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과 함께하는 사람들 8호 / 김영환
재단과 함께 하는 사람들 8호
김영환 감사 / 동물권단체 케어 대표
김영환 감사님 오랜만이고 반갑습니다. 선생님은 리영희재단이 만들어질 때부터 감사로 함께하고 계십니다. 회계사로서 재단의 회계감사 업무를 십여 년 맡아 해 주고 계시는데 언젠가부터는 동물권 운동을 하신다고 회의에 오셨을 때 말씀하신 기억은 있습니다. 선생님은 뭐든 세게 할거란 짐작은 했지만 며칠 전에는 춘천지법에서 징역형에 집행유예를 받으셨더라고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이번 사건에 대한 설명을 부탁합니다.
우리나라에 동물보호법이라는 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법이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법을 어겨도 지자체가 행정처분을 하지 않고 경찰이 수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태일이 온몸에 휘발유를 붓고 외쳤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말을 “동물보호법을 준수하라”는 말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상황입니다.
작년 춘천의 한 염소도살장에서 매우 심각한 동물보호법 위반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잔인한 방법으로 개 34마리를 죽인 것이지요. 증거를 포착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이 밤을 새워 가며 대기했고, 충청도에서 경기도를 거쳐 강원도까지 고속도로를 달리며 개 트럭을 추적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사건을 경찰에 넘겼는데 경찰의 대응은 심히 부적절했습니다. 만 하루가 될 때까지 증거를 넘겨받지 않았고 증거를 넘겨받은 다음에는 시민들의 차량을 가로막고 개장수와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경찰서로 가서 경찰의 처신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따졌는데 그 언행이 재판부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공무집행방해 등의 죄목으로 1심에서 그런 선고를 받고 항소 중입니다.
동물권 운동을 하는 것은, 다양한 경험을 하고 그 경험을 반추하여 내린 결론입니다. 1982년 대학교에 입학하여 당시 많은 대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학생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대학교를 나간 다음에는 노동운동을 했는데 그 시기는 세계적인 체제 변화가 있는 시기였고 그 변화를 보면서 자본주의와 대안적 체제 및 노동운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노동운동은 몇 년 만에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인회계사가 되어 자본주의의 주체인 기업에 대해 살펴보기도 하고 직접 기업을 설립하거나 기업에 들어가 보기도 하였습니다. 약 15년을 그렇게 보냈지만, 대안적 체제에 대한 답은 찾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인권재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체제에서 인권으로 초점이 달라진 것인데 인권이라는 주제를 살펴봄으로써 그전까지 머릿속에 없던 개별성이라는 관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대학원에서 생태신학을 공부하고 녹색당, 녹색전환연구소, 지구와 사람에 참여하였습니다. 체제와 인간 개별성을 포함하되 그보다 더 포괄적인 공간에서 살피고자 했던 마음이었습니다.
제대로 살핌은 가급적 포괄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행함은 국소적 공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행한다는 것은 분별을 일으키는 일입니다. 이 분별은 해방의 걸림돌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행하는 자에게 주어져 있고 그로서는 불가피한 속성 외의 것을 일으키는 것은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 이를 대입시키면 나는 고통을 느끼고 피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저의 배움과 생각, 경험에 의하면, 다른 것은 이에 비하면 덧없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그리하여 무엇을 행할지를, 공동 공간에 대한 근본기획인 이성 도덕의 형태로 전개한다면 나처럼 고통을 느끼고 피하는 존재자들을 고려하여야 한다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즉 동물성은 도덕의 출발점이 됩니다.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동물권 운동에 참여하는 데까지는 먼 거리가 있지 않았습니다. 동물법강좌가 조금이라도 열리는 강원대 법학과의 박사과정에 들어갔고 동물법비교연구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여러 나라의 동물법을 비교하는 연구를 하였으며 동물권단체 케어에 참여하고 대표가 되었습니다.
하루에 평균 세 통 정도의 구조요청 전화를 받는다는 인터뷰기사를 봤는데 선생님이나 선생님이 대표로 있는 동물권단체 케어 입장에서는 매일 일어나는 일일 수 있겠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천200여 마리가 죽은 채 발견됐던 양평 개 학살 사건 이후 가진 활동가들의 대담에서 선생님은 “동물을 먹고, 실험하고, 심적 만족을 주는 생산물로 인식해선 안 된다. 이런 학대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동물을 경제구조에서 분리시키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고 발언했습니다. 뜻대로 할 수 있다면 스스로 죽는 쪽을 택하지 않겠느냐 싶은 공장식 축산, 실험용 동물의 처지와 실태에 대해 먼저 설명을 부탁합니다.
인천 계양산에는 먹거리로 길러지다가 구조된 동물들로만 구성된 보호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자가 취재를 와서 인터뷰를 마치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그 분이 ‘동물보호법의 소관부처는 여성가족부가 되는 것이 맞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이 분이 겪은 동물은 대부분 반려동\물과 유기동물(반려동물이었다가 버려진)이었고 그 경험이 가족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여성가족부에서 동물보호를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 것이지요. 식용 목적으로 사육되다가 구조된 개와 돼지가 있는 보호소에 와 있다면 이들이 구조되기 전에 살던 농장과 그 농장에서 지금도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 가축을 떠올릴 법도 한데 말입니다. 동물이라고 하면, 동물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가축부터 떠올리는 것이 동물에 대한 공정한 태도일 것입니다.
가축은 대부분 닭입니다. 표준적인 도계방법은, 전기충격으로 닭을 고통 없이 기절시키고 의식이 소실된 상태에서 목을 자르는 것인데, 제가 가 본 도계장은 전기충격으로 고통스럽게 하고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목을 자르고 있었습니다. 전류를 너무 세게 흘려 닭을 죽이면 색이 변하고 방혈이 힘들다는 이유였습니다. 저는 여러 기관에서 동물실험윤리위원을 맡아 동물실험계획서를 살펴보았는데 많은 동물실험이 고문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잔인하였습니다.
공장식 축산시설에서 사육되거나 실험에 이용되는 동물의 처지가 어떠한지를 묘사하기 위해서는 한 권의 책이 필요할 것입니다. 축종별로 삶과 죽음의 각 국면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고, 동물별로 동물실험의 내용에 따라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윤리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책 『Animal Liberation Now』의 두 부분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미국 환경보호청은 공기 중 암모니아에 대한 인간의 최대 노출 수준을 정한다: 15분간에 대해서는 35ppm, 8시간까지는 25ppm. 그런데 조지아 대학교의 과학자들에 따르면 닭은 50-110ppm의 우리에 갇혀서 전 생애를 보낸다. 이로 인해 닭은 만성 호흡기 질환에 걸리고, 습기를 머금은 짚에서 쉬면 암모니의 부식성으로 무릎에 상처가 나거나 가슴에 물집이 생긴다. 최고 수준에 노출되면 눈이 멀 수도 있다.“
”<동물에 대한 윤리적 대우를 위하는 사람들(PETA)>이 발간한 보고서에 의하면, Suomi박사는 30년 넘게 국립보건원(NIH)의 자금으로 수백 마리의 유아 원숭이를 엄마로부터 떼내어 작은 금속 상자에 넣고 불안, 우울, 설사, 탈모를 겪게 하고 스스로를 물거나 자신의 털을 뽑는 것과 같은, 평생 지속될 사회적, 정서적, 신체적 위해인 자해를 초래하였다. PETA가 입수한 영상에 의하면, 유아 원숭이는 서거나 쭈그려 앉을 수도 없는 작은 “놀람의 방”에 넣어진다. 실험자는 큰 소리로 겁을 준다 ... 다른 영상에 의하면 ... 또 다른 영상에 의하면 ...“
유발 하라리는 2015년 <가디언> 칼럼에 공장식 축산은 역사상 최악의 범죄라고 썼고, 선생님은 농장동물과 실험동물 등 고통받는 동물의 수와 그 고통의 정도를 생각할 때 현재의 인간은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삶을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더욱이 이 말은 ‘공장식 축산은 동물을 학대한다’는 이야기를 훨씬 넘어서는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좀 더 설명해 주시죠.
공장식 축산을 본다면 누구라도 ‘이것은 동물 학대다’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동물 학대인데 이것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 문제인가? 그것이 역사상 최악의 범죄라는 주장은 인권과 민주주의의 유린, 평화의 파괴, 기후재앙의 초래와 같은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는 주장입니다. 지금 당장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그 해결에 집중해야 할 문제라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이와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어느 개 도살장의 경우 그 폐쇄를 위해 2021년 4월부터 약 반년 간 무려 23번의 집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폐쇄되지 않았습니다. 2021년 4월부터 작년까지 그 도살장에서 잔인하게 죽어 간 개는 1만 마리가 훨씬 넘을 것입니다. 개 살해는 잔인하고 동시에 위법한 행위입니다. 그러한 행위가 공무원들의 묵인으로 인해 무려 1만 회가 넘게 반복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작년에 시민들의 지자체에 대한 항의가 끊이지 않자 지자체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말합니다. “여전히 이 세상과 인류에겐 수용할 수 없는 고통과 모순이 끝이 없습니다. 개만이 그렇지 않습니다.” 비아냥대는 지자체장의 저 말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1만 회의 개 도살과 그 방임만큼 심각한 고통과 모순이 그 지방에서 끝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자체장 스스로 그 지방이 죽어나간 개에게처럼 지옥 같고 부조리가 만연한 곳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지자체장의 저 말은 개 죽이는 문제는 별거 아니라는 자신의 관점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런 관점은 한국 사회, 아니 인류 사회에서 일반적인 관점입니다.
도대체 도덕문제에서 심각성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도덕은 궁극적으로 고통과 행복을 합당하게 배분하는 문제입니다. 고통이나 행복과 무관한 듯 보이는 의무론적 도덕도 왜 어떤 것이 의무인가를 묻는다면 그 의무를 지키지 않을 때 고통과 행복의 배분이 합당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라고 답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비도덕성의 정도는 부당하게 고통을 겪는 개체의 수와 각 개체가 겪는 고통의 크기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한국에서 매우 고통스럽게 사육되다가 도축되는 닭은 1년에 10억 마리가 넘습니다. 이리하여 공장식 축산은 하나의 비도덕적 현상을 넘어서 가장 비도덕적인 현상이 됩니다. 또 최고 고통등급의 실험에 이용되는 동물은 한국에서 1년에 2백만 마리에 이릅니다. 공장식 축산과 동물실험까지 함께 고려하면, 오늘날 인간이 동물을 대하는 행위는 가장 비도덕적인, 역사상 최악의 범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후재앙이 동물 학대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요? 기후재앙이 되면 동물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가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최악의 사태라는 인식은,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는 낫거나 나아질 희망이 있어서 살아 있는 사람의 자기중심적 단견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 인식이 모든 생명 현상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의 표현이라면 매 끼니 빠지지 않는 육식을 설명하기 힘듭니다. 저는 얼마 전 기후정의행진에 갔다 왔습니다. 또 동물권단체 케어 이름으로 기후정의동맹에 가입하였습니다. 그 직후 케어 SNS에 다음과 같이 조심스러운 글을 올렸습니다. “동물운동은 기후정의운동의 한가운데서 자신이 기후정의와 관계없이 축산업과 동물실험에 반대함을 공표해야 합니다. 기후위기가 사라진 '안전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지금처럼 어마어마한 수의 동물에게 극심한 고통을 가하기를 지속한다면, 기후재앙으로 지구상의 사람과 비인간 동물이 멸종하여 고통이 사라지는 것보다 더 낫다거나 더 정의롭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선생님이 우리 시대의 이성이 조망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영역은 “동물에 대한 처우” 이고, 시대의 문제를 이성의 빛으로 살피고자 했던 리영희 선생님을 오늘에 살리고자 하는 재단의 취지에 따르면 재단에서 기후정의와 소수자 문제를 다뤘듯이, 동물의 처우에 관한 내용을 재단이 마땅히 다뤄야 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을 때 우선 난감했던 것은 나의 문제로 삼아지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이 난감함을 김영환 선생님과 같이 풀어보고 싶었습니다. 설득되고 싶은 거죠. 왜 누구는 사체를 빼돌린 경찰관에게 진심으로 휘발유를 갖고 오고 싶을 정도로 분노하고 누구는 반려견과 산을 산책하면서 유기견을 안 만나기만 바라는지. 역사상 최악의 범죄라는 공장식 축산 앞에 나의 공감은 멈춰 서 있고 동물실험 앞에 무감각한지. 선생님은 눈으로 본 소 대신, 보지 못한 양을 죽이는 행위를 인(仁)의 실천이라고 한 맹자를 언급하면서 공감이 가지는 한계, 자기 폐쇄성에 대해 말합니다.
맹자는 사람에게는 측은지심과 어진 마음이 있어서 사람이든 다른 동물이든 고통받는 것을 보기 힘들어한다고 하였습니다. 신경과학은 여러 종의 동물에게서 거울 뉴런을 발견하였는데 이를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의 생물적 상관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맹자나 신경과학의 이야기를 음미해 보면, 인간이 저절로 가지게 되는 측은지심, 거울뉴런, 어진 마음, 공감, 이타성은 작동하는 반경이 처음에는 작을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공감 등이 ‘직접 본다’라는 것과 밀접히 관련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공감이라는 것은 내부집단과 외부집단을 나누고 내부집단 내에서는 돌보는 기능을 하면서 외부집단에 대해서는 적대하는 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공감조차도 그 기원, 그리고 발전의 상당 부분이 유전자든, 개체든, 집단이든, 무언가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환경에 적응된 결과이기 때문이지요..
공감에 터잡되 공감의 반경을 넓혀 나가는 것이 진보를 위한 사회운동입니다. 공감에 터 잡지 않거나 공감에 매몰되는 것 둘 다 잘못된 노선입니다. 전자의 사례로 신유물론을 들 수 있습니다. 신유물론은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경계를 허물 뿐 아니라 동물과 동물 아닌 것의 경계도 허뭅니다. 이 자체는 긍정적인 것이나 신유물론이 도덕을 위한 발언을 할 때 현실의 변화와 무관한 관념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최악의 경우, 동물의 역능성이 잘 보이는 사례를 내세우면서, 학대받는 동물을 구조하는 활동을 폄훼합니다. 한편, 공감에 매몰된 기회주의는 오늘날 한국 동물운동의 주류를 이루어 동물운동에 매우 심각한 폐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바른 동물운동은, 동물해방이념은 대중들의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될 수 없고 선전되어야 한다고 보며 기회주의의 대중추수적 행태에 반대합니다. 바른 동물운동은 동물운동 전체의 연합에 적극 나서되 그 연합에서 ”자신의 견해와 의도를 감추는 것을 경멸받을 일로 여깁니다.“
우리 각자는 어떤 사유가 내용상 옳은지 여부와 그 사유가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물과 무관하게 삶 일반에서 말이지요. 옳음의 문제는 이성의 문제이고 동기의 문제는 다분히 감정의 문제입니다. 공감은 감정의 일종이고 감정이 옳음, 이성, 보편성 같은 것과 함께 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축산업이나 동물실험은 그 실상이 그 종사자들 외의 사람들에게 차단되어 있는데 이것이 축산업과 동물실험이 유지될 수 있는 하나의 기제입니다. 우리 각자는 이 차단의 효과, 즉 자신이 (아직은) 축산동물이나 실험동물에게 공감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인터뷰 준비하면서 자료를 찾다가 대부분 사람들이 싫어하는, 길바닥에서 음식쓰레기 주워 먹는 비둘기가 돌아갈 야생이 없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88올림픽 86아시안게임 때 쓰려고 대량 수입해 들여와 시청 옥상에서도 키우던 비둘기들은 도시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돌아갈 야생이 없고 그래서 야생으로 돌려보내자고 먹이를 주지 말자고 하는 것은 굶겨 죽이자는 소리인 거고 불임 먹이로 50% 개체 수를 줄일 수 있다는 기사를 보고는 길거리 비둘기들이 싫지 않아졌습니다. 간단한 사실이, 지식이, 공감을 넓힐 수 있는 힘이 있지요. 하지만 말씀하셨듯이 개인의 경험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도 분명히 있습니다. 반면 그 한계를 오히려 긍정적인 힘으로 평가하는 의견도 있는 것 같습니다. 피터 싱어와 리차드 포즈너 편지 논쟁에서 포즈너는 “우리가 동물보다 인간을 우선시하는 것은 그게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고양이라면 고양이를 우선시했을 거다”라고 말할 때가 그렇지요. 선생님의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항소이유서에서 말한 동물운동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선의지’, 개인의 취향이나 자기의 경험 만에 근거한 공감을 넘어서는 그래서 동물해방의 무거움을 지탱해내는 데서 의지하고 있는 ‘선의지’는 무엇입니까.
저는 동물권 운동 바깥의 세계와 동물권 운동의 세계를 연결할 언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동물권은 현실 사회에서 반동물권이기 때문입니다. 헌신적인 노동운동가나 환경운동가가 인권의 관점에서 비난을 받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두 세계는 연결될 수 없는 세계로서 이 세계에 머물든, 저 세계로 건너가든 해야 하는 관계입니다. 연결의 언어를 찾고자 하는 태도는 무용할 뿐 아니라, 이 단절성, 더 정확히 말하면 대립성을 모호하게 하여 동물해방운동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공감의 반경을 넓혀 나가는 것은 도약의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저 세계로 건너가는 경우는 첫째, 못 보던 것을 보는 경우, 둘째 몰랐던 것을 아는 경우입니다. 첫째 경우는 동물이 감각을 가지고 있고 고통을 느낄 수 있음을 아는 사람이 축산시설과 실험실에서 동물이 처해 있는 조건과 동물에게 가해지는 행위를 볼 때입니다. 그 순간 그는 저 세계로 건너가게 됩니다. 다만 모든 것이 찰나 생 찰나 멸하는 것이라 그 순간에 그러할 뿐입니다.
둘째 경우는 동물이 감각을 가지고 있고 고통을 느낄 수 있음을 몰랐던 사람이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경우입니다. 데카르트처럼 뛰어난 철학자도 동물이 감각을 가지고 있고 고통을 느낄 수 있음을 몰랐습니다. 감정이나 정서의 표현이 인간과는 다른 동물에 대해 그가 고통을 느끼고 있다고 단정하기 위해서는 증거가 요구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얼마 전 바닷가재 영상이 논란을 일으켰는데 언론으로부터 바닷가재가 고통을 느낀다고 말하는 근거를 달라는 요구를 받고 관련 과학자들이 제시하는 여섯 가지 근거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다만 둘째 경우의 건너감은 몰랐던 사실을 알았다는 것만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적인 성향이 강해서 자신에게도 엄격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둘째 경우의 건너감은 드문 경우라 동물운동은 첫째 경우에 집중합니다. 사람들이 건너갔던 세계에 머무를 수 있도록 계속 보게 합니다. 즉 영상을 제작하고 올려둡니다. PETA는 계속 동물 학대시설에 잠입하여 동물이 고통받는 실상을 폭로합니다. 케어는 개고기 산업의 실상을 담은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돼지 살처분 영상도 만들었습니다. 온라인 영상 중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Dominion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상을 만들고 보여주고 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세상을 불편하게 하는 일입니다. 상업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는 과정과 판이합니다. 세상을 불편하게 하는 이 일은 나의 생물적, 또는 사회적 본성과 어긋납니다. 그래서 동물운동은 동물운동가에게도 명령으로 다가오는 것이고 동물운동가는 의지로써, 선의지로써 감당하게 됩니다. 이 선의지가, 자연의 법칙에 필적할 만한 자유의 법칙을 구성하고자 했던 칸트 같은 사람에게는 가슴 뛰는 개념이었겠지만 과학혁명과 계몽주의의 시대를 한참 지나 법칙이라는 말 자체에서 감흥을 못 느끼는 현대인의 해방운동에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보입니다. 저의 경우 선의지 자체의 이런 취약함을, 선의지의 토대에 무아(無我)라는 관념과 예수에 대한 사랑을 놓음으로써 보강하고자 합니다. 어떤 동물운동가는 선의지 자체의 이런 취약함을, 선의지의 곁에 환대와 우애, 페미니즘 같은 것을 둠으로써 보강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선생님이 생각하는 또, 그것에 기초해서 활동하고 있는 동물권이란 무엇인지, 동물권이 근거하고 있는 다른 방식의 삶의 태도는 어떻게 인간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지 선생님의 꿈이 듣고 싶습니다.
동물권은 동물과 권리의 합성어지요. 여기서 동물이라고 함은 지각이나 생각과 구분되는 감정 또는 감각을 가진 존재자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권리라고 함은 복지와 대립하는 개념인데 복지라는 개념이 복지의 높음과 낮음을 모두 담고 있는 하나의 차원이라면 권리는 그 차원에서 특정 값 이상을 요구하는 개념입니다. 물론 권리는 단일한 것이 아니고 목록을 구성하는 것이고 이 목록에 권리가 하나씩 추가되는 식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이 추가는 개인의 삶의 태도의 변화라기보다는 정치적 변화입니다.
동물학대가 정상으로 취급되는 사회에서 동물권을 진실로 옹호하는 삶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며칠 전 동료 활동가가 법정에서 “외롭다”는 표현을 하더라고요. 늘 종교 사유를 하는 저로서는 부처님과 예수님의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나서 출가수행자 우빠까에게 자신이 도달한 경지를 열심히 설명하였으나 그는 ”그럴 수도 있겠지요“하고 갔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의 제자 두 사람에게, 설명하는 대신 ”와서 보세요“라며 함께 머물 것을 권한 것은 그 때문일 듯합니다.
케어는 20년이 넘는 기간, 늘 위기의 동물 곁으로 다가갔고, 수많은 동물을 구조하여 치료하고 입양을 보냈습니다. 동물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확산시키고, 법과 정책을 동물 친화적으로 움직여 왔습니다. 그러나 케어는 그 이상입니다. 부처님도 안 계시고 예수님도 안 계시고 가진 것 없고 보잘것없고, 비록 아직은 동물에게까지라는 한계는 있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초월한 활동가가 있습니다. 이 초월에 대한 설명이 힘든 것 같습니다. 케어는 언론에 의하면 나쁜 단체이고, 저만 해도 형사 사건만 네 건 이상 걸려있습니다. ”와서 보세요.“ 케어 회원이 되셔요.
그러나 이런 설명은 가능할 것입니다. 동물해방이 동물권 운동을 통해서 실현될지, 대체육과 같은 기술적 요인에 의해 실현될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동물해방을 하고자 하는 궁극적 목적을 생각해 보면 동물권 운동이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동물해방은 그보다 더 넓은 해방의 일부입니다. 어떤 기술은 해방에 기여할 수도 있고 오히려 해방에 맞서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동물해방을 위해 기술을 이용할 수 있는 한 이용해야 하겠지만, 보편적 해방을 위해 사회운동이 필요하고 동물권 운동이 필요합니다. 동물을 매개로, 보편적 해방의 꿈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동물권 운동입니다.
[동물권단체 케어 인사말]
동물의 시선으로 행동합니다.
고통받는 동물에게 달려갑니다.
학대받는 동물에게 달려갑니다.
학대하는 사람에 맞서 싸웁니다. 고발하고, 학대의 현실을 폭로합니다. 그 현실을 낳는 법과 사회구조, 그리고 그 개혁을 말합니다.
동물들이 뛰어노는 세상을 꿈꿉니다.
그 꿈이 행동하게 합니다.
그 꿈이 고단한 싸움의 현장에서 우리를 배양합니다.
케어는 2002년 동물사랑실천협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20년 가까운 시간, 깊은 산골, 대한민국 최남단, 화재로 인한 재난현장, 폭격으로 인한 전시 상황 등 참혹한 고통을 당하는 동물들 곁을 지켰습니다. 동물보호법상 학대의 정의를 확장하고 벌금의 상향조정과 징역형 신설, 동물보호감시제도, 지자체 동물보호소의 시설 기준 마련 및 직영화, 강아지 공장의 허가제 요구 등을 하였습니다.
케어 회원들이 이루어낸 빛나는 성취입니다.
그러나 놀이하는 동물들의 세상은 아직 저 멀리 있습니다.
지금, 케어의 회원이 되어 함께 꿈꾸고 함께 행동합시다.
2021년 7월 3일
케어 대표 김영환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추천 | 조회 |
79 |
『전환시대의 논리』 발간 50주년 기념 토론회 2부 전환의 시대 미디어와 저널리즘 추가 질문과 답변 / 권태호, 김희원, 정준희
관리자
|
2024.11.01
|
추천 1
|
조회 128
|
관리자 | 2024.11.01 | 1 | 128 |
78 |
『전환시대의 논리』 발간 50주년 기념 토론회 인사말 / 백낙청
관리자
|
2024.10.31
|
추천 1
|
조회 76
|
관리자 | 2024.10.31 | 1 | 76 |
77 |
<전환시대의 논리> 발간 50주년 기념토론회 참관기 - 비상했던 시기, 비상했던 한 인물의 비상했던 노력을 기억하며 / 윤춘호
관리자
|
2024.10.31
|
추천 5
|
조회 495
|
관리자 | 2024.10.31 | 5 | 495 |
76 |
‘전환의 시대 미디어와 저널리즘’ 참관기 - 희망의 조각을 찾아서 / 박채린
관리자
|
2024.10.31
|
추천 3
|
조회 101
|
관리자 | 2024.10.31 | 3 | 101 |
75 |
재단과 함께하는 사람들 8호 / 김영환
관리자
|
2024.10.02
|
추천 11
|
조회 1711
|
관리자 | 2024.10.02 | 11 | 1711 |
74 |
“리영희를 위해 리영희에 반(反)해 ‘공학도적 엄밀성을 갖춘 전투적 자유주의자 리영희’를 소환한다” / 백승욱
관리자
|
2024.10.02
|
추천 2
|
조회 993
|
관리자 | 2024.10.02 | 2 | 993 |
73 |
리영희재단 이사를 시작하며 / 진영종
관리자
|
2024.09.02
|
추천 1
|
조회 658
|
관리자 | 2024.09.02 | 1 | 658 |
72 |
27세 나이 차이를 건너뛴 카센터 사장과의 우정 - 공학도, 노년에 경비행기를 타다 / 신완섭
관리자
|
2024.09.02
|
추천 5
|
조회 633
|
관리자 | 2024.09.02 | 5 | 633 |
71 |
리영희, 한겨울 매화의 봄마음-리영희와 장일순에 관하여 / 한상봉
관리자
|
2024.08.02
|
추천 8
|
조회 891
|
관리자 | 2024.08.02 | 8 | 891 |
70 |
리영희재단 특별상영회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 ‘호응’하는 주체, 감옥 안팎의 공투(共鬪) / 심아정
관리자
|
2024.08.02
|
추천 3
|
조회 875
|
관리자 | 2024.08.02 | 3 | 875 |
69 |
우리는 리영희 선생이 다시 그리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 김세균
관리자
|
2024.07.02
|
추천 5
|
조회 1097
|
관리자 | 2024.07.02 | 5 | 1097 |
68 |
나의 창작활동에 빛이 되신 리영희 선생님! / 박순철
관리자
|
2024.06.02
|
추천 2
|
조회 1523
|
관리자 | 2024.06.02 | 2 | 1523 |
67 |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 이상원
관리자
|
2024.06.02
|
추천 1
|
조회 1118
|
관리자 | 2024.06.02 | 1 | 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