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는 선생이었다” -‘오랜 벗’ 임재경이 본 리영희 /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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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1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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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는 선생이었다” -‘오랜 벗’ 임재경이 본 리영희



 


 


 


김종철 / 전 한겨레신문 기자


언론인 임재경은 리영희의 둘도 없는 벗이다. 리영희가 임재경보다 7살이 더 많지만, 요즘 흔한 말로 둘은 소울메이트다. 리영희는 생전에 “조선일보사 재직시절의 절친한 친구” “60년대 초부터 오늘까지 변함없는 우의를 유지하고 있는 과거 조선일보사 동료”라며 임재경을 친구 목록의 앞자리에 올렸다. 물론 임재경은 한 번도 리영희를 친구라고 부른 적이 없으며, 벗이라고 자랑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리영희는 선생이다. 이번 글을 위해 필자와 세차례 만났을 때도 임재경은 항상 깍듯하게 “리 선생”이라고 호칭했다.


김종철 전 기자와 인터뷰 중인 임재경


선생 호칭이 저절로 입에 붙어


“<조선일보>에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처럼 리 선배라고 불렀어요. 언론계는 나이 차가 많아도 님이라고 안 붙이잖아요. 그런데 그가 1970년대 말 감옥에 갔다가 나온 뒤부터는 선생이라고 불렀어요. 왜냐고? 글쎄, 누가 시키거나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그렇게 되더라고요. 남재희 선배가 한 번은 그러더라고요. ‘너 왜 나한테는 선배라고 부르고, 리영희한테는 선생이라고 하냐. 너 이상하다’고요.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긴 한데 저절로 그렇게 나오는데 어떡해요?”


‘벗과 선생’의 특별한 관계는 1960년대 중반 <조선일보>에서 시작됐다. <합동통신>에서 발군의 능력으로 특종 기사를 쏟아내던 리영희가 1964년 <조선일보>에 스카우트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리영희는 당시 정치부에서 총리실과 외교부를 담당하고 있었다. 임재경은 1961년 공채로 <조선일보> 기자가 된 직후부터 경제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처럼 둘은 나이 차 외에도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관심사나 취향도 달랐다. 리영희는 경성공립공업학교(현 서울공고)와 해양대학교를 졸업한 이과생 출신의 깐깐한 스타일인 데 비해 임재경은 서울대 영문학과를 나온 낭만파 문학청년이었다.


“리 선생은 성씨나 고향 등에서 나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어요. 당시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학교 관계도 없었고요. 나는 주로 문학하는 친구가 많았고, 특히 서울 문리대를 나온 사람들과 어울렸죠. 그런데 리영희 선생은 그런 타입이 아니었어요. 그러니 리 선생을 나한테 소개할 사람도 없었어요. 그런데 한번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갑디다.”


처음에 임재경의 관심을 끈 것은 리영희의 영어 실력이었다. 리영희는 “외국에 나갔을 때는 한글보다 영어로 기사를 쓰는 것이 한결 쉬워요”라고 고백할 정도로 영어에 능통했다. 그런 리영희가 영어와 프랑스 등 외국어에 능숙했던 젊은 임재경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고민하는 인텔리라는 점에 끌려


“영문과 출신의 나로서는 영어를 잘하는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그때 리 선생이 비동맹회의 기사 등 정권에 밉보이는 기사를 썼다가 경찰서를 왔다갔다 하잖아요. 그래서 저 사람 괜찮은 사람이구나는 생각을 하게 됐죠. <조선일보>에서 선배나 동료, 후배들 중에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 당시에는. 그래서 리영희라는 사람한테 배울 게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이 양반이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도 금방 알았는데 그런 것보다는 뭔가를 열심히 고민하는 인텔리구나 하는 것에 더 끌렸어요. 만나봐야겠다 싶어서 제가 술 한 잔 사겠다고 해서 처음 만났지.”


임재경은 샹송과 술 등 낭만을 즐기긴 했지만, 삼성 재벌에 대한 비판 기사를 쓰는 등 정의감이 강한 기자였다. 리영희는 그에게 정의감을 넘어 비판의식을 일깨워줬다.


“경제부 기자들은 당시 주머니에 돈이 많았어요. 기자단에서 흰 봉투를 받으면 술을 먹거나 좋아하는 친구한테 한 턱 내고는 했어요. 신문사에서는 리영희 선생이 아주 좋아하는 선배였으니, 그를 자주 만났죠. 그를 만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그때 들은 얘기가 바로 베트남 얘기였어요. 당시 어느 누구도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이 없을 때였어요. 특히 <조선일보>에서는 그 말고는 아무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선생은 ‘결국 미국이 이기지 못한다’고 했어요. 또, 중국을 보라고 했어요. ‘지금 중국 말고 반식민주의를 얘기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 그런 얘기를 했어요. 나는 문과 계통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견해 같은 게 당시에는 없을 때여서 그런 얘기에 놀랐죠. 나를 선생이 최초로 깨우친 거였죠.”


백낙청과 리영희 만남을 연결


임재경과 리영희의 친교는 리영희가 신문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넘어 확장된 공론장으로 넘어가는 데 역할을 했다. 당시 지성계의 좁은 인적 풀과 흐름을 감안하면 시간문제였겠지만, 리영희를 <창비>의 백낙청에게 연결한 이는 임재경이었다. 임재경은 백낙청이 1966년 <창작과비평>을 만들 때 친구인 사업가 채현국과 함께 많은 도움을 주는 등 마침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창작과비평>을 준비할 때 내가 백낙청한테 그랬어요, 리영희라는 사람한테 얘기를 들었는데 베트남에서 미국이 안 될 거라고 하더라고 했죠. 그랬더니 백낙청이 ‘국내에서 누구한테도 그런 얘기를 못 들었다’고 하면서 같이 만나자고 해요. 그래서 셋이 만나서 술도 마시는 등 자연스럽게 얘기하는 관계가 된 거예요. 시대적으로 보면 리영희하고 백낙청이 관계된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봅니다. 다른 건 몰라도, 리 선생이 사상적으로, 역사적으로 혹은 운동적으로 이렇게 연결되는 것은 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걸 하기 위해서 만나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요.”


리영희도 “백낙청과 <창작과비평>과 인연을 맺은 것은 내가 그후의 인생에서 굉장히 큰 지적 자극을 받는 계기가 되었어요”라며 <창비>와의 인연을 중요하게 평가했다. 그는 미국의 한스 모겐소 교수가 쓴 글인 ‘진리와 권력’을 1967년 번역해 <창비>에 게재한 것을 시작으로 <창비>의 주요 필자가 됐다. 특히 그가 <창비>에 쓴 ‘베트남 전쟁’(1973)과 이후 중국 문화혁명 등에 관한 글들은 맹목적인 냉전 이데올로기의 낡은 껍집을 깨는 죽비이자, 진리에 목말라하는 젊은이들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키는 혁명적 사고였다. 한국 사회에 끼친 리영희의 이러한 영향을 두고, 프랑스의 <르몽드>지는 그를 ‘사상의 은사’라고 칭했다.


임재경과 리영희의 관심이 조우하는 반핵운동과 한반도를 둘러 싼 국제관계


사상의 은사아닌 생각하게 하는 선생


“<르몽드>의 도쿄 특파원으로 있던 필립 퐁스 기자가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나를 찾아와서 만났어요. 그때 내가 리 선생에 대해 여러 설명을 했더니 아마 그걸 바탕으로 기사를 쓰면서 리 선생을 ‘le maître à penser’라고 했어요. 우리말로 하면 ‘생각하게 만드는 선생’ 정도가 되겠죠. 젊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고민하도록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퐁스 기자가 적었는데 이걸 누군가가 번역하면서 ‘사상의 은사’(le maître de pensé)로 한 거예요. 크게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생각하게 하는 선생’이 더 정확한 말이라고 봐요.”


1969년 리영희가 권력과 점점 유착돼가는 <조선일보>로부터 사실상 쫓겨나고, 임재경도 1973년 <조선일보>를 떠났다. 그러나 둘의 우정은 깊이를 더해갔다. 때때로 밤새워 함께 잔을 기울이는 술친구였으며, 시대적 스승을 찾아 전국을 주유하는 길동무가 되기도 했다. 리영희가 원주의 장일순 선생을 찾아뵐 때, 리영희의 제기동이나 화양리 집에서 문화계 인사 등 많은 사람들과 만날 때 거의 대부분 임재경도 함께 있었다.
“리 선생이 장 선생 보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하면 그냥 쫓아갔지. 원주 가면 장 선생님도 만나고, 지학순 주교님도 만났어요. 박정희가 원주에서 근무할 때 있었던 기생 관련 에피소드를 장 선생한테 들은 게 기억나요. 리 선생이 장 선생하고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모르지만, 원주에 뵈러 여러 번 갔어요. 서울 리 선생 집에는 자주 갔고요.”


리영희는 회고록 <대화>에서 시인 김지하가 담시 ‘오적’으로 재판을 받는 등 필화를 겪을 즈음 김지하를 먼저 알고 난 뒤에 “김지하가 사숙하는 원주 가톨릭교구의 사상적 지도자인 장일순 선생을 알게 됐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1973년 8월 술 마시다가 통행금지 단속에 걸렸을 때의 일화는 임재경이 리영희를 얼마나 아끼고 존경했는지를 보여준다. 두 사람은 통금 위반으로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 갇혀서 날이 밝으면 즉심에 회부돼야 할 처지에 놓였다. 당시 이미 정권에 의해 문제교수로 찍혀있던 때라 임재경은 유치장 경찰관을 구슬러서 리영희가 즉결재판에 가지 않도록 빼냈다. 1977년 12월 리영희 모친상 때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던 리영희를 대신해 임재경이 호상을 맡아 장례를 치른 데서도 둘의 친밀한 관계를 알 수 있다. 리영희도 고민거리나 걸끄러운 문제가 있을 때 임재경에게 의지하곤 했다.


법정 환호 잠재우는 악역 맡아


“<8억인과의 대화> 등을 냈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리 선생이 잡혀가서 1978년에 재판을 받을 때였어요. 재판이 열릴 때마다 리 선생의 팬들이 법정을 가득 채우고는 엉터리 재판이라고 고함치는 등 항의를 했어요. 그런데 리 선생이 그런 게 굉장히 부담스럽고 괴로웠던 것 같아. 재판 결과에 도움이 안 될 거라고 여겼던 거지. 한 번은 딸 미정이가 <한국일보> 논설위원실로 찾아왔어요. 아저씨한테 할 말이 있다면서. 뭐냐고 했더니 아버지 재판에 오는 사람들에게 소리 좀 지르지 말아달라고 얘기를 해달라는 거야. 내가 그분들에게 그런 요구를 어떻게 할 수가 있겠느냐고 했더니 아버지 부탁이라는 거예요. 알았다고는 했지만, 나도 괴롭더라고요. 그 사람들은 전부 ‘리 선생님 파이팅’ 하는 건데 그걸 그만두라고 해야 하니까 말이죠. 그랬다가 자칫 리 선생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리 선생을 생각하면, 법정에서 왕왕대는 게 별 의미가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다음 재판 때 지지자들에게 큰소리치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분들은 임 선생이 뭔데 우리한테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하길래 법정에서 방청객이 시끄럽게 하면 판사나 검사가 좋아할 게 뭐 있겠느냐고 얘기했죠. 그분들이 다행히 제 부탁을 들어줬어요.”
이미정은 이에 대해 “시국사범을 장기간 구금하는 사회안전법이 생긴 지 얼마 안 된 때여서 아버지가 굉장히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때 재일동포 서준식씨가 7년 만기복역을 마친 뒤에 사회안전법으로 10년 보호감호 처분을 받았거든요. 그걸 보면서 마음을 졸였던 아버지가 임재경 아저씨를 꼭 찾아가서 말씀을 드려라고 하셨어요. 제가 숙명여고 다니고 있었는데 마침 <한국일보>가 바로 옆에 있어서 찾아갔었죠.”


임재경은 리영희의 석방을 위해 언론계 등 각계 인사들로부터 탄원서를 받는 데도 앞장섰다. 유신정권의 광기어린 폭압정치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숨죽인 채 바짝 엎드려 있을 때였다. 언론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임재경이 택한 돌파구는 <조선일보> 시절의 또다른 벗인 남재희였다. 남재희는 당시 정부가 대주주인 <서울신문> 주필을 맡고 있었다. <조선일보> 시절 임재경은 외신부장 리영희와 정치부장 남재희랑 친했다. 리영희와 남재희는 <조선일보>의 실력있는 비주류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안 좋았다. 리영희가 썼던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수상의 인터뷰 기사(1969)를 둘러싸고는 편집국에서 둘이 집기를 던지면서 크게 부딪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리영희를 위해 남재희를 찾아간 것은 <서울신문> 주필이 서명하면 다른 현역 언론인들도 쉽게 동참할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탄원서를 들고 맨 먼저 남재희 주필을 찾아갔단 말이요. 그걸 보더니 남재희 선배는 두 말 않고 썼다고. 남재희가 서명을 하니까 그후 여러 현역 언론인들도 부담을 덜 느꼈는지 대부분 했어요. 그런데 <조선일보> 기자 출신인 김학준은 안 하더라고. 그는 대학 다닐 때 학생운동도 했다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 있나 싶어서 내 입에서 저절로 쌍욕이 나오더라고. 그는 나중에 서울대 교수로 갔죠. <한국일보>의 조세형도 서명을 안 하더군요.”


임재경에 따르면, 남재희는 리영희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이기도 했다.


“리 선생이 1980년 1월 출옥하고 난 뒤였을 거예요. 남재희 선배가 나한테 이러더라고요. ‘야, 리영희가 나왔으니까 내가 술 한잔 살 테니 같이 보자’고 해요. 나는 속으로 그거 안 될 텐데 생각하면서도 일단 리 선생한테 얘기를 전했지요. 리 선생은 웬일로 그러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좋은 한식집에 가서 셋이서 밥 먹고 술 마시고 했어요. 근데 얘기가 썩 잘 되지는 않았어요. 아마 그것이 리 선생이 남 선배와 자리를 같이 한 마지막이었지 싶어요. 둘은 스타일이 많이 달랐거든요. 리영희는 리영희의 길이 있었고, 남재희는 남재희의 길이 있는 거죠.”


임재경에게 천렵파티 열어준 리영희


전두환 신군부세력이 정권을 잡은 뒤 언론계에서 쫓겨난 임재경이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으로 공부하러 떠날 때였다. 리영희는 벗과의 이별을 앞두고 특별한 이벤트를 마련했다.


“하루는 리 선생이 오늘 뭘 할까 그러더니 느닷없이 천렵을 가자고 하대요. 나는 말만 들었지 그런 것을 해본 적이 없는데 리 선생이 고기잡는 족대를 구하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우르르 근교 물가에 가서 놀았어요. 후배 기자였던 신홍범 등 열 명 정도를 불렀더라고요. 나를 위한 파티를 열어준 거죠. 리 선생이 그런 만큼 다정스런 데가 있는 사람이었어요.”


1991년 8윌 28일 지리산에서 (왼쪽부터) 임재경, 리영희, 신홍범


이 대목에서 임재경은 안타까움과 회한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끄러운 게 말이야. 내가 리 선생 말년에 자주 만나지 못했어요. 그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왜 자주 못 찾아뵀는지 모르겠어. 나한테 그런 점이 있어요. 어른들 찾아뵙는 동양의 미덕이랄까 그런 것이 약했어요. 그래서 요새 친한 후배들과 자주 못 만나서 약간 마음이 서글프지만, 내가 못 했기 때문에 사실 할 말이 없어요.”


1989년 4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리영희 (당시 한겨레 논설고문)와 반갑게 인사하는 임재경


하지만, 임재경은 리영희의 마음을 대체로 정확히 읽었으며, 필요한 상황에서는 동지적 보조를 잘 취했다고 자부한다. 리영희가 1989년 한겨레신문의 북한 방문취재를 기획했다가 구속돼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 감옥에서 한겨레신문 부사장 임재경에게 보낸 편지 전문을 지면에 게재했던 일을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리영희가 1989년 한겨레신문의 북한 방문취재를 기획했다가 구속돼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 감옥에서 임재경에게 보낸 편지 전문


“리 선생이 형무소에서 나한테 편지를 보냈어. 그것을 내가 그대로 신문에 싣자고 주장해서 그렇게 했어요. 편집국에서는 개인한테 온 편지인데 괜찮겠느냐는 의견이 있었는데, 내가 그랬죠. 이건 사적인 편지가 아니라 신문사 전체 나아가 독자들에게 보낸 것으로 봐야 한다고요. 리 선생한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속으로 ‘나하고 리 선생은 말이 통하는구나. 서로 딱딱 맞는구나’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얼마 뒤에 이부영이 감옥에 들어갔는데 그도 역시 논설주간 성유보한테 감옥에서 편지를 보냈어요. 그 편지 역시 지면에 그대로 실었죠. 이부영씨가 기자적인 센스가 있는 거지. 아, 감옥에서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나도 편지를 쓰면 되겠구나고 배웠다고 봐야죠.”


임재경은 1960년대 중반부터 40여년 동안 리영희를 지켜봤다. 가족을 빼고, 리영희 곁에 가장 오래 또 가까이 있었다. 그에게 리영희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했다.


“이 분은 활동가로서의 행적도 많지만, 저널리스트로서 또 지식인으로서 아주 독특합니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해서 70년대와 80년대에 인텔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주추였습니다, 주추. 그것을 보고 배우면서 후배들이 나온 거예요. 그런 점에서 우리 현대사에서 리영희 선생은 아주 독특한 존재입니다.”


 


* 이 글은 임재경 선생의 회고를 정리해서 작성했으며, 앞뒤 맥락을 살리는 내용은 리영희의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과 임재경의 <펜으로 길을 찾다>를 참조했다. 글을 쓰기 위해 2024년 1월 임 선생을 3차례 인터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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