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스승과의 달콤한 동행 / 유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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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3-10-01 21:01
조회
1000

진지한 스승과의 달콤한 동행



 


 


 


유시춘 / EBS 이사장, 작가


 


20대 후반에 나는 새로운 하늘과 땅을 만났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중편소설로 등단한 작가이며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이었다. 월요일마다 전교생이 운동장 조회를 하면서 교장의 지루한 언설을 들어야 했다. 훈육주임의 얼차려 공지사항이 짧께 끝나는 날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조회 후에는 교련훈련이 이어졌다. 예편한 소령이 군복차림으로 행진과 훈련을 지도했다. 학생들의 행렬은 언제나 그들의 행진이 일으키는 흙먼지로 자욱하게 먼지구름이 일었다. 20대 청춘의 삶은 늘 그 흙먼지 속에서 건조하고 목마르기만 했다. 절대왕정, ‘유신’ 통치는 중세의 교황만큼이나 높고 멀리 존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었다. 베트남전쟁의 진실은 두어번 반복해서 읽었다. ‘죽의 장막’이었던 중국의 실제 모습과 일본의 재등장 등도 밑줄을 그으며 되새김질하곤 했다. 눈앞에 어른거리던 안개가 걷히고 맑은 햇살 아래 선 느낌이 급습했다. 온 몸에 신선한 기운이 가득 차오르는 듯한 기쁨이었다.


10살 즈음에 우리 아버지가 어린 딸에게 읽으라고 권해주신 두권의 책, <엉클 톰스 캐빈>과 <로마 이야기>는 내가 모르는 드넓은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소녀의 몸에는 전율이 일었다. 인간세계의 깊고 넓고 아득함이 소녀의 가슴을 덮쳐왔던 그날을 잊을 수 없다.


20대 청춘에게 문득 다가온 ‘전논’ 회오리는 훨씬 더 강렬했다.


나와는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믿었던 정치가 그 매끄럽고 부드럽고 달짝지근한 쌀밥처럼 촉감으로 다가왔다. 홀로 몰래 존재의 의미와 인간세상을 번민하던, 그것이 순수한 문학이라고 확신하던 나는 과감히 밀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 호모 폴리티쿠스로 거듭 태어난 것이었다. 어디 나뿐이겠는가.


반공이념에 전적으로 침윤되어 있던 청년들의 집단적 자각으로부터 우리의 빛나는 80년대는 저항의 광휘를 뿜어내었다. 그 징검다리는 리영희가 던진, 진실에 근거한 묵직한 메시지였다.


 


그러나 정작 리영희라는 인물은 가까이 하기에는 ‘먼 그대’에 머물러 있는 진지하고 근엄한 스승이었다. 선생님을 우연히 처음 대면한 것은 86년 세모 즈음이었다. 그해 겨울은 참으로 혹독했다. 10월 말, 군사독재 타도를 외치며 건국대를 점거한 대학생 1400여명이 굶주림과 잔혹한 진압에 쫒기다 대부분 구속되어 감옥에는 6천여명의 양심수가 갇혀 있었다. 언론자유를 외치는 주류신문, 방송들이여. 그때 학생들을 어떻게 용공분자로 매도했는지 잠시나마 되돌아 보시라. 감히 자유를 그토록 능멸할 수 있는지.


그날 우리 일행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활동가 몇 명을 비롯해 구속학생 학부모 두어분이었다. 참으로 풍찬노숙의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감옥으로 면회를 가야 했고 잇다른 집회, 회의, 농성 등으로 점철된 일상이었다. 우리는 잠시 회의 겸 휴식을 위해 무교동의 카페에 좌정했다. 잠시 후에 입구 쪽이 왁자하더니 5,60대로 보이는 일행이 들어섰다.


우리 일행 중 누군가 혼잣말을 했다.


리영희, 이호철, 송건호, 백낙청....


아. 거기 당대의 빼어난 논객들과 함께 리영희가 계셨다. ‘전논’ 리영희는 우리 일행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그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


그것은 민청련 의장 김근태가 남영동에서 겪은 야수적 고문내용을 밖에다 알린 기록의 제목이었다. 리영희는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도 스테이크에 술 한잔 먹는 이도 있어야 하오. 세상이 그런 데라오.’


나는 깜놀했다. 빼어난 통찰력을 지닌 지식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허름한 일상복 차림으로 동네마트에 담배 사러 나온 중년의 소탈함이었다. 눈여겨 보니 리영희는 술기운이 다소 배어 있었다. 아마도 수많은 이들이 간난신고에 처한 시국에 편안하게 일상을 누리고 있는 자신에 대한 따가운 시선을 의식해서 그랬을지? 선생님은 지레 먼저 스테이크 얘기를 했다. 그렇게 리영희와 대면했다.


 


호모루덴스, 영희


그리고 87년 6월 민주항쟁이 들불처럼 전국에서 타올랐다. 대학이 소재하는 전국 36개 도시 5백만명의 국민이 물결을 이루었다. 직선제 개헌 쟁취라는 부분적 승리 후에 전국에는 2천여개 사업장에서 노조가 설립됐다. 그해 가을에 실천문학사는 편집인, 문인, 필진들이 함께 속리산에서 엠티를 개최했다.


짧았으되 승리의 첫경험을 이룬, 벅찬 희망이 솟구치던 나날이었다. 군사독재의 종식과, 전두환이 폐간시킨 계간 <실천문학>도 무크지의 기형을 벗고 다시 출판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충만했다. 숙소의 뜰, 넓은 테이블 주변으로 낙엽들이 함부로 내려앉고 때로는 참석자들의 어깨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가을 정취 물씬한 저녁이었다.


분단시대의 소설가, 이호철을 비롯해 리영희, 고은, 송기원, 이시영 등 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술잔이 몇 차례 돌자 모두 얼굴이 붉어졌다. 시, 소설, 정치의 담론들이 거침없이 자유롭게 오갔다. 밤이 깊어질 즈음에 리영희가 신박한 제안을 했다.


나이 거꾸로 뒤집기 놀이.


30대의 유시춘은 50대 이호철에게 “호철아,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가 뭐니?”라고 물으면 이호철은 “네, 유선생님. 저는 소피아 로렌 주연 <해바라기>가 그래요. 동서고금의 멜로물 중에서 단연 압권이지요”라고 답해야 한다. 만약 이 규칙을 어기면 현장에서 바로 만원 벌금을 테이블에 내놓아야 했다. 도저히 그리 할 수 없는 젊은 편집자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벗어나기도 했다. 엄청 재미난 게임이었다.


드디어 내가 리영희에게 질문할 차례가 왔다.


나는 리영희의 자전적 고백인 저서 <역정>의 한 대목을 물었다. 어떻게 감히 영희라고 부를 수 있을지. 마른 침을 두어번 삼킨 후에 나는 리영희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또박또박 음절도 정확히 끊어서 말했다. 가난한 내가 벌금을 물 수야 없잖은가 하고.


“영희야. 나는 <역정>에 나오는, 잠시 젊은 영희의 마음을 뺏어간 그 진주기생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책에서는 변죽만 울리던데. 어디가 그리 좋았는지 말해줘.”


나를 응원하는 박수가 그치고 시선이 모두 리영희에게로 화살처럼 꽂혔다.


“대답해. 대답해.”


모두 손나팔로 고함을 지르며 리영희를 다그쳤다. 그의 옴찔거리는 입술을 주시했다. 그때였다. 리영희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살콰 줘. 살콰 줘.”


급하면 태생지의 사투리가 부지불식간 튀어나오는 법. 평안도 사투리를 내뱉은 리영희는 의자를 넘어뜨리고 도망가는 게 아닌가. 그의 등을 향해 이호철이 선언했다.


“벌금 십마넌!”


그 가을밤은 그렇게 흘러갔다.


몇몇은 새벽안개가 일어나는 가을을 보면서 시를 읊조렸다. 리영희가 낸 벌금 십만원으로 테이블에는 금준미주가 넘쳐났다. 실천문학이 발간한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이 백만부 팔리던 문학의 시대였기에.


나는 그날, 근엄진지한 지식인이 아닌, 호쾌한 ‘호모루덴스 영희’를 보았다. ‘즐거운 영희!’


 


영희와 오빠부대


2005년 가을. 리영희 대담집 <대화>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당대의 지식인, 논객, 문인, 기자, 민주화운동인사들이 총집결한 잔치마당이었다. 대담자인 임헌영 평론가가 진행을 맡았다. 2004년 4월 ‘신문의 날’을 맞아 한국기자협회 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선배기자로 뽑힌지라 특히 현직기자들의 참석이 많았다.


세상의 모든 옳은 말씀들이 오갔다. 축가의 순서였다. 유명가수가, 또는 민중가요가 나올 법했다.


그런데 떼로 등장한 여성들은 젊지도 않고 노래 실력이 탁월하지도 않은 중년여성 10여명이었다. 임헌영은 사전에 유시춘에게 물었다.


“뭐라고 소개할까요?”


“우리요? 리영희 오빠부대.”


“네?”


“욘사마 배용준만 오빠부대 있으란 법이 있답니까?”


“크으, 그, 그, 그렇기는 합니다만.”


임헌영은 선생님 말씀을 콩을 팥이라고 해도 믿는 범생이처럼 그대로 참석자들에게 전했다. 출연진 이름도 또박또박 알렸다. 김선주, 김진애, 정혜신, 오한숙희, 이유명호, 서명숙, 한비야, 유시춘, 고은광순, 조선희 최광기 등등. 바야흐로 한비야의 국제긴급구호 활동가의 저서인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가 대히트를 날리던 때였으니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 여성들은 말 그대로 영희의 오빠부대였다. 연예인 오빠부대의 유행은 한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영희의 오빠부대는 유시춘처럼 거듭 태어난 인생역정으로 미루어 지구별 떠나는 순간까지 지속될 것이었다.


오빠부대는 고은광순 한의사가 근처 남대문시장에서 한필 구입한 천으로 급조한 둘레치마를 모두 유니폼으로 입고 머리에는 빨간 카네이션을 꽂았다. 두 번째 곡은 개사해서 영희께 헌사했다.



피었네 피었네


우리나라꽃


리영희꽃.


삼천리 강산에


아름답게 피었네


삼천리 방방곡곡


아름답게 피었네


리영희꽃.



마지막으로 리영희 만세를 삼창했다. 아마도 그때 몸이 불편하지 않았더라면 리영희는 오빠부대와 함께 춤을 추지 않았을지.


2006년 9월 <리영희 저작집> 출판기념회에서 노래를 부른 '리영희 오빠부대'


 


그 이듬해쯤이었을 것이다. 리영희는 오빠부대 초청으로 강화로 향했다. 차를 갖고 오신다는 전갈을 받고 유시춘은 강화대교 초입의 한 주유소에서 리영희를 기다렸다. 혹시 길을 헤맬까봐 함께 모시고 가려고. 그런데 뜻밖에 운전석에서 내리는 이는 리영희였다. 유시춘은 깜놀했다. 설마하니 손수운전을 해서 오시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기에. 그때 이미 몸이 불편하실 때였기에 더욱 의외였다.


놀란 유시춘이 보란 듯이 뒷좌석의 두 여성이 내리면서 환하게 웃었다. 윤영자 사모님과 친구분이었다.


‘숙녀분들을 모시는 건 당연히 남자 몫이지.’


리영희는 어깨를 으쓱 올리면서 의기양양하기 그지없었다.


아 그렇구나. 리영희는 남자구나.


진지엄숙한 스승에 앞서 아내와 그 절친에게 책임감 있는 남편으로 보이고자 하는 남자!


그러고 보니 딸이 학생 때 잡혀들어갔을 때 크게 염려해 수심 가득한 모습을 보이자 지금 누구라고 말하면 다 아는 셀럽이 내심으로 항의했다는 일화가 떠올랐다.


아니, 당신의 책을 읽고 인생의 방향을 바꾼 그 수많은 청년들을 두고 그게 할 소리야!


리영희는 사상의 은사 이전에 한 개인의 아버지였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으리라. 나는 그날 그 리영희의 으스대는 몸짓을 오래 잊지 못한다. 또한 아직은 외제차가 그리 흔치 않을 때였는데 나는 다크레드 컬러의 미국제 SUV 차량을 운전하고 있었다. 혹여 야단맞을까봐 쭈볏거리는 내게 리영희는 시원하게 일갈했다.


“우리도 이쯤에서는 외국차를 좀 사줘야 해. 멋진데, 유시춘.”


리영희는 폐쇄적인 국수주의자가 결코 아니었다.


 


오빠부대는 강화를 즐겨 찾곤 했다. 동해 고성에서 시작해 한반도의 허리를 비정하게 가로지르는 철조망은 강화 교동에서 멈춘다. 철책 너머로 북한 땅이 보이는 곳도 있다. 가끔 주민의 움직임도 볼 수 있다. 그들은 머리에 뿔이 나지도 않았고 우리처럼 열심히 농사를 짓는다. 일몰이면 철책 너머로 황홀한 풍경이 한시간여 지속된다. 철조망으로 찢긴 풍경은 참혹하게 아름답다. 때로 새끼 고라니의 동그란 눈망울을 마주치기도 한다.


그날 오빠부대의 숙소는 48번 국도가 끝나는 지점, 병인양요 때 영국 배가 정박했다는 해안 근처였다. 저녁식사 이후에 오빠부대는 세수대야에 따뜻한 물을 채우고 짝을 이루어 차례로 서로의 발을 매만지고 씻겨주는 일을 한다. 의사, 작가, 교수, 변호사, 건축가, 여성운동가, 국회의원 등 직업은 다양하지만 공통점은 모두 리영희의 제자들이란 점이다. 늘 바쁜 일정에 쫒기는 고된 이들이다. 따뜻한 물에 잠긴 내 발을 어루만져주는 그 편안한 달콤함이라니!


그날 선생님은 아내 윤영자의 발을 오랫동안 정성스레 보듬어 씻겨 주었다. 아내는 의자에 앉고 남편은 바닥에서 고개를 숙이고 대야를 내려다보며 손을 움직이는 그 모습은 영락없이 마님과 하인의 포즈! 아내는 여왕 같은 자세!


끝난 직후에 선생님은 진지하고 진실한, 낮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평생 살면서 아내의 발을 처음 만져보았소. 이런 기회 주신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하오.”


눈물이 글썽이는 듯, 약간은 떨리는 음성이 오빠부대의 마음에 닿았다.


다음날, 일행은 철책 근처 북한 땅이 1킬로 앞으로 보이는 지점에서 천천히 산책했다. 생각해보매 60년대 말까지 한국은 교과서도 방송도 신문도 저자거리도 모두 ‘북괴’라고 표현했다. 이를 ‘북한’으로 맨 먼저 명명한 이도 리영희였다. 북한이 소련과 중국의 꼭두각시가 아님을 객관적으로 실증했다. 심지어 노년의 모택동이 저지른 최악의 실책,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북중관계가 대립으로 치달을 때도 있었다.


리영희의 ‘북한’ 표기 이후로 이는 점차 보편화되었다. 리영희를 교조주의라고 비난하는 집단에게 알려주고 싶다. 그에게 만약 교조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진실’이라고. 공자가 정치를 규정하기를 ‘바른 이름’ 정명에 있다고 한 것은 시대를 관통하는 진리일 것이다.


말은 존재가 거처하는 집이다. 요즘 한국사회를 횡행하는 정치의 언어를 보라. 혐오, 대립, 천박이 난무하는 아수라 지옥이다. 80년 5월 국가수호의 엄중한 책임을 수행하는 국군을 동원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 신군부가 창당한 정당의 이름이 무엇이었던가. ‘민주정의당!’ 언어가 정직하지 않거나 현실과 상충하는 사회는 병든 곳이다. 거짓이 지배하는 사회는 편차가 있을지언정 반드시 붕괴한다는 것을 우리 가까운 현대사는 웅변하고 있다.


그날 일행은 철조망 너머로 북한 땅을 목격했다. 누추한 건물 사이로 농부들이 일하는 모습이 보였다. 헐벗은 능선 너머로 보이는 봉우리가 송악산이라고 했다. 1킬로를 앞두고 오갈 수 없는 땅과 바다 위로 새들이 무심히 날고 있었다. 그때는 중단했던 대북대남 방송이 머잖아 재개된다고 한다.


평화! 아 그리운 그 이름. 일행은 무심한 철책을 끼고 천천히 오래 걸었다. 선생님은 다시 두 숙녀분을 태우고 돌아갔다. 그 길이 아마도 마지막 운전이 아니었을지.


2007년 남북철도연결 시험운행 때 개성 선죽교에서. 왼쪽부터 이철, 박용길, 배기선(뒤), 유시춘, 리영희.


2010년 5월. 마지막 학예회


리영희의 병고는 깊어갔다. 대담집 <대화> 이후 절필선언을 했다. 용기있는,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고 본다. 생물학적 노화를 인정하고 자신의 실력을 접는 일이 무척 어려운 것임을 우리는 익히 보아온 터이다.


돌아가시던 해 5월에 오빠부대는 선생님이 계시는 연희동 댁으로 방문했다. 학예회를 할 작정이었다. 그날을 위해 고은광순은 아쟁을 맹연습했다. 조선희는 제 몸만큼이나 큰 아코디언을 연주했다. 연희동 아드님댁 잔디밭에는 5월의 초록초록한 빛이 가득했다.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오빠부대는 리영희 윤영자 부부께 화관을 씌워드렸다. 두 분이 환하게 소년소녀처럼 수줍어하면서도 기뻐했다.


고은광순이 아쟁으로 그녀의 애창곡 ‘베사메 무초’ ‘아침이슬’을 연주했다. 조선희는 힘겹게 아코디언으로 거리의 악사처럼 폼을 잡았다. 그리고 모두 함께 ‘꽃중의 꽃 리영희꽃’을 합창했다. 잔디밭 가장자리에서 딸아들 부부가 손뼉을 치며 장단을 맞추었다. 그것이 오빠부대가 리영희 스승께 바치는 라스트 콘서트가 될 줄이야!


리영희는 1929년 김소월이 ‘물로 사흘, 배 사흘, 먼 삼천리, 산을 넘는 육천리’로 노래한 평북 삭주에서 궁벽한 산골소년으로 자라나 식민지의 학교시절을 늘 배고픈 공부벌레로 성장했다. 광신적 반공주의가 이성을 잠재운 시기에 그의 붓은 이성이 눈뜨는 새벽을 위하여 치열하게 투쟁했다. 그는 일생동안 일관되게 평화주의자였다.


리영희와 함께한 모든 날들이 행운이었다. 진지 엄숙 근엄한 리영희가 아니라 호쾌한 풍류남아, 자상한 남편, 아버지인 리영희와의 달콤한 동행이 행복하였나이다. 오빠부대가 지구별을 떠나 우주로 가는 날, 다시 그곳에서 못다한 학예회를 하고 싶다. 아니, 그보다 선생님의 고향 삭주에서 ‘꽃 중의 꽃 리영희꽃’ 합창을 할 날을 기다린다.


2010년 5월 '리영희 오빠부대'가 베풀어준 마지막 학예회. 화관을 쓰고 활짝 웃는 리영희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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