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통일의 도덕성: 북한의 변화만큼 남한도 변해야 한다」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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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1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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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통일의 도덕성: 북한의 변화만큼 남한도 변해야 한다」(1998년 『당대비평』, 신화)


 


민족분단, 역사의 악마가 던져놓은 시련

오랜 세월 분단됐다가 남북이 다시 하나되는 통일국가는 마땅히 현재의(또는 해방 이후 누적된 현실로서의) 북한보다 월등히 우월하고 자유로운 민족공동체여야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통일국가는 해방 이후 누적된 현실로서의 남한, 현재의 남한과도 다른 인간다운 삶이 구현되는 민족공동체여야 한다. 해방 이후 반세기 동안 진행되어온, 남ㆍ북한의 국가적ㆍ사회적 존재 양식 중 그 어느 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쪽을 덮치는 방식의 재통합은 도덕적 파탄을 초래하지 않을까 두렵다.
지금 비록 IMF 위기에 처했다고는 하지만, 남한의 물질적 토대와 역량은 몇 해 안에 복구될 것이다. 21세기를 내다보는 장기적 추세로서 남한의 국가적 위상을 고려했을 때, 언젠가는 남한이 우월한 위상에서 북한과의 재통합을 이룩하게 되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남ㆍ북한 통일문제에 관한 여태까지의 논의와 현재의 연구가 그러하듯이, 통일의 정책과 접근 방법도 주로 남ㆍ북한 간의 ‘물질적 역량’의 압도적 우열을 토대로 추진되고 해석될 것이 분명하다. 즉 일방적인 물질적 생산력과 경제적 풍요가 통일문제를 푸는 방정식의 항수, 거의 유일한 그리고 절대적인 항수로 여겨지고 있다. 현재 무력으로의 통합은 일단 배제되고 있지만, 군사력 또한 남한이 압도적으로 우월하고 또 앞으로 더욱 그러할 물질적 요소다(미국 군사력을 제외하더라도 그렇다).
남한의 우리들은 이 같은 압도적으로 우월한 ‘물질적’ 위상에 올라앉아서 통일문제를 바라본다. 그런 까닭에 통일까지의 과정ㆍ수순ㆍ방법의 종류와 가치판단은 물론, 통일된 국가와 사회 속의 사람들 삶의 ‘도덕적 모습’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남한의 물질적 역량은 언젠가는 재통합된 나라에서 북한 지역 주민의 물질적 생활을 향상시키고, 나아가 국가적 경제통합을 이룩하는 데는 성공하리라 믿는다. 이른바 ‘통일비용’의 장기적 배분을 전제로 한다면, 부담은 적지 않겠지만 이루지 못할 일도 아니고 또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과제다.
남한의 물질적 통합 속에 들어온 북한 지역 동포들은 통일 후 10년, 20년, 또는 30년, 50년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차츰 만성적인 가난에서 벗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물질적 생활을 향상시켜주겠다며 국가의 권력과 제도로 그들에게 수락을 강요하는 남한의 경제체제ㆍ관습ㆍ가치관이 과연 그들을 진실로 행복하게 해줄 것인가? 나아가 현재 남한식의 경제적ㆍ물질적 생활방식과 가치관이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지배하게 된 국가ㆍ사회ㆍ사람들의 삶의 내용과 모습은 과연 행복할 것인가? 다시 말해서, 남한의 해방 후 누적된 국민생활의 사회적 경험과, 그 틀 속에서 형성되고 굳어진 인간형의 제반 특성이 남한식 물질문화 생활과 일체적으로 북한 지역 주민들에게 강요될 때, 그들은 과연 정신적ㆍ도덕적 그리고 인간적ㆍ정서적으로 ‘통일’을 감사할 만큼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인가? 통일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늘 이 질문은 마음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남들처럼 통일된 국가는 무조건 좋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
민족의 분단은 역사의 악마가 우리에게 풀 것을 요구하면서 던져놓은 시련이다. 그것은 악마가 예수를 유혹하기 위해, 40일간 광야에서 단식하며 굶주린 예수 앞에 나타나 돌을 들어 보이면서 “너의 믿음이 굳거든 너의 하나님에게 이 돌을 빵으로 만들도록 하라”고 시험하는 것과 같다. 이 민족은 분단되고, 피흘려 싸우고, 광야에서 고통의 50년을 힘겹게 살고 있다. 그러다보면 통일은 지상과제이고, 그에 대한 믿음은 돌을 떡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 유혹 아닌 시련에 직면해 있다. 운명의 악마에게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예수는 바로 통일 달성의 시련에 직면한 이 민족을 대신해서 답변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남한은 ‘떡과 밥’으로 북한을 통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집과 옷을 주어서 북한 주민들을 순치시키려고 하고 있다. 주로 ‘물질주의적 발상’과 가치관이며 방법론이다. 북쪽 주민들이 그것을 받기를 망설인다면 또 하나의 물질적인, 가장 순수하고 노골적인 물질력인, ‘무력’을 써서라도 받기를 강요할 것이다.
나는 비록 예수교 신자는 아니지만, 예수의 말씀 속에 우리의 통일문제에 대한 태도와 통일된 국가와 사회의 삶의 본질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 모든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물질적인 돈이나 빵이나 옷이나 집과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들보다도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을 말한다. 우리의 남ㆍ북 통일에 비추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남한이 북한에 주는 것이 밥이나 떡이나 집이나 옷이기에 앞서, 또는 적어도 그것들과 함께, 사회구성원인 사람과 사람이 사는 모습의 특성이 ‘주로’ 범죄적이거나 부패ㆍ잔인ㆍ반인간적이 아닌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 믿음, 나눔, 동정심, 형제애, 이웃 사랑, 동포애, 정직, 착함, 청렴, 협동, 검소, 책임감, 희생심 등으로 해석된다. 이것은 예수교에서만이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인간 집단에서나 ‘인간다운 삶’이기 위해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도덕적ㆍ윤리적 규범이며 그런 가치들이 이행되고 지배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라고 해석해본다.
만약에 앞으로 통일된 국가ㆍ사회의 인간관계가 주로 부패ㆍ탐욕ㆍ빼앗음ㆍ속임수ㆍ부정ㆍ사기ㆍ뇌물ㆍ퇴폐ㆍ이기주의ㆍ착취에 근거해 이루어지고, 잔인하고 무제한적 약육강식의 경쟁이 당연시되고, 속임수에 능한 자가 정직한 사람보다 잘살기를 보장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된 통일국가가 아닐 것이다. 한나라 한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현재의 남한 사회에서처럼 주야로 이기주의ㆍ불법ㆍ부정ㆍ사기ㆍ절도ㆍ강간ㆍ폭력ㆍ강도ㆍ납치ㆍ살인을 일삼고, 부모형제가 몇 푼의 돈 때문에 서로 목숨을 빼앗는 도덕과 윤리의 총체적 부재인 사회라면, 그리고 그런 것을 일상적으로 걱정하면서 살아야 하는 제도나 재산관계나 소유ㆍ분배 상태나 정신풍토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너무나 먼 사회다. 혹시라도 통일된 사회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두려움이 앞서고, 서로 믿을 수가 없고, 정직이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물질적 소유의 다과가 인간적 덕성보다 존경과 선망의 표적이 되고, 형제ㆍ시민ㆍ동포적 유대가 단절되고, 개개인이 자기 이익만을 좇는 분자화(分子化)된, 사람이 나눔과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오로지 빼앗음의 대상으로만 일반화되고, 또 그래서 일상의 생활에서 공포와 두려움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상태라면, 그래서 모든 인간이 소외(疎外)된 상태라면, 이 같은 사회상과 인간관계라면, 그토록 염원하고 추구한 통일의 의미란 무엇이란 말인가?
예수는 우리가 인간생활에서 밥과 떡만을 앞세우는 것처럼 우리들의 통일 논의와 방법에서 물질적 요소들만을 앞세우는 것에 대해 우리의 잘못을 경고하는 것 같다. 물질적 생산력과 수출액, 경제규모와 값싼 노동력과 협력이 아니라,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하는 무한경쟁, 합작투자와 증권과 주식과 GNP라는 빵만으로 통일의 과정과 통일된 국가의 모습을 생각하는 그 발상을 나무라는 것 같다. 북한 지역 동포에게 ‘떡’밖에 줄 것이 없는 남한의 위정자와 국민에게 남한이라는 국가와 사회, 그리고 그 속에서 나날이 펼쳐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양’을 똑바로 들여다보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밥과 떡 외에 북한의 국가와 사회와 주민들에게 줄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는 것 같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또 북한 주민에게 그 말씀을 나누어주어야 보람있는 통일이 되는데, 돈 몇 푼이 사람의 생명보다 소중히 여겨지는 남한의 국가와 사회, 사람들에게 무슨 도덕적 가치가 남아 있는가를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 같다.

통일은 빵과 떡으로 오지 않는다

통일된 단계에서는 현재 북한의 정치적 통치이념이나 체제와 방식은 대부분 청소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것들은 이미 20세기의 역사적 유물들로서 폐기돼야 한다는 판정이 난 것이다. 이것은 통일을 생각하는 모든 사람의 합의사항이고 나 자신의 신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전제하에서라도, 현재 남한의 정치형태가 그대로 북한 지역에 확대 재생산되고, 남한의 해방 이후 반세기 동안 누적된 정치적 작태가 통일국가의 그것으로 일반화될 것을 생각하면, 그 밑에서 과연 북한 주민이 통일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적이 의심스럽다. 50년간 누적되어온 현재와 같은 남한의 정치실태를 북한 주민들에게 그대로 강요하는 통일은 너무나 가혹하지 않을까? 남한의 정치적 진실을 총체적으로 그리고 집약적으로 체현하고 상징하는 역대 대통령과 국민의 관계양식, 그리고 그들의 행동과 종말을 생각하면 그 이상 물을 필요가 없을 성싶다. 정치(政治)란 ‘바르게 다스리는 것’이다. 남한에 해방 이후 ‘정치’가 있었는가를 물어봐야 한다.
일곱 명의 대통령 중에서 권좌에서 쫓겨났거나, 몰려났거나, 부하에게 암살당했거나, 국민 대학살의 범죄자로 투옥됐거나, 대통령 집무실에 외국제 초대형 금고를 들여놓고 돈만 챙긴 파렴치범으로 단죄됐거나, 국가를 파산시켰거나, 대통령만 되면 자식과 일가친척, 사돈의 팔촌까지 들러붙어 나라의 돈을 훔치고 치부하는…… 그래서 국민의 저주를 받고 퇴임 후의 안위를 예측할 수 없거나…… 이런 따위 ‘국가 원수’ 외에 북한 주민의 사랑이나 존경을 받을 만한 정치적 지도자가 있었는지를 물어볼 일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부도덕’이 아니라 차라리 ‘반도덕’이었다. 그것은 ‘부도덕’을 넘어서 ‘범죄’였다.
한국 정치의 범죄성과 부도덕성에 관해서는 여기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어떻게 이런 정치를 북한 땅에 들씌우는 것이 통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류 역사상 어떤 인간 집단도 ‘이상향’을 건설한 일이 없고, 이는 영원히 불가능하다. 내가 말하는 것은 다만 최소한 내지 ‘웬만큼’의 도덕성이나마 통용되는 정치형태다. 도덕성을 완전히 상실한 정치로서의 통일은 행복이기보다는 재난이며 비극일 수 있다는 우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사회적으로는 어떨까? 우리 사회는 부패ㆍ부정ㆍ타락ㆍ범죄ㆍ비인간화가 극에 달한 사회임이 분명하다. 기성세대들의 사회는 거의 구제불능의 ‘반도덕’ 상태다. 국가는 드디어 ‘극약처방’으로 ‘청소년보호법’이라는 것까지 발동해 어린이들의 만화, 영화, 가곡, 소설, 음반은 물론 컴퓨터까지 국가권력으로 통제해야 할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법적으로는 미성년자인 어린것들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형무소에 끌어넣기도 하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런 말은 참으로 하고 싶지 않지만, 그 같은 극약처방으로도 대한민국의 인간들을 도덕적으로 순화하는 것은 별로 효과가 없어 보인다. 그것은 다음의 사실이 웅변으로 말해준다.
이 나라의 역대 정권과 대통령들은 ‘청소년보호법’보다도 몇십배 가혹한 각종 극약처방을 써보았지만 모두 실패했다. 27년 전인 1970년, 이 나라의 총범죄 사건은 인구 10만 명당 933건이었다. 그것이 1986년에는 1,943건, 91년에는 2,843건이다가, 95년에는 3,119건으로 증가했다. 범죄를 퇴치한다는 군부독재 정권들의 온갖 강압조치들이 무색하게, 인구는 1.4배 증가했는데 범죄 발생은 3.3배나 급증했다. 그리고 그 죄질은 일관되게 잔인 흉악해지고 있다. 정부의 공식조사로 드러난 통계이지만, 이 나라 국민의 78퍼센트가 “일상생활에서 공포감을 느끼며 산다”고 답변하고 있다( 『한국사회지표』, 통계청, 1993, 318쪽). 이것은 ‘인간다운 사회’가 아니다. 어른들과 어른들 사회의 범죄성에 관해서 새삼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몇 해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십대 소년ㆍ소녀들, 중ㆍ고등학교 학생들의 범죄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십대 학생ㆍ학동 본인들은 물론, 전국의 학부형들은 어린 아들딸의 생명과 안전을 걱정하면서 공포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기성세대와 어른들이 닥치는 대로 속이고 훔치고 뺏고 죽여서 토막을 내면, 어린아이들도 어른들에게 질세라 강도질하고 강간하고 살인하고 생매장해버린다. 나라의 최고 통치자(들)에서부터 정직해야 할 국가기관 공무원들, 청렴해야 할 군대ㆍ경찰ㆍ검찰…… 등의 권력 집단들, 자본주의적 규칙을 지켜야 할 자본가ㆍ기업가ㆍ상인, 도덕과 윤리를 가르친다는 교육 기관 종사자들……에 이르는 사회구성원의 밑바닥까지 부패하지 않은 곳이 없고 범죄화하지 않은 곳이 없는 사회! 도대체 어떻게 된 사회인가? 분명히 ‘병든 사회’다. 그것도 보통의 병이 아니라 ‘중병이 든 사회’다.
이 나라의 각종 매스컴은 매일같이 이른바 ‘덕망 높은 사람’, 유식자, 전문가 들을 불러서 이 병의 원인 구명과 처방 및 대책에 관해서 토론을 벌이고 있다. 그것을 듣고 읽고 보고 있노라면 해방 후 반세기 동안 듣고 읽은 그 이야기의 되풀이다. 원인을 분석한 각종 이론도 해방 후 50여 년 간 한 가지도 달라진 내용이 없어 보인다. 그들이 해법이라고 내세우는 학교도, 교육도, 또는 경찰도 형무소도 무효임이 분명하다. 전통적으로 사랑과 인간됨의 보금자리였던 가정도 부모도 속수무책임을 자인하고 있다. 도덕과 윤리는 이 나라의 성인 사회에서 거덜난 지 오래인데 어찌 그것을 아들 손자들에게 요구할 수 있겠는가!
종교는 어떤가? 유감스럽지만 종교도 물신숭배의 병이 들어서 그런 기능과 역할과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남한의 각종 종교 신도는 국민 총인구의 51퍼센트다. ‘종교국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만하면 ‘종교적’ 국가라고 말할 수는 있다. 한 예로서 기독교의 경우 다음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세계 160여 개 나라의 기독교사회에서 규모가 특별히 큰 ‘거대 교회’ 50개 가운데 남한의 교회는 1ㆍ2ㆍ7ㆍ9ㆍ10ㆍ11ㆍ13ㆍ15ㆍ16위 등으로, 세계 ‘거대 교회’의 제1, 2위를 비롯, 10위권 내에서 절반인 5개가 남한의 교회이며, 전체 50개 중에서도 절반에 가까운, 자그마치 23개를 남한 기독교가 독차지하고 있다( 『크리스천 월드』, 1993). 부처님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서약한 종교인이 인구의 절반을 넘고, 하나님을 모신다는 교회의 크기와 수는 세계 160개 나라 중에서 으뜸가는데, 인간과 사회는 더욱 위선적이고 탐욕스럽고, 잔인하고 사악해지고, 부패하고 이기적이고, 범죄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이 처방은 종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톨스토이의 말이지만, “사람의 선악은 그(그녀)가 종교를 갖느냐의 여부에 앞서 그가 도덕적이냐 아니냐에 있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회의 도덕적 평가에서 종교의 유무는 결정적 기준일 수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북한에 종교가 없으니까 인간이 타락하고 사회가 부도덕하리라고 믿고 북한을 ‘구제해야 한다’고 외치는 종교인들이 많다. 서양 윤리학이나 기독교의 윤리관에서 말하는, 도덕은 종교를 토대로 해서만 성립한다는 이론이다. 서양인이나 기독교 신도들이 북한에는 기독교(종교)가 없으니까 북한 사회는 비윤리적 사회일 것이라고 단정하는 경향이 바로 그 이론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종교신자가 인구의 50퍼센트를 넘는 남한은 어째서 비윤리적이고 도덕이 파탄 난 사회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착각에 빠져 있지 않은지, 한 번쯤 톨스토이의 말을 거울 삼아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지금의 한국 종교들을 그대로 가지고 통일 후 북한을 ‘하나님 나라’나 ‘부처님의 극락’으로 ‘인도하겠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분수를 모르는 오만이 아닐까 싶다. 남한의 종교와 종교인들이 몇 해 동안 홍수와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과 북한동포들에게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빵과 국수와 떡을 제공하는 선행은 확실히 예수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랑과 자비의 표현이다. 하지만 그런 착한 종교인은 전체 종교인구 중 극소수다. 압도적 다수의 ‘종교신자’들은 지금도 ‘반공’을 외치면서 동포의 재난을 외면하거나 심지어 소리 높여 구호사업을 반대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굶어 죽고 있는 동포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은 모두 ‘빨갱이’들이다! 공산주의를 대치할, 빵보다도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 즉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회와 사람의 생존을 북한동포에게 전달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남한의 종교와 종교인들이 달라져야 하리라고 본다. 사회와 사람의 생존이 조금쯤은 부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합당하고, 웬만큼은 종교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도덕성이 회복되고, 그것을 북한에서 입증하기에 앞서서 바로 당장 남한 내에서 입증하는 일이 더 시급한 과제가 아닐는지, 이렇게 생각한다.

물질적 풍요와 높은 도덕성이 함께하는 나라

남한의 우리들은 정치적ㆍ개인적 자유와 물질적 풍요와 대량소비의 수준에 정비례해서 사회와 인간의 도덕성이 높아질 것으로 믿는 경향이 있다. 빵이 풍부해질수록 그에 비례해 ‘하나님의 말씀’도 충족될 것이라는 견해와 희망을 갖고 있다. 왕년에 사회주의와 소련 등 국가와의 경쟁에 몰두했던 자본주의 총본산인 미국의 정치가ㆍ경제학자 들이 이른바 ‘풍요한 사회’(Affluent Society)를 자랑했던 논리다. 다시 말해서, 물질적 생산력의 우월성을 입증한 자본주의가 도덕성에서도 사회주의에 우월하리라는 믿음이다. 이 논리에서, 남한의 물질적 우월성이 통일국가의 북한 주민들에게는 물론, 통일국가 판도를 통틀은 자본주의적 민족공동체의 사회와 사람들에게 자동적으로 높은 도덕성을 실현시킬 것으로 낙관하는지 모르겠다. 유감스럽지만 ‘자유+물질+종교=행복’이라는 방정식이 반드시 성립되지 않는 본보기가 미국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마치 낙원처럼 착각하며 우리의 미래 생활의 목표처럼 여기는 자본주의 종주국인 미국의 사회는 어떤가? 금세기 미국의 역대 대통령은 예외없이 취임연설에서 기독교정신을 강조하고 ‘범죄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제도는 어떤 방법으로도 범죄를 줄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했을 뿐이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레이건 정권 시대다. 모든 사회주의적인 것을 악(惡, Evil)으로 매도한 미국식 ‘극우–반공–자본주의적 도덕’의 화신이었던 레이건은 미국이 소련이나 사회주의 국가들보다 범죄가 많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취임 첫날에 ‘범죄와 마약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그의 임기 중 최대 업적을 위해 특별예산 300억 달러와 특별경찰 20만 명의 증원을 단행했다.
그렇다면 성과는 어땠을까? 제로, 아니 오히려 범죄와 마약과 폭력이 더욱 늘어났다. 예컨대 플로리다 주의 범죄 발생률은 10만 명당 8,228건, 뉴욕 주는 5,776건을 기록했다.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한 미국이라는 사회의 범죄율이 세계 최고인 것이다. 이는 물질(돈, 사유재산)이 ‘신’으로 숭상되어 인간(가치)을 우선하는 사회의 일반현상이다.
클린턴 대통령 치하의 현재의 미국도 다름이 없다. 클린턴도 레이건과 마찬가지로 취임 초인 1994년, 야심적인 범죄ㆍ마약퇴치정책을 개시했다. 그 계획을 위해서 302억 달러의 예산이 드는 ‘범죄방지법’을 국회에서 승인했다. 미국 사회의 각종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 순찰경관만 10만 명을 또 증원하고, 19가지 종류의 각종 무기를 불법화했다. 또 많은 수의 교도소를 증설했다. 그리고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범죄의 종류를 50가지 이상 새로 추가하는 등, 무시무시한 반범죄 태세를 강화했다. 물질적 생산력은 인류 역사상 최고이고, 총체적인 경제적 풍요는 어느 국가도 따를 수 없는 미국이 그 물질적 토대 위에서 총력적인 반범죄 계획을 전개했다. 이만하면 미국 사회의 인간성과 도덕성은 단시일 내에 순화될 것으로 기대되었고, 정부도 그렇게 장담했다.
국가와 체제의 총력을 투입한 반범죄 계획이 집행된 6개월 후의 미국 정부 공식통계는, 전국 형무소에 수용된 범죄자 수가 오히려 4만 명이나 증가, 101만 2,851명에 달해 미국 역사상 최고기록을 세웠다. 그 수치는 레이건 정부가 총체적 반범죄 전쟁을 추진한 1985년과 비교했을 때 정확히 두 배나 많은 수치였다. 물질주의 철학과 사상의 소유자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레이건은 자본주의 제도와 사회 그 자체의 범죄 경향적 성격을 인식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물질적 풍요와 법률적 강제로써 미국 자본주의 사회와 인간의 도덕성이 고양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소련과 그밖의 모든 사회주의 국가와 모든 사회주의적인 것을 통틀어 ‘악’(惡)으로 규정하고 매도했던 미국 자본주의의 영도자 레이건의 임기가 끝나던 1989∼90년 1년간의 통계를 보면, 범죄는 오히려 증가했고, 형무소의 수용인원은 8만 명이나 늘었다. 이는 미국 역사상 12개월 동안에 발생한 범죄자의 최고 증가치였다. 클린턴 대통령의 미국도 마찬가지다. 302억 달러의 예산과 특별경찰 설치, ‘사형’법의 강화를 비웃듯이, 클린턴 정부 12개월 동안에만 범죄자가 7만 1,000명이나 증가, 미국 근현대 역사상 레이건 시기에 이어 두 번째 증가 기록을 세웠다. 국가 공권력을 총동원해 ‘범죄와의 전쟁’을 전개한 레이건 정부와 클린턴 정부에이르는 1994년의 청소년범죄자는 10년 전보다 오히려 1년만에 자그마치 260퍼센트나 증가했다. 그 후에도 범죄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 모든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나라에서 인구 10만 명 이상의 200개 도시 중 청소년 범죄 문제와 기성세대의 범죄로부터 보호를 위해 18세 미만 청소년의 야간 통행금지 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도시가 146개나 된다. 전국의 카운티(郡) 내의 소도시를 합할 경우, 통금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지역은 1,000개도 넘는다. 이런 사실을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물질적 소유(돈)를 인간 행복의 척도로 삼고, 이기심의 충족을 동기와 목적으로 하고 사회운영의 기본원리로 삼는 생존양식에서는 불평등한 소유로부터 소외된 사람은 ‘빼앗는 행위’로 물질주의적 사회 운영원리와 일체화하려는 강한 유혹을 받게 마련이다. 즉 그런 사회는 범죄가 체제의 불가결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 그 사회에서는 사람(개인)의 가치가 금전적으로 계산되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궁극적으로는 상호간의 물질적ㆍ금전적 이해득실의 계산으로 처리되는 관계양식, 즉 철저한 ‘게젤샤프트’적 사회일 수밖에 없다. 그런 본질의 사회에서는 아무리 종교가 사회의 ‘소금’이 되고 ‘촛불’이 되려고 해도, ‘범죄와의 전쟁’에 아무리 큰 예산을 들여도 패배할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부패와 범죄와 이기주의적 잔혹성을 줄이려 하거든, ‘돈’이 지고(至高)의 가치판정자가 아닌, 어느 정도나마 ‘게마인샤프트’적인 사회원리를 채택해야 한다.

중공의 당산과 미국 뉴욕 시의 교훈

1976년, 중공의 주요 공업도시의 하나인 인구 70만의 당산(唐山)은 중국 역사상 최악의 규모라는 지진으로 마치 핵폭탄 세례를 받은 도시처럼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런 참변 속에 놓인 시민들이 행동하는 모습을 세계의 보도진이 다투어 전한 뉴스는 진한 감동을 전 세계에 던졌다. 현장을 찾아서 목격한 어느 외국 대사의 목격담을 들어보자(일본 대사가 귀국한 뒤 쓴 글).
“땅이 흔들리고 건물은 계속 허물어진다. 화재는 연옥같이 건물을 태워나간다. ……그런 속에서 중국인들은 질서정연하게 행동하고, 난동을 부리거나 남을 해치는 일이 없다. 진동과 파괴와 화재가 계속되는 속에서 불행을 당한 이웃을 위해 달려나가고,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는 행동은 바로 자기 가족을 위하는 것과 같아 보였다. ……누구나가 공동체 속에서 자기희생으로 남을 위하고 전체를 위해 행동했다. 우리나라의 도시에서 이런 대지진이 일어날 경우,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상상해보면서 나는 너무나도 큰 충격과 감동에 말없이 숙연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공교롭게 몇 달 뒤에 미국의 뉴욕 시에서 12시간의 정전이 있었다. 세계에서 제일 부자 나라의 대도시에서 전깃불이 꺼진 가운데 인간들이 행동한 모습을 미국의 신문들은 한마디로 ‘연옥’(inferno)이라고 표현했다. 남이 자기 얼굴을 확인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 순간, 모든 인간이 밖으로 뛰어나와 혼란ㆍ무질서ㆍ약탈ㆍ파괴ㆍ방화ㆍ강간ㆍ난동ㆍ살인을 일삼았다. “1,000만 미국인이 1,000만 가지의 행동을 했다”고 한다. 유명한 사건이다. 세계는 그 모습에 전율했다. 하나는 천재지변의 불가항력적 사태이고, 다른 하나는 다만 사람의 실수일 뿐인 일시적 정전 상태다.
미국의 뉴욕 시민과 중공의 당산 시민의 물질적 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기독교 없는 중공 도시의 시민들은 예수의 십계명대로 행동했다. 기독교 사회임을 자랑하는 미국 도시의 시민들은 예수의 십계명을 배반했다. 부자 나라의 시민들은 남의 것을 빼앗고 강간했다. 세계에서 어쩌면 제일 가난한 사회의 당산 시민들은 자기 것을 버리면서 이웃을 도왔다. 그것은 너무나도 엄청난 인간행동의 규범적(질적) 차이였다. 같은 종(種)에 속한 인간들의 행동양식이라고 하기에는 그 차이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고 한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든 것일까? 이기주의를 원리로 삼는 자본주의와 공동의 이익을 원리로 삼는 사회주의 도덕의 차이일까? 아무리 풍요해도 불평등할 수밖에 없는 재산 소유제도와 가난하지만 평등 위주의 소유제도의 차이일까? 상부구조인 종교ㆍ법률ㆍ교육ㆍ가치관의 체계는 하부구조인 물적 생산과 소유형태의 반영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동양과 서양의 차이일까? 미국과 중공의 차이일까? 아니면 다만 당산과 뉴욕 시민들에 국한된 차이일까?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고민한다. 중국은 지금 미국식의 자본주의를 도입해 물질적 풍요를 이루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시민들은 코카콜라에 입맛을 들였고, 지식인들은 더 절묘한 자본주의식 이윤극대화의 기업경영을 위해서 MIT 대학 경영학 교과서를 들고 밤을 새운다. 자본원리와 물질주의의 신이 도덕주의와 평등사상을 추방했다. 지금 중국 사회는 타락과 부패, 사기와 횡령, 온갖 범죄와 인간소외의 깊은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소련과 동유럽에서도 같은 현상을 본다.
나는 그런 관점과 관심에서 몇 해 전 통합된 통일독일의 구동베를린 시와 구동독 지역을 제법 널리 여행했다. 그때 노상에서 판을 벌이고 동포를 상대로 사기 치는 사기꾼, 네다바이꾼 들을 무수히 목격했다. 대도시뿐 아니라 읍ㆍ면급 거주자들도 그랬다. 외국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부패와 범죄의 일반화를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의 관심을 질문으로 표현했다. “통일 전 사회주의시대의 동독에서도 이랬냐?” 며칠 동안 여행 안내를 맡아준 서독연방재판소 판사 B씨는 이렇게 답했다.
“사회주의 동독은 자본주의 서독보다 물질적으로는 뒤떨어지고 1당 독재하에서 정치적 자유는 억압됐던 반면에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한결 선량했다. 서로 속이고 뺏고 강간하고 죽이는 일은 극히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자본주의는 구동독인들에게 오른손으로는 자본주의적 자유와 풍요의 보증서를 넘겨주는 것과 동시에 왼손으로는 인간적 부패와 타락, 사회적 범죄의 보증서를 넘겨주었다.”
B씨의 개탄은 잠시 나를 깊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B판사의 소개로 나와 함께 하루 동안을 대화한, 구동독 판사였고 현재도 로스토크 시 지방 판사인 크링크 씨는 B판사의 이 지적을 시인했다. 그리고 사회주의 치하에서 몰랐던, ‘돈’이 매개하거나 돈이 행위의 목적인 각종 범죄의 급증을 심각하게 개탄하고 걱정했다. 이같은 사실은 구소련과 동유럽 국가들, 중국 등 자본주의 세례를 받은 나라들에서 한결같은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세계는 목격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자본주의에 문호를 개방한 이후 10년 사이에 범죄사건이 37배나 증가했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이는 ‘돈’과 ‘재물’을 ‘신’으로 모시게 되는 과정에서 인간과 사회의 공통적 현상인 듯하다.

형제의 눈 속의 가시’, 내 눈 속의 대들보

이른바 ‘이질화’(異質化)도 통일의 도덕성과 밀접하게 결합된 문제다. 남한에서는 북한의 생존양식이 총체적으로 ‘이질화’ 됐다고 비난한다. 북한에서는 남한의 가치관과 생활양식이 자신을 상실해 전적으로 ‘양키화’ ‘비인간화’됐다고 개탄한다. 우리는 북한의 이질화만을 나무라는 나머지 우리 자신의 이질화된 모습에 눈이 멀지는 않았는지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 형제의 눈’ 속의 가시는 보면서 자기 눈 속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는 우리가 된 것은 아닌지.
우리는 남ㆍ북한을 비교하면서, 남한은 하나도 이질화된 것이 없는 것처럼 북한만이 이질화됐다고 주장한다. 말이 달라졌다, 행동이 다르다, 먹고 노는 것이 남한과 다르다, 그래서 북한은 이질화 됐다고 한다. ‘이질화’라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서 어떻게 달라지는 것이 달라지는 것이고, 또 이질화의 판정 평가의 기준은 무엇일까? 이것도 우리는 생각해본 일이 없다. 다만 남한과 같지 않으면 ‘이질화’되었다고 단정한다. 피자나 파이를 안 먹고, 코카콜라를 안 마시고, 양키식 섹스 노래를 안 부르니까 이질화됐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 사회가 1인 숭배, 1당 독재로 공산당이 모든 인민대중의 선택권과 자율성과 결정권을 대리하고 행사한다. 이런 것은 정치적ㆍ체제적 이질화이며, 마땅히 파기되어야 한다.
그 전제하에서 남한의 체제와 정치와 지도자ㆍ권력자 들은 어떤가? 해방 후 오늘날까지 우리의 정부와 지도자와 정권이 인민ㆍ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고, 제대로 된 정치(바르게 다스리는 뜻의 ‘政治’)를 해보고, 제대로 물러나고 제대로 들어온 일이 있는가? 남한 국민이 가장 혐오하고 멸시하고 증오하는 대상이 정치가와 한국의 정치다. 총체적으로 이질화된 것이다. 우리의 생활양식, 옷 하나 입는 것만 보더라도 우리의 한복은 예식장이나 가야만 한두 사람 찾아볼 수 있다. 또 1년에 한두 번 설날이나 추석 때 밖에는 볼 수 없다. 그러나 북한은 「북한의 창」 등 우리의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가 검열하고 편집해서 선택적으로만 보여주는 텔레비전 상영물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민족의상을 상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언어는 소련(러시아)어나 중국어로 더럽혀진 잡탕이 된 일상어가 아니라 우리의 순수한 조선말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 남한의 언어문화는 어떤가? 오히려 북한은 민족문화의 순수성을 지나치게 고수하려는 이념 때문에 잘못 가고 있는 것이다.
같은 이치로 우리는 우리 민족주체적인 언어문화와 사상과 긍지와 주체성, 도덕과 습관 등 모든 것을 너무 쉽게 버리고 오로지 미국화ㆍ서양화한 것을 발전으로 착각하고 있다. 한때 미국과 미국적인 것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면 반공법으로 감옥에 가야 했던 것이 남한의 실정이다. 지금도 그런 언행은 ‘좌경’이니 ‘반미’로 규정되고 있다! 이것은 민족 얼의 ‘이질화’가 아닐까? 남한의 총체적인 부패ㆍ부정ㆍ타락ㆍ범죄화, 나눔과 서로 도움보다 서로 속이고 빼앗음이 일상생활화한 사회, 보험금 몇 푼을 타먹기 위해 남편이 아내를 청부살인하기를 서슴지 않고, 아비가 어린 자식의 손가락을 자르고, 자식은 유흥비를 위해서 부모를 때려죽이고도 양심의 가책을 안 느끼는 사회풍토는 이질화되지 않은 사회인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토막내고, 생매장하기를 다반사로 여기는 사회, 젊은 여성은 언제나 어디서나 강간의 공포에 시달려야 하는 인간관계와 이런 생존양식은 ‘이질화’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남ㆍ북한의 이질화 문제를 논하려면 먼저 냉엄하게 자기비판과 자기반성을 하고, 그러고 나서 상대방의 허물을 찾아야 공평하고 공정한 답변이 나오리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 이유와 근거로, 북한은 자유를 상실한 자신들의 인간생존의 이질화를 철저히 반성하지 않고는 남한의 이질화를 나무랄 자격이 없다.
어떤 사회의 일상적 생활양식과 문화의 내용이 주로 섹스와 관능적 쾌락주의와 허영과 사치가 지배적일 경우, 이것은 ‘이질화’된 인간과 문화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수없이 많은 현상 중에서 한 가지 생활주변의 실례를 보자. 우리 사회의 30여 종의 여성 월간잡지들은 한결같이 600페이지 내외의 부피인데, ‘문화’의 이름에 합당한 내용이 얼마나 될까?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진정으로 교양, 취미, 인간 덕성, 가정, 교육, 육아 등 ‘문화’라고 이름할 만한 글을 찾아보기 어렵다. 최고의 종이에 최고의 인화술로 촬영된 호화찬란한 사진으로 꾸며진 내용의 대부분이 사치와 섹스와 관능적 쾌락과 사치와 낭비를 선동하고 자극하는 소비문화이고 상업주의다. 한마디로, 철두철미 ‘물질주의’적인 성향과 내용이다. 이런 ‘여성문화’로 통일국가의 전체 여성의 삶이 물들여진다면 이것을 우리가 바라는 통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1997년 여름, 우리는 정부당국이 ‘범죄 퇴치’ 정책의 일환으로 서울 시내의 길음동, 화양동, 신길동…… 그밖의 여기저기 지역에서 성업 중인 사창(아니 차라리 공창)가를 강제로 폐쇄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목격했다. 조물주와 부모가 피창조물 중 으뜸가는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빚어준 여성의 육체와, 진정한 사랑의 매개와 성스러운 종의 보존을 위해서 갖추어준 생식기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반인간적 직업을 숙정하겠다는 뜻에서였다(어쩌면 그렇게 순수하고 고귀한 동기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것을 업으로 삼는 포주들이, 그런 행위를 “자본주의 경제의 떳떳한 영업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사유재산 침해”라고 항의하는 장면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백주에 반나체로 대로상에 뛰어나온 사창가 여성들이, 자신들의 “직업 선택권에 대한 침해”라느니, “인권탄압”이라고 거세게 항의하는 장면이었다. 물론 처해 있는 입장의 차이에 따라서는 한마디로 비난할 수 없는 문제이기는 하다.
그런데 그보다도 중요한 사실이 있다. 행정 당국이 그 사창(공창) 구역 철거시책을 단행하면서 ‘비공식적 숫자’라는 전제하에 신문에 제시한 바로는, 철거대상의 ‘창녀’들처럼 육체의 성적 매매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아 살고 있는 젊은 여성이 전국에 250만 명 정도라는 사실이다. 보건 당국은 지금까지 성매매와 관련된 직업 및 준직업적 여성들에게 실시해온 정규 성병검사 제도를 인권침해라는 이유로 1999년 7월 1일부터 폐지하기로 했다고 발표하면서, 그에 해당하는 여성이 190만 명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이 공식수치에서 누락된 여성들이 적지 않다고 믿을 만한 상황 증거가 유력하니 250만이라는 숫자가 과장된 것이 아닌 성싶다.
나는 호기심에서, 정부에서 발행한 인구통계 자료집에서 ‘연령별 인구’란을 찾아보았다. 육체의 성적 기관, 그 기능으로 남성을 상대할 수 있는 연령을 20세에서 39세까지로 어림잡으면, 이 연령대에 드는 한국 여성의 총수가 815만 1,000명이다(1995). 이 인구는 전체 여성 인구 2,218만 명의 36.74퍼센트가 된다( 『한국의 사회지표』, 통계청, 1996). 신문에 보도된 것처럼 ‘매춘’ 내지 그에 준하는 성행위에 종사하는 여성을 250만이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젊고 꽃다운 한국 여성 약 815만 명의 31퍼센트에 해당하는 여성들이 이른바 넓은 의미의 ‘윤락’ 여성이라는 얘기다. 현실적으로는 십대 미성년 여성의 그런 행위가 자못 사회문제화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그 연령대에서 점하는 비율은 감소하겠지만 그런 여성의 절대수는 200만을 훨씬 넘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사회생활 감각으로 판단하건대 이것은 확실히 과장된 숫자인 듯하다. 그러나 그런 여성이 ‘굉장히 많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돈’을 위해서 ‘몸’을 파는 비인간화된 여성들이 많은 사회가 건전한 사회일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 현실은 남한 여성의 소외의 차원을 넘어서 ‘비인간화’의 문제다. 바로 이질화된 여성상이다.
문제는 또 있다. 1961년 5월, 박정희 육군소장 등이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아서 일으킨 군인 쿠데타 직후, 그들은 한국 사회의 부패를 척결하겠다고 대대적인 ‘사회정화’운동을 전개했다. 그중의 하나가 전국의 ‘사창굴’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그들에 의해서 ‘성적 매매로 생활한다’는 이른바 ‘윤락여성들’이 군대와 경찰에 의해 강제로 수용ㆍ구속 또는 귀향 조치되었다. 그때 쿠데타 당국은 그런 여성의 수가 전국에서 37만 명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얼마나 정확한 숫자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아마도 군인들의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과장되었을지도 모른다(‘보릿고개’가 냉혹한 경제적 현실이었던 1961년 당시에는, 호구지책이 없는 많은 여성이 살기 위해서 그런 행위를 택한 것이 사실이었다). 어쨌든 1961년 당시의 전체 여성 인구 약 1,300만 중 그런 여성이 37만(2.84퍼센트)이었던 것에 비해, 1995년 현재의 총여성 인구 약 2,200만 중에 200만이 ‘몸을 파는’ 여성이라면 그 비율은 9퍼센트, 만약에 비공식 추산의 250만이라고 한다면 11.4퍼센트가 된다.
나는 이 같은 숫자들이 정확한 통계학적 진실이라고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이 나라의 여성 10명 중 1명이 그런 부류의 여성이라고 믿고 싶지도 않다. 다만, 우리나라 여성(사회)의 실태와 도덕적 성격의 일면을 설명해주는 자료로서, 남ㆍ북 사회의 ‘이질화’ 문제를 생각할 때 북한 쪽만을 비난하는 우리의 일반적 경향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것뿐이다. 젊은 여성이 고귀한 육체를 상품으로 해 남성에게 성적 쾌락의 수단으로 제공함으로써 하룻밤에 정직한 직장여성의 한 달 수입보다도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사회는 인간소외와 이질화의 극치일 뿐만 아니라, 경제제도로나 사회도덕으로나 완전히 가치가 전도된 사회다. 남한의 국민과 북한의 인민이 각기 상대방과 다른 차원(측면)에서 ‘보편적 소외’의 상태에 빠져 있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질화’는 남ㆍ북한이 피장파장이라고 해야 한다. 굳이 어느 쪽이 더 이질화됐는가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고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 얼굴에 침을 뱉으려 하다보면 그 침이 제 얼굴에 떨어지는 수치를 당할지 모른다. 남ㆍ북 쌍방이 각기 자기반성을 하고, 각기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되어야 동서독처럼 무리 없이 하나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남한과 북한은 둘 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리고 그 추악함에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다.

북한 경험의 변증법적 융합으로서의 통일

북한 사회는 오랫동안 1인 숭배, 1당 독재, 폐쇄적 사회통제, 개인적 사유의 억제 등 어느 모로나 우리가 수용할 수 없는 체제와 제도임이 틀림없다. 게다가 국민 총생산의 단순 비교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듯이, 경제적ㆍ물질적 생활은 현대적 문명사회의 모습이 아니다. 최근의 대홍수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물질적 생산력에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따를 수 없다.
그런 반면, 북쪽 사회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삶의 모습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크게 다른 면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을 버리고 온 귀순자들조차 북한 사회의 인간적 순수성, 도덕성, 정직성, 순박함 등에 대해서는 남한 사회와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비교적 가난하지만 나눔의 미덕, 이웃과의 협동심, 지금도 일반적 생활형태인 대가족적 생활에서 오는 혈육적 윤리 등이 그 사회 사람들의 삶의 특징으로 지적된다. 그들은 겨레 고유의 문화와 관습을 아끼고 가꾸어가려는 민족문화적 긍지가 뚜렷하다. 이런 정신은 분명히 남한이 따를 수 없다.
우리가 선입감을 버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살펴보면, 남한 사회가 잃어버렸거나 잃어가고 있는 여러 가지 아름다움을 그쪽에서 애써서 가꾸고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조금 단순화해서 말하면 물질적으로 우월하고 종교를 자랑하는 남한 사회는 ‘인간의 물질화’ 경향이 심화되는 반면,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종교가 없는 북한은 ‘인간의 종교화’를 지향하는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달리 표현하면 남한 사회를 ‘물질적 풍요 속의 인간적 가난’이라고 한다면, 북한 사회를 ‘물질적 가난 속의 인간적 풍요’라고 말할 수 있는 일면이 없지도 않다.
나는 어쩐지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와 역사적 경쟁에서 일방적으로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자본주의가 사실은 절반은 이기고 절반은 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패도지한 것으로 폐기되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게 절반은 지고 절반은 이기지 않았나 싶은 장면들을 본다. 이런 인식과 관점은 남ㆍ북한의 통일 형태와 앞으로의 남북관계에서 설자리가 없는 것일까? 어떤 사회의 물질적 생산구조 양식과 정신ㆍ문화ㆍ도덕 양식을 각기 독립된 것으로 서로 떼어서 생각하는 사고는 비변증법적이고 비과학적이다. 하지만 남한의 자본주의적 물질적 생산력의 우월성과 정치적 및 개인적 자유에 북한의 사회주의 인간학적 공동이익 우선주의 도덕과 민족문화 생활양식에 대한 강렬한 긍지와 ‘자존’(自尊)의 가치를 지혜롭게 배합하는 방식에서, 통일방법과 통일국가의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의 해답이 얻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긴 통일의 과정에서, 남한적 경험과 북한적 경험의 변증법적 융합으로써 물질적 충족과 도덕적인 인간–사회 가치가 어울리는 통일민족 공동체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것은 북한의 제반 개혁과 버금가는 남한 사회의 자기개혁을 전제로 해서 비로소 가능하리라고 믿는다. 그러기에 나는, 남한의 우리가 할 일은 북한 동포들을 “공산주의 지옥”에서 구해주겠다고 중세기의 십자군을 자처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도 먼저 남한의 우리 사회와 인간을 자본주의의 악덕에서 구해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당대비평』, 1998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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