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와 정도영, 나의 기억 / 정건화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8-09 05:00
조회
1528

리영희와 정도영, 나의 기억



 


 


 


정건화(한신대 교수, 경제학과)


1. 리영희재단 후원회원이 되어
안녕하세요? 후원회원 정건화입니다. 뉴스레터에 실을 리영희 선생에 대한 짧은 글을 요청받았습니다. 원고지 6매 정도 짧은 글이라 들었지만 선뜻 그러마고 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에 대한 글을 쓴다 생각하니 돌아가신 제 부친(정도영), 모친(박춘)에 대한 기억,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저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회상, 반추와 감정의 일렁임으로 글 시작에 대한 부담이 있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기억을 돌이킴이 꼭 부담스럽기만 한 건 아닙니다. 덕분에 컴퓨터 하드디스크 폴더 속에 넣어둔 메모파일들도 찾아 다시 읽었습니다. 메모 글은 몇 년 전 김효순 재단이사장께서 <리영희를 함께 읽다>는 책의 글을 준비하며 부친과 선생과의 친분과 교류에 대해 묻는 연락을 주셨기에 그때 작성한 것이어서 실은 그리 오래된 건 아닙니다. 이사장님과 주고받은 문답은 부분적으로 <리영희를 함께 읽다, 2017>, <3부 삶을 잇다, 리영희와 저널리즘> 중 <정도영과 리영희 (241-244쪽)>에 실렸습니다.


당시 저는 학교를 쉬고 미국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지내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김효순 이사장께서 이메일을 통해 주신 질문들에 대해 어머니께 옛 일들을 물으면서 회신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많은 기억들을 메모형식으로나마 기록할 수 있었고 어머니의 생애와 생각도 오랜 시간에 걸쳐 들을 수 있었습니다. 타고난 이야기꾼이신 제 모친은 당신의 삶을 중심으로 어린 시절부터 결혼, 부친과의 결혼과 이후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으셨고 저는 중간 중간 이야기를 끊으며 요청받은 서면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이야기의 방향을 돌리려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릴 적 기억 속에 두 분은 참 많이 다투셨습니다.부친은 어머니의 반복되고 긴 불평과 불만의 잔소리(!)를 잘 견디셨습니다. 두 분이 그렇게 다투실 때 전 언제나 마음으로 부친 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관점에서 풀려나오는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머니를 더 많이, 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소중하고 고마운 시간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려니 어머니 모습이 떠오르고 그리움에 가슴 한 켠이 시린듯합니다. 어머니는 2년 전 돌아가셨지만 요즘도 제 꿈에 종종 나오십니다.


2. 리영희 선생과 아버지 1
저의 부친은 1926년생으로 리영희 선생보다 3살 연상이고 합동통신사에서 외신부장으로 근무하던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고 박현채, 고 도예종 선생 등과 같이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후 복직과 다시 강요된 퇴직, 한국비료, 대한상공회의소, 건설협회 등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비교적 일찍 은퇴해서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번역과 사사편찬 일을 하면서 생활과 생계를 꾸리시다 1999년 1월 폐암으로 3년여 투병 끝에 돌아가셨습니다.


부친에 대해서는 대학동기이기도 한 한홍구 교수(성공회대)가 참여정부 시절 과거사진 상조사위 작업에서 소상하게 보고서를 작성한 걸 보았습니다. 그에 기초해서 1차 인혁당 관련당사자들도 차례로 재심신청이 받아들여졌습니다. 부친도 마침내 57년 만에 작년(2021년 6월) 서울고등법원 재심결정과 이후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박중기(추모연대 명예의장), 고 전무배(민족일보 복간추진위원회 위원장), 고 박현채, 김병태, 김금수(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 선생 등이 부친과 함께 1차 인혁사건에 연루된 분들로 부친 생전에 가깝게 지내셨던 분들이고, 그 중 박중기, 고 전무배, 김금수 선생은 특별히 부친과 아주 오랜 기간 가깝게 자주 만나셨습니다. 안병직 교수(서울대 명예교수),이대근 교수(성균관대 명예교수) 등도 어린 시절부터 저희 집을 많이 드나든 분들이고 안병직 교수댁과는 한때 리영희 선생댁 만큼 가깝게 지냈던 사이였습니다. 이 분들은 나중에 생각을 크게 바꾸어 뉴라이트 경제학자로 목소리를 크게 내셨지요.


선생의 글에도 가끔 나오지만 부친과 선생은 합동통신 시절에 만났고 당시 부친은 선생의 입사 면접에도 참여했는데 ‘리영희 선생이 영어를 특출나게 잘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부친은 선생께서 ‘평안도에서 월남한 미군 통역장교 출신이고 인상도 강렬해서 서북청년단원을 연상시켰기에 전형적인 우익사상을 가진 사람이란 막연한 편견을 갖고있었다’ 합니다. 그런데 인혁당 사건으로 구치소에 있는 중 선생께서 영치금을 보내와서 깜짝 놀라셨습니다. 출소 후 두 분은 동료 언론인으로서 그리고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하고 국제정세를 논하고 우리사회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지적 동지로서 남은 평생동안 누구보다도 가깝게 지내셨습니다.


3. 리영희 선생과 아버지2


책 ‘리영희 함께 읽기’에서 김효순 이사장은 부친과 선생의 교분을 이렇게 썼습니다.



“그는 정도영과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서로 마음을 나눴고(<대화> 389쪽)', '1999년 1월 정도영이 타계했을 때 리영희는 장지까지 따라갔다. 하관 때 상주가 삽으로 흙을 떠서 관 위에 뿌리고 난 뒤 바로 리영희에게 삽을 넘겼다고 한다. 두 사람의 사이가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김효순: 리영희와 저널리즘).



정말 그랬습니다. 두 분뿐 아니라 부인들끼리도 친하게 왕래했고 나중에는 자식들의 대학입시, 결혼 등에 대한 일들까지 소식을 나누며 지내셨습니다. 리영희 교수 부인께서 어머니께 들려준 이야기로 '정 선생 댁에서 혹시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무조건, 최대한 도와주라’고 선생께서 부인에게 당부하셨다 합니다. 선생 댁도 당연히 형편이 넉넉할 리가 없지만 그때는 선생께서 대학에 자리를 잡으셔서, 항상 생활고에 시달리던 저의 집보다는 조금 형편이 나았던 시기였나 봅니다.



1965년 1월.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심에서 무죄판결로 석방되어 환영 나온 합동통신 동료, 지인들에 둘러싸인 채 찍은 여러 사진들 중 하나.


어린 시절 제가 오래 살던 곳은 서울 강북의 수유리, 우이동이었습니다. 지금 덕성여대 부근으로 당시 소나무가 무성히 자라 숲을 이룬 동네였고 지금도 솔밭공원이 남아 있습니다. 제가 중학생 시절 당시 제기동에 살던 선생은 주말이면 수유리 집으로 찾아오셨고 두 분은 덕성여대가 들어서기 전 그곳에 있던 테니스장을 찾아 함께 운동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주말마다 찾아와서 함께 등산을 가거나 운동하러 집을 나서는 부친과 선생을 못마땅해 하기도 했는데 '두 분이 마치 사귀듯이 친하게 지냈다'고 표현하셨습니다. 또 부친이 그때 어머니께 선생에 대해 ‘성격이 강하면서도 세심하고 부드러운 면이 있고, 실력이 있고 모든 행동거지가 바른 사람’이라 하셨다 들었습니다.


다시 김효순 이사장님 글 인용입니다.



'정도영의 차남 정건화의 증언에 따르면, 생전에 정도영은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 사이에서 필명을 떨치기 시작한 리영희를 비공식모임에 끌어들이자는 얘기가 나오자 ‘평생 기자를 할 사람이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했다고 한다.'



제가 김효순 이사장님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제가 꽤 나이가 든 시기, 아마도 30대로 기억합니다. 그 즈음 대학원 경제학과 박사과정에 있던 저는 부친과 안병직 교수가 주장하던 중진자본주의론이나 유행하던 사회구성체 논쟁 등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있습니다. 부친과 이야기 중 아주 흥미로웠던 이야기였습니다. 부친 말씀에, ‘옛 시절 어느 논의 자리에서 리영희 선생에 대한 이야기와 인물평이 이루어지고 선생을 논의 그룹에 참여시키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공식적인 언론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의 역할이 따로 있고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취지로 반대했다’ 하셨습니다. 부친은 1차 인혁당 사건 이후 반공법, 국가보안법 등으로 이미 사찰과 감시의 대상이 상태였기에 ‘리영희 선생을 시찰대상인 사람들과 위험하게 연결시키지 않으려 했던 배려이자 현실적 필요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논의의 시기와 성격에 대해서는 정확히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그때 더 자세히 묻지 않았던 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1980년대 말-90년대 초 한길사 책 번역하며 노후의 나날을 보내던 시절 우이동 집 마당에서 차남(정건화)가 부친을 찍은 사진(그때 어떤 경위로 사진을 찍겠다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처음으로 부친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4. 리영희 선생과 어머니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두 이야기에서 저는 선생의 새로운 모습을 본 듯 했습니다. 첫 번째는 어머니가 당시로는 파격적인 머리 스타일을 했는데 선생께서 특별히 관심을 보이며 멋있다고 코멘트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머니는 이처럼 선생께서는 ‘만날 때마다 항상 뭔가를 소재삼아 관심을 표명하고 좋은 말을 들려주어 기분을 유쾌하게 해주었다’고 회상하셨습니다. 그래선지 어머니는 선생이 ' 미적 감각이 있고 세련된 걸 좋아하며 심미안을 가진 분‘이라 높게 평가하셨습니다! 또 당시 어머니는 ‘가난에 쪼들려 항상 우울했는데, 선생이 집을 방문하면 재미있고 유쾌해서 남편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지만 긍정적이고 활기차게 사는 것 같아 어머니도 밝은 기운에 위로를 받고 도움이 되었다’고도 하셨습니다. 다른 이야기 하나는, 1990년대 중반, 삼성의료원 부근 수서에 살 때의 일입니다. 선생이 과음의 연속으로 위에 천공이 생겨 삼성의료원 응급실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에 어머니가 문병을 가셨습니다. 선생은 병실에서 어머니를 맞으며 ‘부인 이제 우리 고생 그만하십시다. 정 선생이나 나나 이제는 할 만큼 했습니다. 정 선생 부인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내가 잘 압니다. 정 선생이나 나나 이제는 남은 생을 좀 즐겁게 편안하게 사십시다. 함께 해외여행도 하고 함께 전원생활도 해보십시다'고 하셨답니다. 입원하게 되었을 때 선생은 암이 발병한 걸로 생각했는데 다행히 아니었기에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 퇴원하면 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 술, 담배도 끊겠다'는 바람과 의지를 토로하신 것 같습니다.


5. 내가 기억하는 리영희 선생
선생을 아는 많은 분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듯 제게도 선생의 모습은 찌르는 듯 강렬한 눈빛이 특별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 눈빛으로 전해오는 선생에 대한 느낌이 그저 외견상의 모습에서 오는 느낌이 아니란 것이 확인된 기억도 함께 있습니다. 선생을 어느 자리에선가 뵈었을 때 ‘선생님 글, 잘 읽고 있습니다’라고 인사차 말씀을 드렸는데 대뜸 ‘어느 글의 어떤 내용이 좋았는지 말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순간, 생각이 막히고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 상황을 돌이키며, 선생의 글은 나름 많이 읽었던 터여서 아무 내용이나 말할 수도 있었는데, 왜 그렇게 말문이 막혔을까 조금 의아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자리에서 만난 오랜 친구의 자식이 인사를 겸해 드린 말씀에 정색을 하고 주신 응답이었기에 당황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선생과 부친은 성품이 많이 다르고 대조적이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두 분이 친교와 우정을 지속할 수 있었던 건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얼마 전 이미정 이사를 만나 이야기 나누던 중 들었던 두 분의 공통점이 중요한 이유가 될 듯도 합니다. 선생이 후배 기자들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이 “모든 것을 의심하라”였다고 하지요? 부친의 후배 고 전무배 선생께서 부친을 회고하면서 들려준 말씀이 기억납니다. 부친은 ‘당연하고 뻔한 말을 기계적으로 암송하듯이 말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셨다’고 합니다. 60년대 중반, 그 시절부터 일국 사회주의, 일인숭배, 한국전쟁, 당의 무오류성에 대해 특히 비판적인 문제제기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당시의 분위기, 혁신계 내 상황에서 보면 그렇게 당연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또 부친이 생전에 제게 들려준 이야기도 비슷했습니다. 외신부 근무 시절 ‘1960년 소련 제20차 당대회에서 후르시쵸프 수상의 스탈린 비판’ 을 AP 외신으로 처음으로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도 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소련 교과서 식의 내용을 맹목적으로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냉전이라는 세계사 초유의 상황, 사회주의 형제국인 소련과 중국간의 국경충돌(중소분쟁), 분단 상황에서 남한 사회의 독자적인 체제전환과 한반도의 평화공존 등은 책에서 찾을 수 있는 이론이나 가르침이 아니었으며, 당대의 지식인들이 귀뚜라미와 같은 촉수를 갖고 세계 정세에 관한 정보를 찾고 분석하고 고민해서 도달한 결론이었다’는 이야기,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지식(인)의 역할은 창의적으로 그러한 길을 찾는 것이 되어야한다’는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상식조차 의심해야 한다’고한 선생과 당연하고 뻔한 이야기를 맹목적으로 암송하는 듯한 태도를 못 견뎌 한 부친, 두 분의 이런 생각과 태도는 오랜 기간 공감과 교류를 지속하게 하는 공통점이자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해봅니다.


6. 마무리
부친은 1999년에 돌아가셨고 선생은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2010년 말 이 세상을 하직하셨습니다. 두 분이 없는 세상이 그 후로도 또 11년의 훌쩍 지났습니다. 리영희재단 뉴스레터 발행, 축하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레거시 미디어의 존재 자체가 위기에처한 오늘 우리사회, 국제, 국내적으로 직면한 문제들을 선생처럼 또 선생과 교류한 부친처럼 깊게 들여다보려 노력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저널리즘의 복원과 부활을 소망합니다. 이를 위한 재단의 노력을 기대하고 성과를 거두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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