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5.18. 월남전을 보는 두 개의 눈
조선일보 1967.5.18. 월남전을 보는 두 개의 눈
월남전을 보는 두 개의 눈
「러셀 전범재판」을 둘러싼 찬반논쟁
<편집자 주>
지난 6일부터 5일간 스웨던 수도 스톡홀름에서는 영국의 러셀, 불란서의 사르트르 등 세계적 지성의 대표적 인사들이 주최한 이른바 「월남전쟁범재판」이 열렸다. 이 평화운동자들은 미국의 월남전쟁이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며 존슨 대통령과 미국 월남전 주도인물들 그리고 월남에 군사적 개입을 하고 있는 국가들이 공범자라는 「판결」을 내리고 막을 내렸다.
미국 정부의 압력으로 런던, 파리 등 예정지에서 밀려난 그들은 『그들의 모임을 금지할 국내법이 없다』(에르란데 수상)는 스웨덴에서 간신히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법적효력은 없으면서도 국제적으로 큰 파문을 던졌던 이 월남전범재판이라는 이색법정이 무엇을 목적으로 했던가를 사르트르에게서, 그리고 그에 대한 반론을 미국 철학자 시드니 후크에게서 각각 들어본다.
사르트르의 주장
「법적단죄」는 무의미
「법윤리」적 규정 내려보자는 것
우리가 하려는 것은 법적으로 미국의 월남정책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 정치적 통념에 입각하여 그것이 「전쟁범죄」에 해당하는가의 여부를 문제시하려는 것이다. 사실 「미국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제3국에 대해 미국이 감행하고 있는 전쟁에 대해서 「법적」 의미의 단죄를 해본댔자 무의미한 짓이다. 월남전쟁은 말하자면 계급투쟁을 국제적 규모로 확대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우리들 지성인은 그 메카니즘을 파헤침으로써 그것과 싸울 수가 있다. 계급투쟁이라는 현실적 견지에 선다면 그것은 법의 범주 안에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범죄적 정치」의 범주로 다루어보자는 것이다.
그 전례와 개념이 나치 범죄자들에 대한 뉘른베르크 재판으로 나타났다. 이 재판의 정신은 그때의 승자라 할지라도 앞으로 같은 성질의 국제정치적 범죄를 저지를 때에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과 같은 법정에서 단죄 받아야한다는 것이다.
형의 집행능력이 없는 국제시민의 「법정」이 판결을 내린다는 것은 우스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존슨 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한들 무슨 「법적 효과」가 있겠는가? 우리의 목적은 다만 가능한 모든 증거를 수집하고 증인을 불러서 『이러저러한 경우에 행해진 이러저러한 행위가 국제법상의 이러저러한 항목에 위반되지 않는가. 그리고 그 경우에 범죄의 책임자는 누군가』 하는 것을 밝혀보려는 데에 있다. 말하자면 국제정치상의 행위에 법적인 테두리를 씌워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집단이나 정부의 행위에 대해서는 도덕적 판단 밖에 내리지 못한다는 사고를 타파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난을 받아야할 전쟁방법과 그렇지 않은 전쟁방법이 있지 않은가 하는 반문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는 않다. 월남에서와 같이 한 국가의 정치를 현실주의적인 관점에서만 판단하거나, 정치란 역관계에 의해서 움직인다든가 또는 냉전 목적의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따위의 주장은 마치 스탈린이 그랬던 것처럼 정치를 효과의 면에서만 생각하고 정부의 행위를 실용적 면에서만 판단하려는 것이다.
그런 사고는 어느 사이에 전쟁범죄의 공범자가 되어버리는 큰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우리는 월남에서 행해지고 있는 미국의 그런 행위나, 상부층의 명령에 의한 그와 같은 작전행동에 관해서 세계의 시민의 자격으로 집회를 가지고 판단을 내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행위가 법적 책임에서 면제되어있는 현실에서 「법윤리」적 규정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쟁범죄라는 개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전쟁에는 상대자가 있는 법인데 미국인만 재판하려는 것은 부당하다고 우리를 비난하는 소리를 듣고 있다. 우리는 월남전쟁의 본질도 그렇거니와 진퇴의 여지없이 몰려서 부득이 철의 규율을 받고 있는 빈약한 농민들의 행동과 2억의 인구를 갖은 최강-초근대적 공업국가가 거대한 군대를 동원해서하는 행동을, 같은 기준으로 논하려는 사고방식을 배격한다.
월남은 미국을 침략하지 않았으며, 외국에 가서 폭탄을 퍼붓고 있는 것은 월남인이 아니다.
그런 뜻에서 드골 대통령이 대외적으로 미국정책을 공격하면서도 국내적으로 미국의 경제적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경제적 조처를 취하지 않는 한 그의 태도는 눈 감고 아웅하는 식의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드골이 미국정책을 고발한 유일한 자본주의 국가의 원수라는 사실만은 그것대로 중요한 일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미국이 완전한 지배권을 토대로 하여 세계문제를 다루려하는 데 대해서 생각해봐야한다. 세계는 오늘날 2대 세력이 아니라 유일한 세력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 그리고 평화적 공존이라는 것은 미국의 그와 같은 목적에 봉사하는 것 뿐이다. 미국인이 아무런 걱정없이 월남인의 머리 위에 폭탄을 퍼부을 수 있는 것도 이른바 평화공존과 중-소 대립 덕택인 것이다. 흐루시초프가 시작한 공존정책이 침략과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주의 진영의 후퇴와 분열을 초래하여 적에 봉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는 다만 현재와 같은 불행한 시대에서 객관적으로 보건, 법률적으로 보건 범죄를 구성하는 국가정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세계의 여론 앞에 명백히 드러내 보이려고 말할 뿐이다.
<불 롭저버터 지에서>
장 폴 사르트르(62) = 파리태생의 불란서 실존철학자. 문학, 철학, 정치작가 등 광범한 분야에서 활약하면서 지식인의 정치참여를 주장하고 실천한 사람. 64년 노벨 문학상 수상 거부
시드니 후크의 반론
극단적 전쟁공포증
러셀 주장은 공산선전과 흡사
20세기 유수한 지성으로 통하는 버트란드 러셀 경의 월남 전쟁에 대한 반전이론은 사고의 단순성과 표현방법의 조악성에 있어서 어쩌면 그렇게도 공산주의 선전 문구와 흡사하다. 그가 문제 삼는 세균 전쟁 운운만 해도 한국전쟁 때 공산주의자들이 퍼뜨렸던 그런 헛소문과 같다.
소위 전범재판소가 폭로하려는 월남전쟁의 진상에서 베트콩 테러분자들에게 희생당한 수만 명의 월남 인민에 관한 언급은 감쪽같이 빼먹고있다.
러셀이 발표한 전범 재판 문서를 보면 그 극단주의적인 문투로 보아 러셀 자신이 썼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첫째, 누가 애써 러셀 글투를 흉내낸 것 같고, 또 이 문서가 여러 번 하노이와 베트콩 방송에 나왔다는 점이다.
전쟁이란 언제나 죽음과 고통이 넘치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어느 전쟁이나 똑같이 비인도적일 수는 없다. 포로와 부상자를 함부로 죽이는 전쟁은 역시 제네바 협정을 신사적으로 지키는 전쟁보다 나쁘다. 러셀은 미국이 월남에서 무차별 전쟁을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월맹의 인구밀집지대는 모두 파괴되어 남아있지 않았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한때 서구의 공산화를 반대할 때는 그렇게 열렬한 반공주의자였던 러셀이 유독 월남 전쟁을 기화로 돌연 친공반미적인 입장으로 표변한 이유에 있다.
러셀의 반미 감정은 정치이념을 놓고 따지면 그의 극단적인 전쟁공포증에서 비롯된다. 좀 더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면 1940~1942년 무렵 그가 미국에서 당한 곤경으로 말미암아 그의 반미감정은 광적으로 더해갔다.
러셀은 미국이야말로 복지국가라는 것은 말뿐이고 경제 군사 독재정권 밑에서 세뇌당한 빈곤한 대중이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지옥과 같은 나라라고 생각한다.
러셀의 전쟁공포증은 오늘날 미국이 핵전쟁을 자극하고 있지만 소련의 인내로 겨우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존슨, 맥나마라, 러스크 등 월남전을 지휘하고 있는 미국 지도자들을 히틀러에게 비기면서 러셀은 자본주의의 피할 수 없는 전쟁도발을 저주하는 것이다. 현대철학상 러셀의 위치는 현대음악사에서의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비길 만한데, 마치 바그너가 반유태주의에 매몰되었던 것처럼 러셀은 반미주의에 현혹되어 있는 것이다.
<미 뉴리더 지에서>
시드니 후크(64) = 뉴욕 주립대학 철학교수. 미국의 주요 대학을 거의 빠짐없이 돌아다니면서 교수한 철학계의 관록과 함께 우익지성의 대변자로 자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