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노신”의 노신, 한국 사회운동의 원로 리영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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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5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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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주말> 2006년 12월 14일 문화면


“한국의 노신”의 노신, 한국 사회운동의 원로 리영희 인터뷰



남방주말 기자 샤위(夏榆)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사이에 리영희는 민족자주와 사회정의의 기치를 높게 들었으며, “친미반공의 군부파시즘체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박재우, <한국의 7,80년대변혁운동과 노신>)


한국의 저명한 시인 고은은 리영희를 “진실의 수호자”라고 불렀다. 저명한 인권변호사이자 전(前)조선대학교 총장인 이돈명은 리영희를 “이성으로 우상을 파괴한 지식인의 상징”이라고 했다. 프랑스 <르몽드>지는 그에게 “한국 사상계의 은사”라는 호칭을 부여했으며, <조선일보>와 같은 보수매체는 그를 “학생 의식화의 원흉”이라고 했다.


1995년, 리영희는 <나의 스승 노신>이라는 글에서 자신의 인생 역정과 사회활동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나의 저서나 나의 사상 그리고 나의 삶의 자세가 당대의 젊은이들에게 그런 영향을 끼쳤다면, 나는 그 영광을 중국 현대의 작가이자 사상가인 노신에게 돌리고 싶다. 지난 40년 가까운 세월, 한국 사회의 현실과 대결하는 자세로 사회에 내놓은 적지 않은 분량의 나의 글들은 사상에서 노신적인 만큼 문장에서도 노신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난 한 시대에 내가 이 사회와 지식인과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간접적으로 노신의 정신과 문장을 전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 역할을 자처했고 그것에 만족한다.”


“솔직히 말해서 6,70년대 시기에 나는 매우 고독하다고 느꼈다......박정희 군국주의 극우 독재 치하의 대한민국에서 맑은 이성으로 살고자 하는 지성인에게 그 시기는 바로 ‘백주의 암흑’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소리를 지르는 이는 드물었다. 어찌 보면 노신의 『아큐정전』이 그린 20세기 초기의 중국인(사회)처럼 숨막히고 절망적인 듯 보였다.”


젊은 리영희가 정신과 사상의 돌파구를 찾지 못해 번민과 고뇌 속에 있을 때, 노신은 그에게 인생의 목표와 사상의 거처를 제공해주었다. 리영희는 “나는 노신의 글을 읽으면서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에 감동하게 되었다. 지식
을 ‘상품’으로 파는 삶에 안주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동시대의 제도적, 인위적 조건들로 말미암아 고난 받는 이웃들과 고난과 기쁨을 함께하는 지식인의 사회적 의무에 눈을 뜬 것이다. 그 깨달음은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싹튼 것임은 물론이다.”


1972년에서 1995년까지 리영희는 한양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 기간 사이에 그는 8년이라는 시간 동안 필화와 정치문제로 파면되어 해직교수로 지냈고, 4번이나 감옥에 들어갔다. 그동안 『전환시대의 논리』(1974년), 『8억인과의 대화』(1977년), 『우상과 이성』(1977년), 『분단을 넘어서』(1984년), 『베트남전쟁』(1985년), 『역설의 변증』(1987년), 『자유인, 자유인』(1990년),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1994년) 등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이 책들은 한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2월 3일 이미 절필을 선언한 리영희는 남방주말과의 인터뷰를 수락했다.


 


일본에서 노신을 만나다.


기자: 한국에서 선생님은 “한국의 노신”이라고 불립니다. 왜 이런 호칭이 붙었나요? 그리고 이 호칭이 마음에 드십니까?


리영희: 과거에 일부 지식인들, 특히 중국을 연구하거나 노신 문학과 노신의 시대적 역할을 연구하는 지식인들은 그렇게 저를 불렀지요. 이는 저의 과거 30~40년간의 경력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내가 언론을 통해 펼쳐낸 정치사회비평, 문명비평, 사회활동, 그리고 민주변혁운동 등의 활동 속에서 해낸 일정한 지도적 역할과 정신을 보고 노신이 살아있을 때의 중국 상황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보고 저를 그렇게 불렀다고 봅니다.


기자: 선생님께서는 언제 처음으로 노신을 읽으셨나요? 노신의 어떤 부분이 가깝게 느껴졌을까요? 당시 선생님 개인적으로는 어떤 상황이셨습니까?


리영희: 제가 노신의 작품을 처음 읽기 시작한 때는 1960년대 초입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노신을 공산주의자로 여기고 위험인물로 여겼기에 우리는 노신의 작품을 접하기 어려웠습니다. 한번은 일본에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도쿄의 서점에서 노신에 관한 책 두 권을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노신을 연구하기 시작했지요. 당시 저는 신문기자로 한국의 한 큰 신문사에서 국제부장 업무를 맡아 국제관계 분야의 일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기자: 왜 그 이전에는 노신을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듣기로는 1927년부터 노신이 한국어로 번역소개되었다고 하는데요.


리영희: 우선, 저는 1929년에 태어났습니다. 처음 노신의 번역작품이 나왔을 때만 해도 태어나지 않았고, 당시는 일제식민지 통치 시기이기에 어린 시절에 노신을 알 기회가 없었지요. 1945년 8월 15일 민족해방 이후, 특히 1948년 8월 한국에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 한국은 반공체제가 되어 중국혁명에 대한 모든 정보를 봉쇄하고 차단했기 때문에 차후 일본에 가서야 노신을 발견할 기회가 있었던 게지요.


기자: 처음 노신을 선생님의 사상의 동반자로 삼으셨을 때, 선생님 주변 사람들은 노신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리영희: 아마도 이 점을 중국인들은 이해하기 힘들텐데요. 저는 한국에서 노신을 처음으로 알게된 이후로 아주 많은 노신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노신을 알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은 반공체제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1960년대에는 주변에 가까운 친구들에게 노신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그에 관한 토론할 기회를 갖기 어려웠습니다.


기자: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노신과 그만큼 깊은 정신적 유대감이 생겼다고 보십니까? 심성적, 기질적 동질감이었을까요?



리영희: 확실히 그런 면이 있어요. 저는 노신의 불요불굴의 정신, 인민을 열렬히 사랑하고 시종일관 권력의 허위에 저항하는 정신적 기질이 일정하게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지배계급의 허위를 이용한 통치와 그로 인한 우민화와 정신노예화에 맞서서 노신이 표출한 저항정신과 민중을 일깨우는 계몽사상은 1960년대 이후 30~40년 동안 줄곧 제가 한국사회의 변혁을 위해 노력하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신의 정신은 한국의 실제 상황과 매우 잘 맞아떨어져서 더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기자: 선생님께서는 노신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으셨습니다. 선생님은 자신의 사상이 노신의 사상과 서로 통하고, 필치도 노신과 서로 통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어떻게 서로 통하는 것일까요?



리영희: 제가 노신에 대해 총제적으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노신과 완전히 서로 통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의 제한된 이해의 범위 안에서 노신이 보여준 지식인의 모습은 우리의 선구와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고, 그가 그렇게 큰 중국에서 이룩한 놀라운 업적은 제 일생을 지도하는 스승이 되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노신과 같은 문학가가 아니기 때문에, 문학 방면에서는 특별히 말할 것이 없지만, 문학 이외에 제가 노신에게서 배우고 싶었던 점은 주로 잡문이라 불리는 문명 비판, 사회 비판, 문학 비판, 시대 비판의 문장이었습니다. 그 잡문을 쓰는 법은 매우 다양하여 집권 세력의 직접적인 박해를 피하는데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 어두운 세력의 추악함과 악행을 폭로할 수 있었지요. 노신 특유의 방식은 제가 한국 사회에서 글을 발표하는 데 귀감이 되었습니다. 이는 제게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의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



기자: 선생님께서는 예전에 필화사건과 정치적 문제로 인해 대학에서 파면되신 적이 있고, 연달아 네 번이나 체포되어 수감되신 적이 있습니다. 수감되었을 때, 노신의 정신적 자원이 선생님께 어떤 도움이 되었습니까?


리영희: 노신의 정신적 자원은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비록 노신은 저처럼 감옥에 가거나 여러 차례 기사회생한 적은 없지만, 1920~30년대 노신에게 당시의 중국은 그 자체로 하나의 큰 감옥과 같았습니다. 이는 체포와 구금, 박해를 피하기 힘들었던이 작은 한국 사회에서 제가 겪어야만 했던 감옥생활의 처지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신은 그렇게 매우 혹독한 환경 속에서 그의 기본 정신을 일관되게 유지했으며, 사회, 문학, 사상 방면의 자세, 그리고 인생과 정신의 투철함을 보여줬고, 여러 차례 투옥된 저에게 불요불굴의 힘을 불어넣어줬습니다. 이 힘으로 인해 저는 신념을 지키고 용기백배할 수 있었지요.


기자: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40여 년 동안의 단절의 역사가 있었고, 1992년 8월 24일에야 정식으로 수교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선생님께서는 마음속에서 노신과 멀어지셨습니까?


리영희: 그와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40여 년 동안 한국사회는 저의 사명감을 더 필요로 했고,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노신의 글을 인용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지요. 특히 사회에 대한 비판 속에서, 정치와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 속에서, 군사 독재체제와 거짓 이념에 대한 비판 속에서 노신의 글을 더 자주 인용했기에 노신은 제 마음 속에서 한층 더 가까워졌습니다.


기자: 선생님의 노신에 대한 수용과 일체감은 선생님께서 중국 사회와 중국 현실을 인식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한국의 사회현실을 인식하는 데도 도움이 되셨습니까?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중국과 한국은 유사성이 있습니까?



리영희: 제가 노신의 시대와 노신의 삶을 한국 상황과 동일하다거나 동질적이라고 보는 전제는 한정된 영역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제가 한국에서 하고 싶었던 일은 당시 군사독재의 폭정과 우민정치, 거짓된 통치, 극우 반공 지배계급의 비이성적인 소위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의 허위성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노신 시대의 중국 사회가 처한 단계와 한국의 상황이 완전히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제 관심영역은 방금 얘기했던 집권 세력과 인민 사이의 처참한 모순 관계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기자: 한민족은 우리의 인상에 강인하고 격렬합니다. 한민족은 악한 세력의 압제에 맞닥뜨리면 손가락을 자른다거나 분신하는 등 투쟁합니다. 하지만 중화민족은 꾹 참고 견디는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민족의 국민성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왜 노신의 중국에 대한 해부가 한국에도 마찬가지로 적합하다고생각하셨습니까?


리영희: 중국인의 상황에 따른 태도나 정신적 자세는 한국인과 비교했을 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역대 폭정의 시기에, 일제 치하의 민족해방 운동의 시기에, 훗날 반공독재정치 시기에 손가락을 자르고 분신하는 등 극단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협소한 한국 땅에서 발생한 집권 세력과 인민 사이의 모순관계와 탄압의 정도가 그 질적인 측면에서 중국의 지배계급이 인민대중을 탄압한 정도에 비해 훨씬 심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사람들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오래 버틸 수 있는 대책을 고려하거나 중국인들처럼 구체적이면서도 장기적인 저항행동을 계획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나는 한국의 저항운동이 그러한 극단적인 방법을 채택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으며, 도리어 이런 극단적인 행위를 비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심정은 출구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 내몰려 압제에 시달리는 상황이라 중국과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비록 노신 시대도 폭정과 독재의 시기였지만 중국은 광활한 대륙, 유구한 역사, ‘만만디’의 서두르지 않는 전통의 리듬을 가지고 있기에 한편으로는 긴 호흡으로 역사를 관찰하며, 한편으로는 이를 분석하고 저항하며 극복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
다. 제 평가는 중국인 특유의 대응방식이 한국보다 더 효과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것입니다. 노신의 중국에 대한 해부도 마찬가지로 한국에 적합하다는 말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당시의 상황과 제한적인 조건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 항상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노신의 제3의 입장
기자: 노신이 선생님에게 끼친 영향은 주로 긍정정인 부분이 많습니다만, 부정적인 면에서의 영향은 없었을까요?


리영희: 노신 선생은 당시 사상 방면의 권위자였고 저는 선생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여태까지 이것이 행운인지 아닌지 혹은 부정적인 영향은 없었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노신은 줄곧 당시 중국사회와 중화민족 및 중국인의 상황을 아주 답답하고 비판받아야만 하는 구제불능의 정도로 묘사했고 주로 부정적인 측면의 예를 많이 들었는데요. 마찬가지로 저도 한국사회의 이런 측면을 묘사하고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기자: 중국의 현실에 대해서 지식인들은 줄곧 확연히 다른 입장과 태도가 있습니다. 첫째, 중국은 “문명개화로 나아가야한다”, “현대화로 나아가야한다”고 외치는 입장으로 이를 피상적인 계몽주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둘째, 간디의 방식인 반(反)현대주의로 가자는 입장으로 이는 반(反)계몽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신은 피상적이고 경솔한 계몽주의를 반대하면서도 반(反)계몽주의도 아닌 제3의 입장이었습니다. 노신은 분명히 현대화를 지향했지만 또 끊임없이 현대성을 비판했습니다. 노신은 계급을 중시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단 한순간도 그 한계에 대한비판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제3의 입장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리영희: 저는 기자님의 이 질문이 제기한 노신의 독특한 제3의 입장이 확실히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신은 양무론(洋務論)의 국수주의적인 부국강병 방식에 동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량치차오와 캉여우웨이 중심의 소위 제도개혁도 중국사회의 발전 단계와 괴리가 있다고 비판했지요. 동시에 노신은 당시 일본으로 유학을 간중국유학생 대부분이 법학, 정치학, 공학이나 실무적인 경제정책 등을 전공하는 것을 보고 그러한 겉으로만 계몽주의에 애쓰는 것을 비판하며 홀로 남들이 선택하려 하지 않는 의학을 전공으로 택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의 제3의 입장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노신은 중국인이나 중국 인민의 치명적인 결점이 육체적인 질병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 의학에서 문학의 길로 전공을 바꾸는데, 이는 기존의 입장을 이어나가면서도 대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항일전쟁 시기에 “국방문학”과 벌인 논쟁에서 “민족해방전쟁의 대중문학”의 입장을 취한 것도 중화민족의 문제를 표면적으로만 해결하려는 계몽주의와 구별되는 제3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당시 여러 사상적 흐름 속에서 노신이 시종일관 근본적인 문제를 탐구하고 표면적인 계몽주의를 비판하며 줄곧 제3의 입장이라는 태도를 고수한 것은 발군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자: 지구화라는 배경 하에서 노신의 “민족해방론”과 “민족해방문학”은 이미 시대에 맞지 않는 진부한 것으로 현실성을 잃었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리영희: 노신의 “민족해방론”과 “민족해방문학”은 21세기 현재의 시각에서 볼 때, 적어도 이미 그 역할과 사명을 상당부분 완수했어요. 그러나 “민족해방”이라는 단어는 현재 시대정세의 변화와 조건과 결합해서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현대화 과정 속에서 인식과 극복이 필요한 안팎의 과제가 존재합니다. 우선 이미 심각해진 각종 비인간화 및 심지어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는 반인간화의 문제입니다. 서양문화와 사상에 대해 어떠한 비판도 없이 칭송한 결과, 극단적인 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 도덕과 윤리를 방기한 배금사상, 그에 따른 인간성의 부패와 사회의 타락, 그밖에 많은 외부로부터의 부정적인 요소들이 중국인과 중국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민족의 총체적 위기를 냉철하게 인식하고 효과적인 대책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이 바로 21세기 중국의 “민족해방”의 문제입니다. 정신적, 사상적 각성이 전혀 없이 거의 맹목적으로 타락한 자본주의의 길을 신앙과 같이 추수하는 중국인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중국 인민들에게는 새로운 21세기의 “민족해방문학”이 절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지난 50년간 줄곧 미국식 자본주의를 모범으로 여기고 단순히 물질주의를 신
으로 받들어왔습니다.


한국은 순수히 경제적인 면이나 물질주의 측면에서 일찍이 괄목할만할 발전을 이뤘지만, 한편으로 인간성이 총체적으로 타락해 사회윤리가 크게 훼손됐습니다. 그리 많지도 않은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심지어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거나 자녀가 부모를 살해하는 사건도 있었지요. 한국 사회에서는 인간의 행위규범인 선악 관념이 심각할 정도로 전도되었습니다. 부자들이 통치하는 정치경제 제도 속에서 프티부르주아 계급이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권리는 부자들의 희생양이 되고 있으며, 기층 노동자의 생존권은 소위 미국식 세계화라는 신자유주의에 의해 말살당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이 무한히 착취하는 탐욕의 그늘 속에서 한국은 이미 가난한 사람들이 하루를 일년 같이 보내는 수많은 실업자들이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무한경쟁이라는 무자비한 성공주의와 “우승열패”의 생존경쟁에 기반한 사회진화론이 이미 극에 달했습니다. 게다가 강자건 양자건 간에 50년 넘게 미국식 자본주의에 길들여져서 대부분이 미국을 숭배하는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악순환이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확대재생산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이런 사정에 비추어 저는 선량한 중국 인민에게 새로운 “민족해방”과 21세기의 “민족해방론”이 중국에도 몹시 필요하다는 점을 충고하고 싶습니다. 미국식 자본주의가 중화민족 전체를 자신의 체제 하에 예속시키려는 정세에 직면해 중화민족이 자기민족의 덕성과 사회의 미풍양속을 순조롭게 지켜나가 조화로운 사회로 발전시킬 수 있다면, 이것 역시 “민족해방”의 대단히 어려운 과업입니다. 노신의 “민족해방론”과 “민족해방문학”이 과거의 사상이기에 이미 진부한 것이 되었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미국식사상의 계몽주의적 가치관으로 인한 중대한 잘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련의 해체와동시에 “역사는 끝났다”, “미국화가 실현되었다” 등 후쿠야마가 주장한 것과 같은 우매한 세계관이나 사이비철학에 대해 일부 중국 지식인들이 보여준 가장 충실한 신봉자의 모습들을 보면서 중국의 미래에 대해 걱정과 안타까움을 느꼈어요. 21세기에 접어든지금도 여전히 피상적인 계몽주의의 과오를 저지르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노신은 계속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중국의 지식인들과 중국 인민들이 한국과 한국 사회가 경험해온 사회적 교훈을 진지하고 깊게 받아들이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동아시아의 “지혜”의 가교


기자: 어떤 사람들은 “노신은 동아시아의 위대한 영혼이자 동아시아를 ‘지혜’로 통하게 하는 가교”라고 말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런 견해에 동의하십니까?


리영희: 냉정하게 얘기해서 동아시아에서 노신의 위상과 앞으로의 잠재적 가능성, 혹은 현재의 효용에 대해서는 그렇게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앞서 21세기 현실 속에서 노신의 “민족해방론”에 대해 몇 가지 탐구할 지점에 대해 얘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환경에 부합하려면 노신의 의의는 기자님이 질문에서 얘기한 것과 가까울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을 보면, 동아시아 각국의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등이 발전하는 단계나 생활양식과 수준이 모두 다릅니다. 동아시아 각국의 민족의 이익도 다릅니다. 노신이 동아시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한 것은 반패권주의적이고 평화주의적인 대중을 위해 선린우호의 생존이라는 목표에 최대한 부응하는 것입니다. 작금의 동아시아 각국의 추세를 보면, 국가 간 관심과 방향이 다른 점이 많고 심지어 분열이나 대립의 방향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 현재 아주 중요하게 할 일들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지식인들이 자신의 나라 안에서 노신의 정신을 따르게 하거나 혹은 그를 변형시켜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밝혀주는
것입니다. 이 지식인들이 자기 나라의 각종 제도나 정치사회를 바르게 바꿔낸다면, 이로 인해 동아시아 각 나라들이 하나의 커다란 공통의 방향으로 통일되어 나가고 동아시아의 공동생존을 위한 가교 역할을 할 수 개 될 겁니다. 그것이 바로 노신 정신이 일정한 작용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한국을 예로 들어 얘기하자면, 외세에 대한 의존과 미국식 자본주의 및 물질지상주의, 사회적 타락과 같은 모든 부정적 요소와 모순이 현재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습니다. 이점은 과거 노신의 가치관이나 역할을 통해 상당 정도 고쳐나갈 수 있습니다. 일본은 제국주의, 패권주의, 확장주의라는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평화롭지 않은 국가지향에 대해서도 노신의 사상을 적용해 자아 성찰과 자기비판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각 나라와 민족의 내부 모순을 해결하고 동아시아 지역 내 평화공존과 번영을 이뤄나가는 데 있어서 노신의 정신을 바탕으로 스스로 고쳐나갈 수 있다면, 설사 서거 70년 이후라 할지라도 노신은 동아시아 15억 민중의 미래의 운명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노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죽은 불을 다시 되살리는 것입니다. 21세기 세계는 지구적인 자본주의의 각종 모순이 더욱 복잡하고 심화되고 첨예해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노신은 “과거형”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노신을 “미래형”이라고도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리영희: 21세기에 노신의 정신과 사상을 다시 되살리고 활용하는 것을 죽은 불을 다시 살리려는 노력에 비유한 것은 일종의 착각이라고 봐요. 노신의 사상은 현재도 조금도 변하지 않고 계속 활활 타오르는 불입니다.


저는 미국식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려하고 미국식 물질주의와 힘의 철학이 여러 명칭과 여러 형식으로 인류 전체에 강요되는 상황이 존재하는 한 노신의 사상은 계속 유효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노신은 “현재형”이자 “미래형”입니다. 제가 지나치게 미국을 비난하는 발언을 하는 것을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미국 자신과 미국을 대표하는 각종 부정적인 가치들은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상황이기에 미래에 미국이 그러한 지위와 능력을 상실하거나 평화를 지향하는 체제나 국가로 변화할 때까지 노신은 줄곧 “현재형”일 것이며, 그때까지 계속해서 “미래형”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현재, 중국인들은 현대화와 물질주의의 방향으로 급격히 나아가면서 새로운 양무론의 시대로 접어드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 자신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19세기 중엽부터 시작한 양무론과는 좀 다른 점이 있는데, 모방과 지향의 대상이 주로 미국자본주의, 미국의 생활방식, 미국의 가치관과 각종 체제, 제도 및 운영방식 등이 되리라는 점이겠지요. 그때가 되면 중국의 지식인들은 미국의 물질적 삶에 대한 경찬과 부러움이 뒤섞여 상당기간 중국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현재 중국의 지식인이나 대중들은 미국식 충격을 크게 받고 있는데, 충격을 받은 이후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방향을 잡기 어려운 중국 지식인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 미국의 제도, 미국의 가치관, 미국의 권력, 즉 미국이라는 나라를 깨닫고 새로이 자신을 발견하는 데에는 50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중국 대륙은 아마도 더 빨리 깨닫게 될 것입니다만 인구가 많다보니 적어도 3~40년은 걸릴 것입니다. 중국 자식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야하고 자신의 자율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나의 의식은 왜 이렇게 혼미해졌는가? 왜 이와 같이 방향을 잡기가 어려운가? 우리가 거의 완전히 맹목적으로 미국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 경도되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 그런 노력들이 노신이 당시에 글을 써서 중국 대중에게 요청했던 일이라고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노신은 “현재”의 노신이며, “미래”의 노신입니다. 20세기의 노신이 계속해서 21세기의 노신이 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저는
한 치의 의심도 없습니다.(번역 하남석)


번역 후기



 


 


 


 


 


 


 


하남석(서울시립대 중국어문화학과)



“중국의 남방주말이 리영희 선생님과 나눈 대담이 있어요. 번역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미정 이사님께 번역 의뢰를 받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하겠다 말씀드렸다. 중국연구자라면, 그리고 그 앞에 ‘비판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자신을 비판적 중국연구자라고 여기는 이라면 누구나 사표로 삼고 있는 리영희 선생님이기에 바쁜 일정을 핑계로 망설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대담은 중국의 유명한 언론사 남방주말이 노신 서거 70주기를 맞이해서 동아시아의 노신을 둘러보는 기획이었고 한국의 노신이라고 할 수 있는 리영희 선생님과 대담을 통해 중국과 한국의 여러 상황을 다시 짚어보는 내용이었다. 선생님께서 이전부터 여러 글과 말씀을 통해 노신을 이야기해오셨던 터라 대담에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냉전과 반공의 억압적인 시대의 한국에 중국의 대안적 근대를 추구하는 움직임들을 소개하여 우리 사회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한국의 그동안의 발전 과정에서의 부정적 경험을 중국이 숙고하여 그 오류들을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선생님의 애정어린 당부가 인상적이었다. 선생님의 대담을 번역하며 간절하게 한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지금같은 혼탁한 시기에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어른의 목소리, 독립적인 지식인의 목소리가 그립다는 것이었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경쟁은 지구적 차원에서 더욱 심화되고 있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 혼돈의 세계질서는 물론이고 드디어 영구평화
의 길로 나서나했던 남북관계는 다시금 어두운 터널로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국내 상황도 혼탁하기는 마찬가지다. 2016년 국정농단을 규탄하는 광장에서의 촛불항쟁으로 새롭게 출범한 정부였지만 제대로 된 개혁은 해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몰락하여 정권을넘겨주고 말았다. 김수영 시인이 4.19 혁명 직후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고 했건만 이번에도 혁명은 미완으로 끝나버렸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성찰이 아니라 냉소만이 남아있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지식인의 목소리다. 하지만 지난 몇년 간 지식인들은 객관적이고 사실에 입각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당파성이라
는 가치에 함몰되어 사실을 왜곡하여 맹목적 지지자들의 인기를 얻는 데 급급하거나 안정적인 자리에 대한 욕망으로 조용히 침묵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떠올랐던 분이 바로 리영희 선생님이었다.


2003년 당시 막 출범한 노무현 정부가 이라크 파병 결의안을 통과시키려고 할 때, 상당수 진보 지식인들이 대북관계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된다고 파병 조치를 옹호할 적에 선생님께서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오셔서 거리 시위에 함께해주셨다. 참여정부를 꾸짖으시며 “국익에도 도덕과 윤리가 있다. 부당한 방법으로 국익을 취한들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나. 성숙한 덕성을 갖춘 국민들이라면 남을 해치는 방법으로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된다”고 일갈하셨던 모습이 기억에 선하다. 선생께서 살아계셨다면 지난 정부를 향해서도 잘할 때는 힘을 실어주는 격려의 목소리를, 잘못할 때는 단호하고 엄격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셨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 우리는 그런 어른의 목소리, 지식인의 목소리를 잃어버렸다. 선생님이 남방주말과의 대담에서 노신을 통해 계속 상기시킨 것은 바로 그런 인간의 존재였다. 노신과 리영희의 정신에 비추어 죽어가는 불을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해야하지 않겠는가.


추기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법에 따르면 魯迅은 ‘노신’이 아니라 ‘루쉰’으로 표기하는 것이 맞지만 리영희 선생님은 <대화>(86쪽)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적이 있다. “나는 그를 중국 발음인 ‘루쉰’이라고 부르지 않고, 몇십 년 전에 그의 작품을 처음 대했던 때에 익힌 한자 발음대로 ‘노신’이라고 불러요. 노신이라고 불러야 나의 정서와 심상에는 그 인간 노신이 떠올라요. ‘루쉰’이라고 부르면 나에게는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 노신이 아니라 어떤 다른 인물과 같은, 좀 서먹서먹한 느낌이 든다구. 명칭이라는 것이 이미지 작용에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이 대담의 번역에서는 선생님이 분명히 노신이라고 호칭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魯迅을 노신으로 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