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대화> 일본어판 편집자 세키 마사노리씨를 애도합니다 / 김효순
리영희 <대화> 일본어판 편집자 세키 마사노리씨를 애도합니다
김효순 / 리영희재단 이사장
국내에서는 극히 한정된 분야의 인사들을 제외하면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 출판계에서 유수의 한반도문제 전문 편집자였던 세키 마사노리씨(이하 존칭 생략)가 지난 8월9일 세상을 떠났다. 만 68세가 되기도 전에 유명을 달리했으니 너무도 이른 죽음에 가슴이 먹먹하다. 일본의 지식인 중에는 그의 손을 거쳐 나온 책들을 보고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지역에 대한 사고의 폭이 넓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2019년 8월 ‘아카시서점’에서 나온 <대화> 일본어판도 세키의 작품이다. 일본어판 제목은 <대화 한국민주화운동의 역사>이고 ‘행동하는 지식인 리영희 회상’이라는 부제가 달렸다.
리영희 선생의 수많은 저서 가운데 일본어로 출간된 것은 모두 3권이다. 첫 번째는 1985년 5월 <분단민족의 고뇌>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오차노미즈쇼보’가 5권으로 기획한 ‘한국현대사회총서’의 제1권으로 나온 이 책은 역사학자 다카사키 소지가 번역했다. 리 선생의 머리말과 다카사키의 ‘역자 해설’을 보니 번역판의 체제는 다소 특이했다. 번역판이란 게 어느 특정 단행본을 그대로 옮기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분단민족의 고뇌>는 리 선생이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분단을 넘어서>에 수록된 글 가운데 직접 고른 것을 모아놓았다고 한다. 책 제목도 리 선생의 작품이다. 리 선생은 작명 이유에 대해 수록된 문장의 어느 하나를 보더라도 한반도의 민족적 분단에 기인하는 아픔과 몸부림의 표현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 책에 이어 박현채 강만길 백낙청 안병직의 저서가 차례로 일본 독자에게 소개됐다.
두 번째는 2000년 8월 <한반도의 신밀레니엄-분단시대의 신화를 넘어서>가 ‘사회평론사’에서 나왔다. 재일동포 유학생사건의 원조격으로 18년에 걸쳐 옥고를 치렀던 서승이 감역한 이 책의 원제는 <반세기의 신화>다. 그리고 19년의 시차를 두고 일본에서 출간된 것이 바로 <대화>의 일역판이다. 리 선생이 타계하고 나서 9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이 책은 다른 번역서와 차이점이 있다. 일역판이 나오면 통상적으로는 원저자의 별도 서문이 추가돼 책의 맨앞에 실리게 마련인데 그것이 없다. 생전에 번역판이 나왔더라면 청년기, 장년기에 일본어 문헌을 많이 읽을 수밖에 없었던 리 선생이 일본에서 열렸을 출판기념회 등 행사에 기쁜 마음으로 참석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지식인들과 격조 있는 담론을 펼쳤을 텐데 아쉽게도 그런 일은 실현되지 못했다.
나는 <대화>의 일본어판을 편집하고 있다는 얘기를 세키에게서 직접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1년여전 책을 만들면서 느낀 리 선생의 인상에 대해 리영희재단 뉴스레터에 글을 써줄 수 있는지 타진한 적이 있다. 돌아온 답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감당하기 어렵다는 거였다. 그의 건강에 다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그렇게 일찍 이승과 이별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원저자와 편집자가 고인이 된 마당에 일본어판 <대화>가 어떤 경로로 나왔는지 파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 신뢰할 수 있는 단서로는 책 말미에 실린 ‘역자후기’ 정도가 남아 있다. 번역은 두 사람이 나눠서 했는데 <한국식발상법>의 저자이자 한승헌 변호사의 <분단시대의 법정>, <한국의 정치재판> 등 다수의 한국 책을 번역한 베테랑인 다테노 아키라가 후기를 썼다.
다테노는 1935년생이어서 리 선생과 연배 차이가 많지 않아 스스럼없이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생전에 여러 차례 만났고 말년에는 <리영희저작집>에 사인까지 받았다고 한다. 다테노는 리 선생을 한국의 민주화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논객의 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전환시대의 논리> 등 여러 저서는 70, 80년대 한국사회에서 국가권력에 저항하고 민주화와 자주외교의 확립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바이블’ 같은 역할을 했다고 썼다. 국가권력의 쪽에서 보면 저항세력에 큰 영향을 가진 리영희는 ‘눈 위의 혹’ 같은 것으로, 최대의 배제대상자였다는 것이다.
다테노는 대화의 일본어판이 갖는 의미를 이렇게 썼다.
한국현대사의 산 증인 같은 리영희씨로부터 거의 70년에 걸친 파란에 찬 체험담을 들을 수 있는 것은 독자로서 고맙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역사서를 아무리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시대의 공기, 현장의 리얼한 묘사, 인간관계의 미묘한 사정 등이 생생하게 전달되어 온다.
일본의 독자들이 리 선생의 책을 통해 한국현대사를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고마워해야 한다는 지적은 흥미로운 시각이다. 다테노는 책에 서술된 내용에 대해 고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유감스러운 것은 몸이 성치 않은 조건에서 이뤄진 대담이었기 때문인지 상세히 내용을 읽어보면 균형이 결여돼 있거나 말해지고 있는 것에 중복, ‘짙음과 옅음’(농담 濃淡)이 있거나 장황하게 느껴지는 장면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선생의 신체조건의 반영이고 어느 시기 선생의 실상이기도 하다.
다테노는 번역판에 착수한 계기에 대해서는 저작집에 사인을 받았을 때 일본에서도 출판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다고 혼자만의 생각을 말씀드린 적이 있다고 밝혔다. 한글판이 나온 지 2~3년 지났을 때라고 하니 2007~8년 무렵이 된다. 그로부터 12년의 세월이 흘러서 많은 사람들의 지원을 얻어 일본어판이 세상에 나오게 됐다고 썼다. 그가 신세를 졌다고 거명한 사람이나 단체에는 대화의 상대역이자 일본어판 서문을 쓴 임헌영, 한길사 출판 관계자, 번역출판의 지원을 해준 한국문학번역원과 K-BOOK진흥회, 한국정치 연구자의 입장에서 원고를 봐준 나가사와 유코 등이 포함됐다. 그리고 세세한 배려를 해준 전·현직 편집자로 모리모토 나오키, 세키 마사노리 두 사람을 지목했다. 모리모토가 2015년 2월 아카시서점의 사장에 취임한 것과 결부시켜 생각해보면 다테노가 <대화>의 번역판 출판사로 아카시서점을 접촉해 합의했고, 편집의 전체적인 마무리는 세키가 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운동’이 사라진 시대에 한반도 관련 전문편집자로 출판계에서 활약
나는 뜻하지 않은 인연으로 세키와 며칠간 집중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날조사건을 다뤘던 졸저 <조국이 버린 사람들>의 일역판이 2018년 11월 나왔는데 이 책의 편집도 세키가 맡아서 했기 때문이다. 1970, 80년대 한국을 찾았다가 조작사건에 휘말려 중형을 선고받고 오랜 수감생활 끝에 일본에 돌아간 피해자들은 실의 속에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일부는 망가진 인생에 좌절하지 않고 ‘재일한국인양심수동우회’란 모임을 결성해 서로 의지 격려하며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연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이 양심수동우회를 중심으로 추진된 출판기념회가 도쿄와 오사카에서 잇달아 열려 본국에서도 재심사건에 관여했던 변호사들이 대거 참석하는 등 나름 성황을 이뤘다. 나는 출판기념회에 동행한 세키와 저녁의 회식 자리나 이동하는 차량 안에서 많은 얘기를 주고 받았다. 진솔하고 다정다감하고 이따금 유머도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1975년 와세다대에 들어간 그는 ‘학생운동의 끝물’이었던 시기에 대학생활을 겪었다고 했다. 선배들로부터 일본은 ‘10년마다’ 큰 운동이 벌어지니 그 때를 대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졸업하고 보니 운동이 아예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10년마다란 표현은 일본 현대사의 ‘안보투쟁’과 관련이 있다. 1960년 기시 노부스케 수상이 미일안보조약을 개정하려 할 때 전국적으로 격렬한 반대시위가 벌어졌고 국회의사당에 진입하려는 시위대와 경찰 기동대 사이의 충돌로 도쿄대학 여대생이 숨지는 일도 있었다. 1960년대 말에는 미일안보조약 연장, 베트남전쟁, 대학의 권위적 운영에 항의하는 젊은 세대의 ‘반란’으로 사회 전체가 큰 진통을 치렀다.
운동이 사라진 시기에 졸업한 그는 주로 출판분야에서 일했다. ‘도쿄서적’을 거쳐 ‘헤이본샤’(평범사)에서 정년퇴직을 했고 아카시서점에서 한반도 관련 전문편집자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카시서점으로 옮겨 편집자로서 생의 마지막 시기를 보냈다. <대화>와 <조국이 버린 사람들>은 운 좋게도 편집자로서 가장 원숙기에 있던 그를 만난 셈이다.
세키의 사후 동료 편집자들이 밝힌 회고에 따르면 그는 젊은 편집자 시절부터 ‘공부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노력가’였다고 한다. 그는 헤이본샤에서 오랜 기간 <동양문고>의 제작에 관여했다. <동양문고>는 헤이본샤가 ‘동양학총서’ 발간을 목표로 시작한 간판 프로젝트의 하나이다. 1963년에 5권을 내는 것으로 출범했으니 올해 60주년이 된다. 한 중 일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 전체의 대표적인 고전 명작 일기 기행문 등 다양한 저작물을 꾸준히 내왔다. 이제까지 <동양문고>로 나온 책은 9백종을 넘어섰다.
나는 대학재학중이던 1973년께 당시 광화문 종각 일대에 늘어서 있던 일본 서점들을 기웃거리다가 서가에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번역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한문으로 쓰였던 이 책의 한글판이 온전한 형태로 나오지 않았다. 상하이임시정부의 정신적 영도자라 할 수 있는 박은식의 대표적 저술이 방치됐던 것은 우리 현대사의 슬픈 단면이기도 하다. 일역판은 재일사학자 강덕상의 번역으로 1972년 8월과 9월 <동양문고>에서 2권으로 나왔다. 비슷한 시기에 오지영의 <동학사>, 홍석모의 <조선세시기>, 프레더릭 맥켄지의 <조선의 비극>, 김구의 <백범일지>, 김태준의 <조선소설사> 등도 출간돼 목록에 올랐다. 세키는 출판편집 연구모임에서 ‘동양문고 50년-복수의 아시아를 위해’란 제목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4·3사건 관련해 김석범 김시종 대담 추진, 원고를 보면서 울었다
세키는 한반도, 한국·조선 관련의 테마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열정을 지녔다고 한다.
그가 한반도 관련 주제의 책을 만들겠다고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한국에서 4·3사건의 진상규명 작업이 본격화되던 무렵인 듯하다. 1999년 12월 김대중 정권 시절 국회에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됐다. 그는 특별법 통과 이후 한국에서 전개되는 과정을 한국인과 재일코리안들이 공동으로 이룩한 한국 민주화의 위대한 성과로 이해했다.
그와 나눴던 대화들을 적어놓은 메모들을 들춰보면 이제까지 원고를 보다 운 적이 두 번 있었다고 했다. 첫 번째는 자이니치 문인인 김석범과 김시종을 대담시켜 정리된 원고를 볼 때였다. 두 사람은 해방된 조국에 남지 못하고 가해자였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어로 문필 활동을 했다. 4·3사건에 대한 문학적 대응에서 두 사람은 반대방향을 걸었다. 김석범은 <까마귀의 죽음> <화산도> 등 일련의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파고 든 반면 김시종은 일본으로 도피한 이후 일체 얘기하지 않았다. 세키는 두 사람을 한 자리에 모아 4·3에 대해 얘기를 나누도록 하면 좋은 기획이 될 것 같아서 추진했다고 했다. 그리해서 두 사람이 마주앉자마자 한 첫마디는 “야 소주 사 갖고 와라”였다. 이들은 나중에는 녹음을 알아 들을 수가 없을 정도로 취했다고 한다.
대담 장소는 도쿄대학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는 유서 깊은 여관 <호메이칸>이었다. 2001년 2월 중순 이틀에 걸쳐 7시간 동안 진행된 대담의 결과물은 2001년 11월 헤이본샤에서 나온 <왜 계속 써왔는가 왜 침묵해 왔는가, 제주도 4·3사건의 기억과 문학>이었다. 한글판은 제주대학교 출판부에서 2007년 11월 출간됐다.
편집자의 이례적인 ‘편집후기’
세키는 이 책을 만들며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 ‘찬탁’이니 ‘반탁’이니 하는 낯선 용어와 처음 마주쳤다. 적지 않은 책을 만들며 동아시아 역사에 대해 제법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그로서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하다. ‘최초의 독자’이자 책을 세세하게 마무리하는 편집자는 완성된 책 뒤에 숨어서 일반적으로 표면에 나서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런데 묵묵히 뒷전에서 일하던 고인이 이 책의 말미에 ‘본서의 편집에 관여한 유일한 일본인으로서’라는 편집후기를 실었다. 다소 격정적인 표현도 보이는 이 글은 4·3사건으로 상징되는 전후의 ‘뒤틀림’이 일본 내부의 전후사 기억에서 지워져 있었다는 문제의식에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후기를 부분적으로 인용한다.
식민지지배에서 ‘해방’되었을 사람들이 왜 해방된 조국에서 살지 못하고 식민자의 국가에서, 더구나 또다시 차별 아래 살아가야 했는가. 식민지를 해방시킨 ‘해방군’은 왜 식민지지배의 동조자와 결탁하여 해방된 사람들을 살육한 것인가. 전후의 ‘뒤틀림’을 말한다면 일본의 전후 내부가 아니라 바로 이런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틈새에서 지적됐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점령정책은 한편으로는 ‘해방자’ ‘민주주의 교사’로서 행동하고 다른 편으로는 ‘빨갱이 사냥’의 용서없는 살육자로서 행동했다. 같은 미군의 점령통치 하에 있으면서도 일본과 남한에 가해진 미국 폭력의 치우침은 오키나와를 사이에 두고 언뜻 보기에 극단적인 콘트라스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친일파’와 ‘전범’이 재판의 장에서 함께 복권하고 미국의 파트너로서 전후체제를 형성하여, 미국이 전수해주었을 민주주의는 ‘반공’이라는 냉전의 틀 속에 봉쇄되어 버린다. 식민지의 해방자는 해방된 백성이 아니라, 식민지지배자와 그 협력자와 결탁하여 냉전 하의 새로운 지배구조를 재편성한다. 해방자가 ‘해방’한 것은 억압받아온 사람들이 아닌 억압해온 사람들이었다는 아이러니, 이런 역설과 아이러니가 현해탄을 낀 민주주의와 폭력과의 강렬한 콘트라스트의 그늘에서, 동아시아의 전후에 공통되는 구도로서 그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각인해서, 대조적인 두 나라는 전후 그런 전전과 전후를 연결하는 기괴한 연속성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의 전후사 얘기는 이런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기괴한 ‘뒤틀림’의 구조에 대해 거의 침묵해온 것이 아닐까.....1950년대에 일본인은 경제부흥뿐만 아니라 ‘혁명’까지도 자신들 국민국가의 틀 안에 봉쇄해버렸다. 그때 전쟁의 과거는 말할 수 있어도 식민지지배의 기억은 지워 없어지고 동시에 식민지주의로부터 식민지인과 식민자가 함께 해방되는 길도 잃어버렸다.
그 이후 일본국민의 전후사는, 일본열도 4개섬으로 축소되어, 그 ‘역사를 잃어버린 공간’에 새롭게 쓰인 민주화와 경제성장이라는 직선적인 역사 얘기가 되었다. ...
그러나 동아시아의 전후사라는 건, 정말은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지금은 중동, 남·중앙아시아도 그 시야에 넣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사이에 가로놓인 폭력의 편재와, 해방과 억압의 역설과 아이러니를 함께 살아온 ‘우리’(일본과 한반도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민중)의 역사로서 그려져야 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런 역사의 가능성은 제주도에서 봉기한 사람들과 그걸 지지하고 무참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일가친척과 그 기억이 살아 있는 한, 그리고 일본인에게 있어 ‘전후’라는 시대를 내전이 한창인 시대로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억이 살아 있는 한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결코 잃어버린 것은 아니지 않을까.
고인이 두 번째로 원고 보며 울었다는 유학생 조작사건의 기록
세키가 원고를 읽다가 두 번째로 눈물을 흘렸다는 책이 <조국이 버린 사람들>이었다. 이 책의 번역판 출간 작업은 한글판이 나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추진됐다. 조작사건의 피해자, 구원운동에 뛰어들었던 일본 시민, 학자 등이 조작 사건의 진상을 일본 사회에 널리 알려야 한다며 바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번역진이 정해지고 편집위원회도 구성됐다. 번역 작업의 지휘를 맡은 이시자카 고이치 당시 릿쿄대 교수는 명문 출판사인 ‘이와나미서점’과 접촉해 출간을 의뢰했다. 번역 작업이 거의 완료된 시점에서도 이와나미는 검토를 거듭하다가 책을 내기가 어렵다는 뜻을 전해왔다. 나로서는 정확한 배경을 알지 못하니 어설픈 추측을 할 수는 없다. 수요가 별로 없을 것으로 보고 내부적으로는 ‘학술서’로 분류해 정가를 7천엔선으로 잡았더니 구원회 관계자들이 그런 고가의 책을 팔 수 없다고 반발했다거나 한반도 관련 베테랑 편집자나 교열자들이 은퇴해 실무적으로 감당하기 어렵다거나 하는 미확인 얘기들이 들리기는 했다.
그런 상황에서 ‘구원투수’로 등장한 편집자가 세키였다. 세키는 편집을 맡게 된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2018년 1월 도쿄의 한국YMCA홀에서 최승호 감독의 다큐영화 <자백>의 상영회가 열렸다. 그런 모임에 가면 사회자가 유사한 성격의 행사나 출판 관련 소식을 공지하기 마련이다. 세키는 이와나미에서 유학생 관련 사건의 책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을 진작부터 듣고 있어서 상영회 자리에서 당연히 공지가 있을 것으로 여겼는데 언급이 없어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다 자신에게 맡아달라는 요청이 와서 수락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책의 내용에 문제가 있어 이와나미가 포기했던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지만 이와나미 내부의 지인을 통해 그런 이유는 아니었던 것으로 확인했다.
세키가 강력한 의지를 보여 아카시서점의 간부회의에서 바로 출간이 결정됐는데 뜻하지 않게 상층부에서 제동이 걸렸다. 아카시서점은 자이니치를 포함해 인권 분야의 책도 다수 출간하고 있는데 고위층에서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민단 지도부를 공격하는 내용이 있으면 사업에 지장이 생길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세키는 그런 이유라면 편집 일을 그만두겠다고 반발해서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기로 정리됐다. 그후 일사천리로 작업이 진행돼 그해 늦가을 일본어판이 무사히 출간됐다.
출판 편집자 40년에 책 냈다고 꽃다발 받은 것은 처음
세키는 11월24일 열린 오사카의 출판기념회장에서 꽃다발을 전달받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말을 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이제까지 꽂다발을 받은 것은 두 번 있었다. 한번은 헤이본샤에서 퇴직했을 때이고 또 한번은 딸의 결혼식에서였다. 이제 세 번째인데 40년 가까이 편집자를 하면서 책 내고 꽃다발 받은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의 출판 인생이 평탄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우울증에 시달린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한국에서도 논란의 불씨가 됐던 박유하의 <화해를 위해서>를 맡은 것이 화근이 됐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와다 하루키 교수의 소개로 하게 돼 2006년 11월 ‘헤이본샤’에서 번역판을 출간했다. 그후 서경식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들은 것이 우울증의 원인이 된 듯하다.
세키와 인연을 맺은 학자나 연구자는 수없이 많은데 조경희 성공회대 교수도 거기에 포함된다. 조 교수는 대학원생이었던 시절 김석범 김시종의 대담 녹취를 푸는 ‘아르바이트’에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했다가 역시 울면서 정리했다고 한다. 그런 인연이 이어져 김동춘 교수의 <전쟁과 사회>의 일역판 기획에도 참여했다. 이 책은 <조선전쟁의 사회사-피난·점령·학살>이란 제목으로 2008년 ‘헤이본샤’에서 나왔다. 조 교수를 포함해 자이니치 대학원생 5명이 나눠서 일본어로 옮겼는데 이들은 현재 각 분야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세키가 편집자로서 마지막까지 집념을 보인 것은 <김석범평론집>이었다. <김석범평론집 1 문학·언어론>은 그의 손으로 ‘아카시서점’에서 2019년 6월 출간됐으나, <김석범평론집 2 사상·역사론>은 투병을 위해 포기하고 동료 편집자에게 넘겼다. 그가 마무리하지 못한 평론집 2는 올해 7월에 나왔다.
세키의 장례는 8월16일 사이타마현 우라와시의 성당에서 차분하고 장엄한 분위기에서 가톨릭식으로 치러졌다. 고인의 약력에 대한 별도의 소개는 없었고, 젊은 시절부터 출판인으로 교류를 해온 오랜 친구가 우인 대표로서 송별의 말을 했다고 한다. ‘재일한국인양심수동우회’, 국내에서 유학생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했던 ‘포럼 진실과 정의’와 ‘재심변호인단’은 애도의 뜻을 전하기 위해 장례미사에 조화를 보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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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2024.07.02 | 5 | 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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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작활동에 빛이 되신 리영희 선생님! / 박순철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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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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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2024.06.02 | 2 | 16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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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 이상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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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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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2024.06.02 | 1 | 126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