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카이> 2006년 12월호 야마구치 이즈미의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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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4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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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인터뷰관련 추가/



리영희 재단 뉴스레터를 위해


<세카이> 2006년 12월호 게재 ‘회견기’에 붙여


 


야마구치 이즈미


 


선생님을 소개해 주세요


작가. 남성. 1955년 일본 혼슈 중앙부 나가노현에서 태어났습니다. 도쿄예술대학 미술학부에 재학 중이던 21살 때 소설가로 문단에 데뷔. 이후 지금까지 소설 12권, 평론 11권에 이르는 저서 외에 지난해에는 자작한 그림(회화)과 시적 단장(詩的 斷章)으로 구성된 일본비판 화문집(畵文集) <죽음의 나라에서도 아직 말할 수 있는 ‘희망’은 있는가?> 3개 국어판(오로라 자유아틀리에)도 간행했습니다. 이 ‘그림’과 ‘말’은 첫 대규모 전시회가 2023년 일본 도치기현의 아시카가 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될 예정입니다.


나는 일본인으로서 ‘근대’ 이후 제2차 대전 패배를 겪고도 여전히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천황제를 폐지하지 못했으며, 거짓 ‘전후’(戰後)의 실체는 미국의 꼴사나운 속국으로, 그 세계지배에 가담하고 있는 일본을 일관되게 계속 비판해 왔습니다. 또 일본의 ‘문단’, ‘논단’의 타협적인 기만에 대해서도 근원적인 직언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나는 일본의 제도권 내부에서는 당연히 ‘고립’되어 있지만, 진정한 연대의 회로를, 마음이 있는 일본인과, 한층 더 오키나와,아이누 민족, 재일(자이니치=在日), 한국·조선, 대만·중국 등, 동아시아권의 사람들을 시작으로 하는, 광범한 세계에 찾고 싶다고 바라고 있습니다.


내가 자기형성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동시대의 정치적 사건은 한국 민주화운동이었습니다. 이제까지 한국· "재일" 에 많은 벗들이 있으며, 특히 광주 민중미술 출신의 화가들-홍성담·이상호·전정호 등과 친교를 맺어 왔습니다.


 


리영희 선생과의 인연을 편하게 소개해 주세요


2000년 가을, 일찍이 외경(畏敬)하던 서승 리쓰메이칸대학 교수(당시)로부터 갑작스레 전화를 받았고, “내일, 리영희 선생이 오십니다. 소개할 테니 오세요”라는 말과 함께 시간과 도쿄도내의 장소를 지정받았습니다. 급한 권유였으나 서승씨가 권한 것이어서 어쨌거나 따르기로 하고 만난 분이, 바로 <반세기의 신화-휴전선의 북과 남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다> 일본어판(일본어판 제목 <조선반도의 새 밀레니엄> 서승 감역, 미나미 히로에·히로세 다카코 역/ 2000년, 사회평론사)의 간행을 기회로 일본을 방문하신 리영희 선생입니다. 출판기념회 전의 수십분간, 선생과 둘이서 대좌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얻었습니다.


초대면이었음에도 풍성한 백발 아래 눈빛(안광)이 형형했던 당시 71세의 대사상가는 나를 정중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서, 외람됨을 무릅쓰고 적자면, 나 자신의 문제의식에도 많이 공감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는 고저(高著)를 받았을 뿐이었으나 집에 돌아온 뒤 서둘러 읽기 시작한 그 <조선반도의 새 밀레니엄>은 모든 페이지에 차고 넘치는 선견성·예언성이, 그리고 저자 자신의 실제 삶의 고통과 소망으로 뒷받침된 드문 명저로, 내가 40대에 읽은 손꼽는 책이 됐습니다. 생애에 몇 권 만나기 어려운 저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리영희 선생에 관해 내가 쓴 첫 글은 그때의 회견 내용을 기록하고, <조선반도의 새 밀레니엄>을 논한 ‘역사에서의 참된 희망이란 무엇인가?’(계간 <비판정신> 제6호/ 2000년, 오로라 자유아틀리에 발간)였습니다.


그것을 게재한 그 잡지와 다른 졸저 2권을 보낸 뒤 2005년 3월, 리영희 선생으로부터 생각지도 않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순간 돌연 내 속에서 “리영희 선생을 만나기 위해 한국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곧 바로 팩시밀리로 그 생각을 전하자, 선생으로부터 나와 동행을 희망한 출판사 오로라 자유아틀리에의 대표 엔도 교코(遠藤京子)씨를 위해 댁 근처의 호텔을 수배해 주시겠다는 뜻을 담은 답장이 왔습니다.


이것이 「“그러니까 일본이 좋은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 한국의 사상가 리영희와의 대화」(<세카이> 2006년 12월호)에 기록한, 2005년 4월의 며칠간의 일이 실현된 경위입니다. 체류 이틀째부터 우리는 호텔을 나와 선생이 살고 있는 고층 아파트 일각에 머물렀고 반려자 윤영자씨로부터도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 뒤 다음해 4월부터 5월에 걸쳐 다시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거의 매년 절반 정도는 혼자 선생 댁을 찾아가 며칠간 체류하는 배려를 받아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얻었습니다. 방문 간격이 좀 벌어진 해에는 뜻밖에도 한국에서 커다란 김 상자가 와서, 그 ‘수수께끼 놀이’와 같은 선물이 어쩌면 “오시오”라는 무언의 메시지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바로 방한하는…그런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바로 어제 헤어진 것처럼 리영희 선생과 윤영자씨는 나를 환대해 주셨습니다.


리영희 선생의,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만년에, 매번 며칠간이긴 했으나 아침부터 밤중까지의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훈도를 받는다”는 말의 의미를 확인하는 듯한 여러 견문·경험을 심화시킨 요행이었습니다. 특히 그 첫 방문의 사흘간은 나에게 그 매순간이 황금빛이 떨어지는 것 같은, 생애에 몇 번 맛볼 수 없는 농밀한 경험으로 기억의 핵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목욕탕 동행도 하면서 선생의 호탕(豪放磊落 호방뇌락)한 성격의 일면을 접하는 유쾌한 장면도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물론 말 하나 하나가 통찰로 가득한 그 지성은 말할 것도 없고, 민중 편에 섰다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스스로 남북 조선민중의 고난에 찬 동시대사를 살아낸 한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 했던 리영희 선생의 성실함, 인간적인 따스한 자력(磁力)의 깊이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후 실로 다양한 장에서 리영희 선생에 대해 써 왔습니다. 예컨대 문재인씨의 대통령 당선 전의 자전 <운명>의 서평(‘이 눈부신 민주주의에의 선망에/ 우리는 언제까지 애를 태울까?’/ <주간 금요일> 2018년 11월 2일)과 같은 장에서도 리영희 선생이 학생시절의 문재인씨에게 준 감명에 대해 고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잊을 수 없는 2010년 5월 19일 오후, 서울에서 입원한 리영희 선생 문병을 갔을 때입니다. 당시 나는 사정이 있어서 그 전 해 여름부터 런던과 도쿄를 매월 왕래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리영희 선생의 병이 낙관할 수 없는 상태라는 소식을 사람 편을 통해 전해듣고 윤영자씨에게 전화를 한 뒤 병실을 찾았습니다. 나는 그해 시민봉기 30주년의 광주에 며칠간 머물면서 전정호와 이상호, 홍성민 등 알고 지내던 광주 민중미술의 맹우(盟友)들과 열기에 찬 수십시간을 보낸 뒤 ‘5·18’ 다음날 KTX로 서울에 갔습니다.


다음날에는 일본으로 돌아왔고, 그 다음다음 날에는 런던으로 가야 했던 정신없이 바쁜 일정이었으나 리영희 선생을 뵐 수 있었습니다. 베드에서 몸을 일으킨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손을 잡고 얼굴을 들여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때까지 받은 격려의 총열량을 재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이별이었습니다.


 


인터뷰를 진행하신 뒤의 소회랄까,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소감을 얘기해 주세요.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그 2005년의 회견이 실현된 것은 파란으로 가득찬 한국 현대사의 현재에 이르는 과정 중에서 몇 번인가 찾아 온 ‘초겨울의 따뜻한 날씨’(小春日和)라고나 해야 할 섬광과 같은 희망의 온도를 느끼게 해 준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뒤에도 정권의 변천이 있었고, 마침내 남북통일이 전례없이 현실감 속에 예감되기에 이른 문재인 정권도 임기 후반은 코로나 바이러스 방역대책에 많은 에너지를 할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번의 윤석열 정권이 수립되는, 또다시 역사에 역행하는 듯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만, 그럼에도 이에 대응해 특히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본래의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적인 자기해방의 지평을 열려는 에너지에 나는 놀라움과 함께 깊은 경의를 느낍니다.


그와는 반대로 이번 우크라이나 정세를 통해 마침내 미국의 노예로서, 또한 어리석게도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의 말괄량이 노릇을 하는 ‘서방측의 일원’으로서, 꼴사나운 몰주체성을 발휘하는 일본정부와, 그것을 어쩔 수 없이 좌시하기는커녕 그런 현실에 관심조차 없는 대다수 일본 ‘주권자’ 대중의 저 부끄러워해야 할 꼴이라니.


나는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신 지 얼마되지 않은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를 만일 선생이 보셨다면 어떻게 말씀하셨을까-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뿐만 아니라 현재의 참담한 세계 전체를 어떻게 보실까 하는 것도 있지만, 특히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원전사고라는 이 종말적인 ‘핵 파멸’, 그로 인한 동아시아·북태평양 지역으로의 핵 오염을 거쳐 그 뒤의 코로나 바이러스 참화에 대한 무대책, 그리고 거짓으로 도배된 ‘도쿄 올림픽’에서부터 이번의 우크라이나 위기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기만과 그것을 허용한 대중의 구제불능 상태에 눈 앞이 캄캄해지는 듯한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은 일본이라는 나라는 1945년 8월, 아시아에 대한 식민지지배와 침략전쟁 끝에 멸망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가해국이 미국의 세계지배 의도 때문에 온존되고 다른 나라들이 고통을 받던 중 조선(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이용해 부끄러워해야 할 ‘경제발전’을 이룬 것이 일본의 ‘전후(戰後)’의 실태입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런 윤리적인 파탄이 지금 지구규모의 인류사적인 위기 속에서 마침내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데, 이런 일본에 대해서조차 마지막까지 리영희 선생은 ‘희망’을 잦아내려 하셨다는 걸 생각하면 일본인으로서 참으로 얼굴을 들 수 없는 심정입니다.


리영희 선생의 <반세기의 신화> 속에 “미국에게는 전쟁과 무력분쟁이 없는 세계는 불안한 세계다”(같은 책 ‘조미 핵·미사일 위기의 군사정치학’)라는 강렬한 통찰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점차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바로 지금 미국이 나토를 끌어들여 자신들의 손은 더럽히지 않고 군사기술과 최신예 무기를 공여해 우크라이나를 ‘쓰고 버리는’ 졸로 내세워 러시아와의 ‘대리전쟁’을 추진하면서 중국 봉쇄를 꾀하고 있는 구도는 리영희 선생이 가장 규탄해 온 상황 바로 그것입니다.


역사의 광맥을 맨손으로 파 들어가는 듯한 리영희라는 사상가의 현재성(今日性)을 지금 새삼 재확인하는 것과 함께, 그런 인격의 가장 만년의 몇 년간 친숙하게 그 말씀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 바이러스 참화가 진정되고 다음에 한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된다면, 반드시 광주 망월동 묘지를 다시 찾아 리영희 선생 영전에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또 내가 견문한 리영희 선생의 모습에 대해서도 회상기적인 것을 써서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는 이제까지 발표해 온 것과 같은 정리된 에세이·논고 형식이 아니라 단장(斷章)풍의 에피소드를 늘어놓는 형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리영희 선생은 식견·인격 모두 지금도 내가 최대급의 경의를 계속 품고 있는 지식인·사상가이며, 반려자 윤영자씨와 함께 베풀어주신 두터운 정은 내 생애의 보물입니다.


 


그밖에 하시고 싶은 말씀은


지금 세계가 눈사태를 맞은 것처럼 무너져 인간적 가치가 산산조각이 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태는 갑자기 시작된 게 아니라 1980년대 말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고 ‘동서냉전’의 종언이 미국의 승리로 일방적으로 선언됐을 때부터 진행돼 온 것입니다. 당시 나는 내 책에서 그것을 ‘새로운 중세’ ‘자본주의적 중세’로 정의했습니다.(<새로운 중세의 시작에 즈음해서>=월간 <세카이> 1992년 4월~12월호. 나중에 <‘새로운 중세’가 왔다!>로 제목을 바꿔 1994년 이와나미쇼텐에서 발간)


이 ‘새로운 중세’는 2000년 가을에 도쿄에서 리영희 선생과 처음 만났을 때도 대화의 출발점으로서 내가 전달한 주제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역사의 총반동화는 임계점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이미 ‘제3차 세계대전’이라는 무서운 말조차 결코 공상적인 것이 아니게 된 현재, 사람들은 모두의 인간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나 자신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예술의 힘입니다.


서두에 쓴 화문집 <죽음의 나라에서도 아직 말할 수 있는 ‘희망’은 있는가?>는 일본어·한국어·영어 3개 국어 텍스트를 조합한 같은 제목의 화문집이 이미 만들어져 있으나, 내년의 일본 국내 전시회에 이어 이 책에 서문을 써 준 홍성담씨 등의 후의로 광주에서도 그 전시회가 실현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지금으로선 나를 받쳐 주는 커다란 꿈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현재의 바이러스 참화가 세계에 가져다 준 증층적인 고난을 어떻게든 극복하고, 사람 목숨을 소비해서 부를 쌓으려는 악랄한 ‘전쟁꾼’들의 기도를 단호히 거부할 것. 그러면서 새로운 ‘연대’의 회로를 열어 가는 것 외에 우리가 살아갈 길은 없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곤란한 일일지라도 그 고통에 자발적으로 ‘참가’함으로써 그것을 통해 만나야 할 사람은 서로 만나고, 새롭게 맹우(盟友)가 되겠지요.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또한 리영희 선생한테서 받은 가장 깊고 보편적인 ‘선물’에 대한 ‘보은’이 되리라는 것도 실은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번역 한승동 (전)한겨레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