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 - 집필생활 30년 잡감

에세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3-11-01 22:20
조회
837

독자의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


집필생활 30년 잡감


‘독자의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 한길문학 1990년 5월호(창간호)에 발표되고, <自由人,자유인>(1990)에 ‘30년 집필생활의 회상-잠시 펜을 놓고 쉬는 마음’으로 제목이 바뀌어 수록


 


글과의 기구한 인연


창간을 서두는 월간 『한길문학』의 편집인이 글을 달라고 한다. ‘잘못 생각한 모양이군! 문학잡지에 내가 무슨 글을 쓴담……’ 그런 생각으로 잊어버렸는데, 마감이 되었다고 독촉이 성화 같다. 이건 이상하다.


“아아니, 잘 알면서 왜 이러지? 나의 글이야 제목부터 돌덩어리처럼 딱딱한데다가 내용인즉 모래알을 씹는 것같이 무미건조한 것인 줄 잘 알면 서. 공연히 창간 문학지에 얼룩이나 지지 않는 게 좋을 거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의 사정을 덧붙였었다. 제법 오랫동안 많은 글을 써온 결과로 이제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글을 쓰기보다는 남의 글을 읽고 머리에 다시 채워넣는 일이 급하다는 사정을. 전지(밧데리)를 방전만 하고 보니 이제는 충전을 해야겠다는 나의 다급한 사정은 편집인의 귀에는 아무 런 공명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확실했다. “당분간은 좀 쉬게 해달라. 몸과 마음에 좀 휴식이 필요하다”고 사정을 해도 막무가내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에서는 걸을 때도 있고 뛸 때도 있지만, 앉을 때도 있고 누워서 잠시 쉬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 아닌가. 쉬는 것이 뛰는 것에 못지않게 생산적인 경우도 있는 법인데…… 정직한 고백이 나는 좀 쉬고 싶다. 두개골의 속도 비어버렸다는 공허한 느낌이 없지 않다. 한때는 제법 글로 빚어낼 만한 지식 또는 사상이라고 불리우는 물질로 차 있었다(고 말해도 무방하겠지). 그런데 최근에는 어쩐지 고갈을 느낀다. 그래서 자기의 머리를 손으로 두드려보기도 한다. 한때는 뭣인가 꽉 들어 있는 증거로, 두들기면 뻑뻑……둔탁한 반응이 있었다. 얼마 전부터는 쿵쿵 소리가 들린다. 비었다는 증거다. 또는 피로하다는 신호일까? 어쨌든 당분간은 남의 글을 읽어야지, 쓸 일이 아니라는 신호임이 틀림없다.


그런 하소연을 간절하게 사뢰어도 편집인은 들은 척도 하질 않는다. “딱딱한 이야기가 없으면 물컹한 이야기라도 쓰라”고, 제법 명령조다.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없으면 글을 써온 지난날의 회상이거나 신변잡감이 라도 빚어서 내놓으라는 명령이다. 결국은 이쪽이 꺾이고 말았다. 하기야 사람이 살아가는 정의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글과 관련된 가장 오랜 기억은 국민학교 5학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교실에서 지은 작문이 평안북도 도청소재지 신의주(新義州)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압강일보(鴨江日報)』에 실렸다고 해서 면(面)의 어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일이 희미하게 회상된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데, 당시의 사정으로 미루어 일본어로 썼으리라 싶다. 일간신문이 도(道) 전체에 하나밖에 없던 시대이니까 국민학교 5학년 소년의 글이 게재된 것이 자그마한 화제거리가 될 만했으리라고 짐작된다. 이것이 나의 글이 활자화된 첫 경험이다. 꼭 오십 년 전 일이다. 벌써 오십 년이 지났구나!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란 기구하다. 내가 평생 글을 쓰고 살 것이라고는 부모님도 나 자신도 전혀 예상치 않았던 일이다. 일제 말기에 공업학교를 다니고 해방 후에 이공계 공부를 한 내가 그후에 온 마음과 몸을 던져서 써온 그런 주제와 그런 내용들의 글을 쓰게끔 운명지어졌다는 것은 알지 못했었다. 정말 말이지, 그렇게 바뀐 인생이 나 자신에게 다행한 것인지 불행한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기도 했다. 판단이 안 선다. 또는 사회적 차원에서 나의 글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 시간의 바다 속에 한장의 휴지조각처럼 자취도 없이 흔적도 없이 가라앉고 흘러가버린 것은 아닌지? 혹시 조금이라도 흔적을 남겼다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한 손에 펜대를, 다른 손에 원고지를 쥐고, 좌우를 살필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삼십 수년이었다.


이제 가쁜 숨을 내쉬면서 발을 멈추고, 달려온 길을 잠시 되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래야 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앞으로 다시 걷거나 뛰거나, 이 단계에서 휴식을 취하고 몸과 정신에 새 기운을 불어넣고, 외줄기로 달려온 길과 주변의 산천·지형·지세의 관계도 새로이 가늠해보아야겠다. 좁은 한계의 자기 나라 밖, 넓은 수평선과 산맥을 넘어서 여태까지 보지 못한 형상의 구름이 떼를 지어 솟고, 방향을 걷잡을 수 없는 바람이 일어 어디론지 구름을 날려가고 있다. 지난 동안 비교적 익숙하게 판독해 온 기상도와는 질적으로 다른 천지간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본다. 이 모든 것을 읽어낼 만한 나의 지식이 부족함을 절실하게 느낀다.


마음·몸·정신·지식……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잠시의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의 출발을 위해서 조금은 겸허하기를 권고하기도 한다. 이것은 새로운 자각이다.


긴 세월 동안, 많은 글을 가지고 사회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수의 다정한 벗을 얻었다. 그 반면, 많은 적을 만들었다. 벗들은 한결같이 착하고 순수하고 정열적이지만 모두 약한 존재였다. 적은 모두가 바로 그와 같은 선함을 사갈시하는 흉포한 괴물들이었다. 난들 그같은 흉물들의 심사를 즐겨서 건드리려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로지 포악한 힘을 믿는 저들의 심사를 몹시 불쾌하게 만들어온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로 말미암은 그간의 고초는 회상하기조차 끔찍하다. 힘은 없고 겁만 많은 벗들이 나에게 보여준 사랑이 없었다면 나의 펜은 진작 부러져버렸을 것이다. 힘을 믿는 흉측한 자들에게서 받은 몸과 마음의 상처는 약하고 가진 것 없으면서 '정의'와 '역사의 심판'만을 믿고 사는 따뜻한 마음씨의 손길로 치유돼왔다.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적과 벗과의 사이에서 그 같은 경험을 거듭할수록 나는 차츰 회의적이 되는 것이다. ‘신’·‘하나(느)님’·‘정의’, 또는 ‘역사의 심판’이니 하는 형이상학적인 ‘것’들에 바쳤던 믿음이 나의 마음에서 자꾸만 식어 가고 있다. 악한 자에 의해서 선량한 자가 욕을 보는 역사가 너무도 오래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목격한 친일파·민족반역자의 득세를 비롯해서 그밖의 온갖 불의와 부정의 승리로 입증된 이 나라의 ‘일반·보편적 원리’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일반적 현상은 나와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없거나 희박하다. 내가 ‘정의의 승리’·‘하나님’·‘신의 섭리’, 또는 ‘역사의 심판’이라는 것들에 회의적인 까닭은 일종의 개인적이며 직접적인 죄책감 때문이다. 내가 유신론자냐 무신론자냐…… 등의 문제와는 무관한 일이다. 실제로 나는 유신론자는 아니지만 무신론자도 아니다. 어느 쪽이라고 단정할 만큼 나의 지적 판단력은 미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흔히 이야기되는 것처럼 ‘무조건적 믿음’이라는 것은 지상의 인간을 모든 사고 판단의 출발이고 목적으로 여기는 나로서는 선뜻 납득하지 못한다.


철학·신학 논쟁은 접어두자. 내가 ‘인간적이며 직접적인’ 죄책감이라고 말한 것은 나의 글·책과 그 독자와의 정신·사상적·지적, 그리고 실천적 책임감에서이다. 나는 나의 글을 통해서 맺어진 많은 우애를 흐뭇하게 생각한다. 고맙게 생각하고, 얼마쯤은 자랑으로도 여기고 있다. 그럴수록 나의 글로 말미암아서 직접으로 또는 간접으로 고통을 겪은(또는 겪고 있는) 후배·후학들에 대해서 도덕적 책임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필자와 독자 사이에 그래야 할 아무런 계약은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70년대 80년대의 가혹하고 치열했던 현실 속에서는 달랐다. 지금도 그 점에서는 상황은 계속되고 있다.


1960년대에 발표한 글들을 수록하여 70년대 초반에 출간한 『전환시대의 논리』(창작과비평사), 70년대의 글을 모은 우상과 이성』(한길사)과 『8억인 과의 대화』(창작과비평사), 80년대 초반의 『베트남전쟁』(두레사)을 비롯하여 한 열 권의 책이 나의 이름을 연상케 하는 것들이다. 특히 『전환시대의 논리』는 유신독재 수립 후 이 나라 학생사회의 최초의 조직적이고 의식화된 민주화운동인 소위 ‘민주청년학생연맹’ 사건과 1974년 그 탄생을 같이하였다. 그 이후 요원의 불처럼 일어난 반독재·민주화·인권·평화·반핵·반전·민족화해……운동에서 그 기치를 높이 든 영웅적인 학생·청년들을 많이 만나고 사귀게 되었다. 소주잔을 서로 주고받는 즐거운 자리에서 만나기도 하고, 쓰러진 동지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비통한 장례식의 자리일 수도 있었다. 검찰의 닭장에서, 때로는 구치소에서, 때로는 형무소의 감방 속에서일 수도 있었다.


그들은 거의 하나같이 나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과 당혹감을 술회했다. 그에 뒤이은 공포와 범죄의식 같은 것의 엄습으로 한참동안 사상적 무중력 상태에 빠진 경험을 회고하기도 하였다. 그리고나서 캄캄하던 하늘에 한 줄기 햇살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고도 했다. 차츰 희미하던 그 빛이 환한 빛이 되어, 세상의 사물관계의 모습을 똑바로 눈앞에 드러내 주었다는 긴 이야기를 말하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이 나라의 청년으로서 삶의 뜻에 관해 고민하고, 모색하고, 울고, 분개하고, 사색하고, 그리고 결단하였다는 감동적이지만 가슴아픈 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감사하고 나를 사랑할망정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잠에서 깨어난 것을 고마워하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이 ‘의식’을 갖게 된 개개의 경험담을 여기에 적는 것은 생략하자. 관계된 본인에게는 의미가 있지만 독자에게는 권태스러울 테니 말이다.


어쨌든 그런 내력을 지닌 수많은 후배·후학들은 예외없이 착하고, 순수 하고, 양심적인 정신의 소유자였다. 이웃의 아픔과 슬픔을 자신의 가슴으로 아파하는 타고난 휴머니스트들이었다. 그들은 이 민족의 정예분자들이었다. 그런 영혼에 접함으로써 나 자신의 영혼은 더욱 살쪄갔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이처럼 아름답고 순결한 영혼들이 형용 할 수 없이 악한 무리에 의해서 온갖 수모와 좌절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오늘도 겪고 있다. 70년대·80년대에 걸쳐서 그들이 흘린 눈물과 참아야 했던 상처에 대해서 나는 마땅히 한 사람이 나누어져야 할 만큼의 도덕적 책임이 있다. 그들의 불행에 대해서 간접적일 뿐 아니라 때로는 직접적인 원인자로서의 죄책감으로 가슴아파하는 것이다.


지난 시기의 나와 독자들과의 만남을 생각하면서 가끔 입센의 『인형의 집』을 떠올리는 때가 있다. 입센은 그의 글을 통해서 봉건적 생존조건(환경)에 길들여진 젊은 영혼에게 허위·속박·전통·복종·비인간적 실체를 의식케 하였다. 노라로 대표되는 수많은 청년·학생·남녀에게 스스로 하나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 반항의 정신을 가르쳤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반항했고, 위선과 허위와 구속의 틀(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인간해방’이다.


그런데 입센은 자신에게 상당한 원인이 있는 이 ‘뛰쳐나간’ 젊은이들이 그후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의식’은 주었지만 ‘방법’과 성공의 ‘보장’을 제공치 않았다.


‘새 의식’을 갖게 된 많은 노라들은 길가에서 헤매고 있지나 않을까? 낡은 것에 반항하고 거부한 그들이 새로운 안주의 틀을 찾지 못하고 좌절 하지나 않았는지? 그래서 다시 그들이 거부했던 닭집으로 머리숙이고 되돌아오고 있지는 않는지?


감히 입센을 자처하거나 비견하려는 오만에서가 아니다. 나의 글에 무책임한 점은 없었는지를 스스로 묻는 마음에서이다. 죄책감이 늘상 가슴에 서 떠나질 않기 때문인 것이다.


 


노신과 사르트르의 영향


그런데 80년대에 들어서부터 그와같은 나의 괴로운 마음을 달래주는 반가운 현상을 보게 되었다. 기쁜 일이다. 다름이 아니라 80년대에 들어서 자 그동안 축적된 이 사회의 지적·사상적 역량에 보태어서, 가히 ‘영웅적’이라고 할 만한 젊은 출판인들의 용기에 의해서 세계의 모든 원전(原典) 이 번역·출판되어, 또는 원전 그대로의 복사판으로, 독자의 손에 들어오게끔 된 일대 변화 말이다. 반세기 가까이나 ‘금서’의 딱지가 붙여졌던 동서고금의 사상. 이론서적들이 홍수처럼 쏟아져나왔다. 그것은 정말로 가관이었다. 진시황의 후예들이 길길이 뛰면서 출판인을 옥에 처넣고 책을 불살라도 책은 계속해서 쏟아져나왔다. 한번 의식과 사상의 봇물이 터지면 막을 길이 없다. 이제 볼 만한 책은 다 나왔고, 지적 궁금증을 푸는 데 한(漢)대처럼 비장한 각오를 하지 않아도 되게끔 되었다. 어려움이 전혀 없다는 말은 반드시 흙속(坑)에 묻혀 죽을 상황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사정은 극적일 만큼 변화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소는 외람되고 조금은 자화자찬격인 평가이지만 80년대에서는 나의 글과 책은 거의 무용지물이 되었다. 60~70년대에 나의 글들이 지녔던 일정한 의미와 역할은 완전히 지양되고 초극되었다. 얼마나 반가운 발전인가! 이를테면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의 역할을 했다는 셈일까? 그렇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냐!


지난 몇 해 전부터는 출판사에서 나에게 보내지는 인세가 거의 보잘것없는 것이 되었다. 나의 책 같은 것은 이제 다 잊혀졌다는 표시이다. 어쩌다 아직도 찾는 이가 있다면 지적 관심보다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그로 말미암은 나의 정신적 만족도는 나에게 보내지는 인세가 줄어드는 속도에 정비례하고 인세의 액수에 반비례한다. 인세가 영(0)이 되는 순간이 차라리 나의 기쁨이 극대화하는 순간일 것이다. 선학은 후학에 의해 초극되는 데서 기쁨을 맛본다. 출람지예(出藍之譽)이다. 자기의 한 시기의 애씀이 무위로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시이다. 젊은이들의 의식화를 위해서 바친 나의 30년이 완전히 낭비된 것이 아님을 깨달으면서 나는 나를 위해서 그리고 후배들을 위해서 축배를 든다. 하나님의 정의나 섭리, 또는 역사의 심판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면 나는 이처럼 세대를 이어 서 전진하는, 앞세대를 밟고 노도처럼 힘차게, 그리고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이 착실하고 단단하게 진보하는 이 사회의 후배들에게서 그것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70년대의 저서들을 절판시킬까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무방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말이지 60~70년대의 어떤 시기, 나는 정말로 외로웠다. 그것은 아아서 케스틀러의 『백주의 암흑 (Darkness at Noon)』, 그것이었다. 그 작품에 다소의 편견은 있지만 어쨌든 그 작품이 묘사한 사회는 바로 그 시기의 우리를 둘러싼 사회였다. 저자는 공산주의 스탈린 치하의 소련을 그렸다고 했지만, 자본주의 박정희 치하의 대한민국이기도 하였다. 맑은 이성으로 살고자 하는 지성인에게는 그 시기는 바로 ‘백주의 암흑’에 다름 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소리를 지르는 이는 드물었다. 어찌 보면 노신(魯迅)의 「아큐정전(阿Q正傳)」이 그린 1920년대 초의 중국인(사회)처럼 숨막히고 절망적인 듯 보였다.


사실 그 당시 나로 하여금 생각케 하고 글을 쓰게 한 큰 원인적 요소는 노신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노신전집을 중국어 백화문의 공부를 겸해서 번역판과 대조하면서 읽었었다. 지금도 여행을 떠나면서 지니고 갈 책 한 권을 고를 때면 으레 노신에 손이 가곤 한다. 나의 평론형식의 글의 원형은 노신의 평론문장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노신 선생에게 폐가 되리라는 비례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뿐만이 아니었지만) 그 당시는 사르트르의 시대라고 할 수도 있는 지적·사상적 풍조였다. 적어도 그런 경향이었다. ‘앙가주망’의 정신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자주 논란이 되던 시절이다. 나의 글쓰는 정신에 대해서 영향을 미친 요소는 노신을 비롯해서 각양각색으로 적지 않지만 장 폴 사르트르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 꼽아야 하겠다. 그 당시 나는 쉬운 프랑스어책은 읽었지만 사르트르의 난삽한 철학·소설작품은 주로 일본어나 영어의 번역판으로 읽었다. 그의 문장에서는 배운 것이 별로 없다. 그 대신 지식인의 사상 또는 지성인의 삶의 자세 같은 면에서는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최초로 사르트르를 접하면서 신선하고도 강력한 인상을 받은 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침묵의 공화국」이라는 아주 짧은 글이 그것이다. 겨우 두 페이지 반의 글이었는데, 지식인 (인간)과 현실과의 대결관계와 그 관계상에서의 변증법적 사고를 알게 되면서 전율을 느꼈던 기억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혹시 읽지 않은 분을 위해서 요점만 인용해본다.



우리는 독일의 점령하에 있을 때처럼 자유였던 예가 없다. 우리는 일체의 권리를, 무엇보다도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했었다. 우리는 매일 정면으로 모욕을 당했고, 그러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 우리들은 담벽에서, 신문에서, 스크린에서 우리 자신의 그 추하고 풀죽은 얼굴을 보도록 강요당했다. 그것들은 탄압자가 우리에게 그렇게 되기를 강요하고 있는 바로 그 얼굴들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였던 것이다. 나치의 독이 우리의 사고(思考)에 속속들이 스며들었기 때문에 올바른 사고는 그 하나하나가 전리품이었다. 무소무위한 경찰이 우리를 강제로 침묵시키려 하고 있는 바로 그 까닭으로 어떤 낱말도 그 하나하나가 하나의 신조(信條)로서의 선언(宣言)처럼 귀중하였다.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쫓겨 있었던 까닭에 우리의 거동 하나하나가 앙가주망(자기구속)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사르트르는 이렇게 시작한 뒤, “저항만이 진정한 민주주의였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른 사람에게 의무가 있다는 것,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밖에 기댈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는 말로, 독재·탄압·비인간적 상황에서의 ‘개인’의 유(類)적 존재와 개(個)적 존재의 극한적 존재 양식을 그려주었다. 그리고 그 조건 속에 놓인 인간 “한 사람 한 사람 이 억압자에 저항하는 속에서, 분명한 구제를 기대하지 못하면서도 자기 자신이고자 했고, 자신의 자유 속에서 자기를 선택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자유를 선택하려 했다”고 끝낸다. 이 짧은 글의 정신에서 나는 당시의 한국사회와 그 속의 나와 한국인들의 존재 양식을 찾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확신하게 되었다. 적어도 그같은 확신에 대한 힘을 얻었었다. 50년대 후반에 접하게 된 그런 지적·사상적 자극으로 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70년대에 들어서는 밤을 새워가며 책을 읽고, 밤을 새워가며 글을 썼다. 술도 많이 마셨다. 다행히도 나의 건강은 세 가지를 다 보장해주었다. 그 시기의 나는 중국 고사에 나오는, 장공(莊公)의 전차에 맞서는 버마재비(당랑) 같은 만용으로 비쳤을는지 모른다. 실제로 그 당시 어떤 유력자가 나에게 “찧고 까분다”라고 모욕을 준 것을 잊지 않는다. 세상을 거머쥐고 안하무인으로 군림한 당시의 그들에게 나는 아직 그들이 나에게 준 만큼의 모욕을 되돌려주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그 고사는 장공이 그 버마재비를 보고 “인간 같으면 용자일 것”이라고 칭찬했다고 전한다. 용자를 알아보는 장공은 버마재비를 깔아뭉개고 차를 몰려는 말잡이를 제지하고 비켜갔다고도 전한다. 이 나라에 장공 같은 인물은 없었다. 수많은 학생·지식인·노동자들을 미물 버마재비를 뭉개버리듯 짓눌러버렸다. 그래서 나는 자신이 겪는 고통보다 수많은 후학·후예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죄책감에 가위눌려왔다. 몇 해 전부터 그 마음의 눌림이 많이 가벼워졌다. 나의 역할이 끝났다는 표시이다. 나를 위해서나 전체를 위해서나 반가운 일이다.


그럭저럭 30여 년을 쓰다보니 상상치도 않았던 곳에서 열성적인 독자와 마주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당황하면서도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잊을 수 없는 목욕탕 때밀이 독자


작년 겨울 동래 온천탕에서의 경험도 그런 경우이다. 여러 달 동안 감방에서 누질렸던 몸과 마음을 풀 셈으로 남쪽으로의 여행을 떠났다. 그 어느 날 동래에 이르러 대중목욕탕에 들어갔다. 탕 안은 많은 알몸들로 붐볐다. 증기가 자욱해서 흐릿한 알전구의 빛으로는 사람의 얼굴이 잘 식별되지 않았다. 6개월의 때가 낀 육체에게 약간의 사치를 시켜주는 것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하여, 물 속에서 얼마쯤 몸을 불린 뒤에 때밀이 판대에 올라 누웠다. 한쪽 손에 감은 이태리 타올을 다른 손바닥으로 딱딱 치면서 한참 동안 열심히 움직이던 때밀이의 손이 조금씩 늦춰지더니, 멈추었다. 때밀이의 두 눈이 나의 얼굴을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40대 후반의 나이로 보였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면서 머리를 몇 번 갸우뚱거렸다. 그러더니 “혹시 서울서 오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그렇다”는 대답을 들은 때밀이는 그때서야 속으로 무슨 다짐을 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 아무개 선생이 아니냐”고 묻는다. 그가 묻는 이름은 틀림없이 나의 이름 석 자였다. 나는 거짓말을 할 일도 아니다 싶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그가 얼마나 더 열심히, 얼마나 더 오래, 그리고 나의 몸의 같은 곳을 몇 번씩 되풀이해서 때를 밀었는가의 이야기는 생략하는 게 좋겠다. 그는 자기가 때밀이의 신세지만 나의 글을 빼놓지 않고 읽고 있다는 것, 얼마나 나의 사상(생각)에 공명하는 터인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것이었다. 적지 않은 권수의 나의 저서와 여러가지 글의 여기저기에서 정확하게 인용하는 것으로 미루어 그의 말은 진실 이상이었다.


옮기기에는 너무 쑥스럽지만 그는 나의 때를 밀어준 것을 ‘큰 영광’이라고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때밀이 값은 ‘써비스’라면서 받지 않으려고 고집하는 그에게 돈을 들려주는 데는 한참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이같이 뜨거운 사랑에 부딪칠 때 나의 가슴에 맺힌 상처는 아물어간다. 그래서 나는 이제 모든 이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나는 ‘신’이나 ‘하나님의 정의’ 또는 ‘역사의 심판’이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같은 사람들, 즉 때밀이·지게꾼·노동자·농민·노점상……처럼 땅 위에 짓눌려진 인간들에게서 올 것을 확신하면서 글을 쓴다.


이 신념이 일찍이 나의 글의 형식·격조·문체를 결정했던 것이다. 나의 글을 두고 ‘쉽게 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어떤 이는 “어떻게 그렇게 어려운 내용을 술술 쉽게 써버리느냐”고, 감탄인지 경멸인지 알 수 없는 평을 하는 것을 듣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아마 그럴 것이라고 나도 동의한다.


그런데 어려운 이야기나 까다로운 내용을 독자들이 쉽게 (또는 쉽다는 느낌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쓰기 위해서 필자가 얼마나 어려움을 겪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집필작업이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예를 들어 원고지 9매의 짧은 ‘한겨레신문 논단’ 같은 글에서도 그 주제(主題)에서부터 소재·내용·문체·낱말·글줄의 길이·ᆞ자료통계수집·그 앞뒤 배열…… 따위에 세밀한 신경을 쓴다. 다 쓴 뒤에 몇 번을 고쳐쓰는지 모른다. 2주일에 한번 쓰는 짧은 논단이지만, 머리 속에 주제의 씨를 심고, 물을 주고, 발효시키고, 뜸들이고…… 하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특히 나의 글의 특징이랄까 목적이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좀 강조하거나 조금 달리 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면서 풀어가자니 그 새로운 자료·통계·정보를 수집하는 데만도 여간 고생하는 게 아니다. 원고지 9매짜리 논단 속에 넣을 몇 줄의 자료를 찾기 위해서 미국국회의 사록 책 두 권을 꼬박 읽는 따위의 일도 드물지 않다. 지난 연말부터 논단을 쓰지 않기로 한 것도 이처럼 글쓰기가 너무 힘겨워서이다. 쓰는 사람은 결코 쉽게 쓴 것이 아니라 정직히 말해서 뼈를 깎는 어려움으로 쓴 것이다. 그래서 쉽게 읽혀지는 것이다. 독자가 쉽게 읽도록 하려는 필자의 의식적인 노력과 독자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만은 알아주면 좋겠다.


나는 글로써 사회에 서려는 뜻을 세웠던 그 첫 단계에서 ‘누구를 위해서 쓸 것인가?’를 모택동(毛澤東)과 노신(魯迅)에게서 배웠었다. 유식한 사람, 돈 많은 사람, 지위 높은 사람, 권세 있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들에게 억눌린 사람들의 생각과 눈을 뜨게 하려고 맹서했었다. 혈기왕성했던 20대 말의 그 출발점에서 나는 ‘글을 통한 혁명’ 같은 가능성을 몽상했었다. ‘그 목적을 위해서 나의 글은 쉽게 써져야 한다’, 이 마음으로 삼십 년간의 글쓰기를 일관했다. 적어도 그렇기 위해서 의식적인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성공했는지를 자신이 가늠하기는 어렵지 만 동래 온천탕의 때밀이도 쉽게 씌어진 나의 글을 고마워했다. 고등학생들도 그랬다. 농민도 그랬고 주부들도 그랬다. 어느 정도는 목표가 이루어 졌다고 자위하고 있다. 어떤 글이건 글쓰는 이 치고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 이가 있겠는가? 남이야 짧은 시간에 이룩했을 그 정도로 쓰게 되기까지 나는 30년이 걸렸다는 자탄을 할 뿐이다.


그렇지만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생면부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뜨거운 사랑과 약간의 존경을 받게 되기까지에는 나에게도 바쳐야 할 귀중한 희생이 없지 않다. 가정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내가 한창 ‘사회정의’라는 이념의 포로가 되어 밤낮을 가림이 없이 글을 쓰던 60년대·70년대에 우리 여섯 식구는 고려대학 근처의 제기동 미나리 밭 속에 있는 13평짜리 집에서 16년간을 살았다. 나는 나의 방에서 작업을 하는 버릇이 일찍부터 몸에 배어 있다. 도서관에서도 대학의 연구실에서도 집필을 하지 못한다. 나의 좁은 방안은 온갖 자료와 책으로 마구 흩어져 있다. 하지만 그 ‘무질서’ 속에서만 나는 연구하고 집필을 할 수 있다. 얼핏 보기에 정신착란이 일어날 것 같은 무질서한 좁은 방에는 오랫동안 나의 손때묻은 자료들이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흩어져 있는 것이다. 방이 좁은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창호지문으로 된 방은 다섯 식구의 움직임과 음성을 막을 수가 없다. 13평의 공간을 여섯 식구가 공유해야 하는 현실적 제약 속에서의 집필작업은 나를 신경질적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그 당시의 나는, 어찌 보면 일종의 허위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혁명사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이 땅에 동시대적으로 태어난 젊은 지식인으로서 운명적으로 함께 생존해야 할 사회 전체에 대한 관심이 나에 게는 가장 중요해 보였다. 사회의 현실을 외면하고 ‘가정’과 ‘가족’의 행복을 우선하는 것은 나에게는 배신행위같이 여겨졌던 것이다. 당시의 그같은 나의 철학이나 인생관에 대해서 그후 나는 많은 수정을 가하였다. 하지만 나이 20대 후반에서 40대의 젊은 시절, 나는 가정보다 사회를 앞세운 ‘전체주의적’ 성향이 강했었다. 그리고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러기에 너절한 양키문화가 이 민족사회를 고름처럼 덮는 것을 보면서 분노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밖에도 나의 글의 사상과 성격을 구성하는 제반 요소들이 나의 가정생활에 많은 마찰을 빚었다. 당시 내가 처했던 경제적 가난은 차라리 주요요인이 아니었다. 당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사회의 특성이었던 부정과 부패로서의 경제적 부유에 대해서 도덕적 이념적 규탄을 퍼부었던 나에게는 정직한 가난이야말로 자랑으로 여겨졌다. 작은 단위의 가족 식구에의 탐닉은 전체 사회구성원에 대한 배신으로 생각했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


가족에 대해서 내가 많은 죄를 지었다고 후회하게 된 것은 70년대의 마지막, 나이 50을 넘어서이다. 광주형무소의 0.9평짜리 어두운 감방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아내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아직 국민학교를 다닐까 말까한 철없는 어린것들에게 너무나 엄격(가혹?)했던 과거를 뉘우치게 되었다. 다른 가정의 아버지처럼 어린것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지 않은(못한) 30대·40대의 내 자신이 냉혈적으로 인식되었다. 지나친 도덕주의·엄격주의·평등주의·규율생활……의 강조로 찬바람이 불었던 가정에서 어린것들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서 괴로워했다. 가족과 가정에 대한 뜨거운 사랑 없이 남을 사랑하려 했던 사상과 글과 행동의 모순을 뉘우치게 되었다. 그때 이미 두 아들과 딸은 부모의 동물적인 사랑이 필요 없는 나이로 성장한 뒤였다. 큰아들은 군에 들어가 있었다.


2년간의 형기를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된 뒤의 봄 어느날, 나는 군복무중 인 맏아들 건일에게 편지를 썼다. 친구인 유인호 교수의 시골별장에서 휴양 겸 집필을 하고 있을 때이다. 지난 시기의 아버지의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그 어린 때에 느꼈던 감정을 숨김없이 써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어린 마음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나는 대로 상세히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한참 뒤에 아들에게서 타이프로 친 회답이 왔다. 나는 편지를 끝까지 다 읽을 수가 없었다.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마음의 눈에 비친 한 인간의 모습은, 편지가 아래로 내려감에 따라서 인간의 얼굴이 아니라 야차의 얼굴로 변해갔다. 편지를 다 읽고난 뒤의 나는 거의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가 되었다. 자신의 추악함에 대한 혐오감, 비인간적 냉혈에 대한 죄의식, 어린 영혼에게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적’으로 다가갔던 존재로서의 나…… 그것은 무서운 경험이었다. 거울같이 맑은 어린이의 영혼에 비친 자신의 일그러진 상을 십여 년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 순간의 충격은 나의 모든 표현능력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아들의 편지는 이러했다.



아버님께


아버님의 편지 반갑게 잘 받아보았읍니다.


지금 계시는 곳의 생활은 불편하지는 않으신지요.


제가 말씀드리려는 내용이 아버님 책 내용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저로서는 매우 보람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먼저 대략적인 저의 입장을 말씀 드린다면 어렸을 적에는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었는데 제가 재수를 할 때부터는 사회적인 위치로서의 아버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점차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읍니다.


시기적으로 79년을 전후로 해서 그 이전까지의 저에게 비친 아버지의 모습을 먼저 말씀드리겠읍니다.


제가 국민학교에 다닐 시절 아버님은 저에게는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었읍니다. 뿐만 아니라 항상 저를 감시하고 규제하는, 저에게는 어떤 쇠사슬과도 같이 생각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항상 피해의식에서 생활했던 것입니다. 아버님은 생각나지 않으시겠지만 어렸을 때 아버님이 집에서 글쓰실 때는 하도 신경질적이어서 아예 밖에 나가서 집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였읍니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아무 거리낌없이 부모님과 마치 친구를 대하듯이 자유롭게 생활하는 아이들이 엄한 규제 속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정신적으로 훨씬 빨리 성숙하는 것을 보았읍니다. 어렸을 때부터 엄격한 규율 밑에서 행동과 사고면에서 위축되고 제한된 생활을 강요한다면 자라면서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커다란 제약적 요인이 될 것이 당연한 일이겠읍니다. 그러할진대 하물며 어린아이의 정신연령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엄한 규율, 예를 들면, 지나치게 어른다운 말씨와 행동을 요구한다든지, 또는 재미있는 텔레비전 방송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옆집 상규네 집에 가 보면서 왜 우리 것을 놔두고 남의 집에서 봐야 하는지 이유를 몰라하는 상태로 생활하는 적이 많았읍니다.


물론 아버님의 의도하는 바가 나쁜 것은 아니었읍니다. (하지만) 목적이 아무리 좋다하더라도 수단과 방법이 지나치면 그 목적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님은 혼탁한 사회를 살아가신 생활패턴을 그대로 어린 우리들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거의 강제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아버님의 요구를 따르기에는 너무 벅차기만 했었고, 철모르는 어린이들의 눈에는 (아버님이) 항상 이방인처럼 느껴졌읍니다.


생각나는 것이 있읍니다. 국민학교 시절 아버님이 동화집 20권을 사주셨는데, 매일 50페이지씩 읽고, 아버지 퇴근하시고 우리들 한 명씩 앉혀놓으시곤 줄거리를 물어보곤 하셨읍니다. 어떤 날은 아버지 퇴근시간 10분 전에 번개같이 읽어치울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읽지 않고 머리 속에서 창작을 해서 꾸며 서 이야기한 것도 있읍니다……


물론 그 다음날 어제 이야기한 내용과 책내용이 맞질 않아서 책과 이야기한 것을 연결시키느라고 또한번 창작을 해야 한 적도 있었읍니다.


국민학교 때 일인데 가족 모두가 해남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지요. 그때 지금 집에 있는 쏘니 라디오를 가지고 갔는데, 하루는 내가 라디오를 크게 틀어서 듣고 있다가 아버님께 매우 혼이 난 적이 있읍니다. 물론 그때의 아버님의 뜻은 퇴폐적인 도시문화를 아름다운 시골에서 또다시 접하기 싫은 그런 의도였겠지만, 제 생각은 그때 좋은 라디오를 틀으면은 남이 알면 도둑맞을까 봐서 그러신다고 혼자 결론을 내리고는 정말 째째한 아버지란 이미지를 머리 속에 깊이 못박아왔던 것입니다. 조그만 한 예에 불과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렸을 적의 저의 눈에 비친 아버님의 이미지는 모두 후자와 같은 경우로 점철되었고 실제와는 다른 왜곡된 아버님의 인상이 머리 속에 꽉 차 있었읍니다……


1983년 12월 11일 일요일


이건일 드림



편지의 생략한 뒷부분에는 아들이 대학에 들어간 후, 여러가지 책을 읽고 써클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교육철학·사회관. 가족관…… 같은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게 됐다는 ‘치레’의 말이 적혀져 있다. 그러나 그런 내용은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아들과 딸의 천진난만한 맑은 영혼의 거울에 비쳤던 나의 얼굴이 어떤 모습이었는가가 문제일 뿐이다. 아이들과의 인간적·부자간 애정관계는 그후 나의 여러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만족하리만큼 복구되지는 않고 있다. 슬픈 일이다. 나의 글은 이같은 대가를 치룬 셈이다.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기도 하지만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는 혈육의 애정의 상실로 말미암은 메워지지 않는 공허가 남아 있다. 괴로운 일이다.


글로 말미암은 권력과의 갈등으로 1964년에 시작된 투옥의 횟수가 대여섯 차례 된다. 간간이 끌려가 닦달을 받은 일은 세지 않고도 그렇다.


작년 가을, 한겨레신문사 기자단 북한방문취재계획과 관련하여 옥고를 치루고 나온 뒤, 좋은 벗들은 간절한 권고로 나에게 다가왔다.


“이 교수, 옥고는 이번으로 졸업하지, 할 만큼은 했으니까. 조금은 편안 한 인생도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나이도 생각해야지. 가족의 고통도 생각 하고 건강도 언제까지나 지탱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좋은 친구들의 충고가 아니더라도 그런 고생을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은 없다. 삼십여 년 전 글을 쓰기 시작하였을 때 읽은 「침묵의 공화국」에서 사르트르가 “철저한 억압 밑에서의 선택이야말로 진실한 자유”이고 “잔악한 상황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은 앙가주망의 무게를 갖는다”고 말한 그 정신에 충실하려 했을 뿐이었다. ‘앙가주망’은 자기구속이다. 극악한 상황에서 “시민의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기 자신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의무(義務)가 있다는 것, 그러나 동시에 자기자신밖에 의존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외로운 행위! 그 정신과 철학으로 일관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대로 살아 보려는 실천은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기에 형무소 감방은 치열하고 바쁜 삶 때문에 평소 등한시했던 자기성찰의 기회가 된다. 종교서적이 평소와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친근해지는 것도 그 속에서이다. 내가 옳다고 확신한 세속적 행위에 대해서 종교적 예지는 어떤 해석을 하려는가?


여러 차례의 투옥생활에서 여러 종교의 제법 많은 서적·경전을 읽었는데, 이상하게도 석가모니가 ‘탐·진·치(貪·瞋·癡)’를 훈계한 말씀만이 마음 깊숙이 남아 있다. 부처님은 그의 가르침과 깨달음의 길을 여러가지 방법·단계·비유로 설법하였다. 팔만대장경을 이루는 방대한 말씀 중에 어느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인간을 죄악 속에 옥죄이고 있는 세 가지 독(三毒)에 관한 말씀이 바로 나를 두고 한 것같이 생각되었다. 탐(貪)내는 독(毒)은 물욕·정욕…… 등, 온갖 ‘소유’에 집착하는 독, 진(瞋)은 성급하고 쉽게 화를 내고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독, 치(癡)는 미련하고 집착하고 암울하고 깨우치지 못하는 독……이다.


세 독의 어느 하나인들 내가 빠져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자비스러운 부처님은 나에게는 진(瞋)을 경계하신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고 있는 꼴로 미루어서라도 탐(貪)은 차라리 남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 흠일지 모를 일이다. 치(癡)로 말한다면 나의 머리가 명석치는 못하지만, 미련하거나 아둔하거나 옹고집스럽거나…… 하지 못해서 차라리 손해보는 쪽이 아닌가?


그런데 진(瞋)만은 영락없이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어느 모로 따져 보더라도 부처님의 손가락이 나의 가슴을 꼭 찌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독은 나의 몸과 심장과 오장육부에 스며있다. 앞서의 아들의 진단이 입증한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그렇게 진단했었다. 생전에 써 남기신 일기 철을 들추면, 매일의 기재내용이 같다…… “자식의 성질이 급하고, 마음이 좁고, 참을성이 없고, 화를 잘 내고, 격정적이고, 대들기 잘 하고, 아량이 해서 없고, 행동이 경박하고, 본대로 말하고, 언사를 자제하지 못하고…… 그 장래가 심히 걱정이 된다(원문은 주로 한문 문장이지만 옮기면 대강 그렇다)”. 글자욱마다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한숨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아버지에게 그렇게 비쳤고, 과연 훗날 아들에게도 그렇게 비쳤다. 아버지 가 아들을 보는 눈은 소름이 끼칠 만큼 정확했다. 바로 '진(瞋)'을 경계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독(瞋毒)에서 빠져나오려고 무던히나 애를 썼다. 해마다 정초에는 붓·먹·종이를 갖추어, 서투른 붓글씨지만 일 년 동안 이 독을 경계하는 마음다짐으로 ‘瞋’자를 백자씩 쓰곤 했었다. 써서·붙여놓았다. 출근시간 방문을 나서기 전에 한 번씩 그 앞에서 다짐하였다…… ‘오늘 하루 어떤 꼴을 보아도 화를 내지 말라. 감정을 휘어거두어라. 진(瞋)을 이겨야 한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그런데 어떤 이는 “자네가 막강한 권력을 상대로 해서 그만큼 끈질기게 정론(글쎄?)을 펴올 수 있은 것이 차라리 이 진독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라고 진단하는 것이었다. 진독예찬론이다. 들어보니 그럴 법도 하다. 나는 썩어문드러지고 흉포무도한 반인간적인 권력의 작태를 보면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려진 진실을 드러내야만 속이 후련하다. 모든 글이 그렇게 해서 나왔고, 그 때문에 직장에서 거듭 쫓겨나고 형무소를 거듭 드나들어야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훈을 지키지 않은 죄이다. 부모의 가르침은 지켜야 하는 법. 나는 ‘진독예찬론’보다 ‘진독망신론(瞋毒亡身論)’이 옳은 학설일 성싶다.


그런 생각으로 지난 여름에 또 감옥에서 불경을 읽었다. 읽고 명상하고 하는 동안에 새로운 깨달음에 눈이 떴다. 내가 빠져 있는 독은 진(瞋)만이 아니다. 탐(貪)과 치(癡)의 독에도 마찬가지로 빠져 있다. 그렇다. 틀림없다. 30여 년을 두고 쓰고, 쓰러지고, 일어나고, 그리고 또 쓰고, 또 얻어맞고, 쓰러지고, 또 일어나고, 또 쓰고, 또 다시 얻어맞고…… 이 과정을 2수년간 거듭한 것은 진에 못지않게 치(癡)의 작용이 컸지 않았겠느냐 하는 깨달음이다. 미련했으니까 1회 과정으로 그치질 못했지! 마음의 눈(眼)이 조금 트이자 다음의 업(業)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탐(貪)욕과도 무관하다고 생각해온 것이 바로 부처가 말하는 미망(迷)에 빠져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탐은 물욕만을 이름이 아니라, 정신적인 과욕, 만족을 모르는 성취욕, 혼자서 끝까지 이룩하려는 독선이기도 하다. 남의 앞장을 서려는 승부욕이기도 하고, 남보다 유능하다는 교만이기도 하다.


나는 탐(貪)이 바로 내가 빠져 있는 독임을 깨달았다. 그 많은 속성을 합쳐서 쉬운 말로 고치면, ‘성에 차진 않더라도 적당한 선에서 웬만큼 만족하고 멈출 줄 아는 지혜와 마음씨’가 된다고 나름대로 해석하였다. 그것을 더 압축하면 ‘겸허(虛)’이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식한다는 뜻도 된다. 아무리 의로운 일도 어떤 선에서 멈출 줄을 모르면 오만(傲慢)이 된다. 오만은 남과 함께 자신도 파괴한다. 선배나 개척자는 후배나 후학을 위해서 길을 터주면 된다. 그 이상을 탐하는 것은 오만이다.


이렇게 나 나름으로 ‘삼독(三毒)’을 해석하였다. 그러자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는 스스로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도 알듯 싶어졌다. 이제 겨우 철이 드는 것일까? 어쨌든 그런 생각으로 교도소의 문을 나왔다.


다시 세상에 나와 보니, 여러 직업과 신분의 사람들이 소련·중국·동유럽국가들……을 무상출입하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무심코 엿듣게 되는 승객들의 대화 중에서도 ‘공산국가’들을 뻔질나게 왕래한 경험담이 드물지 않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 사회를 보고 온 사람들의 말투가 히스테리적인 ‘반공주의’의 투가 아닌 것도 반가운 일이다. ‘조금은 변했구나!’ 나는 눈을 감고 앉아서 안 듣는 척 들으면서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곤 한다. ‘진실을 보고 알게 되면 사람이 저렇게 변하는 것을……’ 그럴수록 지난 반세기 동안 진실을 은폐하여 거짓을 가르치고, 사실을 왜곡하여 허상만을 보여준 극우·반공독재의 해독이 그동안 자유로워야 할 시민을 얼마나 불행하게 만들었는가를 회고해본다. 나는 계속 듣고 있다.


차 안의 승객들을 의식해서인지, ‘금단의 나라’·‘악마의 나라’·‘붉은 나라’·‘전염병균의 사회’를 다녀온 청년의 목격담은 몇 정거장을 지나도록 그칠 줄을 모른다. 붉은 악마도 못 보고 공산전염병에도 감염되지 않은 것 같다. 사람이 사는 곳에 사람이 가보았다는 평범한 이야기로 끝이 나는 것 같다. 경축할 일이다.


그 젊은이들을 축복하는 나의 마음 한구석이 웬지 가벼운 감상에 젖는 것이었다. ‘많은 시민이 저런 권리·자유·행복을 누리게 되었구나. 그런데 바로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스스로의 권리와 자유를 유보해야 했던 나에게는 언제나 저 나라들을 드나들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질 것인가?’


이런 의문을 합쳐서 나의 글이 갖는 문제에 대해 바로 최근에 나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이로부터 그 답변을 들었다. 그리고 그 답변에 이용된 비유도 나에게는 뜻밖이었다. 그럴수록 깊이 고개를 숙이게 하는 충고였다.


 


이황과 조광조의 교훈


연말 연초에 걸쳐서 지병인 만성기관지염이 악화돼 입원치료를 받고 퇴원하는 길로 맑은 공기를 찾아 전남 영암군의 월출산(月出山)계곡으로 갔다. 머물게 된 곳은 바로 백제 왕인(王仁) 박사의 고향마을이었다.


그곳 구림(鳩林)면에서, 현대학문(약학)과 전통적 한학을 완벽하게 겸비하고 있는 신사이자 선비인 최준기(崔準基) 어른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500년 전 대동계(大同契)의 발상지이며 지금도 그 전통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인물들 중의 한 분이다. 그런 시골에서 그런 어른이 나의 글에 대해서 간직한 뜨거운 사랑에 접한 것은 정말로 뜻밖이었다. 역사와 한학에 어두운 나로서는 교육받은 것이 많지만 그분의 정성어린 충고야말로 오랫동안 내가 찾고 있던 해답이었다.


최준기 선생은 매실주를 나누면서 밤이 깊도록 글에 대한 많은 견해를 피력한 다음,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를 비유하는 것이었다.


“보시오, 이 선생, 두 분이 다 희대의 석학이요, 이론가요, 사상가요, 경세가였지만 두 분이 걸은 길과, 글과, 행동방식은 대조적이었습니다. 퇴계는 장수와 명성과 관직……등, 많은 가르침을 주면서도 현세에서 누릴 수 있는 복은 다 누렸어요. 그와는 반대로 정암은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가, 끝내는 서른여덟 살의 아까운 나이로 사약을 먹고 죽어야 했지 않았습니까.”


그랬다. 그 역사적 사실은 나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나의 속을 알아차린 최 선생은 중간설명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결론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조광조는 세상사를 지나치게 선악(善惡)으로 대치시켜 타협을 절대로 용납치 않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상사회를 자신의 당대에 실현하려고 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는 사상과 언론과 실천으로 청사에 남을 커다란 업적을 이룩했습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사상을 바로잡고 부정·부패·비정을 철저하게 척결하였지요. 하지만 그 욕구가 지나쳐서 막강한 세력을 적으로 돌리게 되지 않았습니까. 정암에 호의적이던 임금까지도 거듭된 사화(禍) 끝에 그에게 사약을 내리지 않았어요? 이퇴계와 조광조의 성격의 탓이랄까요? 완(緩)과 급(急)의 대조랄까요?"


역사상 두 위인의 대조적인 행적·사상·결과……를 비교한 최 선생은 나에게 간곡히 권고하는 것이었다.


“이 선생의 붓이 너무 곧습니다. 이 선생의 글과 정신은 조광조의 긍정적인 면과 비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화도 겪었으니 앞으로는 이퇴계의 긍정적인 면을 배우고 실천하는 지혜가 필요할까 합니다.”


나는 최 선생의 우정어린 걱정과 충고에 감동하여 연거푸 매실주 잔을 비웠다. 정암과 퇴계의 대비는 지식인의 앙가주망 자세를 현대에 비추어본 교훈적 가치가 있다. 거기서 적지 않은 지혜를 퍼낼 수 있는 비유임이 틀림없다. 역사와 현재의 대화라고 할까. 이제 나는 지나온 삶의 한 장(章)을 접고, 새 삶의 장을 열기 앞서 잠시 자신을 성찰해야 할 건널목에 서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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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광주는 ‘언제나 그 곳에’ 있었다」 (1)
관리자 | 2021.01.21 | 추천 0 | 조회 3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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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불효자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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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농사꾼 임군에게 보내는 편지」
관리자 | 2021.01.21 | 추천 0 | 조회 3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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