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균형추, 리영희 / 백영서
내 삶의 균형추, 리영희
백영서 / 연세대 명예교수, 세교연구소 이사장
리영희 선생을 떠올리면 대학 3년생일 때인 1974년 서울구치소에서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은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통령긴급조치 1, 4호 위반(이른바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되어 재판 중이던 그때 ‘공범’인 이해찬 군이 ‘창비신서’로 나온 그 책을 동양사 전공의 나는 꼭 읽어야 한다고 빌려주었다. 나는 처음에는 ‘신서’라는 명칭을 듣고 ‘이와나미신서’(岩波新書)처럼 일본 책인 줄 알았다. 계간지 『창작과비평』을 간행하던 곳이 출판사 등록(1974년 1월)을 마치고 ‘창비신서’라는 시리즈로 단행본을 간행했는데, 이 책이 4번이었다. 그러니 그 명칭이 낯선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 책에서 읽은 중국혁명에 대한 시각도 충격적이었지만, 베트남전쟁 재평가는 가히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리영희와 창비가 그 후 내 삶의 궤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2심을 마치고 대법원에의 상고를 포기하여 징역 7년이 확정되자, 기결수를 수용하는 영등포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곳에는 거물급으로 박형규 목사, 백기완 선생, 김지하 시인 등 긴급조치 위반으로 들어온 여러 양심수들이 인쇄공장 등에 출역하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박박 밀고 조화공장에 배치되었다. 다른 분들과 접촉이 쉽지 않았는데, 간혹 사식장(재소자가 교도관의 인솔 아래 자기 돈으로 사먹으러 갈 수 있는 구내식당)에서 몇 분과는 어울릴 수도 있었다. 그곳에서 먹은 짜장면의 맛도 잊을 수 없지만, 제3세계의 노벨문학상으로 알려진 로터스(Lotus)상을 김시인이 수상할 수 있다는 소식에 고무되어, 출소하면 제3세계 문화축제를 한판 벌이자고 백기완 선생이 호언하던 장면도 선명히 기억된다(실제로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는 ‘1975년도 로터스상 특별상’을 김시인에게 1975년 6월에 수여했다). 박형규 목사님이 감옥에 계시면서 저서 『해방의 길목에서』를 출간하셨는데, 은밀히 들여온 저자의 초판 교정본을 내게 빌려주셔서 탐독했다(어찌하다가 그 귀중본을 지금도 내가 보관하고 있다).
바로 옆방에 유홍준 선배가 있었다. 같은 조화공장에서 일하던 선배는 거기에서 처음 만난 나를 동생처럼 살뜰히 돌봐주었다. 우리는 『전환시대의 논리』,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문화이론 등 많은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했다. 특히 김지하 시인과 비밀리 편지를 주고받으며 많은 주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인연을 엮어주었다(당시 주고받은 편지들은 두 사람에게 문제를 일으킬까봐 없애버려 안타깝게도 남아 있지 않다). ‘지하형님’은 내가 동양사를 전공하지만, 학과 공부에 흥미를 못 느끼는 것을 알고는, 한국 변혁의 전망을 갖는 데 중국혁명사가 시사하는 바 클 것이라 일깨우면서, 출소하면 리영희 선생을 만나 대학이라는 제도 밖에서 배우라고 조언해주었다. 1974년 연말부터 밖에서 구속자석방운동과 민주화운동이 활발해지자 교도소 내 분위기가 좀 누그러져 몰래 숨겨놓고 일기를 쓸 수 있었는데, 그 중 관련 대목이 있다(그 일기장은 출소할 때 친한 담당교도관에게 맡겼다가 나중에 돌려받았다).
그간은 일기 쓰기보다는 芝河형님과 ‘비둘기對話’에 몰두하느라고 바빴다. 단절된 이곳 생활에서 그와 같은 훌륭한 선배와 중요한 문제들에 관해 의견 교환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다. 그동안 내 중국사 연구태도, 학생운동의 반성과 전망, 농촌문제, 연극운동(민족문화운동의 하나)과 세계사적 관점 등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李영희 교수님, 원주, 구미 농촌운동을 소개받은 것은 내 生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 같은 예감이 든다.(1975년 2월 12일)
1975년 2월 15일 이른바 ‘2·15조치’로 형 집행이 정지되어 출소할 수 있었다. 유홍준 선배와 나는 제기동 리영희선생 댁을 방문했다. 선생은 그간 고생했다면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날의 장면은 이미 유 선배가 실감나게 묘사한 바 있어 그대로 옮겨온다.
나는 리영희 선생님께 한번 찾아뵙고 싶다고 했더니 선생님은 아무 때나 놀러 오라고 하시며 전화번호를 알려주셨다. 그리하여 일주일쯤 뒤 나는 백영서와 함께 제기동 한옥으로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선생님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시며 안방을 향해 사모님께 큰 소리로 외치셨다.
“여보, 여기 이번에 고생하고 나온 분들 오셨으니 어서 술상을 내오시오.”
사모님이 차려오신 술상 앞에서 우리는 선생님의 따뜻한 위로와 진지한 인생 사회 철학을 들었다.
(리영희재단 뉴스레터, 12호)
그때부터 나는 선생을 제도 밖의 스승으로 모시고 중국문제를 공부하였다. 선생이 『8억인과의 대화』(1977), 『10억인과의 대화』(1983)를 준비하실 때, 댁으로 가서 원고 교정을 보는 등 제도권 밖의 조교처럼 거들어드리기도 했다. 외국어에 능통한 선생은 일어·영어·불어로 된 글들을 골라 엮으셨는데, 원문과의 대조를 중시하셨다. 내가 불어를 한다고 하니, 『8억인과의 대화』에 실릴 뻬르피뜨의 「피의 댓가」를 검토하다 궁금한 대목은 원문과 대조해보라고 권하신 일이 떠오른다. 곧 나올 책의 초고를 생산현장에서 미리 읽는 독자로서의 감동과 선생님의 작업에 참여한다는 자부심이 컸다. 그 무렵 중국문제를 공부하려면 중국어를 잘해야 한다며, 동시통역 아르바이트 하실 때 통역사로서 서로 친해진 인천 화교학교 영어교사를 소개해주셔서, 그녀에게 한동안 중국어를 배웠다. 선생은 한마디로 내게 ‘제도 밖의 스승’이셨다.
1977년 『8억인과의 대화』가 나온 지 겨우 두 달도 될까 말까 한 11월, 『우상과 이성』이 간행되었다. 당시 한길사라는 (부인 명의의) 출판사를 갓 등록한 김언호 사장(동아언론자유수호투쟁위원회)이 『전환시대의 논리』 이후에 발표된 선생의 글들을 골라 모은 보따리를 들고와 제2의 평론집을 출간하고 싶다고 열정적으로 설득한 결과였다. 그런데 두 권이 바로 이어서 독서시장에 나오자, 선생의 책이 대학가의 필독서로서 의식화의 무기가 된다고 봐 노리고 있던 공안당국은 이를 체포의 빌미로 삼았다. 11월 23일 가택에서 연행되고, 26일에는 창작과비평사의 백낙청 교수도 연행되었다.
11월 30일 선생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기소되자, 나는 화양리 댁에 기거하며 큰아들 건일 군의 영어 가정교사 겸 탄원 서명과 재판 준비를 거드는 일을 맡았다. 제기동에서 이사해온 새 집에는 선생이 평소 자랑하시던 2층 서재가 있었는데, 나는 거기 머물면서 밤에는 서가의 책들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다. 선생이 신문사에 들어가 독학으로 중국어를 익히기 위해 교재로 삼은 화교학교 중국어교재도 거기 있었다. 어학의 기초부터 다지신 철저함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각종 기사를 오려내 주제별로 보관한 많은 스크랩북, 돈이 없어 제대로 된 것을 구할 수 없어 봉투지를 사다가 송곳으로 뚫어 끈으로 매고 풀칠해 만드신 누런 수제 스크랩북에 압도당했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관한 이러저런 책들을 뒤적이며 선생이 어느 대목에 밑줄을 치고, 어떤 메모를 달았는지를 살피는 것은 그분과의 은밀한 대화라 희열을 안겨줬다. 그중 하나의 예는 하타다 다카시(旗田巍)의 『조선사입문』을 통한 대화이다. 세부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국사를 한반도 전체의 시각에서 새롭게 보도록 이끌었다.
1978년 1월 27일 1차 공판이 시작되어 4개월간 이어진 1심 공판을 방청석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방청석은 늘 만원이었다. 그 당시 김지하 시인 등 시국사건의 재판 과정을 뒤에서 세심히 챙기던 김정남 선생의 회고는 이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리영희 교수는 재판과정에서 자신의 소신과 입장을 명쾌하게 밝혀, 당시 서울형사지법 115호 법정을 가득 채운 방청객들을 감동시켰다. 한번은 법정을 강의실로 착각했는지 “지난 시간에는”이라고 진술을 시작하여 법정을 때아닌 폭소장으로 만들기도 했다. (김정남, 『진실, 광장에 서다』, 창비 2005, 212면)
사실은 ‘착각’이 아니라 법정이 바로 ‘민주주의 학습의 장’이었다.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 일화가 있다. 마오쩌둥이 “큰 인물”이라고 서술한 선생의 표현이 마오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고무찬양한 것이 아닌가 라는 검사의 질문에, ‘크다’는 것은 역할이 컸다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묘사”일 뿐이라고 선생은 답변했다. 우스꽝스러운 이 논란을 나는 그 뒤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그 시대 중국 인식의 어처구니없음을 보여주는 예로 종종 제시하고는 한다. 그리고 문제의 책 출판자인 백낙청 교수에게 재판장이 반공법 위반의 사실을 알면서도 출판하지 않았냐는 뜻으로 출판 동기를 묻자, “이교수를 존경할 뿐만 아니라 상품가치도 대단한 필자이기 때문에 출판했습니다”라고 답해, 방청석에서는 곧 웃음이 터졌다. 냉전시대 공안검찰식 논리를 비웃어버린 70년대의 풍경은, 박정희 유신독재라는 우상이 (1979년 10월 26일 측근에 의해 살해되기 전) 이미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재판의 결과는 참담했다. 1심 공판에서 선생에게 징역 및 자격정지 3년이, 백낙청 교수에게 징역 및 자격정지 1년의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가, 2심에서 선생의 형량은 2년으로 감형되었다.
구속 중이던 1977년 12월 27일 선생의 모친께서 별세하셨다. 잠시 외출도 허용되지 않아 상주 없는 장례식을 재야인사들이 모여 치렀다. 참담한 장례식이라 분노와 애통함에 휩싸인 분위기였는데, 주기가 오른 조문객들끼리의 충돌도 있었다. 김상현 의원과 뭔가의 문제로 다투던 박현서 교수가 거실의 난로 연통을 뽑아 휘둘러 모두를 놀라게 한 장면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어쨌든 다양한 분야의 많은 조문객들이 화양리 자택의 상청(喪廳)을 찾아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렀다. 나는 장례 기간 내내 호상 역을 맡아 분주한 임재경 선생을 도와 심부름을 했다.
이런 인연으로 1970년대 민주화운동세력의 네트워크에 끼어들어 갈 수 있었다. 해직기자들이 설립한 청람출판사에서 1976년부터 일했기 때문에 동아투위와 조선투위 선배들과 가까워졌지만, 리영희 선생의 구속 이후 백낙청 선생을 비롯한 재야지식인들과 가까워졌다. 그 덕에 1978년 하반기 창작과비평사로 직장을 옮길 수 있었고, 그후 그 네트워크가 누증적으로 축적되었다. 선생은 창비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는 원로였기에 그 중심에 계셨다. (돌아가신 후 저서 가운데 중국관계 서적들은 나를 통해 창비에 기증되어, 지금도 파주사옥 3층에 ‘리영희 문고’로 보존되어 있다.)
1980년 1월 9일 선생은 2년형을 마치고 만기 출옥하셨다. 그리고 3월 7일 ‘서울의 봄’으로 형을 사면받고 복권되는 동시에 한양대 교수직에 복귀하셨다. 그해 5월 마침 결혼식을 준비하던 나는 유홍준 선배에 이어 선생을 결혼식의 주례로 모셨다. 서중석·유인태 선배 등도 선생을 주례로 모셨다. 이렇게 주례제자 그룹이 형성되어, 가끔씩 선생 내외분을 모시고 어울렸다. 선생은 결혼 1주년을 맞은 우리 부부를 축하하는 식사자리도 만들어주셨다. 그때 나는 계간 『창작과비평』이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 강제폐간이 된 상태에서 대학에 복학했고, 아내는 근무하던 언론사에서 강제해직을 당한 어려운 처지에 있음을 위로하고 격려하시려는 뜻으로 기억한다. 인천서 통근하는 아내가 큰딸애 임신 막달에 힘들어하자 두주 2주간 화양리 댁에 머물게 해주셨다. 진통이 오기 시작하던 날 돼지고기 먹으면 순산에 도움이 된다고 저녁식사에 탕수육을 해주셔서 그걸 먹고 바로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1987년 미국 체재 중 큰 딸애를 위해 원피스를 부쳐주신 적도 있다. 이러한 자상한 배려심을 가진 선생이신데, 그 원천은 사모님의 자상함이지 싶다. 당시 설날이 되면 재야원로에게 세배 드리러 방문하는 관행이 있었는데, 여러 영역의 세배꾼이 저녁 늦게 모여드는 코스는 화양리 선생 댁이었다. 거기에서 노동현장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오랜만에 볼 수도 있었다. 이렇게 선생이 재야 네트워크의 중심이 된 것은 사모님의 친화력과 지원 덕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선생의 중국연구와 나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이다. 나는 선생을 한국의 ‘비판적 중국연구’의 ‘뿌리’로 자리매김한다. 선생도 2003년에 나와 가진 대담에서 그런 평가를 “고마운 일”이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셨다. 이는 중국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제기하거나 여러 각도에서 접근하는 방법론을 제시하기보다 중국을 보는 냉전적 사고, 즉 선생이 ‘우상’에 도전하는 실천이성으로서 치열하게 글을 썼고, 중국연구와 한국 현실변혁의 실천적 지향을 결합했다는 점을 중시한 것이다. 그래서 제도 밖의 ‘교사’요, 비판적 중국연구의 ‘출발점’으로 후학에게 평가받는다. 이 조류가 중국연구의 주류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온 것은 분명하다. 나는 조선시대 실학파로 시작해, 일제강점기 중국논설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이 흐름의 계보를 정리해본 적이 있다. (「중국학의 궤적과 비판적 중국연구」, 2012). 선생의 중국인식이 동시대적 상황의 소산일 뿐만 아니라 사상사적 자원과 닿아 있는 것으로 보고자 해서였다.
선생의 중국, 특히 문화대혁명 인식에 대해서는 선생 스스로도 성찰의 발언을 몇 차례 하신 바 있거니와, 진지하게 더 토론해볼 주제이지만, 무엇보다 선생의 실사구시적 글쓰기는 지금 더 소중하다. 이론 조작보다는 치밀하게 자료들을 찾아서 논증하는 방식은 비판적 중국연구자라면 응당 몸으로 받아들일 자세이다. 이와 관련해 되새겨지는 일화가 있다. 인천에 살던 나는 가끔 늦으면 선생님 댁에 머물고는 했는데, 어느 날 아침식사를 마치고 거실에서 차를 마실 때, “자네 같은 문과계 출신들과 나는 달라”라고 하시면서, 경성공업학교, 해양대학에서 이과 계통을 공부한 것이 글쓰기에 미친 영향에 대한 자부심을 비치셨다. 선생이 환갑을 맞아 가진 정담에서는 이학 계통을 공부했기에 “경제성, 치밀성, 구성요소 들을 치밀하게 갖추어서 그것을 빈틈없이 짜나가는” 사고가 “습성화된 것”이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셨다(백영서·정민 인터뷰, 1989). 백승욱 교수가 나중에 “공학도적 글쓰기”야말로 선생으로부터 배워야 할 바라고 평가한 것은 귀담아들을 대목이다(리영희재단 뉴스레터, 12호).
선생의 중국론의 바탕에는 한반도의 운명(곧 자주, 평화통일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작동한다. “중국에 대한 정확하고 균형 잡힌 과학적 인식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국가와 민족의 안전 및 번영을 보장하는 중요한 길”(「상고이유서」, 1978)이란 토로는 진영논리에 중국인식이 휘둘리는 지금이기에 더 곱씹어볼 만하다. 그래서 중국을 우리를 비추는 거울로 본 선생의 중국관이 여전히 요구되지만, 이를 조금 보완할 필요가 있다. 중국도 우리의 100년 변혁의 역사경험을 거울로 삼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어야 한다. 이것이 비판적 중국연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중국을 어떤 식으로든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함께 변화하는 중국’으로 인식하고 중국(과 우리)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관심 갖는 참여자 내지 연루자로서 접근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이 글을 마무리 지을 때가 되었다. 나는 2011년 리영희재단 출범 때부터 이사로 참여했다. 내 삶을 늘 다잡게 하는 균형추인 선생의 앎과 삶이 융합된 활동방식을 계승하고, 그 현재적 의미를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데 보탬이 되고 싶어서였다. 박우정 선배에 이어 2대 이사장직을 한동안 맡은 적도 있는데, 임기 중인 2020년 선생 타계 10주기를 맞아 일련의 행사들을 치른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긴다. 그해 『리영희선집』과 『리영희평전』을 출간했고, 그 두 권의 책에 대한 독후감 공모대회를 선생의 모교인 해양대학과 함께 추진했다. 해양대학의 시상식(2020.11.20)에서 만난 수상자들의 독후감은 그야말로 ‘젊은 리영희’들이 여기저기 살아 있음을 실감케 했다. 그야말로 대전환기에 처한 오늘의 우리가 (요즈음 더 또렷이 드러나는) ‘우상’에 대해 “생각하고 저항하는” 길을 가는 일은 ‘살아있는 리영희’를 알아보고 연대하는 작업에서 힘을 얻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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