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지원후기-2] 카친의 평화 정글에서 길을 잃다 (2014년 3월 25일 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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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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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6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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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재단은 제 1회 취재·연구지원 대상으로 이유경 분쟁전문기자의 <미얀마(버마), 개혁과 민주화 이행기에 직면한 도전들>을 선정했습니다. 2차 취재 결과물이 '한겨레21' 991호와 995호, 1000호에 게재됐습니다. 이유경 기자가 취재기와 사진을 재단에 보내왔습니다. - 관리자


<리영희재단 프로젝트 2 - 버마북부 카친 주 취재후기>


카친의 평화 정글에서 길을 잃다

 

지난 11월 17일 오전 6시 16분, 나는 차가운 물에 씻는 둥 마는 둥 대강 물만 묻힌 후 짐을 싸고 있었다. 버마 북부 카친 주의 소도시 마이자양(Maijayang)의 숙소에서였다. 마이자양은 중국인들을 위한 카지노가 중심가를 장악한 소위 '카지노 타운'이다. 카지노 구역에서 5분쯤 걸어 나오면 '주변부 향기'를 풍기는 촌동네가 나온다. 카친족들의 삶터와 엔지오 등은 바로 이 촌동네에 자리 잡고 있다. 반군 카친독립기구(KIO) 통치구역인 마이자양을 방문하는 외국인(주로 기자나 엔지오 직원)은 이 주변부를 중심으로 피난민 캠프가 있는 국경 방향으로만 '조심스럽게' 나다닐 수 있다. 반군지역에 외국인이 발을 딛었다는 건 중국을 거쳐 밀입국했다는 뜻이고, 카지노 거리에 북적거리는 중국인들 눈에 들어가면 바로 중국 이민성에 보고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마이자양은 '국경비즈니스'와 '분쟁'이라는 두 변수를 묘하게 담아낸 곳이었다.

 


그날 아침 내가 짐을 싸며 기다린 건 중국 쪽 국경 도시 륄리(Ruili)까지 나를 무사히 데려다 줄 차량이 '준비되었다'는 전화였다. 륄리로 빠져나간 후 다음 날이면 이번 취재의 첫 관문이었던 중국 쿤밍(Kunming)에 도착할 것이고 나는 참았던 머리를 격렬하게 감을 참이다. 그리고 쿤밍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19일 방콕 행 비행기에 오르면 모든 취재 여정을 마치게 된다. 늘 그렇듯 시원섭섭함이 맴도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울린 전화기를 타고 전해진 소식은 '차량 준비 완료'가 아니라 '교전 심각', '피난민 대이동'이었다. 지역 엔지오 브릿지(BRIDGE) 활동가인 코 르윈(Hkaw Lwin)은 아침 6시 소집된 비상회의를 마치자마자 남부 남림파 소식을 숨가쁘게 전했다. 코 르윈은 구호물자에 의존하기 쉬운 피난민들의 자생력을 높이기 위해 유기농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진취적이고 빈틈없는 여성 활동가다.

 

"긴급 구호 차량이 곧 마이자양을 출발 피난민 도착 예정지로 향한다. 동반할텐가?"

 

코 르윈이 그렇게 묻는 다는 건 '반드시 가라'는 주문이었다.



그 전 며칠간 마이자양에 머물며 나는 카친독립군(KIA, 반군 카친독립기구KIO의 군사부) 3여단장 통라 대령에게 남림파 취재 '허가'를 요청해왔다. 정부군과 충돌이 잦은 남림파 인근 지역(만시 Mansi  타운쉽과 바모 Bhamo 지역)은 마이자양과 함께 KIA 3여단 관할이다. 통상 이런 취재는 반군의 안내나 도움 없이는 해당 지역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 더욱이 교전과 긴장감이 오가던 중이라 '고참'의 '협조'가 필요했다. 이때 '눈에 띄는 서방기자가 아니라 현지인과 다를 바 없는 아시아 여기자'라는 점을 강조하며 통라 대령을 설득한 게 바로 코 르윈이다. 간간이 정부군의 눈을 피해야 하는 '마이자양-남림파' 이동길에 '아시아 여기자'는 누구보다 유리한 조건이었다. 통라 대령은 왕복이동기간과 체류 2-3일을 합치면 최소 열흘 정도는 예상해야 한다고 했고, 나의 비자 만료일은 열흘이 채 남지 않았다. 코 르윈은 내게 비자 연장을 권유했다. 비자를 연장하려면 중국 국경에서 차로 5-6시간쯤 소요되는 망쉬(Mangshi)라는 도시로 나갔다 와야 한다. 다시 말하면 '방콕-쿤밍' 편도 비행기 값보다 비싼 불법 월경용 렌트 차량을 두 번이나 이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비자 작업까지 고려하면 최소 3-4일 걸리니 물질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만만찮은 출혈이다. 비자 연장 후 돌아오면 취재에 완벽하게 협조한다는 확언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내 곧 정부군 측에서 방아쇠를 당겼고, 통라 대령은 '안전'을 이유로 취재(협조) 불가를 선언했다. 교전 조짐을 보이니 되려 가야 한다는 게 나와 코 르윈의 항변이었지만, 설왕설래 끝 결국 나는 취재를 접고 짐을 싸기로 했던 것이다. 

 

전화상태가 고르지 않자 한걸음에 숙소로 달려온 코 르윈은 내가 구호 차량에 오르면 피난민 이동 행렬을 '오늘내일' 만날 수 있을 거라 장담했다. 19일로 끊어놓은 '쿤밍->방콕' 티켓은 버린다 치고, 중국 비자는 21일 만료다. 비자 만료를 넘기지 않기 위해 아무리 늦어도 20일에는 카친주를 떠나야 한다. 혹시 비자를 먼저 연장하고 오면 3-4일 후, 난민들의 증언은 들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내가 원하는 건 '피난길 동행' 취재다. 난민들 이동 루트는 지도상으로 보면 국경에서 멀지 않지만 이동수단과 주변환경을 고려하면 가깝지도 단순하지도 않았다. 오래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취재, 가기로 한다. 


 


나는 구호차량에 오르는 그날(17일)부터 18-19일 안에 무슨 일이 있어도 목표한 취재를 해내야 했다. 마이자양에 남아 있을 코 르윈은 19일이나 20일 무슨 일이 있어도 나의 '밀출국' 차량과 루트를 준비하기로 했다. 카친 발 첫 르포로 쓴 <카친평화 정글에서 길을 잃다>는 그렇게 시작됐다.

 

이후 난민들의 피난길 동행이 가능하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코 르윈의 '이니셔티브'에 이어, 두 명의 여성 활동가가 결정적 순간에 뒷심이 되어주었다. 한 명은 카친 구호단체인 WPN의 코디네이터 메리 톰(Mary Tawn)이다. 구호 차량이 처음 닿았던 랏가양 캠프에서 총괄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던 메리는 내가 랏가양에서부터 다음 단계인 공유양 마을까지 동행할 수 있도록 결정적 지원을 해줬다.

 

또 한 명은 WPN에서 '난민 영양'을 담당하는 닥터 누누 아웅(Dr. Nu Nu Awng)이다. 누누 아웅은 공유양 마을에서 다음 단계인 정글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내 의지를 적극 지지하며 피난민 태워오기 작전을 총괄하던 '남성 동지들'을 설득해줬다. 뿐만 아니라 정글로 들어가는 편도길까지 동행한 누누 아웅은 내가 피난민 트럭에 오르는 장면을 '인증샷'으로 찍은 후에야 트럭보다 여러 배 빠른 오토바이를 타고 공유양 마을로 되돌아갔다.

 

나중에 파악한 거지만 이 여정에 함께했던 이들 대부분은 내가 피난민들의 도착 장면 정도의 취재를 원하는 줄 알았던 것 같다. 최대한 '안전수칙'은 지키되 '피난 길 동행'이 필요하다 수없이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여, 이동 단계마다 우유부단한 상황들을 돌파해 준 세 명의 여성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충혈된 눈으로 풀잎 따먹던 아이들이 토해내던 휴전-평화협상의 '맨 얼굴', 그 값진 취재를 놓쳤을 것이다.


 


이후로도 남림파는 계속 교전에 휩싸이고 있다. 버마 내전 지역 한 복판에서 긴급 구호와 정보제공을 담당해온 자유버마유격대(Free Burma Ranger, FBR)에 따르면 1월 30일-31일 현재, 남 한(Nam Han), 남 가우(Nam Gau), 콩 런 (Kong Run) 등 남림파 주변 마을까지 정부군의 공격이 확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2월 10일에는 반군 수도 라이자가 속한 5여단 구역, 자 잉 양(Ja Ing Yang) 마을에서도 교전이 발생했고, 위태위태하던 바모 전선은 정부군에 함락됐다. 2-3명의 카친 병사가 사망했다는 후문이다.

 

 

우유부단한 상황을 돌파해준 건 세 명의 여성 활동가     

 

이번 카친 주 취재는 10월 22일 방콕을 출발 중국 윈낭성의 성도인 쿤밍을 거쳐 망쉬(Mangshi), 인장(Yinjiang)을 찍고 수도 라이자에 이르는 '남하작전'으로 시작됐다. 이 루트는 구멍 난 국경, 카친의 분쟁과 빈곤 그리고 중국의 산아 제한 정책 등이 복합적으로 촉발한 인신매매 이동 경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단 한 번도 이동해보지 못한 여행길과 오랫동안 열망해오던 카친 취재를 '마침내 하는구나'고 쏟아낸 흥분감이 망쉬에서 라이자로 향하던 차안에 가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10월 25일 밤 현지 시각 10시께. 차량은 어둠 속에 나타난 얕은 냇물을 철펑대며 가로질렀다. 6시간 여행길 나와 필담 소통을 해온 카친계 중국인 기사는 '여기, 라이자'라 말했다. 냇물은 국경이었다.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하기 위해 차를 바꿔타야했다거나 뇌물을 줄 수 밖에 없었다는 취재 경험담을 들은 바 있지만 내게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검문소 하나, 공안 유니폼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월경은 순탄했다. 그 '싱거운' 국경 통과는 공교롭게도 내게 좋은 생일 선물이 되었다.


 


이번 취재를 위해 여러 달 접선해온 온 뭉 아웅의 안내로 나는 '심사 호텔'에 짐을 풀었다('심사'는 카친 어로 '평화'라는 뜻이다). 라이자 시내 대엿개 쯤 되는 호텔들은 모두 반군소유로 일종의 '재정사업용'이다. 그러나 여행객이 있을 리 없고, 호텔에 묵는 이는 가물에 콩 나듯 들어오는 취재진, 아니면 무료로 숙박을 제공받는 컨퍼런스 참가자나 일부 카친 병사들 정도다.

 

시내 비즈니스는 거의 대부분 중국인들에 의해 운영 중이었고 간판도 카친어, 중국어 그리고 버마어 이렇게 세 언어로 쓰인 곳이 많았다. 최근 몇년간 버마에 손전화 바람이 불고 있다지만 반군 지역에는 통신 신호가 '점 하나' 서질 않았다. 그 빈자리에 중국 통신사들이 들어와 모두들 중국 심카드를 사용했다. 페이스북이나 트윗터, 유투브 등 소셜미디어를 금한 중국의 통신·검열 정책이 카친주에서도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다. 내게는 SNS가 중요한 정보원인지라 '라이자의 걸어다니는 백과사전' 프당셍의 도움으로 손전화에 짝퉁 페이스 북을 깔았다. 이름하여, '페이스북 나우(Facebook Now)'다. 


 


도착 과정도 그랬거니와 이번 취재도 대체로 운이 좋았던 것 같다. 라이자에 머물던 초기 전 소수민족무장단체들이 라이자로 모여 들어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대규모 회의를 가졌다. 버마 정부가 야심차게 밀어붙이던 '전국 휴전'(Nationwide Ceasefire)을 앞두고 각개격파 보다는 단일대오를 형성, 대정부 협상을 벌이자는 취지다. 비휴전단체 중 하나인 카친독립기구(KIO)가 주도한 회의다. 이 회의기간 내가 주목한 건 '전국휴전' 전망만이 아니다. 버마에 또 하나의 분쟁으로 심각하게 부상중인 로힝자·무슬림 이슈와 관련, 주류 버만족은 물론 '부국'(父國)의 '이슬람화'(Islamization)에도 맞서 싸운다는 아라칸 주 무장단체들에 대한 취재다. 더 정확히 말하면 로힝자 무슬림을 적대시하는 라까잉 불교도 무장단체다.

 

이미 오랜 기간 무장단체로 존재해온 아라칸해방정당(Arakan Liberation Party/Army)은 물론 몇 해 전 새롭게 구성된 아라칸군(Arakan Army, AA / 정치조직 없는 무장단체)을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후자는 카친주에 본부를 두고 카친 반군에 의해 훈련받은 조직이다. 소수민족("Ethnic")으로 공식 인정받는 단체들의 연대와 그 틈새에 끼지 못하는 로힝자 무슬림이 얽힌 분쟁 양상은 버마의 종교-종족 갈등이 얼마나 무한대로 복잡한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서는 '보트피플' 문제를 포함하여, 버마 분쟁이 나라 밖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게 될 3차 취재에서 자세히 다룰 계획이다.



무한대로 복잡한 소수민족문제 

 

한편, 라이자 체류가 길어질수록 나는 이 도시의 정감어린 표정과 미소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건 '(전쟁 중에도) 삶은 계속된다'와 같은 진부한 문구 이상의 끈질긴 생존력이자 '파괴되지 않을 권리'의 발현 같은 거였다. '목욕탕 의자'에 앉아 먹는 국숫집에는 아침마다 국수와 차를 마시러온 이들로 북적거렸고 이들을 친구 삼는 건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동남아의 주 교통수단 '뚝뚝'을 개조해 만든 소위 '스쿨 버스'에는 10살 미만의 어린 학생들이 가득 들어앉아 내게 '메롱'을 하거나 연신 깔깔거렸다. 피난민 인구가 넘치는 라이자에는 어린이 인구도 넘쳤다. 집집마다, 캠프마다 햇볕 아래 걸어 놓은 빨래는 거의 아이들 옷이다. 캠프의 저녁시간은 아이들의 책읽는 소리와 까불대는 소리로 생기가 넘치며 피난생활의 피곤함을 압도했다. 피난민 캠프에 대한 국제단체들의 지원은 제약을 받았지만 KIO 재난구호부인 '피란민 구호 위원회'(IRRC)와 지역 엔지오들이 능수능란하게 구호활동을 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동의 자유에 제약 없는 피난민 캠프를 만난 건 참 오랜만이었다. 라이자 성당의 응비 조셉 노(Nbwi Joseph Naw, 57) 신부의 말은 이랬다. 

 

"정부 통치구역 피난민 캠프 가봐라. 사람들 얼굴에 그늘이 가득하다. 여기 피난민들 보다시피 행복하게 웃고 있지 않은가."

 

속내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표정으로 나타나는 그들의 모습은 조셉 신부의 말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들었다. 지난 8월 취재했던 서부 아라칸 주의 '게토'나 다름없던 로힝자 무슬림 피난민 캠프와 카친 주의 피난민 캠프는 여러가지 면에서 -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으나 - '천지 차이'였다. 나는 이게 자신의 일처럼 피난민들을 돌보는 조직이나 기관(어떤 형태든)이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캠프와 이동의 자유마저 박탈당한 채 '조직' 없이 방치되고 고립된 캠프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끌벅적한 미소 뒷편에 분쟁의 그늘이 없을 리 없다. 실은 심각한 사회문제들이 악취를 내고 있었다. 이번 취재의 세 번째 기사로 작성한 인신매매는 대표적 사례다. 기사에 등장하는 후천성면역결핍증(HIV+) 환자이자 인신매매 피해자인 콘자(가명)는 그 악취에 가장 숨막혀하던 이로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아픈 사람들을 여럿 찍어봤지만, 이번처럼 '저 몸이 내 몸인양' 아팠던 적은 없었다. 너무 아파 입도 못여는 그녀의 사연을 나는 정확히 모른다. 어떤 연유로 아픈 몸을 하고 다시 중국에 갔는지(여성단체들은 그녀가 두 번째 중국행에서 돌아온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HIV+ 환자들이 절대 거르지 말아야 할 항레트로바이러스(ARV) 약통을 브로커에게 빼앗겼을 것으로 모두들 추정하는 바, 그 순간 얼마나 절망했을지, 그리고 멈추지 않는 설사와 구토로 범벅이 된 가눌 힘도 없는 몸을 중국 경찰이 이쪽으로 '넘겼을 때' 콘자는 머릿 속에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지. 많은 걸 나누고 싶었으나 내가 그녀 속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만이 내 안에 들어왔을 뿐이다.

 

마약 문제 역시 심각했다. 라이자에 친구들이 늘어날수록 '우리 오빠가' '우리 삼촌이' '우리 아빠가' 마약과다 복용(사용)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하는 이들이 적잖았다. 그나마 반군 통치 구역은 2년여 전부터 마약금지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있다. 캠페인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고, 소위 '감옥'에는 인신매매 사범과 함께 마약 사범들이 수감 중이다. 그러나 정부군 통치 구역으로 넘어오면 (헤로인) 주사 한 방에 천 쨧(약 천원)밖에 안하는 마약풍경이 '일상'이라는 게 여러 보고서와 관계자들의 지적이다(인신매매 기사 참조). 분쟁은 총싸움이나 승전가, 혹은 패전가 따위만 울리는 게 아니었다. 인격과 존엄이 바닥을 치고 관계가 파괴되며 질러대는 괴성도 나왔고 비명도 쏟아졌다.


 


1월 초 밤 9시께였다. 비명과 구타와 깨지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옆방이었다. 카친 병사인 남자도 취했고, 그의 파트너로 보이는 여자는 더 취해보였다. 아무도 말릴 재간이 없었다. 17년 휴전 끝에 재개된 2년여 전쟁은 교전 경험 없던 젊은 병사들을 최전선에 굵직하게 노출시켰다. 나는 그들 중 다수가 의심할 여지 없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를 겪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치료? 카운셀링? 생존에 급급한 반군 조직에 그런 게 있을 리도 만무하지만 KIO처럼 여유자금 있는 조직인들 진도 안 나가는 휴전 협상에, 멈추지 않는 전투 압박에 병사들의 스트레스를 돌볼 여력이 없다. 버마의 '민간 개혁 정부'가 피난민을 쫓고 또 쫓는, 반군 전선이 정부군에 하나둘 넘어가는 비 휴전선, 여기는 버마 북부 카친 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