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과 지성의 빛: 내가 기억하는 리영희 선생님 / 박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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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2-12-31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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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과 지성의 빛: 내가 기억하는 리영희 선생님


 



 


 


 


 


박노자(블라디미르 티코노프) / 오슬로대


 


나는 ‘리영희’라는 성함 석자를, 아마도 1995년쯤 처음으로 들어보게 된 것 같다.  그해 여름에 내 처형의 광명시 소재 아파트에서 몇 주를 보내게 되었는데, 처형과 그 남편은 한때 학생운동권의 전력이 있었다.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을, 나는 그 집의 서가에서 처음으로 발견했다. 사상 탄압이 대단히 심했던 1970년대에 이와 같은 내용의 책이 저술되어 나올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책 때문에 구속도 되고 해임도 당했다”는 이야기도, 내가 그때 들은 것으로 기억된다. 그 이야기와 함께 “이 책들이 우리 세대의 필독서였다”는 말도 들었다. 반공주의적 광기의 시대에 현대 중국이나 통일 문제를 이 정도로 차분하고 객관적인 어조로 다룰 수 있었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그때 나에게는 매우 신기하고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리영희’라는 성함을 다시 접하게 된 것은 1990년대에 한국 현대 사상사를 공부했을 때였다.  재(在)베트남 구수정 한겨레21』 통신원이 베트남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를 파헤쳐 국내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형성된 것은 1999년인데, 내가 ‘베트남 전쟁과 현대 한국’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6-7년쯤의 일이다. 1998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베트남에 가서 “두 나라 사이의 불행한 과거”에 대한 “유감” 발언을 하기 전의 일이었다. ‘베트남 특수’, 즉 미국 침략에의 편승과 전쟁 폭리로 1960-70년대의 한국에서 자본주의적 개발이 가속화되었다는 것은 역사 자료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었던 일인데, 과연 국가 주도의 ‘개발’과 기업의 치부(致富), 그리고 반공주의적 이념의 이름으로 행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해 한국 지식인 중에서 파병 반대를 한 양심가(良心家)들이 있었는가라는 게 내가 궁금했던 일이었다. 


자료를 확인해보니 다소 우울한 심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준하 선생이나 강원용 목사의 파병 반대 의견은 있었지만, 신앙처럼 된 반공주의와 경제적인 이익 타산까지의 여러 이유로 지식인 포함, 그 당시의 한국 사회에서 파병은 당연시됐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리영희 선생님은 파병 반대의 입장을 고수하여, 1969년에 조선일보사에서 해직되고 책 외판원 같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일을 알고 나서, 냉전 극복의 일관된 논리에 기반한 이와 같은 파병 반대가 한국에서의 ‘평화사상’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리영희’라는 역사적 인물이자 당대인에 대한 나의 궁금증은 커졌다. 그의 마지막 투옥이 1989년, 즉 전두환 독재가 종식되고 나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더욱 더 궁금하게 됐다. 도대체 어떤 ‘위험 사상’의 소유자이고, 어떤 ‘위험한’ 행동을 벌인 분이기에, 이미 형식적 민주화가 진행됐던 가운데에서도 투옥을 당하게 된 것인가?


직접 만나 뵐 기회는 1999년에 드디어 왔다. 2000년대에 안타깝게도 폐간된 『당대비평』 창간 2주년 기념 모임에 나도 가게 되고 리영희 선생님도 오셨다. 그때 나에게 다소 의외였던 사고(?)가 발생했다. 내가 리영희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다지 깊이 절하지 않았는데, 어떤 출판사 사장인 남성이–아마도 술에 취한 상태에서–“우리나라의 위대한 지성인 앞에서 이렇게 제대로 인사를 안 하는 건 건방진 일!”이라고 고함을 지르고는 “제대로 인사하라”면서 내 등을 손으로 눌렀다. 물론 그 자리에서 주최측인 『당대비평』 편집진이 그를 말렸고, 그가 “폭력 사용에 대해서 사과한다”는 말을 곧 했다. 23년 전의 일이라 그의 이름도 기억할 수가 없는데, 1990년대까지만 해도 비록 모임의 ‘이념’은 진보적이라 해도 특히 만취한 상태에서는 이런 크고 작은 마초적인 폭력이나 폭언이 꽤나 흔했던 걸로 기억한다. 특정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군사적 마초 문화가 만연한 사회에서 그 ‘이념’의 진보성 여부와 무관하게 개개인 ‘인권’에 대한 존중의 ‘습관’ 자체가 잘 안돼 있는 것이었다. 


한데 이 자리에 계셨던 리영희 선생님은 이 해프닝에 대해 다소 미안하게 생각하신 모양이다. 그는 나를 자신의 자리로 불렀고,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최초로 본격적으로 나눌 수 있었다.  “선생님의 책이 제 윗세대의 운동가들에게 필독서였다”고 말하자 그는 “난 그래서 미안하다. 내 책을 읽어서 감옥에 간 사람들이 하도 많기 때문에 나로서는 너무 미안한 일이다”라고 했다. 사실, 독자로 하여금 독재정권 하에서 감옥에 갈 만큼의 비판적 사고를 키운 그 또한, 그 ‘위험한 책’을 쓰고 출판한 죄(?)로 몇 번이나 투옥을 당해 건강을 크게 해치신 바 있다. 그런데도 우선적으로 독자들의 고생부터 생각한 그의 태도는 대단히 이상적으로 보였다. 


단명 잡지인 『당대비평』 덕택에 나와 리영희 선생님 사이의 인연은 이렇게 맺어졌다. 나는 경희대에서 비정규직으로 교편을 잡고 있다가 2000년3월에 오슬로대에서 정규직 발령을 받아 거기로 가게 는데 이후에도 리영희 선생님과의 교류는 계속 이어졌다. 이미 주로 전자우편을 쓰게 된 컴퓨터 본위의 세상이었지만, 리영희 선생님은 종이 편지나 팩스를 아름답게도 고집하셨다. 그의 편지도 몇 차례 받았지만, 『당대비평』에 발표한 그의 글, 남북한 군사력을 정밀히 비교해 사실상–남한 국방부의 주장과 달리–남한이 재래식 무기 차원에서 우위에 있다는 점을 입증한 글을 보고는 그의 분석력과 객관성에 감동받았다. 2006년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했을 때 결국 이 ’북핵’이란, 재래식 무기 차원의 남한 우위를 상쇄시킬 북의 무리수라는 생각이 들었고, 리영희 선생님의 예전 글이 떠오르는 건 당연했다. 


계속 리영희 선생님의 글을 읽고 서신 왕래까지 하고 있던 2003년, 한겨레21로부터 “국내 지식인 중에서 누구와 대담을 하고 싶냐”는 질문을 받았고 나는 스스럼없이 “리영희 선생님”이라고 바로 답했다. 다행히 리영희 선생님도 관심과 여유가 있으셨기에, 그해 여름 내가 방학을 맞아 한국에 왔을 때 선생님과의 대담이 성사됐다.(*대담과 인터뷰 보러가기)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당시에 중추신경에 문제가 있어서 몸이 불편했는데 병인(病因)을 여쭈어보니 난방이 안되는 서대문 형무소 감방 생활 이후에 건강이 악화됐다면서, 일제 시절보다 한국 군사독재 시절에 오히려 감옥의 생활 여건이 나빠졌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 말이 그 뒤에 자꾸 생각나곤 했다. 한국의 독재정권이 식민지 시대의 감옥 등을 포함한 폭압 기구, 시설 등을 인수받았다는 점이야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여건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알 길이 없었다.


이외의 흥미로운 대화는 ‘문자(文字)’와 관련된다. 알고 보니 리영희 선생님은 여전히 한국어보다 일본어 읽기가 다소 편하셨던 것이다. 단어나 개념의 의미를 축약시키고, 잘 보는 사람에게는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한자들이 섞인 일문(日文) 읽기가, 순수 한글만의 국문 읽기보다 빠르다는 말씀이었다. 아마도 일제 시절에 교육을 받은 많은 한국인들이 이와 같은 문자 생활에 대한 감상을 공유할 터인데, 한글 민족주의 당위 때문인지 그런 발언을 다수가 쉽게 하지 못해왔다. 한데 생각해보면 한자란 동아시아 지역 공통의 문자 체제이며, 전통시대에는 물론 근대에 접어들어서도 한국어의 조어(造語) 과정에서 계속 활용돼온, 의미의 압축이 가능한 매우 유용한 글자이다. 요즘은 한글 민족주의라는 이유보다는 주로 영어 공부에 밀려 차세대가 잘 배우지 않고 있지만, 사실 한자와의 결별은 득보다 실이 더 크다고 볼 여지도 있다. 나는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해왔지만, 리영희 선생님과의 대화는 내 확신을 더욱 더 굳히게 만들었다. 


대담과 그 전후 이야기에서도 나왔지만, 리영희 선생님은 한글 민족주의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자체에 대해서도 매우 회의적이었고, 본인의 인생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이성(理性)에 기반한 사고, 그리고 평화라고 몇 차례 강조하셨다. 그는 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희망했고, 남북한이 스스로 신뢰를 쌓아서 점차 평화 공존에 익숙해지고 통일을 향해 같이 가기를 기대하셨다. 실향민으로서의 본인의 인생 경험이 녹아 있는, 평생의 고민과 사회적 활동의 결론인 단계적, 평화 위주의 통일론이었다. 남북관계는 거의 복원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주한미군의 지속적 주둔에 대한 한국인의 지지는 이미 90%를 넘었고, 한국의 핵무장을 60%나 지지하고 있다는 이 불행한 시대에, 나는 리영희 선생님의 평화를 향한 노력을 자주 회상하곤 한다. 전세계적인 열강 각축과 침공, 미-중 대립과 미-러 대리전의 시기일수록, 우리는 반대로 이웃인 북한과의 “공통의 이해(利害)”를 추구하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 하지 않을까? 미-중 충돌이 한반도의 전장화(戰場化)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남북관계부터 정상화하고 신뢰가 구축돼야 하지 않을까? 대립과 갈등이 심할수록, 이성에 기반한 평화를 늘 호소하셨던 리영희 선생님의 목소리가 더 그리워진다.


2006년에 리영희 선생님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세계한민족포럼에 참여하신 김에 내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레닌그라드)도 방문하셨다. 그 기회에 노르웨이로도 모시려 했는데, 매우 아쉽게도 여의치 않았다. 그 뒤에 이미 몸이 많이 불편해지신 리영희 선생님이 이명박 정권의 권위주의적 추태를 비판하신 것을 듣고, 이 분의 목소리야말로 어려운 시대일수록 더 절실히 필요한 양심과 지성의 목소리라는 내 평소의 생각을 더욱더 굳혔다. 그러다 2010년에 리영희 선생님께서 서거하셨다. 그때의 내 슬픔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가 가신 뒤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 그가 한때에 맡았던 사회적 ‘목탁(木鐸)’의 역할을, 지금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사회의 원로가  없다. 그래서 한국의 앞날이 가면 갈수록 더 걱정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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