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변호사 이병린, 유신시절 감옥에서 들고 나온 책은?/ 김효순(리영희재단 이사장)
리영희는 1974년 본인의 첫 단행본 전환시대의 논리 출판기념회 자료를 스프링 달린 스케치북에 풀로 붙혀서 정리해 놓았다. 누렇게 바랜 종이와 회비 500원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초대장, 사진과 방명록, 당시 신문기사 스크랩
원로변호사 이병린, 유신시절 감옥에서 들고 나온 책은?
김효순 / 리영희재단 이사장
군사독재, 권위주의 정권의 탄압 아래서 자유를 갈망하며 저항하다 감옥에 갇혔던 인사들을 격려하고 도움을 아끼지 않던 변호사들이 있다. 언론에서 흔히 ‘인권변호사’로 지칭되는 법률전문가들이다. 엄혹했던 시절 공안기관에 끌려가 가혹행위를 당하고 수감됐던 이들과 고락을 같이했던 인권변호사들이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있다. 올봄에는 홍성우, 한승헌 변호사가 우리 곁을 떠났고 작년 7월말에는 민청학련사건 군사법정에서 변론 도중 중앙정보부로 연행돼 수감됐던 강신옥 변호사가 타계했다. 이들의 부음기사에는 ‘인권변호사 1세대’라는 표현이 상투어처럼 등장한다.
시기를 나누는 데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니 잘못된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세대별로 공감도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1960, 70년대 민주화운동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인권변호사를 얘기할 때 이병린 변호사부터 떠올리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홍성우 변호사 자신이 그를 ‘인권변호사의 사표’로 삼았다.
이병린 변호사가 서대문구치소에서 출소 직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왼쪽은 김상현 전 의원, 오른쪽은 한승헌 변호사
20년 전인 2002년 12월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 1층 로비에는 이병린 변호사의 흉상이 세워졌다. 물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변호사는 서울변협 회장과 대한변협 회장을 두 번씩 역임한 원로이기도 했지만, 계엄통치에 맞서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 강골 있는 법조인으로 존경받았다. 그가 1986년 별세했을 때 마지막 길은 대한변협장으로 치러졌다. 이것도 법조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 로비에 2002년 12월 세워진 이병린 변호사의 흉상
그가 이 정도로 후배 법조인들로부터 예우를 받은 연유는 단순명료하다. 서슬퍼렇던 권력의 칼날에 굴하지 않고 법조인의 기개를 온몸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대표적 사례의 하나로 1964년 6·3사태 때 계엄 해제와 구속학생 석방을 건의한 것을 들 수 있다. 박정희는 굴욕적 한일회담에 항의하는 시위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거세게 일어나자 6월3일 밤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서울 시내에는 탱크와 장갑차가 등장했고 캠퍼스에는 무장병력이 진주했다. 당시 대한변협 회장이었던 이병린은 비상계엄의 선포 요건이 ‘전쟁이나 사변으로 적에게 포위된 때’로 한정하고 있는데 학생시위는 전쟁이나 사변이 아니고 적에게 포위된 것도 아니니 계엄선포가 위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계엄 해제와 연행학생 석방 등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관련 당국과 언론기관에 배포했다가 영장 없이 연행돼 포고령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현직 변협회장의 구속도 처음이었다. 그는 1개월여 수감됐다가 계엄 해제 전날 공소기각 결정으로 풀려났다.
그는 이후에도 박정희의 장기집권 음모를 까밝히고 규탄하는 일에는 두려움 없이 앞장섰다. 1969년의 3선개헌 저지투쟁, 1971년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 위수령 선포 규탄 등에는 항상 그의 이름이 전면에 등장했다. 가혹한 철권통치로 한동안 잠잠했던 박정희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이 1974년말부터 활기를 되찾자 그는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에 나서 재야원로들과 함께 대표를 맡았다.
그런 와중에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1975년 새해를 맞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월17일 이병린 변호사가 연행돼 서대문구치소에 전격 수감됐다. 인권변호사의 명성에 먹칠을 하려는 듯 당국이 밝힌 범죄협의는 ‘간통죄’ 위반이었다. 이 변호사와 함께 구속된 여인은 서울 종로에서 일식집을 운영하는 마담으로 알려졌다. 정보기관의 공작 냄새가 물씬 풍기는 사태의 흐름에 많은 이들이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영장 발부 자체가 음흉스러웠다. 통상적으로 공안사건의 비밀영장을 담당하는 박충순 서울지법 수석부장 판사를 통해 영장이 떨어진 것이다.
한승헌 변호사는 구속 다음날 서대문구치소로 찾아가 이병린 변호사를 면회했다. 졸지에 치정문제의 덫에 빠진 이 변호사는 혈압이 2백을 넘었다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가 털어놓은 내막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구속되기 전 중앙정보부 6국의 과장이 자택으로 찾아와 간통으로 고소당했다고 알려주고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을 사퇴하겠다는 각서를 써주면 고소사건을 잘 마무리해주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거부하면 구속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도 협박했다.
정보부의 더러운 공작에 움찔할 이병린 변호사가 아니었다. 그는 호통을 쳐서 기관원을 돌려보냈다. 대표위원 사퇴는 있을 수 없으며 설사 사표를 내더라도 왜 정보부에 내느냐고 따졌다.
한승헌 변호사는 이 변호사의 폭로를 기자들에게 공개했다가 정보부에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정보기관이 초법적으로 발호하던 시절이었다. 정치공작의 비열함과 치졸성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이 변호사의 감옥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선일보>는 1975년 2월9일치 사회면에서 이 변호사의 석방을 사진과 함께 상세히 보도했다. 당시 기사를 보자.
이병린 변호사의 석방을 상세히 보도한 <조선일보> 1975년 2월9일치 사회면
지난달 17일 간통혐의로 구속된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 이병린(63) 변호사가 구속 22일 만인 8일 밤 11시25분 서울구치소에서 출감했다.
이 변호사는 고소인의 고소취하로 구속사유가 소멸됨에 따라 서울형사지법 정만조 판사가 구속취소를 결정, 석방됐다.
한복 바지저고리 차림의 이 변호사는 감방에서 읽었다는 <전환시대의 논리>(한양대 리영희 교수 저)란 책을 손에 들고 피로한 기색 없이 마중 나온 재야법조계 등 각계 인사들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스러울 뿐”이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국민투표에 대해서는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고 말하고 “국민들도 이번 투표가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역사적 전환점이라는 점을 명심, 용기있고 슬기로운 결단을 내려줄 것을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또 구속되기 이틀 전인 15일 오전 10시쯤 모 수사기관의 과장 등 2명이 찾아와 간통죄로 검찰에 고소가 접수됐다는 사실을 알리고 미리 준비해온 국민회의 대표위원 사임서를 내놓으면서 “사임서에 도장을 찍으면 입건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고 밝히고 그러나 자신은 이들의 제의를 거절했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출감 후 마중나온 인사들과 함께 서울1다 6086호 코티나승용차로 밤 11시45분쯤 성동구 학동 영동3단지 71호 자택에 돌아갔다. 이날 서울구치소에는 이항녕 홍익대 총장, 언론인 천관우씨, 이 변호사의 담당변호인인 한승헌 변호사, 민주회복국민회의 대변인 함세웅 신부 등이 나와 오후 3시부터 8시간 동안이나 기다리면서 출감하는 이 변호사를 맞았다.
이 변호사의 구속취소가 이날 오전에 결정됐는데도 석방시간이 이처럼 늦어진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기사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리영희 선생의 첫 본격적 저서이자 대표작의 하나인 <전환시대의 논리>가 등장한 것이다. 지금보다 평균수명이 훨씬 짧았던 때이니 환갑을 넘기면 노인 대접을 하던 무렵이다. 나이가 지긋한 법조인이 감옥 안에서 열독했을 정도로 <전환시대의 논리>가 당대의 화제로 떠올랐다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이 책이 창작과비평사에서 처음 출간된 것은 1974년 6월5일이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백명의 재야인사와 학생들이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돼 군법회의에 회부됐던 시기이다. 출간 한 달 뒤에는 군법회의 1심 판결이 나와 사형, 무기, 20년 징역형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그야말로 유신 폭압통치가 정점으로 치닫던 무렵이다. 이 책은 그런 공포의 지배체제에 균열을 내는 작업을 소리 없이, 차근차근, 끈덕지게 했다.
물론 <전환시대의 논리>는 어느 날 굉음과 함께 지표면을 뚫고 솟구쳐나온 것은 아니다. 언론사에서 한직으로 밀려나다가 결국 쫓겨난 리영희는 자신의 이상을 관철하기 위해, 최소한의 생계유지를 위해 <창작과비평> <문학과 지성> <창조> <다리> 등 여러 잡지에 길고 짧은 글들을 썼다. 리영희의 논리적 체계적 설파에 매료된 열성적 독자라면 새로운 글이 발표될 때마다 수록된 잡지를 찾아다녔겠지만, 평범한 시민이나 대학생들이 그렇게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여러 잡지에 분산됐던 글들을 한곳에 모아놓은 <전환시대의 논리> 출간은 숨 막힐 듯한 반공극우체제에서 새로운 시각을 갈망하던 사람들에게 하나의 ‘지적 종합선물세트’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1970년대 중반 이후 대학에 들어간 젊은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출간 2주 뒤인 6월19일치 <조선일보>에는 기명 서평이 실렸다. 특이하게도 필자는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노재봉이었다. 노태우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했던 사람이다. 전체 지면이 8개 면에 불과하던 때라 아주 짧은 서평인데 그대로 인용한다.
낡은 생각과 새로운 성찰이 엇갈려 갖가지 신화를 낳는 것이 전환기의 현상이다. 그 신화들이 일상화되었을 때 진실과 진리를 파헤치는 작업은 바위를 깨는 것보다 힘들다. 리 교수의 책은 그 어려운 일을 감당하려 한 결의의 결정이다.
아시아시대의 아시아세계를 한국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일관된 비판분석을 가하고 나아가 곳곳에 지성의 힘을 신화와 대결시키고 있다.
이런 작업은 흔히 일반이 읽기 어려운 딱딱한 글로 나타나는 것이 예사인데 리 교수는 오랜 언론인 경험으로 쉬이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사회의 좌표를 알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독을 권해 마지않는다.
노재봉은 <전환시대의 논리>가 ‘바위를 깨는 것보다 힘든 작업을 감당하려 한 결의’의 덩어리로 압축적으로 표현하며 격찬했다. 언론사에서 추방된 후 한양대에 자리를 얻기는 했지만, 아직 아카데미즘의 정식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리영희에게 노재봉이 우호적 서평을 쓴 것은 당시 서울대 외교학과의 태두였던 이용희 교수의 영향력과 분리해서 생각하기는 어렵다.
이용희 교수는 베트남전쟁을 다루는 국내 신문 가운데 조선일보의 보도 자세를 높게 평가하고 강의를 하면서 조선일보 외신면을 텍스트로 삼을 정도였다. 조선일보 외신부장 시절 리영희는 이용희에게 편지를 보내 사의를 표하는 한편으로 “정부의 감시 압력으로 백을 알아도 눈물을 머금고 오십만 써서 내보낸다”며 텍스트로 쓰지 말 것을 하소연하기도 했다고 한다.
엄혹한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환시대의 논리>가 지식인사회에서 선풍을 일으켰는지 6월28일 서울 중구 다동의 ‘호수그릴’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초대장은 각계 인사로 구성된 발기인 12명의 명의로 발송됐다. 가나다 순으로 쓰인 발기인 면면은 김경환 노재봉 백낙청 법정 송건호 신동문 이병린 장룡 정도영 정재춘 천관우 함석헌이다.
민주회복국민회의 공동대표인 천관우(가운데)가 출판기념회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리영희 모친 최희저, 리영희, 천관우, 한남철(소설가). 천관우 한남철 사이 앉아 있는 이는 백낙청
함석헌 천관우 이병린 법정 스님은 당시 민주화운동의 지도자였고 언론계 인사로는 김경환 송건호가 대표로 들어갔다. 김경환은 <조선일보> 부국장 때 <합동통신> 기자였던 리영희를 스카우트했고 편집국장 때는 외신부장으로 발탁한 사람이다. 훗날 <한겨레신문> 창간을 주도한 송건호는 당시 <동아일보> 수석논설위원이었다. 문단에서는 백낙청, 신동문(시인, 당시 창작과 비평사 발행인)이, 학계에서는 노재봉 서울대 교수 외에 리영희의 한양대 동료 교수인 장룡 정재춘이 포함됐다.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축하객들. 앞줄 왼쪽부터 임재경 강신옥, 두번째줄 한남철 신경림 리영희
정도영은 리영희가 7년간의 군인 생활을 청산하고 <합동통신>에 입사했을 때 외신부 차장으로 ‘새내기 기자’ 리영희를 단련시킨 사람이다. 두 사람은 평생 서로 아끼는 선후배이자 가까운 친구로 지냈고 가족끼리의 교류도 지속했다. 공교롭게도 정도영은 1964년 1차 인혁당사건에 연루돼 투옥의 고난을 겪었고 리영희는 정도영과의 관계에 대해 대외적으로 밝히는 것을 가급적 삼갔다.
출판기념회에는 한승헌 강신옥 남재희 김윤수 김정남 전옥숙(영화 제작자, 영화감독 홍상수의 모친) 등이 모습을 드러냈고 신경림 방영웅 염무웅 조태일 등 소장 문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출판기념회의 열기와 함께 이변은 계속됐다. 당시 신문 문화면에는 ‘중앙도서전시관·광화문서적센터 집계’라는 형식으로 베스트셀러 목록이 소개됐는데 7월초부터 <전환시대의 논리>가 베스트셀러 비소설부분에 등장했다. 시사평론집이나 사회과학서적 성격의 책이 베스트셀러 명단에 오르는 것 자체가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이후 이 책이 장기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유신체제의 허구에 몸서리를 치던 대학생들에게 문제의식을 심어주고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공안기관에서 이 책을 대학생 의식화의 ‘원흉’으로 꼽은 것도 같은 차원의 현상을 상반된 관점에서 거친 용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전환시대의 논리>가 리영희가 3년 뒤 낸 후속 저서 <8억인과의 대화> <우성과 이성>과 비교하면 수난을 덜 당했던 점이다. <우성과 이성>은 출간 직후 바로 판매금지가 됐고 <8억인과의 대화>도 이어서 같은 조치를 당했다. 저자 자신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돼 2년 징역형을 받았다. <전환시대의 논리>는 1979년 3월말까지 11쇄를 찍고 나서 판금 처분을 받았고 80년대 후반에 들어가서야 판금 해제로 출간이 재개됐다. 누적 판매부수는 정확한 집계가 남아 있지는 않으나 20만부 정도로 추정된다.
끝으로 이병린 변호사의 말년으로 돌아가보자. 그의 생전에 소설가 최일남은 인터뷰를 하면서 “연애를 하셨지요?”라고 짓궂게 물었다. 이 변호사의 답변은 이랬다. “연애했지, 연애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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