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는 영원한 소년 / 『사회평론 길』 정범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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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1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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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19971사회평론 길에 실린 리영희 선생과 정범구 선생의 인터뷰입니다.


 


"내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는 영원한 소년


남은 인생을 아주 만끽하고 싶어


두 시간이 넘는 대담을 마치려 할 때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와인 잔을 가리켰다. 1/4, 또는 5분의 1쯤 와인이 남아 있었다. 3/4, 또는 5분의 4 정도의 공간은 이미 비어 있었다. 그는 후회 없이 지나왔던 그 3/4, 또는 5분의 4 정도의 지나간 삶에 대해 충만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고 이제 마지막 남은 1/4, 또는 5분의 1의 삶이 너무도 소중하다는 듯이 그 남은 와인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고 있었다.


“내 지금 심정은 요 유리잔에 남아 있는 포도주를 보는 것과 같아. 어떤 사람들은 날 보고 왜 활동하지 않느냐고 그러는데,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에 지족(知足), 족함을 아는 심정이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래 난 족함을 알아.


뭐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난 지금 비어있는(그는 이 대목에서 술잔의 비어 있는 부분을 가리킨다), 술이 비어 있지만, 이만큼은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못했더라도 할려고 만전을 기해서, 전력투구를 한 때문에 요만큼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아 그렇게 했는데도 아직 이만큼 남아 있구나' 하는 심정이야. 그런데 아직도 발버둥치고 뭐 정당 만들구 뭐하구 뭐하구 이제 감투 쓰고 이럴려고 하는 사람들은 '아직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요것밖에 안 남았구나!' 이런 심정이지 않겠냐 싶어. 그래 '지족', 족함을 이제 난 알아. 욕심을 낼 문제가 아니야. 이 나이되고 이 만큼 살고 난 뒤에도 집착하고 무언가를 하고자 하고 욕심을 부리고 하는 것은 노욕(老慾)이란 말이야, 노욕, 학문도 마찬가지야. 사실 학문이란 것이 끝이 없이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 볼 때 너무 집착하고자 하면 노욕이 되고 말지. 난 그저 요만큼 남은 인생을 아주 만끽하고 싶어요. 한 시간도 꽉꽉 채워가며 살아가고 싶은 거예요. 이제까지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고…”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고…” 하는 마지막 말이 귓가에 남는다. 사실 그처럼 자신의 인생을 끝없는 긴장 속에 순간순간 결단하여야 하는 순간에 자신을 던지며 살아온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충분히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도 물론 많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는 이 노교수의 옆얼굴에서 나는 소년의 모습을 본다.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휴머니즘이다


내가 카메라를 처음 갖게 된 것은 아마 서른 살쯤 무렵이었던 것 같다. 처음 렌즈를 통해 세상을 봤을 때의 경이로움이 지금도 생생하다. 바깥 사물이 고스란히 그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카메라에 대한 흥미는 그러나 곧 시들해졌다.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사각(死角)이 너무 많았고 생기를 잃고 인화지 위에 박제된 풍경이 차츰 싫어졌기 때문이다.


리영희 교수와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나는 내가 다시 카메라로 사진을 찍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의 온전한 면모를 어떻게 이 ‘사각’ 투성이 카메라로 투영해낼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여전히 왕성한 그의 ‘기’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 것인지?


『사회평론 길』 주선으로 리영희 선생과의 대담이 있던 날, 서울지방은 모처럼 영상의 날씨를 보였다. 덕수궁 근처의 한 양식당에서 만난 우리는 식사 후 덕수궁을 거닐었다. 동행한 김민경 기자가 서둘러 입장권을 사왔는데 리 교수, 자신은 입장권 안 사도 되는데 샀다고 한다. 아! 그에게는 이제 ‘경로 우대증’ 이 나오는 것이다.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으로 비이성과 맹신의 정글 속을 포효하며 싸우던 투사 리영희! 그가 갖고 있는 ‘경로우대증!’ 생각해 보니 1주일 전에 선생의 예순일곱 번째 생신이 지났다.


그의 삶의 이력 중 수치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9번 연행, 5번 구치소, 3번의 재판, 총 1012일의 감옥 생활.


최근 그가 연구대상이 된 학술발표 모임이 있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변혁시대의 지성이란 주제로 가졌던 학술발표회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박현채, 백낙청, 김지하 등과 함께 연구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리영희 - 휴머니즘으로서의 이데올로기 비판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조선대 철학 강사 박병기는 그의 생애를 일관해 온 이데올로기 비판 작업이 휴머니즘에 기반한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이 부분은 리영희 교수의 주장이기도 하다. “내가 『전환시대의 논리』등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휴머니즘이었지 마르크스나 레닌주의는 아니었습니다.”(1991년 6월 25일 한국일보 장명수 편집부국장과의 대담) 그리고 이 휴머니즘은 '애국적 정의감' 의 형태를 띤 '계몽주의적 휴머니즘' 이라고 한다.


명색이 정치학자로서 나도 ○○○ 주의, XXX이즘이니 하는 말을 직업병처럼 사용하게 되지만 내심으로는 그런 추상성 높은 용어들로 어떻게 이 세상의 예민하고 미세한 부분들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한다. 한때 공부하는 과정에서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이 갖는 과학성, 이론적 정교함에 매료되었고 그를 통해 세상의 모든 일과 역사를 해석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적도 있었지만 역시 거기에는 무수한 '사각'이 있었고 또 사람들 간에 서로 다른 배율(倍)의 렌즈로 세상을 들여다보며 자기가 본세상이 옳다고 우기는 데에도 싫증이 났다.


어쨌든 리영희의 활동을 관통하는 사상을 휴머니즘이라고 정의하는 박병기의 견해에 부분적으로 나는 찬동한다. 내게 그것은 이론적 분석을 통해서라기보다 거의 동물적인 느낌으로 전해져 온다. 우상과 비이성,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그의 분노와 투지는 지식인의 단순한 선지자적 사명감과는 류(類)가 다르다.


그는 예를 들면 이런 사람이다. "최전방 전투 근무 뒤에 전후방 교류로 내려간 부산, 시청 앞 네거리에서 이승만의 행차와 맞부닥쳤을 때 허리에서 권총을 찾았던, 전선을 내려올 때 팔아먹어 이제는 없는 권총을 찾았던" (역정240, 316쪽) 그런 사람이다.


이번 대담에서 확인하려다가 까먹었지만 그의 고백대로라면 그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은 구부정하다. 군 생활 중 사병들의 식량인 쌀을 가로챈 직업군인을 때리다 손가락 관절이 부러졌기 때문이다. 군대생활 7년을 통해서 단 한번 남에게 육체적 모욕을 가한 경우다. 나는 이런데서 그의 휴머니즘을 느낀다.


 


생명이란 생물의 자기 생존을 위한 사욕을 말하지


다시 박병기의 발표로 돌아가자. 그의 리영희 연구는 다음과 같이 끝나고 있다. "다만 그의 인간관은 크게 변해서 더 이상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지 않고 인간의 원초적 생존본능에 기대어 문제해결의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것 같다. '생명' 의 위대함이 극단적인 생명파괴 상황을 제어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가 휴머니즘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그 실현방법을 다른 것에서 찾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제 '비판적 부정'이 아닌 '생명의 긍정'에서 희망을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사실 논쟁이 필요한 부분이다. 1991년 1월을 전후한 시기, 우리 제도언론이 갑자기 리영희 교수를 주목하게 된다. 그가 1월 26일 연세대에서 열렸던 한국정치연구회 월례토론회에서 한 강연 때문이다. 당시 이 강연은 변혁시대 한국 지식인의 사상적 좌표」란 제목으로 이루어졌는데 동년 3월호 신동아는 이를 「사회주의의 실패, 지식인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정리해 싣고 있다. 이 글은 다시 사회주의의 실패를 보는 한 지식인의 고민과 갈등 - 사회주의는 이기적 인간성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그의 열 번째이며 현재까지는 마지막인 저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사실 소련 붕괴와 사회주의권 몰락이라는 엄청난 역사적 사변을 경험하면서 지식인의 무기력한 상황 예측 능력에 스스로도 낙담하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와는 달리 인간 이성에 대한 신념이랄까 확신 같은 것이 약화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강연을 통해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의 수정. 또 이제까지 이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시되어 왔던 인간의 ‘생존 본능’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표현하려 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정치적 허무주의로 받아들여진 것 같다. 그의 연세대 강연 내용에 대해 한 철학자는 “우울한 시대에 유행하는 진보적 지식인의 고백은 지적 혼란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토해 버리는 것”이라고 비유하며 “사회주의 문제를 도덕적 차원에서 논의할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중앙일보 91년 4월 2일자)


그렇다면 이제 이 부분에 대한 리영희 교수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는 수밖에 없다. 이 견해에 동의하던 아니던 그것은 각자의 자유일 것이다.


“사회주의란 견제장치를 잃어버린 21세기의 자본주의는 앞으로 더욱 병들게 될 거예요. 사회주의는 나름대로 자본주의의 병폐와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마이신 역할을 해 주었어. 앞으로 자본주의는 이런 마이신 역할을 할 어떤 것을 일부러라도 만들어내야 할 거에요. 그것이 사회주의라는 이름이건 녹색당 (GreenParty)이란 이름이건, 또는 생명이라는 이름이건 역시 생명은 그 자체로서 자본주의의 물질지상주의적인 것과 상극되는 대치개념으로서 가치를 가지는 거 아니겠냐, 이런 생각이지.”


잠깐! ‘생명’ 이라니. 이건 김지하에게 익숙한 얘기가 아닌가? 과학적 글쓰기를 주장해 온 리영희에게는 어딘가 어색한 화두가 아닌가?


“자본주의의 근원적 힘이란게 그 생명력에 있어요. 내가 말하는 ‘생명’은 자기보존을 위한 생물의 사욕과 소유욕, 이걸 주로 말하는 거예요. 그건 사실은 가치로서 부정할 것인지 긍정할 것인지의 문제는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난 사회주의가 믿었던 것처럼 선하고 협력하고 사랑하고 나누어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생명 자체의 근원적 속성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 사회주의적 교육과 구조와 사회조건으로서 그것을 더욱 완벽하게 인간의 속성으로 바꿀 수 있지 않겠는가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안됐다는 것으로 보아, 역시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생명은 소유하는 것, 욕심, 이것인 것 같아. 살아가는 것의 본질은 자기보존, 생명보존을 위해 필요한 것을 소유하려는 것이라는 거지. 자기 생명보호를 위한 욕심, 이걸 ‘생명’ 이라고 개념화했어요. 사리사욕, 자기보존을 위한 욕심을 나는 과거에 전적으로 부정했던 것인데, 인간이 인간 아닌 것으로 되기 전에는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인 것으로 파악하게 된 거죠.”


필자는 기독교 방송에서 저녁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여러 차례 그를 모시려 했다. 은퇴 후 그의 생활이 궁금했고 그의 생각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자신은 글로써 발언하는 사람이지 말로서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고사했다. 지금 그의 이 새로운 ‘생명론’을 그의 말을 통해서만 옮기는 데는 역시 한계를 느낀다. 기회가 된다면 그리고 그의 건강이 허락한다면 언제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주장을 그의 정교한 문장을 통해 다시 들어보고 싶다.


 


지금의 시대는 내게 맞지 않는 것 같아


조선대 철학강사 박병기의 '리영희 연구' 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추가해야 할 삽화(揷畫)가 하나 있다. 1996년 11월 30일 오후 리영희 등 변혁시대 한국의 대표적 지성에 관한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발표회가 열리고 있던 한국방송대학교 별관 2층 세미나실 한구석에 홀연히 그가 나타난 것이다. 자신의 삶이 해부되고 논의되는 현장에 당사자로서 나타나는 쑥스러움보다는 "자신을 취재한 박병기 교수에 대한 예의로" "인간적인 도리로“ 그는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그 자리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의 약간은 수줍어하는 모습을 아는 분들은 능히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와의 인터뷰를 계획할 때 원래는 그가 만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 집 근처 수리산을 오르며 그의 삶과 생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볼 참이었다. 그러나 날씨만 추워지면 악화되는, 벌써 몇 년째 그를 괴롭히는 기관지염 때문에, 그리고 혹시라도 겨울 등반길에 넘어지면 치명적이 될 수도 있는 척추디스크 때문에 등산은 포기해야 했다. 그의 '신체적 고장은 사실 등산뿐 아니라 그의 글쓰기까지 포기하게 만들 정도로 심각했다. 두주불사였던 그로부터 마시는 즐거움을 앗아 갔던 C형간염과 위궤양 그리고 글쓰기의 동반자였던 흡연도 만성 기관지염과 고혈압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따져보면 그의 이런 질병들은 어려운 시절을 어렵게 살아온 참여 지식인으로서의 직업병' 일 터였다. 담당의사에 따르면 이런 질병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그는 우선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 했고 그러자면 피를 말리는 글쓰기의 고통으로부터도 벗어나야 했다. 그래서 그는 은퇴한 후 지난 2년간 집필도 전혀 안하고 "이제 내 건강 회복하려는 일념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칭병(稱病)하며 글쓰기로부터 해방되어 살아온 지난 2년이 그에게는 너무 행복해 보인다. “여러 십년 만에 모처럼 갖게 된 개인생활”이 너무 좋고 그리고 무엇보다 “구공탄 밀어 넣고 빼던” 생활로부터 해방된 것이 너무 즐겁다. 평생에 처음으로 꼭지만 틀면 자동으로 더운 물이 나오는 집에서 생활하게 된 것이 그로서는 아직도 현실로 믿어지지 않는 것 같다.


돈암동, 제기동, 화양동을 거쳐 2년 전에 분양받아 이사 온 산본의 아파트, 그 아파트 현관에는 화양동 집 대문에서 떼어 온 나무 문패가 걸려 있다. 그의 집 식당에 앉아 있으면 바로 코앞에 병풍처럼 수리산이 둘러쳐져 있다. 한번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선생은 "어때 어디 콘도에 온 것 같지?" 하며 코까지 벌름거리며 웃는데 그 웃음이 정말로 갖고 싶었던 새 운동화를 얻어 신은 소년의 그것처럼 천진난만했다.


선생은 지난 2년간의 절필의 이유로 건강문제를 이야기해 왔다. 그가 산본으로 이사 왔던 첫해에 급성 기관지 확장증으로 앰뷸런스에 실려 갔던 일이나, 이미 여러해 전부터 만성 기관지염과 천식으로 시달려온 것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이젠 남이 마시는 것을 쳐다보는 수준에서 만족해야 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아온 사람들은 그의 이 '핑계' 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가 지난 몇 십년간 확보(?)해 온 그의 독자들, 글을 통해서 교유해왔던 그의 문도(門徒)들에게는 이 건강상 이유' 만으로 완벽한 설득력을 갖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서 다시 물어 보았다. 그는 절필의 이유로 두 가지를 더 들었다.


“사람마다 장단점이 있는 것인데 난 싸우는 시대, 격렬하게 정면으로 지식과 사상과 글로써 대결하던 시대, 군사독재 시대가 어쩌면 나에게는 살 맛 나는 시대, 내가 나다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시대였던 것 같아요. 그 후의 것은 편안해지고, 또 뭐랄까 어떤 정열적인 글보다는 서술적인 글, 요샌 그렇지 않아요? 그저 이런 시대적 상황에 난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취급할 주제라든가 내용이라든가… 난 싸우는 시기에 사회의 권력이 조작하고 은폐하고자 하는 문제를 주제를 골라서 하나씩 실증적으로 논파해 나가는 것에 맞았던 것 같고, 지금은 좀 뭐랄까, 하여간 나의 시대는 끝난 것 같은, 나의 지적인 활동의 전성기(prime time)는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죠. 나이도 그렇고 상황도 그렇고.”


시대변화가 그의 절필을 독촉했다는 것인데 국내적 상황의 변화 못지않게 세계적 상황의 변화도 그의 '침묵'을 요구했다. 어쩌면 이 부분이 그에게는 더 절실했을 부분이 아닌가 싶다.


“내가 생각하고 글 쓰고 했던 시기가 이를테면 양 체제간의 이데올로기, 세계관, 철학의 대립 속에서 인류의 새로운 생존양식을 찾아내고 모색하는 시기였는데, 지금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회주의적 시도랄까 시험, 이것이 일단 끝나고 이제 자본주의적 해석 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그런 감이 들어. 그렇다고 '역사는 끝났다'고 주장하는 후쿠야마식의 천박한 역사관에는 동조하지 않지만, 자본주의적 시대해석, 이건 뭐 내가 할 필요 없는, 다른 사람들의 본령에 속하는 것일 테고, 또 어느 정도는 이상적인, 낭만적 이상주의라고 할 수도 있는 지적 활동을 통해 단순히 현실적 효용과는 다른 차원에서 어떤 희망을, 이상을 찾는 것이다 보니, 나는 최소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개의 생존방식, 철학, 세계관 사이에서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했던, 그런 개인적 희망이 있었지만 이젠 그 시기가 지난 것 같고 해서 멈췄습니다.”


이런 얘기 끝에 덧붙이는 다음의 이야기는 쓸쓸한 어조의 것이었다.


“이제 새롭게 뭔가를 해석하고, 역사적 대변혁을 해석하고 어떤 전망을 제시한다고 하기에는 너무 과학주의적(그는 이 대목에서 요새 우리가 흔히 '정보화' 라고 일컫는 시대현상을 지적하는 것 같았다), 물질주의적으로 돼서 나 같은 사람은 따라가기가 힘들게 됐어. 컴퓨터 시대, 경쟁의 시대, 물질적 문명, 이러한 시대··· 무조건 과학기술적으로, 물질적으로 풍부해지고 발달하고 빨라지고, 이런 것에 대해서 나는 지금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어요.… 이런 것에 나는 좀 마음이 편하지 않아.”


두 개의 전혀 다른 용어로 한 가지 현상을 설명하고 있는 설명할 수 있는 그 변화하는 시대에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고 선언하는 데서는 시대예측 능력의 상실로 고민하면서도 여전히 깐깐한, 상황을 변증법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진보적 지식인의 모습을 잃지 않으려는 그, 그러면서도 '지족'의 철학을 익히고, 노욕의 위험을 경계하는 그. 그러나 어떤 식의 용어를 선택하던 그는 이제 '자신의 시대적 한계'를 주객관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듯이 보였다. 이젠 짐을 내려놓고 싶은 것일 것이다.


 


“10년 후의 변화보다는 1/10이라도 당장 현실에서의 변화가 중요했어


리영희 교수는 저널리스트인가 아카데미션인가? 그 스스로는 60% 저널리스트 40% 아카데미션이라고한다. 하나의 주제를 갖고 오래 천착하는 것은 오히려 그의 성격에 맞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유유자적한 학자적 생활을 허용하기에는 그가 몸담고 살았던 시대가 너무도 가팔랐다. 당장 대중에게 상황을 해설하고 계몽하는 것, 그리하여 현실을 다만 얼마간이라도 개선하는 것이 그가 관심을 갖고 해야 할 일이었다. 그에게는 "10년 후의 변화보다는 1/10이라도 당장 현실에서의 변화가 중요했던“ 것이다.


저널리스트로서의 긴장된 삶을 살았던 그에게 노년의 여유 있는 삶은 학자적 삶을 가능하게 할까? 이 문제에 대해서 그는 회의적이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필생의 주제를 하나 갖고 씨름한다는 것일 텐데 이제 내가 앞으로 지적 활동을 한다고 해봐야 고작 5년 정도인데, 그 안에 그런 것이 가능할까? 아무래도 어렵다고 봐야겠지?”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임무는 끝난 것 같다”는 이야기를 여러분은 오늘 반복해서 들었을 것이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는 대단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이제 자기 시대의 종언'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계속 ‘현역’ 이기를 바라는 관중들의 박수도 받고 있다. 그가 이 커든 콜(curtain call)에 맞춰 몇 곡의 앵콜곡을 다시 관객들에게 선사할지, 아니면 거장(巨匠)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간직한 채 사라져갈지, 그래서 어느 날엔가는 관객들 속에 조용히 앉아 무대 위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인지, 아직은 뭐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힘들다.


어떤 친구는 리영희 선생의 모습에서 외로운 호랑이의 모습을 본다고도 했다. 이리는 무리지어 다니지만 호랑이는 홀로, 그리고 자유자재로 산중을 누비고 다닐 뿐이다.


 


내게 충실한 것이 내게 자유스러운 것이야


이 대담은 원래 사회평론 길지의 97년 신년특집의 하나로 꾸며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리영희 교수와의 대담은 앞날을 전망하기보다는 오히려 종결되어 가고 있는 한 시대를 되돌아보는 성격의 것이 되었다.


엄청난 변화를 겪었던 지난 몇 년간이었지만 그 변화의 성격은 아직도 많은 부분 모호하다. 그 변화를 바라보는 시각도 그래서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를 몰아가고 있는 이 변화의 빠른 템포는 우리에게 지난날의 이야기조차도 차분히 정리할 여유를 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전망은 더욱 난망(望)인 채로 이렇게 또 몰려가는 것일까?


“아무 노력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 불면불휴(不眠不休). 각고(苦)의 세월이었지…” 덕수궁 뜰 안을 이리저리 거닐다 우리는 영국 대사관과 이어진 담장 가까이 이르렀고, 그때 불쑥 이 노교수는 덕수궁 담장 뒤로 솟아 있는 한 러시아풍의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건물은 영국 대사관 안의 도서관 건물이라고 했다. 5~60년대의 기자시절, 그는 왕성한 지식욕과 우리 현실에 대한 애정으로 이 건물을 무수히 드나들었던 것이다. 미국 대사관의 자료실은 말할 것도 없고.. 7년간의 군대생활 중에 영어와 프랑스어, 중국어를 거의 독학으로 섭렵했고 전쟁의 와중에서 미군 고문관들이 보던 맑스와 레닌의 저작들, 중국관계 서적들을 탐독했던 그 역사의 구비구비마다에서 실존적 선택을 해야 했던 그!


실존적 선택은 그에게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하다. 같은 조건에서 어떤 이는 반역의 길을 가고 어떤 이는 투쟁의 길을 가는 것. 이것이 실존적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같은 만주벌판에서 어떤 이는 만주군관학교로 갈 때, 어떤 이는 민족독립투쟁의 풍찬노숙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내게 충실한 것이 내게 자연스러운 것이야.”


“삶의 현장에서 물러나서는 안 돼, 그리고 신념이 주춤해서도 안 돼.”


이지누 사진편집위원의 요청에 따라 덕수궁 어느 나무를 배경으로 이리 저리 포즈를 잡아보던 이 늙은 호랑이의 옆얼굴로 초겨울 오후의 햇살이 비끼고 있었는데 문득 나는 거기 서 있는 아주 수줍은 소년 하나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