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보다 중요한 건 "추구하다" / 고병권
어떻게 보면 한참 뒷 세대인데 그 오래된 글들에서 신선함을 받았다는 게 참 의외네요.
네. 아, 일단 기본적으로 문장이 좋아요. 지금 봐도 글이 명료하기 도 하고, 자극하는 게 있습니다. 글이 자극적이에요. 생각을 탁, 일깨운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마 거기서 언급하는 사실들이 우리 시대의 사실은 아니니까 그런 점에서는 의외라고 하지만 다루는 문제라고 할까요? 그런 것에 있어서는 시대를 넘어서는 어떤 생명력이랄까요? 이런 게 있다는 느 낌을 좀 확실히 받았어요. 제 느낌에는 80년대 책을 읽었던 선배들이 더 낡아 보여요. 생각에서. 흐흐. 이건 제 느낌인데, 일단 그렇습니다.
리영희 선생님을 학자나 사상가로서 어떻게 평가하세요?
음, 글쎄 이게 얘기가 묘한데요. 사상가를 뭐라고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른데, 보통 이제 사상이라고 하는 것을 저는 이제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약간 콘텐츠라고 해당되는 사상의 내용이 있어요. 그러나 또 하나의 차원이 존재하는데, 제가 리영희 선생을 존경하고, 글을 좋아하고 다시 보는 이유는 내용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 있어요. 그러니까 사상의 내용도 있지만 그러니까 사상가는 제 식으로 표현을 쓰면 어떤 새로운 지식의 정보나 또 어떤 프레임을 보게 되는 그런 걸 전하기도 하지만 또 생각하게 하는 것. 일깨움이라고 그럴까? 각성을 전달한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그런 차원도 있죠, 분명히. 그래서 새롭다, 우리가 모르던 정보를 알게 된다던지 혹은 세상에 대해서 다른 틀로 보게 한다든지 이런 것도 있지만 그걸 떠나서 이런 것 있죠? 사유하게 한다라고 할까? 네 식으로 보라, 라는 걸 일깨우는 사람. 그러니까 교육자로서의, 이것도 또 교육자가 무엇이냐에 따라 다른데, 교육자는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 이러면 이제 좀 재미가 없고 그게 아니라 교육자는 배우게 하는 사람. 그러니까 뭘 배울지는 그 학생이 해나가겠지만 그런 점에서는 리영희 선생님한테는 좀 뭔가가 있어요. 그래서 이제 뭐, 보통 그 <르몽드>에서 그런 표현을 많이 쓰는데요, 메트라 팡세? 사상의 은사? 이렇게 번역을 하는데 그게 저는 좀 흥미로운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아마. 그래서 이를 테면 언론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거 있잖아요. 리영희 선생님 글쓰기. 내 글쓰기의 목적은 진실 추구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고 거기가 끝이 다. 뭔가 이런 식의 문장이 있는데, 사람들은 진실에 따옴표를 치더라고요. 근데 저는 추구에 따옴표를 치는 편이에요. 진실을 “추구”하는 것. 그러니까 리영희 선생님이 말한 게 팩트냐 아니냐 팩트체크 식의 팩트를 말했다. 기자는 팩트를 말해야 한다. 여기에 방점을 찍는 게 아니고 기자는 진실을 “추구”해야 된다. 다시 말하면 어떤 것의 우상으로서, 우리가 자명하다고 느낀 것에 대해서 추구한다는 건 내가 사실을 알아내서 밝히는 게 아니라, 따져 묻는 거죠. 정말 그런지에 대해서 회의하고, 물어보는 것. 따라서 진실을 “추구”하는 자가 깨인 자, 자유인의 태도이지. 그냥 설령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냥 무의식중에, 혹은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것? 리영희 선생님이 그런 표현을 쓴 적 있어요.
어, 지식인에 대해서 지식의 소유자와 구분했어요. 그러니까 아무리 많은 지식이어도 의식이 없으면 무식자라고. 이 얘기는 뭐냐면, 설령 그 지식이 맞다 하더라도 그냥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그 지식은 노예적인 것이라는 뜻이거든요? 무식이라고. 그러니까 지식을 소유했냐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소유하느냐의 관계이고, 어떻게 추구하느냐가 중요하지 그걸 추구한 것이 사실이냐, 아니냐. 그 결과물이? 요거는 포인트가 좀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리영희 선생님이 말했던 것 중에 어느 것은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어떤 것은 맞을 수도 있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것이 있는데, 그의 태도라고 그럴까? 그런 점에서. 그러니까 자유인은 자유의 의식. 그러니까 자유인은 어떤 지식을 가지면 자유인이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 시대의 지식을 고시원에 쌓아놓고 다 읽었 다? 구글이 자유인인가. 그렇지가 않아요. 단 한 개의 지식도 다르게 볼 수 있어야 되고, 다르게 질문할 수 있을 때 지식인인데, 그런 점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하는 것은 이전에 알던 것과 반대 사실에 도달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전환. 언제든지 전환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그걸 따져 물을 여유라고 할까요? 그런 능력이랄까. 저는 이제 그 부분을 더 주목하는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론.
제가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글이 뭐랄까, 집대성됐다고 해야 하나. 제가 생각하는 리영희가? 이게 78년에 쓰신 상고이유서예요. 법원에서 상고 쓸 때. 이거는 굉장히 그의 어떤, 그의 세계관이랄까. 그의 태도가 어떤 건지를 너무 잘 보여준다. 이런 느낌인데, 물론 다른 글도 다 좋아합니다. <자유인> 서문, <우상과 이성> 서문. 서문을 참 잘 쓰세요. 머리말을 잘 쓰시는데 상고이유서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리영희 선생님도 그런 얘기를 했더라고요. 자기가 50년 동안 글을 썼는데, 제일 소중한 걸 꼽으라면 그 상고이유서를 꼽겠다고. 물론 이런 게 있을 거예요. 기억과 관계될 거예요. 추운데 막 서대문 형무소에서 물도 다 얼고, 당시 교도소라는 게. 근데 그 추운 데 복사기도 없으니까 먹지를. 네 장이나 써야 하니까 판사한테 제출할 거, 검사한테 제출할 거, 변호사한테 제출할 거. 하여튼 네 장을 해야 되니까 먹지를 사이사이 내야 되니까 여덟 장을 추운데 붓 펜으로 꽉 눌러가지고 다 통과해서 글자를 썼대요. 그게 2만 몇 자라던데. 어마어마한 거죠. 2백 자 원고지로 따지면 백 장이 넘는 거니까. 그걸 아무 자료도 없이 혼자 쓴 거예요. 아주 매력적인 장소에서, 매력적인 환경에서.
그리고 처음에 글을 쓰면서 상고이유서에 집필 동기에 이렇게 써 놨어요. 1. 동기가 "선입견에 대하여"예요. 이것도 굉장히 재밌어요. 왜 재밌냐면 선입견은 이전의 견해라는 뜻이에요. 영어로 따지면 prejudice라고 하는데, prejudgement란 뜻이에요. 우린 세상일에 대해서 많은 판단을 하 거든요? 견해들이 다양해요. 그런데 그 견해들 밑에는 그 견해의 근거가 되는 견해가 하나 있어요. 이를 테면 법에 비유하면 헌법과 법률쯤 될까요? 사람들은 헌법에 유념해서 재판관도 판단을 하고 견해를 밝히고 검사도 판단을 하잖아요? 그때 그들은 주어진 조건에 입각해서 판단하는 거예요. 그런데 리영희는 그 법정을 법 정에 세우고 싶어 해요. 철광을. 그렇기 때문에 judgement 전에 judge 이전에 prejudgement. 우리가 갖고 있는 선입견. 우리가 보통 반공주의를 살아갔을 때는 그 시대의 그런 선입견.
그래서 왜, 그게 일단 딱 들어오게 되면 사람들은 저 사람이 간첩인가 아닌가를 열심히 판단한단 말이에요? 그러나 왜 우리가 그 사람을 그렇게 판단해야 되는가. 어떤 사람을. 이라고 할 때 선 판단이 있어요. 그런 인종주의에 대해서도 그렇고, 여성에 대해서도 그렇고, 성소수자들에게도 마찬가지에요. 저 사람이 어떻게 보인다, 인데 보이기 이전에 우리에게 어떤 선 뭐가 있어요. 선입견이. 그걸 문제 삼는 것이고, 따라서 그는 그가 국가보안법을 어겼 는가 안 어겼는가에 관심 있는 게 아니고 국가보안법이 정당한 법 인가, 아닌가를 가지고 글을 쓴단 말이에요? 그게 이제 선입견에 대한 것이고, 그리고 그 질문방식은 굉장히 독특해요. 따져 묻는 것이고. 왜냐하면 근거의 근거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니까 근거에 입각해서 그냥 질문을 던지는? 그래서 심지어 답이 있는 판사나 검사의 질문하고는 달라요. 답이 있고, 얘가 그걸 틀렸는가 맞았 는가를 검토하는 사람과 이 답 자체가 근거 없는 것이라고 문제 자체가 근거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상고이유서에서 계속 대결하거든요.
그리고 나서 리영희 선생님의 글의 백미가 뭐냐면 이제 재판을 해서 판결을 내리죠. 리영희 선생님이. 판사하고 검사하고 우리 시대의 재판정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냐면 인식정지증에 걸렸다. 자 기가 6.25때 봤던 그 검사. D검사가 자기를 취조할 때 이야기인 데 자기가 중국놈들 아는데, 어렸을 때 6.25때 봤는데 막 까무잡 잡해가지고 무식하고 이런 거 있잖아요. 자기가 우리 시대에 가졌 던 편견을 아직까지 갖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아직 도 인식정지증에 걸렸다. 이미 심판을 받은 거예요. 뭐냐면 이 인식정지증에 걸린 것. 그렇게 노예적으로 사는 것하고 사회적으로 전혀 성숙하지 못한 것. 이들은 이미 심판 받았다. 라고 하는 어떤 걸 보여주는데 사유란 무엇이냐를 너무 잘 보여주고, 왜냐면 우리 시대의 근거 있음의 근거 없음을 드러내고 하는 것?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사유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판결을 내리는 것. 미숙한 채로 남아있는 사회, 미숙한 채로 남아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때요? 이제 선생님이 떠나신 지 십 년이 됐는데, 이제 지금 시 대에도 리영희 선생님 다시 읽고 다시 반하고 다시 생각해야 되는 이유나 이런 것들이 있을까요?
그러니까 이제 제가 말씀드린 것과 뭐, 제 경험과 통할 것 같아요. 뭐, 다른 사람의 경험을 떠나서 제가 왜, <전환시대의 논리> 가 70년대 초에 나왔지만 글은 60년대 글인데. 어 왜 60년대에 쓴 글을 보고 흥미로워 하고 감동을 받는가, 라고 하는 것과 깊게 관계가 있는데, 거기서 말한 많은 내용들은 소위 말씀드리면 콘텐츠랄까. 내용의 측면. 리영희 선생님 주장의 내용 측은 시대의 고유한 걸 거예요. 그 시대적 사실들이고 그런 의미 에서 시대의, 좋게 말하면 시대에 딱 맞는 이야기이고, 나쁘게 말 하면 시대와 같이 있는 내용이에요. 시대를 넘을 수 없어요. 일부 넘어올 수는 있긴 있어요. 아직도 한반도에 냉전의 메커니즘이 작 동하니까. 리영희 선생님이 심지어 6,70년대 말했던 내용의 일부는 지금도 의미가 있을 수가 있어요.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도 그렇게 오래 남지는 않을 거예요. 조금 더 오래 남을 뿐이지, 더 남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나 제가 말했던 어떤 스타일이라고 할까? 그러니까 내용이 아니라, 생각의 내용이 아니라, 리영희 생각에 동의하느냐 동의하지 않느냐에 상관없이 생각하게 한다, 라는 측면 있잖아요?
그거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요. 그거는 시대에 매일 이유가 없어요. 말하자면 우상은 시대마다 그 형태가 다를 것 같아요. 그리고 노예도 시대마다 그 형태가 다를 거예요. 로마시대의 노예와 중세 시대의 노예와 자본주의 시대의 노예는 달라요. 그 모습이. 그러나 우상에 대한 비판, 노예에 대한 비판은 아마 모든 시대에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과제가 아닐까, 싶은데 그런 점에서 리영희 선생님의 사고법이라고 할까? 이거는 설령 리영희 선생님이 말하 지 않았다 하더라도 적어도 리영희 입을 통해서 나왔는데, 그것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해야 될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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