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와 루쉰 그리고 의식화 / 최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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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3-11-02 04:46
조회
507

리영희와 루쉰 그리고 의식화



 


 


최진호(읽기의집/점필재연구소 연구원, <상상된 루쉰과 현대중국>(소명 2019) 저자)


 


1. 리영희의 루쉰 독서사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리영희가 투옥되었을 때 『르 몽드』 도쿄 특파원은 리영희를 한국의 ‘사상의 은사’로 소개했다. 반공을 내세운 억압적 국가기구에 대한 리영희 비판이 새로운 세대에 다른 사고와 실천을 촉발하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일 터이다. 새로운 세대가 리영희의 글을 통해 ‘우상의 저편’을 사고했던 것처럼, 리영희의 글쓰기와 실천은 루쉰에 많은 것을 기대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리영희 역시 루쉰을 자신의 ‘영원한 스승’이라고 말하고 했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 나의 글을 모은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시작하여 1990년대 나온 『自由人, 자유인』까지의 열 권 안팎에 수록된 나의 글들에서 독자들은 바로 노신의 그런 흔적을 쉽게 발견할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글을 쓰는 일과 역사를 보는 자세에서 노신의 제자 한 사람인 셈이다.


「영원한 스승, 노신(魯迅)」,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리영희는 글을 쓰기에 앞서 루쉰의 아무 글이나 책을 펼쳐 읽은 후 글을 쓴 뒤에 다시 루쉰의 마음으로 글을 점검했다. 루쉰으로부터 촉발받고자 했고 루쉰의 시선으로 글을 마무리한다는 점에서 리영희의 글에는 루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그런데 리영희가 루쉰의 글과 사상을 소개하던 시기는 반공·군사독재의 시대이자 검열의 시대였다. 그리고 루쉰은 마오쩌둥에 의해 중국혁명의 상징으로 자리매김된 상태였다. 따라서 일부 소설만이 번역이 허용될 뿐, 대부분의 루쉰 작품을 소개하거나 언급할 수 없었다.


리영희가 소장한 루쉰 도서 중 김광주와 이용규가 공역한 『魯迅短篇小說集』(1946)이 눈에 띈다. 이 책의 번역자들은 애초 베이징 베이신서국(北新書局)에서 출판한 『吶喊』과 『彷徨』에 수록된 단편을 전체 3권 분량으로 번역할 계획이었지만 실제로 두 권만 출판했다. 이 두 권의 책 뒤에 한국에서 루쉰 수용 1세대로 1946년 당시 서울대 중문학과 교수였던 정내동의 작품 해제가 붙어 있다. 이 작품 해설에서 정내동은 루쉰을 반봉건 계몽주의자로 읽어내고 루쉰의 본령에서 사회주의를 분리하려고 시도했다. ‘빨간 루쉰’과 계몽주의자 루쉰을 분리하려는 한국 루쉰 수용 전통으로 인해 한국사회에서 부분적이나마 루쉰의 글과 사상이 유통될 수 있었다. 그러나 리영희를 촉발한 루쉰의 그림자는 냉전체제가 허용한 루쉰의 형상보다 더 포괄적으로 보인다.


김광주와 이용규가 공역한 『魯迅短篇小說集』(1946). 표지 안쪽에 다른 사람의 사인이 있는 걸로 보아 노신을 접한 후에 중고책을 사서 소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우리의 현실 속에서 60년대 초부터 이른바 ‘평론’의 글을 쓰기 시작한 나는 노신을 교사로 삼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주로 일본어 번역판으로 시작했다. 일본의 권위있는 중국문학 연구가인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의 번역선집 『筑摩叢書』, 다음에는 이마무라 요시오(今村與志雄)의 번역선집, 그리고 얼마 뒤에는 학습사(學習社)의 『노신전집』 등으로 읽었다. 이것은 북경의 인민문학출판사판 전16권을 완역한 것으로 일어판으로 20권으로 된 것이다.


산본 리영희의 서재에 꽂혀있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번역한 노신작품집


리영희의 고백에 따르면 1960년대 초반보다 정확하게는 1960년대 중반 ‘일본을 경유한 루쉰’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다. 가령 리영희가 가장 먼저 언급한 다케우치 요시미 번역선집인 『筑摩叢書』의 정확한 명칭은 『魯迅作品集』(1~3)이고 1966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의 1권에는 『외침』과 『방황』이, 2권에는 『들풀』과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새로 쓴 옛날이야기』가, 3권에는 다양한 잡문이 실려 있다. 리영희는 냉전 한국사회에서 금지되었던 루쉰의 모습을 일본어로 번역된 루쉰을 중역(重譯)하는 과정에서 재구성해냈다. 마치 루쉰이 일본어로 번역된 동유럽과 북유럽 작품을 중역함으로써 중국인들의 사고습관을 해체하고자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사유의 재구성은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우상과 통념의 문제를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리영희는 언어와 장소를 달리하며 루쉰을 겪었다.


 


2. 사상의 은사, 루쉰


리영희가 루쉰의 글과 사상을 소개하던 시절은 “광신적 반공과 군사독재의 시대”였고 “노신은 선진적·진취적 개혁정신을 잘 못 안 우리 정보·검찰당국은 노신을 공산주의자로 규정하고 반공법의 대상”으로 삼았던 시대였다. 따라서 1960년대 말부터 평론가로서 글을 쓰기 시작한 리영희도 ‘빨간 루쉰’을 우회적으로만 활용할 수 있었다. 리영희는 이 작업을 소설이 아니라 잡문을 통해 추구했다. “1960년대부터 내가 우리 사회에 다소나마 소개할 수 있었던 내용도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은데, “그 작은 부분이란 말하자면 순수문학적 성격의 저술보다는 사상가·비평가·평론가로서의 그의 탁월한 글”이었다. 이 잡문 속에서 리영희는 루쉰이 지닌 하나의 태도를 끄집어낸다. 그것은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강력한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선행하는 태도의 문제였다.



내가 평론 문장 쓰기에 언제나 명심하는 교훈은, 노신의 광명 속에 앉아서 암흑을 시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암흑 속에서 암흑을 대상화하는 태도다. 그는 값싼 도덕론으로 문제를 논하는 자들은 혐오하고 멸시했다. 나도 그에 따라서 우리 사회의 그 현실상황에서 값싼 동정으로 미래의 행복을 민중의 눈앞에 들어 보이는 대신, 얼룩진 민중의 못남을 가혹하리만큼 밝혀 보이면서 그들의 함께 울고 웃고 괴로워하고 몸부림치는 삶을 따르고자 했다. 그의 글 한 글자 한 글자에서 우리는 억울한 민중에 대한 그의 사랑을 읽게 된다. 나는 아직도 내가 노신의 그 경지에 도달하기에는 너무도 개인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임을 개탄한다.


「영원한 스승, 노신(魯迅)」,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루쉰에게 있어 인식론적 전회의 순간이 있으며 이 회심 속에서 문학적 ‘태도’가 길러졌다고 지적한다. 다케우치는 이를 ‘정짜掙札’라고 말한다. 이 말은 갈등, 모순 혹은 저항이라는 다의적 의미를 갖는데, 다케우치는 이를 ‘저항’이라고 번역했다. 이는 노예 상태였던 이들이 외부의 초월적 힘에 의한 구원의 가능성을 거부한 채 다른 길을 찾기 위한 일종의 몸부림을 의미한다. 루쉰은 사람들에 앞에 서서 민중을 지도하고 이끌어가는 계몽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타자에 의한 계몽에 좌절한 인물이다. 리영희에 따르면 루쉰은 상대의 어둠 속에서 자신의 어둠을 보고 그들과 시선을 나란히 한 채 세계를 바라보았다. 즉 리영희는 이를 “스스로 암흑 속에서 암흑을 대상화하는 태도”라고 불렀다.


리영희는 루쉰을 계몽가로서 이해하는 대신 그를 통해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냉전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사유의 잠에 빠져든 사람들을 어떻게 깨어나게 할 수 있을까? 동시에 이들을 각성시킨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3. 가설과 경계


리영희가 『전환시대의 논리』 「머리말」에서 자신을 중국 문제에 관한 ‘해설자’ 특히 ‘가설의 해설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흥미롭다. 그에게 ‘가설’은 세상의 통념, 혹은 잠에 빠진 사유의 반대말을 의미했다. 동시에 이 가설은 어떤 진실을 드러내며 이를 은폐하는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촉구하는 증언의 성격도 갖고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천동설로 가릴 수 없는 다른 세계에 대한 진실이며 다른 사회적 관계를 촉구하는 증언인 것처럼 말이다(「머리말」, 『전환시대의 논리』). 말하자면 리영희에게 ‘가설’은 진리의 추구에 앞서 고정관념으로부터의 이동을 촉구하는 언어적 실천에 가깝다(「대륙중국에 대한 시각 조정」,『전환시대의 논리』). 항상 객관적이고 과학적 사고를 강조했던 리영희이기에 조금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리영희의 가설은 진리와 정보가 아니라 낯선 체험과 사유 이동과 관계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중국본토 사회를 밖에서 들어가 살펴보는 식으로 우선 들어가는 문제부터 시작하여 그 사회의 낯선 몇 가지 독특한 행동과 사상을 검토하면서 그 사회를 파악해보는 방법을 택하기로 한다.


「대륙중국에 대한 시각 조정」,『전환시대의 논리』



이런 의미에서 ‘혁명’이란 개념조차 문제적이다. 한국인들에게 혁명은 ‘파괴’의 대명사이며 뭔가 ‘흉악한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거꾸로 중국의 내재적 관점으로 방향을 전환해보면 중국의 역사는 혁명의 역사이며 마오쩌둥의 혁명도 중국의 수많은 혁명 중 하나이다. 더 나아가 ‘중국 대륙이 대나무와 장막을 드리운’, 그래서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는 나라라는 신화도 마찬가지이다. 냉전시기 중국이 ‘죽의 장막’ 속에 있었다는 것도 중국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보인 미국의 입장에 불과하다. 이와 반대로 중국은 ‘미국과 몇몇 동맹국’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나라의 언론에 문호를 개방해왔다. 홍위병으로 대표되는 문화대혁명은 대체로 ‘중국 지도자들의 권력투쟁, 인간성 파괴, 야만적 문명 말살, 강제된 개인숭배’라는 통념도 마찬가지이다. 리영희는 문혁을 하나의 실험으로 간주하고 역사적 평가를 유보할 때, 문혁이 거꾸로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기 위한 하나의 실천일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하면서 이를 중국의 내재적 원리를 통해 설명한다. ‘이곳’이 아닌 ‘그곳’의 논리로 관점을 이동하여 이를 ‘가설’의 차원에서 제기한다.


가설의 설정은 중국의 실체를 직접 접할 수 없는 현실적 제약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에게 진실을 전달하는 문제보다 더 선행하는 관심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번역의 관점에서 본다면 리영희는 원본 그대로의 번역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즉 진실을 그대로 전달한다는 재현의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하는 대신 중국과 한국 사이에서로 낯설지 않고 친연적인 영역을 활성화하는 문제를 고민했다.


리영희는 비판적 중국 연구자의 한 사람이자 1970·8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식인이다. 이때 리영희가 말하는 비판은 일견 진실과 거짓, 진리와 오류, 이성과 우상을 분할하는 척도의 정립 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전환시대의 논리』나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을 출판한 뒤 그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 D검사에 맞서 자신의 상고 이유서를 썼던 것처럼 그가 말을 하는 자리는 판사의 자리가 아니라(척도를 정립하는 자리가 아니라) 일종의 ‘범죄자’의 자리였다. D검사로 표상되는 국가권력은 “학생들이 길에 나와 시위를 하지 않는 사회, 노동자가 하루 몇 푼의 임금을 받고 상당액을 자본주에게 뺏겨도 파업을 하지 않거나, 꿈쩍 않고 12시간을 일한 뒤에 주는 대로 아무 말 없이 받아가지고 돌아가는 그런 사회를 안정된 사회”로 본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있어야 하는 것 그대로’를 말하는 사람은 비국민의 자리로 밀려가게 된다. 비국민의 체험은 공동체 밖의 체험이며 거꾸로 이 체험이 그 공동체의 경계들을 바꾸어간다. 이런 의미에서 리영희에게 비판은 가치와 척도를 이행시키는 것과 관련된다.


 


4. 의식화와 바보체험


리영희는 ‘노신(魯迅)’의 「왔다(來了)!」를 통해 의식화의 문제를 이야기한 적 있다. 루쉰은 「왔다(來了)!」에서 중국의 군벌들이 끊임없이 과격주의가 ‘왔다’를 외치면서 체제를 유지하려는 방식을 비판했다. ‘왔다!’라는 서슬 퍼런 구호와 달리 실제로 중국에 온 것은 없다. ‘온 것’이 부재하는데 ‘왔다!’가 외쳐질 때, ‘온 것’을 군벌들이 규정하게 된다. 즉 ‘과격주의가 왔다’라고 질문하는 순간 ‘과격주의자’가 만들어진다. 리영희에 따르면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의식화가 왔다는 겁나는 소리”의 본질이다(「왔다!」, 『분단을 넘어서』). 의식화되는 것이 특별한 지적 각성이 아니라 평범한 상식의 회복이라고 리영희는 말했지만 평범한 상식이 평범하지 않던 조건 속에서 평범한 말은 비상해 보인다.


리영희에게 ‘의식화’는 깨는 행위이고*, 이런 의미에서 ‘잠’과 대비된다. 쇠철방 속에서 잠든 사람을 깨우는 문제로 루쉰과 진신이(金心伊)가 대화를 나눈 일이 있는데 리영희는 이 이야기를 차용해 의식화의 문제를 고민했다.



잘 알려진 노신(魯迅)의 글 가운데, 빛도 공기도 들어오지 않는 단단한 방 속에 갇혀서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벽에 구멍을 뚫어 밝은 빛과 맑은 공기를 넣어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를 궁리하면서 고민하는 상황의 이야기가 있다. 방 속의 사람은 감각과 의식이 마비되어 있는 까닭에 그 상태를 고통으로 느끼지 않을뿐더러 자연스럽게까지 생각하면서 살아(죽어)가고 있다. 그런 상태의 사람에게 진실을 보는 시력과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되살려줄 신선한 공기를 주는 것이 차라리 죄악스러운 일일 수 있지 않느냐 하는 말이다. 물론 당시의 중국사회와 중국인의 상태를 안타까워해서 쓴 것이다.


「읽는 이에게」, 『우상과 이성』



리영희가 생각한 루쉰의 안타까움은 어떤 것이었을까? 적어도 루쉰은 잠을 자는 몇 사람이 깨어나고 그들이 쇠로 된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진신이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진신이는 ‘철로 된 방에서 나갈 희망’을 말하지만, 루쉰은 ‘창문 없는 방’에서 평생 나가지 못할 것을 예감했다. 리영희에 따르면 루쉰은 자신을 쇠철방에 갇힌 채 깨어난 존재라고 보았다. “노신은 광명 속에서 앉아 암흑을 시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암흑 속에서 대상화하는 태도”를 가진 작가였기 때문이다. 즉 자신을 쇠철방 밖에 두었던 진신이와 달리 루쉰은 쇠철방 있는 상태로 깨어났고 그 결과 누구보다 더 빨리 암흑을 보았던 것이다.**


리영희가 루쉰을 통해 펼쳐낸 ‘의식화’의 곤혹스러움이 여기에 있다. 의식화는 깨어난 해방이 아니라 깨어난 고통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리영희의 글을 읽고 ‘이불을 쓴 채 괴로움’에 떨었던 이유도 이와 달라 보이지 않는다.


리영희는 중국 관련 글을 읽은 젊은 세대를 혼란스러운 중국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1967년 1월 15일 『조선일보』에 실린 차영환의 인터뷰도 그 한 예이다. 차영환은 1949년부터 1965년 즉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도 요녕성 싱징(興京)에서 거주하면서 중국혁명을 몸소 체험했다. 이 인터뷰 기사에서 차영환은 ‘중공’을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그리는 ‘생지옥’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학교나 합작회사에서는 모든 일을 토론으로 결정한다는 말이나 문제에 대한 벽보와 이에 대한 당간부의 설득, 젊은이들의 스포츠와 오락에 대한 담담한 증언은 냉전의 상상력이 중국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차영환의 인터뷰가 실린 「중공의 젊은 세대」, 『조선일보』 3면, 1967.1.15


일차적으로 리영희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비정상적인 세계로 중국을 바라보다 그 생각에서 어긋나는 다른 감각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다른 감각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되돌아 왔을 때 그들은 오히려 흑백 논리와 이치 관념이 지배하는 한국사회를 대면하게 된다. 세계, 작게는 아시아를 둘러싼 냉전체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지배체제는 중국을 계속 타자화하고 있다. 독자들은 자신의 공동체가 그 인민들을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하고 계속 사유의 잠을 잘 것을 강요하는 세계임을 자각한다. 한국사회가 ‘사상적·지적·이성적 잠’을 요구하는 사회이며, 무엇보다도 일정한 ‘스테레오타입적 관념을 머리 속에 형성하고 계속 유지’하려는 공간임을 보게 된다.


이 체험과 자각의 결과로 일종의 전회 혹은 의식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제 이를 의식하게 된 존재들은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문제적 인물로 간주되게 될 터이다. 리영희와 함께 한 중국체험의 결과 아무런 문제 없어 보였던 공간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낯선 공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루쉰의 「광인일기」의 광인이 마주하게 된 관계, ‘광인’을 광인으로 만드는 배치와 대면한다. “개인 생활에 닥치는 소외감, 사회에서 일어나는 부조리, 국가의 이름으로 정부가 하는 일의 비리 같은 것을 걱정하거나, 생각하거나, 말한다거나, 글로 표현하려 한다거나 하는 민주사회에서의 당연한 행위는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어버리고 “돈 사람이 아니면 잘 봐주어서 아직 철이 덜 든 사람, 딱지가 덜 떨어진 사람”으로 ‘언제부터인지, 어째서인지’ 되어버렸다(「언제서부터인지, 어째서인지」, 『우상과 이성』). 의식화는 사회의 낙인과 비난이라는 (사회 통념상) 부정적 대상으로의 전락을 의미했다. 앞서 루쉰에게 자각이 그 자신이 쇠창살 안에 있으며 누구보다도 먼저 어둠을 봤다는 인식의 문제였던 것처럼, 의식화된 존재들은 한국사회의 어둠과 그 어둠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조건을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떨릴’ 수밖에 없었다. 안전과 안식을 줄 공동체 밖으로 자신의 몸을 두고 공동세계 바깥을 체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이라는 공동체 속에 있으면서도 한국 바깥의 삶을 살게 된다. 정상적인 시민들은 ‘문명화’와 ‘도덕화’의 단란한 잠에 빠져들게 되겠지만 이들은 비이성적인 광인이 된다. 의식화된 존재들은 비국민이 되어야 했다.


앞서의 리영희 글 『우상과 이성』 「머리말」은 루쉰의 「총명한 사람, 바보, 종」과 『외침』 「머리말」의 이야기가 뒤섞여 있는 듯한 사례이다. 이 이야기는 리영희가 생각한 의식화된 존재들을 보여준다. 사람들을 깨우는 문제를 고민한다는 점에서 『외침』 「머리말」과 닮았지만, 벽에 구멍을 뚫는다는 설정은 「총명한 사람, 바보, 종」과 닮아 있다.


루쉰의 「총명한 사람, 바보, 종」에서 총명한 사람은 불행한 삶을 한탄하는 노예에게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마취제를 투여했다. 며칠 뒤 노예는 다시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며 주인에게 창문을 하나 내어달라고 말하지 못하는 삶에 대해 탄식한다. 이 말을 들은 바보는 종이 사는 집으로 따라가서 냅다 흙벽을 부순다. 그리고 강도로 몰려 쫓겨나게 된다. 총명한 현자와 대조를 이루는 바보는 세계의 변혁을 시도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루쉰은 바보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냈지만, 바보 역시 노예의 거부에 의해 실패한다. 바보는 「광인일기」의 광인처럼 노예와 계속 충돌한다. 리영희가 이 사례를 『우상과 이성』의 「머리말」에 인용했던 것도 우상에 맞서는 이성의 실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리영희의 프리즘 속에서 의식화를 본다면 이 의식화는 어떤 의미에서 이성이 아니라 비이성 혹은 광인의 체험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공동체 바깥을 체험한 이들이 공동체의 외부인으로서 공동체를 흔든다는 점에서 바보의 형상과 닮아 있다. 시민사회 혹은 국가의 바깥을 체험하고 공동체 안에서 방치 혹은 감금될 존재들. 이들이 리영희의 글을 관통한 ‘의식화’된 존재들이다.


 


*“노신의 문학을 문학으로서 이해할 능력이 없다 보니 그 정신인들 이해할 수 있으랴마는 ‘왔다(來了)!’식 사고방식에 마비된 중국 민중의 인식을 깨우치려는 듯이었던 것만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현대적 표현을 빌리면 ‘의식화’라고 할까.”(「왔다!」, 『분단을 넘어서』)


**고병권, 「사상이란 감옥에서 상고이유서를 쓰는 이유」, 고병권 외, 『리영희를 함께 읽다』, 창비, 2018, 41~42쪽.


***「중공의 젊은 세대」, 『조선일보』 3면, 1967.1.15


리영희가 참가한 한국 루쉰연구회 제2차 국제학술대회 자료. 오른쪽 끝은 리영희가 수정을 가한 발표문 초안.
한국 루쉰연구회 제2차 국제학술대회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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