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와 시작하는 앎 / 최진호
리영희와 시작하는 앎
최진호/ 읽기의집,점필재연구소 연구원 <상상된 루쉰과 현대중국>(소명 2019) 저자
1. 리영희와 피로
“나는 이제 가벼운 피로를 느낀다. 펜을 무기 삼아 싸우는 전선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것도 여러 번이고 흉포한 권력의 포로가 된 것도 너덧 차례나 된다. 국가와 현실 상황은 아직도 가열한 전투를 예고하지만, 개인에 따라서 잠시 쉬면서 상처를 아물게 하고 기운을 회복할 필요 또한 절실할 수가 있다. 개인적 상황과 심정적 상태를 그린 「30년 집필 생활의 회상-잠시 펜을 놓고 쉬는 마음」이 이 책의 끝을 이루는 것이 그 때문이다.”(『自由人, 자유인』, 「머리말」, 19쪽)
1990년 여름, 리영희가 토로하는 피로감은 예사롭지 않다. 그는 1970~80년대 ‘사상의 은사’이자 ‘의식화의 주범’으로 냉전시기 한국사회의 폭력과 모순에 대해 지치지 않고 이야기해왔다. 87년 민주화 이후에도 폭력과 모순이 일순간 해소된 것도 아니었다. “21세기를 바라보는 문명세계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자유, 그리고 자유로운 판단의 박탈” 등의 “상태는 지금도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고 리영희는 판단했다. 그렇다면 1970년대 후반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로 인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투옥되었을 때도, 검사로 상징되는 국가권력의 폭력성을 신랄하게 지적해왔던 리영희의 피로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리고 이 피로는 그의 실천에 어떤 영향을 주었던 것일까. 이와 관련해 40대의 리영희의 선택을 참조해보자.
40대를 시작한 리영희는 저널리스트-인텔리 직업을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때를 다룬 글이 「어느 인텔리의 수기」이다. 정확히는 리영희가 ‘조선일보’ 외신부장을 그만두고 ‘합동통신’으로 직장을 옮기기 바로 직전의 시기이다. 이 글은 60세에 가까워진 작가가 자신의 40대의 선택을 반추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었다.¹ 말하자면 60세의 리영희가 돌아본 40대의 리영희의 모습이다. 이 시기 리영희는 자신이 소속된 회사와 사회에서, 아무리 해도 있을 곳을 찾지 못하는 곤경에 빠져 있었다. 베트남 파병에 대한 비판적 입장 때문에, 회사 더 정확히는 국가의 명령에 순종한 회사로부터 사직을 종용받았다. 베트남을 방문하고 파병에 대한 호의적 기사를 쓴다면 지금까지의 문제가 모두 해결될 것이라는 제안도 듣지만 40대의 리영희는 이러한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나는 저널리스트로서, 직업적 양심과 훈련된 격식에 따라 본 대로 있는 대로 쓸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을 못 쓴다는 말입니다.”(『自由人, 자유인』,「어느 인텔리의 수기」, 335쪽)
“‘신문사에 낸 사표는 나의 인텔리 자격의 사표다. 지식을 상품으로 파는 인텔리 직업은 이것으로 끝났다. 이 사회에서 지식인은 경멸의 대상이다. 앞으로는 나의 육체로 살아갈 것이다. 사회와 대중을 지식으로 사기치고, 스스로에게 불성실한 글줄을 써서 먹고 사는 짓은 다시는 하지 말자. 노동으로 살자.’”(위의 글, 336쪽)
리영희는 권력의 반대편에 선 저널리스트이자 진실의 전달자로 자신을 규정하고 억압적 국가권력의 명령에 저항했다. 이때 리영희가 저널리스트-인텔리의 자리를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권력의 명령과 언어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 역시 ‘기회주의적 지식인’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직접적 이유는 육체노동을 통해서도 생활할 수 있다는 나름의 확신과 관련된다.
리영희에 앞서 노동자의 길에 들어섰던 친구 J는 육체노동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노동으로 사는 고생과 고통을 가지고 인텔리로서 충실하게” 살 것을 권유했지만 리영희의 결심은 확고했다. “노동으로 살자!” 그러나 양계장 운영계획도, 택시 운전 결심도 모두 실패한다. 인텔리가 되는 것이 고도의 훈련과정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노동자 역시 고도의 숙련을 요한다. 인텔리이기를 그만두고 (언제든) 노동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인텔리의 허약한 관념일 따름이다. 계속된 좌절 앞에 리영희는 ‘밖으로만 향해 있던 눈을 처음으로 자신의 안으로’ 돌리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처음부터 허약한 인간인 것을 인정하기를 거부해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인텔리가 스스로 인텔리임을 부정하려는 것은 관념적 인식 착오가 아니었던가?”(위의 글, 342쪽)
노동은 인텔리의 손쉬운 선택지가 아니다! 이 자각 앞에서 리영희는 노동자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지식밖에 가진 것이 없는 인텔리가 노동자의 생활을 미화한 것이 바로 인텔리의 환상(342쪽)”이었음을, 그리고 자신의 오만이었음을 받아들였다. 리영희는 연이은 사업 구상의 좌절, 그리고 어머니의 질책, 생활고 속에서 번민하면서 다시 인텔리로서 출발하게 된 것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거부당했던, 그래서 그 역시 그 자리를 거부하고자 했던 인텔리 리영희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주시해야 하는 상황과 만났다. 그 만남 속에서 새로운 언어의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60세의 리영희는 생각했다. 인텔리가 노동자가 되는 것은 혁명가적 신념과 결의를 요하는 것이며 자신에게는 그렇게 노동자가 될 의지력도 신념도 없음을 겸허히 확인하는 시간! 그것은 “자신이 허약한 인간임을 확실히 깨닫게 된” 이후의 “귀중한 소득”(347쪽)이기도 했다.
이런 태도가 리영희 글쓰기의 바탕을 구성했다. 그가 글을 쓸 때, 메시지가 닿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리영희가 미처 될 수 없었던 노동하는 존재들 혹은 비지식인들이었다.² 리영희는 이들의 ‘앞에서’ 이들의 ‘입이 되기’ 위해 말을 했고, 이 언어가 이들에게 전달되기를 갈망했다. 이를 위해 인텔리 리영희는 복잡한 의미를 손쉬운 언어로 전달하기 위해 ‘지난한 노동’의 과정을 거쳤다. ‘어려운 이야기나 까다로운 내용을 독자들이 쉽게(또는 쉽다는 느낌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리영희가 겪었던 어려움은 그가 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그의 분투였던 것이다. 이것은 사회에서 자리를 찾지 못한 언어를 발견하고, 그 언어로 자신을 주체화하려는 시도였다. 이때 비로소 40대 리영희 글쓰기 여정이 시작되었다. 아마도 감옥에서 벗어난 60대의 리영희 역시 이 시작점을 떠올리며 자신의 글쓰기를 채워가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1968년 7월 31일, C일보사 의원 해직이라고 쓰고 비워두었던 난으로 만년필을 옮겼다. 감회가 어린 표정이다. 그리고 확실한 손 움직임으로 칸을 메웠다.
1969년 2월 7일 H통신사 입사, 외신부장.”
2. 리영희와 위기
「어느 인텔리의 수기」에서 보이는 리영희의 다짐과 비교할 때, 2년 뒤에 쓴 「30년 집필생활의 회상」의 분위기는 사뭇 대조적이다. 전자에서 리영희는 권력과의 싸움을 다짐하고 있는데, 후자에서 리영희는 거듭 피로를 호소한다. 물론 그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글을 쓸 수 없는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정황은 유사하다.
“제법 오랫동안 많은 글을 써온 결과 이제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당분간은 좀 쉬게 해달라. 몸과 마음에 좀 휴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최근에는 어쩐지 고갈을 느낀다.” 등등 리영희는 오랜 집필활동의 결과 자신이 고갈되었다고 토로한다. 그 글을 쓰기 직전인 1989년 한겨레 북한 취재 방문 구상을 도왔다는 이유로 구속된 지 6개월 만에 석방되었기에 리영희의 피로감 호소는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앞서 몇 차례의 구속과 감금 속에서도 계속 글쓰기를 해왔다는 점에서, 이번의 호소는 다소 예외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얼마 전까지 글쓰기를 통한 ‘앙가주망’을 다짐하곤 했기에, 고갈과 피로의 정체는 육체적 피로만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체제의 명령에 대한 의문을 ‘의식화’로 규정하는 폭력과 이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이들의 곁에서, 글쓰기의 가능성을 탐구했던 리영희의 피로감! 이 피로감은 그의 집필 조건의 변화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
「30년 집필생활의 회상」에서 리영희는 자신의 “글과 책은 거의 무용지물”이 되어버렸고 “60~70년대에 나의 글들이 지녔던 일정한 의미와 역할은 거의 지양되고 초극”되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출판사에서 그에게 보내오는 인세가 줄어들고 보잘것 없’게 되었다. “70년대의 저서들을 절판”시켜도 무방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리영희는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는 것에 기쁨을 토로했다. 적어도 그의 책이 읽히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대결했던 문제가 해소되었거나 최소한 동일한 양태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리영희 식으로 말하면 ‘한 시대에 애씀이 무위로 끝나지 않게 된 것’에 기뻐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억압하거나 또는 그 억압을 대표하고 거기에 공모하는 타자를 타매함으로써 자유의 영역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수상쩍은 사람’, ‘범죄자’, ‘빨갱이’로 명명된 채 폭력적으로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들과의 연대를 지향했다. ‘의식화’된 이들을 변별해냄으로써 공고해지는 체제, 그리고 이 체제를 유지하려는 말들을 정지시키기 위해 리영희는 글을 쓰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이런 글쓰기와 말하기의 종언을 리영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이 기쁨은 위기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제 리영희는 기존의 언어 혹은 글쓰기를 멈춰야만 했다. 작가로서 리영희는 그의 글이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안도감과 함께 자신의 언어와 사고가 현실에서 어긋나고 있다는 것에 당혹스러워한다. 그가 피로와 함께 고갈을 말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글쓰기와 말하기가 통용되지 않게 된 당혹스러운 해방감 앞에 리영희는 30여년 ‘집필생활’을 돌아보는 전략을 취한다. 그는 “딱딱한 이야기”가 아니라 “물컹한 이야기”를 던졌지만, 이 물컹한 이야기는 그가 딱딱하게 됨으로써 놓쳐왔던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리영희는 글과 말을 하는 자신에게로 돌아가 자신이 말과 글이 멈추게 된 원인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리영희는 글과 말의 정지 혹은 좌절 앞에서 밖으로 향했던 눈을 자기 안으로 돌린 것이다.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실천하는 과정, 밖의 적을 응시하고 저항하는 과정에서 보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과 대면한다.
3. 리영희와 시작
“30여년 전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읽은 「침묵의 공화국」에서 사르트르가 “철저한 억압 밑에서의 선택이야말로 진실한 자유”이고 “잔악한 상황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은 앙가주망의 무게를 갖는다.”라고 말한 그 정신에 충실하려 했을 뿐이다. 앙가주망은 자기구속이다. 극악한 상황 속에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기 자신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의무가 있다는 것, 그러나 동시에 자기 자신밖에 의존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외로운 행위! 그 정신과 철학으로 일관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대로 살아보려는 실천은 어려운 것이었다.”(『自由人, 자유인』, 「30년 집필생활의 회상」, 369쪽)
리영희는 잔악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저들의 세계와 자신을 분리해, 나를 억압하는 타자에게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저항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자유의 영역을 창출하고자 노력했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어디서나 폭력이 가능한 ‘철저한 억압’ 아래에서 리영희는 다른 말과 글을 통해 새로운 사고와 실천의 가능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저항의 과정에서 리영희 자신은 “가정보다도 사회를 앞세운 ‘전체주의적’ 성향”을 보이곤 했던 것 같다. “나는 썩어 문드러지고 흉포무도한 반인간적인 권력의 작태를 보면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역설적이지만 억압과 폭력에 근거하지 않을 미래적 가능성을 리영희는 분노의 힘에 근거해 재구성했다.
그런데 이 분노의 힘에 근거해 저항한 리영희 자신 역시 그 가족에게 일종의 전제군주적 모습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실천적 지식인 리영희의 내적 균열이, 가장 가깝기에 신경 쓰지 않았던, 그러나 동시에 그를 상대적으로 잘 관찰한 가족의 평가 속에서 엿보인다.
“물론 아버님의 의도하는 바가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목적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수단과 방법이 지나치면 그 목적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님은 혼탁한 사회를 살아가신 생활 패턴을 그대로 어린 우리들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거의 강제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아버님의 요구를 따르기에는 너무 벅차기만 했고, 철모르는 어린이들의 눈에는 아버님이 항상 이방인처럼 느껴졌습니다.”(위의 글, 367쪽)
리영희는 아들의 편지를 읽고 아이들에게 자신이 “혈육이 아니라 야차의 모습”으로 비추어졌다고 힘겹게 고백했다. 도처의 억압에 저항했지만, 그 자신 역시 아이들 일상 곳곳에서 강제력을 행사했음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난 리영희는 한없이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편지를 다 읽고 난 뒤의 나는 거의 공포”에 사로잡혔고 “자신의 추악함에 대한 혐오감 비인간적 냉혈에 대한 죄의식”을 느꼈다. “어린 영혼에게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적’으로 다가”갔다는 “무서운 경험” 속에서 리영희는 괴로워했다. 70~80년대 자신의 글이 이같은 대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무서운 자각! 고갈된 리영희에게 떠오른 이 괴로운 부끄러움!
리영희 부끄러움은 어떤 의미에서 이전과 다른 삶을 촉구하고 알리는 신호로 보인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시대의 전환 속에서 리영희는 자신의 언어가 이제 불필요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즉 그를 인정받게 만들었던 언어는 고갈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리영희는 내심 이 언어의 고갈을 기대했다. 앞서 리영희가 자신의 글을 ‘절판시켜도 무방’하다고 말한 것은 ‘야차와 같은 모습’을 다시 만들어내지 않으려는 의지로도 읽힌다. 그리고 밖으로 향했던 시선을 안으로 돌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독(毒)’을 겸허히 수용하기 시작했다.
“30여년을 두고 쓰고, 쓰러지고, 일어나고, 그리고 또 쓰고, 또 얻어맞고, 쓰러지고, 또 일어나고, 또 쓰고, 또다시 얻어맞고 …… 이 과정을 이십수년간 거듭한 것은 진에 못지 않게 치(癡)의 작용이 컸지 않았겠는냐 하는 깨달음이다. 미련했으니까 1회 과정으로 그치질 못했지! …… 탐은 물욕만을 이름이 아니라, 정신적 과욕, 만족을 모르는 성취욕, 혼자서 끝까지 이룩하려는 독선이기도 하다. 나는 탐 또한 내가 빠져 있는 독임을 깨달았다. 자기 능력의 한계를 아는 문제다. …… 그것을 더 압축하면 겸허다. 자신의 능력을 겸손하게 인식한다는 뜻이 된다. 아무리 의로운 일도 어떤 선에선 멈출 줄 모르면 오만이 된다. 오만은 남과 함께 자신도 파괴한다.”
예전의 리영희는 ‘분노’가 말과 글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말과 사유를 억압하는 상황에 분노해 말과 글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제 이런 말과 글의 존재가치가 사라졌다. 이때 리영희는 기존의 나를 대상화하고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라져가는 나의 말이 저항의 언어였지만 동시에 어리석음과 오만의 언어였다고 고백한다. 이를 통해 집필자로서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폭력의 근거를 발견하고 드러내며 이를 상대화하고자 했다. 전보다 덜 탐(貪)·진(瞋)·치(癡), 삼독(三毒)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새로운 말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육십대의 리영희는 이전의 글과 말을 회고하면서 자신이 허약한 인간이자 무지한 인간이었음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따라서 이제 리영희 자신도 가르치는 대신 다시 읽고 배워야 한다. 그가 거듭해서 다른 글을 읽고 배울 것, 그리고 그 언어를 몸에 장착할 것! 「30년 집필생활의 회고」는 기존의 말과 글이 사라져가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말을 배우기 시작한 리영희의 내면 풍경을 보여준다.
“이제 나는 지나온 삶의 한 장을 접고, 새 삶의 장을 열기에 앞서 잠시 자신을 성찰해야 할 건널목에 서 있는 셈이다.”
¹「어느 인텔리의 수기」에서 L부장이 C일보를 그만두고(1968년), H통신사로 이직한 시기(1969년)는 리영희가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합동통신사에 다시 취직한 해보다 1년 앞으로 설정되어 있다. 단순한 기억의 오류인지, 아니면 의도적 창작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² “나는 ‘신’이나 ‘하나님의 정의’ 또는 ‘역사의 심판’이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같은 사람들, 즉 때밀이·지게꾼·노동자·농민·노점상…처럼 땅 위에 짓눌려진 인간들에게서 올 것을 확신하면서 글을 쓴다.”(『自由人, 자유인』, 「30년 집필생활 회상」, 361쪽) “‘누구를 위해서 쓸 것인가?’를 모택동과 노신에게서 배웠다. 유식한 사람, 돈 많은 사람, 지위 높은 사람, 권세 있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들에게 억눌린 사람들의 생각과 눈을 뜨게 하려고 맹세했다.”(위의 글, 3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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