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진리가 아니고 진실인가 / 박우정 (2014년 1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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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4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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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은 평생 진실을 탐구하는 것을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책무라는 신념에 충실했습니다.


1977년 펴낸 <이성과 우상> 서문에서 리선생 스스로 이렇게 밝혔습니다.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행복,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 2005년에 출간한 <대화>라는 자서전적 대담집에서 선생은 그 진술이 '나의 지식인으로서의 기본철학과 정신'이라고 규정하고 "나는 손에서 펜을 놓는 날까지 이 정신으로 탐구하고 쓰고,세상에 알릴 결심이에요'라고 밝혔습니다. 진실을 추구하는 목적의식적 글쓰기는 선생의 글쓰기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 철학이자 정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리영희 선생은 왜 진리가 아닌 진실의 추구를 글쓰기의 목적으로 삼았을까요? 과문인지 몰라도 이 대목에 대해서 선생이 직접 글을 통해 해명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의 이런저런 언급들을 통해 그 이유를 추론할 수는 있을 듯 합니다. 선생의 육성을 담은 <대화>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리영희 선생은 종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곳에서(무신론자의 인간관 사회이념-'유일신'과 '절대주의' 없는 삶을 향해) 종교적 진리의 절대시가 안고 있는 위험성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와 알라를 각각 유일신으로 절대시하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비이성'을 지적하면서 "이런 절대신 유일신을 모시는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몇 천년을 두고 인간에게 평화보다는 전쟁과 파괴,사랑과 자비 보다는 증오와 적대감을 강요해온 것은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종교뿐만 아니라 모든 사고와 신념에서 '유일사상'과 '절대주의 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인과 이슬람교도들을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종교를 절대 관용하지 않는 원리주의와 그 광신자들의 반이성적 반문명적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 원리주의적인 진리의 절대화가 도그마로 변질해 인간을 억압하고 인류를 불행에 빠뜨리고 있다는 견해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진리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성에 근거한 근대 과학적 진리에 신뢰를 보냅니다.  절대적 존재를 믿지 않는 사상에서는 무신론자라고 자처하면서 "무신론 또는 이신론을 주장하여 신학의 허구를 밝히고, 초자연적 종교의 자리에 자연법칙에 의한 우주 지배원리를 올려놓은 인류의 사상적 스승들인 루소,볼테르,불란서 백과전서학파의 디드로,존 로크,다윈,에드워드 기번, 심지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기독교 성서의 우주창조설의 신학적 도그마를 목숨을 걸고 부정한  조르다노 부르노,코페르니쿠스,신념 때문에 교회권력에 의해서 혀를 뽑히고 그것도 모자라서 화형에 처해진 이탈리아의 대석학 루칠리오 바니니,갈릴레오 갈릴레이 등,나는 이런 무신론 내지 이신론적 종교관의 충실한 제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리선생은 진리의 존재를 인정하되 그것의 절대시나 절대화는 거부하고 그 상대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적 진리는 언제나 뒤집히고 수정되고 새로이 발견되는 상대주의적 과정을 영원히 되풀이한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입증된 상식입니다. 이 점에서 리영희 선생은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며 진리를 향해 분투하는 철저한 근대인이자 휴머니즘과 계몽주의의 적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리영희 선생이 자신의 지적 작업의 목적을 진리 추구라 하지 않고 굳이 진실 추구라고 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모든 사고와 신념에서 유일사상과 절대주의 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는 언급속에 담긴 진리의 교조주의화(도그마화) 경향에 대한 경계임은 분명한 듯 싶습니다. 자연과학이 아닌 사회과학을 하는 지식인으로서도 진리보다는 진실의 탐구를 지향하는 것이 본령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진리가 아닌 진실의 추구를 글쓰기의 목적으로 삼은 또다른 이유_ 이것이 보다 강력한 것처럼 보이는 바_는 진실이야말로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의 잘못된 생각들을 깨우치고 그들을 의식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이고 강렬한 방법론적 무기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 이후 한국의 민중은 말할 것 없고 대다수 지식인들도 반문명적이고 비이성적인 수구 냉전적 유일사상인 반공주의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생존환경의 구체적 사실들에 대한 인식이 거꾸로 서 있다는 잘못된 사회인식"에 사로잡혀 있었고, " 세계와 자신의 관계형태를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왜곡되고 경직된 의식을 깨는데는 추상적인 진리보다는 구체적이고 생동하는 진실과 사실을 알려주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수많은 학생 지식인들이 리영희 선생의 저서를 읽고  스스로 의식화되었음을 고백하고 선생을 사상의 은사로 존경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리영희 선생이 자신의 글쓰기의 목적이 진실에서 시작해 진실에서 끝난다고 요약한 것도 이런 자신의 방법론의 효과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사회과학적 방법론으로서 진실추구의 글쓰기에 대해 리영희 선생은 <대화>에서 외국학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대목을 설명하는 리영희 선생의 육성을 인용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할까 합니다.



"(그런 방법론은) 나의 본능적인 진실규명 정신과 문제의 핵심에 도달할 때까지 파고드는 집념의 결과요. 따지고 들다보니 진실을 만나는 거지요.....나는 이공계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기계설계나 건축설계를 하듯 정말 치밀하게 분석하고 종합 체계화하는 것이 습관이 됐어요. 그냥 막연한 이해로는 만족하지 못해. 한치의 오차가 있어도 건축물은 무너지니까. 그런 식으로 치밀한 설계 위에 완전히 균형이 잡힌조직체로 짜기도 하고, 정책이나 사물관계나 구조물의 구성에 필수불가결한 재료들 즉,논증자료들을 찾아모아서 철저하게 해체, 분해,해부해서 알맹이를 드러내지 않으면 멈추지 않는 기질이에요."



이러한 독보적인 방법론에 의해 베트남 전쟁에 관한 탁월한 논문들과 만년에 작성한 남북한 전쟁수행능력 비교와 서해 북방한계선의 진실에 대한 충격적인 논문이 탄생했던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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