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와 행당동 17번지의 풍경 셋
리영희와 행당동 17번지의 풍경 셋
풍경 하나, 리영희 선생님을 그리는 단상(최상명 / 1984년도 입학)
밀레니엄이 시작되는 해였던 것 같다. 여름날 강원도 원주에 있는 치악산을 찾았다. 구룡사를 지나 야영을 했다. 다음날, 혼자의 산행이라 야영 후 아침 일찍 정상 도전에 나설 수 있었다. 사다리 병창을 오르기 전 세심정까지 4km 남짓 계곡길을 걷게 되었다. 조금은 지루한 코스였다. 그 길에서 리영희 선생님을 만났다. 혼자 산행 중이셨다. 지팡이를 짚은 모습이 조금 낮설었다. 반갑게 인사를 했다. 87년 총학생회 간부였다고 인사를 드렸어도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셨다.
길은 한참을 이어졌기에 사제 간에 대화가 자연스레 이어졌다. 학생운동 시절 리영희 선생님 과목을 수강했다가 F학점을 받은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제법 시험을 잘 쳤다고 생각했는데, F학점의 이유는 출석 미달이었다. 87년은 1년 내내 민주화투쟁으로 한 해를 보낸 해였다. 그해 나는 대한민국의 여느 청년들처럼 민주화운동에 나섰다. 그래서 사실 수업에 들어가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민주화의 국민적 여망과 역사적 사명이 곧 시대정신이었기에 많은 교수님들께서 학생운동 간부들에게 학점을 주시는 관행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당시 민주화운동의 사상적 지주의 한 분이셨던 리영희 선생님으로부터 F학점을 받은 터여서 못내 아쉬웠었다.
내 볼멘 기억이 단초가 되어 시작된 이야기는 이내 이어진 선생님의 대답으로 급선회했다. “최군! 그래 요즘 자네가 이루려 했던 민주주의가 얼마나 성숙되었다고 생각하나?” 순간 당황했다. 사실 밀레니엄 첫해, 나는 20세기의 고루한 역사를 뒤로하고 앞으로 닥칠 미래만을 고민하고 있었다. “제도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성숙도면에서 아직 선진화되기에는 멀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자 선생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민주주의의 제도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우리나라가 아직 선진국은 아니라고? 당신 대답은 다 추상적이고 인지함정에 빠져 있어. 87년 이후 민주화가 되었다고 믿고 민주화 이후의 선진화단계가 다음 성취목표라고 스스로들을 강제하면서 아주 기본적인 것들을 등한시하고 있어. 그래서 IMF도 오고, 재벌과 언론이 헌법 위에 있는데도 민주화되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게지. 그게 다 기본 책무를 하지 않아서 오는 착각이야. 어쩌겠어? 게으르면 고생하는 거지, 학점도 기본적 태도 때문에 F를 준 거야. 서운해 말라.” 몇 마디 말씀에 뒷머리를 맞은 듯한 혼란이 왔다.
그날 선생님과의 동행은 내 인생의 새로운 화두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그후 민주주의, 기본, 인지함정으로부터 탈출하기는 내 학습의 도반(道伴)이 되었다. 선생님이 떠나신 지금, 리영희 선생님 추모사업을 위해 발 벗고 나선 고형권 선배로부터 추모사를 부탁받자 나는 이내 원주 구룡사 계곡이 떠올랐다. 그리고 혹여 내가 그때의 선생님 말씀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님은 여전히 세상의 사표이시다.
풍경 둘, 리영희 선생님을 생각하며(천세익 / 1981년도 입학)
행당동 인문대학을 에워싸고 있는 진달래가 서서히 붉은 빛을 발하던 1981년 4월 어느 날이었다. 어두컴컴한 화장실에서 선배가 건네준 누런 봉투로 감싼 책, 그것은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대학 1학년인 나와 리영희 선생님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상의 은사’라고 그분을 부른다. 선생님으로부터 사상적 세례를 받은 사람이 어찌 하나둘이랴. 나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는 유신체제만이 민족의 살 길이라고 배웠고 믿어왔던 우리들, 81학번을 뿌리부터 흔들었다. 그 이후 진실은 결코 편하게 오지 않으며, 피와 땀을 흘려 얻는 것이라는 소중한 자산을 내 몸 속에 채워나갔다.
대학 시절, 선생님과의 인연은 책을 통해서만 이뤄졌다. 학교를 다닐 때에는 선생님께서 해직교수였고, 복직하셨을 때 나는 군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그분의 말씀과 삶의 흔적을 존경했지만, 동시에 어렵고 두려운 분이었다. 광기가 지배하던 시절, 모두가 동굴 속에 숨어 있을 때 불의와 거짓에 맞서 대항할 용기를 어찌 쉽게 갖겠는가.
90년 후반부터 선생님과의 본격적인 만남은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대학을 정년퇴임 후 산본 아파트로 이사하셨다. 김승수 선배, 심흥식 선배, 예진수 선배, 그리고 친구 창빈, 영묵과 함께 선생님 댁을 3개월에 한번씩 방문했다. 선생님께서는 다른 누구들보다도 후학들을 반겨주셨다. 처음 승용차를 구입하셨다며, 애마를 몰고 운전하는 것이 그리 즐거우시다고 소년 같은 웃음을 짓던 모습이 선하다. 함께 집 뒤편의 수리산에 등산도 하고 막걸리도 즐겼던 건강하신 시절이셨다. 흥에 겨우면 기꺼이 노래도 부르시고, 후배들을 편하게 해주시던 그런 분이었다. 불의 앞에서는 단 한치의 타협도 없이 싸웠지만, 마음이 따뜻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손수 운전하는 차를 타고 비봉저수지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단골 매운탕집에서 해주시던 말씀들을 잊지 못한다.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가시밭길을 걷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미안해하셨다. 자신의 세대에서 굴종과 분단의 역사를 끝내지 못하고 후학들이 고난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선생님은 안타까워하셨다. 선생님은 그런 분이셨다. 어렵고 두렵기만 했던 선생님의 참모습을 보았다.
수습기자 연수에 언론계 선배로서 강의를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선생님은 불편하신 몸에도 불구하고 그 강의는 꼭 해야 된다며, 산본에서 광화문 프레스센터까지 나오셨다. 강의실에서 선생님을 소개했을 때 수습기자들이 모두 일어나 선생님을 박수로 모시자, 어느 자리의 환영보다 기분 좋다며 환하게 웃으셨다. 선생님께서는 후배기자들에게 “저널리스트들이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추구해야 할 단 한가지, 그것은 바로 진실에 대한 충성이다. 다른 모든 것에 타협은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실을 대상으로 한 거래와 타협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 자리에 있던 수습기자들은 대부분 80년 후반에 태어난 세대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리영희’ 석자는 시대의 양심과 지식인을 대표하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20년을 다닌 회사를 떠나기로 마음을 정한 후,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선생님은 ‘어려운 상황인 것은 알지만 조금 더 생각한 후 결정하는 것이 어떠하겠나. 하지만 세익군이 마음을 정했다면, 나는 그 선택을 믿는다’고 격려해주셨다. 선생님의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뵙지 못할 것 같다고 인사드렸다. 그런데 그해 12월 4일, 후배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리영희 선생님 부음을 전해주었다. 하늘이 노래진다는 표현이 글 속에서만 존재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이제 정말 다시는 선생님을 뵐 수가 없구나.
선생님을 기리는 말은 많다. 그 모두가 옳다. ‘사상의 은사’ ‘마지막 지식인’ ‘영원한 기자’ 등이 우리 시대에 남긴 그분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내가 아는 리영희 선생님은 그 모든 것을 넘는 ‘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오직 양심에 따라 행동하며 거짓과 타협하지 않고 진실만에 복무하는 것. 그것이 지금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던져주는 선생님의 마지막 말씀일 것이다.
풍경 셋, 운동권 학생에서 리영희 교수님 조교로 만남(윤창빈 / 1981년 입학)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1981년 봄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81학번으로 입학한 3월 어느날 선배들이 추천한 <전환시대의 논리>를 통해서였다. 그 당시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였던 선생님의 저서들은 나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큰 사상적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
5공 전두환 군부독재 시대였던 당시 리영희 선생님은 1980년 복직되었으나 그해 여름 다시 해직되었다가 1984년 가을에 복직되었다. 한양대 복직 후 책으로만 대했던 선생님을 찾아가 선생님의 조교를 하고 싶다는 간곡한 말씀을 드렸고 1985년부터 대학원생으로 연구실에서 1989년까지 같이 지내게 되었다. 나는 그후 1989년부터 34년을 언론진흥재단에서 직장 생활을 하였고 작년에 정년퇴직했다.
생각해보면 연구실은 그 시대를 고민하고 탄압받던 지식인들의 사랑방이었다. 조교생활을 하는 사회과학대 연구실의 냉장고에는 항상 소주와 오징어가 있었다. 선생은 조선일보 외신부장 시절에도 수통에 독한 술을 담아 마셨을 정도로 애주가였다. 박정희 유신시절 그 술 때문에 위가 망가졌으나 반공법으로 구속 후 감방에서 병이 나았다고 유신에 감사하다고 농담하곤 하셨다. 경기도 산본 아파트에 계실 때 제자들이 가면 저수지 근처 매운탕집에서 막걸리 한잔 하시고 소년 같은 미소로 좋아하셨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인사동 ‘평화만들기’ 카페, 명동 백병원 앞 죽집 ‘죽향’ 등도 선생님과 추억이 서린 장소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연희동 자제 집 마당에서 제자들이 막걸리를 사서 한잔 할 때도 한 모금 드시고 싶다고 하신 아픈 기억이 있다.
1989년 봄날 한겨레신문 방북취재 기획사건이 발생했다. 안기부의 강제구속으로 수감되신 선생님으로 인해 한겨레신문사와 한양대는 긴박한 상황이 되었다. 당시 조교였던 본인에게 안기부 수사담당자가 학교 앞 다방에서 보자고 연락이 왔다. 연구실의 방문을 열어달라고 협박하고 그게 통하지 않자 전화 연결을 해준다며 회유하기 시작했다. 취조실에 갇힌 상황인 선생님의 뜻을 따를 수 없고 한밤중에 도끼로 부수고 들어간다면 나도 할 수 없다고 강하게 거부해 그들은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한양대 학생들은 언론노조와 함께 한겨레 편집국을 방문해서 선생을 구속한 공안정국을 규탄하고 의견광고를 내는 등 선생님의 석방을 촉구했다. 반년 후 석방된 선생님은 학교 앞 식당, 여러 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안기부 직원이 “선생님 조교 하나는 참 잘 두었더군요”라고 했다는 말을 전하며 칭찬해주시던 기억이 새롭다..
선생님은 강원도 원주에 많은 지인이 있었는데 장일순 선생, 박경리 선생, 지학순 주교, 김지하 시인 등을 만나러 원주에 다니시곤 했다. 특히 장일순 선생은 리영희 선생님이 특별히 존경하는 분으로, 한 인터뷰에서 “서양학문의 합리주의적 사고의 틀과 환경 속에서 나 또한 공부하고 가르치고 사회활동하도 하곤 했는데 종종 벽에 부딪친단 말이예요. 그럴 때 원주에 내려가면 그런 벽이라든가 인위적인 방법의 한계 등이 동양적 사상의 지혜로써 극복될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말이죠.”(전표열 리영희 대담, 「밖에 있으면서 안에 있던 분」,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엮음, 녹색평론사)라고 언급한 바있다. 나 또한 원주가 고향이어서 모시고 갈 기회가 있었는데 고향이 평양인 부친과 학창시절의 추억과 실향의 아픔에 대해 장시간 대화하셨던 장면이 생각난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경의선 개통 시 학창시절 고향과 서울로 통학하던 철로라며 아이처럼 좋아하셨던 모습도 떠오른다..
자유인 리영희.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20대 청년이었던 우린 꿈과 변혁을 향한 신념이 있었고 그 중심에 리영희 선생님이 함께 하셨다. 그의 저서를 가지고 밤새 토론했던, 그 치열했던 젊은 날의 뜨거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에게 자유인의 길을 가라고 한 스승의 모습이 그리운 시절이다.
(윤창빈 모으고 정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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