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극에 달하고 있던 1929년 평안북도 북진군 운산에서 태어나 삭주군 대관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와서 경성공립공업학교와 국립해양대학을 졸업하고 통역장교, 외신기자, 언론학 교수로 50여 년간 정론직필의 지식인으로 살다가 2010년 작고했다.
리영희는 1971년 조선일보에서 해직된 후 1972년 한양대 교수로 부임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긴 호흡의 글들을 쓰고 책을 펴내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미제국주의와 베트남 전쟁의 본질, 중국사회주의 이해, 권력과 언론의 야합, 청년계몽과 의식의 개조 등과 관련한 글을 다수 발표했다. 2년여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1980년 출소한 후에는 여러 악조건 속에서 주로 중국과 제3세계 관련 문서들을 번역 소개한다. 권력에 의해 글쓰기가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1984년 이후 일본교과서와 우경화 문제, 군사독재권력 비판, 국가보안법과 남북관계, 핵무기의 위험, 냉전체제이후 국제관계 등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1984년 한양대에 복직한 후 1987년에는 미국 버클리 대학과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동아시아와 냉전체제에 대해 강의하였다. 1988년에는 <한겨레신문> 창간을 주도했고 이후 논설주간으로 근무하며 ‘한겨레논단’을 집필한다. 1989년에는 한겨레신문의 방북취재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다섯 번째로 구속되었다. 1957년 기자가 된 이후 리영희는 기사와 저술의 반공법위반 등의 혐의로 모두 아홉 차례 연행되고 5차례 구속되었다. 직장이던 언론사와 대학에서도 네 차례 해직된다.
1990년대 이후에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 ‘한반도 핵·미사일’ 문제, 남북통일의 의미 등 첨예하고 심각한 문제들에 천착하였다. 1995년 한양대학교를 정년퇴임하고 ‘단재학술상’을 수상했다. 1998년에는 ‘햇볕정책’ 덕분에 꿈에 그리던 고향을 방문하여 조카와 상봉하기도 한다. 1999년에는 문익환기념사업회에서 주는 ‘늦봄통일상’ 받았고, 2000년에는 만해상을 수상했다. 2000년 11월 독재정권의 오랜 탄압과 감옥살이 후유증으로 뇌출혈이 찾아와 투병을 시작한다.
리영희는 이후 3년간 집요한 투혼으로 마비되어가던 몸을 살려낸 후 몇 가지 작업을 마무리했다. 2005년에는 문학평론가 임헌영과 대담형식으로 방대한 자전에세이 <대화>를 펴냈고, 2006년에는 총 12권에 달하는 <리영희저작집>을 교열 후 완간한다. 이후 많은 단체에서 시상을 통해 리영희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 한국기자협회의 ‘기자의 혼 상’(2006년), 한겨레신문사의 ‘한겨레통일문화상’(2007년), 전남대학교의 ‘김대중학술상’(2008년)이 그것이다. 2009년 7월에는 반신이 마비되어 가는 몸을 이끌고 광장으로 나와 이명박 정부의 야만적 통치와 파시즘 회귀 행태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한다. 2010년 12월 5일 작고하여 광주 5.18민주묘지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