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불효자의 변」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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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1-01-21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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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불효자의 변」(1977 여름, 우상)


 


불효자의 변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도 효도를 하지 못했고 현재 살아 계시는 어머니에게도 효도를 하지 못하고 있는 불효자다. 선친의 마지막 병고 때에는 의사 한번 부르지 못한 채 돌아가시게 했다.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가족인데다가, 이름은 언론기관이라고 버젓하지만 안에서 뒷바라지하는 소위 ‘내근’(內勤)인 나에게는 쥐꼬리만한 월급밖에 없는 수입으로는 가족의 세 끼를 보장하는 일조차 힘에 겨운 형편이었다. 이 쓰라린 경험은 나에게 효(孝)도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주었다. 해방 후 내려오신 아버지를 10년쯤 모시면서 그 회갑조차 못 해드리고 이렇게 세상을 뜨게 한뒤에야 나는 비로소 철이 들어 아버지가 존경할 만한 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럴수록 조금 살게 된 후에는 만사에 선친 생각이 앞선다.


나는 어머니는 별로 존경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20년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서 지금도 ‘마음으로부터’의 공경을 해본 기억이 없다. 여러 가지 사연이 얽혀서다. 이 글을 적고 있는 순간에 사경을 헤매는 노모에게는 퍽이나 죄송스럽지만 별수가 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나의 불효함을 탓하기에 남달리 열심인 사람이나 마주 앉기만 하면 효의 공덕을 훈계하려고 덤비는 사람은 대체로 부모를 섬겨본 일이 없거나 모실 필요가 없는 ‘복 받은’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양친을 20년, 30년 섬긴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저렇게도 쉽게 남에게 효의 도덕을 훈계할 수 있을까 의심하게 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여기서 나는 또, 효를 하기 위해서는 ‘관념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뿐이 아니다. 효를 강조하는 사람마다 공맹(孔孟)의 고전과 유학의 원리에도 통해 있고, 훈고학(訓詰學)의 심오한 학문을 꿰뚫은 사람들인 것을 보면서 효를 하기 위해서는 현학적(衒學的)이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훌륭한 석학들이 온갖 매스컴을 통해서 효학(孝學)을 강의하는 것은 반드시 효의 모범적인 행실로서 인정된 탓이기보다는, 권력자를 의식하면서 자기의 그런 역할이 눈에 들고 귀에 미치기를 애타게 바라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세정에 어두운 나는 뒤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효를 국민에게 타이르기위해서는 ‘출세주의자’가되어야하며, ‘상업주의정신’에 투철해야 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위선적’이기까지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로서는 굉장한 계몽이다.


돈도 없고, 관념주의자도 아니고, 학문이 없으니 아예 현학적일 수도 없고, 출세란 처음부터 출세시켜줄 쪽이 마다하는 입장이니 출세주의자가 되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어떻게 잘못 태어났는지 상업주의적이기에는 세상을 저울질하면서 살아본 일 없고, 어차피 나야 위선자니까 새삼스럽게 위선을 위장해본들 남이 속아 넘어가지도 않을 것이고 보면, 나는 아예 효자 되기에는 타고 나면서부터 실격자라는 생각밖에 없다. 부모를 모시는 데 이렇게도 많은 과외의 자질과 능력과 재주와 자격을 아울러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미처 몰랐다. 그런 줄 알았던들 구태여 불효자식임을 한탄하고 자책으로 고민할 필요도 없었겠다. 그래서 최근에는 불효자로 끝나는 것에 만족감마저 갖게 되었고, 타고나면서 구제할 수 없는 사람은 죽는 날까지 구제할 수 없다는 철학 같은 것을 믿게 되었다.


아버지는 10년을 모시다가 돌아가시게 했고, 어머니는 그 후로 20년 가까이를 모시고 있으니 그만하면 됐지 않느냐고 자위할 때도 있다. 그런 생각에서 어느 날 공자에게 물으니 그게 아니라고 한다.


“요즘 사람들은 부모를 모시면 그것이 효도인 줄 아는가 본데, 그것만이라면 개나 말을 기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효도의 차이는 마음에서부터 공경하는 것이다”(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皆能有養, 不敬何次別乎).


하긴 그렇다. 견마(犬馬)도 사람이 양식을 주어서 기르는데 부모를 양식만으로 봉사하고, 공경함이 따르지 못한다면 견마를 기름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과연 성현의 말씀이다. 공경할 줄 몰랐으니 결국은 효의 덕은 깨우치지 못한 셈이 되었다.


그러기에 나는, 얼마 전부터 웬일인지 갑자기 ‘효’가 하나의 ‘사회신앙’으로 고양되고 강조되기 시작할 때 그 모든 것이 나를 꾸짖는 것만 같아서 책과 라디오와 텔레비전과 신문과 훈사(訓辭)에 효에 대한 말이나 글자라도 나오면 죄진 사람처럼 비실비실 피해야 했다.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나 글을 쓴 사람의 얼굴을 나는 도저히 정시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저렇게 성현의 말과 가르침을 자신의 말과 가르침으로 거침없이 이야기하고 쓸 수 있을 때야 어찌 감히 나 같은 사람이 듣고 읽을 수 있으며, 듣고 읽은들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이름깨나 있다 하는 사람이면 날이면 날마다 높은 자리에 나와서 내려다보며 효의 강의를 계속하니, 어느덧 나도 그 감화를 조금씩 받게 되었다. 이제 새삼스레 하는 말을 외워두었다가 거침없이 효의 풀이를 해야 불효의 지탄이나마 면할 수 있겠다 하는 이기주의에서다. 그렇고 그러는 사이에 나도 요새 용기를 내어 효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에 적는 것이 그것이며, 이름해서 ‘불효자의 변’이다.


그 많은 유식자들의 소론(所論)에서 알게 되는 것은, 오늘 우리 사회ㆍ국가의 각종 혼란과 무질서가 충효사상의 결핍과 문란 때문이라는 것 같다. 즉 도덕규범의 문란 때문에 사회ㆍ국가생활의 제도적 기강이 퇴폐해졌다는 해석이 압도적이다.


그런데 이 주장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원인과 결과를 곤두박질시킨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 같다. 본래 어느 사회의 도덕률이건 그것은 그 사회의 어떤 특정 시대의 역사적 발전단계의 경제적 조직원리에 따라 형성된 사회구조에 대응하는 인간관계의 규범이라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효의 사상도 예외일 수 없다. 효의 사상과 실천(효행)이 좋고 그르고는(그를 것은 없지만) 논리의 범주에 속하는 논제인데 그 논리는 인류의, 또는 집단적 생존 단위의 경제적 구조를 반영하면서 그것을 유지하며 변화하는 이데올로기체제의 일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에 그렇지 않고 거꾸로 논리를 조작한다면, 인류사의 진전 과정의 어느 단계에서나, 그 단계의 경제적 생활양식이 같은 곳에서는 어째서 같은 윤리체계가 형성되는지 해석할 수 없게 된다. 최근 중국에서는 약 3,200년 전의 한 제왕의 무덤에서 2,000명 넘는 생매장된 시체유물이 발굴되었다. 그 많은 사람은 남녀노소의 시중ㆍ무사들인데 과학적 검증으로는 한창의 씩씩한 젊은 무사도 많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살기를 바랐을 터인데 어째서 한 사람의 제왕의 죽음과 함께 묻혔어야 할까. 당시의 도덕과 윤리를 오늘에 이식하려 해도 될 일이 아니다.


그 변화를 가져온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시대의 권력의 관계이며 그 권력관계의 바탕은 총체적 경제적 소유관계다. 그릇된 경제적 소유관계는 그릇된 도덕을 낳는다.


요사이 충효사상의 복고나 재생을 강조하는 식자들은 충효의 사상이나 도덕이 딛고 서 있던 역사적ㆍ사회적 조건을 애써 무시하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들도 말로는 시대가 다르면 ‘시대적 수정’을 할 필요가 있다는 정도까지는 시인하는 듯하다. 그러나 전적으로 이질적인 소유관계의 사회질서에 약간의 수정만을 가해서 원리화해보려는 것은 무의미하고 헛된 노력에 그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공자는 봉건시대의 사상가ㆍ경세가이므로 그가 제창한 도덕은 봉건시대의 도덕일 수밖에 없다. 그가 교시하는 예교(禮敎)나 생활 상태(양식)는 봉건시대의 예이며 생활방식이다. 그가 주장한 정치도 본질적으로는 봉건제도의 정치다. 봉건시대의 도덕ㆍ예교ㆍ생활ㆍ정치는 그것이 어디 있든 간에 소수의 군주나 귀족의 권리와 명예의 범위를 넘지 않으며, 다수 대중의 그것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은 역사가 가르쳐주는 바와 같다.


그 시대와 사회의 소유관계란 가족의 단위에서는 가부장제도이고, 근대에 이르러서도 부모 가운데 부의 재산권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운영되는 것이었다(어느 정도는 현재도 그렇지만).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은 부이며 그 가족은 출생에 의한 ‘자연적 관계’를 형성하지만 ‘소유권자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다. 소유권 관계는 인격관계의 기본인데, 여기서 친자(부자) 사이의 의존ㆍ예속ㆍ비독립적 인격관계가 형성되게 마련이다. 서양에서도, 오늘의 가족이라는 말로 쓰이는 패밀리(family)의 원어 파물루스(famulus)는 처음에는 심지어 부부와 그 자식들을 지칭하는 것조차 아닌 주로 노예를 말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파물루스는 한 가내노예의 이름이고 파밀리아(familia)는 한 ‘남자’에 속하는 노예 전체의 집합명사였다고 한다.


불평등적 인격관계는 불평등적 도덕관계를 낳고, 그것으로 그 바탕인 불평등적 소유(재산)관계는 합리화되고 정당화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물적 소유관계의 사회에서는 효(마찬가지로 크게는 ‘충’(忠)의 사상과 도덕은 강제력의 행사 없이도 발생되는 것이며 사회질서의 기본원리로서 모순 없이 기능할 수 있다. 우리가 전통으로 이어온 효사상이 그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소유ㆍ생산ㆍ분배관계(즉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개개인이 소유ㆍ생산ㆍ분배의 주체가 되었다(현실적으로는 어떻든 제도가 그렇게 바뀌었고 명분이 그렇다). 더욱이 화폐경제의 현 단계 사회에서는, 개개인은 자연적 소속인 가족에 속하면서도 소유관계에서 독립적 주체가 되고 그 물적 주체성은 사회적 인격의 주체로 분화ㆍ발전했다. 이와 같은 소유관계는 현대적 용어로는 ‘경제적 수입’의 관계가 된다.


여기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 페르디난트 퇴니스의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의 이론이다. 라디오ㆍ텔레비전ㆍ잡지ㆍ신문ㆍ강단에서 그토록 열을 올려가면서 효사상을 역설하는 그 사람 자신이 혈연의 ‘자연관계’(즉 Wesenswille, 자연발생 또는 본질의사)가 지배하는 게마인샤프트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퇴니스가 규정하는 선택의사(Kürwille)가 행위 결정의 요인이 되는 게젤샤프트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자본주의적 소요(생산ㆍ분배)관계의 사회 속에서는 인간관계는 인간과 물질의 관계에서와 다름없이, 수단과 목적을 분리시키는 합리주의가 기본원리가 된다. 우리는 원하건 원하지 않건, 또는 좋건 싫건, 개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인간을 그 개인에 ‘고유한’(intrinsic) 가치나 목적 때문이 아니라 각기의 이익이 계산된 관계 속에서 ‘사용’하게 된다. 가족을 두고 말하더라도 계산을 초월한 ‘절대적 규범’으로서의 친자관계는 이와 같은 경제ㆍ사회구조 속에서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가 없다. 한 자식(아들)은 친자(즉 가족)관계에서 이탈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관계의 ‘유용성’에 관해서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이 명하는 데 따라서, 즉 자신의 목적의 수단으로서 그 약정관계를 맺기도 하고 해체하기도 한다. 부모가 그 힘을 저지할 ‘독점적’능력은 현실적으로 상실한 지 오래다. 그것에 바탕을 둔 인간관계, 사회생활의 질서는 그 물적 소유형태를 바꾸기 전에는 되찾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효’학자ㆍ선전가들은 이 ‘소유관계’의 변화에는 전연 눈과 의식이 못 미친 채, 충효사상을 만세불역(萬世不易)의 사상ㆍ도덕처럼 복고시켜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다. 또 어떤 논자들은 ‘산업사회’에서는 그렇다는 식의 막연한 분석을 하고, 어떤 이는 ‘핵가족’제도가 되니까 그렇다고 분석하고 있다. 산업사회라고 이름하는 그 사회의 인간행위의 기본적 요인은 무엇인가? 핵가족주의라는 경향은 어째서 생겨나는가? 그런 현상을 근본적으로 해부하지 않고 현상을 가지고 효의 문제를 해석하려고 한다면 도달할 곳은 허공뿐이 아닐까 걱정스럽다.


정말로 효를 다시 인간관계의 중심으로 삼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권고할 수 있는 것은 다음의 한마디에 그칠 것 같다. 즉 효라는 도덕률이 지배하는 좋은 사회를 원하거든, 봉건주의적 소유관계의 시대로 되돌아가든가, 그것이 싫으면 불평등적 소유관계가 아닌 다른 게마인샤프트적 관계의 사회를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가 통일되는 어떤 경제ㆍ사회구조에서는, 효는 강요하지 않아도 효보다 더 높고 큰 보편적 인간애ㆍ형제애의 도덕체계의 일부로서 자연히 실현되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을까. 그런 근본적 문제 접근을 회피하거나 의식함이 없이, 공맹의 교전류(敎典類)의 훈고학적 규명이나 유학의 이론적 해설 강연에 국민의 세금을 아무리 쏟아 넣어도 얻을 것은 실망뿐일까 싶어 딱하다. 그 학식 깊고 덕망 높은 이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또 그들의 사변과 논리 조작의 일면성을 느끼게 된다.


효사상은 그 도덕이 확립 수용되었던 시대의 개인의 권리ㆍ의무 관계나 가치관의 하나의 총체ㆍ종합적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삼강(三綱)의 하나이며 오륜(五倫)의 일부이며, 그 전체의 유기적 부분이다. 현대적 표현을 빌리자면 효는, 효사상이 지배하던 시대의 그밖의 여러 가지 도덕과 윤리와 ‘한 세트’로 발생하고 기능한 것이지 효사상 하나만이 단독으로 형성되고 기능했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요사이의 효의 열렬한 신봉자와 전도사들은 나머지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효만을 독립된, 분리 가능한, 자생적인 것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경향이 있다. 효가 하나의 무조건적인 도덕률로서 유기적으로 기능하던 인간관계의 규범은 군신관계, 남녀관계, 형제관계, 붕우관계를 아울러 규정하고 있다. 그 어느 관계도 다른 모든 관계의 정당성과 실천의 요청을 전제로 해서만 형성되고 기능했던 것이다. 그 모든 ‘인간의 길’은 그 시대의 그 소유관계(물적 조건)를 하나의 뿌리로 해서 생겨난 도덕이다. 그 어느 것도 자기완결적일 수 없고, 분리독립적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효의 위계질서의 확대와 절대화가 군신관계이며, 그 성적(性的) 생활 표현이 남녀유별이며…… 남존여비사상이다.


그 모든 관계규범은 상호 보완적이며 상호 침투적 성격이다. 그 사회의 소유관계와 그것에 입각한 권리ㆍ의무관계의 ‘총질서’를 확고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한 세트의 도덕이 어느 한 구석의 불균형도 없이 꽉 짜인 채 기능해야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유교가 개인생활의 지엽 말단에까지 파고들어 오늘의 육법전서도 무색할, 오히려 그 정밀, 엄격함에서 경탄할 만한 체제를 짜야 했던 이유도 바로 그 도덕체계의 본질 때문이다. 그것은 그 시대의 사회라는 건물을 구성하는 골격의 전체다. 따라서 어느 기둥 하나도 없을 수 없고, 어느 서까래 하나도, 전체 구조의 붕괴 없이 뺄수 없게끔 조직된 도덕질서다.


그런데 우리 식자들은 2천 년, 3천 년이 지난, 전혀 다른 시대의 다른 건축양식에 입각한 빌딩의 안정을 위해서 이 효라는 옛 건물 기둥 하나만을 뜯어다가 떠받들려고 애쓰고 있다. 사회의 물적 관계도 변증법적이지만 인간관계도 변증법적인 것이다. 효사상이 요구하는 친자관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연 그의 가정에서, 남녀는 7세에 부동석하고 있는지. 수(嫂)와 숙(叔)은 통문(通問)을 안 하는지. 출가해 되돌아오면 형제도 석(席)을 같이 하지 아니하며 기(器, 그릇)도 같이 쓰지 않는지. 아들 딸은 행매(行媒, 중매)가 아니고는 그 상대자와 이름도 모르고 지내는지. 부인이 문을 나설 때는 얼굴을 가리는지. 자기의 비서나 여학생에게 물건을 줄때 직접 수교하지 않고 제자를 거치는지. 자기는 안(內)을 말(言)하지 아니하고 그의 부인은 밖을 말(言)하지 않는지. “무릇 부(婦, 며느리)는 사실(私室, 침실)에 가라 하지 않으면 남편을 맞이하지 아니하고, 작고 큰 온갖 일을 시어머니에게 반드시 청한다”로 살고 있는지. 자기와 아내가 아무리 금슬이 좋아도 부모가 언짢아하시면 이연(離緣)하는지. 또 자식들에게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가르치고 강요하고 있는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자기 자신은 공교(孔敎)가 가르치는 인간적ㆍ사회적 덕행을 실천하고 있는지?


그런 말은 필자의 말이 아니라 바로 효를 인간행위의 원리로 가르친 그 성현의 전서들에서 뽑은 말이다.


“아비가 자식이 죽기를 바라면 자식은 죽지 않을 수 없고, 임금이 신하가 죽기를 바라면 신하는 죽지 않을 수 없다”(父欲子死子不得不死君欲臣死臣不得不死). 어쩌면 요사이 효의 강의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은 그 모든 계율을 실행하고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君欲臣死’의 어명이 내려오기를 고대하면서 ‘臣不得不死’의 영광을 실천으로 보여드릴 기회만을 고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의 비역사적 사고에 못지않게 이 비변증법적 사고방식도 문제된다. 효의 도덕이 아름답게만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효가 ‘인륜’이었던 시대에 그토록 많은 인간이 굴종과 비참과 눈물로 인생을 마쳐야 했던 그 가려진(아니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다. 효가 ‘제도’로서 강요되는 사회는 본질적으로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는 사회라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것인가. 여기에 관료주의가 깃들 위험성이 있고, 실제로 현재 충효사상을 ‘운동’으로 몰고 가는 움직임이 권력기관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다. 충과 효의 이데올로기는 그 도덕률의 전제로서, 그리고 동시에 필연적인 결과로서 비이성적ㆍ비독립적 인간을 상정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늘에서 울었고,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영혼(마음)이 억울함과 비통함에 찢어졌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당연히 발휘될 수 있었을 창의력과 생명력이 짓눌리고, 해방됐더라면 꽃피었을 인간적 아름다움이 위선의 탈 속에서 시들어갔는가도 생각하면서 효를 찬양하면 좋겠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지배하는 자, 지배하려는 자, 지배를 계속하고 싶은 자들의 도덕이다. 그것은, 현대사회에 적용해 국민의 총체적 우민화(愚民化)에서 지배의 이득을 얻는 전제자(專制者, 또는 그런 취미)의 철학임이 분명하다. 독자적 사고력, 독립된 판단력, 주체적 비판력, 반항의 권리를 도덕의 이름으로 마취시키고 빼앗으려는 사람이나 세력이나 그 철학에 심취하는 이유를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과정에서 남의 나라(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어차피 효의 문제라면 중국을 빼놓을 수가 없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을 세운 중국은, 이미 19세기 말엽에 구제(舊制)를 개혁하기 시작해, 손문(孫文)에 의한 현대사를 위한 혁명을 추진했다. 그러나 수구(守舊) 반동적 구지배세력은 원세개(袁世凱)를 끌어내어 그 헌법초안 가운데 “중화민국 인민은 법률에 의해 초등교육을 받을 의무를 지닌다. 국민교육은 공자의 도를 가지고 수신의 대본으로 삼는다”(제1조)를 삽입하려다가 실패한 일이 있다. 혁명으로 수립된 민주적 국가체제를 쿠데타로 뒤엎은 원세개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그 야욕의 대중적 토대를 ‘공자의 도’를 국민화함으로써 이룩해보려 했다. 이때 공화제와 민주주의와 사회진보에 반대하는 반동적 학자ㆍ정치인ㆍ지식인ㆍ교수ㆍ향신 들이 효의 도덕을 앞을 다투어 선전하고 풀이하는 데 열을 올렸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가장 비극(차라리 희극)적인 인물은 강유위(康有爲)다. 그는 무술변법(戊戌變法)의 주동인물로서, 명맥이 끊어져가는 제국(諸國, 중국)의 살길은 민주(부르주아)혁명에 있다고 믿은 대선각자다. 그는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로의 전환기에 사상적 진보성으로 인해 많은 고루한 복고주의자들과 구지배체제의 지식인들의 집중 공격을 받으면서도 중국 민중의 사상적 혁명에 앞장섰던 위인이다. 그러한 강유위였지만 일단 역사가 자신의 사상적ㆍ실천적 한계성을 뛰어넘어 전진하기 시작하자 원세개와 여홍원(黎洪元) 대총통의 반동세력에 아부하면서 공교(孔敎)의 국교화를 헌법에 명기하도록 하는 캠페인의 기수가 되었다.


시대는 흘러 1934년에는, 앞서간 전제자 원세개ㆍ여홍원ㆍ장훈(張勳)의 복벽(復辟)운동의 현대판을 시도한 것이 장개석(蔣介石)이다. 1934년 앞뒤의 시대는 중국에서는 5ㆍ4운동의 여파로 사회 개혁을 요구하는 진보적 사상이 열화같이 일어나고 있을 때다. 1921년에 창립된 중국 공산당은 이미 그 시대사상의 선봉자로서 지식인과 자각한 대중 사이에 커다란 동조세력을 구축하고 있을 때다. 밖으로 외세의 압력ㆍ침략에 몰리고 안으로 혁명(현대화)의 요구가 시대정신으로 팽배해지는 속에서 집권자와 지배세력이 택할 길은 그 시대정신에 호응하거나 적어도 사회혁명의 시늉이라도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개석 총통과 그가 대표하는 ‘소유하는 세력’은 ‘신생활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신생활운동이란,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 길 골목을 쓰는 것, 침을 안 뱉는 것, 아편을 안 피우는 것, 술을 덜 하고, 절약 저축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농촌의 협동작업ㆍ협동조합 만들기 등등으로 중국 5억 대중의 정신적 부흥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이 다 좋았지만 결국 근본적인 중국 인민의 오랜 한 가지 요구를 거부한 결과는 그 후의 사태가 역사적인 판가름을 내리게 했다. 즉, 90퍼센트의 농민 대중이 요구하는 토지 소유제도의 개혁이 그것이었다. 이는 도시 노동자와 영세민을 몇몇 재벌의 질곡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금융 재산 소유제도의 개혁이다.


신생활운동의 중심 사상으로 공교(孔敎)와 특히 효의 도덕이 강조되었다. 그것으로 혁명의 열의로 술렁거리는 정치ㆍ사회적 ‘무질서’와 ‘혼란’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공산당을 이기는 길은, 그런 고식적이고 도호적인 신생활운동의 전개나, 민주적ㆍ현대적 개혁의 요구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복고적ㆍ위계질서적 충효사상의 강조가 아니라, 시대의 전진을 앞지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에 부응하는 어떤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창출하고 적용하는 것이었다.


원세개ㆍ여홍원ㆍ장훈ㆍ장개석에게 공통적인 것은, 민주주의를 사갈시하고 대중적요구를 거부하면서 각기 전제적 정치권력을 강화하려 할 때 공교와 (충)효의 교의를 국민에게 숭상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역사를 발전시킬 이데올로기에 궁핍한 집권자가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적ㆍ대중적 압력에 최면술적 효과를 기대한 것이 효의 사상이었다. 낡은 사상의 창고 속에서 이미 이끼가낀 이데올로기를 들추어내 그 먼지를 털어 빛나게 보이려 할 때 각성된 대중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이 중국 현대의 효사상 복고 노력의 에피소드다. 매스컴에서 입에 거품을 물어가며 효의 사도임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한번쯤 참고 삼아 무방할 에피소드겠다.


중국의 전례에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또 하나의 교훈은, 효사상은 본질적으로 종적(縱的) 지배와 예속질서인데,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수평적 평등질서라는 것이다. 수평적 평등 지향 사회와 어용적이고 제도화된 효사상이 상응하기 어려운 점이 이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사회에 효의 도덕을 모순 없이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연령ㆍ성ㆍ재산(수입)ㆍ사회적 지위ㆍ인종ㆍ사상과 신념의 차이에 구애되지 않는 전체 사회 구성원 간의 수평적 ‘우애’, ‘시민적 평등’, ‘인류애’의 형태 속에 그 자체를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소유관계의 수정 없이 이것을 상정한다는 것은 관념론적 사고이고 환상일 수밖에 없다. 혈육의 관계가 이웃 또는 사회 모든 구성원 사이의 관계와 합일 통일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인가. 친ㆍ자의 효관계가 그 발생학적으로 부의 독점적 또는 배타적 소유의 질서를 근거로 한다면, 모든 사람의 소유가 평등화된다면 부ㆍ자의 게마인샤프트적 관계(도덕)는 전체 사회 구성원 사이의 게마인샤프트적 관계로 발전 통일될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본다. 그런 상태는 곧 가족 구성원 간의 사랑이나 자연적 감정이 전체 사회 구성원 사이의 자연적 감정으로 승화되고 통일ㆍ합일된다는 뜻이다. 그 상태에서는 구태여 내향적이고도 제한ㆍ배타적인 효의 도덕이 강조될 필요가 없다. 한 큰 공동 집단체의 전체 구성원 사이에 분리와 불화가 없는 ‘혈육적’결합과 사랑이 넓어지고 깊어질 것이다. 이것이 과연 백일몽일까.


현실적으로 일어난 두 개의 사건이 이에 대한 어떤 중요한 암시를 준다. 1976년, 중국의 공업도시 당산시(唐山市)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중국 역사상 최대의 지진과, 1977년 7월 미국 최대 도시 뉴욕에서 일어난 12시간의 정전사건이다. 두 도시는 모두 현대적 경제생활과 현대문명의 물질적 생산 중심지며 인간의 밀접한 생활공동체라는 데서 공통적이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아직 제어하는 방법을 발견하지 못한 지진의 경우나, 인간이 창조한 문명의 이기이지만 인간능력의 틈을 타서 일어나는 전기장치의 우발적인 사고는 다 같이 일단은 예측할 수 없는 문명생활에의 도전이다. 이 불가항력의 돌발사태에 직면해서 인간이 어떤 태도로 반응하는가는 그 사회의 기본적인 성격을 설명해줄 것이다.


사상자 70만을 낸 제1차 본진(本震)이 지나고 렉타 진급 3, 4의 여진이 아직도 간단없이 땅을 흔들고 있는 당산시를 일본 대사가 현지시찰했다. 그는 얼마 후 본국에 돌아와 도쿄의 한 신문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감상을 쓰고 있다. 표현의 정확한 재생은 기억에서 희미하지만 뜻은 대체로 이런 것이었다.


 


 


……일본 역사상 가장 비참했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의 몇 배의 피해를 입은 당산의 시민들은 정부가 지급한 천막 속에서 혈육을 잃고 모든 재화를 상실한 채, 계속 흔들리는 땅 위에서 다시 닥쳐올 재난에 직면해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서나 질서정연하게 행동하고 있었으며 난동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남을 해치려는 따위의 거동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딘가에서 사고가 났다는 경보가 알려지면 가족의 안위를 뒤로하고 그대로 뛰어나가 힘을 합쳐 그 방지ㆍ대책작업에 열중했다. 모두가 공동체 속의 개인의 위치를 확신하고, 개인을 위한 전체 사회(국가사회)의 보장을 확신하면서 자기희생적으로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다. 이런 현장을 목격한 나는 만약 이런 크기의 참사가 일본의 대도시에 발생했을 경우 일본인은 어떻게 행동할 것이며 그 집단생활 공동체는 어떤 모양을 드러내 보일 것인가를 혼자 생각하면서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뉴욕 시에서 12시간의 정전이 일어난 동안의 이 생활공동체의 모습을 미국의 신문ㆍ잡지ㆍ라디오 등은 한마디로 ‘지옥’(inferno)으로 표현했다. 모든 사람이 아무런 인간 상호관계에 대한 관심 없이 길거리로 뛰어나와, 혼란ㆍ무질서ㆍ살인ㆍ약탈ㆍ파괴ㆍ난동을 마구 자행해, 천만 시민이 예외없이 오직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서 천만 가지의 행동을 했다고 한다. 암흑은 인간의 짐승 같은 욕망의 무제한의 분출을 덮어주었고, 파괴되고 약탈당한 상점이 수천, 수만에 이르고, 체포된 사람만 2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누구도 자기 외의 것은 돌볼 생각이 없고, 암흑을 이용해서 남의 재물에 손을 대 그 전체 피해액은 계산도 할 수 없는 규모였다고도 한다. 그러기에 미국의 보도기관들은 미국 사회의 기본적 존재 양식과 미국이 지향하는 인간 행동의 도덕심과 행동원리에 대해서 절망적인 평가를 하고 있었다. 기독교가 지배하는 사회다. 박애ㆍ정직과 공동의식을(적어도 명분으로라도) 세상에 내세워 자랑하는 사회다. 그 시민의 물질의 양적 수준, 즉 GNP적 생활수준, 다시 말해서 개개인의 소유의 양으로 말하면, 뉴욕 시의 미국인은 당산시의 중국인 개개인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클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같은 극한상황에 직면해서 이와 같은 인간관계와 인간행동 양식의 대조적 차이가 생겨나는 이유를 캐물어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두 도시의 인간사의 생존양식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소유의 양보다도 소유의 질이다. 하나는 소유의 불평등이고 하나는 소유의 평등이다. 어째서 한쪽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위하려 하고, 한쪽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해치려는 것일까.물론 예외도 있었을 것이지만 일반적 현상은 그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유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필요한 만큼의 재화를 적은 대로 고루 소유하고 있다는 현실 조건은 도덕ㆍ심리적으로 사회적 인간애의 조건이 된다는 논리적 귀납이 가능하지 않을까. 바로 우리 자신의 사회에서 당산이나 뉴욕의 사태를 당했다고 가정하고 어떤 상태가 전개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일본 대사보다 편안한 심경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물어보고 싶어진다.


즉 어버이와 자식 사이의 사랑과 신의라는 제한적ㆍ내향적, 그러면서도 그것마저 불안정하고 이제는 불안해진 인간관계는 더불어 사는 모든 사람과의 인간애와 신의의 관계로 승화될 필요가 있겠다.


뉴욕 시민도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서는 그 혼란과 난동 속에서 서로 보호하고 믿으려 했을 것이다. 안에서는 그리 하고 나가서는 ‘만인이 만인을 향한 전쟁’의 인간 행동과 사회적 생존양식을 전개한다면 개인적 효는 사회적 ‘효’와 모순ㆍ대립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효나 충이나 공성(孔聖)의 본뜻이 그랬고 유교의 가르침이 그랬듯이 기본 정신은 ‘인’(仁)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은 구차한 교의해설이나 훈고학적 규명이 필요 없는 사랑의 마음이다. 어찌하여 그 인의 정신이 부자관계에서는 정당하고 개인과 타인,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에서는 이토록 ‘적자(敵者)관계’로 묵인되어야 하는가?


군인의 행동이 사회적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킬 때, 으레 우리 사회의 식자들이나 언론이 강조하는 것을 보면 ‘군규를 강화하라’는 힐책의 소리다. 이것은 군대도 가정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존재하는 큰 사회 속에 존재하는 변증법적 관계를 도외시한 소리다. 한 작은 단위 생존 형태는 그것의 원리와 성격을 규정하는 큰 단위 생존 형태의 일부로 존재한다. 그 모태적 생존양식의 기본원리와 성격 및 조건을 바꿈이 없이, 가정 내부의, 군대사회 내부만의 인간관계의 원리ㆍ조건ㆍ상태를 고치라고 해도 될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효의 도덕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특징은 바로 이에 대한 인식의 결핍이다.


뉴욕 시의 에피소드는 바로 철저한 소외 상태의 인간상을 말하는 것이다. 평소의 생존 형태에서 만인은 만인과의 적대자라면 그것은 ‘유적(類的) 소외’, 즉 같은 인류의 한 개체가 다른 개체와의 관계양식을 통해서 전체 인류와의 공감(simpathy)ㆍ사랑ㆍ믿음을 갖지 못함을 입증한 것이다. 모든 ‘타자’를 공격의 대상으로,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빼앗아야 할 ‘재화의 소유 주체’로 인식할 때, 순순한 본래적인 인간(인격)관계는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상품경제(즉 소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환가치를 토대로 하는 경제원리와 구조) 사회들에서 예외없이 부자간의 갈등, 남녀간의 타락, 사제간의 불신, 상하간의 반목, 부부간의 배신이 이른바 ‘문명 사회의 위기’로 경고되고 있다. 도덕주의자나 관념론자들이 주장하듯이 그 근본 원인은 도덕의 타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상품화된 인간’을 요구하는, 인간을 재화의 소유 단위로 해서 상호 기능하는 그 경제ㆍ사회적 원리와 구조에도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최근에 이르러 인간관계, 사회도덕의 파탄 현상을 그런 측면에서 치유해야 한다는 경종이 저명한 그리고 양심적인 많은 정치인, 학자들 속에서 점점 짙은 위기감을 띠고 울려 나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우리 사회의 식자들이 젊은이들의 작태에 실망했거나 불안을 느껴 ‘효’의 도덕을 복구해보려는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현 사회의 원리와 구조가 소외의 원리와 구조라는 사실에 지식과 의식이 미치면 그들의 강의도 좀 발전적일 수가 있을 것 같다.


한때 ‘청년문화’에 대한 논의가 많았다. 대체로 젊은이들의 행동양식에 불만인 사람들이 그것을 비난했고, ‘젊은이의 반기성도 덕적 자각과 독립심’이 그 청년문화를 낳는다고 변명한 사람들은 그것을 시인하는 경향이 있다. 옹호하는 논자들도 막연히 ‘소외’의 현상이라는 데까지는 인식이 미쳤지만 그 소외의 발상 근거가 무엇이냐에는 아무런 구명의 노력도 하지 않은 듯 보였다. 소외는, ‘결과적 현상’인 문화 형태의 추상적 개념체계의 내부에서 맴도는 논리로서는 해명도 극복도 되지 않을 것이다. 부자관계나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관계나, 그밖의 모든 인간관계에 대해서 애덤 스미스는 적절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는 상업사회이며, 그 성원은 누구나 상인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상인과 상인 사이의 관계는 물론, 상인과 소비자(그 사람도 다른 면에서 상인이지만)의 관계는 직접적인 ‘인간적’ㆍ‘인격적’관계가 아니라, 상품ㆍ재화ㆍ돈ㆍ수입ㆍ이익, 통틀어 물질적 매개로 관련지어지는 작용이 압도적이다. 인간과 인간의 분리가 바로 현대 상품경제사회의 기본 성격임을 일단 의식하면 효의 문제도 그 접근 방법이 달라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끝으로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효도덕의 전도사들이 효에 관한 이야기 끝에서는 으레 ‘충’과 결부시키는 태도다. 효사상을 사회 제도적 관계에서 볼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그 다음에 충이 나오는 논리는 오히려 당연하다. 그러면서 충에 결부시키는 단계에서는 애써 여러 가지 구차스러운 해설을 하느라고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보면 그들이 민망스러워진다. 효도덕은 충사상과 상하일치ㆍ표리일체를 이루는 도덕체계인데, 또 그런 체계 속에서만 효도 충도 합리화되고 정당화되는 것인데, 구태여 충에 이르러서 겸연쩍어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그것이 낯 간지럽다면 효 강의부터 하지를 말아야 할 일이다. 충에 이르러서는 현대 국가의 본질 문제가 선행적으로 규명돼야 하지만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난데없이 효도덕을 국민도덕처럼 선전하게 된 발상의 근원은 알 도리가 없다. 민주사회적 시민도덕이 요구되어야 할 자본주의 경제ㆍ사회적 발전 단계에 막 들어섰거나 그 초보적 단계를 지나가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어째서 수평적 인간관계가 아닌 수직적ㆍ상하적ㆍ종적 인간관계의 도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내세우는 슬로건은 누구도 정면으로 부정할 수 없는 효도덕이지만, 참뜻은 ‘충’도덕을 사회신앙으로 복고시켜보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혹시라도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가 있다. 원세개, 여홍원, 장훈, 장개석은 그런 면에서 훌륭한 역사적 교사가 되어준다. 히틀러도 서양 현대판의 교사다.


효는 아름다운 인간 감정의 행동적 표현이다. 효를 다하지 못한 필자 같은 인간이 죽는 날까지 그 못다함을 한으로 품고 고민할 것이다. 필자도 자식들에게는 효의 도덕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이 사회의 사회적 신앙교육의 근본 정신, 인간관계의 범주로 강조하려 할 때에는 그것만이 아닌 더 중요한 근본적 사실을 아울러 생각해보도록 권하고 싶어진다. 이런 생각이 나의 불효심 탓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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