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순 『조선인 시베리아 억류: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교토 서평회 참관기 / 가게모토 츠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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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2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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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순 조선인 시베리아 억류: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교토 서평회 참관기



 


 


가게모토 츠요시


필자 소개 / 한국문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일본의 여러 대학교에서 한국어, 한국문화 등을 가르치는 시간강사로 살고 있다.


지난 2023년 7월 30일, 일본 교토에 있는 리츠메이칸 대학교에서 김효순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의 일어판 『조선인 시베리아 억류: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와타나베 나오키 번역, 도쿄외국어대학교출판회, 2023 / 金孝淳, 渡辺直紀譯 『朝鮮人シベリア抑留: 私は日本軍・人民軍・国軍だった』, 東京外国語大学出版会, 2023)의 서평회가 열렸다. 이 글은 이 행사의 참관기이다.


행사는 30여 명의 참가자가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단순 관객들 모두가 자기를 알리는 인사를 서로 나누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은 흔치 않은 광경이었다. 절반 정도가 한국과 관련된 주제를 연구하는 학생이나 연구자였고, 나머지 절반 정도가 이 책에 관심을 가진 시민들이었다. 교토라는 지역성이 반영되었기 때문인지 우토로 마을이나 오사카에서 오신 분들도 계셨다. 각자가 살아온 지역에서 조선이나 한국에 대해 나름의 연구나 실천을 해 오신 분들이 많이 참여하신 것 같았다.


교토에서의 간담회에 앞서 2023년 7월 29일 도쿄에서 있었던 서평회.
필자가 참석한 2023년 7월 30일 교토에서의 서평회


 


1. 교토, 마이즈루, 일본인의 ‘피해’경험 서사


고대부터의 역사를 품고 있는 교토는 천황이 살았다거나 유명한 사찰들이 남아 있다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군사도시이기도 하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후시미이나리 신사(伏見稲荷大社)의 바로 남쪽에는 일본패전까지 구일본군 16사단이 주둔한 본부가 있었고, 교토시의 남쪽에 있는 우지(宇治)시에는 자위대 부대가 있다. 교토에서 시베리아 억류와 관련해서는 ‘마이즈루(舞鶴)’라는 이름을 뺄 수 없다. 마이즈루는 지금도 해상자위대의 기지가 있는 항구이며 일본근대를 지탱한 핵심적인 군사도시 중 하나였다. 우키시마호(浮島丸) 사건이(주1) 발생한 곳도 마이즈루항이었다. 그리고 마이즈루는 무엇보다 시베리아에 억류된 많은 일본인 병사들이 ‘귀환(引揚)’한 곳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이즈루는 일본사회에서 시베리아 억류를 아는 사람이면 바로 떠올리는 교토의 지명이다. 시베리아 억류 문제를 다룰 때 ‘억류’와 짝을 이루는 ‘귀환’의 지리적 이미지는 바로 교토에 있는 마이즈루인 것이다.


7월 30일의 서평회에서는 일본근대사 전공자이자 불교대학교(佛教大学) 명예교수이기도 한 하라다 게이치(原田敬一)가 여러 화제를 던져주었다. 이 글에서는 ‘귀환’이라는 맥락에서 김효순의 책에 다가간 하라다의 논의에 기대어 이야기를 시작해보고 싶다. 하라다는 일본의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서술된 내용에 나오는 일본에서의 ‘귀환’이미지를 소개해 주었다. 역사교과서에서는 시베리아에서 일본으로의 ‘귀환’이 서술되면서 귀환한 모든 일본 병사들이 마이즈루에서 일본 각지로 ‘돌아갔다’는 식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러나 교과서의 서술에서는 마이즈루항에 ‘돌아온’ 이들 중 일부는 ‘다시 떠난’, 즉 ‘역귀환(逆引揚)’(조선인이나 중국인이 마이즈루를 경유하며 조선이나 중국으로 가는 것)을 했다는 역사가 전혀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마이즈루’에 대한 일본사회의 인식은 대부분 시베리아에서 ‘돌아왔다’는, 너무나 일방향적인 방식이다. 그만큼 마이즈루항을 일본 정주자들만의 이야기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하라다는 이렇게 ‘개념화’된 지명인 마이즈루를 다른 시각으로,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작업으로서 김효순의 저작을 평가했다.


시베리아 억류라고 할 때 일본인의 ‘피해’서사만 강조되어온 일본사회에서의 인식은 마이즈루를 ‘귀환’으로만 인식하게 만들었고 ‘역귀환’의 장소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망각시켜버린다. 이러한 시각은 책의 일본어판에 기고된 나카노 도시오(中野敏男)의 추천사 「‘시베리아 억류’의 역사와 기억을 다시 묻는다는 것: 『조선인 시베리아 억류』 일본어판에 부쳐」에서도 강조된 것이다. 나카노는 ‘시베리아 억류’를 일본의 ‘국민적 기억’이자 ‘내부를 향한 서사로 만들어버린 것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렇게 일본에서 시베리아 억류와 마이즈루를 묶어 인식할 때, 일본의 ‘피해’서사가 생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해서사의 효과는 가해의 사실을 숨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마이즈루를 귀환 이미지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역귀환’한 사람들의 경험까지도 함께 생각하도록 하는 효과를 가져올 뿐 아니라, 마이즈루가 일본사회에서 기능해온 이데올로기에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다시 말해 ‘전쟁에서 피해만 입었다’는 일본사회의 기억방식에 개입하는 것이다.


한편, 그러한 일반적인 마이즈루 이미지에 일본사회가 개입한 사례가 있다면, 이 책에서도 다루어진 2001년에 돌아가신 이창석(李昌錫)의 사례일 것이다. 서평회의 자리에서는 이창석을 지원해온 사이토 마사키(斎藤正樹)가 이창석에 대해 자신이 쓴 자료나 『교토신문(京都新聞)』에 실린 관련기사를 참가자에 배포해주었다. 이창석은 1992년에 일본 국적이 없다는 이유로 군인연금을 받을 수 없는 것은 헌법위반이라며 교토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서평회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에 따르면, 이 이창석의 소송을 전하는 기사는 공교롭게도 김효순이 첫 번째로 쓴 한국인 시베리아 억류의 기사였다고 한다. 그가 나중에 시베리아 억류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기사 검색을 해보았을 때 90년대에 쓴 본인의 기사가 떴다고 한다.


이창석의 재판은 최고재판소(한국의 대법원에 해당)에까지 갔으나, 결국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일본 군인으로 시베리아에 억류되었지만, 일본 국가는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연금에서 배제한 것이다. 다른 전후보상재판과 마찬가지로 일본 국가는 구 식민지 출신자에게 ‘일본인’으로 고통을 주었으면서도 현재는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보상에서 배제했다. 그는 조선에서 태어나 ‘만주’의 부대에 부임해 거기서 일본의 항복을 맞이했다. 그는 8년에 걸쳐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다. 그 사이에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조인하며 주권을 회복했고, 구 식민지의 ‘일본인’들은 일본국적을 일방적으로 상실당했다. 그는 1953년에 시베리아 억류에서 마이즈루항으로 ‘귀환’한 셈인데, ‘귀환’은커녕 첫 번째의 ‘일본행’이었다. 그는 이후 교토에서 살았다. 일본인의 ‘피해’경험으로 덮어쓰기 당한 일본사회의 통상적인 마이즈루 이미지를 무화시키는 경험을 일본인이 아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이즈루에 대한 상상력을 더욱 단련시키기 위해서도 이 책의 일본어판이 갖는 의의는 적지 않다.


 


2. 공백’을 둘러싸고


역사적 사실을 안다는 것은 어떠한 일일까? 물론 타자의 경험을 듣거나 교과서에 나오는 문장을 외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런데 그 사실 자체가 ‘있다’는 것조차 알려지지 않는 경우는 어떨까. ‘어떤 것’이나 ‘어떤 이름’인지조차 알 수 없는 채 단지 ‘무언인가가 있다’는 것밖에 알 수 없는, 다시 말해 ‘어떤 공백’이 있다는 것을 감지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알기’가 있다. 감지하려 하는 자가 있어야 비로소 인식되기 시작한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이 책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일본사회가 인식해 온 ‘피해’경험으로서의 시베리아 억류에 ‘조선인’이라는 커다란 공백이 있다는 것을 한 권의 책이라는 형식으로 일본사회에 알려준다. 일본의 서평 전문 주간신문인 『도서신문』에 실린 이 책의 서평은 그 의의를 보여준다. 이 서평의 저자인 고바야시 아키나(小林昭菜)는 시베리아 억류 문제를 연구해 온 역사학자이다.



“평자는 오랫동안 억류 연구에 종사해왔지만, 그들(억류 조선인)에 대한 선행연구를 보거나 듣거나 한 적은 전혀 없다. 그 의미에서 이 책은 ‘시베리아 억류’의 역사에서 완전히 공백으로 남겨져 온 조선인 억류의 역사에 개입한 귀중한 기록이다.”(고바야시 아키나, 「조선인의 억류의 역사에 개입한 귀중한 기록: 약 80년 전의 전쟁이 남긴 것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준다」, 『도서신문』, 3599호, 2023년 7월15일. /小林昭菜 「朝鮮人の抑留史に切り込んだ貴重な記録―およそ80年前の戦争の残滓を私たちにまざまざと見せつける」 『図書新聞』)



이러한 효과는 와타나베 나오키의 번역 덕분이기도 하고, 이로써 그 공백을 인식할 가능성이 있는 독자의 언어적 폭이 넓어졌다는 것 또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이 알려주는 ‘공백’을 감지한 독자들은 그것을 알자마자 더욱 커다란 공백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자료에 기록된 창씨개명된 이름들 때문에 조선 이름을 밝히기가 어렵고, 냉전체제를 살아낸 경험을 가지는 생존자였던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말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공백인 채 남겨두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그 경험을 들었다고 해도 출판물에는 쓸 수 없었다는 점에서 공백인 채 넘겨야 하는 지점들도 있다. 독자들은 그러한 공백을 만들어낸 냉전체제를 직시하게 된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서평회의 질의응답 시간에 어떤 대학원생이 질문을 던졌다. 책에 쓸 수 없는 것들이 많았을 텐데 그것에 대해 알고 싶다고. 저자는 이야기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분들이 있었다는 것이나, 책이 출판된다고 해서 인생을 다시 찾을 수 없는데 왜 인터뷰를 받아야 하냐고 인터뷰 자체를 거부하신 분들이 있었다며 여러 에피소드를 소개해 주었다. 물론 서평회 자리에서도 고유명사는 밝히지 않고 이야기되었다.


나는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사실 한국문학의 연구자이기도 한데, 연구할 때 종종 과거 신문기사의 도움을 받는다. 그때 신문기사에서 기대하는 것은 바로 육하원칙이다. 신문기사에서 담백하게 나오는 날짜나 장소가 연구의 객관성을 논의하기 위해 매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효순 또한 육하원칙으로의 서술이 어려웠다는 점을 ‘들어가는 글’에서 밝히고 있다. 육하원칙을/으로는 쓸 수 없는 경험들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떠한 방식으로 기술할 수 있을까.


공백을 만든 것은 냉전체제이다. 어쩌면 책의 원제(『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는 냉전체제의 지정학적 사고가 머리에 박혀버린 사람에게는 언어적인 모순으로 느껴질 수 있겠다. 그런데 책에 쓰였던 것처럼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 이 사실은, 제도는 현실의 삶보다 좁다는 것을 확인하게 만들어준다. 사실을 이야기하면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그리고 살기 위해서는 무덤까지 가져가야 하는, 그러한 경험들은 타인에게 이야기할 대상이 될 수 없다. 즉 삶을 이어가기 위해 법을 어겨야 했던 경험들이 존재한다. 그러한 사람의 존재를 포섭하지 못한 채, 그러한 존재를 구조적으로 법의 외부에 남긴 채, 제도가 작동되어왔다는 것이다. 냉전체제는 사람들이 살기 위해 행동한 경험들을 육하원칙 형식으로는 말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그러한 육하원칙에 노출될 수 없었던 경험들을 그것이 가질 수밖에 없는 공백들과 함께 보이게 해준다.


나는 우선 이러한 공백을 발견한 후에 역사 서술을 메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공백을 발견함으로써, 그 공백의 크기를 가늠하며, 그 곁에는 아직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공백들이 이어지고 있음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공백을 발견함으로써 더욱 큰 공백을 감지하게 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신문기사나 행정문서, 그리고 서적에 기록된 것들과 현실의 인간의 삶 사이에는 틈새가 있기 마련이다. 이 책은 그 공백, 그리고 현행 체제와 현실 존재의 틈새를 환기한다.


나는 타자의 말해지지 않는 공백들을 감지하는 것과 자신의 그것을 감지하는 과정은 동시에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정체성을 생각하는 일이란 바로 그 틈새에서 시작하며, 이것은 다름 아닌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령 자신의 정체성이 국가의 인식 틀과 딱 맞아 틈새를 인식할 수 없다면 틈새를 보여주는 이들을 ‘가짜’, ‘위장’이라고 의심하게 되어버린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틈새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난민이나 성적소수자를 비롯한 존재들을 의심하며, ‘위장’이나 ‘가짜’라는 공격을 가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보편적 인권을 믿고 그 달성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들 중 하나는, 그러한 현행체제하에서는 보여줄 수 없고 이야기할 수 없는, 즉 숨겨야만 살 수 있는 경험들을 타자와 나눌 수 있는 조건을 끊임없이 만드는 과정이리라.


냉전체제가 만들어낸 말할 수 없는 공백은, 형태를 달리하면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제도의 언어를 가지고,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의 경험을 어떻게 매끄럽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국가의 인식 틀과 인간의 경험 사이의 불일치를 목격할 때, 체제가 만든 틀로는 말해질 수 없는 공백과 마주할 수 있으며, 이 순간이야말로 타자의 인권을 대하는 능력이 발휘되는 순간이 아닐까.


 


3. 김효순이 교토에서 건넨 말들


위에서 말한 ‘공백’의 인식과정은 저자 김효순이 서평회 자리에서 이야기한 자신의 경험담과도 이어진다. 그는 한겨레신문 창간에 참여한 후, 90년대에 도쿄 특파원을 지내면서 경험한 일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이야기했다. 그가 90년대에 일본에서 듣게 된 것은 베트남전쟁 당시의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문제였다. 90년대라면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 아직 20년밖에 안 된 시대이다. 아마 그 질문을 던진, 일본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쩌면 실제로 1960-70년대에 베트남 반전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90년대의 그들은 2023년에 혐한(嫌韓)을 위해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의 만행을 떠들어대는 일본인들, 즉 국가폭력을 문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한국’을 비꼬기만 하는 일본인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들이 아니었을까. 즉 모든 국가폭력과 전쟁에 반대함으로써 가해자도 피해자도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일본에서의 베트남 반전운동은 피해를 입고 싶지 않다는 기존의 반전운동과 달리, 스스로의 ‘가해’, ‘구조적 가담’을 인식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2023년과는 다른 현실을 가진 질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한국에서 별로 논의된 적이 없던 문제제기였기 때문에 일본사회가 주목한다는 사실이 생소했을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김효순의 ‘공백’, 한국사회가 갖는 인식의 공백이었다. 그런데 서평회 자리에서 김효순은 2023년에 한국의 법원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해 한국정부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1심 판결이 나왔다는 사례를 소개하면서 한국은 일본과 다른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공백’은 능동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 어쩌면 수동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능동적으로는 지금 지닌 상식의 외부로 도달하기 어렵기 때문에 타자의 힘이 필요하며, 타자와 만날 능력 또한 필요하다. 김효순이 90년대에 일본에서 여러 사건이나 사람과 ‘만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는 일본사회가 김효순의 책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게 된다. 서평회를 통해 작은 만남을 쌓아가면서 국가에 책임지게 할 목소리를 만들고, 국가폭력에 맞서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힘을 공유할수 있음을 느낀다.


 


주 1)


우키시마호(浮島丸) 사건: 일제는 패전 사흘 뒤인 1945년 8월 18일, 일본 전범의 재판과 관련해 재일한국인들의 폭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한국인 노동자를 부산으로 송환하도록 한다. 이에 따라 강제 징용되었던 7,000여 명의 한국인을 일본 해군 군함 우키시마호에 태워 8월 21일, 일본 북동쪽 아오모리현(靑森縣) 오미나토항(大溱港)을 떠났다. 그러나 부산항으로 향하던 우키시마호는 24일, 돌연 방향을 돌려 일본 중부 동해 연안에 있는 마이즈루항(舞鶴港)으로 들어갔는데, 갑자기 폭음과 함께 배가 폭발하며 두 동강이 나면서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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