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 이상원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이상원 / 대구경북독립언론 뉴스민 편집국장
“‘대구사회(비평)’의 발전 무궁하여라. 지역주의의 망존을 타파함에 앞장서서 영·호남 화합과 정다움으로 민주적 성세를 이루면 남북 민족 합심하여 마침내 통일을 이루리라.” 2003년 《대구사회비평》 신년 호는 제일 앞단을 리영희 선생 친필 서신으로 시작했다.
복사본으로 남은 서신으로부터
지난 5월 17일 리영희재단의 갑작스러운 부탁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시작했다. 리영희 선생이《대구사회비평》에 위와 같이 써 보낸 서신의 복사본 사진이다. 재단은 서신에서 언급되는 《대구사회》라는 잡지가 여전히 발행되는지, 당시 어떤 연유로 리영희 선생이 서신을 보낸 건지를 포함한 사연을 알아봐 줄 수 있느냐고 부탁해 왔다.
선생이 대구와 직간접적으로 맺은 인연은 개인적으로도 흥미로운 정보인지라 흔쾌히 알아보겠노라고 했다. 일단 처음 들어보는《대구사회》라는 잡지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게 급선무였다. 짧지 않은 기간 지역에서 기자로 일하면서도 들어보지 못한 제호였기에, 이미 오래전에 발행을 멈춘 게 아닐지 생각됐다.
인터넷에서부터 탐문을 시작했다. 역시 정보의 바다 인터넷이다. 간단하게 검색을 해보니, 《대구사회비평》이라는 유사한 이름의 잡지가 과거에 대구에서 발행됐다는 정보가 확인됐다. 개인적으로 인연이 없진 않은 김용락 시인이 발행인이었다는 정보와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정보도 확인됐다. ‘이거겠구나’
김용락 시인에게 연락을 취해보니 맞단다. 리영희 선생의 서신을 2003년 또는 2004년 신년 호에 실은 적이 있다고 했다. 김 시인은 오래된 자료이니만큼 서고를 뒤져 찾아본 후 연락을 하겠노라고 했다. 기쁜 소식을 재단측에 전하고, 시인의 연락을 기다렸다.
대구사회비평과 김용락 그리고 리영희
그로부터 닷새 후 5월 22일, 대구 수성구의 한 카페에서 시인을 만났다. 《대구사회비평》 2003년 신년 호를 들고 온 시인은 리영희 선생과 인연뿐 아니라《대구사회비평》을 발행한 이유, 언론의 중요성, 선배 언론인으로서 독립언론의 길을 가는 후배 기자에 대한 애정 어린 조언도 덧붙여 풀어놨다.
《대구사회비평》은 지역 최초의 인문 사회 비평지를 표방하며 2002년 창간했다. 시인이 발행인을 맡아 주도했고, 지역사회의 진보적 지식인들을 편집위원으로 묶어내 지면을 내줬다. 시인은 1984년 창작과비평사 <마침내 시인이여>를 통해 등단했고, 지역지 기자로 일한 언론이기도 했다. 시인은《대구사회비평》을 통해 지역 사회 변혁 운동의 밀알이 되길 바랐다. 그는 “창작과비평사 출신 시인으로 백낙청 선생의 초기 비평에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 사회 변혁의 두 가지 기제로 대학과 언론이 제시됐고, 변혁의 기제로서 언론에 관심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지금의 개념으로 풀어내면 시인은 일종의 ‘독립언론’을 꿈꿨던 셈이다. 그는《대구사회비평》을 통해 지역 사회의 주류적 언론 매체가 다루지 않는 이야길 담아냈다. 창간 직후에는 꽤 많은 지역 인사들이 연간 구독을 하며 재정적 뒷배가 되어 주었지만, 독립언론의 길이란 건 지금이나 그때나 어렵긴 매한가지여서, 창간 4년 만에 발행을 멈췄다. 2002년 격월간지로 문을 열었지만 2004년 계간지로 전환했고, 2005년엔 이조차 어려워 더 발행하지 않게 된 거다.
시인은 “주요 매체를 빼면 언론이 없었고 그래서 만들었지만 잘 안됐다. 언론도 결국 돈이 필요한데, 소수·좌파처럼 찍혀서 광고는 되지도 않았고 후원도 잘 안됐다. 환경 자체가 안된 거다. 멤버가 좋아서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오래 못 간 이유는 재정 문제고, 상품으로서 가치를 시장에서 인정받지 못했다”고 평했다.
길게 이어지진 못했지만, 지역사회에선 꽤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켰다. 창간호에는 여유가 없는 형편에도 거금을 들여 시민 인식 조사를 실시했다. 인식조사에서 대구시 행정에 대한 주민 만족도를 분석하는가 하면, 영남대 김태일 교수, 계명대 김한규 교수, 경북대 이강은 교수 등을 초청한 특별 좌담을 통해 2002년을 맞은 대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도 깊이 있게 다뤘다.
지역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은 지역 일간지에도 꽤 신선한 충격이었는지《매일신문》이나《영남일보》 같은 지역 주요 일간지는 창간 소식을 다룰 뿐 아니라 이후에 2호, 3호 이어지는 대구사회비평의 주요 내용을 요약해 소개했다.
《한겨레》는 시인을 직접 인터뷰한 기사까지 내놨다.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시인은 “흑인이 자신을 짓밟은 백인 문화를 동경하듯 중앙에 밀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지역이 정신적으로까지 중앙에 투항해 버리는 현실이 안타까워서”《대구사회비평》 창간에 나섰다며, “대구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어 구조적, 제도적, 문화적 문제를 짚어내고 그 대안을 제시하려 한다”라고 말했다.
지역에서 지역 문제에 천착한 고민을 담아내는《대구사회비평》에 리영희 선생을 포함한 사회의 저명한 지식인들도 응원을 보냈다. 2003년 신년 호에 실린 리영희 선생의 서신을 보면, 선생은 지역에서 어렵게 시작한 작은 언론의 발전을 기원하면서, 고질적인 지역주의 타파의 선봉장이 되길 주문했다.
리영희 선생이 2003년 신년 호에 서신으로《대구사회비평》의 평을 남긴 건 선생과 시인 간의 개인적 인연도 영향을 미쳤다. 시인 역시 선생을 존경하는 언론인으로 크고 작은 인연을 이어왔다. 시인이 기억하는 선생과 첫 대면은 1983년 10월의 어느 날 우연히 이뤄졌다. 그해 10월 13일 시인은 군을 전역했고, 그해 겨울 창작과비평사에서 발행하는 <마침내 시인이여>에 자신의 시가 발표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시인은 전역 후 며칠 만에 인사를 하기 위해 서울 마포경찰서 뒤에 있던 창작과비평사 사무실을 찾았다.
“사무실에 들어서는데 어떤 세 어른이 의자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한 분은 백낙청 선생이었다. 문학 하는 사람으로서 사진으로 많이 본 그 얼굴 그대로였고, 다른 한 분이 리영희 선생이었다. ‘이번에 새로 앤솔로지(마침내 시인이여)에 시를 싣게 된 김용락입니다’라고 인사드리고 ‘대구에서 올라왔다’고 소개를 해드리니 시꺼멓게 턱이 각진 얼굴의 리영희 선생이 ‘열심히 하세요’ 그랬던 기억이 있다.”
시인은 이후 지역에서도 리영희 선생과 인연을 이어가려 했다. 1994년 시인이 계명대학교 대학원 학생회장을 맡고 있을 때는 ‘한반도와 핵’이라는 심포지엄을 기획해 선생을 초청하기도 했고,《대구사회비평》을 창간한 이후인 2003년 10월에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핵 문제를 주제로 한 강연으로 선생을 초청한 바 있다. 2003년 10월의 강연 내용은《대구사회비평》2003년 9·10월호에 실었다.
“《대구사회비평》을 통해 일종의 거점 역할을 하고 싶었던 게 있다. 계몽의 장인 셈이다. 리영희 선생을 비롯해 당대 여러 지식인을 대구작가회의와 함께 초청했다. 지금은 인터넷이 워낙 발달해 있어서 공유하고 보고 하는 게 쉽지만, 당시는 그렇지 못했다. 이렇게 강연을 해서 사람들이 모여서 공유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리영희 선생은 그때 건강 문제로 사회활동도 중단한 상태였는데, 지팡이 짚고 열강을 해주셨다. 복도까지 300명가량이 와서 강연을 듣고 질문하고 하는 모습들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앞서간 발자국들
사실,《대구사회비평》의 지향은 내가 몸담은《뉴스민》의 지향과도 다르지 않다. 대구경북 독립언론으로서《뉴스민》역시 지역의 주류적 시각을 벗어난 이야기를 담아내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이들의 거점이길 희망한다.《대구사회비평》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시인은 다른 무엇보다 지속 가능한 독립언론의 길을 가기 위해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지금은《뉴스민》을 포함해서 다양한 독립언론이 등장해서 잘 운영되고 있으니까, 과거보다 오히려 언론환경은 나아진 게 아닐지 생각은 한다. 하지만《대구사회비평》을 할 때도 그랬지만 중요한 건 재정적인 문제다. 인천의 경우엔《황해문화》라는 잡지가 오랫동안 잘 운영되고 있는데, 지용택 이사장이 만든 새얼문화재단 지원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지역은 그런 고민을 하는 어른이 많지 않아서, 이 기자를 포함한 《뉴스민》기자들의 희생 위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걸 안다. 대단하다고 생각한다”고 후배의 어려움을 헤아리고 힘을 북돋웠다.
시인과 만난 후 돌아가는 길에 문득 리영희 선생이 서재에 걸어뒀다는 시구 한 편이 떠올랐다. ‘눈 덮인 들판 한 가운데를 걸을 땐(답설야중거), 발걸음을 어지럽게 걷지마라(불수호란행).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이(금일아행적) 뒤따르는 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수락 후인정).’
희미하게 찍힌 앞서간 이들의 발자국을 더듬고, 더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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