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밖에 없는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 김효순
하나밖에 없는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김효순 리영희재단 이사장
50년 전 여름 도쿄 도심에서 대형 폭파사건을 일으켜 일본 사회를 충격에 빠트렸던 과격파 무장투쟁 단체를 추적한 다큐영화 상영에 리영희재단 후원회원들을 초청합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영화라고 해도 무방할 특이한 소재의 영화입니다. 건설 일용노동자의 삶을 묘사한 <노가다>, 대형마트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외박> 등 노동을 테마로 한 일련의 독립영화 작품을 만들었던 김미례 감독이 제작하고 2020년 8월 개봉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입니다. 코로나 유행 탓에 대면집회가 제한되던 때여서 아쉽게도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습니다. 이 다큐영화의 제목인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하 <무장전선>)은 일본인들이 식민지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을 도외시하고 오로지 고도 경제성장에 몰입했던 1970년대 전반기, 격렬한 폭탄투쟁으로 근원적 문제제기를 시도했던 단체의 이름입니다. 명칭만 보면 상당수의 무장전사들을 보유했음직한 조직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10명 안팎의 20대 젊은이들로 구성된 소수정예의 단체였습니다. 구성원들은 대부분 대학중퇴자들로 외견상 주변의 주목을 끌 일이 없는 평범한 직장인들이었습니다.
무장전선은 오랜 기간 일본 사회에서 터부의 대상이었고 집단적 기억에서 지워져 있었습니다. 금기의 대상이 된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무장전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폭탄테러의 결과가 상당히 참혹했기 때문입니다. 1974년 8월 30일 낮 12시45분께 도쿄 중심부의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현관 앞에서 2개의 시한폭탄이 터져 8명이 죽고 380여명이 다치는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시한폭탄이 설치됐으니 급히 대피하라는 경고전화가 걸려오기는 했지만 직장인들의 점심시간대와 겹쳐 인명피해가 컸습니다. 폭탄의 위력은 다이나마이트 40킬로분으로 추정됐고 수사당국이 범행단서를 샅샅이 뒤지기 위해 현장에서 수거해간 유리파편이 40톤에 달했다고 합니다. 한달 뒤 나온 범행성명에 무장전선 ‘늑대’라는 명칭이 등장합니다. 이후 무장전선이 저지른 테러의 성명문에는 ‘대지의 엄니’, ‘전갈’이라는 그룹도 나옵니다.
둘째, 무장전선은 기존의 좌익 혁명세력과는 달리 식민지지배와 침략전쟁의 책임론을 전면에 내세워 정권보다는 기업을 무장투쟁 대상으로 삼었던 소수파 과격조직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장전선이 벌인 일련의 테러에 대해 ‘연속기업폭파사건’이란 용어가 통용되고 있습니다. 조직의 일부 구성원들은 대학생이었던 1970년대 초반 한국에 들어와 강제동원 피해를 직접 조사하기도 했습니다. 무차별 테러를 운동의 수단으로 택했던 과도한 폭력성의 문제는 당연히 비판받아야 하지만, 이들이 당시 일본의 전쟁책임을 가장 정면으로 고민했던 젊은이들의 한 축이었다는 측면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무장전선 구성원의 상당수가 홋카이도 출신이었다는 점도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홋카이도 선주민인 아이누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노골적인 차별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사회적 소수자들의 억압문제에 예민한 감수성을 키웠다고 합니다. 무장전선은 1975년 5월19일 8명의 구성원들이 일제히 체포돼 사실상 와해되는데 그 과정에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 한 청년도 홋카이도 무로란 출신이었습니다.
무장전선의 문제의식은 미쓰비시중공업 폭파의 범행성명에서 격렬한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전전, 전후시기를 걸쳐 전투기나 군함을 제조하는 일본 군수산업의 근간이지만 매스컴의 일상적 보도에는 그런 점이 부각되는 법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성명에서 “미쓰비시는 옛 식민주의 시대부터 현재까지 일관되게 일본 제국주의의 핵심으로 기능했으며, 장사라는 탈을 쓰고 시체를 뜯어먹는 기업”이라고 규정하고, 사상자들이 ‘무고한 일반시민’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중추에 기생하고 식민주의에 참여해 식민지 인민의 피로 비대해진 식민자’라고까지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무장전선이라는 명칭을 공식화하기 이전인 1971년, 교수형에 처해진 A급전범 7명을 기리는 ‘흥아관음(興亞觀音) 순국 7사비’를 파괴했습니다. 미쓰비시중공업 폭파 보름전 쯤에는 일왕(천황)이 탑승하는 전용열차를 폭파하려다가 실행 직전에 취소하기도 했습니다. 무장전선은 미쓰비시중공업 사건 이후 침략전쟁의 악행을 반성하지 않고 제3세계에 진출해 현지인들을 ‘착취’한다는 혐의로 10여개의 대기업을 상대로 폭파활동을 이어갔는데 추가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무장전선의 문제의식이 일본 사회의 주류적 사고와는 너무도 격차가 컸기 때문에 그들의 문제의식을 진지하게 성찰해봐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는 거의 조성되지 못했습니다. 일본은 자국민뿐만 아니라 주변국가들에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초래하고 1945년 9월 미주리함상에서 거행된 항복문서 조인식으로 끝난 전쟁에 대한 공식 명칭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매년 8월15일 일본 정부가 개최하는 ‘전국전몰자추도식’에서 일왕이 하는 추도사에는 ‘지난 대전’(큰 전쟁), ‘그 전쟁’이란 애매모호한 용어가 나옵니다. 전후 점령군이 들어와 일제가 쓰던 ‘대동아전쟁’이란 말을 금지시키고 ‘태평양전쟁’을 쓰도록 했는데 전후 80년 가까이 되어가는 현시점에도 사회적으로 합의된 용어가 없습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15년전쟁’이란 용어가 학계를 중심으로 쓰이고 있는 정도입니다. 일본사회에서 침략전쟁을 부인하는 망언이 터져나오고 전후보상의 요구가 갈수록 미미해지는 것은 이런 풍토와 맞닿아 있습니다.
일본에서 거의 사어가 되다시피 했던 무장전선이란 말이 지난 1월말 매스컴에 느닷없이 등장해 한동안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길거리에서 쓰러져 병원에 실려온 70세의 노인이 자신은 49년 동안 ‘중요 지명수배자’로 도피생활을 계속해왔던 무장전선 ‘전갈’그룹의 기리시마 사토시라고 본명을 밝히고 경찰에 신고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위암 말기 환자였던 그는 급거 출동한 공안 관계자들의 조사에 응하기는 했지만 4일 뒤 숨졌습니다. 히로시마현 후쿠시마 출신인 기리시마는 메이지학원대학에 재학 중 무장전선에 합류했고 1975년 4월 도쿄 긴자에 있던 한국산업경제연구소 폭파에 관여한 혐의로 지명수배를 받아왔습니다. 당시 21살의 앳된 청년이었던 그는 가명을 쓰며 줄곧 도피생활을 이어오다가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신원을 드러낸 것입니다. 언론의 취재경쟁이 불붙었지만, 어떻게 장기간 위장생활을 할 수 있었는지, 외부의 협력자가 있었는지, 공안경찰은 왜 검거에 실패했는지 등에 대한 흥미 위주의 보도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무장전선의 젊은 청년들이 도대체 무슨 고민을 했길래 그런 엄청난 일을 벌였는지에 대한 심층분석은 찾아보기 어렵고 냉혹한 테러리스트 단체의 일원이었다는 오명만 남는 것 같습니다. 기리시마의 주검은 가족이나 가까운 친지들조차 인수를 거부해 무연고 묘지에 묻혔습니다. 죽어서도 평온을 찾을 수 없는 기피대상 인물로 취급된 것입니다.
김미례 감독의 작품보다 33년 전에 나온 무장전선 관련 영상물이 있습니다. 1987년에 제작된 <어머니들>이란 다큐가 무장전선 수감자들을 지원하는 모임 등에서 간헐적으로 상영돼왔고 현재는 디브이디로도 시판되고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이 작품의 감독은 기리시마와 같이 ‘전갈’그룹에서 활동하다 1975년 일제 검거시 구속돼 아직까지도 무기수로 수감중인 구로카와 요시마사입니다. 구로카와가 감옥으로 면회온 사람들에게 무장전선 수감자들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요청해 제작됐습니다.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 중인 청년을 양자로 삼아 지원활동을 하고 있는 ‘양모’도 등장한다고 합니다. 무기수의 옥중 메시지로 만들어진 다큐이니만큼 사실상 무장전선 ‘내부자’의 작품인 셈입니다. 그러니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제3자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것은 김미례 감독의 작품이 유일합니다. 현재 일본 사회 분위기로 보면 일본인 감독이 이 주제로 본격적인 다큐영화를 만들겠다고 나설 가능성은 상당 기간 아주 낮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김미례 감독의 작품은 일본에서 상영 행사가 공지되면 우익들의 방해 움직임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시민단체의 ‘자주(自主)상영’ 활동은 위축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김 감독 자신은 상영회에 나온 일본인들로부터 한국인 감독이, 그것도 여성이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들게 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합니다. 지난 3월에 <아사히신문>에 김 감독 인터뷰가 실렸는데 역시 이런 성격의 질문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 한국의 언론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본인들이 무장전선에 대해 애써 눈 감으려 하는 풍조는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젊은 시절 전쟁책임을 철저하게 고민했던 일본인들의 비극적 삶을 다룬 김 감독의 작품이 우리 사회에서는 왜 관심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을까요? 한국은 가혹했던 일제 식민통치의 최대 피해자가 아니었나요? 우리 함께 무장전선 영화를 보면서 그 이유를 탐색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영화 상영 후 김미례 감독과 영화 제작의 코디네이터 역할을 했던 심아정 박사를 모시고 토크쇼가 진행됩니다. 후원회원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로 풍성하고 심도있는 대화가 오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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