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7.5 중공을 휩쓰는 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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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3-04-01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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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66.7.5


 


중공을 휩쓰는 폭풍


문제의 풍라작품과 반격의 논거


 


문화혁명의 내막


언론인 등 삼가촌 그룹에 집중


()사상 비방 혐의


 


<병석의 히스테리 모택동 후계 경쟁 속에>


중공 내부에서는 각 분야에 걸쳐 거센 숙청의 폭풍이 불고 있다. 주은래 수상은 최근 『문화혁명이 중국의 운명을 건 대사업』이라고 평함으로써 중공 집권자들의 결의를 표명한 바 있다. 모택동의 병약설이 떠도는 가운데 시작된 정풍 운동의 목적은 무엇이며 어떻게 번져가고 있는가? 그리고 지식층의 사고방식을 개조하려는 이 운동의 공격대상이 된 작품이란 어떤 것인가를 종합적으로 살펴본다. <외신부>


 


흑선주동에 몰린 세 사람


중공이 벌이고 있는 문예정풍은 소위 「삼가촌 그룹」이라고 불린 세 사람의 저명한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삼가촌 그룹」이란 ①「연산야화」의 저작자 등척은 전 인민일보 편집장 ②역사극 「해서파관」의 작자 오함은 북경 시 부시장이며 동시에 중국 당대의 역사학자 ③「삼가촌 예기」의 공동 집필자 중의 한 사람인 유말사는 당 북평시위원회 통일전선부장 등 3인을 말한다.


이 세 사람이 정풍에 휩쓸린 반당 반혁명 노선의 「흑선」(음모계열)의 주동인물들이라고 지적되었다. 문제의 작품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정부를 풍자한 것


연산야화 = 61년3월부터 62년9월까지 북경만보의 고정란에 발표된 1백53편의 수필문이다. 이것을 모아 다섯 권의 책에 수록 발간한 것으로서 유머로써 정부를 비꼰 것이다.


내용 없고 공허


모(毛)의 동풍론 비판 = 세상에는 내용이 없는 공허한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를 듣고도 결국엔 아무것도 얻은 것 없는 이야기들, 내 집 근처에 어린애가 있다. 그는 대시인의 기풍으로 「빈소리」와도 같은 시를 읊었다. 최근의 작품에는 이런 것이 있다.


하늘은 우리들의 아버지 대지는 어머니 태양은 유모 동풍은 은인 서풍은 적


이 시는 천지, 부모, 동풍, 서풍 등의 사람의 눈을 끄는 말들을 사용하고 있으나 말을 난용하여 결국엔 진부한 것이 되고 말았다. 위대한 말들을 사용에 앞서 나는 친구들에게 많이 읽고 생각하고 떠벌리지 말고 또 피로할 땐 휴식을 취하여 여러분과 다른 사람의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말도록 충고한다.


주석을 모욕했다


▲인민일보의 비평 = 『동풍이 서풍을 압도한다』 이것의 과학적 판단은 모택동 주석이 57년11월에 발표한 바 있다. 등척은 「동풍은 은인」, 「서풍은 적」이란 말들에 대해서 『위대한 빈소리』, 『진부하다』고 하여 모욕했다. 흐루시초프가 「동풍서풍」을 황당무계한 교조주의 이론이라고 한 것과 같다.


불치의 건망증


▲당에 대한 공격 = 세상에는 건망증이란 병이 있다. 이 병을 고칠 수 있는 적극적인 치료법은 없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의 말은 믿을 수가 없다. 중국 고대의 의서에 의하면 건망증은 기분이 안정을 잃을 때 발생한다고 했다. 이것을 치료하는 데는 개의피를 건망증 환자의 머리에 부어주고 그 다음에 찬물을 끼얹어주면 된다고 했다.


당을 악용비방


▲인민일보의 평 = 이 문장이야말로 이빨을 드러내고 그가 위대한 우리의 당을 공격하고 있는 글이다. 의학서를 조사한 바로는 건망증이 「발광한다」고 적혀있지 않다. 등척은 의학서를 정치에세이에 악용하여 당을 비방했다.


노동사용 이해를


▲「대약진」과 자력갱생론에 대한 비판 = 춘추전국시대에 많은 고대정치가들은 「민력 사용」의 한계를 알고 노동력을 아껴 썼다. 그들은 노동력 사용의 객관적인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 점을 현대적인 노동사용을 위해 이해해야 한다. 우리들은 온고이지신에 의한 지식을 경험해야 한다.


미제에 부응한 것


▲인민일보의 평 = 그는 『노동력을 아끼지 못했다』고 「대약진」을 모욕했고 사회주의 건설의 총 노선과 대대적인 농업발전, 자력갱생 등의 혁명적 방침을 버리라고 했으며 지주계급의 「지배경험」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붕괴를 요구했다. 이것은 명백히 미제와 현대수정주의에 부응하여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다.


등척의 정치논문


「삼가촌 예기」


전 67편으로 61년10월에서 64년7월까지 북경시위의 이론지 「전선」에 게재했다. 오남성이란 펜네임으로 3자 공동 집필한 이수필은 연산야화와 함께 반제-반혁명적 문장으로 규탄받았다. 오함, 마남촌(실명은 등척), 번성(실명은 유말사)의 머릿자를 딴 것이 공동 집필자의 오남성이란 펜네임.


「삼가촌 예기」는 주로 등척의 정치에세이가 주된 내용으로 엮어져있다. 특히 이 내용 중에 문제된 것도 연산야화 중의 「모(毛)의 동풍론」이다. 비판가들은 역시 「삼가촌 예기」도 모택동 사상을 공격하기 위한 현대수정주의와 통한느 정치에세이라고 규탄했다.


명조실정을 통박


해서파관 = 오함은 명조 연구의 사가로 명조 때의 「청관」 해서를 연구했다. 그가 발표한 해서에 관한 논문은 역사수필 「해서, 황제를 욕했다」, 역사논문 「해서를 논함」, 역사극 「해서파관」 등이 있다.


내용은 명조의 가정제 때의 실제 인물 해서가 실정을 통박하여 투옥 되었다가 황제가 죽고 난 후 출옥하여 다시 관계(官界)에서 농민들을 도와준 「청관」의 행적을 찬양한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 상해의 문회보(65년11월10일)는 오함이 봉건지주의 이익을 옹호한 해서를 「농민의 구세주」처럼 찬양했는데 『봉건관리가 어떻게 농민의 이익을 옹호할 수 있는가?』라고 비난했다. 또한 오(吳)가 59년부터 61년까지 부시장직에 있으면서 이 기간에 이러한 반혁명 문필활동을 했다는 것을 정치문제로 삼아 비판공격했다.


 


<밖의 진단>


과거정풍관 판이


수정주의에로의 전락 예방


대외 강경책 위한 정신공작


정풍은 그가 죽기 전에 중공을 이념면에서 순화하려는 모택동의 광적인 걱정이 표현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의 정풍은 심각한 정책 논쟁이 당 지도층의 분열을 유발했던 과거의 정풍과는 그 양상이 크게 다르다. 어쨌든 모(毛)의 죽음이라는 유령은 중공인민과 당의 이제까지의 업적이 이미 유효한 기준이 될 수 없을 만큼 모든 전망을 변화시킨 것 같다. 지성인에 대한 구별이 뚜렷해짐에 따라 정책면에서 좌파와 우파의 알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 등척, 오함 등이 내세운다고 규정된 우파, 온건 입장은 모택동 사상의 정통주의에서 크게 일탈했음을 뜻한다. 외교문제에 있어 온건파는 소련과의 화해, 전 세계에 뻗친 해방운동에 대한 중공 지원의 감축, 그리고 아마도 대미 적대감의 완화를 요구한다. 모(毛)의 사후, 중공을 지배하려는 많은 인물들 사이에 아직은 이념상의 뚜렷한 분열을 드러내지는 않은 권력투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 경우 승리하는 측은 패자 측에 수정주의자 혐의를 씌울 것이다. 중공의 권력 균형이 앞으로 어떻게 변모하든 간에 중공의 강경노선을 변모하려던 기도가 있었다면 그건 실패하고 말 것이다. <에코노미스트 논평지>


 


<폭풍의 눈>


임표란 어떤 인물


서구를 아는 유일한 50대


모택동 당 주석의 병약설이 떠도는 가운데 중공 각계각층에 대해 정풍, 숙청의 바람을 휘몰아치고 있는 막후의 인물은 국방상 임표인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모(毛) 주석의 사망 후에 그 지도권을 계승할 9명의 실권자들은 대부분이 60 또는 70대의 노령인데 비해 임표는 그 중 가장 젊은 57세. 57년 팽덕회 원수 추방의 뒤를 이어 국방상의 지위로 올라온 후부터 중공군 내부의 지도권을 강화했다.


정치국 내에서 가장 강력한 적수인 팽진을 밀어낸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알바니아 대표단을 영접한 모택동 옆에 임표만이 나란히 서있었던 사실도 뭣인가 시사하고 있다.


임표는 현재의 최고의 지도자들이 외부 사회의 실정에 어두운데 비해 서구 사회도 이해하는 인텔리라는데 강점이 있다. 그가 혁명적인 무인이면서도 이론가로서 꼽히는 것이 그의 오늘의 지위를 약속한 중요한 자질이기도 하다.


한국동란 때 이른바 「중국인민의용군」을 거느리고 참전했던 인물로 우리에게도 무관한 사람이 아니다. 출생은 호북성 황안현. 24년 국부군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해에는 공산당에 들어가 중공군을 창설했다. 중공군의 아버지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45년에 당 중앙위원, 50년 국무원 부총리, 56년 정치국원이 되어 당 중앙위 부주석으로 승격한 뒤 59년부터 국방상으로서 그 지위를 굳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