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스승과 26년 /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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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4-12-04 06:19
조회
347

리영희 스승과 26



 


 


 


 


김연수 사진가,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겸임교수


스승 리영희 선생과의 만남은 내 삶의 이정표였다. 리영희란 이름은 70~80년대 당시 의식 있는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신군부의 탄압에 수감생활을 오래 하셨기 때문에 선생의 강의를 직접 듣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다. 그런 면에서 난 운이 좋은 사람이다. 한양대학교 사회대학 신문방송학과 학부와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에서 선생님의 강의 3과목을 들었고, 한겨레신문사에서 모시는 행운을 누렸다. 리영희 선생이 한양대와 한겨레신문을 떠나신 이후에는 산본의 아파트를 종종 찾아, 반월 호수 민물고기집에서 메기매운탕을 맛보는 호사도 누렸다. 2010년 12월 눈발이 휘날리던 날 스승님을 우리 곁에서 보낸 지도 14년의 세월이 흘렀다. 늘 맘속에 자리 잡고 있는 스승님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본다.


리영희선생이 2004년 문화일보 갤러리에서 열린 김연수기자의 자연사랑사진전에 참석 격려하고 있다. (출처: 김연수 제공)


한양대에서 첫만남


1984년 7월 리영희 교수는 한양대 사회대 신문방송학과에 복직했다. 난 4학년 2학기에 졸업 학점은 이미 다 확보하고 있었지만, 리영희 교수의 강의를 직접 듣고 싶어서 ‘평론’ 강좌를 신청해 꿈에 그리던 첫 대면을 이뤘다. 세월이 지나 기억이 희미하지만, 당시 교수님은 건강이 완전하게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휴강도 없이 강의시간을 꼭 채우셨다. 정치현실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기대했는데, 수업 중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정치 현안이나, 국내 문제는 언급을 자제하셨다. 단 국제 정세와 특히 동북아의 군사대결에는 아주 냉철한 시각으로 비판하며, 우리나라의 미래를 걱정하셨다. 평론과목은 신문의 칼럼이나 사설을 분석하며, 어떤 주제를 어떤 시각으로 어떻게 기술 하는지에 주안점을 두었고, 교수님과 친분이 두터운 소설가 이호철 선생을 모셔와 글쓰기에 대한 특강도 들었다. 교수님은 성적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처리 하셨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아주 짜다는 평가를 받았다. 난 다행히 A 학점을 받았다. 내가 졸업한 후인 1985년 교수님은 23년 만에 출국 허가가 나와 일본 도쿄대와 독일 하이델베르크대에서 강의와 연구를 하셨다. 1987년에는 미국 버클리대학 아시아학과에서 한민족 현대정치운동사를 강의했다. 나는 그야말로 짧은 틈새에 운 좋게 1학기 1과목을 수강한 셈이다.


한겨레신문사에서 다시 만난 스승님


한양대 졸업 후, 1985년 5월 나는 서울신문 공채 26기로 신문사에 들어갔고, 리영희 교수는 1985년부터 1988년 3월까지 일본, 독일, 미국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셨다. 1988년 2월 나는 민주화 열기로 탄생한 국민주 형식의 한겨레신문사로 경력공채 시험을 거쳐 입사했고, 미국 버클리대에서 강의 중이던 스승님을 기다렸다. 그해 5월 스승님은 한겨레신문사 이사 겸 논설고문으로, 조선일보를 떠난 이후에 언론계에 돌아왔다. 1988년 5월 15일 창간 때부터 가로쓰기를 시작한 한겨레신문의 1면 상단에 리영희 선생의 ‘한겨레논단’ 칼럼을 게재한 날은 한겨레신문의 가판 부수가 늘어났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데이터를 제시하고, 논리가 정연하며, 간략하면서도 압축적인 선생의 글은 몇 번을 읽어도 명쾌하고 또 읽고 싶다.


나는 당시 편집국 사진부에서 수석기자로 근무하며 사진부장이 공석이라 사진 데스크를 겸직했다. 사진부 데스크 자격으로 매일 열리는 편집위원장 주재 편집회의에 들어갔고, 회사의 주요 회의에 참석했다. 리영희 스승님이 회사에 상주하기를 기대했으나, 원고만 보내올 뿐, 회사는 거의 오지 않으셨다. 그 당시 한겨레신문사는 중고 윤전기를 사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공장지대에서 시작했다. 2층 건물 중 2층만 통으로 임대해 사용했는데, 아침에 출근하면 책상 위에 1층 공장에서 날아온 쇳가루가 뽀얗게 쌓여있었다. 게다가 사무실 장소가 협소해 직원들이 상주 할 자리가 없었다. 화장실을 보려면 줄을 서야 했을 정도로 열악한 시절이라, 선생님은 회사에 부담을 주기 싫어서 자주 오시지 않은 것이리라.


한겨레신문 방북취재로 또다시 옥고를


1988년 재야 원로들의 남북대화 촉구 선언 이후, 19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가 북한 조평통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문 목사는 유원호, 재일교포 정경모 선생과 함께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갖고 ‘자주적 평화통일과 관련한 9개 항’을 합의하고 발표했다. 한겨레신문을 비롯 모든 신문에 대서 특필되고 국내 정가는 발칵 뒤집혔다. 일본을 통해 귀국한 문 목사와 유원호씨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일사천리 구속됐다. 이 무렵 나는 평양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문익환 목사를 취재하러 도쿄로 날아갔다. 문 목사와 정경모 선생은 평양방문의 성과와 내용을 기자회견 했다. 비공식 자리로 한겨레신문 기자만 유일하게 만나 주었던 문 목사 일행과 호텔에서 날밤을 보내며 북한 방문 이야기를 들었다. 김일성 주석에게 받아온 알코올도수 70도의 황구렁이 술을 김종철 논설위원, 오귀환 사회부 기자, 이주익 주일 통신원, 그리고 내가 다 비웠다. 취중이었지만, 당시 문목사께서 “남한은 좀 더 평등해지고, 북한은 좀 더 자유로와지면, 그것이 통일이야!” 하신 말씀은 지금도 귀에 선하다.


기억이 희미한데 이 무렵 한겨레신문은 창간 1주년을 앞두고 방북취재 계획을 했다. 방북 취재에 대한 국내 기관의 제재를 예상, 북한 입국 비자를 받으면 곧바로 취재를 진행할 예정으로 추진 한 것 같다. 누가 방북취재 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 했는데, 사진기자로 나도 포함될 수 있다며 문 목사 취재 후 일본서 대기하라는 회사의 지침을 받았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해서 문 목사 귀국과 동시에 서울로 돌아왔다.


1989년 4월 당시 안기부에 연행, 중부서에서 구속수감절차를 받는 리영희선생 (출처: 김연수 제공)


1988년 4월 12일 임의동행식으로 안기부에 불법 연행된 리영희 선생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 됐다. 나는 스승님의 모습을 보기 위해 아침부터 카메라를 분리해 보이지 않게 하고 서울 중부경찰서로 달려갔다. 남산 안기부에 연행돼 구속,기소하려면, 가장 가까운 중부경찰서에서 수감 절차를 반드시 받는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중부경찰서 구치감에 취재 온 기자는 오로지 나 한명이었다. 다른 일로 온 것처럼 위장하고 인상이 비교적 온화한 경찰과 대화를 나누며 선생님이 오기를 기다렸다. 몇 시간이 지난 후 리영희 교수님은 건장한 사내들이 팔짱을 끼고 중부서 구치감으로 들어왔다. 난 잽싸게 카메라에 렌즈를 끼고 스승님을 부르며 사진을 몇 컷 찍었다. 스승님은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한 표정으로 지쳐있었다. 카메라에 놀란 수사관들이 나를 제지 했고, 스승님은 유치장을 거치는 절차를 짤막하게 받고는 기관원들이 다시 호송해 갔다. 이른바 실체도 없는 한겨레 방북취재 사건을 만들고 공안정국을 다시 강화하려는 노태우 정권의 술책이 시작된 것이다.


한겨레방북취재사건으로 1989공판 서울중앙지방법원 대법정(서소문시절) (출처: 김연수 제공)


그 후 리영희 스승님의 얼굴을 보려면 구치소에서 법정에 출두하는 짧은 순간밖에 없었다. 나는 당시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인 서울지법 대법정의 피고인 출입문에 새벽부터 사다리를 놓고 기다렸다. 대부분 시국사건은 독재정권에서 뉴스화를 싫어하기 때문에 시국사범은 언론사 기자들이 촬영을 못하도록 온갖 방해를 했다. 호송차를 출입문에 바짝대고 그옆에는 전경들이 에워싸기 때문에 법정에 출두하는 피고인의 사진을 찍으려면 사다리를 설치하고 전경들 틈새로 통과하는 1-2초간의 시간적 여유밖에 없다. 손목에 포승줄을 묶인 채 호송차에서 내린 스승님은 스승님을 부르는 나의 절규에 환한 미소로 화답하셨지만, 죄수복을 입은 스승님의 모습을 담으려니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서울중앙지법이 서소문에서 서초동으로 옮기고 리영희 선생의 공판은 계속됐다.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법정의 리영희 선생 공판 사진을 한겨레신문사 김선규 기자가 찍었다가 법정사진을 무단으로 촬영 했다는 혐의로 또다른 언론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전례없는 언론탄압에 국내외 항의가 빗발치자 1심 선고후, 160일 만에 리영희 선생은 석방되었다.


화갑기념문집 헌정식에서 (출처: 김연수 제공)


그해 12월 리영희 선생 회갑을 맞아 언론계와 학계에서 화갑기념문집(1989 두레)을 헌정했다. 헌정식에는 송건호 한겨레신문사 사장, 임재경 주필 겸 부사장 등 언론계는 물론 한승헌 변호사, 백낙청 교수, 고은 시인 등 재야 원로들이 많이 참석했다. 하지만 정작 몸담고 있는 한양대 신방과와 언론학회 사람들은 눈에 많이 띠질 않아 아쉬웠다.


언론정보대학원에서 다시 만난 스승님


1995년 나는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에 입학했다. 서울 한복판 프레지던트 호텔에서 수업을 받는 이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한양대를 정년 퇴직한 리영희 선생이 언론정보대학원에 출강한다는 정보를 이강수 원장으로부터 입수하고, 스승님을 다시 만난다는 설렘으로 지원했다. 대학원에서 스승님에게 신문영어와 언론사상 두 과목을 들었다. 스승님의 표정은 학부 때 보다 여유롭고, 수업 시간에 지나간 인생 역정도 간간이 전해 주셨다.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야간대학원이라 학부 때와는 달리 학점도 비교적 후하게 주셨다. 난 학부 때와 마찬가지로 스승님 과목은 모두 A학점을 받았다. 1996년 스승님을 모시고 일부 대학원생들과 같이 한 경주 졸업여행에서 선생님의 진면목을 발견했다. 적당히 약주도 드셨고, 공옥진 여사의 ‘병신춤’을 리영희 버전으로 선보였으며, 여학생과 맞잡은 블루스도 수준급이었다. 불의에 항거하는 강인 함으로 평생 책만 읽으신 줄 알았는데, 놀 때는 또 확실하게 놀 수 있는 감성이 살아있는 분이었다.


리영희선생이 1997년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원생들과 졸업여행에서 공옥진여사의 병신춤을 선보이고 있다. (출처: 김연수 제공)


“나 이제 운전면허증도 새로 마련했지. 요즘이 가장 즐겁고 행복해! 평생 고생한 아내를 데리고 자동차 여행을 살살 하고 있어! 아내와 아내 친구들 모시고 난 운전하며, 여자들 수다 떠는 얘기만 들어도 행복해!” 평범한 시민이 다 누리고 있는 삶을 스승님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다가 뒤늦게 발견한 셈이다.


1996년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경주 졸업여행에서 리영희 교수님이 김연수 등 원생들과 저녁식사후 기념촬영 (출처: 김연수 제공)


제자를 격려하는 따듯한 은사님


2000년 초 신문사 간부가 되면서 늘 쫓기는 일과로 스승님을 뵙는 일이 점점 소원해 졌다. 특히 스승님이 성동구 화양동에서 경기도 산본으로 이사 하신 후에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연락을 잊고 살았다. 그런데 스승님은 달랐다. 어쩌다 내가 상을 받으면 어떻게 소식을 아셨는지 여지없이 축하전보가 날라왔다. 서울에서 가진 사진전에도 친히 찾아주셔서 격려와 용기를 복돋아 주셨다. 나는 내 졸저가 출간할 때마다 경기도 산본 수리산 자락의 선생님 댁을 찾았다. 누구보다도 선생님께 자랑하고 싶었다. 아파트 현관에 화양동 시절 달았던 문패를 고스란히 달은 점도 기억나지만, 갈 때마다 인근의 반월저수지로 데려가 민물매운탕을 사 주셨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세번째 저서를 드리러 간 2008년 스승님은 건강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오랜 구금생활의 후유증이 본격화 된 것이다. “ 출간을 축하하네만, 난 이제 책 읽거나 글쓰기가 힘들어! 여기 있는 장서도 내겐 이제 무용지물이야!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다 가져가게나! 이따금 불경이나 들여다보지만, 그도 힘들어!” 서울로 운전하며 오는 길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 어떤 탄압에도 굽히지 않던 스승님도 세월에는 힘이 없었다. 차가운 감방에서 고생만 덜 했어도 지금보다는 건강하실 텐데…



생전의 마지막 조우


백두산 에서 바라본 북녘. 백두대간이 겹겹이 펼쳐진 모습은 새벽에만 보인다. (출처: 김연수 제공)


2010년 스승님은 지병이 악화해 병원에 입원하셨다. 나는 스승님께 기운을 넣어 드리고 싶어 백두산에서 북녘의 백두대간이 겹겹이 이어지는 사진을 크게 프린트해서 액자에 담아 갖다 드렸다. 스승님의 고향인 삭주가 그 너머에 있으니 고향을 바라보며 기운을 얻으시라고…. 그 사진은 백두산 정상에서 먼동이 트기 전에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해가 솟으면 광선이 위에서 내려 산맥이 겹겹이 보이는 현상이 눈에 보이지도 않으며 사진으로 담을 수 없다. 눈 쌓인 백두산 정상에서 비박하며 새벽에 담은 사진이라 스승님께 꼭 선사하고 싶었다. 그러나 스승님은 병세가 일시 호전됐다가 재차 녹색병원에 입원하셨다. 이번이 마지막이란 예감이 들었다. 2010년 11월 14일 마침 미국에서 일시 입국한 임희순(전 AFP 한국주재기자, 한겨레신문 사진부장) 선배와 녹색병원을 찾았다. 말씀도 못하시는 스승님은 나와 임선배를 보시고 눈시울 붉히셨다. 의식도 제대로 없던 분이 아는 체를 하신다고 사모님도 놀라워 하셨다. 임희순 선배는 스승님의 마지막 모습 같다며 사진을 몇 컷 찍으시고 메모리카드를 내게 건네줬다. 그로부터 약 3주일 후인 12월 5일 스승님은 우리 곁을 영영 떠나셨다.


하늘도 슬퍼한 영결식


2010년 11.14일 돌아가시기 3주전 서울 녹색병원에 입원당시 모습을 임희순 전 한겨레신문 사진부장이 찍음 (출처: 김연수 제공)


2010년 12월 9일 민주사회장으로 치뤄진 스승님 영결식. 한겨레신문사 임직원, 재야민주 인사, 한양대 신방과 제자 등 많은 시민들이 선생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지성으로 세상을 바로 잡는 길잡이이자, 거목이 쓰러지자 하늘도 슬퍼했다. 선생님이 운구 행렬이 연세대 장례식장을 나오자 갑자기 눈발이 몰아쳤다. 늦봄 문익환 목사의 운구 행열이 서울 시청 앞을 지날 때도 눈발이 몰아쳤다. 나는 그때 하루를 휴가내고 장지인 광주 5.18민주묘지에 따라가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된다. 위대한 스승이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분의 육신만 떠난 것이다. 리영희 선생이 평생 추구한 진실은 영원하며, 선생의 헌신은 후대에 자리 잡아 대한민국이 올곧게 유지하는 주춧돌이 되리라 생각한다. 선생의 제자인 필자도 부끄럼 없는 제자가 되기 위해 늘 정진하고 첫 만남의 초심을 간직하고 있다.


2010년 12월 9일 고 리영희선생 민주사회장 영결식에서 백낙청,고은 임재경등 조문객들이 헌화하고 있다.(출처: 김연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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