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일본이 좋은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세카이>2006년 12월호, 야마구치 이즈미 인터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4-24 23:49
조회
487

리영희 <세카이> 인터뷰/



 


그러니까 일본이 좋은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


 


한국의 사상가 리영희와의 대화


 


야마구치 이즈미(山口泉)


 


 


한강 근처의 버드나무들이 풀빛 연기처럼 움이 트고, 비탈진 양지 여기저기에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핀 2005년 4월 초순, 3박 4일의 가쁜 일정으로 서울 근교인 경기도의 한 도시를 찾았다.


지난 번에 내가 같은 동행자와 함께 마지막으로 그가 있는 땅을 밟은 것도 4월이었다. 이 계절의 한국, 바야흐로 이른 봄의 숨결에는 그러나 당시-1998년의 경우 사람들이 그 한복판에서 신음하고 있던 IMF(외환) 위기의 격심한 고통이 선명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이번에는 달라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전에 이 나라를 여행했던 어떤 경우와도 다른, 공기 전체에 퍼져 있는 일종의 꿈을 꾸는 듯한 푸근함이 먼저 내게 스며 들었다.


“한국은 변했어요.”


“예, 확실히 변했습니다.”


서울시내의 호텔 로비에서 재회한 구면의 벗(友人)은 미소로 대답했다. 그가 돌봐 온 노동자 자립지원센터는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고, 지금은 나아가 2007년부터 한국에도 도입하기로 돼 있는 개호(介護. 돌봄)보험제도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단계라고 한다. 이번 여행의 용건을 묻기에, 다음날 회견할 예정인 인물의 이름을 내가 대자,


“리영희 선생? 한양대학의?”


벗의 음성에는 얼핏 위의(威儀)를 갖추는 듯한 여운이 있었다.


어쨌든 이번 여행은 3년 전 꼭 한 번 그 경해(謦咳. 말씀)를 접했을 뿐이지만, 그 이후에도 내가 지금의 세계를 생각할 때 하나의 지표(指標) 또는 원기(原器)로 여겨 온 사상가와 재회하기 위해서다.


일본에서는 여전하다. 먼저 구미 지식인 이 사람 저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고 나서 “발언”하는 자들이 뒤를 잇고 있다. 그 인용에 별반 필연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 경우에도 유행하는 그들 몇몇의 이름은 빈번하게 인용되며, 그리고 그래야 마치 뭔가를 얘기할 수 있었던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 한편으로, 일본과 모든 의미에서 중대한 관계가 있는 이웃나라-한국에 쟁쟁한 지식인들이 현존하는 사실에 대해, 그런 구미의 ‘지(知)의 거인’들에게 무릎꿇고 절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듯하다. 그 중에서도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상가로서의 ‘덕성’이라고 해야 할 자질을 내가 가장 강하게 느낀 이가 리영희씨다.


 


“이런 날에는 벗들이 소주병을 지고 산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아요.”


4월 2일 오전, 호텔 위층의 티(茶) 라운지에서 우리와 마주한 리영희씨는 근교의 구릉지대가 멀리 바라다 보이는 창가에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병으로 쓰러지기 전에는 나도 산에 오르는 걸 무척 좋아했지.”


아침에 투숙한 호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려 하는데, 거기에 리영희씨 모습이 눈에 띄었다. 풍성한 백발에 많은 사람들이 꼭같이 형용하는-바로 그 형형한 눈빛(眼光)은 예전에 도쿄에서 이야기한 첫 대면 때 그대로였다.


정부 합동청사가 있는 과천시는 원래 제2 수도로서의 기능을 하던 도시였다고 한다. 남북관계가 긴장돼 있던 시절, 한국정부가 서울을 포기할 경우에는 한강 남쪽에 있는 이 도시가 임시 수도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던 이유의 하나가 ‘악산’(惡山)이라 통칭되는 맞은 편 관악산으로, 서울을 공격하는 미사일의 피해를 저 산이 막아 줄 것이기 때문이다….그런 일화를 눈앞의 석학은 담담하게 얘기했다.


“당신은 미술을 좋아합니까?” 이미 우리를 어떻게 대접할지 생각해 두신 듯, ‘악산’과 마주보는 청계산 기슭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있다, 후배가 관장을 하고 있으니 가 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점심은 경치 좋은 곳을 예약해 두었으니…”


자신의 차를 몰고 온 리씨는 오른 팔과 오른 다리가 부자유스럽지만 운전은 매우 경쾌했다. 오른 팔 때문에 작은 보조 바가 부착된 운전대를 시원시원하게 조작하면서 산길을 올라가던 리영희씨는 담담하게 말했다.


“요즘 텔레비나 신문에서 이래저래 찾아오는데…나는 이제 얼굴이나 이름을 내고 싶지 않아요.”


자신이 ‘마지막 책’이라고 규정한 인터뷰 형식의 자전 <대화-어느 지식인의 삶과 사상>(대담 임헌영, 한길사)을 지난 달 간행한 리씨는, 실로 한국현대사와 발걸음을 함께해 온 지식인의 750쪽에 이르는 대저(大著)를 둘러싼 큰 반향의 한복판에 있었다.


 


리영희씨는 1929년, 조선(한반도) 북부 평안북도(지금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내)에서 태어났다. 1945년, 구제 중학교 졸업 직전에 해방을 맞았고, 그 뒤 1950년에 국립 해양대학교를 졸업했다. 고교 교사직을 얻은 직후에 발발한 조선(한국)전쟁 때 통역장교가 된다. 가족의 이산을 포함한 그때의 절절한 전쟁체험은 탁월한 자전적 에세이 ‘전장과 인간’(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 역 <분단민족의 고뇌> 1985년 오차노미즈 쇼보 御茶ノ水書房 수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


1957년에 소령으로 예비역이 된 뒤 <합동통신> 외신부장, <워싱턴 포스트> 통신원, <조선일보> 외신부장 등을 역임했고, 1972년에 한양대학교 교수가 됐다. 그 뒤 버클리대학 준교수, 하이델베르크대학 객원교수. 그리고 일본에도 1985년부터 1년간 도쿄대학(사회과학연구소)에 초빙교수로 가 있었다.


2000년 뇌졸중 뒤에 한양대학교 교수를 비롯한 모든 교직에서 물러났다.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청년층을 중심으로 큰 영향을 끼친 <전환시대의 논리>(1974년), <우상과 이성>(1977년), <분단을 넘어서>(1984년)를 비롯해 앞서 얘기한 최신간 <대화>에 이르기까지 많은 저서들이 있다. 일본어역으로 <분단민족의 고뇌> 외에 <조선반도의 새 밀레니엄-분단시대의 신화를 넘어서>(서승 감역, 미나미 히로에南裕恵, 히로세 다카코広瀬貴子 역, 2000년, 사회평론사)가 있다.


 


미술관을 나와 점심식사 예약을 해 둔 경치 좋은 식당으로 가던 도중 차 왼편에 길게 이어지는 콘크리트 담장을 가리키며, 리영희씨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새 서울 교도소요. 이것이 만들어져 일제 강점기의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를 쓰지 않게 됐지. 나는 두 번째 투옥됐을 때 여기에 갇혀 있었어요.”


리영희씨의 존재는 한국의 1970년대·80년대·9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는 30년이 넘는 기간을 통해 학생·노동자를 비롯한 민주화운동·통일운동 담당자들에게 사상적 지주가 돼 왔다. 일찍이 씨의 저작은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체포·투옥당했다고 한다. 씨 자신이 자신의 언론활동에 대한 “권력 쪽으로부터의 보복은 강제연행·체포 7회, 그 가운데 투옥 5회,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에 의한 재판 3회, 징역 합계 약 3년 반, 신문사 강제퇴직 2회, 대학교수 해임 2회(각 4년, 계 8년)…등이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조선반도의 새 밀레니엄> 일본어판 서문)고 회상했다.


“아까 만났던 국림현대미술관의 김윤수 관장을 선생님은 ‘후배’라고 하셨습니다만….” 내 의문은 두 사람의 경력에 직접 공통성이 없는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아, 그것은-” 리영희씨는 신중하게 말을 고르듯 대답했다. “이런 식의 얘기는 오해를 살지 모르지만…, 지금의 한국 40대·50대 이상의 사람들 중에 내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의 ‘후배’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오만한 느낌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의 ‘사실’을 담담하게 설명하는 말투로 진술되는 것에 나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인간의 삶의 모습에 관한 어떤 ‘규범’이 분명히 존재한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또는 거기에 다가가고 싶다는 이상이 사회 속에 명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것이 한국과 일본의 결정적인 차이인 것처럼 내게는 생각된다.


백운호라는 아담한 이름의 호반 식당에서 한정식을 먹은 뒤 바깥으로 나가니 오전보다 공기에 온기가 많아져 있었다. 리영희씨는 단장을 짚은 채 잠시 걷기를 멈추고 바로 위 낮은 고도로 지나가는 여객기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 비행기는 국내선으로, 제주도나 부산에서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 항공로 아래에 아까 봤던 그 교도소가 있는데…운동시간에 방사상으로 구획된 좁은 운동장에 동물처럼 풀려나가 있을 때 머리 위를 지나가는 여객기를 보고 있노라면, 아, 자유다, 자유를 빼앗긴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하는 통절한 생각이 들었지요.”


 


내가 이 사상가와 처음 만난 것은 2000년 10월, 도쿄에서 서승씨(리쓰메이칸대학立命館大学 교수)로부터 소개받았을 때였다. 그때까지 단 한 번 정말 우연히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 얘기해 본 적이 있었을 뿐인 서승씨로부터 갑자기 전화가 왔고, 리영희씨를 만날 수 있는 자리에 초청을 받았는데, 서승씨가 ‘리영희 선생’이라고 한 그 이름이 정경모씨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재일 조선인 2세·3세에 대한 제언’(<씨알의 힘> 제7호, 1984년)에 소개돼 있던 논문 ‘분단민족을 둘러싼 군사적 위기’(<세카이> 1983년 11월호)의 필자 바로 그 사람이라는 생각을 떠올린 것은 잠시 뒤였다.


그 뒤 나는 그 2000년 가을의 만남에 대해서 쓴 짧은 글이 실린 잡지와 내가 예전에 쓴 두 책(舊著)을 리영희씨에게 보냈다. 그 뒤 소식이 끊어졌는데 올해 3월 뜻밖에도 편지를 받고 씨가 뇌내출혈로 요양을 해야 했던 사정을 알았다.


만나고 나서야 새삼 알게 된, 식사 때에도 왼손으로 받치고 젓가락을 사용해야 하는 그 부자유스런 오른손으로 편지지 3장을 빼곡이 채워 쓴 그 소식은 그때 보내드린 졸저에 대한 과찬의 기록이었다. 말미에 쓴, 한국에 갈 기회가 있으면 꼭 찾아뵙겠다는 말이 이번 여행의 발단이 됐다.


 


(필자) 야마구치 이즈미 山口泉


작가, 1955년 생. 저서 <여행하는 사람들의 나라>(지쿠마쇼보筑摩書房), <아시아, 겨울 이야기>(오로라 자유 아틀리에), <‘새로운 중세’가 왔다!>(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호텔 아우슈비츠> <신성가족>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 전설-가스실 속의 ‘희망’으로>(이상 3권은 모두 가와데쇼보河出書房 신사) 등


 


 


댁으로 향하는 차 속에서 노무현 대통령 평가에 대해 물어보는 쪽으로 얘기가 흘러갔다. 리영희씨는 몇 초 정도 침묵한 뒤,


“이전에 내가 그를 ‘무식’하다고 한 것을 모든 매스컴들이 보도해 버리는 바람에…좀 미안한 짓을 했어요. 그는 정치가로서는 별로 외교적이지 못해요. 최근에는 상당히 바뀌긴 했지만…”


“저 3·1절에서 한 노무현씨의 ‘대통령 축사’를 나는 매우 진지한, 오히려 일본에 대한 관용을 가지고 미래를 지향하는 발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일본 미디어의 논조에는 적지않은 반발이 있었습니다.”


내 말에 씨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했다.


“외교적이라고 할 순 없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외교적이진 않지만 틀린 것은 아니에요.”


리영희씨를 볼 때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은 지식인의 존재가 여전히 압도적인 영향력을 지닌 사회가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2003년 5월 21일, CBS텔레비전의 시사프로에 출연한 리영희씨는 그때 미국방문 중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현지에서 미국을 상찬한 언동의 경솔함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면서 대통령의 식견에 의문을 표시했다. 이른바 그 ‘무식’ 발언은 한국의 거의 모든 매스미디어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됐고, 귀국 직후에 그것을 알게 된 노무현 대통령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후 그 리영희씨의 비판은 대통령의 언동·시정 방침에도 적지않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일국의 대통령에게 직접 영향을 끼치는 지식인이 존재하는 것도, 또한 대통령이 일개 지식인의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스스로를 바로잡는 것도, 그것 자체가 적어도 일본 국내의 현상(現狀)으로 보자면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사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자동차는 리영희씨가 살고 있는 군포시로 들어갔다.


“아까, 한국은 7년만이라고…?” 내가 확인해 주자, 씨는 반쯤 혼잣말처럼 천천히 얘기를 이어갔다.


“최근 7년간의 변화는 컸어요.” 중얼거리듯 다시 조용히 반복했다. “컸어. 정말 많이 변했어.”


리영희씨 자택은 일본의 집들과는 규모나 척도가 상당히 다른 고층 아파트군의 한 동으로, 그 25층 중 19층에 있었다. 문 옆에는 예전의 집에서 사용했던 오랜 목제 문패가 걸려 있었다. 현관으로 통하는 거실 오른쪽은 커다란 유리창 가득 이른 봄 향내가 나는 동네산이 바짝 다가와 있는 절경이었다. 수리산이라고 이미 그 이름은 듣고 있었다.


리영희씨가 널찍한 거실의 안락의자에 편안하게 앉고 나와 동행자가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씨의 동반자 윤영자씨가 귀가했다.


처음에 리영희씨는 <대화>에 관해 각 신문 잡지에 난 엄청난 수의 서평 사본들을 보여 주었다. 기사 중의 한 사진에 리영희씨가 몇 번째인가의 투옥 뒤 석방된 직후 두부를 손에 든 윤영자씨가 맞이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한국에서는 출옥한 뒤 손을 대지 않고 두부를 먹는 풍습이 있다지요?”


“밟아 뭉개는 풍습도 있어요.”


리영희씨는 당시 그때까지도 일본에서 화제가 되고 있던 후지텔레비와 라이브도어 사건(인터넷, 미디어, 금융 관련 사업을 하던 일본 주식회사 라이브도어의 2004년 9월 결산보고 중의 유가증권보고서 허위내용 기재 의혹사건-역주) 경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듯했다. 미디어론 문제에서 화제는 내가 그 전 달에 복사해서 보낸 논문 ‘「정의」와 「평화」-「전후민주주의」의 공리(功利)주의적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윤리를 위한 하나의 보설(補說)’(<도시샤(同志社)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연구> 제2호,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学)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연구센터 발행) 쪽으로 옮겨 갔다.


씨는 말했다.


“거기에서 당신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를 엄중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왜 고바야시가 여전히 일본문단의 권위가 돼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가 그런 위치에 있는 데에는 뭔가 그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요.”


“고바야시 히데오 문제는 일본의 특수성의 근간과 관련돼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느끼기에는 고뱌야시의 존재가 지극히 명백한 정치적 요청을 토대로 해서 온존돼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바야시는 언론에 대한 자신의 역사적 책임에 대해 추궁당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이 예컨대 한국의 친일파 문학자 이광수의 경우와 크게 다릅니다.”


“이광수는 1922년에 조선민족 멸시의 <민족 개조론>이라는 매국적인 저작을 써서 일본과의 동화를 주장했지요. 그 해에 루쉰(魯迅)은 <아Q정전>을 써서 중국인의 결점을 통렬하게 비판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뜨거운 민족애를 호소했습니다. 같은 아시아의 문학자로서 나는 루쉰 편이에요. 2002년에는 병을 무릅쓰고 중국으로 여행을 가서 염원하던 루쉰의 고향 참배도 하고 왔는데…” 리영희씨는 천천히 얘기를 이어갔다.


“천재적인 이광수는 문학자로서는 뛰어난 존재였어요. 그런 그가 왜 그렇게 돼 버렸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작가로서는 이태준과 함께 한국 근대문학 최고의 작가라고도 할 수 있는 이광수가. 일본에서 루쉰과 같은 국민적 문학자를 든다면 누구입니까? 또는 톨스토이나 셰익스피어 같은-”


나는 대답하기가 난처했다. “대단히 어려운 질문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일본에서 루쉰에 필적하는 존재는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루쉰에 필적하는 문학자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실은 일본문학 내지 일본의 특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내 평생 유감스럽게 여기는 것으로, 예술과 친해지지 못했다는 점이 있어요. 나는 늘 사회과학의 방법을 취해 왔기에 어디까지나 논리적·분석적인…”


“아닙니다. 결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의 예컨대 ‘전장과 인간’이라는 자전…그것은 모두 사실에 토대를 둔 것입니다만 또한 동시에 생기 넘치는 정치(精緻)한 산문으로 쌓아올려 가는 작업에서, 나는-굳이 말씀드리자면-압도적인 ‘소설’을 느꼈습니다.”


“그렇습니까. 확실히 발표 당시 ‘이것은 소설이다’라고 얘기한 사람도 있었지요.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소리도 있었지만.”


전체가 9만 자에 가깝고, 그것만으로 작은 책 한 권 분량의 작품 ‘전장과 인간’이 담고 있는 내용의 무게는 압도적이다. 리영희씨 가족의 이산가족으로서의 운명과 생사의 경계를 넘은 씨 자신의 체험이 그대로 ‘민족’ 나아가 ‘인간’의 보편적인 비통함으로 밑바탕에서 상통한다(通底)는 의미에서, 내 생각에는 드문 기록이다. ‘어느 젊은 지식인의 6.25체험’이라는 부제가 보여 주듯이 일종의 극한적인 청춘소설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작품이 일본인 독자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일본에게 조선(한국)전쟁이란 무엇이었던가, 남북분단이란 어떤 것인가가 흠잡을 데 없이 제시돼 있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전란의 한복판에 병에 걸린 동생의 목숨을 구하지 못했고, 또 분단이 고정된 뒤 형 및 누나와 재회하지 못한 채 사별한 리영희씨의 경험과 생각은 그 뒤에도 1976년부터 4반세기 이상 매년 실시돼 온 한미 합동군사연습-현재 지상에서 실시되고 있는 유일한 ‘전쟁 규모의 합동 핵군사훈련’ ‘대북조선(북한) 핵공격·상륙작전훈련’-‘팀 스피릿’의 포학(暴虐)이 북조선사회에 짐 지워 온 공포와 고뇌를 깊은 고통을 수반한 내재적인 상상력으로 냉정하게 묘사해낸 <조선반도의 새 밀레니엄>의 투철한 서술과 고찰까지 일관돼 있다.(또 덧붙인다면 이 책은 현재 세계에서 미국이라는 나라의 존재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갖기 위해서도 읽어 볼만한 최고의 입문서다)


 


여기에서 얘기하는 장소를 저녁식사 자리로 옮겼다. 리영희씨는 윤영자씨의 손을 빌려 붉은 와인을 따라주었다.


“잊기 전에 얘기해 두자면, 그 뒤의 그림은 평양에 갔을 때 아이들이 그려 준 것입니다.”


씨가 얘기한 것은 바로 내가 앉은 곳 뒷벽에 걸려 있던 꽃병에 꽂힌 꽃을 그린 수채화였다. 얇은 종이가 크게 일렁일 정도로 몇 번이나 색을 덧칠했다. 그 그림을 잠시 들여다 보고 나는 입을 열었다.


“한국은 오랜 군사독재정권으로 민중이 고통을 받았고, 선생님도 여러차례 투옥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런 것들은 어쨌든-이런 외람된 표현을 용서하세요-공화정체(共和政體) 내의 일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유사 이래 단 한 번도 진정한 공화국이 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민중을 탄압하기 위해 투옥할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눈에 보이지 않는 감옥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것도 때로는 희희낙락하며. 그런 일본인의 입장에선 한국의 여러분의 지금(모습)은 참으로 눈이 부십니다.”


리영희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일본인은 천황을 통해 안심입명을 얻는다고 할까… 천황제의 자기마취에 걸려 있는 면이 있는 건 아닙니까. 2002년에 천황이 ‘황실의 선조는 조선반도에서 유래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이것은 그때까지의 모든 것을 뒤엎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그 뒤 나는 상당히 주의깊게 일본 매스컴의 대응을 주시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지요. 이제까지의 신화를 부분적이긴 해도 스스로 부정하는 듯한 이런 중대한 발언이 나왔다는데…. 다름 아닌 천황 자신의 말로 발설된 것인데도!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이런 무반응 자세는 해도 너무한다. truth(진실)에 반응하는 감각이 없어졌다. 장래에까지 일본인의 근저에 무반응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일본의 ‘히노마루’(일장기) ‘기미가요’(애국가)를 둘러싼 상황을 보노라면, 교사들의 모습에서는 예전의 군사독재정권하의 우리 모습을 느낄 수 있는데…. 한국의 경우 전국(초·중·고) 교직원조합 사람들은 6년에서 8년간 직장에서 쫓겨나 있었어요. 그 동안 월급도 받지 못하고. 그래도 투쟁을 계속하면서 민주화를 언젠가는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모두가 열심히 노력해 왔어요. 민주적인 교육을 떠받친 집단적 경험이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여기에서 여러 번 말이 끊어진 뒤,


“한국의 경우-” 리영희씨는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시선을 하고 다시 계속했다.


“지난 30간…실패를 거듭하고, 실패를 거듭하고, 실패를 거듭하다가-마침내 어떻게든 민주화를 정착시켜 왔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씨는 더 이어갔다.


“이 나라는 세련돼 있지 않아요. 그 때문에 마모되지 않았어요. 매수당하지 않았어요. 한국에서는 인간의 원형질에 저항심이 있어요. 따라서 이 나라는 어떤 하모니 아래 일체화되기 어렵습니다. 박, 전, 김…어떤 통솔자도 그렇게 할 수 없었지요. 어느 시기에도 일관되게 사회와 개인 사이에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설사 대통령이, 이것은 국민대중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아무도 쉽게 믿지 않아요. 체제 복종, 환경 순응으로 마을 축제에 모두가 나가서 미코시(神輿. 신요. 신을 모신 가마)를 메는 것과 같은 일은…이 나라에서는 좀체 되질 않아요. 알몸으로 왓쇼이, 왓쇼이라며 떠들어대는 일은. 하지만 일본은 달라요. 뭐랄까, 그…”


“‘와’(和)의 정신 말이지요. ‘국체(國體)의 본의(本義)’를 관통하는-”


“맞아, 맞아. 한국인에게는 일본인의 ‘와’가 좀 필요하고, 일본인에게는 한국인의 ‘개’(個[性])가 좀 필요할지도 모르겠어.”


“일본의 경우 이 ‘와’의 해독은 보수층만이 아닙니다. 혁신이라는 데서도 엄청 ‘와’를 존중하는 정신이 강하고, 혁신정당에도 시민운동에도 갖가지 작은 천황제가 있습니다.”


“‘국체의 본의’ 이야기를 하자면, 나의 일제하 소학교(초등학교) 시절에는 시험이 있었어요. ‘국체의 본의’를 어디까지 익혔는가-”


그 뒤 리영희씨는 내 저서와 작품에 대한 감상을 얘기한 뒤 ‘남북문학회의’나 5월에 예정돼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북 방문 등에 대해 언급했으며, 또 김영삼 정권에 관해 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역사적 평가를 제시했다.


“김영삼 본인은 뿌리부터 반공주의자이고, 평범(凡愚)한 보수적 인물이지만 그 임기 중에 전두환과 노태우, 그리고 군의 중핵세력을 배제하고 한국 정치에서 군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대단한 일을 했어요. 뭐라 해도 군은 ‘반공’ ‘반북’ ‘숭미(崇美. 미국 숭배)’로 똘똘 뭉친 조직입니다. 그것을 광주사건의 책임을 전두환, 노태우 두명에게 묻는 형태로 그들을 투옥하고, 정치에서 군의 영향력을 배제했어요. 그렇게 했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은 암살당하지 않고 민주화를 촉진하고 북과 교섭을 할 수 있었어요. 김영삼이 전임자가 아니었다면 김대중은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역사에는 무의미한 존재는 없어요.”


- 이것이 자신이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해직당했을 뿐만 아니라 광주사건의 주모자 중 한 사람으로 몰려 체포·투옥당한 7명 중 한 명이었던 인물의 말이다. 그런 사실을 떠올리는 것은 리영희씨의 역사관에 한층 더 다이내믹한 진폭을 보태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된다.


씨는 계속했다.


“지금 한국에서는 여러 방면에서 변화가 일고 있어요. 무엇보다 냉전적인 사고가 아니라 개인의 자유나 권리를 존중하려는 기운이 생겨나고 있지요. 특히 여성의 권리에 관해서 그래요. 북과의 관련에서도 문제를 군사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평화가 priority(우선 순위)의 넘버 원이 돼 가고 있어요. 김대중이 한 일이 확실히 대중화돼 왔습니다. 이제 ‘반북’ ‘반공’으로는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어요.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이 3월 31일에 국가보안법 적용 대상에서 해제됐어요. ‘혐의 없음’이라는 거지요. 이것도 획기적인 사건이에요. 예전에 북에 간, 이른바 ‘월북 작가’ 여러 명이 남에서 해금되게 됐습니다. 저작권법의 적용대상도 됐고요. 독립운동 지사 여운형도 명예를 회복해 가고 있어요. 제주도의 ‘4·3사건’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구제가 추진되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일이지요. 대통령 직속 위원회가 역대 독재반공정부의 과오에 대해 진실을 규명하려 하고 있어요. 역사상의 진실을 해명하고 책임자들을 처벌한다-그 바탕 위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화해가 이뤄진다…”


이에 대해 동행자가 일본의 경우는 전전(戰前)·전중(戰中)의 역사에 관해 전혀 그런 과거청산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얘기를 하며 끼어들었다. 나도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 고문사한 <게 가공선>의 작가-역주)나 요코하마 사건(2차 대전 중이던 1942~1945년, 편집자와 신문기자 등 약 60명이 체포당했고 그 중 약 30명이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4명이 옥사한 사건-역주)의 사례 등을 끄집어내 국가권력의 탄압을 받아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제대로 된 원한 씻기(雪寃)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한국에서의) 모든 변화는 한국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불러들이고, 쌓아 올린 것이라는 사실이다. 본래 모든 ‘타개’나 ‘해결’이 그렇듯이, 여기에서는 어떤 ‘타개’도 ‘해결’도 바깥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싸워서 얻어낸 것이다.


씨는 말했다. “25~6년 전이었다면, 38도선 주변에서 옥신각신하는 것만으로도 한국에서는 미국으로의 이민 신청이 왕창 늘었을 거요. 하지만 지금은 북이 핵을 가졌다고 발표해도 아무도 놀라지 않아요. 이민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거지요. 북이 남을 공격할 것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요. 북에 대해서도 그들의 궁상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대중들 사이에 퍼지고 있어요. 미국은 그곳이 지독하게도 싫은 겁니다. 그와는 반대로 금강산 관광은 점점 늘고 있어요. 핵정책에 관해서도 노무현 대통령은 동족 내부의 전쟁으로 연결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 점이 또한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어요. 최근에는 ‘북은 전쟁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들을 어떻게든 먹여 살려야 한다’-그런 기운이 국민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합리적인. 그것은 미국의 생각과는 크게 다른 것이지요. 미국과 한통속이 된 반공우익에 의해 만들어지고 증폭된 공포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허둥대지 않게 됐어요. 북으로부터의 망명자의 말에 일일이 춤추지도 않습니다.”


“예컨대 황장엽씨와 같은?”


나는 <조선반도의 새 밀레니엄>에 수록돼 있는 ‘「주체사상」의 이데올로그 황장엽과의 대담’을 떠올리고는 끼어들었다. 1997년, 한국에 망명한, 이 전 김일성대학 총장·조선노동당 국제담당비서, 무엇보다 ‘주체사상’을 만들어낸 인물과의 대담은 <한겨레신문> 창간 10주년 기획으로 1998년 5월에 이뤄져 이 신문에 실렸다.


리영희씨는 조용히 응대했다.


“이 나라에서는 변절자의 말은 믿지 않는 전통이 있어요. 역사적·사회적 경험의 결과로…”


“문제를 이렇게 규정해 버리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만일 유교적 정신이라는 것의 뛰어난 면이 있다면, 적어도 그런 것들은 일본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덕성’(德性)이라는 개념이라고 할까…”


“들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군요. 일본에는 사회적·기능적 측면만이 들어갔지요. 봉건주의의 본원적 체제에 실리적인 기능만이. 그것이 중국·조선과 일본의 차이일지 모르겠어요. ‘문화’보다 먼저 ‘문명’을 수입해서”


“그와 관련해서 선생님은 유교적 정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공자선생의 제자(徒)이기도 하고, 예수의 제자이기도 하고, 붓다의 제자이기도 해요. 모두의 제자이기도 하지만 어떤 ‘유일신’ ‘절대자’도 믿지 않아요.”


“한국 민주화 투쟁의 윤리적인 기반에는 역시 기독교의 영향이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일본에는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만.”


“한국 기독교에서 진보파라 할 수 있는 세력은 기독교 전체의 10% 정도도 되지 않아요. 거기에는 초창기부터의 역사적인 경위도 관련이 있어요. 한국의 기독교도들은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이에요. 그들은 민주화투쟁·남북화해를 ‘반미’라며 반대해요.”


초저녁이 다가와 있었다. 리영희씨로부터 이미 우리는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는 권유를 받아 놓고 있었다. 앞서 윤영자씨가 급거 외출한 것도 아마도 우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취미로 바이올린을 즐기는 동행자가 문화와 민족성이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애호하는 정경화 얘기를 화제로 끄집어냈다. 차이코프스키를 연주하든 시벨리우스를 연주하든 역시 정경화의 바이올린에는 조선민족의 자잘이라는 것을 진하게 느낀다. 그런 얘기를 하자, 리영희씨는 “그런가요”하고 다소 놀라는 모습이었는데, 그리고 나서 천천히 일어나 “기악 쪽은 잘 모르지만…”이라면서 실내의 오디오 장치 쪽으로 걸어갔다.


“최근에 일본의 노래를 들어 보려고 레코드를 샀어요. 사서 실제로 들어 보니 이 가수의 목소리 자체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나…다만 일본의 노래가 들어 있어서.”


곧 울려 퍼진 것은 일본의 고명한 소프라노 가수가 취입한 창가·동요 CD였다.


‘조춘부(早春賦)’ ‘어스름 달밤’ ‘카나리아’…어느 곡이든 낮고 가는 바리톤으로, 리영희씨는 따라 불렀다. ‘고추잠자리’ ‘이 길’ ‘고향’….


“중학 4학년 때까지 일본어로 자기나라 역사보다 일본의 역사를 배웠으니까. 아직 가 본 적이 없는 장소에도 그런 어떤 그리움 같은 것이 있어요. 병이 들어서 이젠 틀렸지만 자동차로 일본 전국을 돌아다녀 보고 싶었어요.”


이제 방은 거의 저녁 어둠에 잠겨 있었다. 리영희씨도 우리도 굳이 불을 켜려 하지 않았다.


돌연 리영희씨가 가슴을 저미듯 혼잣말을 했다.


“참으로 일본이 좋은 나라가 됐으면 좋겠어요. 좋아하는 나라니까. 국가가 좋다는 게 아니라 일본인이나 일본의 자연, 풍물이 좋으니까. 그러니 좋은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거요. 부시나 미국만 좋아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그 몇 분간은 갑자기 찾아 왔다. 그날의 모든 것들 가운데 일종의 보석과 같은 시간이었다. 또는 훨씬 더 긴 시간의 척도로 재더라도.


“예술-. 서대문(교도소)에 있을 때 매일 쇠창살이 박힌 창을 통해 지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내가 음악이나 시를 할 수 있다면 이런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했어요…”


“어머, 전깃불도 켜지 않고.”


비닐 쇼핑백을 손에 든 윤영자씨가 기가 막히다는 듯 조선어로 얘기하며 들어오셨다.


 


척척 저녁준비를 하신 윤영자씨는 일품인 김치류와 돌솥에 가득 담긴 된장찌개를 비롯해 멋진 한국 가정요리로 환대해 주셨다. 이 작은 몸집의 상냥한 여성이야말로 최신간 <대화>의 벽두에서 저자가 다음과 같은 헌사를 바친 분이다.


 


긴 세월에 걸친 문필가로서의


나의 인생의 마지막 저술이 될 이 자서전을,


결혼 이후 50년간, 자신을 희생하며


오로지 사랑하는 자식들과


못난 남편을 위해서 온갖 어려움을 힘겹게 극복하고.


굳건한 의지로 헤쳐 온


존경하는 아내 윤영자에게 바친다.


 


“앞서 야마구치씨는 <전장과 인간>을 칭찬해 주셨는데…” 리영희씨는 생각이 난 듯 얘기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또 하나의 소설풍의 단편을 쓴 게 있어요.”


‘D검사와 이 교수의 하루’라는 제목의 그 작품은 일세를 풍미한 씨의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등의 저작들의 반공법 위반 혐의로 1977년 11월 23일 새벽, 갑작스레 연행당했을 때 반공 검사실에서 하루 심문을 받을 때의 통절한 체험을 묘사한 것이다. 당시 86세의 어미니는 그 한 달 전부터 병상에 누워 있었다. 심문에서 기소로 탄압이 진행되던 그해 12월 27일, 검사실에 면회하러 온 윤영자씨로부터 리영희씨는 단 한마디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라고 고하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씨의 이야기에 윤영자씨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 다음날, 역시 리영희씨로부터 소개받은 정병호씨(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정진경씨(충북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부처는 내게 동년배의 새로운 벗이 됐다. 정씨 부처, 그리고 서승씨도 함께 리영희씨와 재회한 그해의 여름에는 왕년의 교단에 서던 때의 모습을 방불케 하는 리영희씨의 강연도 들었다.


그리고 올해 5월 말부터 6월 초순, 나로서는 14년만이 된 광주 재방문을 포함한 한국행 때도 바쁘신 중에도 씨는 시간을 내 주셨다. 하지(夏至)가 가까운 경기도의 전원지대에 이윽고 저녁이 다가오는 시각, 모내기가 막 끝난 펼쳐진 논에서 개구리의 대합창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번에는 반월호라는 아담한 이름의 호숫가에서 전통적인 메기요리를 대접받으면서 ‘광주’에 대해 품고 있던 리영희씨의 생각들을 접하면서 가슴 떨린 잊을 수 없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한국을 찾아가 처음으로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눈 2005년 4월의 며칠간 농밀했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리영희씨와 함께하면서 느꼈던 것은 씨의 ‘삶(生)’과 ‘세계’에 대한 책임의식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수행해야 하는 건 단지 지식인만이 아니다. 하지만 지식인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완수하려 해 온 리영희씨가 현대 한국의 발걸음과 함께 하면서 남북으로 분단된 민족의 운명을 몸소 체현하는 한편, 동시에 지식인으로서의 고난에 찬 처신을 통해 77세의 오늘까지 일관되게 싸워 온 것에 나는 경의를 느낀다. 그럴 때 아마도 비로소 지식인이라는 자들은 뿌리깊고 야비한 그 특권성을 불가역적으로 넘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지식인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나는 생각한다.


나도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적지않은 사자(死者)들. 제2차 대전 뒤, 조선전쟁 뒤, 현대한국의 민주화투쟁, 남북통일운동을 통해 ‘열사’로 불린 사람들. 그리고 이름조차 전해지고 있지 않는 수많은 사자들-.


여러분들이 자신의 ‘희망’을 맡긴 나라는 지금 인간 공동성(共同性)의 더 먼 지평을 멀리 바라보려 하고 있다, 라고.



번역 한승동 (전)한겨레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