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와 불교 / 이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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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2-12-01 05:22
조회
1469

리영희와 불교



 


 


 


이학종 / 작가, 전 법보신문 기자


 


20세기와 21세기를 관통해 우리나라의 대표 지성으로 존경받는 리영희 선생은, 불교와 언제 인연을 맺었고, 또 그 인연은 어떻게 성숙했을까? 사실 리영희 선생의 치열한 일생을 살펴본다면 그처럼 비종교적인 삶을 살아온 경우도 흔치 않을 듯싶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거의 절반의 인구가 종교를 가지고 있고, 불교와 개신교, 천주교 등 거대 종교와 유교, 천도교, 원불교 등 이른바 ‘민족종교’들이 공존하고 있어서 종교와 부딪치지 않고 살아가기 쉽지 않은 환경이다. 이렇게 종교적 분위기가 강한 나라에서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종교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리영희 선생이라고 해도 종교와 완전하게 절연된 삶을 살아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 『만다라』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승려 출신 소설가 김성동이 쓴 2002년 11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상(思想)의 길라잡이 리영희 1’ 제목의 글에는 리영희 선생의 종교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있다. 리영희 선생은, 김성동의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라는 말에 크게 동감하며 “유일신을 신봉하지 않는다면 인류가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혼잣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 구절을 볼 때 리영희 선생의 종교인식은 기독교처럼 유일신을 믿는 종교에는 거부감을 느꼈으며, 절대자의 타력(他力)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 자력(自力)를 강조하는 불교에는 상대적으로 호감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첫 불연은 6.25법보신문 고문 맡으며 깊어져


리영희 선생이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6.25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통역장교로 종군하던 그는 임시연대본부가 자리한 설악산 신흥사에서 군인들이 불경 목판을 야전삽 같은 것으로 빠개어 화톳불을 놓는 광경을 보고는 민족의 귀중한 문화재를 저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즉시 불을 끄고, 타다 만 조각까지 판고(板庫)에 꽂아놓게 함으로써 경판을 보전하는, 불가(佛家)에서는 매우 큰 공덕을 지었다. 리영희 선생은 불교계 신문인 「법보신문」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1996년 12월 4일자에 쓴 ‘내 젊었을 적 잘한 일 한 가지’라는 제목의 칼럼으로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를 소개했는데, 당시 불자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조계종은 리영희 선생의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해 2000년 7월 표창장을 수여했고, 이로부터 한 달 후 리영희 선생은 설악산을 관장하던 오현스님의 추천으로 만해상 실천상 수상자에 선정됐다.


설조스님과 25년 인연장의위원회 고문 맡아


리영희 선생의 불교와의 인연은 「법보신문」 고문으로 일하면서 더욱 돈독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법보신문」의 고문을 맡게 된 것은 80년대 후반 미국에 체류할 때, 함석헌 선생의 소개로 알게 된 설조스님(전 불국사 주지)과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당시 리영희 선생은 설조스님에게 “나는 종교는 갖고 있지 않지만, 만약 종교를 갖게 된다면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종교인 불교를 갖겠다”고 말했고, 이 말을 잊지 않은 설조스님이 훗날(1995년) 불국사 주지로 취임하면서 「법보신문」의 발행인이 되어, 고문으로 추대한 것이다. 「법보신문」 고문직은 약 3년 간 맡았는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지성이 불교전문지의 고문을 맡은 것 자체가 교계 안팎의 화제 거리였다.


두 분의 돈독한 인연은 신문사 고문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지속되었는데, 2001년 경 리영희 선생이 뇌출혈로 우반신(右半身)이 반쯤 마비되었을 때,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도 이렇다 할 차도가 없다는 소식을 접한 설조스님은 명의로 소문난 그의 인척이 원장으로 있는 종로6가의 한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도록 주선해 병세가 크게 회복된 일도 있었다. 이곳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리영희 선생은 마비증세가 크게 호전되어 지팡이를 짚고 걷는 것은 물론, 등산도 하고, 직접 운전을 해 가까운 거리는 드라이브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두 분의 깊은 인연은 2010년 리영희 선생이 타계했을 때, 유가족의 각별한 요청에 따라 설조스님을 장의위원회 고문으로 모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필자는 설조스님과 함께 빈소가 차려진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으로 조문을 갔는데, 이 자리에서 윤영자 여사는 ‘마지막 눈을 감기 전에도 고인(리영희)이 설조스님 이야기를 자주 했다. 살아생전 오셔서 스님께서 염불이라도 해주셨으면 좋았을 것을…’이라는 이야기를 설조스님에게 전하기도 했다. 또한 윤영자 여사는 2018년 설조스님이 조계종단의 개혁을 주창하며 단식정진을 시작한 지 19일째 되던 7월 8일 오후 조계사 옆 우정국 공원의 천막 단식장을 찾아왔다. 설조스님에게 “부디 건강을 유지하셔서 이다음에 통일이 되면 금강산 구경 같이 가시죠”라며 완곡하게 단식 중단을 호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현스님과 인연 각별임종 전 파릉의 선구 보내기도


「법보신문」의 고문직 활동과 이후의 몇 년간은 리영희 선생의 불교에 대한 관심이 부쩍 깊어지는 시기였다. 그는 <법구경> <금강경> <유마경> 등의 불교경전을 읽으면서 조금씩 심오한 불교의 바다에 들어섰고, 이즈음 설악산의 오현스님과도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2002년 김성동의 글 ‘사상의 길라잡이 리영희 1’에 실린 “‘維摩不二法門(유마불이법문)’이라는 붓글씨가 (리영희 집의) 벽에 걸려 있다. 백담사 회주 오현스님[법호: 설악무산]이 선생의 쾌유를 빌며 보내준 것이다”라는 언급을 볼 때, 만해상 실천상 수상 후에도 두 사람의 교유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유마불이법문’이란 글은 벽암록을 좋아했던 오현스님이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둘로 나누어 보지 않았던 유마거사의 둘이 아닌 법문을 리영희 선생에게 주고 싶었던 듯하다.


오현스님은 리영희 선생이 투병 중이던 2000년에도 『碧巖錄(벽암록)』 마지막 100칙 파릉선사의 날카로운 칼[巴陵吹毛劍]에 나오는 게송의 끝구절인 ‘珊瑚枝枝撐著月’을 자필로 쓴 한 폭의 묵서편지(墨書便紙)를 보내 쾌유를 기원했다. “리영희 선생 窓下에 설악산 늙은 산지기 庚辰 2000년 아침에 三拜 雪嶽五鉉”이라고 쓴 이 묵서 편지에 담긴 선구(禪句) ‘산호지지탱착월’의 뜻은 “산호의 가지마다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다!”인데, 이는 한 시대를 이끈 지성이자 석학 리영희 선생의 삶에 대한 오현스님의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과 찬탄으로 읽힌다.


취모검이란 털 한 오라기를 칼날 위에 불면 그대로 털이 잘려버릴 만큼 예리한 검으로 ‘더 없이 날카롭고 빠른 직관력’을 의미한다. 파릉선사는 “어떤 것이 취모검입니까?”라는 한 납자의 질문에 “산호가지마다 빛나는 달빛”이라는 얼핏 보면 환상적이고 탐미적으로 느껴지는 답변을 내놓았는데, 이는 창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천하인들의 말문을 틀어막아버린 스승 운문선사의 기량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설두선사는 파릉선사의 이 답을 두고 “일생 동안 사람들을 위하여 번뇌망상의 못과 쐐기를 뽑아버렸다”고 평했다. 한 선구 속에 세 글귀가 갖춰져 있으니, 천지를 뒤덮는 글귀, 망상의 흐름을 절단하는 글귀, 말의 물결을 따라 굽이치는 글귀라는 것이다.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등 시대를 꿰뚫는 혜안을 담은 글들로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에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을 촉발시킨 우리 시대의 지성 리영희 선생에게 이보다 더 적합한 찬사가 또 있을까.


소설가 김성동봉은사 전주지 명진스님과도 교유


리영희 선생은 소설 『만다라』를 쓴 승려 출신 김성동 소설가와도 교유를 가졌다. 2002년 김성동의 글 ‘사상의 길라잡이 리영희 1’에는 두 사람 간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김성동 소설가가 『꿈』이라는 소설을 선생에게 보내드렸더니 불편한 몸인데도 꾹꾹 눌러쓴 답장을 보내왔다는 것이다.


“김성동 씨, 정중히 서명까지 해서 우송해 준 최근작 ‘꿈’을 고맙게 받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문의 신간안내를 보고 궁금하던 터라서 더욱 그러했습니다. 마침 나는 7개월 전의 뇌출혈로 右半身이 半쯤 마비되어, 딱딱한 글은 일체 멀리하고 좌선하는 마음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처지여서, ‘꿈’을 조금씩 읽으며 시간을 보내려 합니다. 팔과 손 손가락의 마비가 덜 풀려서, 떨리고 아프고, 쑤셔서 더 쓸 수가 없어, 이만 그칩니다. 다시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건강하세요. 리영희.”


리영희 선생은 전 봉은사 주지 명진스님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사사롭게는 서울공고 동문이라는 학연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이명박 정권에게 당당하게 맞서는 명진스님의 모습에 리영희 선생은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진스님은 리영희 선생 10주기를 맞아 유튜브 방송 ‘명진TV’를 통해 선생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명진스님은 “리영희 선생님은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분이고,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신 스승이며, 살아가는 데 목숨 같은 기준을 주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2010년 11월 선생의 부음을 들었지만, 봉암사에서 안거 결제 중이어서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선방의 허락을 얻어 봉은사에서 열린 49재에는 참석했다. 그는 49재 추모인사에서 “리영희 교수님은 절대 극락세계 가지 마시고, 시퍼런 눈으로 저희들을 내려다보면서 세상이 잘못 가고 있을 때, 우리들을 꾸짖으셔야 한다”고 역설해 이목을 끌었다. 리영희 선생은 평생 간직해온 몽블랑 만년필을 명진스님이 봉은사에서 천일기도를 회향할 때 선물했는데, 명진스님은 “리영희 선생께서 세상을 바르게 가도록 이끈 기록의 상징과도 같은 몽블랑 만년필을 제게 주신 진정한 의미는 ‘자네도 세상을 바르게 가도록 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고문 시절 기자로 만난 필자, 3년간 값진 지도 받아


필자는 「법보신문」의 기자로 일한 인연으로 리영희 선생에게 귀한 가르침을 받는 호사를 누렸다. 1996년 고문으로 리영희 선생님을 모시게 되었다는 사내 발표가 있었다. 그때의 놀라움과 기쁨은 지금도 생생할 정도로 컸다. 대학시절 군부독재의 총칼을 피해 ‘걸리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전환시대의 논리』를 마치 첩보작전 하듯이 돌려 읽던 시절이 생각났고, 바로 그 책을 쓴 저자를 신문사의 고문으로 모시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희유한 일인가. 이후 신문 지면에는 ‘리영희 칼럼’이 신설되었고, 선생의 지인이었던 소설가 박완서 선생 등 중앙일간지를 능가하는 화려한 필진이 등장했다. 그 덕으로 「법보신문」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발행부수가 크게 늘었고, 부수에 비례해 영향력도 커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가 법보신문의 전성기였다. 1주일에 두 번 정도 출근했던 리영희 고문은 기자들에게 알토란 같은 조언은 물론 당신의 경험을 들려주곤 했다.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시절의 ‘무용담’이나 감옥에 갔을 때의 이야기, 월남과 중국 관련 이야기들이 파편처럼 필자의 기억에 남아 있다.


리영희 선생은 호의를 가지고 있던 불교와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불교 책을 읽고 불교에 대해 이런저런 궁금한 것들이 있으면, 당시 주필이었던 박경훈 선생이나 설조스님에게 묻곤 했다. 선생은 종각역 뒤편에 있던 이문설렁탕집 단골이어서, 출근하는 날이면 점심은 주로 그곳에서 해결했다. 필자는 본래 육식을 싫어하고, 특히나 물에 띄운 육고기 요리에는 질색했지만, 값진 말씀을 하나라도 더 듣기 위해 설렁탕집을 빼놓지 않고 따라다녔다. 목구멍으로 억지로 설렁탕을 밀어넣는 고역을 감수하면서 ‘이 기회가 아니면 선생님의 듣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들을 수 없다’는 생각에 고통을 마다하지 않았다. ‘불교공부를 조금 더 일찍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말씀에서부터 ‘초급장교로 군에 갔을 때, 건봉사를 보존했던 이야기’, ‘당신의 저서를 읽고 많은 학생들이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고, 죽거나 감옥에 가는 것을 볼 때 가장 괴로웠다’는 리영희 선생의 이야기들은 지금도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선생의 이야기들 중 일부는 ‘리영희 칼럼’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신문을 제작하는 날이면, 밤늦은 시간인데도 리영희 선생은 죽 몇 그릇 사들고 충무로에 있던 신문제작소까지 찾아와 기자들을 격려해주시곤 했다. 신문사의 고문직을 그만 둔 이후에도 경기도 여주 인근의 밤나무가 무성한 곳으로 신문사 식구들을 초대해 함께 밤도 따고 음식도 나눠먹는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리영희 선생이 2000년 만해상 실천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백담사에서 시상식이 열렸을 때, 취재차 참석했던 필자는 선생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리영희 선생은 필자에게 “잘 있느냐? 설조스님은 어떻게 지내시느냐?” 등의 안부를 물었다. 그런데 이날 수상소감에서 리영희 선생이 하신 말씀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리영희 선생은 “여기 와서 절을 둘러보고 한 마디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운을 뗀 후 “백담사에 왜 치욕스럽게도 일해[전두환의 아호]의 흔적이 자랑스럽게 전시되어 있느냐”고 일갈했다. “상을 받는 사람으로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상을 주신 쪽에 찬사를 해야 마땅한 줄 알지만, 그래도 이 말만을 해야겠다”면서 “위대한 ‘만해’가 치욕스러운 ‘일해’로 인해 빛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시상식에 참석한 하객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역시 리영희다. 상을 준 쪽에 대해 저런 독설을 할 수 있는 분은 리영희 선생 말고는 없을 것이다’라는 쪽과 ‘아무리 그렇더라도 상을 마련한 주최 측을 공격하는 듯한 발언은 심했다’라는 쪽이었다. 그러나 그래서 리영희가 아니겠는가. 리영희 선생의 진면목을 다시금 보여준 소중한 장면이었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2010년 12월 5일 0시 30분. 차마 눈을 감기 어려웠을 대한민국의 기막힌 상황을 뒤로하고 사바세계를 떠난 리영희 선생의 장례식장에서 조문한 것으로, 필자는 리영희 선생과의 소중한 인연이 다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리영희 선생을 다시 만나는 기회가 찾아왔다. 리영희재단의 이미정 이사가 ‘리영희와 불교’를 주제로 한 글을 부탁해온 것이다. 그 순간 필자는 기자 시절 리영희 고문께 기자일을 하면서 화두처럼 들고 있던 딜레마에 대해 여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고문님, 불교계 비리를 파헤치는 기사를 썼을 때, 다종교가 공존하는 현실에서 불교계의 부끄러운 면을 드러내는 것은 불교계의 이익을 해치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곤 합니다. 이럴 때 기사를 쓰는 것, 쓰지 않는 것 중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라는 필자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영희 선생은 간단명료하게 답을 주셨다. “당연히 써야지. 얼핏 보면 불교계가 피해를 입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것이 불교계에 이익이 되는 것이네. 그것은 중앙일간지에서도 마찬가지지.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쓸 경우 국익을 해친다는 따위의 공격을 받기도 하지만, 길게 보면 그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이네. 종교나 국가는 영원하지 않지만 진실과 정의는 영원한 것이네.”


최근 한 방송의 보도를 놓고 “국익을 해쳤다”는 억지를 부리며 언론탄압을 가하는 정부의 행태를 지켜보며 필자는 리영희 선생의 이 가르침을 떠올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완성된 것을 보지 못하고 사바세계를 떠난 선생의 불교 인연을 정리하노라니, 그 카랑카랑한 목청과 예리하면서도 자애로운 눈길이 눈앞에 선하다. 리영희 선생이 유난히 그리워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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