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의 리영희 선생 / 오창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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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2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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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리영희 선생



 


 


 


오창익 / 인권연대 사무국장


 


리영희 선생의 교분은 워낙 깊고 넓으니, 다양한 분들이 선생과 연을 맺고 지내셨겠지만, 나는 선생의 말년에 비교적 자주 뵈었던 인연이 있었다.


이를테면 선생의 마지막 사회적 발언은 내가 몸담은 ‘인권연대’의 창립 10주년 기념식이었다. 2009년 7월 1일(수) 저녁에 조계사 구내 불교문화관에서 연 행사. 선생은 여기서 이명박 정권이 초기 파시즘에 들어섰다고 걱정하셨다. 저녁에 연 행사였는데도 선생의 말씀은 다음 날(7월 2일) 경향신문 1면에 실렸다. 게다가 똑같은 내용의 기사가 그다음 날(7월 3일) 한겨레 1면에 다시 실렸다. 이례적인, 그리고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경향신문은 “이(명박) 정부 1년 반, 인권 존재하지 않았다”는 제목을 뽑았다. 리영희 교수가 “물질주의 숭배, 인간가치 말살”을 비판했다는 부제를 달았다. 한국의 인권상황이 거꾸로 가고 있고,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때보다 못하고, 이명박 정권은 파시즘 시대 초기에 들어섰다고 지적했다는 내용이다. 기사의 한 대목이다.



리 전 교수는 1980년대 감옥에서 읽었던 <레미제라블>을 예로 들며 우리나라의 후진적인 인권상황을 비교했다.


그는 “<레미제라블>은 1830년대 프랑스 상황을 쓴 소설인데 거기에 경찰 자베르가 다 잡은 장발장을 체포영장이 없다며 놓아주는 대목이 나온다”며 “나 자신이 영장도 없이 체포되어 감옥 안에서 책을 읽었는데 그때 느낀 감동, 쇼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우리나라의 인권상황이 180년 전 프랑스 상황만도 못한 것 아니냐”고 말해 청중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 경향신문 2009년 7월 2일 9면, 황경상 기자 기사 중에서



2009년 7월 1일 인권연대 창립 10주년 기념식에서의 강의하는 리영희(좌). 강의가 끝난 후 독자들에게 사인하는 리영희(우)


그랬다. 청중은 선생의 말씀에 뜨겁게 호응했다. 선생은 차분하게 말씀하셨고, 선동형 연설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호응은 뜨거웠다. 선생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하나의 장면이었다. 충북 제천에서 올라온 이철수 화백 부부도, 늘 선생의 제자임을 자임하는 정범구 전 독일대사도 선생의 말씀에 뜨겁게 호응했다. 인권연대 기념식이 아니라, 리영희 선생을 뵈러 온 분들이 많아 보였다.


며칠 지난 다음, 한겨레21 편집장이었던 박용현 기자는 그날 행사의 단상을 잡지에 적었다.



인권연대 10주년을 기억하는 자리였다. 리영희 선생이 참석했다.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등으로 저 눈먼 군사독재 시절 우리의 정신을 손잡아 이끌던 이다. 2000년 병을 얻어 쓰러진 뒤 우리는 그를 잊고 지냈다고 해야 할 게다. 간혹 투병 소식을 접할 때 안타까움을 느꼈을지언정, 그의 꼬장꼬장한 사유와 비판적 지성에 더 이상 손을 내밀 필요는 없었기 때문일 터다....


그가 아직 자유롭지 못한 몸으로 힘겹게 단상에 올라 자리를 잡을 때까지 우리는 박수를 그치지 않았다. 의지와 무관하게 자꾸 떨리는 여든의 오른손을 왼손으로 맞잡으며 그는 붉은 얼굴로 <레미제라블>을 이야기했다. 군사독재 시절 감옥에 앉아 프랑스어로 읽었다는 소설의 한 대목.


그의 메시지는 간명했다. 지금의 지배집단은 “비인간적이고 오로지 물질주의적”이며 이제 한국 사회는 “파시즘의 초기”에 들어섰다. “지향하고 숭배해야 할 가치라고는 돈밖에 모르는”, 그래서 “인간의 존재가치가 말살되어가는” 세상이 다시 왔다. 장발장을 구원했던 인권의 원칙과 절차적 정의는 다시 다리 밑으로 처박혔다...


-한겨레21 768호(2009년 7월 7일)



선생은 스스로 밝힌 것처럼 신병 치료와 요양에만 전념하셨다. 부러 번잡한 행사는 피했다. 그럼에도 청중 앞에서의 말씀을 결심한 것은 좋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불굴의 인권정신’을 가지고 싸워줄 것으로 믿는 사람들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그랬다. 선생은 이렇게 늘 누군가를 편들었다.


얼마 전 서승 선생이 리영희 선생을 술회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어떤 모임이었는데, 리영희 선생이 계셨지. 젊은 기자도 한 명 있었는데, 이 기자가 나한테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그걸 들으시고는 버럭 화를 내셨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셨지. 서승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아무 맥락도 닿지 않는 질문을 해대면 쓰나. 당신을 기자라고 말할 수 있냐고 화를 내셨지. 옥중에서 19년이나 고생을 한 분에게 아무런 기초적 정보도 없이 질문을 하냐는 거였어. 경외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고 하셨지. 민망한 상황이었는데, 그건 옥중 19년을 지낸 한 명의 양심수에게 보내는 선생의 지지 메시지였지. 선생이 나를 편들기 위해 당신의 이미지 같은 것은 거리낌없이 포기하시는구나. 내가 감옥에 갇혔던 세월과 연대하기 위해 저렇게 노력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정말 고마운 대목이었어.



이철수 화백은 리영희 선생과 신영복 선생이 처음 만난 자리가 바로 자신의 전시회였다면서, 두 분이 처음 만나는 장면을 상세히 들려주었다.



서로 알고는 계셨지만, 만남은 처음이었지. 그런데 두 분은 정말이지 서로에게 깍듯하셨어. 리영희 선생이 연배가 높으셨지만, 신영복 선생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 시대의 선생님, 살아있는 지성”처럼 대하셨지. 신영복 선생이 20년 동안 구금되었던 세월에 대한 존경을 보내드리는 것 같았어.



이런 일화를 많이 들었다. 상대를 편하게 대해주시고, 주로 지나칠 만큼 후한 평가도 해주셨지만, 어떤 대목에선 날카롭게 반응하기도 하셨다. 이를테면 누군가 챙겨야 할 때 부러 엄격하셨다.


선생은 공평하다거나 균형감 있다든가 하는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말년의 선생을 비교적 가까이에서 뵐 기회가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선생께서 인권운동 하는 사람을 위해 뭔가 거들어야 한다고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리영희 선생은 공평한 분은 아니셨다. 한쪽으로 심하게 쏠려 있었다. 그 쏠림은 일종의 시소와도 같은 것이었다. 몸무게가 차이나는 사람이 중심축에서 ‘공평하게’ 똑같은 간격을 두고 얼마쯤씩 떨어져서 시소를 탄다면, 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은 지면에 딱 붙어 움직이지 않고, 가벼운 사람은 공중에 떠 있을 것이다. ‘공평하게’ 오르내리는 시소가 되려면, 무거운 사람은 좀 더 앞으로 와야 하고, 가벼운 사람은 좀 더 떨어져 앉아야 한다.


새로운 인권단체가 생겼다고 말씀이라도 드려야겠다 싶어서 종이 소식지를 보내드렸다. 남들에게처럼 지로용지와 함께였는데, 선생은 꼬박꼬박 1만 원씩 후원금을 보내주셨다. 저렇게 성원해주시는 곳이 한둘이 아닐 텐데. 고마웠다. 그러던 어느 날 후원 중단을 지로용지 메모칸을 통해 알려오셨다. 편찮으신 다음에 글씨체마저 ‘삐뚤체’로 바뀐 다음이었다.



“연금도 받지 못하고, 다른 벌이도 없어 죄송합니다.”



액수가 크든 그렇지 않든 돈 가는 곳은 곧 마음 가는 곳이다. 선생은 작은 인권단체까지 챙겨주려고 하셨다. 선생의 평생을 통해 원칙이 그랬다.


이런 사랑과 성원을 받으면, 좀체 잊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선생이 응원하셨던 그 일, 인권운동도 계속할 수밖에 없다.


오가며 선생을 뵐 때마다 인사도 드렸지만, 그건 그냥 아는 사이 정도의 스치는 만남이었지, 개인적인 교분을 나눈 건 아니었다. 첫 만남은 군포의 자택에 찾아뵈었을 때였다. 정범구 전 독일대사가 선생을 찾아뵙는데 함께 가자고 했다. 기쁜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정 대사 말고도 한두 분이 더 계셨던 것 같은데, 그분들에 대해서는 따로 메모를 해놓지 않아서 누군지 모르겠지만, 아마 리영희 선생의 독일 방문과 관련되었던 분들인 것처럼 보였다.


선생은 나를 보자마자, ‘의문사위원회’(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요즘 어떻게 돌아가냐고 물으셨다. 몇 가지 말씀을 드렸더니, 대뜸 하시는 말씀이 “신문에 나오는 이야기 말고.”


아차 싶었다. 맞지. 앞에 있는 분은 리영희 선생이었지. 약간은 버벅거리며 아는 이야기 잘 모르는 이야기를 섞어서 몇 말씀을 더 드렸다.


그렇게 선생과의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되었고, 선생의 마지막 세 번째 생신을 모두 함께하는 호사도 누렸다.


그때그때 쓴 일지를 바탕으로 추억을 더듬어본다.


2009년 5월 19일(수) 평촌 한림대병원으로 선생 문병을 갔다. 원래 20일(수)에 댁으로 찾아뵙고, 점심을 함께하기로 했다. 약속 확인차 전화를 드렸더니,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했다. 병원은 불편한 곳이다. 원래 잡힌 약속이니 얼굴이나 뵙고 10분쯤 있다 나오려고 했는데, 선생은 질문을 거듭하셨다. 인권연대의 평소 활동, 인권문제에 대한 생각을 많이 물으셨다. 1시간 3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2009년 7월 10일(금) 선생댁을 방문했고, 내외분과 점심을 함께 했다. 인권연대 창립 10주년 기념식 행사 사진을 앨범으로 만들어드렸더니, 좋아하셨다. 정범구 박사, 김희수 변호사, 이찬수 교수가 함께했다. 선생께 80회 생신(2009년 12월 2일)을 인권연대 차원에서 준비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위로와 연대’ ‘새로운 전망의 자리’였으면 좋겠다 싶었다. 인권연대는 실무작업만 하고, 민주주의와 인간화를 바라는 마음을 앞에 놓기로 했다.


2009년 7월 17일(금) 리영희 선생 80회 생신 모임의 이름을 ‘선생 리영희’로 잡아보았다. 물론 가칭이다. 이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정범구, 김희수, 이찬수, 이지상(가수), 홍승권(삼인출판사 부사장)과 만났다. 이 모임을 조금 더 넓혀서 도종환 시인, 이철수 화백, 정태춘 가수, 홍세화 선생도 함께하기로 했다. 행사는 어둡고 답답한 이명박 정권에 우리에게는 ‘리영희 선생’이 계시다는 내용으로 진행하고 시 낭송, 대담, 축하공연 등으로 짜임새 있는 일종의 문화공연으로 꾸며보기로 했다.


2009년 8월 19일(수) 군포댁으로 선생을 찾아뵈었다. 선생은 80회 생신 잔치가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뜻이 맞는 벗들과 함께 교유하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이나 그것과 패거리를 만들어 자신들끼리만 어울리는 것은 자칫하면 종이 한 장 차이가 된다. 나는 절대 그런 패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다.”



팔순 잔치를 열자는 제안에 손사래를 치며 했던 말씀이다. ‘성문과정(聲聞過情) 군자치지(君子恥之)’ 곧 명성이 실제보다 지나치게 알려지는 것을 군자는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맹자 말씀도 덧붙였다. 무엇보다 가족이 강력하게 반대한다고 하셨다. 가족의 반대는 아무래도 핑계 삼아 하신 말씀 같아 보였지만, 선생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행사는 취소했다. 그렇지만 행사의 일환으로 준비했던 단행본 작업은 계속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선생의 80회 생신을 기념하기 위한 책은 리영희 선생에게 바치는 책은 아니었기에 선생의 허락을 받고 말고 할 문제는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마지못해, 책을 내는 건, 알아서 하라고 하셨다. 책의 제목은 <리영희 프리즘>으로 정했다. 고병권(수유너머 연구원), 천정환(성균관대 교수), 김동춘(성공회대 교수), 이찬수(종교문화연구원장), 오길영(충남대 교수), 이대근(경향신문 논설위원), 안수찬(한겨레 기자), 은수미(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한윤형(대학생), 김현진(에세이스트) 등으로 진용을 갖췄고, 머리글은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에게 부탁했다. 책은 2010년 2월 20일에 나왔다.


<선생 리영희>라는 행사를 준비할 때, 리영희가 썼던 메모 두 장. 오른쪽은 행사를 할 마음이 있었을 때 쓴 기획이고, 왼쪽은 완강히 고사하며 쓴 ‘성문과정(聲聞過情) 군자치지(君子恥之)’


2009년 9월 28일(월) 댁으로 찾아뵈었다. 여름내 몇 번을 들렸는데, 이날은 정범구 박사와 한겨레 이순혁 기자가 동행했다.


2009년 10월 15일(목) <리영희 프리즘>을 위해 김현진 씨가 선생과 인터뷰했다. 사진작가 조성수 선생이 사진 작업을 맡아주었다.


2009년 10월 25일(일) 선생 내외분을 모시고 1박 2일 일정으로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미산계곡을 다녀왔다. 가을 들놀이였다. 불편한 것이 많았지만, 선생 내외는 좋아하셨다. 내내 “내 인생 최고의 가을 여행”이라고 하셨다. 아마 여름에 모시고 가셨다면, “내 인생 최고의 여름 여행”이라고 덕담을 하셨을 거다. 인권연대의 조영민 주임과 이광조 CBS PD, 가수 이지상 씨가 함께했다. 이광조 피디가 아직 총각이란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미산계곡에 있는 근사한 바위를 하나 찍어서 나중에 결혼할 때 선물로 가져가라고 인심을 쓰셨다.


2009년 10월 25일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미산계곡. 왼쪽 사진은 왼쪽부터 가수 이지상, 이광조 CBS PD, 미산산장지기, 리영희, 윤영자 여사, 조영민 인권연대 주임,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2009년 12월 2일(수) 선생의 생신을 맞아. 마포구 한 냉면집에서 80회 생신 잔치를 했다. 잔치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박한 식사였다. 정범구·변세경 부부, 도재형 이화여대 교수,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강맑실 사계절출판사 사장, 조건형 사계절 직원, 김현진 에세이스트, 고병권 수유너머 연구원, 한윤형 대학생, 홍승권 삼인출판사 부사장, 이찬수 교수, 이재성 한겨레 기자,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이 함께했다. 선생께서는 ‘의식화의 은사’와 ‘의식화의 원흉’이라는 상반된 찬사와 저주 속에서 살아왔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사명대사와 백범 선생이 말씀하신 것처럼 눈길에서 뒷사람을 생각하며 똑바로 걸으려고 노력했다며 삶을 회고하셨다. 즐거운 분위기였고, 선생 내외분도 좋아하셨다.


2010년 2월 20일 출간된 "리영희 프리즘"과 출판의 기념을 겸해 "리영희 프리즘" 작가들과 가진 리영희의 80세 생일모임. 왼쪽부터 이찬수 강남대 교수, 정범구 박사, 리영희, 윤영자 여사, 은수미 노동연구원 연구위원.


2010년 2월 17일(수) 설 인사차 점심때 선생 댁으로 찾아뵈었다. 정범구 박사와 피우진 중령이 함께 갔다. 마침 리영희 선생의 80회 생신을 맞아 펴낸 <리영희 프리즘: 우리 시대의 교양>(사계절)이 출간되었기에 책도 가져다드렸다. 좋아하셨다.


2010년 2월 23일(화)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계신 선생을 찾아뵈었다. 문병이었다. 편치 않으셔서 입원하셨는데도 농담은 여전하셨다. 복수가 많이 차서 갑자기 입원하신 것인데, 다음날 들으니 암은 아니고, 투약만으로도 치료가 가능하다고 해서, 퇴원하셨다고 한다. 다행이다.


2010년 3월 20일(토) <리영희 프리즘> 출간을 기념하는 강좌를 시작했다. ‘아트 앤 스타디’에서 열렸다. 인권연대와 사계절출판사가 공동 주최했다. 한 번에 두 강씩 달렸다. 오후 4시에는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저녁 7시에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가 강의했다.


2010년 3월 27일(토) 오후 4시에는 고병권 수유너머 연구원이, 저녁 7시에는 한윤형 씨가 강의했다.


2010년 4월 3일(토) 오후 4시에는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이, 저녁 7시에는 이찬수 교수가 강의했다.


2010년 4월 10일(토) 저녁 7시에 안수찬 기자가 강의했다. 선생께는 이런 강좌가 열린다고 알려드리기만 했다.


2010년 4월 13일(화) 오후 3시 30분. 백병원으로 선생 문병을 갔다. 사계절출판사의 강맑실 사장과 조건형 사원, 안수찬 한겨레 기자, 손제관 경향신문 기자가 동행했다. 선생의 상태는 좋지 않아 보였다.


2010년 4월 23일(금) 오전에 문병을 갔다. 선생의 상태는 별로 호전되지 않았다.


2010년 7월 23일(금) 오후에 연희동 아드님 댁으로 선생을 찾아뵈었다. 간경화로 인한 복수는 여전했지만, 그래도 봄에 비하면 건강이 좋아지셨다. 조만간 다시 뵙기로 했다.


2010년 11월 18일(목) 오후에 녹색병원으로 선생을 찾아뵈었다. 선생은 의식이 없었다. 간경화는 간암이 되었고, 콩팥 기능도 떨어져 투석을 받아야 하는 상태였다. 정말 유감스럽지만 올해를 넘기기 어려워보였다. 곧 생신(12/2)인데...


2010년 12월 2일(목) 선생의 생신이었다. 오후 4시에 김희수 변호사, 서상덕 가톨릭신문 기자, 홍승권 삼인출판사 부사장과 함께 면목동 녹색병원으로 선생을 찾아뵈러 갔다. 의식은 전혀 없으셨지만, 그래도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셨으리라 믿고 싶었다. 사모님께 봉투를 드렸다. 그냥 마음이 그랬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생신은 지나시는구나 싶었다. 술이라도 마시고 싶은 날이었다. 면목동에서 치과를 하는 허홍열 원장과 술을 마셨다.


2010년 12월 5일(일) 아침 일찍부터 선생의 부고가 들려왔다. 선생이 돌아가셨다. 예정된 죽음이지만, 비감한 마음이다. 선생을 뭐라 표현할지 모르겠다. 존경할 만한 어른도 별로 없는 상태에서 선생은 참으로 마음 깊은 존경을 드리기에 가장 적당한 분이셨다. 특별히 말년 2년 동안 인권연대와 깊은 정을 나누고, 격려해주신 것도 큰 복이었다. 영광이었다. 선생을 잘 보내드리고, 사모님께서 살아계신 동안에는 적어도 명절에 문안 인사라도 빼먹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또 어떤 어른에 기대어 살아야 할지 벌써부터 막막하다. 선생의 뜻을 생각하며 사는 일주일이 될 것이다. 유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좋은 분들 우리와 동시대에 보내주신 신께 감사드렸다. 오후 5시에 정범구 박사, 김녕 서강대 교수, 도재형 이화여대 교수, 이재성 한겨레 기자, 이지상 가수, 홍승권 삼인출판사 부사장, 황미선 초등교사와 함께 조문을 했다.


12/6(월)에 다시 선생의 빈소를 찾았다. 오후에 인하대 총학생회 강연을 마치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정범구 박사, 김희수 변호사, 서상덕 가톨릭신문 기자, 이찬수 교수, 김영호 교사, 김진규 교사, 김진한 교사, 정인태 경찰관, 피우진 중령과 함영희 선생 추모 생방송에 출연했다.


12/7(화) CBS-R ‘시사자키’와 리영희 선생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소설가 서해성과 함께 했다.


12/8(수) 오전 7시 신촌 세브란스 병원 영결식장에서 열린 영결식에 참석했다. 선생은 광주 망월동에 묻히셨다. 선생이 광주에서 영면에 든 것은 광주학살의 희생자, 치욕적 지역차별의 피해자들과 연대하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었다. 광주 사람들은 선생의 안장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마지막까지 누군가를 구체적으로 편드는 선생다운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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