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와 그의 유토피아 / 허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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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31 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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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와 그의 유토피아



허준행(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근무하던 리영희는 1971년 10월 해직되었다. 1969년 7월 조선일보 외신부장에서 물러났던 그는 일 년여 만에 또다시 직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외압이 작용하였다. 당시 정부는 베트남전쟁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고자 애쓰는 리영희의 보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한국군을 파병한 베트남전쟁이 공산주의에 항거하는 반공주의의 표상이기를 바란 까닭이다. 조선일보 국장이던 선우휘도 이념 문제를 거론하며 그에게 사표를 종용하였다. 사실상 강제 퇴직이었다. 이후 리영희는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회사를 옮겼지만 그곳에서도 오래 있을 수 없었다. 비판적 지식인의 책무를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때 그는 성실한 생활인으로 살 방도를 궁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리영희는 부당한 권력의 폭압을 못 본 채하고 홀로 평안히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 2기 이사에 이름을 올리고 64인 지식인 선언에 참여하였다. 그럼으로써 합동통신에서 리영희의 자리도 사라졌다.


그즈음 리영희는 영국의 인문주의자 토머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를 읽었다. 그는 히라이 마사오(平井正穗)가 일역한 이와나미문고판 1965년 13쇄본(1쇄는 1957년 출간)을 보았다. 리영희는 책 내지에 1972년 1월 18일 이 책을 첫 번째로 읽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때를 그는 “팟쇼代”라고 지칭한다. 파시즘의 시대 리영희는 몰락한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再起를 위한 敎養” 쌓기에 부지런하였고 그 일환으로 『유토피아』를 탐독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유토피아』는 유토피아에 다녀왔다고 알려진 포르투갈 선원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머스 모어가 갈무리하여 1516년에 펴낸 책이다. 1부에서는 철학적 대화 가운데 유토피아의 면면이 부분적으로 언급되고, 2부에서는 이상 사회로서의 유토피아가 종합적으로 소개된다. 리영희는 1부에 많은 밑줄을 그어두었다. 히슬로다에우스가 사유재산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는 장이 특히 그러하다.



그런데 모어 씨, 내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사유재산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돈이 모든 것의 척도로 남아 있는 한, 어떤 나라든 정의롭게 또 행복하게 통치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것들이 최악의 시민들 수중에 있는 한 정의는 불가능합니다. 재산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한정되어 있는 한 누구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소수는 불안해하고 다수는 완전히 비참하게 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래서 아주 소수의 법만으로도 대단히 훌륭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유토피아의 현명하고도 성스럽기까지 한 제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그들은 모두 덕을 숭앙하면서도 모든 것을 공평하게 나누어갖고 또 모든 사람이 풍요롭게 살아갑니다. 이에 비해 다른 나라에서는 늘 새로운 법을 만들면서도 만족스러운 정도로 질서를 이루지는 못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가 얻는 것을 모두 자기 사유재산이라고 부릅니다만, 그토록 많은 신구의 여러 법들로도 각자의 소유권을 보장하거나 보호하는 것, 심지어 다른 사람 재산과 구분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같은 재산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차례로, 혹은 일시에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도 하므로 소송이 끝없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노라면, 플라톤이 모든 물건의 평등한 분배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법의 제정을 거절한 것이 이해가 됩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현인이었던 그는 모든 사람이 복리를 누리는 유일한 길은 재화의 완전한 균등분배뿐이라는 사실을 쉽게 파악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재산이 개인 소유인 곳에서 과연 그런 평등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아무리 재화가 풍부하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자신만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이 소유하려고 하다 보면 결국 소수의 사람들이 재화를 독점하게 되고 대다수 사람들은 가난 속에 남겨지게 됩니다. (토머스 모어, 주경철 옮김, 『유토피아』, 을유문화사, 2007, 55~56쪽 ; 이와나미문고판 61~62쪽.)



리영희는 여백에 “사유재산”, “재산 有”라고 메모해두었고, 논의의 흐름에 따라 “자유재보호→권력→不正” 등을 정리하여 표기해두었다. 눈에 띄는 부분은 그가 “재산이 개인 소유인 곳에서 과연 그런 평등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라는 문장에서 ‘평등’을 두드러지게 표시해두었다는 점이다. 2부에서 리영희는 유토피아의 특성—“지리적 구성”, “장로회의”, “농경 人民公社”, “노‧농 지주교환”, “가축사육”, “잉여농산 무상교류” “각종농작물”, “首都”, “선거 市의회 주민조직”, “정치담론 死刑”, “職업, 기술+농업의무”, “취업 6시간제”, “잔여시간-8시간 수면, 10시간 개인용”, “고상한 생활”, “주택”, “지도자들”, “의복”, “병원”, “교환가치 사용가치”, “교육‧교양”, “종교”, “건전한 快樂”, “노예”, “결혼(순결‧책임‧처벌)”, “이혼” 등의 키워드를 여백에 적어 두었다. 이와 더불어 그는 유토피아를 가장 바람직한 형태의 공화국으로 칭송하는 히슬로다에우스의 말을 묶어 “utopia!!”라고 부기해두었다.1)


또한 리영희는 “유토피아인들은 돈을 없앴을 뿐 아니라 그와 함께 탐욕까지 없앤 것입니다! 그 한 가지만으로 도대체 얼마나 큰 고통이 사라진 것입니까!(토머스 모어, 주경철 옮김, 『유토피아』, 을유문화사, 2007, 150쪽 ; 이와나미문고판 179쪽.) 얼마나 많은 죄의 뿌리를 잘라낸 것입니까!”라는 구절에서, ‘화폐(돈)’에 동그라미를 치고 다음과 같이 썼다. “굉장한 現實 파악력 (資本主義가 아직 初期 단계였을 뿐아니라 마르크스에 앞서길 300年!!)” 이상의 여러 메모에서 짐작할 수 있는 바, 훗날 그는 “사상 및 인간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이유를 밝히면서 인상 깊게 읽은 책 가운데 한 권으로 『유토피아』를 꼽았다.(권혜선, 「리영희 선생 “PD수첩 계속돼야”」, 미디어오늘, 2005년 12월 10일.) 2008년 시민들과 함께 한 독서토론에서 리영희가 선정한 책도 『유토피아』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에 매몰되어 경쟁으로 치닫는 현대는 멈춤이나 공생, 옆을 돌아보는 여유가 없다. 이런 때일수록 시대를 지혜롭게 넘어설 ‘유토피아적 상상력’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삶을 길게 보고 스스로를 성숙시키면서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라!”(이명옥, 「‘시대의 지성’ 리영희 선생님과 함께 한 독서토론」, 오마이뉴스, 2008년 10월 21일.)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그가 독서토론 자리에서 “유토피아가 ‘마야 문명에 실재한 공동체 모형일 수 있다’는 오래된 영문판 기사를 수첩에서 꺼내”(이명옥, 위의 글.)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실제로 나는 이와나미문고판에 리영희가 스크랩한 1992년 6월 21일 <가디언 위클리> 뉴스 「Utopia finally put in its place?」가 들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로레인 스토바트(Lorainne Stobbart)가 지은 책 『Utopia Fact or Fiction: The Evidence from the Americas』(1992)를 분석한 기사로, 내용의 핵심은 유토피아가 모어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는 데 있다. 저자는 마야 문명의 정보를 접한 모어가 이를 바탕으로 『유토피아』를 집필하였음을 논증한다. 이러한 요지를 담은 주간지를 오려 책에 간직해둔 리영희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유토피아가 공상의 나라가 아닌 실재하였던 세계이며, 그러는 한에서 오늘날 우리가 유토피아를 발전적으로 전유할 가능성 역시 제로가 아니라는 그의 기대감이었으리라.


한편 리영희의 “사상 및 인간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유토피아』의 주요 대목은 위에 기술한 메모와 밑줄 등을 고려하면, “사유재산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돈이 모든 것의 척도로 남아 있는 한, 어떤 나라든 정의롭게 또 행복하게 통치할 수는 없습니다.” 등을 포함하는 문단으로 추측된다. 그것을 염두에 두면 그가 1976년에 쓴 「크리스찬 박군에게」의 주된 메시지에 『유토피아』가 반영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신적‧사상적‧인간적 비약의 단계”에 봉착한 청년에게 리영희는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한 속에 함께 태어나 함께 살아야 할 국가‧영토‧사회에 주어진 공동의 것이어야 할 자원을 가지고, 그리고 혼자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사회적 협동(또는 노동)’으로 생산한 추상적‧구체적인 ‘것’이 어째서 분배와 소유에서는 이렇게 큰 등차현상이 있어야 하는가는 참으로 문제일세. (……) 한마디로 이 관계를 규정한다면, 불평등을 전제로 하는 사유재산제도는 인간적‧사회적 권리, 자유, 신분적 불평등의 근거라고 하는 것이지. 무엇이 문제인가를 생각해보게.”(리영희, 「크리스찬 박군에게」, 『리영희 저작집2—우상과 이성』, 한길사, 2006, 118쪽.)


사유재산과 결부된 화폐(돈)의 시스템을 철폐한 유토피아 상황을 곧바로 현실사회주의 소련으로 등치시킬 수는 없다. 리영희는 「소련 반체제 지식인의 유형과 사상」(1975)에서 솔제니친 등 소련 반체제 인사들의 특징을 분류하면서, 마르크스 이론을 기계적으로 적용한 스탈린 체제의 오류를 지적한다. 덧붙여 그는 “러시아 사회의 제반 모순과 부조리는 주로 사회의 하부구조인 경제제도의 변혁 뒤에 상부구조인 정치‧문화‧사상의 혁명이 수반하지 않은 데서 비롯했음”을 꼬집는다. 이제 리영희의 전망은 중국에 가닿는다. “어렵지만 그것 없이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의 실현이 불가능한 문화혁명, 즉 상부구조의 개조 실험은 중국혁명에서 모택동에게 넘겨졌다고 할 것이다. (……) 중국이 제시하는 이데올로기와 인간 생활양식이 장기적으로는 많은 후진 사회 또는 일부 자본주의 사회에까지도 유혹적인 효과를 가질지 모른다.”(리영희, 「소련 반체제 지식인의 유형과 사상」, 위의 책, 424~431쪽.)


물론 지금 우리는 역사적으로 문화대혁명이 저지른 오류를 자세히 알고 있다. 그렇지만 리영희는 1970년대 중국에서 현재 진행 중이던 “상부구조의 개조 실험”에 소련이 실패한 유토피아 건설의 잠재성을 어렴풋하게 감지했던 것 같다. 그렇게 보면 그가 유토피아를 성립하는 데 중요하게 여겼던 요소도 드러난다. 무엇인가 하면 “유토피아인들은 돈을 없앴을 뿐 아니라 그와 함께 탐욕까지 없앤 것입니다!”에서 부각되는 물질적 욕심의 변환이다. 이것은 하부구조의 변혁만으로는 이루어낼 수 없다. 상부구조의 변화가 동반되어야만 비로소 어디에도 없었던 유토피아가 바로 여기로 현현한다. 그러기에 리영희가 수행한 문화대혁명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과 연구를 문화대혁명이라는 사건 자체로만 국한시킬 수는 없다. 이성으로 우상의 권위와 괴롭게 싸우면서 그는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리영희, 「머리말」(1977), 위의 책, 19~20쪽.)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유토피아』를 읽은 리영희의 유토피아는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에 세워져 있다.


 



  1.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가 부유하게 된다고 해도 각자가 자신의 식량을 준비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남들보다는 자기 자신부터 돌보아야 할 필요가 절실합니다. 그러나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것이 공유이므로 공공창고가 비지 않는 한 누구도 필수품 부족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배는 그들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유토피아에서는 빈민도 없고 걸인도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소유하는 바가 없지만 모든 사람이 부자인 것입니다.” 토머스 모어, 주경철 옮김, 『유토피아』, 을유문화사, 2007, 150쪽 ; 이와나미문고판,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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