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과 함께 하는 사람들 7호 / 장경욱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11-01 02:47
조회
1085

 



 


 


 


 


장경욱/변호사, 리영희 재단 감사


이번호 뉴스레터의 ‘재단과 함께하는 사람’은 재단의 감사로 활동하는 장경욱 변호사입니다.


인터뷰를 위해 자료들을 보면서, 국가 또는 사회가 그 길대로만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파놓은 홈을 완강히 거부하는, 깊게 홈 패인 그 곳에서 그걸 펴내고자 분투하는 한 사람이 그려졌습니다. 그것은 ‘금지를 금지하라!’인데요. 여기에는 또한 증거 조작, 사육수사, 회유 협박으로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유우성, 홍강철, 이혜련, 지영강, 배정옥, 이경애, 허성일 ...... 누군가가 흘리는 피눈물에 뜨거운 눈물을 같이 흘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자기 이름과 자기 얼굴로 존엄하게 살수 있도록 하라


1.장경욱 변호사는 유우성씨 간첩조작사건을 세상에 알린 공로로 뉴스타파와 함께 제2회 리영희상을 수상했는데요. 유우성 조작간첩 증거조작사건 이후, 그렇게 외쳐댔으나 법조 동료들 조차 믿으려고 하지 않았던 고문수사 증거조작이 사실이었음을 사람들이 알게 되서 술을 좀 덜 마시게될 거 같다고 말했지요. 당시 리영희재단 이사장 박우정 선생님은 “리영희상이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 대다수 국민들이 결말이 뻔한 게임이라고 생각했을 국정원, 검찰과의 싸움에서 수레의 앞길을 가로막으려고 앞다리를 들고 맞서는 사마귀처럼 그렇게 우직하게 파고들어서 그들의 폭주를 멈춰세웠다. 이건 기적이었다”(재단 홈페이지 ‘제2회 리영희상 시상식을 마치고’)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설명해주시고 장변호사 개인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말씀 부탁합니다.



제2회 리영희 상을 뉴스타파, 민변 동료들과 함께 수상하고 있다


당랑거철(螳螂拒轍, 사마귀가 수레의 앞길을 막으려고 앞다리를 들고 맞서는 모양)이 이뤄낸 분명한 승리... 그러나 이후 누구도 사과하거나 처벌받지 않았다


국가보안법 사건 변론을 하며 사건 당사자 아닌 다른 탈북자 위장 남파간첩 판결문이 증거로 자주 제출되었어요. 그게 증거로 들어오니까 분석도 안 되고 설마 자유민주 대한민국에서 민주화도 됐다고 하는데 조작하겠나 싶었고 그런가보다 하고 지냈죠. 그러다가 2008년 원정화라는 탈북자에 연루된 황주용 장교의 국가보안법위반 간첩방조 사건을 맡게 되었고 군사법원 재판에서 원정화를 증인신문하게 되었죠. 그 유명한 원정화를 보기 전에는 무서웠는데 증인신문을 해보니까 바로 가짜인 거예요. 원정화는 자기 판결문 내용조차 알지 못하고 엉뚱한 답변을 하더니 나중에는 묻기만 하면 실신해서 응급처치를 해야 하는 지경이었어요. 인생 전체를 거짓으로 증언한 거예요. 그때부터 증거로 들어온 탈북자 위장 간첩 사건 판결문이 읽혀지기 시작했고 판결문만 읽어도 감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북에 대해 잘 모르니까 검증할 능력도 안 되고 객관적으로 검증할 방법도 없었어요. 원정화는 가짜 간첩이라고 주변에 얘기해도 아무도 안 믿어요. 화가 나서 술 많이 마셨어요. 그러다가 2012년 이경애라는 김일성 종합대학 준 박사 출신이라는 탈북자 간첩 사건을 맡게 되었어요. 국정원 합동신문센터에서 짐승 사육하듯 고문 수사를 받고 허위자백을 한 거예요. 처음 접견을 가서 국정원 위치가 어디냐고 물어봤더니 남산에 있다고 하길래 가짜구나 알았죠. 그때 합동신문센터에서 6개월 사육수사로 허위자백을 만드는 구조를 정확히 알게 되었어요. 유우성씨 사건 1심 무죄를 받고 항소심 진행 과정에서 국정원의 중국 공문서 위조까지 드러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제가 이경애씨 접견 가서 자백을 번복하도록 교사했다고 해서 검찰이 서울지방변호사회에 징계신청을 하기도 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청와대 김기춘 비서실장의 지시에 따라서 검찰이 한 거였어요.


유우성씨, 유가려씨 탈북화교 남매 간첩조작 사건(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은 합동신문센터에서 유가려씨를 독방에 6개월 불법감금한 채로 고문에 의해 오빠를 간첩으로 허위자백케 만든 사건입니다. 2013년 1월에 신문에 크게 발표되었지요. 그 전부터 합동신문센터에서 탈북자를 계속 간첩으로 조작해 왔었어요. 탈북자 간첩조작이 쉽다 보니까 영영 들통 나지 않을 걸로 생각하고 유우성씨 가족들이 북한에서 중국 연길(옌지)로 이사를 나온 2011년 이후 시기에 마치 계속 회령에 거주했던 것처럼 해서 유우성씨가 북한을 드나들며 간첩활동을 한 것처럼 아무렇게나 조작했다가 우리 변호사들이 중국 연길에 가서 공소장 일시에 북한 회령이 아니라 중국 연길에 있었다는 객관적 증거들을 확보해서 법정에 제출했던 겁니다. 유가려씨 허위자백이 객관적 증거에 의해 허위임이 드러난 거죠. 간첩조작을 그렇게 엉망으로 해도 누가 검증하겠나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나 했다가 드디어 걸린 거였는데 사실은 분단냉전체제를 떠받드는 국가기관들이 밑둥부터 흔들릴 정도로 큰 사건이었어요. 분단 이래 간첩조작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고 유우성씨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인데 이 사건 하나가 밝혀진 것만으로 흔들리는 걸 느끼며 분단냉전체제의 극복에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당시 청와대, 국정원, 검찰에서 난리가 났어요. 간첩조작 1심 무죄가 나니까 유우성씨를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유우성씨의 북-중 출입경 기록(중국 공문서)을 위조하다가 중국 당국에 적발되기도 했고, 중국 공문서 위조로 국제적 망신을 당하니까 유우성씨가 송금브로커로 외국환관리법위반을 했네, 이름이 몇 개네 하며 국정원이 여론 공작을 위해 보수언론에 찌라시를 유포하며 여론반전을 꾀하고 급기야 유우성씨를 파렴치범으로 만들기 위해 외국환관리법,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보복기소까지 했죠. 간첩조작에, 증거위조에, 증거은폐에, 여론공작에, 보복기소 등 총력전을 펼치며 유우성씨와 가족을 괴롭혔지만 지금까지 진심으로 반성을 하거나 제대로 처벌을 받은 사람이 없어요.


당시 너무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하늘이 도와줬다고 생각합니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어요. 많은 분들의 도움과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2. 장변호사는 “탈북민은 조작간첩의 어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홍강철씨를 다룬 뉴스타파 프로그램 제목이 ‘열네 번째 자백’(최승호, 2015년)이니 지금은 몇 번째 자백이 심신허약한 탈북자의 조건을 악용해서 강요되고 있는지. 지난 정부 국정원은 합동신문센터(유우성사건 이후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로 개칭) 내부를 공개하고, 소위 북한 보위부 직파간첩 홍강철 조작 사건이 무죄판결 받은 걸 계기로 과거 탈북민 간첩사건에 대해 전수조사를 하겠다고도 했습니다 국정원이 말한 위의 내용에 실질적인 개선이 있었는지와 합동신문센터를 통해 끊임없이 간첩이 만들어지는 토양이 무엇인지 설명 부탁합니다.


체제유지를 위해서 유지되고 있는 망상, “그들이 온다, 간첩이 온다”


지금까지 일어난 탈북자 간첩조작 사건에 대한 통계를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90년대 중반 북한의 고난의 행군 이후 탈북자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탈북자 위장 간첩을 조작해 왔습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합동신문센터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간첩으로 조작한 피해자는 제가 거의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한해 최소 세 명 이상을 조작하는 것으로 파악되니까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2013년까지 전체는 최소 45명이 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우성, 홍강철씨 사건 이후에는 합동신문센터에서 탈북자를 간첩으로 조작하기 어려워졌지만 제보가 와서 접견을 시도하거나 접견한 조작 간첩 피해자가 계속 있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2021년에 제보를 받고 접견한 것이 있습니다.


유우성씨 간첩조작 사건으로 수세에 몰린 국정원은 2014년에 합동신문센터를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로 이름을 바꾸고 기자들을 불러서 합동신문센터를 개방하며 마치 간첩제조공장에서 탈바꿈한 것처럼 쇼를 했어요. 합동신문센터의 조사동 조사실에 유리창을 내고 복도를 지나며 안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했고 생활동 방에는 안에서 문을 열 수 있게 해 복도까지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고 자랑했어요. 방에 달력도 비치하고 방 안 화장실도 CCTV로 촬영할 수 없게 윗부분까지 전부 불투명 처리했고 생활하는 방의 벽지를 어두운 색에서 환한 색으로 바꿨고 그렇습니다. 이게 개선인가요. 문재인 정부 들어 조사기간이 최장 6개월에서 최장 4개월로 단축되었고 조사동 조사 중에도 1인실 독방생활이 아니라 2인실에서 두 명이 생활하도록 바꿨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외부와의 접촉이 일체 안 되는 중감금(국정원은 보호라고 하고 언제든 퇴소할 자유가 있다고 거짓 선전합니다) 시설이고 조사 중에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없고 대한민국이 보호할 필요가 있는 진성 탈북자인지 조사한다는 명목(행정조사)으로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국 소속의 조사관들이 실질적으로 간첩 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이 경찰로 이전되는 2024년부터는 합동신문센터에서 최장 4개월 동안 국가정보원 소속 합동신문센터 조사관이 행정조사 명목의 사실상의 간첩수사를 한 후에 안보경찰에 사건을 이첩해서 안보경찰이 이어서 형사소송법에 따라 간첩을 조작해내는 것으로 바뀔 뿐입니다. 형사소송법이 보장하는 판사의 영장도 없이 합동신문센터에 가둬서 변호인 조력권도 보장하지 않고 진술거부권도 고지하지 않은 채 밀실 수사를 해서 언제든 간첩으로 조작할 수 있는 고문 감금시설이 그대로 존재하는 한 계속 억울한 피해자들이 발생할 것입니다.


2020년 연말에 홍강철씨 대법원 무죄 판결 확정을 계기로 당시 박지원 국정원장이 탈북자 위장 간첩사건 전수조사를 한다고 하더니 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전수조사 결과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졸속으로 끝내버렸어요.



재일유학생 간첩단사건 이철 선생의 재심 무죄를 받아낸 장경욱 변호사가 이철 선생과 함께 있다


납북어부, 재일동포 모국유학생, 탈북자로 이어지는 간첩조작의 주요 피해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어요. 첫째는 북한과 접촉면이 있었다는 겁니다. 즉 반국가단체인 북한, 조총련과 접촉면이 있었으니까 언제든 북한과 연계되었다고 하여 간첩 조작하기가 쉬운 스토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방어력이 취약한 분들입니다.


 우리사회에서 차별받고 있는 탈북자의 지위에서 더욱이 신변보호 담당 경찰의 감시망에 있는 탈북자들이 한국에서 수집한 기밀이라는 것이 뭐냐면 합동신문센터 구조와 조사방법, 합동신문센터 조사관의 인적 사항,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 인적 사항 및 사회 정착 후 신변보호 담당 경찰의 인적사항입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 인적 사항이 북한에 알려지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기에 국가기밀이라고 해요. 탈북자들이 공개 출연하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 라는 프로그램도 있는데 말이 되냐, 무슨 기밀이냐고 다퉈봤지만 대법원은 간첩죄의 국가기밀이라고 하네요. 탈북자로 위장한 간첩이 들어온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고문사육수사로 탈북자들의 허위자백을 받아 간첩으로 조작해서 북한을 적대화 하는데 이용하고 있는거죠. 한국사회는 탈북자 허위자백을 검증할 의지도 능력도 없고, 야만적 고문감금시설인 합동신문센터에 대해서도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를 못해요. 제게 재심을 해달라고 찾아온 탈북자 조작간첩 사건의 피해자들이 줄을 서 있는데 유우성, 홍강철 사건 무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재심 무죄를 받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지금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납북어부 사건 등에 대해 수십년이 지나서 진실규명을 하고 있듯 탈북자 간첩조작 사건도 특별검사 또는 과거사위와 같은 진실규명 조사기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국사회의 민주화가 실현되고 남북관계가 개선이 되어 우리사회가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할 때 탈북자 간첩조작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과 재심무죄가 이뤄질 겁니다.


3. 홍강철씨는 ‘통일중매꾼’ 일원으로 대북전단 살포 금지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더군요 장변호사가 생활안정을 위해 카톨릭 쪽에 보호를 주선하고 한국생활 적응을 도왔던 걸로 압니다.류경식당 종업원 집단탈북사건의 지배인 허강일씨와 종업원에게도 지원을 했는데요. 이것이 조선일보 등에 의해 돈 주고 재입북을 종용했다고 엄청난 공격을 당합니다. 이때 변호사님의 반응이 참으로 대책없이 순수하고 순정(純情)해서 난감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왔는데요. 어느 인터뷰에서 돈 주고 재입북을 권유한 게 사실이냐고 묻습니다. 장변호사는 답을 안하면 뻔히 오해를 살 상황인데도 그건 이미 종북으로 몰려는 프레임에 갇혀 있는 질문이므로 답을 안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재차 묻자 “아닙니다. 날조입니다”라고 단호하게 대답을 하죠. 그러면서 내가 잘못한 건 생활고에 처한 그들에게 돈을 줬다는 게 아니라 회유 유인한 지배인한테는 50만원을 주고 유인당한 종업원한테는 30만원을 준 거였다고 말합니다. “거꾸로 줬어야 했는데”라면서 말이죠. 그리고 국정원 직원들이 증인을 서 준 유가려씨 동료의 직장에까지 찾아오자 득달같이 달려가서 그들을 돌려보냅니다. 그리곤 가지 않고 옆에서 계속 그를 지켜주죠. 그러다 또 출입국관리사무소를 가장한 전화를 그분으로부터 건네받고 저들의 행태 하나를 증거를 잡을 수 있게 됩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현장을 지키게 했고 그 현장을 또 사건화할 수 있었던 거죠, 장변호사님의 이런 행위들의 원동력이랄까 그게 궁금합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사랑이 내 자존심과 다른 사람의 지존심을 지키게해주는 뒷심


저는 2남 2녀의 막내로 막내 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어머니 품을 떼기가 참 힘들었던 철부지였어요. 5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힘들 때면 어머니한테 많이 의존했고 어머니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어머니는 1990년에 중풍이 오셔서 오래 앓으시다가 1998년경에 큰 누님이 계시는 과테말라로 가셔서 그곳에서 2008년에 돌아가셨어요. 2000년에 변호사 개업해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심리적으로 늘 불안하고 긴장하며 힘들었어요. 사랑을 받기만 하고 자식으로서 도리를 못했기에 더 심했어요. 어렵고 힘든 시국사건이 생기면 어머니 건강에 대한 불안과 우려, 긴장감을 가진 상태에서 자식으로 도리를 다하는 자세로 공익적 차원에서 승화시키고자 헌신적으로 노력했습니다. 효도하는 자세로 시국사건에 열심히 임했던 것도 어머니 덕분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한테 들었던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씀도 되새기는 경우가 많았고,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산 입에 거미줄 치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도 큰 용기와 지혜를 주었어요. 정신력을 믿고 자신감을 갖고 자존심을 지키고 지켜주려는 노력이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4. 학생운동을 한참 열심히 하던 대학 4학년 때 어머님이 중풍으로 스러지셨고 교대로 병간호를 하던 형님한테는 끊임없이 친구들이 병문안을 오는데 장경욱한테는 친구들이 졸업앨범 찍는 것도 안 알려주고 감감무소식인 걸 경험한 후 ‘뭔가 인생을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러곤 총학생회 사무국 일을 맡아 하면서 청소를 제일 열심히 했다고 했는데 뭘 느낀 거고 왜 청소였나요? 이때의 생각은 이후 변호사가 됐을 때 서초동으로 안 가고 동네에서 개업하는 것과 같은 맥락인가요?


매사를 다르게, 새롭게 해 보고 싶은 사람, 동네변호사로 개업하다


1990년 가을의 일이예요. 학생운동을 하면서 자만심 가득했는데 어려운 일을 겪고 보니 정작 중요한 것이 뭔지를 놓치고 지냈다는 후회를 크게 하게 되었어요. 제가 많이 부족한 탓에 가족에게도 소홀했고 밖에서도 행세나 하며 서로 힘이 되는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자책이 컸어요. 다들 운동하느라 바빴고 우리에게는 더 큰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컸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위로를 받고 싶어 힘들어할 때 찾아와 함께 고민을 나눌 동료가 없었던 것에 많이 부끄러웠어요. 한참 동안을 학생운동에서 떨어져 지내면서 어머님 병간호에 집중하며 점검을 많이 했었고 다음해 뒤늦게 총학생회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동료들과 다시 호흡하며 같이 일익을 담당하는 것 자체에 큰 보람을 느꼈어요. 우리 스스로의 부족함과 취약점이 보이기 시작했던 거 같아요.


서초동이 아니라 당시 봉천동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것은 법원과 검찰 주변에 변호사 사무실이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탈피해 의뢰인 가까이에 다가서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바램이었어요. 봉천동에 변호사 개업하겠다고 하니까 잘 믿지 않았고 국회의원 되려고 하느냐는 말도 많았던 기억이 나요. 용감하게 동네에서 개업했어요. 아무런 경험이 없이 바로 개업을 했는데 사건이 없어 사무실 유지하기가 참 힘들었어요. 지금 후배가 개업한다면 개업하지 말라고 할 거 같습니다. 경험 쌓고 개업하라고 말이죠.


5. 동네변호사가 맡은 첫 번째 사건은 기이하게도 소위 ‘백두청년회’ 국가보안법 사건이었습니다. 첫날 접견을 다녀간 이후 저녁과 다음날 오전 조사과정에서 의뢰인이 구타를 당했다는 얘기를 다음날 오후 접견에서 듣고는 초짜 변호사 장경욱은 의뢰인을 보호하지 못한 무력감에 심하게 자존심이 상하게 되지요. 이후 10년 동안 끈질기게 수사관을 법정에 세우기 위한 국정원과 재판부를 향한 싸움이 진행됩니다. 이 과정에서 신참내기 변호사는 이후에 쓰여질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는데요 국보법 전문변호사의 단련과정이었겠어요.


투지가 단련시킨 10년,국정원 상대 전문 변호사



2018, 경찰관에게 범죄자라고 소리치고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2000년 개업해서 수임한 첫 사건이 국정원에 연행된 지태환씨 사건이었고 봉천동 개업 변호사로 인근에서 벌어진 압수수색 현장에도 가봤고 수십명의 국정원 수사관들과 대면하고 초보 변호사로 법지식도 모자라고 하니까 현장에서 국정원 수사관들을 상대하기가 힘도 들고 밀리는 형국이었어요. 내곡동으로 변호인 접견을 가서도 국정원 수사관들이 저를 상대로 트집 잡고 겁주기가 계속되었어요. 오후 4시에 접견을 가면 수속 절차라고 하며 1시간 그냥 지나고 국정원 출입절차라며 보안시설 안에서 본 거 들은 거 외부 유출하지 말라고 각서 강요하고 조사동으로 이동하기 위해 국정원 차량에 태워 들어가는데 차량 밖을 못 보게 검은 천으로 가리고 하니까 호흡이 가빠지더라구요.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연행된 피의자를 위해 변호하러 가는 변호사조차 얼이 빠지고 호흡이 엉망이 되고 불안해지니 바짝 긴장했어요. 국정원 조사동에 내려서도 접견 장면을 촬영하겠다고 해요. 접견하고 밖에 나가서는 접견 안 시켜줬다고 거짓말할지 모른다고 그러면서요. 오후 5시 40분에 시작된 접견도 6시 되니까 일과시간 끝났으니까 접견을 마치라고 종용하더라구요. 피의자 접견 가서 피의자와 접견한 시간보다 국정원의 시비질에 지루하게 싸운 시간이 더 길어요. 이거 참 큰 일 났다 싶더라구요. 내일은 더 일찍 와서 시비질을 봉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음날 오후에는 좀 더 이른 시간에 접견을 갔어요. 그런데 전날 제가 접견을 마치고 나서 시작된 저녁 조사 때와 다음날 오전 조사에서 고문을 당했다고 하시는 거예요. 변호인 접견 후에 고문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니 피의자를 도와주러 가서 피의자를 지켜주지 못한 무력감, 자책과 함께 제 자존심이 도저히 용서가 안 되더라고요. 매일 매일 접견을 갔어요. 의사를 섭외하고 국정원에 모시고 가서 진찰하려고 하고 국정원은 이를 거부하고, 고문 흔적을 증거로 남기기 위해 법원에 증거보전 청구도 하고 검찰에 국정원 수사관들을 고소도 하며 최선을 다했고 그때 밤새며 대응해도 힘 드는 줄 몰랐죠. 투지가 불타더군요. 그렇게 국정원과 싸우고 또 싸워서 10년 걸려서 당시 고문수사관을 법정에 세우기는 했는데 법원에서 무죄가 났어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많이 긴장하고 준비하며 대응하고, 대응하면서 경험도 쌓이고 단련도 되었습니다.


6. 헌법재판소는 지난 9월15일 국보법 제7조 등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 및 헌법소원 사건 최초로 공개변론을 열었습니다.


제7조1항은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 고무, 선전 또는 이에 동조한 자 등을 처벌“, 제5항은 “제1항, 제3항 또는 제4항의 행위를 할 목적으로 문서, 도화 기타의 표현물을 제작, 수입, 복사, 소지, 운반, 반포, 판매 또는 취득한 행위를 처벌”.


사실 국가보안법이 사문화됐다고 생각하고 국가보안법 때문에 불편한 사람은 특수한 몇 명 아닐까 그리고 ‘나는 국보법으로 내 생각이 위축되지 않아’ 이렇게 생각하는 다수의 사람이 있을 거 같습니다. 과연 그럴까. 장변호사는 히틀러 회고록도 팔리는데 김일성 회고록은 왜 안되냐고 묻습니다. 국보법 페지 토론회에서 광화문에서 북한지도자 만세 부르면 어떡하냐는 질문에 주최측 식의 경범죄로 처벌하면 된다는 답변이 아니라 북쪽 지도자를 존경하면 안됩니까 라고 되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존엄을 위해서, 사회의 수준을 위해서 ‘금지를 금지하라“는 말이지요


이게 금기시 되어야 할 이유가 있나요



국가보안법 철폐 1인 시위중


국가보안법은 해도 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금기를 양산하는 법입니다. 자유민주주의가 강조하는 사상의 자유시장도 통하지 않는 분단냉전체제에 국민 모두가 갇혀 있어요. 헌법 위에 악법인 거죠. 테두리를 정해서 그것을 벗어나면 용인하지 않고 추방하고 매장합니다. 그 테두리를 정하는 것이 국가보안법이고 그 안에서 갇혀 있는 것이 국민입니다. 자유의 속박을 인식하지 못하는 노예같은 존재로 국민이 추락합니다. 주권자가 아니게 됩니다. 새장 속의 새처럼 자유를 잃고도 자유를 만끽하는 양 행세하며 비정상적으로 살아갑니다. 국가보안법이 사문화되었다는 착각이 광범위하게 유포된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국민이 누려야 할 사상의 자유, 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 즉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자유를 누리지 못하므로 국민주권의 주권자도 아니고 평화적 생존권과 평화통일을 지향하고 향유하는 집단적 기본권을 향유하지도 못합니다. 인간의 존재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정치사상 양심의 자유도 누리지 못하고 통제당하는 것입니다. 그 자유를 제한하고 빼앗은, 즉 금기를 양산하여 선과 테두리를 긋는 힘이 분단냉전체제를 유지하는 절대권력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그 거대한 장벽과 힘이 국가보안법이고 국가보안법이 금기시하는 것은 민족자주, 평화통일인 거죠. 이게 금기시되어야 할 이유가 있나요. 해도 되는데 하지 못하고 할 수 있어도 안 하게 되고 거꾸로 친미사대 동족대결의 논리가 판을 치는 비정상 사회가 우리의 자화상 아닌가요.


7. 요즘 종북從北논란이 또 한참입니다. 어느 정치인은 종북세력이 누구냐는 질문에 “그 말 듣고 찔리는 사람”이라고 전혀 부끄러움 없이 말하더군요. 이 세상의 한 인간집단에 대해 궁금해하고 알려고 하는 모든 노력은 그로부터 어떤 결론도 얻기 전에 이미 종(從), “따른다”는 판단을 국가로부터 받게 됩니다. 종북이란 거지요. 종북 딱지는 국보법에 의한 처벌 이전에 이미 이 사회에서 왕따가 되는, 이 사회에 왕따를 만드늘 걸 제도화하는, 관계 단절의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감추거나 검열하게 하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변호사는 탈북자를 어떤 사람 앞에 개방하면 그들의 대북인식. 인권의식, 인간성이 개방된다고 농담처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얼만큼 저들이 파놓은 홈을 따라서만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 걸까요


조선족 보다 더한 차별을 느끼는 탈북자들


종북몰이나 탈북자에 대한 차별은 그들에 대한 차별에 그치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과 구별됨을, 나는 ‘깨끗함’을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서도 관리하고 검열해야한다는 거지요. 종북몰이나 국가보안법에 걸리지 않으려면 분단적대 논리를 거역하지 않으면 되니까 그걸 받아들이게 되요. 강요된 세뇌의식이란 걸 자각하기가 쉽지 않아요. 탈북자의 존재는 북한을 비방하고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선전하는데 안성맞춤이죠. 딱 거기까지예요. 내 이웃의 탈북자를 접촉하는 순간 태도가 달라져요. 혐오하는 사회주의 북한의 문화를 간직한 사람들, 이곳에서는 때를 다 벗겨야 할 사람인 거죠. 북한의 가족과 통화도 하고 돈도 보내준다는 얘기를 들으면 탈북자들이 포섭된 간첩일지 모른다는 공포감도 들어요. 북한은 탈북자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아 닥치는 대로 대남공작을 하는 곳으로 선전되어 있으니까 엮이면 큰일이다 싶죠. 탈북자들과 엮여서는 위험해지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친교를 나눠서 이익이 될 만한 것도 없으니까 탈북자들과 이웃으로 지내려 하지 않고 불편해 하죠. 탈북자들이 그걸 다 느낍니다. 차별인거죠. 조선족보다도 더한 차별을 느낀다고 해요.


8. 마지막으로 장변호사는 3년째 리영희재단의 사업감사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재단의 미흡한 점, 바라는 점을 말씀해주세요.


리영희 선생의 정신은 세계 속 분단된 조국이 처한 시대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진단 그리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실천하는 사상가, 지식인, 언론인으로서의 삶에 있습니다. 리영희 정신을 시대와 세대를 이어 계승해 나가는 것이 우리 재단의 역할입니다. MZ 세대는 물론 어린이, 청소년들이 참여하여 다양한 세대가 재단과 함께 할 수 있는 사업을 펼쳤으면 합니다.저부터 대학생 딸과 고등학생 아들이 재단의 후원회원이 되어 재단 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긴 시간 감사했습니다 장변호사는 국보법이 없어져도 또 다른 한계를 없애기 위해 그곳으로 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전체 66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40
리영희 교수(1929-2010)와 함께했던 연구의 기억 / 크리스티네 리네만-페린
관리자 | 2023.05.02 | 추천 1 | 조회 799
관리자 2023.05.02 1 799
39
글로벌 코리아? 덩치만 커진 ‘아메리칸 코리아’ / 정욱식
관리자 | 2023.05.01 | 추천 0 | 조회 585
관리자 2023.05.01 0 585
38
한일관계 강화와 한미일 안보협력은 미래지향적인가? / 남기정
관리자 | 2023.05.01 | 추천 0 | 조회 636
관리자 2023.05.01 0 636
37
리영희 선생님의 주례사 / 유홍준
관리자 | 2023.04.01 | 추천 5 | 조회 1328
관리자 2023.04.01 5 1328
36
‘공학도적 글쓰기’에 헌신한 전투적 자유주의자 리영희 / 백승욱
관리자 | 2023.04.01 | 추천 7 | 조회 1686
관리자 2023.04.01 7 1686
35
장서표 이야기 - 마음에 새긴 리영희 선생님 / 남궁산
관리자 | 2023.03.03 | 추천 0 | 조회 1092
관리자 2023.03.03 0 1092
34
베트남 민간인 학살 배상판결과 리영희 / 김효순
관리자 | 2023.03.03 | 추천 2 | 조회 997
관리자 2023.03.03 2 997
33
리영희샘이 우리에게 남겨주신 유토피아(천박한 자본주의, 고급진 유토피아) / 고은광순
관리자 | 2023.02.01 | 추천 3 | 조회 1495
관리자 2023.02.01 3 1495
32
치열하되 인간적이었고, 비판적이되 냉소적이지 않았던... / 정범구
관리자 | 2023.02.01 | 추천 19 | 조회 1911
관리자 2023.02.01 19 1911
31
리영희와 그의 유토피아 / 허준행
관리자 | 2022.12.31 | 추천 1 | 조회 826
관리자 2022.12.31 1 826
30
양심과 지성의 빛: 내가 기억하는 리영희 선생님 / 박노자
관리자 | 2022.12.31 | 추천 0 | 조회 1083
관리자 2022.12.31 0 1083
29
리영희와 불교 / 이학종
관리자 | 2022.12.01 | 추천 3 | 조회 818
관리자 2022.12.01 3 818
28
이성도 본성이야! / 정병호
관리자 | 2022.12.01 | 추천 5 | 조회 1947
관리자 2022.12.01 5 1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