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그 후(1984)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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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1-01-06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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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6
1-4. 베트남, 그 후* (1984년, 80년대)

하노이, 빈곤과 정치선전의 거리

희미한 가로등이 새벽 햇살에 밀려나면 하노이는 숨막힐 듯한 열기 속에서 아침 잠을 깬다. 100만 대도 넘어 보이는 자전거가 길을 따라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가끔 가다 몇 대씩 관용 승용차도 나타나고 얼마 안 되는 오토바이도 눈에 띈다. 고색 창연한 버스, 그보다도 더 낡아 보이는 전차가 공손하고 예절 바르며 절도 있는 시민들을 콩나물처럼 빼곡히 태우고 먼지 많고 초라한 시내를 덜컥거리면서 달려간다. 상점ㆍ사무실ㆍ시장이 문을 열기 시작한다. 이 시간부터 하노이에는 또 하루의 생활이 시작된다. 그러나 외국인이 이 콩나물 전차의 풍경 사진을 찍거나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누추하고, 조금도 나아진 흔적이 안 보이는 빈곤 - 이것을 정부는 ‘서로 나누는 가난’이라고 정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 은 어디서나 역연하다. 시(市)는 어떤 기준에서 말하든 지저분하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그런대로 번들거린다. 그 중앙부는 가히 하나의 건축물 박물관이라고나 할까. 수많은 호수와 공원으로 이름났던 1930년대의 프랑스 식민지의 성도(省都),다 낡은 황토색의 2층 별장식 빌라,일본군의점령과 30년 전쟁의 온갖 소모와 파괴를 용케도 견디어낸 녹색의 셔터(겉문)와 가로수로 장식된 시가…….

이 도시의 120만 시민의 대부분에게는 나날의 생활이 스파르타식이다. 남자나 여자를 가릴 것 없이 옷차림은 지극히 검소하다. 임금은 싸고, 상점에도 살 만한 것은 별로 없으며, 상점에 물건이 있어도 살 돈도 없다. 베트남인들은 굉장히 많은 물건을 가지고 생활하지도 않고 오락이나 위안이라는 것도 별로 없다.

그런 탓인지 베트남의 국영방송, 텔레비전, 신문에서는 정부의 선전들만이 억척스럽게 떠들어댄다. 그토록 오랜 세월의 궁핍과 투쟁을 겪고도 왜 여태껏 물자가 이렇게 부족한가, 어째서 시내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의 종류와 물량이 이렇게 부족한가 등등을 끊임없이 해명할 필요가 있다. 시민의 평균 월수입(임금)은 100동(dong)가량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공식 환율로는 미화(美貨) 10달러이고 암시장에서는 1달러에 해당한다. 그런 것이 있지도 않지만, 만약 있다면 던힐(Dunhill) 담배 한 갑이 10동은 할 것이다.

고아원, 식당, 집단농장, 군(軍)신문사, 전쟁박물관 등 어디를 방문하든, 또 정치가를 만나건 관리를 만나건, 선전 - 은밀하건 노골적이건 - 은 방문의 구성요소가 된다(일반적으로는 영어를 말하는 안내원의 빈틈없는 안내를 받게 마련이지만). 그 내용은 언제나 대충 비슷하다. 중국은 천 년 동안 언제나 그러했듯이 지금도 인도차이나를, 특히 베트남을 지배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진짜 적(敵)이다. 소련만이 친구, 그것도 진정한 사회주의적 친구다. 미국의 간섭을 받고 있는 아세안(ASEAN, 동남아 5개국 연합기구)이, 베트남 관리들이 키우 삼판ㆍ노로돔 시아누크ㆍ손산의 흉악한 결합체라고 말하는 단체(캄보디아의 반베트남 세력)를 뒷받침하는 중국의 장난에 놀아나고 있는 한, 캄보디아문제를 놓고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이런 이야기들이다).

베트남으로서는 캄보디아가 짐이 될 뿐이며, 따라서 그곳에 주저앉을 생각은 없다고 베트남인들은 주장한다. 중국이 대량학살자 폴 포트에 대한 지원을 중지하고 철수하면, 베트남은 하루 이르지도 않고 하루 늦지도 않은 바로 그날로 철수할 것이다. 베트남의 궁핍, 재정적 부담, 남부(베트남)의 재건사업의 어려움, 아직도 복구되지 못한 전쟁의 피해…… 등 현실을 생각하면, 그렇게 주장하는 그들의 말을 어떻게 달리 해석할 수 있을까? 외상(外相) 구엔 코 타크가 얼마 전 “간신히 지탱할 수 있는”이라고 표현한 바 있는 힘겨운 경제와, 각종 사회적 시설의 혹심한 전쟁 피해의 생생한 물증들은 누구에게나 역력하다.

전쟁의 상흔이 남겨진 다리들

우리 일행은 새벽 5시, 중국 국경선을 향해 출발했는데 하노이의 롱빈 교(橋)를 건너기 위해서 한 시간을 지체했다. 이 다리는, 이름 그대로 ‘붉은 강(홍하)’의 넓디넓은 폭을 가로지른 다리다. 1896년 프랑스인들에 의해서 건설된 이 다리는 현재 이 도시의 소요(所要)를 도저히 충족할 수 없다. 트럭 한 대가 그 위에서 고장나 서버리면 이 다리는 거의 영원토록 제구실을 못 할 것 같은 상태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하이퐁 항(港)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들어오기는 했지만, 주로 이 다리를 통해서 북베트남인들이 미국 군대와 남베트남과 싸우고 승리한 그 처참한 전쟁을 이끌고 나가게 해준 식량ㆍ기계류ㆍ무기류 등이 중국으로부터 북베트남에 들어왔던 것이다.

공습으로 무너진 다리의 잔해가 저 아래 홍하의 모래 속에 여기저기 묻혀서 부분적으로 드러나 보인다. 전쟁의 발톱자국은 어디를 가나 그대로 남아 있다. 중국 국경까지 좁은 도로의 주변은 아직도 폭탄 웅덩이로 곰보처럼 패어 있고, 완전히 파괴됐거나 크게 무너졌던 다리가 적어도 16개가 된다. 지금도 그중 몇 개는 완전 복구되지 못한채,아직도 응급용 가교로 이용되고 있다.그 모두가 미국의 폭격이나 1979년 잠시 동안 있었던 중국 침공군의 포격흔적들이다.

시골과 촌읍

시골 풍경은 황홀하다. 층층을 이루어 높이 쌓여 있는 듯한 건답(乾畓)과 수답(水畓), 고구마와 그밖의 야채류의 밭들, 톱날처럼 깎아세운 석회질 절벽을 가진 산을 배경으로 흐르는 강물과 골짜기, 이 절벽과 강, 그리고 골짜기들은 중국과 베트남 사이의 자연적 요새 구실을 하고 있다.

우리 일행에는 베트남군의 중령 한 사람이 동행했다. 그는 22년간 군복무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생 동안을 오직 전쟁으로, 처음에는 프랑스인, 다음에는 미국인, 그리고 최근에는 중국인과의 전쟁으로 지냈다고 말한다.

“중국인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겐 상대도 되지 않아요.”

이렇게 말한 중령은, “중국인은 본래가 상대가 되지 못했어요.

일본인도 마찬가지였고……”라고 결론짓는다.

그는 베트남군의 (여름용) 정규 군모인 별표 달린 수피(樹皮) 헬멧을 벗더니 나더러 쓰라고 전한다. 내가 지난달 베트남 경찰에 지급된 볼품없는 소련식 새 정복과 모자에 관해서 한마디 하니까 중령은한숨을쉬었다. “ 우리도그것을지급받고있지요.”나는 그가 그것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눈치를 챘다.

상당히 큰 읍에 들어섰다. 나는 아이스박스 속에서 얼음에 재웠던 아사히 비루(일본 아사히 맥주)와 코카콜라를 꺼내 중령ㆍ운전사ㆍ안내원에게 하나씩 내밀었다.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싸고 모여들었다. 아이들이 나를 손가락질하면서 수군거렸다.

“리엔 소(소련=러시아)!”

“오스트레일리아”라고 내가 대답했지만 그들은 그런 나라 이름을 들어본 일이 없음이 분명했다.

그들은 깡통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한 아이에게 코카콜라를 주었다. 맛을 보더니 언짢은 표정이었다. 아이들이 갖고 싶어하는 것은 반짝거리는 빈 깡통이었다. 장난감이 없는 나라에서 무엇인가 새롭고 반짝거리는 물건을 갖고 싶은 것이다!

중국은, 동 당(Dong Dang)에서 끝나는 도로의 저쪽에, 깜짝 놀랄 만큼 느닷없이 나타났다. 이곳은 한때는 주민 5천을 헤아리는 제법 큰 국경도시였지만 1979년의 1개월 전쟁에서 거의 폐허가 되어버렸다. 나는 잿더미로 남아 있는 이곳을 굽어보고 있는 1,000피트 높이의 산을 올려다보았다. 그 꼭대기에서 중국 측 레이더 반사판이 재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의 초점을 그것에 맞추었다.순간적으로 중령의손바닥이렌즈를 가로막았다.

“촬영 금지!”

하노이의 전쟁박물관

우리는 길을 걸어 내려왔다. 동 당에서 비교적 부서지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건조물은 탑의 일부였다. 그밖에는 모두가 껍질뿐이었다. 그중의 한 담벼락에 중국인의 짓인지 베트남인의 짓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음탕한 그림 하나가 아주 뚜렷하게 스케치되어 남아 있었다. 나는 보라는 듯이 그것을 손가락질했지만 누구도 대꾸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북쪽은 상당히 청교도적이다. 나는 동당에 누가 살고 있느냐고 물었다. 중령이 정말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대부분이 중국계들이라고 답변했다.

“베트남을 정복하기 위해서라면, 중국인은 그 누구도 가릴 것 없이 죽여버리지요. 심지어 자기 동족까지도 말이에요. 그놈들은 다시 쳐들어올 겁니다. 두고 보시오. 그러나 반드시 실패하고 말거예요.”

멀리 보이는 논에서 베트남의 한 소수민족인 눙족의 여인들이 푸른 목댕기를 한 모습으로, 찌는 더위 속에서 개미같이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었다.

이튿날, 하노이에 돌아온 나는 전쟁박물관을 관람했다. 광장에는 미국ㆍ남베트남ㆍ중국의 군대에서 노획한 탱크, 각종 포, 헬리콥터, 각종 소형 무기들이 진열돼 있었다. 베트남어ㆍ영어ㆍ러시아어로 쓰인 한 플래카드는 베트남인 300만이 목숨을 잃고, 미국인은 90만이 죽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른 플래카드는 격추된 미국 비행기의 숫자에서 허황한 주장을 하고 있었다.

나의 안내원은 팔에 상처 자국이 있었는데, 그의 말로는 대공포부대의 장교였을 때 B-52 폭격기의 폭탄 파편에 다친 자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네 차례나 부상당했다고 말했다. 나는 유명한 디엔 비엔푸 디오라마(투시화관)를 찾았다. 그것은 큰 규모의 수영장만한 크기였다. 불을 끈 실내에서는 영어로 녹음된 설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디엔 비엔푸의 언덕, 계곡, 평야 등이 작은 등(燈)의 선광(線光)으로 비쳐졌다. 베트남군의 야포공격이다. 베트남군의 참호는 주변의 짙은 녹색의 넓은 논 속에 가느다란 금실로 표시되어 있다. 성냥갑만한 크기의 탱크들이 프랑스군 비행장을 향해 전진해간다. 프랑스군 부대의 지휘소 하나가 유린되고, 뒤따라 다른 지휘소가 괴멸된다. 백기(白旗)가 나타난다. “프랑스군 장군 하나가 자결했다”고 녹음된 목소리가 말한다. 프랑스군은 지리멸렬하여 도주한다. 이때 갑자기 조금 전까지 3색기(프랑스 국기)가 게양돼 있던 곳에 베트남기가 펄럭인다. 금세기의 한 역사를 바꾼 치열한 전투의 하나가 끝난 것이다.

하노이의 실상 - 사회주의의 허상

한 친구가 하노이에 지금도 남아 있는 4개의 프랑스 요리 식당 가운데 하나에 나를 안내해주었다. 그는 절대로 그 자신은 운전할 수 없게 되어 있는 승용차를 갖고 있다. 그는 차창을 열어놓은 채 한길에 놓고 가기로 했다. 그러면서 그는 “누구도 손대지 않으니까. 남쪽에서는 그렇지 않지”라고 말한다. 음식은 좋고, 주변은 지저분하고, 식당 주인은 철학적이다. 식당은 그의 사기업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무거운 세금을 낸다.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유제(遺制)이니 별도리 있느냐고 그는 체념하고 있다. 그 프랑스인 식당주인은 이제 낯설어진 프랑스로 돌아가기보다는 여기서 이 사업으로 사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승용차로 돌아가니 차주인이 그 날 시장 본 물건들이 뒷자리에 놓인 그대로 정확히 남아 있었다.

하노이에서 본 공중적 정직성의 수준은 내가 경험한 아시아의 어떤 도시의 그것과도 완전히 다르다. 그렇다면 내 마음에 들지않는 것은 무엇인가? 두 가지다. 첫째는, 부패가 실제로는 이미 지방병이 되어 있는데도 그것을 ‘남부(베트남) 전염병’이라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외국산 담배에 대한 광장한 웃돈 거래를 보기만해도 이것을 알 수 있다. 담배는 베트남의 화폐 대용이다. 둘째는, 서구인들에게 억압으로 느껴지는 은근한 감시의 태도다. 사람들은 감시받고 있다. 한 서구인은 나에게 하인들 앞에서는 말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심부름꾼들은 정기적으로 우리의 거동에 관해서 치안경찰에 보고하게 되어 있어요. 그들은 자기의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자기들끼리 서로를 보고하기도 하지요.이것은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어요. 한 하인이 빈 아이스크림 깡통을 달란다고 합시다. 그것을 가져다 자기 집에서 무슨 용도엔가 쓰겠지요. 그런데 다른 하인은 같은 물건이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 하인이 반사회주의적 행동을 했다고 보고를 하는 것입니다.”

베트남의 경제문제

나는 어떤 농업전문가 회의를 참관했다. 그들은 농지 분배, 비료, 살충제, 협동농장과 자유농업 등등의 문제에 관한 많은 문제점을 나에게 설명했다. 누구도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인구문제에 관해서 예를 들자면, 정부 간행 공식문서에 의하면 인구 증가율이 연 2.6퍼센트로, 그것이 당장 내일부터 떨어진다 하더라도 떨어질 까닭이 없지만 금세기 말까지 현재 인구 5,300만에서 9,000만, 어쩌면 그 이상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이것은 베트남 인구가 거의 배가한다는 뜻이며, 불가피하게 식량생산이 배가돼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공업자원 개발은 어떻게 할 것이며, 사회 간접시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베트남은 앞으로 거액의 원조가 필요할 것이다.

베트남 비극 후의 사이공 모습

소련제 제트여객기로 보는 남쪽의 풍경은 전혀 다르다. 탄손누트 공항에 내리는 순간 모든 것은 눈에 익은 나라의 모습이다. 오래전에 읽었지만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책의 경우처럼, 여러 해 전의 기억과 같지만은 않다. 사이공 - 누구도 여기를 호치민 시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 에는 지금도 제법 화려한 장식으로 영업 중인 옛날 그대로의 자본주의적 호텔이 적어도 두 개가 있다. 그중 하나에서는 별로 식사를 하지 않지만 그곳의 생활양식은 이상하리 만큼 사람을 흥분시키고 이기주의적 분위기를 풍겨서, 북쪽의 내핍, 검소, 극기(克己)의 생활을 경험하고 온 사람에게는 얼굴에 한 방 얻어맞은 것과 같은 당혹감과 놀라움을 준다.

하노이의 여성들은 작업복 같은 바지와 셔츠를 입고 있다. 사이공에는 지금도 그 화사하고 풍부한 색채의 아오다이 - 날씬하게 길며 옆이 트인 스커트 속의 검은 바지 - 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하노이를 보고 온 눈에는 사이공의 교통은 거의 살인적이다. 상점과 시장은 웬만한 상품을 다 갖추고 있다. 마침 인도차이나 3국 외상회의가 개최 중이어서, 방콕에 사무소를 둔 서방세계의 기자들 30여 명이 몰려와 있었다. 이렇게 수많은 서방 특파원을 맞이하고 보니 당국의 감시의 눈도 허술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안내원이자 고문과 스승을 겸한 격인 베트남인은 남부에 왔다고 해서 암시장에서의 외환 암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의 경제를 사보타주하기는 간단합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주시오”라고 안내원은 사회주의자적 냉소를 띠며 말했다. “예, 그러지요”하고는 싶지만, 암시장 시세가 워낙 구미가 당기는데야 어쩔 것인가!

하이네켄 맥주 한 깡통 값이 미화 1달러, 호텔 요금도 달러로 요구된다. 굉장히 비싼 자동차 요금 역시 ‘그린백’으로 지불해야 한다. 그밖에는 동이 사용된다. 외환 암시장 시세는 75~100동이 1달러다. 투 도 가(街)에서 트라 바이 둥 가 사이의 어디에나 자리잡고 있는 암달러 시장에서 암시장 시세로 동을 받으면 외국인들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보통 안전하고 최저 레이트인 75동으로 바꾸어서는 유럽인 친구를 데리고 호화스러운 프랑스식 식당에가곤 했다. 거기서 음악을 감상하면서, 단맛으로 껍질이 씌워진 공기보다도 가벼운 수플레(달걀 흰자를 섞어 부석부석하게 부풀도록 구은 요리)를 깊숙이 푹 떠 먹고는, 기가 막히게 맛 좋은 알자스산 백포도주로 씻어 내려 보내는 것이 낙이었다.

사이공은 베트남이 통일된 지 7년이나 지난 지금도 뒤죽박죽이다. 어떤 문제들은 완화되었고 어떤 문제들은 더 나빠진 상태다. 내가 남베트남의 수도에 있었던 8년 전에는 시의 안팎에 거의가 전쟁 피난민인 집 없는 인구가 적어도 100만이 넘었다. 초인적인 노력과 조치로 그것은 지금 10만가량으로 줄어든 듯하며, 그 당시 450만의 시 인구는 350만 정도로 줄어 있다. 이것은 상당한 수의 사이공 주민이 교회나 농촌에 건설된 ‘신경제지구’로 이사했음을뜻한다. 그런데도 아직 그 당시의 추잡한 풍경은 여전하여, 거지들과 실업자들이 해가 저물면 골목길이나 뒷길뿐만 아니라, 대로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왕년의 자본주의적 건물들의 지붕 있는 석조 기둥(주랑) 아래 자리를 펴고 누워 있다.

길거리에 나가면 매일같이 미국인 아이들에게 포위된다. 남베트남에는 지금 미국인 아버지와 남베트남 여인 사이에 생긴 혼혈아가 8,000명가량 있는데 대부분은 백인 아버지의 핏줄을 타고난 아이들이다. 백인 아버지건 흑인 아버지건 관계없이 이들이 오늘날의 베트남에서 가장 푸대접받는 인종이다. 주위 사람들보다 덜 짙은 색깔의 부드러운 머리칼에, 가끔 푸른 눈동자의 이 아이들은 비극적 운명을 타고났다. 이 미국인 혼혈아들은 어머니가 서명을 하긴 했지만 직업적 대서사(代書司)가 작성한, 하소연하는 문장이 적힌 종잇조각을 가지고 다닌다.

그 글의 사연은 가지각색이다. 어떤 것을 보면, “이 아이는 제가 1973년, 미국인과 동거하다가 낳은 아이인데 이름은 구엔이라 합니다. 구엔은 미국인 피가 섞인 얼굴 때문에 학교 가기를 부끄러워합니다”라는 것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아메레시안’(Amerasian) 아이가 나의 손에 쑤셔 넣어주는 것을 보면, “그는 미국인이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올 때마다 환영을 했더니 그 후 딱한 일이 생겼습니다”라고 시작되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누구도 이 아이들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의 나라도 원하지 않고, 어머니의 나라는 더욱이나 원하지 않는다. 취재차 잠시 왔던 유럽인 특파원들이 그들의 본거지인 방콕으로 돌아가버린 뒤에는 이 ‘미국-아시아’혼혈아 거지들의 수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내가 시내에 나타나면 어딘가에서 두셋이 다가오지만, 그 많던 거지 아이들은 백인들이 가버린 것을 알고 대부분 어디론가 뿔뿔이 사라져버렸다.

사회주의적 질병의 도시

그렇지만 이 미국인계 거지 아이들은 여러 가지 사회주의적 질병이 깃들어 있는 도시의 상징적 존재다. 그 한 예로 10만 명의 전쟁고아가 있고, 먹고 살아갈 기술과 기능, 산업시설(남부 베트남에서는 농업이 발달되어 있는데도), 식료품 공급,전력, 의사와 진료시설, 치과의사, 부속품과 예비부품 등 모든 것이 태부족한 상태다. 남부 베트남은 어떻게 관리하고 다루는 것이 적절한가의 각종 문제를 놓고 비교적 최근까지만 해도 이율배반적인 일이 많았다.

70대의 정치국 강경파 지도자들은 남부의 강제적 통합을 지금도 주장하고 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총으로 다스려야 하고, 그것은 남부 베트남인들의 자업자득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북부가 남부의 절반을 투옥하거나 몰살해버릴 각오가 되어 있으면 모르되,남부 전체도 그렇거니와 특히 사이공이 실제로 그에 응하지 않을 것이고 보면, 그런 정책은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타크와 국가기획원의 신임 원장인 실용주의자 보반 키에트 같은 지도자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며 새로운 방법을 적용하고 있다. 하노이의 계획 수립가들은, 남ㆍ북부 베트남의 서로 다른 국가ㆍ협동조합ㆍ협동농장ㆍ반사유(半社有) - 반사유(半私有)ㆍ개인 소유 등 각종 형태의 제도를 여러 가지로 결합ㆍ혼합시키는 방법으로 남베트남을 한 세대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을 두고 서서히 공산주의로 바꾸어가는 통합방식을 검토하고 있다.

나는 제법 현대적인 4색 인쇄소를 포함하여 여러 개의 ‘국가 - 개인’공영식(共營式) 기업체를 방문ㆍ시찰했다. 이 인쇄소는 정부가 임명한 다소 교조주의적인 남부 베트남 임시 혁명정부의 전(前) 간부 2명이 관리인이 되고, 그들의 지원을 받는 전(前) 공동소유자의 한 사람인 전무가 운영하는 형식이었다. 이 인쇄소는 아주 능률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국가관리 방침에 따라서였다. 경영의 사(私)기업적 측면에서 제시되는 생산 유인이라고는 다른 국가공무원의 대부분에게 제공되는 것보다 다소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는 매일의 무료 점심식사와 여분의 쌀 배급 정도였다. 이전 공동소유자는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북베트남은 남에 대해서 부르주아적 생활수준까지 재정지원을 하고 있다. 그것은 한때 남부 베트남인들이 몸에 익혔던 정도는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북부에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수준이다.

돈만 있으면 화이트 호스 위스키 한 병을 7달러에 살 수 있고, 원색 필름을 암시장에서 300동 또는 4달러에 마음대로 구할 수 있다. 이런 사치품 매매는 외국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남ㆍ북 베트남의 이질성

사이공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은 유능하고, 상당히 실용적ㆍ현실주의적 공산주의 이론가들이다. 다만 그들은 내가 사이공 시내에서 테니스 라켓을 걸치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을 본 한 소녀의 눈치를 볼 때 위스키나 원색 필름 같은 것을 부르주아적 퇴폐의 상징으로 멸시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그런 것도 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는 할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으로 달라진단 말인가? ‘우정 어린 값’으로 도입했다는 초만원을 이룬 사이공발 하노이행 구식 소련제 여객기의 승객은 비행기 안에 꽉 찬 남쪽의 잡화로 발을 옮겨놓기 힘들 정도다. 그것들은 대부분 장난감ㆍ선풍기ㆍ비스킷ㆍ초콜릿ㆍ혼다(일본제 오토바이) 부속품ㆍ옷감에다 심지어 코냑 병도 있다.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은, 한쪽은 공산주의, 한쪽은 비공산주의로서 통일된 유일한 국가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만약 두 개의 독일이 통일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현재의 베트남은 유일한 그런 융합이라 할 것이다.

한 세대쯤 후에 변해 있을 베트남은 하노이에 있는 노령의 당지도자들이 꿈에 그리는 형태의 공산주의 국가이거나, 반대로 아직도 사이공에서 몇몇 사람들이 못 잊어 그리워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자유경제로의 복귀가 아니라, 그 두 체제의 튀기 같은 것이 될 전망이 가장 크다. 경제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적 순응성을 짙게 띠도록 하기 위해서 온갖 정치적 압력이 작용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결과가 되리라는 것이 제일 큰 가능성으로 보인다. 정치체제는, 어떤 변화된 공산주의라 하더라도 필경 공산주의적이다.

외국인으로서 우선적으로 받게 되는 인상은 주로 꾸준한 설득에 대한 것이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카오다이교

나는 (베트남전쟁기간의) 옛 추억에 끌려 다시 카오다이교(Cao Dai 敎) 사원을 구경할 셈으로 사이공 북서방의 타이닌으로 가기 위해 캄보디아 국경을 향해 차를 몰았다. 그때 보았던 흉악한 용(龍)들이 지금도 그대로 거대한 기둥을 휘감고 기어오르고 있었다. 상당히 큰 가스 미터기만한 크기로 부릅뜬 눈알이 여전히 높은 제단 위에서 속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나 다름없이 흰 법복을 입은 무식한 중이 의식을 집전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톱도 그때나 다름없이 더러웠다. 부처님을 가리고 있는 금색의 높은 차양(해가리개) 주위를 맴돌기도 하고 날아갔다 왔다 하는 참새들도 그때의 그 참새들이었다.

빅토르 위고가 두루마리 위에 “Dieu et humanité, amour et justice”(신과 인간, 사랑과 정의)라고 펜으로 적고 있는 것을 손문(孫文)이 옆에서 부축하고 있는 모습의 벽화도 훼손된 흔적 없이 그대로 있었다. 1930년에 한 괴이한 프랑스 식민지 공무원에 의해 서 창시된 카오다이교는 절충주의적 종교이고 교리는 일관성이 없다. 그 후 이 종교는 반(反)프랑스, 반고딘 디엠(정권), 반구엔 반 티우(정권)로 일관했다. 그러나 틀림없이 반공산주의다.

70만 타이닌 주민의 거의 60퍼센트가 카오다이교도다. 성인민위원회(省人民委員會)가 그들을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모든 정황을 살펴본 결과 말할 수 있는 것은, 위원회가 손을 댄 것은 다만 이 종파의 병원, 후생사업,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특히 그들의 학교를 폐지한 것이다.

그들은 이 같은 조치로, 크리스천계 학교를 폐지하면서 희망했던 것과 같이, 카오다이교가 말썽 없이 사그라져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반공산주의적 반체제파에 대한 탄압

그러나 그밖의 다른 반공산주의적 반체제파, 그중에서도 ‘앙시앵 레짐’의 상부층에 대해서 취하는 그들의 태도는 그렇게 유순한 것이 아니다. 구정권 지도자들의 얼마쯤은, 영화를 누리던 때보다는 훨씬 못한 형편이지만 지금도 사이공에서 그대로 살고 있다. 그들은 직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공개적 화젯거리가 되는 것을 기피하고 있다. 그들은 관심의 각광을 받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들과 접촉하기는 용이하지 않다.

그들에 관한 조처는 종잡을 수 없지만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구(舊)체제에 대한 강력한 탄핵이라 할 수 있다.종전이후, 반체제자 중 약 10만 명 - 그중 약 2만 5,000명은 개전의 정이 없는 극렬분자 - 은 재교육수용소에 수용되어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가장 심한 압력을 받고 있는 반체제라고 불리는 집단의 숫자는 분명치 않지만 전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요원들, 왕년의 공산주의자로서 지금 환멸을 느낀 사람들, 해방투쟁 기간 중의 공산주의 동조자들이다. 그들의 반감은, 돈을 받고 캄보디아 침공군의 복무에서 친구들 또는 친척들을 빼내기도 하고, 이럭저럭해서 쌀 배급, 더 나은 직장, 가끔 있는 해외여행을 울궈내기도 하고, 자기 자식들을 더 좋은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분망하는 당간부들에 집중되어 있다.

그들의 말인즉, 자기들은 공안경찰, 억압적인 당간부들에 의해 끊임없이 감시를 당하는 공포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은 투쟁 기간에 동지들을 믿었던 것만큼 옛 동지들조차 믿지 못하며, 자신의 자식이나 친구의 자식들은 더군다나 믿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런 것을 통틀어서, 남에서는 지금의 공산주의 대 반(反)공산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정직 대 부정직이 문제라고 말한다.

글쎄,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별의별 소리를 다하고 있고, 그중 어떤 것들은 분명히 과장돼 있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베트남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 변화의 긴장상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어떤 이의 웅변을 빌려 표현하자면 “Très triste, monsieur, très fatiguè”(몹시 괴로워요. 선생님, 정말 피곤해요)의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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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은이주: ‘30년 전쟁’이 끝난 1975년, 베트남은 북부 베트남에 의해서 통합되었으나 그 후의 소식은 묘연하다. 수많은 베트남 탈출 피난민, 그리고 캄보디아 피난민의 참상은 세계의 인도적 관심을 끌기도 했으나 객관적 입장의 현지보고가 궁금할 때다. 타이의 수도 방콕에 인도차이나 및 동남아지역 취재본부를 두고 있는 서방국가 언론기관의 특파원 20여 명이 전쟁 종결 8년 만에 처음으로 베트남의 남북을 통한 취재여행을 하도록 허용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아시아의 권위 있는 경제지『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Far Eastern Economic Review) 특파원 피터 헤이스팅즈(Peter Hastings)는 오스트레일리아인 기자의 눈으로 남ㆍ북부 베트남의 대조적 모습을 생생하게 들춰내준다(『리뷰』지, 1982.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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