. 가자의 표적화 알고리즘, 우크라이나의 데이터 통합과 킬체인 가속, 베네수엘라의 MSS 실전 검증, 이 세 축이 이란에서 처음으로 완전한 주권 국가를 상대로 동시에 가동되었다. AI 전쟁 운영체제는 실험을 종료하고 표준 운영 절차가 되었다.</span></span></span></span></span></p>
<p>[caption id="attachment_5169" align="aligncenter" width="600"]<img class="alignnone wp-image-5169 size-full"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4/%EB%A9%94%EC%9D%B4%EB%B8%90.jpg" alt="" width="600" height="338" /> 팔란티어의 인공지능 시스템 메이븐의 화면(출처: 팔란티어)[/captio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trong><br />“제안했을 뿐이다” ― 책임이 소멸하는 언어<br /><br /></strong>이 전쟁들을 관통하는 공식 언어가 있다. ‘의사결정 지원 도구’. AI는 타격을 결정하지 않았다, 표적을 제안했을 뿐이다, 최종 결정은 인간이 내렸다는 것이다. 이 언어는 기술적으로 정확하지만, 바로 그 정확성이 책임을 소멸시킨다.<br /><br />미나브의 어린이들이 사망한 후에도 책임의 소재는 특정되지 않았다. 클로드는 표적을 제안했을 뿐이고, 지휘관은 목록을 확인했을 뿐이며, 앤트로픽은 도구를 제공했을 뿐이고, 정부는 작전을 승인했을 뿐이다. ‘-뿐’들의 연쇄만 있다. 이 모든 항변이 동시에 참일 수 있다는 것이 이 시스템의 설계 원리다. 책임은 사슬의 어느 한 지점에 머물지 않고, 모든 지점을 통과하면서 증발한다.<br /><br />리영희 선생은 ‘반공’이라는 단어가 모든 질문을 차단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반공을 의심하면 그 자체가 용공이 된다. 오늘 ‘의사결정 지원 도구’라는 네 글자가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이 언어를 의심하면 “그러면 AI 없이 전쟁하자는 것이냐”는 반문이 돌아온다. 냉전 시대의 우상이 이데올로기였다면, 오늘의 우상은 기술적 정확성 그 자체다. 그 정확성의 기만을 드러내는 것이 리영희 선생이 남긴 과제의 현재적 형태다.<br /><br />앤트로픽의 사례가 이 구조의 작동 방식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준다. 앤트로픽은 클로드의 군사적 사용에 조건을 달았다. 미국 시민에 대한 대량 감시와 완전 자율무기에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두 가지가 주목된다. 첫째, 이 레드라인은 미국 시민에 한정되었다. 이란의 어린이, 가자의 주민, 베네수엘라의 시민은 이 윤리적 경계 밖에 있었다. ‘의사결정 지원’이라는 언어가 국적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보편성의 실패다. 둘째, 이 제한적 거부조차 시스템의 관성을 이기지 못했다. 2026년 3월, 미 전쟁부는 앤트로픽을 ‘공급망 위험’으로 지정했다. 다른 어떤 방산 계약자도 앤트로픽의 기술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거부한 기업이 시장에서 축출되고, 메이븐 스마트 시스템은 전군 공식 시스템으로 격상되었다. 개별 기업의 윤리가 구조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거부 자체가 보복의 대상이 되는 체제가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윤리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퇴출 사유가 되었다.<br /><br />이 체제에서 통제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기업의 자발적 윤리가 아니라면, 민주적·헌법적 통제, 즉 의회 제정 법률에 의한 규율만이 남는다. 그런데 한국의 국방인공지능법안은 바로 그 법률 자체가 이 운영체제를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합법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다. 이것이 이 법안의 근본적 문제이며, 이 운영체제가 향하는 다음 목적지가 한반도라는 사실이 이 문제를 긴급하게 만든다.<br /><br /><strong><br />한반도 ― 이중의 문턱<br /><br /></strong>이란에서 검증된 AI 전쟁 운영체제가 한반도에 이식되고 있다. 이식의 경로는 구체적이다.<br /><br />팔란티어는 이미 한국에 깊이 들어와 있다. HD현대의 팔란티어코리아 지분 25.1%를 보유하고 있고, 양사는 무인수상정 ‘테네브리스’를 공동 개발 중이다. 2026년 다보스포럼에서는 수억 달러 규모 소프트웨어 공급 계약을 체결했고, 2024년 서울 REAIM 정상회의장에서는 테네브리스 모형을 전시했다. 팔란티어는 ‘책임 있는 AI’를 논의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무인 전투 체계를 마케팅한 것이다. 안두릴은 2025년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 지사를 설립하고 HD현대, 대한항공, LIG넥스원과 협약을 체결했으며, 방위사업청과도 첨단 무인체계 공동개발 MOU를 맺었다. 쉴드AI는 퀀텀에어로와 파트너십을 맺고 한국 시장에 진출했다.<br /><br />이들이 가져오는 것은 무기 하드웨어가 아니다. 전쟁 운영체제 자체다. 선체와 기체는 한국이 만들지만, 그 안의 두뇌(데이터 통합 플랫폼, 킬체인 가속 알고리즘, 임무 자율화 소프트웨어)는 미국 기업이 장악한다. 가자에서 표적화를 학습하고, 우크라이나에서 데이터 통합을 검증하고, 베네수엘라에서 실전 투입되고, 이란에서 표준화된 바로 그 운영체제가 한국의 방산 생태계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br /><br />국방혁신 4.0은 무인 전투 체계의 단계적 자율화를 공식 국방 정책으로 제도화했다. 원격통제형에서 반자율형을 거쳐 완전자율형으로 이행하는 로드맵이다. 이 로드맵은 윤석열 정부에서 수립되었지만, 이재명 정부에서도 이탈하지 않았다. AI 예산은 증액되었고, 첫 민간인 국방부 장관 안규백의 취임 일성은 “50만 드론전사 양성”이었으며, 국방인공지능법안은 여야 초당적 지지 아래 추진되었다. 군사 AI의 확장은 정권을 가리지 않는다.<br /><br />달라진 것이 있다면 12·3 내란 이후의 개혁이다. 이재명 정부는 국방부 장관 직속 '내란극복·미래국방 설계를 위한 민관군 합동 특별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미래전략, 헌법가치 정착, 방첩·보안 재설계, 군 내 사망사고 대책, 사관학교 개혁의 5개 분과에서 110일간 국방 개혁을 논의했다. 헌법가치 정착 분과는 위법 명령 거부권의 법제화와 계엄법 개정을 권고했고, 방첩·보안 분과는 방첩사 해체를 권고했다. “누가 명령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답한 것이다. 필자는 이 헌법가치 정착 분과의 자문위원으로 군인복무기본법상 헌법 가치 구현 방안을 발제했다. 그 경험에서 확인한 것이 있다.<br /><br />미래전략 분과가 다룬 것은 합동작전사령부 창설, 드론작전사령부 폐지, 전작권 전환, 우주사령부 창설 등 군 구조 개편이었다. AI 경계작전센터를 현장 방문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DMZ 경계 자동화에 관한 것이었다. 알고리즘 표적화의 허용 범위, AI 전쟁 운영체제에 대한 시민적 통제, 자율 살상의 윤리적·법적 규율은 미래전략 분과의 의제에도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하는가”라는 질문은 가장 개혁적인 정부의, 가장 야심적인 개혁 기구에서도 제기되지 않았다. 가자에서 학습되고 우크라이나에서 검증되고 이란에서 표준화된 AI 전쟁 운영체제가 한국의 방산 생태계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바로 이 시점에.<br /><br />이 운영체제가 한반도에서 작동할 때, 두 개의 문턱이 동시에 열린다.<br /><br />첫 번째는 외부의 문턱이다. AI 전쟁 운영체제가 북한 전체를 ‘위험 환경’으로 모델링하고, 킬웹 아키텍처를 통해 탐지된 위협에 최적의 타격 자산을 자율적으로 매칭한다면, 가자에서 벌어진 것, 즉 한 인구의 전체적 생활 조건이 체계적으로 표적화되는 논리가 한반도 규모로 복제될 수 있다. AI의 예측이 위기를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를 생성하는 자기실현적 순환. 이란 전쟁이 이를 증명했다.<br /><br />두 번째는 내부의 문턱이다. 이것이 더 즉각적으로 위험하다. 한반도에는 70년간 축적된 반공주의적 인구 분류 인프라가 존재한다. 1949년 조직된 국민보도연맹은 30만 명 이상을 ‘위험 인구’로 등록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 데이터베이스가 활성화되어, 구금자들이 A, B, C 등급(처형, 선별 처리, 관리)으로 분류되었고, 수만 명이 개별적 행위가 아니라 범주적 귀속에 근거하여 약식 처형되었다. 이 A/B/C 등급 체계는 라벤더의 1-100점 위험 점수화와 구조적으로 동형이다. 분류가 삶과 죽음을 결정했다. 양민증, 도민증, 맹원증이라는 신분증 체계는 전체 인구를 의심의 등급화된 계층으로 범주화했다. 가자의 녹색/파란색/오렌지색 신분증 체계와 같은 구조다.<br /><br />이 분류 인프라는 전쟁 후 해체되지 않았다. 국가보안법은 “이적 행위”라는 법적 범주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이는 AI 시스템이 “위험 패턴”의 파라미터로 계승할 수 있는 분류다. AI 전쟁 운영체제가 이 토양 위에서 작동할 때, 외부의 적과 내부의 위협을 하나의 플랫폼에서 동시에 모델링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진다. 한국전쟁 당시 외부 군사 작전과 내부 인구 분류가 동시에 가동되었듯이, AI 전쟁 운영체제는 정확히 이 통합을 수행할 수 있다. 차이는 이제 분류가 인간의 수기가 아니라 알고리즘의 자동 생성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br /><br />2024년 12·3 내란이 이것이 추상적 시나리오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정치적 분류에 기반한 체포 대상자 명단이 작성되었다. 국회의 계엄 해제 의결과 시민의 저항으로 집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AI 전쟁 운영체제가 도입된다면 명단은 더 이상 인간이 수기로 작성하는 것이 아니다. 시스템이 자동으로 위험 점수를 생성하며, ‘명단’은 연속적이고 자기 갱신되는 알고리즘적 산출물이 된다. 리영희 선생이 비판했던 국가보안법 체제의 분류 논리가, 전투에서 검증된 알고리즘의 속도와 규모를 얻는 것이다.<br /><br /><strong><br />공식 언어를 해체하는 것<br /><br /></strong>리영희 선생이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수행한 작업은 공식 언어를 해체하여 그 아래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정밀 폭격’의 아래에 민간인 학살이 있었고, ‘전략촌’의 아래에 강제 이주가 있었으며, "소탕 작전"의 아래에 마을의 소각이 있었다. 공식 언어가 현실을 은폐하는 데 성공하는 한, 폭력은 정당화된다.<br /><br />반세기 후, ‘정밀 타격’, ‘부수적 피해 최소화’, ‘인적 개입 보장’, ‘의사결정 지원 도구’, 이 언어들은 베트남전의 공식 언어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되, 하나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이 언어들은 기술적으로 정확하다. AI는 실제로 결정하지 않았다. 인간은 실제로 승인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이 정확성 자체가 은폐의 도구다. 정확한 언어가 현실을 은폐할 때, 부정확성이 아니라 정확성의 기만을 드러내야 한다. 이것이 리영희 선생의 방법이 오늘 요구하는 것이다.<br /><br />멈출 수 있는 장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설계할 수는 있다. 자동화된 표적 추천에 이의를 제기할 절차. 표적 ‘처리’ 속도가 인간의 검증 능력을 초과할 때 자동으로 멈추는 세이프가드. 민간 피해가 사전 설정된 임계치를 넘을 때 외부 감사가 개입하는 트리거. AI 시스템의 결정을 거부할 수 있는 실질적 중단권. 이것들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아직 요구되지 않은 것이다.<br /><br />사람을 죽이는 세계가 설계된 것이라면, 사람을 살리는 세계도 설계되어야 한다. 설계되지 않은 평화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것이 ‘평화월딩’(Peace Worlding)이 기술의 문제가 되는 이유이고, 리영희 선생의 우상 파괴가 알고리즘의 언어 앞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다. <br /><br /><br /><br /><br /><br /><br /></span></span></span><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r /></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Wed, 01 Apr 2026 13:17:1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11"><![CDATA[리영희다시읽기]]></category>
		</item>
				<item>
			<title><![CDATA[한반도형 평화공존은 가능한가? / 서보혁]]></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937]]></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color:#333333;"><strong><span style="font-size:2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한반도형 평화공존은 가능한가?</span></strong><br /></span></p>
<p style="text-align:right;"><img class="alignright size-full wp-image-5162"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4/%EC%84%9C%EB%B3%B4%ED%98%81-248X310.png" alt="" width="248" height="310" /></p>
<p> </p>
<p> </p>
<p> </p>
<p> </p>
<p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font-size:17px;color:#333333;"><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r />서보혁(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trong>문제의식<br /><br /></strong></span><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올해 들어 이재명 정부는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을 발표하였다. 이 정책은 ① 남북 간 평화공존의 제도화, ② 한반도 공동성장의 기반 구축, ③ 전쟁과 핵 없는 한반도 실현 등 3대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이를 달성할 추진 전략으로 교류-관계정상화-비핵화의 포괄적 접근, 국민-국제사회와 함께 하는 열린 정책 추구를 제시하고, 화해·협력의 남북관계 재정립 및 평화공존 제도화 등 6개 중점 추진과제를 밝혔다. 정부는 위 정책의 추진 원칙으로 ① 북한체제 존중, ② 흡수통일 불추구, ③ 적대행위 불추진 등 셋을 언급하고 있다. 이같은 현 정부의 대북 혹은 한반도 정책은 지난 시기 민주당 정부가 표방한 비핵·평화체제 구상보다 그 목표에서 하향 조정된 것이지만 전반적인 방향은 유사하다.<br /><br />정책 목표의 하향 조정은 김정은 정권이 남한-어떤 성향의 정권이든-을 더이상 민족의 일부 혹은 통일의 상대로 간주하지 않고, “적대적 두 국가관계”, “교전국 관계”로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2023년 12월 말,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이런 입장을 밝힌 이래 북한은 남북 합의, 남북 간 교류협력사업(철도·도로연결 사업 포함), 북한 내 통일 관련 법제 및 건축물 등을 폐기해왔다. 그리고 휴전선 일대에 방벽과 초소를 늘려온 것도 확인되었다. 나아가 북한은 한반도와 그 일대를 핵공격 할 수 있는 무력과 군사교리를 발전시켜 오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출범한 이재명 정부가 평화체제가 아니라 평화공존을 전면에 내선 것은 합리적이다. 물론 정부는 그 둘을 연속선상에서 보고 있다.<br /><br />평화공존은 우리들에게 익숙한 용어이지만 그것을 특정 시기 정부의 대북정책 목표로 밝힌 것은 이례적이다. 우리들은 평화라는 용어도 한반도 맥락에서 이해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데, 평화공존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그 말과 함께 써온 (평화)공영과는 어떤 관계인지 의문이 든다. 정책 측면에서는 대북정책 목표를 평화공존이라고 할 때, 그러면 비핵화는 어떻게 되고 나아가 통일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증이 올라온다. 마침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공식 석상에서 북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북관계를 “한국-조선관계”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평화공존의 한 표현이자 북한의 대남 적대적 태도를 바꾸려는 노력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br /><br />이런 배경 하에서 아래에서는 평화공존에 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이 용어에 대한 개념적 이해와 그 적용 사례를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한반도 평화정착에서 평화공존이 점하는 위치와 의의, 그리고 우리의 과제도 토의해보고자 한다.<br /><br /><img class="size-large wp-image-5164 alignnone"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4/%EC%84%9C%EB%B3%B4%ED%98%81_%EC%9D%B4%EB%AF%B8%EC%A7%80-819x1024.png" alt="" width="790" height="988" /><br /></span></span></span><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r /><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trong>평화공존이란? <br /></strong></span> <br /><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중고등학교때 세계사 과목을 좋아했던 이는 평화공존하면 먼저 떠오르는 사례가 후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일 것이다. 후루시초프는 스탈린 사후 그의 통치 방식을 비판하며 공산권은 물론 자유진영으로부터도 관심을 모았다. 그는 소련 내적으로는 스탈린을 공포정치, 비밀정치로 비난했고, 밖으로는 자유진영과의 과도한 군비경쟁을 비판했다. 그는 군비경쟁을 줄여 경직된 소련 사회에 활기를 불어넣고 경제 활성화를 추구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서방 진영과의 관계개선, 곧 데탕트를 필요로 했으니 그 논리가 평화공존론이다. 그의 평화공존론은 마오쩌뚱으로부터 ‘수정주의’라로 비난받으며 중소분쟁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후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은 1950년대 중반-1960년대 중반까지 미소관계 개선을 촉진하는 듯하였지만 다른 국제관계에서 더 꽃피워 갔다. 그것이 비동맹 진영에서의 평화공존론이다.<br /><br />약소민족들이 대거 해방과 독립을 획득한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서였다. 일부 독립 국가들이 냉전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기도 했지만 많은 국가들은 비동맹·중립을 기치로 별도의 국가군, 소위 제3세계 진영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평화공존론이 비동맹·중립운동 속에서 꽃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동서 진영 간 평화공존은 신생 독립국가들의 사회 안정과 경제발전의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신생 독립국가군 중 중국과 인도는 정치체제와 국가 규모 등에서 눈에 띄었다. 두 나라의 협조관계는 더 눈에 띄었다. 1954년 중국과 인도는 상호 무역 협정을 맺었는데 협정 서문에 ‘평화공존 5대 원칙’을 명문화했다. 이 원칙이 이듬해 인도네시아에서 가진 반둥 회의를 거쳐 비동맹 운동의 핵심 가치로 확산되었고 나아가 현대 국제관계의 기본 규범으로 발전하였다. 이때 제시된 평화공존 5원칙이 ① 영토 보전과 주권 존중, ② 불가침, ③ 내정 불간섭, ④ 평등과 상호 호혜, ⑤ 평화적 공존이다. 여기서 평화적 공존은 “차이점과 갈등 요소가 존재하더라도 전쟁이 아닌 평화적 수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며 공동의 번영을 추구한다”는 의미였다. 중국이 외교적 언사로 널리 이용하는 구동존이(求同尊異)가 평화공존을 말하고, 평화학에서 중시하는 분쟁의 평화적 해결, 평화공존에 기반하는 공영도 위 5항에 담겨 있다. 물론 평화공존 5원칙을 공동 개발한 중국과 인도는 이후 무력 충돌까지 빚으며 그 원칙을 스스로 위반하기도 하였다.<br /><br />이제 이론적인 차원에서 평화공존을 간략히 살펴본다. 평화공존은 가치관, 존재 여건, 지향이 서로 다른 복수의 존재, 그중 일부 경우에는 과거 물리적 충돌까지 경험한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정치집단을 전제한다. 그 위에서 공존을 추구하거나 결과적으로 공존하기도 한다. 미생물의 ‘공생’에서 인간과 우주의 원리를 발견한 린 마굴리스에게 공존은 공영과 동전의 양면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공존은 다른 존재들이 한 하늘 아래 함께 숨 쉬고 있다는 단순하고 정태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그 이상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평화공존의 본질은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상호 존중과 절제를 통해 물리적 충돌을 방지하는 구조적·심리적 틀을 형성하는 데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평화공존의 원리 혹은 가치는 통합, 통일이 아니라 존중, 인정이라 하겠다. 한 사회에서든 국제적 차원이든 다양성의 존중이 평화공존의 원리인 셈이다.<br /><br />다양성 존중은 평화공존론이 자유주의적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물론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집단이 평화공존보다는 분쟁을 초래하는 사례는 흔하게 나타나지만 여기서는 이론에 한정해서 토의해본다.<br /><br />평화공존론의 기원은 크게 철학적 배경과 정치적 배경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철학적으로는 칸트의 1795년 저작 『영구 평화론』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칸트는 공화주의적 헌법, 국제법에 기반한 자유 국가들의 연맹, 그리고 세계 시민권(cosmopolitan citizenship)이 전쟁을 억제하고 영구 평화를 보장할 것이라고 보았다. 정치적 측면에서 평화공존은 위에서 냉전의 맥락에서 살펴보았지만 그 기원은 더 거슬러 올라간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직후 레닌과 트로츠키는 ‘평화에 관한 포고령’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 참가국들 사이의 협상을 제안하며 평화공존을 외교적 수사로 활용하였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자들이 평화공존을 제안한 것은 평화주의의 발로가 아니라 신생 소비에트공화국의 존립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br /><br />위에서 평화공존론의 한 줄기는 자유주의적 정치사상, 다른 한 줄기는 국제정치적 필요의 산물임을 살펴보았다. 이는 평화가 폭력과 큰 거리를 둔 이상적인 가치라기보다는, 둘이 뒤엉켜 싸우며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평화로운 상태가 커져가는 연속체임을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결국 오늘날 지구촌의 ‘실존적 위기’ 시대에 평화공존은 인류 전체의 생존,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공생, 그 속에서 삶의 방식을 재구성하는 실천적 사유의 토대로 재규정할 수 있다. 국제 분쟁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는 미증유의 사태에 직면해서 인류는 글로벌 내전에 돌입했는지도 모른다. 평화공존은 이제 이상적인 바람이나 정치적 수완을 넘어 인류와 인류 삶의 터전의 회복력을 보장할 제일 원리로 부상하였다. 물론 그 선택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 비인간 존재의 생존이 인간의 판단에 의존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평화공존을 향한 인간의 결정은 인간만의 자유로운 선택이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이 평화공존론은 크게 정치사상과 정치적 판단의 의미를 갖고 시대 변화에 따라 다양한 차원과 측면에서 변화해왔다.<br /><br /><img class="aligncenter wp-image-5163"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4/%ED%91%9C.png" alt="" width="652" height="214" /><br /><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trong>평화공존의 범위와 유형<br /></strong></span><br /><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평화공존의 다양한 의미에 이어 여기서는 그 형태를 살펴봄으로써 평화공존이 다의적이고 그 범위가 폭넓다는 사실을 확인해볼 수 있다.(표 참조)<br /><br />첫째, 지정학적 및 이념적 공존이다. 상이한 정치 체제와 경제 모델을 가진 국가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가장 전통적인 유형이다. 이런 공존은 국제적 차원에서 나타나는데, 군사적 대결 대신 외교와 협상을 선호하며 상호 주권을 인정하는 국제법적 틀 안에서 작용한다. 냉전기 미-소 관계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한반도와 양안, 그리고 중동은 지정학적 및 이념적 공존을 계속 실험하고 있다. 냉전 해체기에 각광을 받은 문명충돌론은 일종의 이념적 대립이라 할 수 있는데 그에 대해 유세프 쿠르바즈와 에마뉴엘 토드는 『문명의 충돌이냐, 문명의 화해』를 출간하며 문명 간 공존의 가능성을 논증한 바 있다.<br /><br />둘째는 종교적 공존이다. 다양한 종교 공동체가 서로의 신념 차이를 인정하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는 주류 종교 간의 대화뿐만 아니라, 동일 종교 내의 분파(이슬람교 내 수니파와 시아파 등) 간의 화해를 포함한다. 종교적 공존은 단순한 관용을 넘어 타자의 종교적 자유와 인간 존엄성을 절대 가치로 수용할 때 실현된다. 이라크 사회나 알바니아의 종교적 관용 사례가 이를 뒷받침한다. 지금까지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팔레스타인에서는 종교 간 대립의 외피를 쓰는 경우도 있지만 영토와 정치적 주도권 다툼이 주된 분쟁 원인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지역에서도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공존해오며 분쟁의 종식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br /><br />셋째는 민족적, 인종적 및 언어적 공존이다. 한 국가나 지역 내에서 인종, 피부색, 관습이 다른 집단들이 협력하는 모델이다. 언어적 공존의 경우, 다언어 사회에서 특정 언어의 문화적 독점을 배제하고 다국어‧다문화 교육 등을 통해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화의 가치를 보전하는 정책으로 나타난다. 이는 사회적 소외를 방지하고 공동체 통합을 이루는 필수적 요소이다. 다민족 국가에서 소수민족의 언어와 풍습을 존중하는 것은 사회적 평화의 근간이다. 한국에서는 노동력 부족으로 다른 언어를 가진 인종과 민족이 들어와 공존하고 있는데, 그에 부응하여 종교적 공존이 부족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br /><br />마지막으로 한 사회에서 개인 간 공존이다. 일상생활에서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개인들이 갈등을 건설적으로 관리하며 공생하는 상태를 말한다. 개인 간 공존은 모든 공존의 토대이다. 개인 간 공존은 상호 존중, 다양성의 인정을 의미한다. 개인적 차원에서 공존을 학습하고 체험하지 않으면 사회적 차원이든 국제적 차원이든 공존은 흔들릴 수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 자기 성찰의 태도, 의사소통에의 참여 등이 민주시민의식을 높여준다. 그것은 곧 사회적 평화를 만들어낸다.<br /><br />한반도 분단‧정전체제가 고질적 분쟁(intractable conflict)의 성격임을 감안할 때 평화공존의 유형을 그 수준에 따라 생각해보는 것도 유용하다. 전쟁 경험이나 적대관계를 전제로 하는 평화공존은 그 정도에 따라 적대적 공존&gt; 기능적 공존&gt; 인식적 공존&gt; 제도적 공존 등의 형태로 유형화해 볼 수도 있다. 앞의 두 형태는 분쟁 가능성이 높고 뒤의 두 형태는 상대적으로 협력 가능성이 높다. 3-4단계의 순서가 맞는지, 둘이 단계적인지도 토론할 여지가 있다. 거시적으로 볼 때 한반도에서 남북은 낮은 수준의 공존, 즉 적대적 공존과 기능적 공존 사이에서 부침을 거듭해왔다고 볼 수 있다. 수준별 평화공존 유형은 현 정부가 밝힌 평화공존정책의 목표와 추진전략에 유용한 준거 틀이 될 수 있다.<br /><br /><br /><strong>평화공존의 성공과 실패<br /></strong><br />평화공존의 뜻이 복수이고 그 유형이 여럿인 만큼 그 사례도 사회적 차원, 양국간 혹은 지역적 차원, 세계적 차원 등으로 다양하다. 냉전시대였던 유럽에서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35개국(미국, 카나다 포함)이 1970년대 중반부터 냉전 해체까지 역내 안보와 협력을 위해 대화를 지속해왔다. 유럽안보협력(CSCE)으로 시작해 냉전 해체 이후에는 공식 조직체계(OSCE)를 갖추고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냉전기였던 만큼 CSCE는 대서양에서 우랄산맥까지 전쟁을 막고 전통적인 안보를 넘어 공동안보, 포괄안보 협력을 개척해갔고, 다양한 분야에서 인적 교류를 전개해 공산권의 평화적 전환과 유럽통합의 밑바탕이 되었다. <br /><br />지역 차원의 또다른 평화공존의 성공 사례는 아세안(ASEAN)이다. 동남아 역내 국가들이 안보에서부터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서 협력을 진행하고 있다. 아세안은 ‘아세안 방식’이라는 독특한 규범을 통해 역내 평화공존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서구의 법치주의적이고 강제적인 갈등해결 방식과 달리 비공식적 협의와 합의, 조용한 외교를 중시한다. 아세안 방식의 핵심은 내정 불간섭과 엘리트 간 신뢰구축이다. 비록 남중국해 영토 분쟁과 같은 심각한 불안 요인이 존재하지만, 아세안은 공개적인 비난보다는 막후 협상을 선호하며 지역 내 군비 경쟁과 대규모 무력 충돌을 성공적으로 억제해왔다. <br /><br />양국 차원의 평화공존은 러시아와 일본, 인도와 파키스탄, 남북 키프러스, 에디오피아와 에리트레아,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등 수 많은 사례들이 있다. 위에서 소개한 평화공존 개념의 요소들과 측면들을 고려해 공존의 성격과 형태, 수준을 평가하고 전망해볼 수 있다. 그런 작업은 한반도 평화공존정책에 풍부한 시사점을 제공해줄 것이다. <br /><br />그러나 평화공존이 지속하지 못하고 실패, 붕괴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그 원인을 찾는 일이 평화공존을 지속시키는 노력만큼 중요하다. 흐루쇼프가 개시한 미소 데탕트는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계기로 무너지고 신냉전이 격화된다. 군비경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소련 스스로 평화공존론을 폐기한 것으로 보였고 미국, 일본, 영국 등 서방진영은 강성 보수 지도자들이 권력을 잡았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는 국제안보정책을 보는 눈과 접근방식에서 대립하였다(소위 현상유지 대 세력팽창). 그 밑바닥에서 상호 불신에 기반한 패권욕이 작용하였다. 현실에서는 각국 내 강경세력의 득세가 두드러졌고 그 결과 상대방과의 대화의 창은 닫혀갔다. 시민사회의 견제와 평화여론이 대결 분위기를 제어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이런 사실들은 평화공존을 회복하거나 지속할 때 무엇이 필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br /><br />한 사회에서도 사회적 평화의 붕괴는 다양한 구성원들 사이 상호 존중과 신뢰의 결핍 혹은 급격한 감소에서 비롯된다. 그 계기는 동류 집단의 지위 혹은 이익의 축소와 타 집단 희생양 만들기이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불평등에 따른 사회정치적 양극화이다. 위에서 소개한 토드 교수는 『샤를리는 누구인가?』에서 프랑스 사회의 우경화와 이슬람인들에 대한 혐오의 원인을 다양한 데이터를 제시하며 중간층의 붕괴와 불평등을 지적하고 있다.<br /><br /><br /><strong>한반도 평화공존 어떻게? <br /></strong> <br />물론 사회적 차원에서의 평화공존과 국제적 차원에서의 평화공존이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다. 국제관계에서는 정부가 없으므로 불신과 생존 욕구가 두드러지므로 평화공존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거나 일시적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현실주의적 시각이 그렇다. 다만 현실주의 학파에서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외교가 중요하다고 보는 그룹도 있다. 반대로 사회적 차원에서도 불평등의 정도에 따라 집단 간 불신과 생존 우선적인 행동 방식이 우세할 수도 있다. 더구나 국제분쟁의 일상화, 기후위기 시대에서 위협인식과 불안감의 상승작용은 평화공존의 길을 어둡게 만들 수 있다. 한 국가 내 사회적 평화공존을 중시해 타 국가의 그것을 무시할 때 그 사회의 평화공존이 가능할까? 또 평화공존이 선의라 하더라도 상대편이 선호하지 않을 경우 평화공존이 가능할까? 여기서 공존·공영이 평화의 실체임을 알 수 있지만 충분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공감이 함께할 때 평화가 구현될 수 있다. 필자가 이 삼공(三共)을 평화의 길을 닦아갈 집합적 덕목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br /><br />평화공존은 한반도에서 전쟁 위험을 불식시키고 평화를 정착하는 노력의 일환이고 궁극적으로는 평화통일을 예비하는 일이다. 남북은 현실적으로 또 국제법적으로 국가 간 관계이므로 위에서 소개한 평화공존 5원칙을 적용함이 타당하고 또 필요하다. 이재명 정부가 천명한 평화공존 정책도 그런 정신의 발로라 할 수 있다. 다만, 5원칙 중 내정불간섭 원칙은 세계화 시대의 맥락, 인간 존엄성 증대의 시각에서 변용할 여지가 있다. 물론 긴장 완화의 막중함을 고려해 신중하고 건설적인 방식으로 접근할 바이다.<br /><br />한반도 평화공존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관련 행위자들과 실행 영역이 각각 3차원임을 직시하고 세 방향에서 병행 추진하는 정책 기조를 분명히 세워야 한다. 그 3차원이란 대내적 차원, 남북관계 차원, 국제적 차원을 말한다. 정부가 밝힌 평화공존 정책이 3차원을 고려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대내적, 국제적 차원이 미흡해 보인다. 특히, 국민들의 평화의식을 제고하고 정치사회에서의 초당적 정책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진력해야 한다. 한반도에서 긴장이 지속되고 있지만 민생이 개선되지 않는 상황에서 평화공존이 북한을 주 대상으로 하는 일이라면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다. 사회적 평화, 개인 간 평화공존이 상호 존중을 전제로 한다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존중이 가능한 조건, 존중할 마음이 생길 여건을 조성하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누릴 권리로서 생존권이다. 경쟁이 극심하고 사회 복지망이 약한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평화공존 없이 남북 간, 한반도 차원의 평화공존의 길은 지속가능성이 약할 수밖에 없다.<br /><br />국제적 차원에서는 정부가 밝히고 있는 국제평화에 기여할 인적, 물적 자원을 대폭 확대하여야 한다. 유엔 평화유지활동과 공적개발원조 기금의 확대가 그것이다. 나아가 급증하는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기여하는 노력도 확대해 나가야 한다. 이 지적은 러-우 전쟁과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에서 한국의 역할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기여하는 노력의 크기와 국제사회의 한반도 평화정착 지지도는 명백하게 비례관계에 있다.<br /><br />그리고 평화공존의 수준과 방식이 다양함을 인정하고 정책 과제들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고 일관되게 전개해나가야 한다. 남북의 경우 일방이 적대적 관계를 선언하고 대화를 단절한 상태에서 과거 교류협력이 활발하던 시기로 곧장 회복하려는 자세는 비현실적이다. 군사적 긴장은 물론 교류협력의 경험을 공존이 아니라 불신의 증좌로 간주하는 일방과의 평화공존은 낮은 수준에서 시작해 상대의 호응이 있기까지 인내심 있게, 일관되게 접근해나가야 한다. 평화공존은 호혜성을 행동 원리로, 상호주의를 행동 준칙으로 한다. 일방의 선의는 그것을 촉진하는 기제가 될 수 있지만 그 원리와 준칙을 대체할 수는 없다. 국제적 차원에서도 국익과 동맹의 이름으로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과 모순된 판단을 할 수도 있다. 어려운 문제다. 평화공존이 이상과 현실의 상호작용이기 때문이다. 특정 상황에서 둘의 균형이 깨질 수 있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평화공존에 기여할지는 믿음의 영역에 가깝다. 요컨대, 평화공존은 대내적으로는 평화 지도력과 평화 지지 여론, 대외적으로는 공존의 상대가 호응할 정도의 호혜성이 성립할 때 실현가능한 연속 게임인지도 모른다.<br /><br />마지막으로 앞에서 던진 큰 질문, 평화공존이 평화통일을 보장하는가의 문제이다. 평화공존론이 기반하는 자유주의 국제정치관에서 볼 때 공존이 깊어지면 통일의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지만, 그 방식과 시점은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평화주의’ 관점에서 한반도 평화공존의 종착지는 평화통일이 아니라 통일평화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통일은 한반도 환경에서 특수한 중간목표이지만 최종목표는 평화공동체이다. 평화를 수단과 절차, 소극적 평화의 울타리에서 해방시키자. 평-통-평! 이런 점에서 정부의 한반도 평화공존정책은 비전과 목표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br /></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p>
<p>[caption id="attachment_5170" align="aligncenter" width="966"]<img class="size-full wp-image-5170"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4/%ED%8F%89%ED%99%94%ED%96%89%EB%8F%99.png" alt="" width="966" height="642" /> 지난 12월, ‘정전 70년 한반도 평화 행동’ 회원들이 한반도 전쟁 위기 해소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출처: 한겨레)[/caption]<br /><br /><br /></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Wed, 01 Apr 2026 13:04:2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11"><![CDATA[리영희다시읽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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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조선 이겨라”를 외치니 그들이 와서 인사했다 / 정욱식]]></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936]]></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color:#333333;"><strong><span style="font-size:2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조선 이겨라”를 외치니 그들이 와서 인사했다<br /></span></strong><br /></span></p>
<p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font-size:17px;color:#333333;"><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img class="alignright size-full wp-image-5160"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4/%EC%A0%95%EC%9A%B1%EC%8B%9D-248X310.png" alt="" width="248" height="310" /></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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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font-size:17px;color:#333333;"><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정욱식(리영희재단 상임이사)</span></span></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내가 ‘북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이라고 부른지 어느덧 2년이 지났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적대적인 관계를 조금이라도 바꾸려면, 그들이 우리를 ‘남조선’이 아닌 ‘대한민국(한국)’이라고 부르듯 우리도 공식 국호를 사용하는 게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br /><br />그래서였을까? 3월 9일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조선과 중국의 아시아 여자축구 경기 응원에 나선 한국 시민들과 호주 동포들은 경기장에서 “조선 이겨라”를 목청껏 외쳤다. 경기가 끝난 후에 조선 선수들은 우리를 향해 인사했다. 우리는 그들의 인사에 손을 흔들고 함성을 외치며 화답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사람들도 있었다. 다음날엔 조선 선수단이 호주 동포를 통해 우리 응원단에 감사의 뜻도 전해왔다. 우리가 그들을 ‘있는 그대로의 조선’으로 대하자 그들도 호응한 것이 아닌가 싶다. ‘변화를 통한 접근’이 작지만 의미 있는 성과를 냈다고 자평한다. <br /><br />경기 직전 경기장 앞에선 인공기 여러 개 들고 응원을 준비하는 호주 청년들을 만났다. 이런 대화를 나눴다.<br /><br /><em>- 조선 국기는 왜 들고 있어요? </em><br /><em>“조선을 응원하기 위해 갖고 왔어요.” </em><br /><em>- 조선을 왜 응원하세요? </em><br /><em>“조선 여자 축구가 매우 인상적이에요. 우리 모두 조선 여자축구팀 팬인데, 호주까지 와서 경기를 한다니 흥분됩니다.”</em> <br /><br />문득 ‘우리는 언제 인공기를 들고 자유롭게 응원할 수 있을까’라는 아쉬움이 담긴 질문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br /><br />전날에는 한국 응원단과 호주 응원단이 모여 응원 구호를 정하는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떤 분은 한반도 단일기를 들고 ‘통일’을 외치겠다고 했고, 어떤 분은 ‘북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겠다고 했다.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우리가 이 자리에 왜 모였는지 생각해보자’는 얘기가 오갔다. 조선팀을 응원하러 온 만큼, 그들이 불편해할 수 있는 표현이나 도구 사용은 자제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 과정을 거쳐 “조선 이겨라”라는 응원 구호에 모두가 흔쾌히 합의했다. <br /><br />한겨레통일문화재단과 평화네트워크는 ‘바늘구멍’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꽉 막힌 남북관계를 조금이라도 풀어보고자 호주 응원단을 조직했었다. 리영희재단도 최근에 나온 단행본 ‘나와 리영희’ 수십권을 호주 동포들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함께 했다. <br /><br />앞으로도 한국과 조선이 참가할 것으로 보이는 국제 스포츠 대회는 많이 있다. 올해 9∼10월에는 일본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리는데, 조선은 선수단을 파견하겠다고 밝혔고 일본 정부도 불허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에 여러 단체와 인사들, 그리고 재일동포사회와 긴밀히 협의해 아시안게임 응원에도 나서려고 한다.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선민후관(先民候官)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br /><br /></span></span></span></p>
<p>[caption id="attachment_5155" align="aligncenter" width="2560"]<img class="size-full wp-image-5155"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4/%EC%9D%91%EC%9B%901-scaled.jpg" alt="" width="1200" height="1200" /> 한국 응원단과 인공기를 든 호주 시민이 ‘조선 힘내라’를 외치고 있다.[/caption] [caption id="attachment_5156" align="aligncenter" width="1189"]<img class="size-full wp-image-5156"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4/%EC%9D%91%EC%9B%902.jpg" alt="" width="1189" height="1200" /> 조선-중국 경기 직후 조선 선수들이 우리 응원단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caption] [caption id="attachment_5157" align="aligncenter" width="2560"]<img class="size-full wp-image-5157"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4/%EC%9D%91%EC%9B%903-scaled.jpg" alt="" width="1200" height="1200" /> 조선팀이 골을 넣자 한국 응원단이 기뻐하고 있다.[/caption] [caption id="attachment_5158" align="aligncenter" width="2560"]<img class="size-full wp-image-5158"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4/%EC%9D%91%EC%9B%904-scaled.jpg" alt="" width="1200" height="1200" /> 인공기를 든 호주 시민들이 경기장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caption]</p>
<p style="text-align:right;"><span style="color:#808080;"><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 저자 프로필 출처: 한겨레</span></span></span></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Wed, 01 Apr 2026 12:10:1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23"><![CDATA[기타사업]]></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 지역언론 기후보도 취재지원 사업 공모(~4/9)]]></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933]]></link>
			<description><![CDATA[<p><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5151" src="https://rheeyeunghui.or.kr/wp-content/uploads/2026/03/260323_%EA%B8%B0%ED%9B%84%EB%B3%B4%EB%8F%84%EC%A7%80%EC%9B%90%EC%82%AC%EC%97%85_%EA%B3%B5%EB%AA%A8.png" alt="" width="1200" height="1200" /></p>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지역사회에서 기후위기의 영향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여전히 지역의 정책 의제로 충분히 논의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br /><br />이에 리영희재단과 녹색전환연구소는 2025년 ‘지역언론 기후보도 취재 지원사업’을 신설했습니다. 지역언론이 지역의 현실과 연결된 기후문제를 심층적으로 취재하고 보도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함입니다. 이를 통해 교통, 도시공간, 폭염, 기후불평등 등 다양한 지역 기반 기후보도가 생산되며 사업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br /><br />2026년에는 이러한 흐름을 바탕으로, 기후위기를 지역의 정책 선택과 연결해 바라보는 보도에 보다 초점을 맞춰 공모를 진행합니다. 이번 공모는 ‘기후위기 시대, 지역의 선택을 묻다’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br /><br />특히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교통·에너지·도시계획·산업 등 지역 정책과 기후위기를 연결해 다루는 기획보도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자 합니다. <br /><br />이번 지방선거는 2030년까지 이어지는 임기를 결정하는 만큼, 탄소중립 중간목표를 평가하는 ‘중간고사’의 성격을 갖습니다. 지역의 기후 대응을 짚는 기획보도에 언론인 여러분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span></span></span></p>
<hr />
<p><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  </span></span></span><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trong>1. 공모 부문<br /></strong></span><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1) 지방선거와 지역 기후정책을 다룬 기획 취재 <br />2) 기후위기와 지역 삶의 변화를 다룬 기획 취재 <br /><br /><strong><span style="font-size:18px;">2. 지원 내용<br /></span></strong></span><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 언론사 총 4곳 선정, 1곳당 400만 원<br />*유연하고 실질적 언론 지원을 위한 지원 사업으로, 별도 예산서 제출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br /><br /><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trong>3. 지원 자격</strong></span><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 <br />- 지역신문법 제2조에 따라 일부 특별시·광역시·특별자치시·도 또는 시·군·자치구 지역을 주된 보급지역으로 하는 신문(일간지, 주간지, 인터넷신문, 잡지사) <br /><br /><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trong>4. 지원 조건</strong></span><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 <br />취재 윤리/준수 기획안에 제시된 취재 계획 및 보도 횟수 준수 <br />▶ 지원사업에 선정된 언론사는 자사 지면 혹은 홈페이지에 기획안과 관련하여 최소 3건 이상의 기사를 게재해야 함 <br /><br />보도물 게재 시 녹색전환연구소와 리영희재단의 지원 사실 명시 필수 <br />▶ <strong>“이 기사는 녹색전환연구소와 리영희재단의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strong>라는 문구를 반드시 표기 <br /><br />사업에 선정된 언론사가 작성한 보도물은 녹색전환연구소가 운영하는 소셜미디어(SNS) 채널에도 게재됨 <br />▶ SNS 채널 게재를 위해 보도물의 편집과 재구성이 필요할 때는 해당 언론사와 협의를 거침 <br /><br /><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trong>5. 지원 기간</strong></span><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 <br /><strong>① 서류 접수: 2026년 3월 23일(월)-4월 9일(목) 오후 18시까지</strong> <br />- 사업신청서, 취재계획서, 개인정보 수집·이용 동의서 모두 작성 / 10장 내외로 작성 필수 <br />- PDF 형태로 climate.igt@igt.or.kr 접수 <br />*한글, 워드 파일로 접수 시 반환 예정 <br /><br /><strong>② 면접 심사: 2026년 4월 15일(수)-4월 16일(목)</strong> <br />- 서류 합격자에 한해서 면접 안내 예정 <br /><br /><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trong>6. 안내사항</strong></span><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 <br />- 서류는 총 10장을 넘지 않도록 작성 <br />- 취재 계획서 분량은 ‘별지 2’ 양식 기준 최대 5장 이내 <br />- 증빙서류를 제출할 경우 해당 서류 스캔 후 PDF 파일 형태로 신청서와 계획서를 함께 첨부 <br />- 선정된 취재계획서 내 사업 기한은 공고문에 명시된 일정과 심사를 거쳐 인정된 기한을 준수해야 함. 부득이한 경우 녹색전환연구소와 사전 협의 후 조정 가능 <br />- 최종 결과물의 일부 자료는 녹색전환연구소와 리영희재단의 자료집 발간 등에 활용될 수 있으며, 양 기관의 공익적 목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협의 후 사용될 수 있음 <br />- 최종 결과물까지 제출한 언론인은 12월에(예정) 계획된 ‘2026년 기후 저널리즘 심포지엄’ 행사에 참석해야 함 <br />- 본 지원사업은 별도 예산서 제출 없이, 취재계획서 심사를 통해 선정된 계획에 대해 순수 취재 활동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운영됨. 유연하고 실질적인 언론 지원을 지향하는 지원사업임 <br /><br /><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trong>7. 지원금 중단 및 반환</strong></span><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 <br />- 제출 서류 내 허위 기재 확인 <br />- 범죄, 사고 등으로 녹색전환연구소와 리영희재단의 품위를 손상한 경우 <br />- 중도 포기 의사를 밝히는 경우(퇴사, 권고사직 등) <br />- 동일한 취재계획서로 타 기관으로부터 중복지원을 받은 경우 <br />- 위 사항 중 하나에 해당할 경우 지원금 일체를 리영희재단으로 1개월 이내에 반환하여야 함 <br /><br /><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trong>8. 접수 및 문의처</strong></span><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 <br />- 담당: 녹색전환연구소 기후시민팀 <br />- 이메일 접수: climate.igt@igt.or.kr <br /><br /><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8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strong>9. 서류 다운로드</strong></span><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 <br /><span style="color:#333333;">- <a style="color:#333333;" href="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1QhvVkSOD0nDg3G6LuqEQE240pr13tkvX" target="_blank">한글 양식 다운로드(링크 클릭)</a> </span><br /><span style="color:#333333;">- <a style="color:#333333;" href="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18iOX9jNIBF_aYuFVl_MtOl0OOUTpweQD" target="_blank">워드 양식 다운로드(링크 클릭)</a> </span><br /><span style="color:#333333;">- <a style="color:#333333;" href="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11u8gYlepuUX1Yary1HSC1kD22M1MNg0t" target="_blank">안내문 및 가이드라인 확인하기(링크 클릭)</a></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span></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Mon, 23 Mar 2026 18:29:0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2"><![CDATA[공지사항]]></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성명서] 전쟁의 시대, 대법원은 민간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정의로운 판결을 확정하라]]></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932]]></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color:#333333;"><strong><span style="font-size:2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성명서] <br />전쟁의 시대, 대법원은 민간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br />정의로운 판결을 확정하라 </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사건 발생 60년, 소제기 6년, 대법원 계류 1년…<br />최고법원의 '재판 지연'이 역사적 정의를 가로막고 있습니다.<br /></span></span></span></p>
<p style="text-align:left;"><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r /></span></span></span><span style="color:#333333;"><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대한민국에서는 세계사적으로 유례없는 ‘전쟁과 정의에 대한 판결’이 선고되었다. 베트남전쟁 시기인 1968년 베트남 중부 퐁니 마을에서 발생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사건의 피해자 응우옌티탄(Nguyễn Thị Thanh)은 2020년 대한민국을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위 소송에 대해 2023년 1심, 2025년 2심 모두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피해 사실과 이에 따른 피고 대한민국의 배상책임을 인정했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23. 2. 7. 선고 2020가단5110659 판결, 서울중앙지방법원 2025. 1. 17. 선고 2023나14901 판결). 대한민국 법정에서 고통과 진실을 호소했던 응우옌티탄은 항소심 승소 소식을 듣고 말했다. “학살당한 영혼들도 이제 안식할 수 있을 것 같아 너무도 기쁩니다.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 <br /><br />베트남전쟁과 관련하여 베트남 피해자가 참전국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세계적으로 본 소송이 유일하다. 그 유일한 소송에 대해 가해국 대한민국 법원은 가해의 책임을 인정했는데, 참전국 법원이 자국 전쟁책임을 인정한 사례 역시 극히 드물다. 이 빛나는 판결에 대해 피고 대한민국은 다시 대법원에 상고를 했다. 사건이 대법원에 접수된 날은 2025년 3월 13일이며, 오늘이 그로부터 정확히 1년이 된다. <br /><br />이미 5년 가까운 시간 동안 1, 2심 변론과정을 통해 원·피고 모두 충분한 주장과 입증을 하였고, 철저한 심리가 이루어졌다. 모든 법적 쟁점에 대해 1, 2심 재판부는 동일한 판단을 하였다. 피고의 상고이유 역시 1, 2심의 반복일 뿐이었다.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한국의 시민사회는 대법원에게 요구한다. 신속하게 판단하라! 원고 응우옌티탄의 고통에 응답했던 1, 2심 판결을 존중하여 그대로 확정하라! 사건 발생 60년, 소제기 6년, 대법원 계류 1년, 원고는 너무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으며, 또 기다리고 있다. 대법원 역시 이 사건의 ‘지연된 정의’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br /><br />이 소송의 원고 응우옌티탄은 2025. 6. 18. 한국 대법원에 직접 방문하여, 신속한 정의로운 판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였다. 그때의 발언이다. “제 사건을 심리하고 있으신 대법관님들에게 제 말씀을 전합니다. 한국 정부가 사실을 인정하고 당시 사건의 피해자와 그 가족의 고통을 덜 느끼게 해주세요. 그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서 인정하고 위로해주세요. 대법원에게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저는 생존자 증인입니다. 저는 8살부터 지금까지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상처는 아직도 아픕니다. 그래서 잊을 수 없습니다. 사실대로 판결을 내려주시길 원합니다. 대법원에게 간청드립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br /><br />전쟁의 시대다. 이제는 ‘전쟁에 반대한다’, ‘전쟁을 멈춰야 한다’라는 구호조차 사치스러울 만큼 전쟁과 죽음, 학살과 공포가 일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조금도 전쟁을 용인하거나 용납할 수 없다. 한 사회가 전쟁을 거부하는 여러 방식과 형태가 있겠지만, 과거 자신들이 행한 전쟁의 책임을, 자신이 만든 과오와 고통을 직시하는 것이 가장 첫 번째일 것이다. 대법원은 ‘대한민국이 전쟁에서 행한 과오와 고통을 인정한 판결’을, ‘민간인을 보호해야 한다라는 전쟁법의 정신을 가장 온전히 담은 판결’을 최종 확정해야 한다. 이번 판결의 확정은, 과거의 전쟁 책임에 대한 인정과 함께, 대한민국 헌법이 선언한 ‘침략전쟁 부인’이라는 국제평화주의 가치를 사법적으로 확인하는 의미 역시 가진다. 전쟁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민간인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법치주의의 가치를 대한민국 사법부가 확인해달라. ‘전쟁 중이라도 민간인은 보호해야 한다’라는 이 문명의 원칙에 대해서, 대한민국 사법부의 입장이 무엇인지 이 판결이 시금석이 될 것이다. <br /><br />2026년 3월 13일(금) <br /><br /><strong>베트남전 민간인학살 국가배상소송 대법원 판결을 촉구하는 총 69개 단체 일동</strong> <br /><br />(가나다순) 강정일상저항행동, 강정친구들,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경북북부 이주노동자센터, 국제법×위안부세미나팀, 극단 신세계, 김복동의희망, 나와우리, 내란청산 국민추진단, 녹색당, 대전평화여성회, 동국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도시산책소모임 산책은 핑계고, 리영희재단, 멈 비엣남(Mâm Việt Nam), 미로한의원의료봉사단, 민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실규명 TF, 민족문제연구소, 민주누리회, 번역공동체 잇다, 베트남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 네트워크, 베트남평화의료연대, 변혁적여성운동네트워크 빵과장미, 부산민주시민협의회 동지회(부민협동지회), 부산을바꾸는시민의힘 민들레, 부산자주연합, 비무장평화의섬제주를만드는사람들, 사회적협동조합 상상마을가치공작소, 세브란스병원노동조합, 소박한자유인, 수원대학교 만화동아리 S.C.O., 시드니 평화의 소녀상 연대, 식민지역사박물관, 아리아리 불꽃, 아시아의친구들, 아시아평화인권연대, 아카이브평화기억,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예배공동체 '광야에서',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이스크라21, 인권운동사랑방,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위한정의기억연대, 작가노동조합, 재)성프란치스코평화센터, 전쟁기념관을 바꾸는 시민활동가들의 모임 탄탄이, 전쟁없는세상,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제주작가회의, 제주평화인권센터, 조선학교와함께하는시민모임봄, 종이로만든배, 참여연대, 청년하다,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평화나비네트워크, 평화를만드는여성회, 평화바닥, 트랜스보더링랩, 하노이 국악협회, 한베평화재단, 향린교회, (사)부산민예총,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사)부산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사)아디, (사)열린포럼, (사)오월어머니집, (사)제주다크투어, (사)호아빈의리본</span></span></span></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Fri, 13 Mar 2026 22:00:3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23"><![CDATA[기타사업]]></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뉴스레터 제46호]]></title>
			<link><![CDATA[https://rheeyeunghui.or.kr/?kboard_content_redirect=931]]></link>
			<description><![CDATA[<p><iframe src="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Fkw2bnfeeazRq-i8ZyJBIRUSMiQEp9Q" width="100%" height="1500" allowfullscreen></iframe></p>]]></description>
			<author><![CDATA[관리자]]></author>
			<pubDate>Thu, 05 Mar 2026 15:51:1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rheeyeunghui.or.kr/?kboard_redirect=27"><![CDATA[뉴스레터]]></category>
		</item>
			</channel>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