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역사와 특징 / 황석영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3-06-13 19:18
조회
743

사람과 역사의 특징



 


 


 


황석영 / 소설가


 


내가 리영희 선생을 처음 만났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사람이란 누구나 자신이 살았던 때와 만났던 사람들을 자기 식으로 재해석하면서 기억의 서랍에 남기기 마련이다. 나도 이제 팔십이 넘었으니 추억은 길고 남은 시간은 짧아졌다. 살면서 수많은 사건과 사람을 겪었고 만났다. 나는 일찍이 서울을 떠났고 늘 지방의 현장 근처를 떠돌았다. 그러고는 곧 십여 년의 망명과 투옥을 거치면서 세계가 변한 뒤에야 세상으로 돌아와 다시 글쓰기를 시작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인연은 길게 이어졌지만 정작 만나지 못하다가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이들이 많았다. 리영희 선생도 그런 분의 하나였지만, 내게는 동시대를 살았던 선배로서 귀중한 기억의 조각들을 많이 남겼다.


 


내가 처음 리영희 선생을 만났던 것은 아마도 박정희의 유신시대가 시작되던 70년대 초반 무렵이었다. 박정희가 유신을 준비하던 삼선개헌을 거쳐서 마지막 대선으로 김대중을 아슬아슬하게 이긴 뒤에 총선에서 간담이 서늘해져 그해 십이월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나는 그때 우이동에서 가난한 청년작가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결혼하고 아들도 낳고 하면서 생활하던 중에 모친과 아내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아내는 순하고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서울내기 외동딸로 자라서 살림에는 서툴기 짝이 없었다. 요즘으로 견주어 보자면 철없는 젊은것들이 아이까지 낳으면서 대책 없는 살림을 덜컥 시작한 셈이었다. 집세가 싸던 우이동으로 분가하여 나온 것도 모친과 아내의 갈등을 피하려던 고육지책이었던 셈이다.


어느날 시인 최민을 만났더니, 리영희 선생 이야기를 하며 우리 인생에 좋은 스승이 될 테니 한번 찾아가보자는 의견을 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하여도 그분이 어떤 이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최민에게서 듣기로는 보기 드문 지식인으로 그가 쓴 글들이 좋다고 말했다. 그렇기는 하여도 그이는 내 짐작으로는 ‘사회과학적’이어서 나로서는 일종의 경계 대상이었다. 나중에 뵙고 이모님처럼 좋아하게 된 윤영자 사모님께는 실례되는 말이었지만, 최민은 선생님의 결혼생활에 대한 사정을 내게 이야기해주었다. 리영희 선생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으며 부인과 모친 사이에서 일상적인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그랬다. 선생이 신문사에서 야근하고 있을 때도 아내가 걱정되었고 날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무슨 일은 없는지 조마조마했다고 한다. 최민의 말에 나는 부쩍 리영희 선생을 만나고 싶어졌다. 친구는 나름대로 내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그런 식으로 나를 리 선생과 만나게 하려고 했다.


 


리영희 선생 댁에 가니 마침 김정남과 박재일이 방문해 있었다. 김정남은 김지하와 더불어 6.3 한일회담 반대운동 시기부터 백기완의 백범사상연구소 시기와 유신체제 내내 물밑에서 여러가지 뒷바라지 일을 해왔던 사람으로 내게는 이제 몇몇 남지 않은 벗 중 하나다. 그리고 박재일은 김정남이 내게 ‘산맥 같은 친구’라고 소개했듯이 그 무렵에 원주로 가서 한국가톨릭농민회의 산파 역할을 했으며 한살림운동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는 이날의 리영희 선생 방문 직후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선생이 기다리는 원주로 떠나게 되었고, 최민과 나의 오랜 친구인 김헌일이 동행하여 그들의 일원이 되었다. 이제는 김정남만 남고 그들 모두가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사모님이 차려준 조촐한 술상 앞에 둘러앉고 일대 시국담이 벌어졌는데 최민이 권하는 대로 내 집안 고부갈등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낼 자리가 아니게 되었다. 선생은 이전부터 일관하여 한국의 사회 정치 경제 등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신문과 시사잡지에 써왔지만 나는 한 줄도 읽은 적이 없었다. 이른바 문학청년의 편식적인 독서 취향 때문이었으리라. 그렇지만 나는 이미 온몸으로 겪은 일이어서 그때에는 이미 나도 노동현장과 분단을 다룬 <객지>라든가 <한씨연대기> 또는 베트남전쟁을 배경으로 한 <탑>이나 <낙타누깔> 등의 소설을 발표하고 있던 때였다.


 


<창작과비평>은 4.19 이후 60년대에 백낙청 교수가 창간하여 문학이 현실 속에서 살아 생동하고 실천하는 길을 찾아 나가려던 문예운동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창작이 내가 관여할 범주였다면 비평은 그 밑바탕을 이룰 역사 문화 철학 정치 경제 등등의 담론들을 펼치는 장이기도 하여, 나는 선배 동료 작가 시인들은 물론 많은 학자 교수 비평가 기자 논객들을 자연스럽게 만나며 배울 수가 있었다. 선배들이 권하는 책을 읽기도 하고 동료들의 경험과 담론을 확인하기도 하면서 세계관의 깊이를 차츰 갖출 수 있게 되었다. 1974년에 창비에서는 단행본 출판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대형 출판사에서 ‘전집’ 중심으로 월부 판매하는 것이 출판계의 실정이었는데, 청년 독자층에게 일상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단행본 출판이야말로 시급한 문화적 과제였다. 창비를 시작으로 민음사, 문학과 지성 등이 잇달아 단행본 출판을 시작했다. 황석영 창작집 <객지>가 출간되고 이어서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나왔다.


 


창비신서3 <객지>, 창비신서4 <전환시대의 논리>


 


그 무렵에 선생의 평생 측근이었던 조선일보 외신부 출신 신홍범이 내게 전해준 선생의 일화가 가슴속에 깊이 남아 있다. 당시의 신문에는 현재의 대만을 지칭할 때 ‘중화민국’이라는 국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자유중국’이라는 고정 부호로 기사에 쓰는 것이 관례였다. 신홍범이 대만 기사를 쓰면서 남들이 하던 대로 ‘자유중국’이라고 번역해서 썼는데 리영희 외신부장에게 딱 걸렸다.


“신기자, 자유중국이라는 국호가 있습니까? 나라 앞에 자유라는 표현을 우리가 만들어 사용하는 게 올바른가요?”


아무 생각 없이 당시 관례대로 써왔던 신홍범은 할 말을 잃었다. 당시의 대만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본토에서 섬으로 쫓겨난 후, 국민당 일당독재로 장개석 총통의 종신 총통제가 이어지던 때였고, 박정희 군사정부가 그쪽 총통제를 흉내 낼 것이라는 논리적으로 그럴듯한 소문이 돌던 때였다. 신홍범은 신출내기 기자로 부장의 그런 지적을 듣고 절집에서 죽비로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누군가의 책이 나오거나 <창작과비평> 계간지가 나오면 필자들과 문인 학자 지식인들이 모여들어 술자리가 벌어지기 마련이었고 나는 리영희 선생을 비롯하여 선후배들과 어울려 자주 만나게 되었다. 당시에는 많은 사건이 벌어져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기자들이 자유언론투위를 조직하고 해고되었고, 유신반대 성명서 등으로 문인들도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조사받고, 구속되고, 검열에 걸리고, 도망 다니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아무튼 어느 느슨한 자리에서 내가 선생님을 처음 찾아갔을 때 사실은 개인적인 일로 고민 상담차 갔던 것이라고 고백을 했고 할 수 없이 가정사의 자초지종을 말했다. 선생은 진지하게 지금은 모친과 아내의 관계가 어떤가 하고 물어서, 분가해 나왔지만 해결은 안 되었노라 그랬더니 그럴 줄 알았다며 껄껄 웃었다.


“효도가 쉽지 않아요. 고부간 갈등을 화해시키는 일은 어려운 일이오. 어느 정도의 전제 조건으로 한쪽을 설득한 뒤에 다른 한쪽을 쎄게 편들어 주는 거요. 그렇지만 애초부터 사랑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겠지요.”


그 자리에는 한남철 소설가도 있었는데 그는 백낙청 교수의 오랜 친구로 리영희 선생을 좋아하면서도 딴지를 거는 버릇이 있었다.


“옛말에 효도하는 것도 손발이 맞아야 한답디다. 사람 사는 일이 복잡한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대로 딱딱 맞아떨어집니까? 이건 과학이 아닌데 껄껄.”


나에게는 ‘쎄게 편들다’와 ‘사랑에 대한 신뢰’라는 선생의 말이 남았고 한남철 선배의 ‘사람 사는 일은 복잡하다’라는 말도 남았다.


 


나의 <객지>와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나오던 1974년 무렵에 김지하 시인이 구속되고,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문인간첩단,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고, 대학에서는 학생 구속과 교수 해직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감생활 기간에 우리 책은 광범위하게 읽혔고 특히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줄여서 ‘전논’이라고 불리면서 젊은이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독서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도 베트남전쟁에 대한 선생의 자료 탐구와 관점에 대하여 깊은 감명을 받았고, 뒤에 베트남전쟁을 다룬 나의 소설 <무기의 그늘>을 집필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고백한다.


훗날 어느 술자리에서 리 선생의 글쓰기에 대하여 회고담을 나누다가 백낙청 교수가 말했다.


“영어에서는 태도가 다를 뿐 존대와 반말이 그리 명확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 리 선생님이 인용하여 번역한 문장은 교묘하단 말이지.”


기억이 이제는 가물거리지만, 선생의 글 중에 미국대사가 여섯 차례나 쿠데타를 기도하던 남베트남 장군들을 모아놓고 꾸짖기도 하고 어르고 달래는 장면이었다. 원어가 ‘젠틀멘’이었을 텐데 역문에서 미국대사는 그들에게 ‘제군들’이라고 서두를 뗐다. 반 민, 반 티우, 카오 키 등 나중에 대통령 부통령 총리 다 해먹게 되는 장군들은 ‘옛썰’이라고 말하면서 미국대사의 꾸지람에 대하여 온순한 학생들처럼 ‘대사 각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식이고 대사는 고압적인 반말이었다.


그때의 우리 얘기는 번역이란 원래가 의역이 옳다는 것이었다. 미국과 남베트남 군부의 관계가 그러했고 이러한 말투는 상황으로 미루어 인지상정일 것이다. 초대 대통령 고 딘 디엠은 프랑스 점령시기 응우옌 왕조의 시종집안 사람이고, 이들 남베트남 장군들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군 휘하의 장교들이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우리네 사정과 비슷한 것이다.


 


내가 방북하고 유럽을 거쳐서 뉴욕에 망명하고 있을 무렵, 누군가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대학교수 아무개라고 했다. 용건을 물으니 내 소설 <무기의 그늘>을 번역하고 싶다고 했다. 처음에 그의 말이 유창한 한국어여서 한국 사람으로 알았으나 나중에 자기 이름을 말하는데 서양 이름이어서 조금 놀랐다. 그는 자기가 한미 혼혈이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왜 <무기의 그늘>을 번역하려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매우 간명하게 대답했다.


“베트남전쟁은 한국전쟁이니까요.”


그 심플한 대답으로 나는 그가 이 책을 번역하기에 꼭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서문에서도 썼듯이 이 소설을 ‘남의 목청을 빌려서 울겠다’라는 심정으로 썼다고 했다. 한국전쟁을 아직도 정면으로 심화하여 쓸 수 없으므로 베트남을 빌려서 내 생각도 담아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뒤에도 그와 뉴욕, 로스앤젤레스 사이에서 전화 통화가 진행되었다. 몇 차례의 통화 끝에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밝혔다.


“저의 어머니는 김수임입니다.”


잡지의 선정적인 제목으로 조선의 ‘마타하리’라고 나오는 ‘여간첩 김수임’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미군 헌병사령관과 살며 아기를 낳았고 미군정 당국의 남로당 불법화 정책으로 박헌영 이강국이 삼팔선을 넘어 월북할 때 도움을 주었다는 신여성의 이름이었다. 우리는 해방정국에 대하여 여러 자료를 접했고 조선정판사 사건이라든지 반탁찬탁 과정이라든지 남북협상 과정이라든지 나름대로는 객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바로 사건 직후 본국으로 소환되어 조사받고 예편한 주한미군 헌병사령관이었다. 전쟁 발발 직전에 김수임은 총살형을 받았고 아기는 기구한 외할머니에게 맡겨졌다가 전쟁 직후 할머니가 돌아가면서 지인에게 맡겨졌다. 그는 고등학교까지 한국에서 자라다가 양부모의 노력으로 미국으로 왔다. 그는 청년이 되어 아버지를 찾아간 적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를 만나기를 거절했다고 한다.


아무튼 나는 모든 역사 자료의 뒤에 깔린 개인의 인생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나는 그에게 <무기의 그늘> 번역을 맡기고 싶었지만 이미 한국에서 나의 친구였던 전경자 교수가 그의 미국인 남편 웨스트 변호사와 함께 절반이나 번역을 마친 뒤여서 그의 제안에 응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나는 귀국했고 구속되었다. 근년까지 들리는 몇몇 일화에서 보면 그는 아직도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의 실마리를 찾아다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시대 리영희 선생의 베트남과 중국에 대한 탐구며 글쓰기의 목표는 대개 다음 두 가지였을 것이다.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강고하게 우리 사회를 옥죄고 있는 냉전의 허상과 우상을 깨트려 절집의 죽비처럼 우리의 뇌리를 후려쳐 일깨우려는 데 있고, 그다음은 남의 목소리를 빌려 내 울음을 울어보려는 은유로서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선생의 글은 지금 읽어도 여전히 생생하고 유효하다. 그것은 마치 김수영 시가 지닌 ‘현재성’과도 같다.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에는 분단시대의 자의식이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며, 외세의 작용 또한 변화는 할지언정 기본은 같은 흐름이기 때문이다.


 


리영희 선생이 최초로 구속되었던 것은 1964년 아시아 아프리카 외상회의의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검토 중’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조선일보에 썼던 때문이었다. 정치인 김대중은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시절 '미일중소' 4대국의 한반도 전쟁억지 보장과 향토예비군 폐지를 주장했고 80년대 후반에는 오스트리아식 중립화통일론을 거론해 오랫동안 '빨갱이' 소리를 들어야 했다. 결국 미소 냉전체제가 해체된 이후인 1992년 유엔은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가 대한민국이라는 한국의 오랜 주장과는 달리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권유 추진했다.


이는 내가 미국 뉴욕에 체류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당시 미주 한국청년연합을 이끌고 있던 광주항쟁 망명자 윤한봉 등이 주동하여,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은 코리아의 분단을 국제적으로 용인하고 두 개의 나라가 되어 영구분단을 받아들이게 되는 나쁜 정책이라고 반대해 나섰다. 이들 재미 한국청년들은 유엔본부 앞에서 단식하면서 한 달 가까이 투쟁했다. 남측은 방관했고 북측은 여러가지 선을 통하여 간곡하게 만류했다. 유엔에게도 코리아의 남북 분단은 오랜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뒤에 미국의 힘이 있었지만 한국의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은 유엔의 실책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뒤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이후, 이른바 교차승인이라는 해법이 나왔다. 소련 중국은 남한을 승인, 외교관계를 가지며 미국 일본은 북한을 승인, 외교관계를 갖는다는 안이었다. 소련 중국은 차례로 남한과 외교관계가 있게 되었지만, 미국 일본은 오히려 북한을 압박했다. 북한이 이후 핵 개발에 매진하기 시작한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것은 북한의 생존전략이며 협상전략이 되었다.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북미 평화협정의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도 미국은 여러 핑계를 대어 봉쇄를 이어갔고 전쟁 위기는 상승과 하강을 거듭했다. 미국은 냉전 이후 첨단기술의 발전과 세계화 정책으로 전략적 간섭 기능의 뇌수 노릇을 하면서 대리전을 조정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점에서 미국은 오랜 동북아 전략이었던 미일한 삼각안보의 틀을 완성하려고 집요하게 애쓰는 중이다. 미국에 의한 일본의 군국화와 한국의 군사적 예속은 현재 강화 진행 중이며 리영희 교수는 이미 칠팔십년대부터 이러한 점들을 끊임없이 지적해왔다.


 


어찌 선생과의 추억을 한두 가지로 끝낼 수 있겠는가. 언젠가 후배 문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노무현 정부의 마지못한 이라크 파병 반대시위에 나갔다가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나온 선생을 수년 만에 만났고, 함께 나란히 참전 반대 플래카드를 맞잡고 종로 탑골공원에서 광화문까지 걸었던 기억이 난다. 그는 문학인들 가운데 유일한 학자였으나 동료 문인 중 누구도 그가 작가가 아니라고 여기는 이는 없었다. 일찍이 그가 쓴 자서전의 일부인 <역정>의 명문장과 동족상잔의 현장이었던 육이오의 역사적 증언에 대하여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다.


2003년 3월 이라크 파병반대 집회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문인시위를 이끌고 있는 황석영(좌), 집회에서 연설을 하는 리영희(우)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어떤 자는 선생의 편역서인 <8억인과의 대화>에서 중국혁명과 문화혁명을 리영희가 지나치게 왜곡하고 미화했다고 공격했다.


나중에 나는 장벽이 무너지던 베를린 현장에서 사람의 삶을 제약하던 허상이 무너지는 것은 어쨌든 좋다고 생각했다. 윌러스틴은 세계는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아니었던 적이 없으며, 그 가운데서 사회주의라는 칠십년 동안의 임시 바리케이드가 무너진 것뿐이라고 다소 냉소적으로 말했다. 이미 붕괴는 1968년 파리 5월혁명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라고 또 누구는 말했다.


장벽이 무너진 뒤에 나는 베를린에서 일주일쯤 늦게 도착하는 한겨레신문을 읽었는데 내로라 하는 사람들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현실사회주의는 끝나지 않았고 이제 다시 시작할 것이라는 둥,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둥, 새로운 의미의 공산주의가 나올 것이라는 둥, 그 일년 동안의 숨가쁜 세계사적 변화를 모르고 이제까지 자신이 읽어왔던 독서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리영희 선생은 쓸쓸하게 현실사회주의의 종언을 확실하게 인정하는 글을 써냈다. 그러나 이제 반면거울로써의 영역이 세계 속에서 사라지면서 반성하지 않는 자본주의적 탐욕이 거리낌 없이 자행될 것이 두려웠다. 이후 세계는 그렇게 진행되었고 석유패권을 위한 테러전쟁으로 다시 분쟁은 끝없이 이어졌다.


나는 선생이 ‘문화대혁명’에 대하여 편파적으로 적었다는 점에 대하여 인정하면서도 그때는 당연히 그랬을 수 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런 점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조지 오웰의 열광과 환멸 같은 것이다. 에드거 스노의 장정과 중국혁명의 장엄한 묘사 뒤에 지친 그가 발리에서 휴식하면서 촌락의 힌두공동체에 대하여 또 하나의 책을 쓴 것과도 같다. 루이제 린저의 북한 기행문은 서구사회에 넌더리를 낸 작가의 반대급부로서의 북한공동체 찬사가 보인다. 나에게도 그런 오류는 있었다. 내가 쓴 북한 기행문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책은 북한의 전후 복구와 육칠십년대의 사회제도를 다룬 것이며 다분히 편향적이다. 나는 오랜 뒤에 어느 독자가 낡은 책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행사장에 들고 와서 사인을 요청했을 때 이렇게 적어주었다.


“모든 움직이는 것들은 균형을 지향한다.”


이는 어느 후배의 적절한 농담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는 팔십년대 한국의 질풍노도의 시대를 이렇게 말했다.


“옛날 만원버스 생각나요. 운전사는 차장이 버스문을 닫는 걸 도와주려고 오른쪽으로 핸들을 확 틀지요. 그러면 승객들은 왼쪽으로 확 쏠리며 안으로 밀려들어가요. 그럴 때는 편파가 아니고 균형 잡는 동작이에요.”


이제 지나고 보면 우리가 당시에 세우려고 애썼던 여러 명제는 결국은 평범한 상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당시에는 그 상식을 말하는 것조차 두렵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코페르니쿠스라든가 갈릴레오처럼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리는 속삭임 같은 일이었다.


 


나로서는 리영희 선생과 함께 늘 기억하게 되는, 일본에서 망명객으로 끝내 돌아오지 못했던 정경모 선생이 생각난다. 두 분은 만나자마자 서로 흉금을 털어놓는 지기가 되었으며 치열한 저널리스트적 글쓰기로 ‘쎄게 편들기’와 ‘사랑의 신뢰’를 실천했던 분이다. 우리 리 선생이 한국전쟁 때 국군 통역장교를 했듯 정경모 선생도 일본과 미국 유학 중에 전쟁이 터져서 문익환 목사와 더불어 도쿄 미군 GHQ 사령부에 파견되어 군속 신분의 통역관이 되었다. 그는 휴전협상 기간의 통역으로서 여러가지를 목격하고 체험하면서 민족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리영희 선생은 정경모 선생의 비평을 읽고 ‘글을 써도 그렇게 야박하게 쓰니 한일 합동 미움을 받아 싸지’라고 농담했고, 정경모 선생은 ‘그러는 자기는 참 너그럽다. 장검도 아니고 면도칼로 그어대니 당하는 자가 얼마나 아플까?’라고 받아쳤다. 두 선생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쓰러졌지만 각자 다시 일어나 몇 년 더 사셨다.


 


내게는 리영희 선생이 보내준 엽서 한 장이 남아 있다. 내가 공주교도소에 살던 때였는데 신년이 되자 문득 선생의 엽서 한 장이 독방으로 날아왔다. 만년필로 흘려 쓴 내용은 이러했다.


 



年年歲歲花相似(년년세세화상사)


歲歲年年人不同(세세년년인부동)


해마다 피는 꽃은 똑같지만


해마다 사람들은 같지 않네


 


사람과 역사의 특징은 변화에 있습니다.


건강하게 잘 지내시오!



작년 6월 서울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열린 김지하 추도식에 참석한 황석영 (중앙). 왼쪽은 미야타 마리에 전 문예지 편집장, 오른쪽은 히라이 히사시 <교도통신>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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