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민간인 학살 배상판결과 리영희 / 김효순
베트남 민간인 학살 배상판결과 리영희
김효순 리영희재단 이사장
지난 2월7일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 부대가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책임을 인정하고 국가가 배상하도록 명령한 판결이 서울 중앙지법에서 나왔다. 박진수 민사 단독 판사는 1968년 마을주민 집단살해가 벌어진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응우옌티탄이 2020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변호사들의 협력으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선고공판에서 원고 쪽 주장을 대부분 받아들여 국가의 불법행위와 함께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또 청구권 소멸시효가 오래 전에 지났다거나 살해가 있었더라도 게릴라전의 특성상 정당방위에 해당한다는 피고 정부쪽 대리인의 주장을 배척하고 원고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던 장애 사유가 있었으니 피고가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고 못박았다.
한국은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전투병력을 보낸 주요 참전국가이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여부와 배상책임 소재를 처음으로 다툰 이 판결은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앞으로 유사한 소송이 줄을 이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 판결이 상급심에서도 선구적인 판례로 굳어질지가 주목된다. 응우예티탄의 소송을 적극 지원해온 시민사회운동 진영은 판결을 환영하고 나섰다. ‘민간인 학살 범죄에 시효란 없다’는 국제법학계의 기준을 1심 재판부가 인정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민간인 학살 의혹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진상 조사, 자료 공개, 사죄 등 신속한 후속 조치를 요구했다.
베트남 참전에 수반된 문제들을 직시하지 않고 뒤처리를 기피해온 한국 사회의 인식이 이번 판결을 계기로 달라져 자성과 속죄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우리 사회의 분열상을 보여주는 다른 쟁점과 마찬가지로 언론의 보도자세는 갈라졌다. <한겨레>와 <한국일보가> 1면 머리기사로 다뤘고 경향, 국민, 세계도 1면에 눈에 뜨이게 배치했다. 반면 ‘조·중·동’으로 일컬어지는 보수언론 카르텔의 1면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경향은 개별 언론사가 현안의 중요도, 심각성을 어떻게 판정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는 사설에서도 나타났다. 한겨레, 한국, 경향, 서울이 ‘정부, 진실 규명에 성의 다하길’ ‘학살 첫 인정, 후속조치 있어야’ 등의 제목으로 사설을 게재했으나 ‘조·중·동’은 아예 다루지를 않았다.
일본인 전후보상 활동가들 한국의 베트남전 뒤처리 물어
이번 판결에 대한 활동가나 전문가들의 반응을 보면 “우리는 일본과 다른 길을 갈 수 있다”, “전후책임을 줄곧 회피해 온 일본을 국제사회에서 당당한 자세로 추궁할 수 있다”는 등 일본과 연관시킨 발언이 눈길을 끈다. 개인적으로는 1992년 한 신문사의 도쿄특파원으로 부임한 후 겪었던 일들의 기억과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 일제의 식민통치 정책으로 강제로 끌려 갔던 징병 징용 근로동원정신대 피해자들의 전후보상 소송이 봇물 터지듯 제기되던 무렵이다. 타사의 특파원들은 이 문제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나 나는 재판이나 관련 집회에 얼굴을 내밀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인 활동가들은 낯선 곳에 와서 헤맬 수밖에 없는 한국인 피해자, 유족들 옆에 바짝 붙어서 애로 사항을 들어주고 법정이나 숙소로 안내했다. 이들은 모금을 통해 활동자금을 마련하고 일본 언론이 제대로 다루지 않는 공판 진행상황을 상세히 알리는 소식지를 수시로 발행했다. 주말에는 토론회를 열어 각기 지참한 도시락으로 요기를 때우며 장시간 활동방향을 논의했다. 일본의 우익이나 우파 매체들은 전후보상 활동가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매국노’, ‘배신자’로 비난하고 한국에서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수임수수료나 챙기려는 ‘사건브로커’처럼 깎아내리기도 했다.
당시 소송을 담당했던 일본인 인권변호사와 활동가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한국인들의 전후보상 소송은 지속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활동가들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는 기회가 늘어날수록 이들의 헌신적인 자세와 열성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리적 거리감이 좁혀지면서 대화의 폭도 상당히 넓어졌다. 질문을 던지는 것은 기본적으로 기자의 역할인데, 활동가들이 나에게 묻기 시작했다. 이들이 아주 조심스럽게 말문을 여는 주제의 하나가 베트남전쟁 관련이었다.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이 민간인 살해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한국 사회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좀 당황하기는 했지만 답변에 궁색할 것도 없었다. 그 무렵까지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 민간인 학살문제가 공론화된 적이 없어 에둘러 포장할 것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오랜 세월 군사독재정권에 맞서는 민주화운동에 전력을 쏟아야 했고 기층민중운동은 노동자 농민의 생존권 투쟁에 몰입해야 했다. 그러니 베트남 민간인학살 문제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베트남 시민평화법정, 가운데 재판부 왼쪽부터 이석태 변호사, 김영란 전 대법관, 양현아 교수.
학살 추궁 이정표가 된 ‘베트남시민평화법정’
2000년 6월27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한겨레신문사 건물 안팎에서 난리가 벌어졌다. ‘고엽제후유증전우회’(후에 고엽제전우회로 명칭 바꿈) 소속 베트남전 참전군인 2천여명이 신문사로 몰려와 민간인학살 보도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며 건물 진입을 시도했다. 놀란 신문사 직원들이 셔터를 내리고 제지하자 이들은 거의 폭동 수준의 행동에 나섰다. 건물 밖에서는 종이박스 나무 등을 모아 불을 지르고 주차장에 있는 차들을 뒤집어엎었다. 건물을 에워싸고 돌아다니며 군홧발로 출입문을 걷어차고 짱돌을 던져 유리창을 산산조각 냈다. 출동한 전투경찰은 참전군인들의 험악한 기세에 눌려 제지에 나서지도 못했다.
이들의 분노를 촉발한 것은 주간지 <한겨레21>의 끈질긴 학살 의혹 제기였다. <한겨레21>은 1999년 5월 구수정 베트남 통신원의 르포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을 시작으로 관련 기사를 쏟아냈고 양민학살 악몽을 청산하기 위한 모금 캠페인도 벌였다. 오랫동안 봉인돼 왔던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 기사의 반향은 엄청났다. 민주화운동의 투쟁과정에서 비판의식을 키워온 일반 시민들이 캠페인에 적극 호응했다. 학살 현장에 있었다는 전직 장교의 고백까지 나오자 시민사회도 이 문제의 해결을 주요 과제의 하나로 인식하게 됐다.
<한겨레21>은 첫 보도후 20년이 지난 2019년 10월 학살 폭로의 불길을 댕긴 주역 몇 사람이 참여한 좌담을 실었다. 글을 쓴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이사, 주간지의 담당 기자였던 고경태 등은 당시 3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이들의 표현에 따르면 신문사에 난입했던 참전군인의 말처럼 “베트남전쟁에서 싸울 때 기저귀나 차던 애들”이 일을 벌인 것이다. 이들이 길을 연 진상규명 작업에는 많은 활동가, 전문가들이 속속 참여해 힘을 보탰다. 집요한 후속 보도, 피해자 초청사업, 정보공개 청구, 법적 투쟁 등의 노력이 쌓인 결과 한국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판결을 쟁취하기에 이른 것이다.
2018년 4월 서울 마포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 베트남시민평화법정은 중요한 이정표가 됐다. 50여 시민단체가 준비모임에 참여해서 ‘베트남전쟁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법정을 개최했다. 이 민간 재판은 일본 군부의 ‘성노예’ 강제동원을 단죄하기 위해 2000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천황’의 전쟁책임 거론이 금기시되어 있는 일본에서 많은 여성단체들이 협력해 우익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법정을 열어 ‘천황’의 유죄판결을 내린 것이다. 한국 여성운동의 약진은 베트남시민평화법정의 재판부 구성에도 드러났다. 3인의 재판관 가운데 김영란 전 대법관, 양현아 교수 등 여성이 두 명이었다. 베트남시민법정의 성공적 개최로 국내 시민단체의 넓어진 시야와 저력이 확인됐다. 시민법정 개최 1년 전인 2017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인권활동가였던 길원옥 할머니의 이름을 딴 ‘길원옥 여성평화상’이 제정돼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이사가 초대 수상자로 선정됐다. 반면 일본의 운동은 전반적인 우경화 추세와 군위안부 문제 대응을 둘러싼 내부 분열이 겹쳐 추진력을 잃어갔다.
박 정권의 전투부대 파병, 헌정 사상 최초의 ‘1당 국회’에서 처리
베트남 민간인 학살 의혹 진상규명 운동은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한국 사회의 양심이 살아 있음을 보여줬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베트남 현지에서 날마다 살육극이 벌어졌던 1960, 70년대 한국 사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한국인의 양심을 보여준 운동이 있었나? 없었다. 당시는 전세계적으로 반전·평화운동의 폭풍이 휘몰아친 시대였으나 여기서는 미풍조차 일지 않았다. 세계의 흐름과 동떨어진 완벽한 무풍지대였다.
박정희 정권의 베트남 파병이 없었더라면 민간인 학살 의혹이 제기될 소지도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국회의 파병동의안 처리를 기준으로 하면 파병 결정 절차는 1964, 65년에 이뤄졌다. 80세에 가까운 노인층이 아니면 상황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할 수 있는 세대가 없는 셈이니 그때로 돌아가 잠시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박 정권은 전투부대 파병으로 가는 멍석을 깔기 위해 사전단계를 차곡차곡 밟았다. 신문 보도를 살펴보면 그런 과정에서 파병의 정당성에 관한 국민적 논의가 폭넓게 행해졌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첫 파병결의안의 정식명칭은 <월남공화국 지원을 위한 국군부대의 해외파견에 관한 동의안>이다. 의무부대와 태권도 교관을 합쳐 140명이 대상이어서 별 논란이 되지 않았고 1964년 7월31일 본회의에서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당시는 남베트남을 ‘월남’, 북베트남을 ‘월맹’이라고 지칭했다.
1965년 새해 들어서 신문 지상에 ‘모종 중대문제’라는 요상한 문구가 등장했다. 이런 식이다.
외무부는 최근 월남 정부 및 주한외교사절들과 빈번한 접촉을 가져 항간에 널리 알려져 있는 ‘모종 중대문제’를 협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동원 외무장관은 지난 5일 하오 브라운 주한 미대사와 약 1시간 동안 이 ‘모종 중대문제’를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장관은 타드 주한 월남대사와도 외무부에서 회담했다. ...최근 외신 보도들은 한국군의 월남 파견 가능성을 보도했으나 이것이 모종 중대사건과 관련된 것인지의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박 정권이 외신에서 수시로 보도되던 한국군 파병 계획에 대해 보도 통제를 하니까 ‘모종 중대문제’라는 웃지 못할 조어가 나온 것이다. 박 정권이 비전투부대 파병 방침을 공식화한 것은 1월8일이다. 월남의 증파 요청에 따라 공병부대인 ‘비둘기부대’ 약 2천명을 보낸다는 것이다. 미국의 강력한 압력에 따라 방침이 정해졌음에도, 기사에 미국이 명시되지 못했다. ‘7만명의 생명을 한국 전선에 바친 어떤 나라’가 상당히 크게 영향을 끼쳤다는 식의 우회적 기술이 신문에 보인다. 두 번째 파병동의안은 1월26일 야권의 일부는 퇴장하고, 일부는 표결에 참여하는 등 혼선을 보인 가운데 여당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비둘기부대에 460명을 증파한다는 세 번째 동의안은 5개월이 지난 그해 6월18일 야당이 기권한 가운데 사실상 여당 단독으로 통과됐다.
박 정권은 이제 뜸을 들이지 않고 그동안 발톱을 감춰왔던 전투부대 파병안을 바로 꺼냈다. 전투병력 1개 사단을 증파한다는 동의안은 한일협정 비준안과 맞물려 여야의 대치전선이 선명해졌다. 야당은 안건 상정부터 저지하겠다고 나섰지만 7월14일 밤 여당이 기습상정을 하면서 의사장에서 여야간에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언론은 7년 전 ‘2·4파동’ 이후 최대격돌이라고 썼다. 2·4파동은 1958년 12월말 이승만 정권이 국가보안법의 적용대상을 확대하고 처벌을 강화하는 개정안을 처리하기 위해 경호권을 발동해 본회의장에서 야당 의원을 끌어내고 단독 가결한 것이다. ‘보안법파동’이라고도 하는 이 사건은 영구집권을 노리던 자유당 정권 말기의 발악적 폭거였다.
전투부대 파병안은 야당이 의원 사퇴서를 내고 등원하지 않아 8월13일 여당 단독으로 통과됐다. 언론은 헌정 사상 최초의 ‘1당 국회’라고 지적했다. 파병부대의 실제 내역은 육군 2개 연대, 해병대 1개 연대로 ‘맹호부대’와 ‘청룡부대’가 그것이다. 한일협정 비준안은 하루 뒤 역시 ‘1당국회’에서 처리됐다. 당시 파병 동의안에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사람이 공화당 소속 박종태 의원이었다. 그는 3년 뒤 3선개헌에 반대하다 공화당에서 제명됐고 1979년 가을 박정희 피살후 ‘YWCA위장결혼식’ 집회에서 사회를 보다가 보안사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다시 1개 사단을 보내는 전투병력 증파안은 해를 바꿔 1966년 3월20일 처리됐다. 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된 지 17일 만에, 본회의 상정된 지 3일 만에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야당이 표결에 참여해 반대표를 던지기는 했지만 들러리 선 것에 지나지 않았다. 1개 연대를 보충하고 1개 사단을 증파하는 것으로 맹호부대를 보완하고 ‘백마부대’를 추가로 파병하는 내용이다.
1960년대 중반 베트남 반전운동 시민단체 베헤이렌을 이끌던 두 소설가, 오른쪽이 오다 마코토, 그 옆이 가이코 다케시
일본의 베트남 반전운동, 미군 탈영병 구조, 전차 장갑차 수송 저지로 이어져
국회가 여러 건의 파병동의안을 처리하면서 제한적이나마 찬반 토론을 벌이기는 했지만 베트남전쟁의 본질을 둘러싼 심도 있는 논의는 없었다. 공산세력의 확산을 막고 자유세력의 보루가 된 월남을 지키는 ‘성전’에 참전한다는 관제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는 사회에서 개인이건 단체이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이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당시 세계의 표준이 아니라 이질적 현상이었다. 멀리 미국이나 유럽으로 갈 것 없이 옆 나라 일본의 경우를 보자. 한국에서 박 정권이 전투부대 파병 작업을 착착 진행하고 있을 때 일반 시민이 평화적 반전 시위를 시작했다. 존슨 미 행정부가 북베트남에 대한 융단폭격(북폭)을 확대해가자 철학자 쓰루미 슌스케, 소설가 오다 마코토, 소설가 가이코 다케시 등이 모여 정당, 노조에 소속되지 않은 ‘무당파’ 시민이 모여 시위를 벌이자고 호소했다.
1965년 4월24일 도쿄 중심부의 한 공원에 5백명의 시민이 모였다. 시위 현장에는 오다 마코토가 쓴 전단이 뿌려졌다. 아주 간결한 전단이 참가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전문을 그대로 옮긴다.
저희들은 보통 시민입니다.
보통 시민이라는 것은 회사원이 있고, 초등학교 선생이 있고, 목수가 있고, 음식점 주인아줌마가 있고, 신문기자가 있고, 꽃집 주인이 있고, 소설을 쓰는 남자가 있고, 영어를 공부 하는 소년이 있고
결국 이 팜플렛을 읽는 당신 자신이 있고
그런 저희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베트남에 평화를!’
이들의 참신한 선전과 시위 방식은 언론과 여론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베트남에서 벌어지는 학살에 분개하는 시민들의 참여가 크게 늘어나면서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약칭 베헤이렌)이란 단체가 정식으로 발족했다. 이들은 뉴욕타임즈에 반전 광고를 싣기로 하고 성금을 모아 그해 11월 전면광고를 냈다. 미국의 단체가 베트남전쟁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광고를 뉴욕타임즈에 싣기는 했지만, 외국의 단체가 한 면 전단광고로 베트남전쟁 반대를 미국인에 호소한 것은 유례가 없었다.
베헤이렌은 자유로운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표방했기 때문에 규약도 없고 회원 명부도 없었다. 시민들의 반전활동은 여러 갈래로 번져갔다. 베트남전장으로 파견되는 것을 거부하고 탈영하는 미군 병사가 속출하자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주는 비공식조직이 생겨났다. 탈영 병사를 한 군데서 오래 머물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협력자 망을 구축해 계속 이동시켜야 했다. 외국의 반전단체와도 접촉해 탈영병을 외항선에 몰래 태워 스웨덴 등 중립국으로 탈주시키는 작업도 벌였다.
보다 과격한 방식으로 투쟁하는 그룹도 나타났다. 주일미군의 전용 항만시설인 요코하마 노스 독 인근에서는 1972년 8월 유명한 ‘전차 수송 저지투쟁’이 벌어졌다. 파손된 전차 M48, 병력수송 장갑차 M113을 수리해 다시 베트남으로 보내기 위해 항만으로 이송하는 트레일러 대열을 활동가나 일반 시민들이 몸으로 제지하며 연좌농성에 들어간 것이다. 이 투쟁은 거의 백일이나 계속됐다.
1972년 8월 요코하마에서 베트남으로 이송될 미군 전차를 실은 트레일러 대열을 가로막고 있는 일본 시민들. ⓒ아사히신문사 홈페이지 캡처
‘반공 성전’의 나팔수 되기를 단호히 거부한 리영희
군사독재 정권이 지속되던 한국에서 이런 유형의 반전운동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만에 하나 직접행동에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면 엄청난 공안사건이 만들어지고 무자비하게 탄압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베트남전쟁과 관련해 한국에는 양심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언론인 리영희가 있었다. 그가 홀로 고군분투하며 한국에도 지성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70, 8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은 그가 고심 끝에 써내려간 글들을 정독하며 베트남의 진실을 깨우쳤고 세상을 보는 넓은 시야와 비판적 탐구정신을 갖추게 됐다. 베트남전쟁의 진행을 보며 번민하는 지식인들이야 있었겠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때로는 아주 정치하게, 때로는 우회적 방식으로 글을 다듬어 동시대인들에게 알리려고 발버둥친 사람은 리영희가 유일무이하다.
통역장교를 하다 1957년 늦은 나이에 <합동통신>에 입사해 외신부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리영희는 1964년 조선일보로 옮겨 정치부에서 외무부를 출입했고 65년 외신부장으로 발탁돼 베트남전쟁 보도의 실무 책임자가 됐다. 그는 자신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당시 어떤 고뇌를 했는지를 보여주는 글을 몇 편 남겼다. 쉽게 읽히는 것이 베트남전 종전 20주년을 맞아 <한겨레21> 95년 5월4일호에 기고한 ‘광기의 베트남전쟁을 회고하면서’이다. 이것은 2011년 나온 리영희산문선 <희망>에 수록돼 있다. 또 하나는 1997년 10월 젊은 문인을 상대로 한 ‘베트남에 먼저 사죄를 하자’는 강연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1999년 출간된 <반세기의 신화>에 실렸다. 뒤의 글이 앞의 글보다 훨씬 길지만 주요 골자는 비슷하다. 두 글에는 약간의 오기도 보이는데 리영희가 신문 스크랩이나 메모를 놓고 썼을 테니 불가피했을 것이다. 한겨레21 기고를 중심으로 인용해본다.
1965년초 조선일보 정치부의 외교담당 기자에서 국제부(외신부)의 책임을 맡게 되면서부터 75년에 베트남에서 총소리가 멎기까지 베트남에서 헛되이 죽어가고 있는 이쪽저쪽의 생명들을 생각하면서 편안히 잠자리에 드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6·25전쟁의 최전방에서 살던 3년 반의 시기에도 느끼지 못했던 양심의 쓰라림이었다. 자신이 편집한 그날의 베트남전쟁 기사와 해설이 외부의 압력으로 빠졌거나 변형될 수밖에 없는 날은 더욱 그랬다. .....
미국(한국)의 불세례로 매일 수없이 죽어가는 베트남인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나는 매일 우울한 마음으로 신문사를 나섰다. 그리고 가슴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딘가에서 소주나 배갈을 마셔야 했다. 나는 베트남인을 위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태로 밤늦게 돌아와 잠자리에 들어서도 뒤척이는 나에게 아내는 의레 같은 말로 나를 달래곤 했다 “당신 혼자서 분노하고 괴로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당신이 그런다고 베트남인 한 사람이 덜 죽을 것도 아니지 않아요?”
그것은 틀림없는 말이었다. 내가 무슨 힘이 있는가? 1930년대에 스페인에서 파시스트(프랑코) 정권과 그 군대에 대항해서 싸우는 민군을 돕기 위해서 스페인내란의 전쟁터로 달려갔던 그 당시 세계의 양심적 지식인들의 괴로움을 되씹을 뿐이었다. 베트남전쟁은 ‘제2의 스페인내전’이었다. 그래서 세계의 지식인들은 고민했던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미국의 전쟁화한 베트남 ‘반공성전’의 철없는 나팔수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시기에 내가 만든 조선일보 국제면은 전국에서 미국의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파병에 비판적인 유일한 신문이었다. 세계의 존경받는 지성인들이 미국의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발언을 조심스럽게나마 소개하는 데 힘썼다. 서방국가 통신들의 한국 군대의 잔학행위에 관한 기사도 자주 들어왔다. 그것도 공정하게 독자에게 알려야 한다는 나의 신문인적 책임감은 그때마다 외부압력에 부딪쳐 번번이 좌절하고 말았다. 이제는 고인이 된 당시의 편집국장 선우휘씨는 나와 같은 평안북도 출신이었지만, 베트남전쟁과 관련된 신문 만들기에서는 사사건건 나와 대립했다. 선우휘 국장에게 베트남전쟁은 ‘반공 성전’이었고 나에게는 ‘사회혁명’의 내전이었으며 베트남을 재지배하려는 외세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 전쟁이었다.
베트남 ‘관제 시찰여행’ 회유, 끝까지 응하지 않아
이 글에는 박 정권이 베트남 파병을 미화시키려고 언론인을 구워삶는 공작을 어떻게 진행했는지를 까밝히는 부분이 있다. 리영희가 얼마나 깐깐했는지, 자신에게 얼마나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대부분의 언론사 간부들이 ‘관제 시찰여행’에 별다른 고민 없이 동승했고 회유책을 단호히 거부한 리영희는 30년이 지난 1997년 4월에야 베트남 땅을 처음 밟았다.
1966년에서 67년 사이에, 국방부는 언론기관의 각부 부장들을 번갈아 사이공에 모셔다가 융숭한 대접을 했다. 국군 파월의 ‘영광’을 현장에서 확인케 하고, “베트남인들이 한국군 파병을 환영하고 한국 군인을 사랑한다”는 국내여론을 만들기 위한 행사였다. 모두들 융숭한 대접에 부응했다. 군복 입고 군모 쓰고 군화차림으로 며칠간의 여정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들의 보따리에서 녹용이니 코끼리 이빨 따위가 쏟아져 나온 후문이 자자했다.
뒤늦게 외신부장들의 차례가 왔다. 67년 여름이었던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여러 날 생각한 끝에 신문사와 국방부의 연락관에게 말했다. “나는 민간 신문기자이니 민간복을 입고 민간항공기로, 종군기자가 아닌 외신부장의 자격으로라면 가겠다. 어차피 국방부가 제공하는 군 수송기나 현지 시찰의 체재비 등 일체가 국민의 세금인 국고에서 나올 것이라면 그 비용을 나에게 달라. 그러면 나는 신문 기자의 윤리강령과 개인적 양심에 따라서 시찰하고 기사를 쓸 것이다. 결코 파월 국군에 해로운 기사는 안 쓰겠지만 그렇다고 사실이 아닌 국군 파월 찬양이나 미화의 글을 쓸 수는 없다.” 그 뒤에도 또 한 차례 전국 신문의 다른 부의 부장단의 행차 뒤에 외신부장단의 ‘국비시찰’ 여행이 제공되었으나 그때도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끝냈다.
이보다 앞서 중앙정보부가 나에게 한 달 정도 사이공 주재 특파원으로 가달라고 제의해 왔었다. 베트남 전쟁에 비판적인 내가 “베트남인들이 한국군을 좋아 한다”고 써주면 독자들이 다 믿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당시의 부장 월급의 2배를 따로 약속했다. 아내는 이 말을 듣고, 부장 월급 외에 2배의 수입이 어디냐고 가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가난에 쪼들리던 때였으니까. 그때 외신부장의 월급과 수당은 합계 2만원이었다. 결국 나는 베트남 땅을 밟지 못 했다
리영희가 제작한 베트남전쟁 찬반 토론 기사가 살린 <조선일보> 1967년 5월 18일자 6면. ⓒ조선일보
찬반 논쟁 형식 빌려 ‘베트남전 전범 재판’ 상세히 알려
리영희가 외신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베트남 보도는 살얼음을 딛는 것과 다름없었다. 조선일보 1965년 6월11일치 1면 머리기사 제목은 ‘베트콩 우계(雨季) 대공세’였다. 당시는 ‘남베트남해방전선’을 베트콩이란 멸칭으로 표기했다. 해방전선 3개 대대가 공세로 나와 미군 고문관 21명이 있는 월남군 병영을 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는 내용이다.
중앙정보부는 신문이 나온 그날 저녁 조선일보 편집국장, 편집부장, 편집기자 3명을 출두시켜 밤 늦게까지 머리 기사의 보도 경위 및 동기 목적 등을 추궁하고 다음날에도 다시 출두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편집국장은 합동통신에 있던 리영희를 조선일보로 스카우트한 김경환이었다. 65년 1월 국장이 되자 평기자 리영희를 외신부장으로 발탁한 사람이다.
중앙정보부는 이들에게 “그 기사를 크게 취급함으로써 한국군의 파월 문제에 심리적 영향을 주기 위한 저의가 있지 않으냐”고 따졌다고 한다. 리영희는 머리기사 보도 과정에 직접 연관이 없었는지 연행자 명단에는 없었다.
리영희는 정보부가 눈을 부라리는 상황에서 베트남전쟁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세심한 궁리를 했다. 다른 신문이 생각지도 못 하는 방식을 대담하게 시도했다. 대표적인 게 1967년 5월18일치에 ‘월남전을 보는 두 개의 눈’이란 제목으로 찬반 논쟁을 크게 실은 것이다. 찬성 쪽은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반대 쪽은 미국 철학자 시드니 후크의 주장을 대비시켰다. 물론 이것은 두 사람에게서 직접 기고를 받은 것은 아니고 프랑스와 미국 잡지에 실린 것을 정리한 것이다.
리영희는 찬반 균형 보도의 형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그의 의도는 5월6일부터 스톡홀름에서 5일간 열렸던 ‘베트남전 전범재판’을 상세히 소개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면에 ‘전범재판 판사단’이란 제목의 별도 상자 기사를 마련해 버트란드 러셀, 사르트르, 시몬느 드 보브아르, 아이작 도이처 등 저명한 지식인들을 나열했다. 그리고 편집자주에서 이 평화운동자들은 미국의 베트남전쟁이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며 존슨 대통령과 미국의 베트남전 주도 인물들, 그리고 베트남에 군사적 개입을 하고 있는 국가들이 공범자라는 ‘판결’을 내리고 막을 내렸다고 썼다. 신문사 편집국의 작업 관행으로 유추하면 이 편집자주는 리영희가 쓴 것으로 단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리영희가 이끄는 조선일보의 베트남전 보도는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화제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리영희는 신문사에 입사한 수습기자들을 교육시키다가 서울대 외교학과에서 자신의 기사가 텍스트로 사용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당시 학과장은 국제정치학의 태두로 인정받고 있던 이용희 교수였다. 리영희가 이 교수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의 번민이 절절이 드러나 있다.
선생님께서 제가 쓴 기사를 교재로 쓴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쓰지 않으시기를 부탁합니다. 왜냐하면 미국 정책, 베트남전쟁, 중국의 문화혁명, 제3세계 혁명 등에 대해 다른 신문의 기자들에 비해서는 좀더 충실한 안목을 갖고 쓰려고 노력을 하지만, 정부의 감시나 압력 때문에, 백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검열을 통과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스스로 가슴에 눈물을 머금고 웬만큼 타협해서 오십만 써서 내보낼 때도 많습니다. 그런 글을 내보낼 때는 아무도 안 봐주길 바라는 심정입니다.
유례가 없던 비동맹 대형 기획 ‘아시아·아프리카 물결’ 시리즈
합동통신에 입사한 1950년대 후반 리영희는 외신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옛 식민지들의 민족해방운동 관련 기사를 접하면서 세계사적 대변화에 희열을 느꼈다고 한다. 1960년은 아프리카에서만 17개의 신생 독립국이 탄생해 ‘아프리카의 해’로 불렸다. 반식민지 민족해방은 도도한 시대정신이 됐고 리영희는 베트남전쟁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했다.
리영희가 외신부장으로서 심혈을 기울인 기획의 하나가 1965년 6월6일치 1면에서 시작한 ‘아·아(亞·阿)의 물결’시리즈였다. 아·아는 아시아 아프리카를 말한다. ‘반둥회의에서 알제이까지’란 부제가 달린 이 기획은 1955년 4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1차 아시아·아프리카회의(반둥회의)에 이어 오랜 해방전쟁을 거쳐 독립한 알제리에서 개최되는 2차 아시아·아프리카회의를 앞두고 마련된 것이다.
한국에서 비동맹운동은 ‘친공산주의’ 경향이 짙다는 이유로 정권 차원에서 불온시하는 풍조가 강했다. 게다가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나라로 인식되고 있던 한국은 비동맹진영에서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고, 2차 아시아·아프리카회의에 초청받을 가능성도 희박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조선일보가 한국 주류사회의 관심사가 아닌 비동맹회의를 다각도로 조명하는 대형기획을 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모두 5회로 구성된 시리즈는 2회가 3면에 실렸다가 3회부터는 다시 1면으로 나왔다. 신문 지면 전체가 4개면, 또는 8개면에 불과했던 시절에 비동맹 관련 기사가 대부분 1면에 배치된 것을 보면 기획 자체가 김경환 편집국장과 리영희 외신부장의 합작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회부터 4회까지 기사 말미에는 ‘희 禧’라는 한자가 표시돼 있다. 편집자주를 비롯해 시리즈의 대부분은 리영희 혼자서 쓴 것으로 추정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한편 아·아회의 개막 열흘을 앞두고 리영희로서는 매우 곤혹스런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알제리에서 쿠데타가 발생해 벤 벨라 대통령이 실각하고 우아리 부메디엔 국방장관이 전권을 장악했다. 이 정변의 여파로 아·아회의는 연기됐다가 결국에는 무산되어 버렸다.
리영희가 기획한 '아·아(亞·阿)의 물결' 1편이 실린 <조선일보> 1965년 6월 6일자 1면. ⓒ조선일보
국제문제 보도에서 독보적인 색채를 맘껏 발휘하던 리영희 외신부장 시대는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김경환 국장이 1968년 1월 물러나면서 막을 내렸다. 후임으로 리영희를 탐탁치 않게 여기던 선우휘가 편집국장에 복귀하면서 조사부장으로 ‘유배’됐다가 69년 7월에는 신문사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리영희는 해직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베트남전쟁과 중국 문제 등을 본격적으로 다룬 장문의 글을 여러 잡지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그런 글들이 모아져 1974년 <전환시대의 논리>가 출간됐다. 1970, 80년대 의식 있는 대학생들의 필독서였다는 ‘문제서적’의 탄생이다.
리영희 책을 읽고 영향을 받은 독자 가운데 상당수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해 고초를 겪었던 시기에 리영희 자신도 해직 압수수색 투옥의 가시밭길을 걸었다. 그리고 87년 6월 대항쟁의 성과로 한겨레가 창간됐을 때 1면에 실리는 ‘한겨레논단’의 주요 필자로 참여했다. 그가 94년 3월5일치에 쓴 논단의 제목은 ‘베트남인민에 먼저 사과할 일’이었다. 그는 ‘푼돈이나 만지게 된’ 한국인들이 ‘파월군인’의 기분으로 베트남에 들랑거리고 있다는 세태를 지적하고 “돈벌이에 앞서서 한국은 어떤 형식으로건 사과의 표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썼다. 30년전 베트남전쟁의 추이를 처절한 마음으로 지켜보며 불면의 밤을 보냈던 그는 여전히 베트남을 잊지 않고 있었다.
리영희가 '한겨레 논단'에 '베트남 인민에 먼저 사과할 일'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한겨레> 1994년 3월 5일자 1면.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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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자주, 여전히 가장 중대한 시대적 과제 / 문장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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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밖에 없는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 김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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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와 시작하는 앎 / 최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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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힝야 제노사이드, 끝나지 않았다 / 이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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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레기’ 멸칭 피폐해진 언론 환경 더 악화시킨다 / 김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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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지 않은 사람들 – 류춘도와 리영희 / 정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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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는 선생이었다” -‘오랜 벗’ 임재경이 본 리영희 /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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