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권력의 역사와 민중의 역사: 장개석 시대」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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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1-01-21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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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권력의 역사와 민중의 역사: 장개석 시대」(1972년 『다리』, 전논)


 


 


역사에서 배우려는 마음가짐


 


민중에게서 버림받은 ‘영웅’처럼 가련한 신세는 없다. 민중에게 버림을 받은 사실을 모르고,아직도 영웅의 환상을 버리지 못한 채 권력으로 민중을 억압하여 권력의 유지나 권좌의 복귀를 꿈꾸는 ‘영웅’의 모습에는 일말의 연민이 따른다. 그러나 그 영웅의 소유 물일 수 없는 백성이나 민중의 입장에서는 그와 같은 감상에 앞서는 준엄한 논리가 있다. 그것은 민중이 만드는 것이며, 민중에게 버림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그에 앞서서 그가 민중을 배반했다는 엄연한 인과응보의 논리다.


엘바 섬과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쫓겨난 나폴레옹도 민중의 뜻을 따를 때에는 ‘영웅’이었다. 그러나 마르세유로 북진하는 나폴레옹과 세인트헬레나 섬의 나폴레옹 사이에는 프랑스 민중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큰 역사적 발전이 있다. 그리고 ‘황제’를 섬기지 않으려는 프랑스 민중의 ‘역사의 교훈’은 150년 후 드골을 그 절정의 시점에서 거부해버리는 전통으로 굳혀졌다.


장개석도 한때는 중국 민중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대만(臺灣)섬의 장개석은 40년 전 광동(廣東)에서 북벌(北伐)혁명군을 몰아 남경(南京)과 북경(北京)에 입성하던 그 영웅은 아니다.


세인트헬레나와 대만이라는 섬은 ‘민중의 등에 업힌’영웅이 ‘민중의 등에서 굴러 떨어진’영웅으로 묻히는 무덤이라는 상징으로 비친다. 그리고 한 사람의 황제와 총통이 권력의 성쇠사를 엮는 사이에도 ‘민중’은 변하지 않고 그 땅 위에서 몇십 명의 영웅을 등 위에 올려놓기도 하고 흔들어 떨어뜨려버리기도 하는 길고 긴 ‘민중의 역사’를 엮어나간다.


‘장개석’이라는 영웅의 일대사를 통해서 우리는 ‘민중의 논리’를 배우게 된다. 어떤 측면에서는 진정으로 위대했던 근대 중국의 한 영웅을 아끼는 마음이 간절할수록, 그가 대표했던 권력 과정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교훈을 준다.


이 작업에 가장 끼어들기 쉬운 위험성은 우리의 정치적 편견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최근에는 과거의 역사와 눈앞의 현실이 어느 정도 공정하게 그리고 사실대로 비춰지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편견과 선입감이 판단을 지배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와 같은 편견과 선입감은 우리 한국 국민이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국민적 현명을 얼마나 가려왔는가를 생각할 때, 싫건 좋건 우리는 한 영웅과 민족 또는 민중의 역사를 허심탄회하게 살펴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검토 과정에 불가피하게 관련된 장개석과 모택동의 개인적 주장이나 저서는 다같이 인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가능한 한 광범위한 제3자적 관찰과 공식문서를 토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


 


손문 혁명의 계주자


 


장개석이 대표하는 중국은 중국 근대사에서 제2혁명이라고 불리는 1926~27년에 시작하여 국민당 정권이 1949년 5월 본토를 쫓겨나 대만으로 낙향하는 파란 많은 20여 년을 말한다.


중국혁명은 광동에서 봉화를 올린 손문(孫文)의 혁명을 포함해서 역사적으로 화남에서 화북으로 향하는 운동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중국의 자연적 조건으로 하여 경제적 중심은 농업이 발달한 양자강(장강) 유역과 그 이남인데 비해, 정치적 중심은 황하 유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북방 변경에서 흘러나오는 병력을 토대로 한 역사왕조의 전통적 정치판도의 확장운동이 화북에서 화남을 지향한 것과, 그 기존정권에 대항하는 혁명 에네르기가 북방 지향적이었다는 특성에서 손문의 근대혁명과 그것을 이어받은 장개석의 북벌통일혁명의 어떤 성격과 운명을 이해할 수 있다.


손문의 ‘미완의 혁명’을 계승한 장개석이 1926년 북벌군 총사령관으로 광동에서 남경과 북경을 향해서 추진한 혁명도, 그런 뜻에서 기본적으로는 북방 정치권력을 구성하는 관료ㆍ군벌, 금융 및 산업 소유계급에 대한 농민적 혁명이어야 했다. 그러나 국민당은 끝내 그것이 타도하려는 봉건적인 관료, 군벌, 재산계급 및 지식인과 제휴한 형태와 사상적 토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실제로 중국의 ‘기본계급’인 농민과의 이해관계에서 어디까지나 대립적인 당시의 지배계급에 정치적 통일과 사회혁명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초기에는 볼셰비키혁명의 본을 받아, 있지도 않은 도시프롤레타리아트와 지식인에의한 혁명을 추진했다.1924년 손문에 의해서 이루어진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제1차)이 북벌(1927)을 완수한 장개석과 국민당 우파에 의해서 처참하게 깨어지고,전국에 걸쳐거의 20만에 달하는 살상자를 내고서야 농민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만약 장개석과 국민당이 지배계급의 이익을 옹호하지 않고 노동자와 농민에 의거하는 혁명세력이 되었다면 그 후의 중국혁명 과정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하는 것은 흥미 있는 가설이기는 하지만 별로 실제적인 가정일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의 저명한 중국혁명 연구가인 벤자민 슈워츠와 함께 다음과 같은 가정을 세워보는 것도 중국혁명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역사의 막이 내린 오늘에 서서, 국민당 정권이 1927년에서 40년대에 걸쳐 중국의 전토를 군사적으로 통일하려는 헛된 노력을 하지 말고 차라리 제한된 곳에서나마 장악하의 지역에서 철저한 사회개혁에 주력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보려는 유혹에 빠진다.


장악한 지역에서 그 세력을 굳힐 수 있었다면 그 지역들은 보다 효과적인 통일 노력을 위한 탄탄한 기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기존의 중국 군사권력과 체제에 대한 근본적 개혁과 농민의 생활에 대한 다소간의 개선이 앞섰어야 할 것이다.


……국민당 정권이 그와 같은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겠는가는 지금 이 시점에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중국문제에 관한 미국 상원외교위 청문록, 185쪽, 1966.3.16).


 


 


슈워츠는 완곡하게 그 답변을 회피했지만, 국민당 혁명의 역사는 장개석이나 국민당이 그것을 할 수 없는 ‘본질적 제약’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진시황의 꿈을 안고


 


장개석이 이끄는 북벌군은 공산당과의 합작의 도움으로 전국의 농민ㆍ상공업자의 열광적인 협력 속에 파죽지세로 진군을 계속하여 1927년에는 남경에 혁명정부를 수립했다. 28년에는 북경을 장악하고 있던 만주군벌 장작림(張作霖)을 북방으로 몰아내어 북경(이후 북평으로 격하)에 입성하여 북벌의 염원을 이루고, 위대한 중국통일과 혁명의 꿈을 품은 채 1925년에 사망한 손문의 뜻을 달성했다. 국민정부는 만리장성 이남의 땅을 그 지배하에 넣음으로써 진시황(秦始皇) 이래의 한민족(漢民族)에 의한 중국통일을 달성한 것이다.


시베리아와 동북지방(만주)의 지배 음모를 꾸미고 있던 일본의 군부와 자본가의 결탁세력은 장개석의 통일세력이 만주에 미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장작림을 살해하는 한편, 그 아들 장학량(張學良)에게 만주에서의 일본의 지배권에 대한 동의를 강요했다. 그러나 국민정부에공감하는 장학량은 일본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1929년 통일된 대중국에 참가함을 분명히 했다. 완전한 형태는 아니었지만 동북지방까지 합친 중국통일은 이렇게 해서 1929년에 완료된 셈이다. 장개석은 중국통일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이 단계에서 장개석과 국민당 정권 속에서는 그 통일의 열매를 겉마르게 하는 내외적인 제약이 싹트고 있었다. 하나는 장개석이 대표하는 국민당 정권의 계급적 요인이고, 또 하나는 중국을 둘러싸고 벌어진 국제정세다. 변증법적으로는 당시의 국제정세에 그렇게 대처한 장개석과 국민정부의 그 대응책이 다름 아닌 장개석과 국민정부의 계급적 본질의 반영이었다는 점에서는 그것을 통틀어 근본적으로는 그 계급성의 문제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 본질은 그 반응 외의 딴 반응을 낳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운명을 결정한 내부적 사태는 1927년 공산당과의 제1차 합작을 쿠데타로 깨어버린 것으로 나타났다. 장개석은 상해에 입성하자마자, 북벌군의 무혈입성을 가능케 했던 유소기 지도하의 공산당에 의한 상해지역 노동자의 대대적 파업을 무력으로 분쇄하고 파업주동자의 대대적인 체포와 살해로 응수했다. 이때까지 국민혁명을 도와 이립삼(李立三)ㆍ진독수(陳獨秀)의 지도하에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혁명활동을 맡았던 공산당은 전국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노동자 속에서 국공합작에 의한 장개석의 북벌혁명에 호응했던 공산당의 많은 지도자가 체포ㆍ살해되고몇 해에 걸친 화남 각 도시의 대규모 파업이 전멸한 뒤 도시를 쫓겨난 공산당은 호남성(湖南省)의 정강산(井崗山) 속으로 도피했다. 모택동혁명의 발상지로 유명해진 정강산 기지는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계급성의 논리


 


국민정부는 상인ㆍ은행가ㆍ공장주ㆍ선박보험업자ㆍ보세(保稅)염전업자 등 도시 자본가계급과 국내로 송금하는 화교를 토대로 하고 있었다. 국민당 군대의 병사는 어느 시대 어느 군벌의 병사나 다름없이 농민 출신이었지만 국민정부의 물리적 핵심인 장교는 대부분 상류계층 및 지주계급 출신이었다. 그와 같은 성분적 구조는 당연히 그것이 옹호하려는 이해의 계급성을 지니게 마련이었다.


이 혁명세력의 계급성은 외교정책과 결부되어 국민당 정권의 대중적 토대를 더욱 제약하게 되었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하나는 더욱 본격화하는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서 영ㆍ미ㆍ불 등의 지지가 필요해졌고, 그러기 위해서는 100년에 걸쳐서 중국에 뿌리박은 영ㆍ미ㆍ불 등의 경제적 이권을 침해하려는 의사가 없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려는 의사표시를 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했다. 중국을 반(半)식민지화한 그들 외국 자본은 국내자본을 예속시키고 있었던 까닭에 국내의 기존 생산제도와 기득권을 부인하는 정책도 이를 반대해야 했다. 이 목적을 위한 가장 적절한 조치가 공산당에 대한 탄압으로 나타났다.


또 하나의 논리적 이유도 같은 성격의 것이다. 만주와 화북지역을 군사력으로 점령하면서 중국 본토로의 침식을 확대하고 있던 일본은 그들의 행동이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에 의한 중국 사회주의화의 위험을 예방하려는 목적에서라고 선전했다. 아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정권을 굳히고 있는 소련과 사회주의화한 중국이 결부되는 사태를 방지하는 것은 바로 일본의 임무지만, 그것은 유럽 자본주의국가 및 미국의 이익과도 부합한다는 일본의 논리 앞에서 장개석은 대일정책에서는 유화적이고 대내적으로는 그의 반공주의를 행동으로 입증해 보여야 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중국군벌의 각축으로 중국 사회의 ‘법과 질서’에 대한 불신을 품고 있던 외국자본과 정부는 장개석과 국민정부에 대해 중국 내의 그들의 이권을 보장할 만한 정치적ㆍ사회적 안정을 이룩할 능력이 있는지에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많은 외국 자본들은 불안하게 통일된 중국보다는 차라리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의 법과 질서를 유지시키는 대가로 그들의 이권의 안전을 보호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견해를 갖기까지 했다. 사회주의 소련에 대한 자본주의국가들의 경계심과 적대감 때문에 그들은 1931년 만주에 대한 일본의 공공연한 군사적 점령에 대해서도 사실상 이를 묵인하는 태도를 취했다. 국제연맹이 파견한 린튼 경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의 애매한 태도와 보고서는 바로 소련 포위 고립화정책에 여념이 없었던 자본주의국가들의 태도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것은 뒤따라 일어난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점령과 스페인 내란에 대해서 보여준 그들의 태도와 마찬가지다.


중국 정부가 가장 믿고 있던 미국은 이미 1919년 11월 2일의 ‘랜싱–이시이(石井) 협정’으로 “미국과 일본 양 정부는 지리적 근접성이 국가관계에서 특별한 관계를 조성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따라서 미국 정부는 중국에서 특히 일본의 이권이 접촉하는 부분의 중국 영토에 대해서 일본이 특수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라고 합의하고 있는 터였다. 이것은 막연한 미국의 ‘최혜국 대우’와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유명한 문호개방 정책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 사실상 중국에 대한 일본 침략을 묵인하는 공식적 의사표시였다.


그것을 우리나라에 적용할 때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를 미국이 양해한 것이나 다름없는 ‘가쯔라(桂)–태프트 협정’을 상기시킨다.


그런데도 장개석은 국제적 반공주의와 미ㆍ영 이권의 보호 및 내부적으로는 공산당 탄압으로 미ㆍ영 등의 지지를 얻어 그의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렇지만 중국에 이권을 가진 미ㆍ영ㆍ불ㆍ소 등 세력은 그런 동기와 계산 때문에 중ㆍ일 관계에서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했다.


그는 1929년, 정강산에 근거한 모택동과 주덕(朱德)의 농민 반란세력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국민정부 군대의 공격으로 정강산에 밀렸던 농민정권은 1930년 다시 서금(瑞金)으로 후퇴하여 이곳을 근거지로 삼게 된다.


장개석은 중국 공산당을 강서(江西)ㆍ복건(福健)ㆍ호남(湖南)의 좁은 산악 속에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부터 국민정부는 외국 자본의 신임과 차관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외국자본의 더욱 많은 신임을 얻게 된 그는 국민당 군부를 현대화하고 현대적 장비와 항공기를 도입하여 1930년부터 33까지 5차에 걸쳐 90만의 병력을 동원한 대대적인 섬멸작전으로 서금을 근거로 하는 강서성ㆍ호남성ㆍ광동성 지역의 중국 공산군을 불모의 서북 변경 연안(延安)에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인간집단의 역사상 유례없는 6,000마일의 대이동을 중국공산당은 ‘장정’(長征)이라 부르고, 국민당 군대는 군사상 유례없는 ‘대패주’(大敗走)라고 부른다.


만약 장개석이 공산당과 그 군대의 토벌로 미ㆍ영 등의 지원을 얻어 일본의 만주침략과 화북점령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결과는 실패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1931년, 일본은 서금 기지에 대한 3년간의 섬멸작전에 장개석이 그 휘하 병력의 거의 반 이상을 투입하고 있는 동안 우선 만주를 점령해버린 것이다. 장군(將軍)이 6,000마일의 산악과 사막을 따라 연안까지 공산군 토벌작전을 벌이고 있던 1931년에서 36년 사이에 일본은 다시 화북 일대와 황하 이북을 거의 중국군의 저항다운 저항도 받은 일없이 그 지배하에 넣어버렸다.


6,000마일을 행진한 공산당군은 이동하는 6,000마일 지역마다 활동분자를 부식했을 뿐 아니라, 연안에서 재편성된 공산당군은 오히려 고난을 극복한 정예군대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장개석과 국민정부는 점점 민중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만주와 황하 이북의 국토를 이렇다 할 저항도 없이 내맡기고 공산당과의 내란에만 국가의 자원을 소모하는 정부에 대해 중국 민중은 즉각적인 시위와 항일전의 단결을 외치게 되었다. 반대로 공산당은 그것이 선전이었든 진정이었든 간에 중국민족의 해방을 위한 철저한 항일전쟁과 내란의 종식을 호소하여 민중의 지지를 확대했다. 그럴수록 장개석은 공산당 탄압의 명분으로 모든 반대 세력과 비판적 여론을 탄압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점점 더 비밀기관을 강화하고 공산주의뿐 아니라 자유주의자와 내란을 반대하는 지식인ㆍ학생ㆍ노동자까지 탄압하는 불행한 실책을 저질렀다.


 


극대 권력의 극대 부패


 


장개석의 독재권력이 강화될수록 그와 병행하여 정권의 부패가 극대화됐다. 그 심각함과 추악함은 국민당 정권의 세계적인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정치권력과 경제권은 표리를 이루어 소수에 집중하게 되었다.


장개석의 근대화정책은 그 역사적 타당성은 접어두고 그의 독재권력의 주변에 모인 소수의 고급군벌과 재벌을 비대하게 하는 반면 민중의 생활은 더욱 도탄에 빠져들어가는 현실을 초래했다, 그의 정치권력을 뒷받침하는 경제력은 장개석, 송자문(宋子文), 공상희(孔祥熙), 진과부(陳果夫) 형제 등 그 자신과 외척 일파와 그 외곽을 형성하는 세력에 의해 독점되었다.


이와 같은 성격의 그의 권력이익은 불가불 침략자 일본과의 타협적 태도로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수천 년에 걸쳐서 민중이 요구하는 농민혁명과 타협한다면 국민당은 스스로의 존재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럴수록 정치ㆍ군사ㆍ경제력을 쥔 보수세력은 그에게 민중에 대한 더욱 가혹한 탄압 압력을 가했다.


장개석 ‘개인’이 모든 불행한 사태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스탈린은 장개석이 ‘사리사욕이 없는 애국자’라고 평한 일이 있다(스탈린과 해리만 미국대사의 대화, 1945.4.15, 미 국무성 발행『중국백서』, 95쪽). 대일전쟁 공동수행의 상대자였던 그로서는 당연한 인물평이라는 사실을 도외시하더라도, 국가 최고지도자의 청렴ㆍ애국심은 그 국가사회의 현실적 결과와 분리해서 평가될 수는 없다.


마치 그리스의 희곡을 보는 듯한 준엄한 논리에 따라서 숙명적인 종착점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는 듯 보이던 그와 국민당정권에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왔다. 그것은 서안(西安)에서 일어난 장학량 군대에 의한 장개석 납치사건이다.


 


다시 민중에게 업힌 영웅


 


점점 높아가는 지식인ㆍ학생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반발에 직면할수록 그는 권력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섬서성(陝西省)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한 공산 ‘비적’(匪賊)을 완전섬멸할 필요성을 느꼈다.


1935년 10월, 장개석은 일본에 의해 만주를 쫓겨나 서북지방에 이동해 있던 장학량 군대를 서안 일대에 배치했다. 모택동의 군대를 포위ㆍ섬멸하기 위해서였다.


이 결정을 내린 것은 마침 일본이 북경을 중심으로 한 화북 일대를 분리시켜 또 하나의 괴뢰정권을 수립하려고 책동하고 있는 때였다. 중국 인민은 이에 반대하는 열화 같은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중국 대학생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대 ‘구국’운동을 일으켜 장개석에 대하여 공산당 토벌 병력을 돌려 항일전을 전개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1919년의 5ㆍ4운동 이후 구국전선에 나선 학생ㆍ지식인 들이 자진해서 군대에 입대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때였다. 이 판국에 그는 한편으로는 전국에 걸친 구국운동을 반정부운동으로 몰아 탄압하면서 장학량의 동북군에게 공산당군에 대한 배후공격을 명령하기 위해 1936년 12월 7일 서안으로 비행했다. 이것은 전국적인 민중감정을 무시한 처사였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더욱이 일본군에 의해서 고향에서 쫓겨난 동북군은 철저한 ‘구국항일’전쟁을 원하고 있던 터였다. 서금에서 쫓겨나기 전인 1932년, 이미 ‘중국 소비에트 임시정부’명의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공산당군은 2년 후 연안에 도착한 후에도 국민 정부에 항일전쟁을 위한 공동전선의 결성을 거듭 호소하고 있었다. 장학량 군대와 모택동 군대 사이에는 그런 점에서 어떤 양해가 성립되어 있었던 듯하다.


장개석이 공산당군 토벌작전에 성의를 보이지 않는 장학량을 항명으로 해임하고 동북군을 끝내 공산당군 소탕작전에 동원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했을 때 장학량 휘하 장교들은 즉각 장개석을 감금했다.


장학량의 부하들은 장개석을 감금해놓고 즉시 공산당군에 연락하여 주은래와 장개석의 대면을 알선했다. 당시 공산당군과 동북군 내부에는 장개석의 처형을 주장하는 일부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장개석과의 대담을 통해서 주은래는 만약 그가 내전을 그만두고 항일전쟁에 돌아선다면 그의 국가적 지도권을 인정하고 반드시 석방토록 노력할 것이라고 서약했다(Edgar Snow, Red Star Over China, 12장).


공산당이 이와 같은 타협을 한 것은 항일전쟁의 결의를 입증하는 것 외에 전 중국 인민을 통틀어 항일 연립공동전선의 선두에설 수 있는 인물은 아직 장개석을 제외하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산당은 아직 전 중국 인민을 대표하기에는 지배지역으로나 그 군사력으로나 그리고 지지세력 면에서나 아직 그의 권력에 비하면 미미한 형편이었다. 또 국민정부 국방위원장인 하응흠(何應欽)이 일본군의 화북 진주에 대해서 유화적이었던 사실과, 하응흠을 중심으로 하는 정부 내의 좀더 반동적 세력이 일본과의 잠정적 양해하에 국민정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반공징벌작전’을 개시할지 모른다는 위험이 있었다는 것도 그 이유의 하나다. 하응흠이 독일에 망명 중인 왕정위(汪精衛)를 급히 불러들인 것을안 장개석이, 하응흠과 왕정위가 연합하여 정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즉시 공산당과의 타협의 길을 택했다는 해석도 있다(D. F. Fleming, The Cold War and Its Origin, 12장).


위험을 무릅쓰고 서안으로 날아온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宋美齡)의 용감하고 현명한 판단도 크게 작용하여, 12월 25일 장개석 총통은 무조건 석방되고 장학량은 국민정부의 군법회의에 출두하기 위해 장개석을 따라 남경으로 갔다.


서안사건은 20세기 중국 정치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일 뿐 아니라 극동 국제정세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장개석 총통은 군법회의에 회부된 장학량에게 반란죄 선고가 내려진 다음날 대사령을 내렸고, 장학량은 전국에 자기의 죄를 뉘우치는 성명과 함께 장개석 총통과 국민정부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모택동은 국민정부와의 항일공동전선 결성을 위해 “① 공산당군의 해체와 국민정부군으로의 편입 ②‘중국소비에트공화국’의 해체와 그 모든 권력조직 및 기구의 국민정부로의 이양 ③ 공산주의 선전의 절대적 중지 ④ 계급투쟁의 중지”조건을 수락했다. 이 제안은 그에 앞서 공산당이 국공연합 항일전선 형성을 위해 스스로 제시했던 조건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국민정부가 공산당에게 4개 항목에 따르는 공산정권 ‘개혁’조건을 제시하고 공산당이 이를 수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남경으로 돌아간 장개석 총통은 모택동이 요구한 ① 내전종결 ② 정치범 석방 ③ 연립정부 수립 ④ 손문주의의 실시 ⑤ 민주적 개인 및 단체 활동의 자유 ⑥ 대일공동전선의 결성 등에 동의한다고 발표했다. 헌정을 실시하기 위해 1년 뒤인 1937년 11월에 전국인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계획도 발표했다.


이와 같은 타협은 오직 중국인만이 할 수 있는 삼국지(三國志)적인 웅장함과 통쾌감과 “누구의 체면도 다치지 않으면서 문제를 해결하는”고도의 정치적 협상능력을 입증한다.


1927년, 장개석의 쿠데타로 제1차 국공합작이 깨어진 후, 10년 간에 걸친 처절한 동족상잔은 더 큰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여기서 끝났다.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것이다.


저명한 한 중국 전문가는 그와 같은 정치적 효과에 못지않게 서안 항명사건 그 자체를 중요시하고 있다. 그것은 중국의 군대는 그 국가원수나 장성들이 외침에 직면하면서도 권력투쟁에 골몰할 때는 반란과 납치의 물리적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전통을 갖게 됐다는 견해다(Owen Lattimore, China: A Short History).


그러나 1936년 크리스마스날에 대단원을 본 이 해결은 장개석ㆍ장학량ㆍ주은래 3주역의 개인적 차원에서보다는, 그 당시 중국 사회의 역사적 현실의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해야겠다.


그 하나는 100만 병력을 동원해서 10년 동안 추진한 무력에 의한 공산당 섬멸정책이 파산한 현실이다. 무력에만 의존하는 국가 통일이란 불가능하다는 현실이기도 하다. 한편 공산당으로서는 일시적인 시운과 상황의 위세를 딛고 장개석을 사형시키거나 장기 감금하는 등의 행동을 했다면 국민의 지지를 잃거나 국민당 군대에 의해 섬멸될지도 모를 자체 약세의 현실이다. 또 장개석 총통으로서는 석방 후에도 내전의 재개를 주장했더라면 그런 명령에 반란으로 대응하기까지 한 군대의 더욱 큰 항거에 직면할 것이라는 현실상황이다.


장개석도 모택동도 오직 대일공동전선을 폄으로써만, 전자는 전날의 위신을 회복하고 후자는 새로 획득한 세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이해가 합치점을 발견했던 것이다.


중국 인민은 비로소 협동 단결했다.


장개석 총통은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명실상부한 국가지도자와 영웅이 되었다. 모택동은 구국의 대의를 위해 소리(小利)를 버릴 수 있는 인물로 크게 빛났다.


이 극적인 사태발전에 놀란 일본은 중국 인민의 분열을 초래하기 위해 1937년 봄, 중국 정부에 경제협력과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중국의 국민감정은 그런 술책으로 가라앉기에는 이미 너무도 격해 있었고, 그것으로 분열되기에는 너무도 굳건히 뭉쳐져 있었다.


일본군은 1937년 7월 7일 임진(壬津) 교외의 노구교(蘆溝橋)에서 중국군에 의한 일본군 공격의 조작극(?)을 꾸며내어 중국에 대한 선전포고 없는 전면전쟁을 개시했다. 중국 민중은 이 순간부터 8년간에 걸친 처절한 민족생존을 위한 투쟁에 들어간다. 그리고 일본에 의한 중국 사회의 철저한 분해과정에서 새로운 중국의 토대가 생겨남을 보게 된다.


 


전쟁 속의 혁명


 


장개석의 국민적 인기는 1927년 북벌군의 총사령관으로서 파죽지세로 북진을 계속하던 당시보다도 더 상승했다. 일본은 몇 해안 가서 중국 국토의 거의 3분의 1, 그러나 사실상은 중국의 전체 산업과 자원의 거의 80~90퍼센트를 차지하는 동북지방, 화북 및 북경에서 양자강 상류의 요충지 한구(漢口)를 거쳐 광동에 이르는 동쪽의 비옥한 땅과 산업 중심지를 점령했다. 중국의 민중은 내전을 종식하고 ‘구국항일’의 기치를 분명히 한 그에게 중국민족의 운명을 구출할 지도력을 다시 한 번 기대했다.


국가의 위기에 처해서 중국 민중은 과거의 정치노선이나 이해 관계를 초월하여 거의 절대적인 권한과 신뢰감을 장개석 총통에게 부여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장개석은 날이 갈수록 지배계급과의 결탁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민중의 회의와 불신을 사게 되었다.


일본군의 추격에 쫓겨 중경(重慶)에까지 밀려갔을 때에도, 전쟁이라는 긴급사태 때문에 장개석과 그 정부의 권력은 착실히 확대되어가는 듯 보였다. 해안지대와 양자강 유역을 상실했지만 그것은 장개석의 정치권력 통설에 따르면 거추장스러운 대소 군벌세력이 소멸되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아직도 일본이 점령하지 못한 넓은 오지(奧地)의 군벌들에 관해서는, 그들을 일본군과의 전투에 투입하거나, 그들의 근거지에서 ‘작전상의 필요성’이라는 명목으로 멀리 이동시킴으로써 간단히그 근거지와 세력을 박탈할 수 있었다.


국가와 민족이 존망지추(存亡之秋)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권력자와 정권이 그 권력의 궁극적인 토대가 되는 민중과의 관계에서 어떤 성격을 지니는가를 검토하는 것은 중요하다. 거기에서 그 권력자나 정권의 장래가 거의 수학적 법칙성을 가지고 예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1937년에서 45년까지의 중국과 장개석과 그 민중 사이에서는 그러했다.


공산당이 농민혁명을 포기한 이 시기에는 바로 유산계급을 토대로 하는 국민당 정권이 공산당에게서 민중을 빼앗을 수 있는 절호의 시기였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외적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전선을 형성한 뒤에도 각기 자기의 세력확장을 위해서 애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제3자적 관측자들에 따르면, 처음부터 장개석은 민중의 절대적 인기를 가지고 능히 할 수 있었던 사회혁명을 통한 민중에게로의 접근을 하지 못했다.


일본군에 점령당한 해안지역의 상업ㆍ은행ㆍ산업세력과 물리적으로 떨어져야 했던 상황은 국민당의 계급적 동맹관계를 좁히기는 했으나, 그럴수록 국민당 권력은 당내 중추부에 있는 정치적 모사(謀士)와 장군들이 독점하는 바가 되었다. 민족애와 개인적 덕성은 나무랄 데 없는 장개석 총통도 이처럼 구조화한 권력의 성격을 이미 타파할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장개석 그 자신에게서 출발한 일련의 순환론적 결과일지도 모른다.


전쟁은 전 인민적 성격을 상실하고 1927년의 반공 쿠데타 당시와 36년의 서안사건 당시의 최악의 상태를 재현하게 되었다. 전쟁은 점점 개인적 목적을 위한 전쟁으로 화해갔다.


정부시책에 비판적인 세력이나 지성인, 자유주의자는 처음에는 경원시되다가 전쟁 후기에 가서는 투옥되었다. 언론통제, 비밀경찰에 의한 통치, 대학에 대한 당의 통제, 그밖에 1인ㆍ1당독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리고 불가피한 온갖 추악한 현상이 표면화되었다. 그것은 일견 정권의 강력함을 뜻하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가장 약한 권력의 특징임을 우리는 차차 알게 된다.


논리적으로는 장개석과 국민당은 이 비상상태에서 용솟음치는 민중의 정열을 사로잡아 농민과 소도시의 노동자들을 동원 조직하여 밖으로 항일전쟁과 동시에 안으로 사회혁명을 완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해안도시의 금융ㆍ경제 지배계급과 떨어진 국민당은 그 힘의 바탕으로 내륙의 대지주들과 손잡았다.


전쟁 대책으로 조직된 ‘전국자원위원회’가 관장하는 중국의 모든 경제능력과,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비로소 1942년 6월 2일 조인된 미국의 무기대여법(Lend-Lease Agreement)과 군비원조 및 추후 시작된 막대한 경제원조, 차관은 국민정부의 소수 고위장성들과 국민당 재정부장인 공상희와 송자문ㆍ진과부 등 송미령과 관련된 몇몇 은행과 재벌이 독점ㆍ농단하게 되었다. 오직(汚職)과 부패는 이에 따르는 당연한 현상으로 심화해갔다. 일본의 중국 침략 개시 이후 10년 만에 처음으로 루스벨트 미 대통령이 승인한 위의 ‘무기대여법’에 의한 4억 달러 외에 장개석은 1942년 우선 5억 달러의 차관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서 당시의 주중(駐中) 미국대사가 본국 정부에 보낸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와 같은 거액의 원조는, 그것이 주어졌을 경우에 그것을 착복해버리려는 유혹을 억누를 수 없는 이기적 은행업자들과 정부 내의 파벌들에 의해서 낭비될 각종 조작을 빚어낼 것이다(“United States’Relation With China,”『중국백서』, 474쪽, 가우스 대사가 헐 국무장관에게 보고, 중경에서, 1942.1.8).


 


 


장개석은 이 거액의 차관을 농민들을 위한 농지개혁 등 말하자면 중국적 혁명에 쓰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서 가우스 대사는 같은 보고서 가운데서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작년 12월 회의에서 ‘농지소유 평등화’등을 포함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또 국민당의 여러 위원회와 기관이 과거 같은 결의를 여러 차례 채택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무것도 없다.


 


 


결론적으로 가우스 대사는 “5억 달러 가운데서 50퍼센트는 국민당을 형성하는 각종 세력과 개인들에 의해서 낭비와 부정으로 없어진다 치더라도, 나머지 돈도 건설적인 목적에 쓰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이 클래런스 E. 가우스라는 미국대사는 친중국(장개석)파였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가끔 인용하게 될『중국백서』라는 것은 1949년 8월 미국 정부가 발표한 중국정세의 종합보고 형식의 문서집이다. 이 백서는 장개석과 국민당 정권이 본토에서 쫓겨나 대만으로 낙향한 후 어째서 한때는 중국 국민의 열광적 지지를 받았던 장개석 총통과 그의 정권이 패망하게 되었는가를 1844년의 중국정세로 거슬러 올라가 1949년까지의 100여 년을 검토 분석한 1,054쪽의 방대한 공식문서집이다. 이것은 모택동에게 중국을 상실한 후, 미국 내에서 그 책임을 당시의 집권당인 민주당에 돌리려 하는 여론이 일어났을 때, 그 책임이 전적으로 장개석 총통과 국민당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미국 정부의 목적의식으로 편찬ㆍ공포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을 이해하면서 백서를 읽을 필요가 있다. 중국의 오늘을 알기 위해서는 기존의 어떤 도서ㆍ출판물보다도 종합적이고 세밀하며, 관련된 모든 공식기록을 망라한 이 백서는 가장 권위 있고 귀중한 자료다. 때로 미국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목적의식이 코에 걸리는 곳도 있지만 그것은 훈련된 눈으로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사정을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이 백서가 그래도 가장 공평한 역사적 자료가 되어 준다.


국민정부와는 대조적으로 공산당군은 전쟁 시초부터 민중 속에 문자 그대로 ‘녹아들어가’있었다. 그들은 일본군이나 국민당 군대에서 빼앗은 무기로 농민을 무장시켰다. 일본의 압도적 군사력과 점령체제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중국 농민이야말로 무장화되어야 할 에네르기였지만 국민정부는 농민을 무장시키지 못했다. 계급적 이해가 대립되는 농민을 무장시킨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느냐는 것은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중국내전과 항일전 기간 중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이념 및 실천을 대조해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결과적으로 패배했다는 ‘결과적 실증주의’적 입장을 취하지 않더라도 “장개석과 지배계급이 좀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서안사건의 합의에 따라 섬서성(陝西省) 지배지역에서 농민을 무장시켜 파르티잔 전술로 일본군과 싸우면서 한쪽으로는 그 민중적 토대를 꾸준히 넓혀나갔다. 그 세력확대는 국민당 정부에 의한 고정된 점령 내지 지배영토의 확대 방법과는 달랐다. 항일전쟁의 화북지역 전선을 이리저리 이동하는 공산당군은 농민들을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의 사상으로 각성시키고, 훈련된 농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병사ㆍ농민ㆍ혁명가가 되어 새 마을에 들어가 농민을 감화시키는 방식을 취했다. 공산당이 지배하는 땅은 없어도 그 땅에 사는 농민은 공산당의 혁명에 동조하는 세력이 되었다. 사회구조의 표면은 국민정부에 속하고 그 하부는 공산당에 속하는 현상이 생겼다.


지주의 토지 몰수 등 과격한 사회혁명은 서안사건 이후의 합의에 따라 중지하고 ‘농민에 의거하고 모든 계급과 동맹하는’광범 위한 정책으로 모든 계급과 제휴하는 전략을 추구했다.


농민의 조세를 줄이고 지대를 내리는 한편, 성인교육, 합작사(현재 人民共社의 원시형태)를 조직했다. 마을의 결정은 처음으로 민중(주민)의 집단적 참여와 토의를 통해서 결정하는 이른바 ‘사회적 결정’의 형태가 되었다. 공산당과 팔로군(八路軍)의 간부ㆍ사병들이 그 지도역할을 담당했지만 크게 보아서는 민중의 자발적 에네르기에 의존했다는 것이 외부의 관측자들에 의해서 국민당 지배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농민과 민중 속에서 그들과 같이 먹고 같이 사는 공산당원(그들은 바로 그 계급 출신이었으니까 이상할 것도 없지만)은 국민당정권 관리처럼 지배하거나 호령하는 자가 아니라 돕는 자로 인식되었다.


서안과 보안(保安)을 기지로 한 이와 같은 운동은 일본 군대와 접촉하는 공산당 군대의 범위보다도 더 앞서 일본군 점령하의 동부해안 쪽으로 침투ㆍ확대되었다. 그들은 낮에는 땅을 갈고 밤에는 숨겨둔 총으로 일본군의 배후나 소부대의 일본군을 공격하는 파르티잔이 되었다.


일정한 지점과 지역에 배치되어 일본군과 진지전(陣地戰)을 전개하는 국민당 군대가 일본군에게 쫓겨나면 그 지역은 국민정부에서 떨어져나갔다. 그와는 반대로 공산당군은 일본군에게 땅을 잃어도 그 땅에 남아야 하는 농민이 그대로 장차의 공산당의 기반이 되었다.


 


적전(敵前) 내전


 


공산당 군대와 국민당 군대가 일본 군대가 없으면 어디서나 소규모의 내전을 전개한 사실은 너무도 알려져 있는 일이기에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일본군은 때로 이것을 유리하게 이용하여 군사적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군을 앞에 놓고 벌어진 국민당 군대와 공산당 군대의 충돌에 어느 쪽이 더 책임이 있느냐를 따지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연구 제목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그에 대한 확실한 판단을 내리기에는 그 당시의 정황이 너무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다만,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내전 당시부터 장개석의 패배 때까지 중국에 파견되어 장개석 군대를 도왔거나 국공연합작전에 진력한 미국의 스틸웰 장군, 패트릭 헐리 대사, 라이튼 스튜어트 대사, 마샬 장군, 웨드마이어 장군들의 보고서나 개인적 서한들은 국민당 쪽에 더 많은 책임을 묻고 있다. 속으로는 공산당을 싫어한 그들이 말이다.


그 가장 대표적인 실례는, 1941년 1월에 일어나 전 세계에 큰 충격을 던진 ‘신사군(新四軍) 사건’이다. 신사군은 서금기지의 주력부대가 장정을 떠난 뒤에도 장강(長江) 이남지역에 남아 있다가 36년의 제2차 국공합작으로 국민정부군에 편입된 엽정(葉挺) 사령관과 항영(項英) 부사령관 휘하의 공산당 부대였다.


1940년 10월 군정부장(국방부장관) 하응흠은 연안의 주덕 총사령관에 대해 장강 이남의 기지를 버리고 일본군의 압력이 강해진 장강 이북으로 신사군을 전전(轉戰)시키라고 요청했다. 연안사령부는 이에 동의했다. 41년 1월, 명령에 따라 장강을 도섭(渡涉)하던 신사군 10만 병력은 도중에 국민당군 대립(戴笠) 장군 휘하의 사천성(四川省) 군대의 기습공격을 받아 거의 전멸당했다. 장개석은 신사군 섬멸 이유로 ‘명령 불복종’을 들었으나 여하간 이 사건으로 장강 이남의 공산당 군대와 지배지역이 소멸된 사실만은 틀림없다.


연안사건 이후의 연합전선 기간 중 국공군 충돌에 관해서는 국민정부 고위층 내부에서도 적지 않게 고민한 흔적이 있다. 다음은그 한 가지 증거다.


 


……미국대사관을 찾아와서 정세를 논의한 손과(孫科, 손문의 아들) 입법원장은 중국군의 전쟁능력이 급속히 회복돼야 한다는 심각한 정세평가를 했다. 손과는 중국군의 대일전쟁능력 상실의 기장 큰 원인은 장개석 총통이 정부군 30만을 공산당지역 봉쇄를 위해서 고정배치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개탄했다. 그는 이것은 정부군 30만의 손실일 뿐 아니라, 그에 의해 포위되고 있는 공산당 군대, 일본군에 대항해서 그토록 잘 싸운 수십만의 공산당 군대를 무장해제한 것이나 다름없는 처사라고 말했다(국무장관에 대한 주중 헐리 대사 보고서, 『중국백서』60쪽).


 


이것이 1939년 화북 서북지방을 향해 공격해 들어오고 있는 일본 대군 앞에서, 국민정부군 30만으로 연안을 포함한 섬서성을 가로지르는 공산당지역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실태다. 항구적인 포위진지에 배치된 정부군 30만과 포위되어 있던 적어도 40만의 공산당군, 합계 적어도 6, 70만의 병력이 대일전쟁에서 전력을 상실한 꼴이었다. 그밖의 지역의 사정도 대체로 비슷했다. 적전(敵前) 내전의 책임에 관해서 헐리 대사 보고서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손 박사는 장개석 총통에게, 현재의 공산당은 중국을 공산화하거나 지배하려 하고 있지는 않으며 설사 하려 한다 해도 되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과 그들이 원하는 것은 분명히 일본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서 국민정부와의 협조를 가능케 하는 해결을 이룩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손 박사는 그러나 장개석 총통이 모든 일을 자기 혼자서 결정하려고 고집할 뿐 누구의 건의나 충고도 듣지 않으려 한다고 실토했다. 손 박사는 전력 낭비의 중대한 사태를 시정하기 위해서 미국의 충고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같은 책, 61쪽).


 


장개석은 거의 절대적 권력을 자의대로 행사하여 주변의 충고나 건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것 같다. 그와 같은 지도자의 주변에 어떤 권력 보좌관들이 장막을 치게 되는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치ㆍ군사ㆍ경제ㆍ사회적으로 이미 1941년경부터 장개석과 국민당 정권의 기반은 사실상 사라진 상태가 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장개석과 중국을 동정했던 이름난 많은 옵서버, 예를 들어 에드가 스노, 님 웨일스, 마이클 린제이,존 스튜어트 서비스, 페이튼 데이비스, 자크 베르덴…… 등이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는 바다. 페이튼 데이비스와 존 스튜어트 서비스 같은 사람은 최근 닉슨 대통령의 대중공 화해정책으로 가능해진 미국의 초대 주중대사 물망에까지 오르내리고 있으며, 당시는 주중 정무관영사였다. 그들은 이와 같은 정확하고 공정한 판단 때문에 그 후 50년대 초에 반공 매카시즘에 의해 관직에서 쫓겨났다.


국민당 군대가 어쩌다가(드문 일이었지만) 일본군을 물리치고 어느 지역을 해방하면, 그곳 주민들은 그 ‘해방자’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가질 않았다. 정부의 직업군인 집단은 민중의 반감을 사고 민중은 오히려 일본군에게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기대하는 사례가 일반화하기에 이르렀다.


항일전쟁도 말기에 가까워질 무렵에는 장개석과 국민당 정권의 운명은 이미 회생의 가능성을 상실한 듯한 징조들이 나타났다.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그 권력과 정권이 민중에 의거하지 않고 직업군인, 재벌, 직업 정치가, 대지주, 생산수단을 소유한 부유층…… 통틀어 유산계급, 즉 당시 중국의 소수 지배계급에 의존했기 때문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그때 가난한 중국의 민중은 4억이었다. 그리고 지배계급은 민족이나 국가나 백성보다는 권력과 재산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세력이었다).


 


환상의 승리


 


장개석은 미국이 대일전쟁에 참가한 1941년부터는 아시아에서의 전쟁 부담을 이제는 미국이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너무도 오랫동안 대일전쟁의 희생을 치러왔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것이 그가 대일전쟁에 소극적이고 대중국 공산당전쟁에 적극적이었던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장개석은 머지않아 대일전쟁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리라 믿었고 따라서 일본군 철수 후에 공산당과의 내전이 필연적이라고 판단했다.


한편 미국은 태평양과 동남아에서 미국 군대의 희생을 줄이고 앞으로 있을 일본 본토 작전에 대비하여 최대한의 일본 군대를 만주와 중국 본토에 묶어놓기를 바랐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장개석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모택동과의 접촉을 시작했다. 공산군대에 대한 소규모의 군사원조 문제가 검토되었다.


그 동기와 목적은 이중적이었다. 군사적으로는 ① 장군(將軍)에 대한 기대 상실 ② 공산당 군대의 전투능력 인정 ③ 중국 전토 특히 공산당 지배지역에 미국의 대일전 기지를 구축해야 할 필요성이다. 정치적 장기평가가 군사적 고려보다도 더욱 중요한데, 그것은 ① 공산당군에 군사원조 제공 계획으로 장개석의 양보를 얻어보려는 기대 ② 대일전 기간 중 또는 대일전 승리 후에 중국공산당이 군사 및 정치적 원조를 위해 소련에 접근할지 모르는 가능성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노력 ③ 중국 지식층 및 정치적 중도ㆍ민주세력의 더욱 많은 지지를 받게 된 공산당군과의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장개석을 대치할 중도ㆍ온건ㆍ민주세력을 육성 강화하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 제안은 미국 정부의 장개석 지지세력에 의해 결국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1937년 공산당군이 국민정부군에 개편ㆍ편입된 후 미국 원조의 소구경무기와 탄약이 구공산당군에게 약간 ‘배급’된 일이 있으나 그나마 ‘신사군 사건’전에 중단되었다.


정부군의 패배와 관련하여 그 원인이 중국공산당에 대한 소련의 원조에 있는 듯이 착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히틀러 독일제국주의의 위협하에 있던 1942년 이전이나 히틀러의 군사적 공격을 당한 그 후나, 소련은 자체방위조차 부족한 자원을 중국공산당에 돌릴 여유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코민테른의 정치적 지도와 정신적 원조는 1927년까지 있었으나 모택동의 농촌을 중심으로 한 농민혁명 주도권이 확립된 그 후부터는 오히려 중국공산당은 스탈린과 대립하는 관계였다.


1932년 상해에서 국민정부 정보기관에 체포된 코민테른 극동지도원 노이렌스에 대한 신문 결과, 그때까지 전 극동지역(중국만이 아니고)에 지원된 금액은 월 1만 5,000달러 정도를 넘지 못했다는 사실이 국민정부 당국에 의해서 밝혀졌다(Edgar Snow, Red Star Over China,Grove Press edition, p. 415).


이에 비해 미국이 1933년 한 해에 국민정부에 제공한 것만도 5,000만 달러를 넘었다. 중국공산당을 거세하기 위해서 일본군국주의, 히틀러의 나치세력, 무솔리니의 파쇼기관 등이 국민당기관이나 중국 우익세력에 제공한 공작금액은 비교가 안 될 만큼 거액이었다고 한다(같은 곳). 따라서 국민정부는 전면적인 원조를 누렸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대독(對獨)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승리한 소련이 중국공산당을 지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945년 4월 15일 주소(駐蘇)대사 에이브릴 해리만과, 주중대사 패트릭 헐리 장군을 모스크바로 보내 스탈린과 협상케 했다.


이 미ㆍ소 협상에서 몰로토프 소련 외상은 중국공산당과 모택동 등이 “①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② 그들은 다만 이념도 없는 중국 사회의 불평불만분자다 ③ 중국공산당에 아무런 원조도할 생각이 없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① 장개석은 청렴결백한 인물이며 애국자다 ② 중국국민당 정권의 부패는 혹심한줄 알지만 장개석에게는 책임이 없다 ③ 장개석과는 과거의 친교가 있다(모택동과는 없었다) ④ 장개석에 의한 중국 통일을 지지한다 ⑤ 중국문제 해결에 대한 미국의 주도권을 인정한다”는 것을 명백히했다(주중헐리대사보고, 『중국백서』, 49쪽, 95쪽).


미국은 대일전쟁 후의 중국이 공산당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스탈린을 설득해 1945년 8월 14일 장개석 정권을 상대로 한 중ㆍ소 우호협조조약을 체결케 해주었다.


이 조약으로 장개석은 ① 중국공산당의 소련에 대한 기대를 말살하고 ② 이것을 조약형식의 공식선언으로 구체화하여 ③ 중국에서의 장개석의 통치권을 보장하고 ④ 그럼으로써 앞으로 계속될 내전에서 공산당과 공산당군의 사기를 꺾으며 ⑤ 공산당에 동조하는 중도ㆍ민주 세력들을 공산당과 분리시키고 ⑥대일본 승리 후의 국민당 정권의 전쟁처리 발언권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얄타회의를 통해서 미국이 명시한 중국정책의 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군사ㆍ정치ㆍ경제적으로 장개석은 모든 국제적 지원을 누렸다. 그런데도 1945년 일본에 대한 7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했을 때, 국민정부는 내부적으로 완전히 패배한 상태였다. 장개석의 권력기반은 정치ㆍ군사ㆍ경제ㆍ민심의 모든 면에서 거의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다.


 


버림받은 영웅


 


공산당은 10년간의 내전과 7년간의 일본군 공격을 견디었다. 그들은 장개석의 중앙정부에 대한 일본군의 몇 배나 되는 일본군 압력을 이겨냈을 뿐 아니라, 장개석 자신에 의한 철저한 봉쇄도 이겨냈다.


그들은 이 고난을 이겨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과정에서 성장했다. 1937년 연안으로 도피해왔을 때는 겨우 10만 평방킬로미터의 지역과 150만의 민중을 지배할 뿐이었던 중국공산당은 지금은 전쟁과 포위 속에서 85만 평방킬로미터의 땅과 약 9천만의 민중을 지배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계속 성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경이적인 생명력과 힘의 원칙은 아주 단순하고 기본적인 것이다. 그것은 민중의 지지와 참여다. 공산당과 공산당군은 근래 중국사상 처음으로 능동적이고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누리는 정부이고 군대다. 그들이 민중의 지지를 얻게 된 것은 그 정부와 군대가 진정으로 민중의 정부이고 민중의 군대이기때문이다(John Stuart Service,“ Memoranda by Foreign Service Officers in China 1943~1945”, 『중국백서』, 567쪽).


 


그러면 장개석과 그의 정권에 대한 진단은 어떻게 내려졌던가를 보자. 다음 보고서는 페이튼 데이비스 정무관이 국무장관 앞으로 보낸 것이다. 그는 본시 친장개석파였다. 장개석을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된다는 강경한 권고를 본국 정부에 거듭 보낸 끝에 이렇게 결론지었다.


 


 


장개석은 중국을 침공한 일본 군사력만한 규모의 외국간섭세력을 끌어들이기 전에는 공산당 세력을 분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침략 규모의 외국간섭은 있을 법해 보이지 않는다.


사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사분오열이 되어버린 그의 세력기반이나, 퇴폐ㆍ부패한 정부 기구와 관료, 내용도 없는 그의 정치적 도덕주의, 그리고 외국의 손에만 의존하려는 그의 자세와 사상으로는 일본이 그 막강한 군사력과 단호한 결의로 7년간 시도했으면서도 쓸어버리지 못한 공산당과 공산군에 승리할 수는 없다. 공산당의 힘은 그에게는 이미 대처할 방법이 없을 만큼 성장했다.


장개석이 설사 내전을 끌고 나가든 공산당과 화해를 하든, 그는 여전히 패배에 직면해 있다. 그의 봉건적 정권은 화북에 수립된 현대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중의 지지를 받는 (공산당) 정치제도 및 권력과 경쟁, 공존하기는 이미 틀렸다.


 


 


그리고 그는 보고서의 결론으로, “공산당은 중국에 뿌리를 박았다. 내일의 중국은 장개석의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의 것이다”라고 끝맺었다(『중국백서』, 573쪽).


 


46억 달러의 행방


 


아무리 군 내부의 부패가 혹심하기는했더라도 장개석의 패배가 군사력의 부족에 있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났을 때, 국민정부군은 253개 사단이었다. 그리고 그중 39개 사단이 미국이 제공한 최신무기와 장비로 완전 무장되어 있었다.


국민당 정권을 그 정도나마 유지해준 것은 미국의 정치ㆍ군사ㆍ경제면에서의 아낌없는 원조였다. 그러면 국민정부는 미국의 원조를 얼마나 받았을까?


1937년 7월, 일본이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개시하여 48년, 사실상 장개석 정권의 운명이 결정나게 된 12년 동안 그의 정권은 경제ㆍ군사 목적의 무상공여와 차관 합계 35억 2,300만 달러와 주로 현물 또는 군사비 대충(對充)자금으로 사용된 잉여물자 10억 7,810만 달러, 총계 46억 110만 달러어치를 받았다. 이것은 아무리 전시라 하더라도 결코 적은 금액이나 물자가 아니다.


군사ㆍ경제 차관 및 공여 합계 35억 달러 이상 가운데 약 24억 2,200만 달러가 무상원조이고, 11억 100만 달러가 차관이다. 시기별로 좀더 정확히 보면 1937~45년에 전체의 40퍼센트에 해당하는 15억 1,570만 달러가 제공되고 약 60퍼센트인 20억 770만 달러가 대일전쟁 승리 이후, 즉 1945년 8월 이후에 제공되었다. 이 미국 원조는 특히 1945년 이후에는 결국 대공산당 내전을 위한 장개석 군대의 군비와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기한 잉여물자 및 그 판매대금 10억 7,810만 달러가 물론 여기에 더해지지만 시기적 구분은 어렵다. 이상의 전체 금액과 물자 외에, 미군이 대일전 승리 후 화북 해안지대에 진주했다가 철수할때 넘겨준 탄약은 이에 포함되지 않는다. 또 이 기간 중, 사회ㆍ문화ㆍ경제ㆍ군사의각 분야에서 활동한 미국 고문단들의비용으로 나간 금액과, 각종 유엔기관을 통해서 1949년까지 제공된 물자와 금액도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을 합하면 적어도 50억 달러의 원조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외국 원조가 적었다는 것은 별로 납득할 만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이런 상태로 장개석은 1945년 8월 15일을 맞이했다.


 


갈 곳 없는 영웅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사태는 국공 정치협상과 내전 재개로 복잡하고 우여곡절이 많은 장개석의 권력사를 엮어준다. 어떤 사건이나 그 연대를 찾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그것은 흥미 있는 역사지만 그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역사의 방향과 의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사실상 1945년 이후의 장개석 총통과 국민당 정권의 역사는 그 이전, 즉 1945년까지 진행된 역사의 일직선상에서 원형대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 차라리 중요하다.


국민당 정권과 중국의 지배계급은, 1937년 이전과 45년 이후의 변화에서 별로 교훈을 얻지 못했다. 얻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은 흔적이 많다. 그들은 일본이 물러갔으니 다시 그들이 지배하고 갈라먹던 ‘그 좋은 과거’가 그대로 오늘에 이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일본 침략과 대일전쟁의 8년 사이에 중국의 인민대중이 얼마나 각성하고 자신의 힘에 대한 자신감을 키웠는지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여기에 그들의 비극이,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비극’이 있다.


지식인과 민중의 지지를 상실했지만 루스벨트, 스탈린,처칠, 트루만 등 연합국 최고지도자들과 자리를 같이한 몇 개의 ‘세계정상’회담을 통해서, 장개석의 위신은 잠시 다시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는 종전과 함께 승리의 기세를 몰아 어디까지나 무력으로 잃은 땅을 통치권하에 넣으려 했다. 민심을 얻음으로써 인민을 그의 지도하에 규합하는 정치는 그의 철학과 정책에 없었다. 군사력만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생각한 무솔리니와 히틀러와 일본군 장군ㆍ제독 들이 줄지어 역사의 심판을 받은 사실을 눈앞에 보고도…….


중국을 소련과 중국공산당 세력에 넘기지 않으려는 것이 미국 정부의 전후정책이었다. 종전 즉시 미국은 실질적으로 중국 정부군의 총지휘관 역할을 하고 있던 웨드마이어 장군으로 하여금 미국 육ㆍ해ㆍ공군 기동력을 동원하여 내륙지역에서 약 40만 명의 장군(蔣軍) 병력을 한구(漢口), 남동(南東), 북동(北東) 등 해안도시에 단시일 내에 수송했다. 공산당 군대와의 해안 요충지역을 향하는 진격경쟁에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중국 정부군이 힘에 겨워한 상해(上海)ㆍ청도(靑道)ㆍ천진(天津)등 국제도시에는 약 5만의 미국 해병대가 급파되어 공산당군에게서 이를 분리시켰다. 1945년 8월에서 12월 1일까지 5개월 동안에 과거 공산당군이 장악했던 황하지역 내로 들어간 미군은 10만을 넘었다.


그러나 화북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공산당군은 만주를 선제(先制)했다. 미국은 맥아더 사령부 휘하의 전 해ㆍ공군 수송력을 동원하여 미식으로 완전무장한 국민당 군대 정예군 14개 사단을 만주로 수송했다. 여기서 만주 장악을 위한 최초의 대대적 내전의 막이 다시 열린다.


이미 일본 패전 전에 군사적으로 국민정부의 장래가 위태로워진 것으로 판단한 미국은 장개석과 모택동의 정치협상으로 장개석의 지배권을 확립하려고 했다. 1945년 12월 22일 조지 마샬 장군이 트루만 대통령 특사로 중경에 도착하여 정력적인 노력 끝에 국민당군과 공산당군 사이에 1946년 1월 9일 휴전이 성립되었다.


정치면에서도 모든 정당ㆍ단체가 참석하는 ‘정치협상회의’가 1946년 1월 16일에 열렸다. 장개석은 미국과 국내 각계의 비난과 압력에 못 이겨 마침내 국민당 일당독재의 권력체제를 개편하는 데 동의했다. 휴전협정의 일환으로 12개월 후에 장개석 군대는 90개 사단, 모택동 군대는 18개 사단으로 제한하는 협정도 성립했다. 다시 그 6개월 후에는 국민당군 50개 사단, 공산당군 10개 사단, 즉 군사력의 5 대 1 비율과 그 배치지역 결정에 대한 공산당의 동의를 얻는 데 성공했다.


정치협상 측면에서도 1936년 제정된 채 햇빛을 못 본 헌법 초안을 1946년 5월 5일 제헌국민대표대회를 열어 상정키로 하는 등의 정치적 민주화 계획이 합의되었다.


그밖의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한 ‘중경회담’합의사항은 2개월이못 가서 모두 깨져버렸다. 어느 쪽에 더 책임이 있느냐는 것을 추궁하기 좋아하는 학자들이나 공식문서들도, 참으로 안 된 일이지만, 국민당 내 우파세력에게 그 책임을 돌리는 데 대체로 일치했다. 장개석 총통 개인은 점점 더 이 발판을 잃은 데 초조해진 반동파의 책동을 막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1948년에는 이미 중국대륙은 주요지역이 거의 공산당 세력하에 들어간 듯했다. 국민당군은 실제로 이렇다 할 반항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많은 사단이 미식 무기와 장비를 가지고 부대째 공산당군 측으로 넘어갔다.


국민당 정권이나 공산당 정권을 반대하면서 많은 지식인, 중산계층의 정치적 세력을 구축했던 중도ㆍ온건ㆍ민주적 ‘민주동맹’(民主同盟)이 1947년 10월 28일 강제 해산되고 대량 체포되자 지식인과 중산층은 별수 없이 공산당 쪽으로 돌아섰다. 장개석의 실책 가운데서도, 민주적 온건분자에 대한 탄압으로 그들을 공산당으로 몰아붙인 실책처럼 큰 것은 없다.


 


대륙은 민중에게


 


전세가 결정적으로 기울었다. 국민당 정권은 군대의 충성마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트루만 대통령 정부는 이 시기에 중국의 일부라도 확보하기 위해 국민당 지배하의 지역과 공산당 정권 지배하의 지역으로 중국을 분할하는 정책을 검토했다(『중국백서』, 279쪽).


경제적 판단은 국민정부의 무제한적인 지폐 인쇄ㆍ발행으로 1936년 기준으로 100만 배의 물가앙등을 초래했다. 이 참상 속에서 민중이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는 너무도 분명한일이었다. 공산당 지배지역에서는 8년간의 대일전쟁 속에서 오히려 생산이 증가하고 물가가 안정되어 민중의 생활은 어려운 속에서 조금씩 향상되고 있다는 소식들이 영향을 미쳤다. 그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국민정부 상층부가 민중의생활고에 아랑곳없이 사복을 채우고 향락을 누리고 있는데 비해 공산당 간부들이 토굴 속에서 산다는 평등 문제가 더욱 크게 작용했다. 평등의 욕구는 혁명의 정열로 확대해 갔다.


만사휴의(萬事休矣)를 깨달은 국민정부는 1949년 1월 8일, 미ㆍ영ㆍ소ㆍ불 4개국 정부에 공산당 정권과의 중재를 호소했다. 그러나 중국 포기로 정책을 전환한 미국은 물론, 나머지 3국도 이미그 시기는 지났다는 회답을 보내왔다. 공산당군은 장강 이북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국민당 정권의 항복을 요구하고 있었다.


1월 21일 장개석은 그토록 놓으려 하지 않았던 권력을 이종인(李宗仁) 부총통에게 넘기고 손과(孫科)를 총리로 하는 성명과 함께 20년간 누리던 1인독재 권력을 내놓고 남경을 떠났다. 이종인 총통대리의 국민당 정권은 종국에 와서야 장강 이남에서 농지개혁과 탄압완화 등 지식인과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장개석과 당내 우파세력은 이를 끝내 저지하려고 이종인에게 압력과 간섭을 가했다. 공산당 정권과의 직접 휴전협상제의도 그들에 의해 저지되었다(같은 책 294쪽). 결국 온건파인손과는 국민당 최강경 극우세력 대표인 군정부장 하응흠에 의해서 총리 자리에서 밀려났다. 하 장군은 행정원장직까지 겸했다.


정부요인과재벌들은 해군함정과 군 항공기편으로 그 가족과 재산을 싣고 광동으로 또는 대만으로 도피했다. 권력자들과 재벌들이 재산을 싸가지고 도피한 뒤에 중국의 농민은 중국 대륙을 손에 넣었다. 공산당군 총사령부는 주덕의 이름으로 국민당 군대에 대해 1949년 4월 12일까지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발했다. 8개 항목 조건이 제시되었다. 총사령부는 그 기한을 4월 20일까지 연기하고 그것이 최후통첩이라고 선언했다. 하응흠은 이를 거부했다.


공산당군은 1949년 4월 21일 0시를 기해 400마일의 장강 연안공격 출발점에서 일제히 도강했다. 저항하는 국민당군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광동으로 천도했던 국민당 정권은 대만으로 건너갔다. 955만 8,000평방킬로미터의 땅과 4억 5천만의 인민을 버리고.


 


가슴 아픈 예언


 


상상을 절했던 5억 인간의 20년에 걸친 대 드라마의 종막은 너무도 안티 클라이맥스적이다. 20년간 1인ㆍ1당독재의 권력을 5억 민중 위에 휘둘러온 한 영웅의 권력사도 역시 그렇다.


다음의 글로써 그 모든 것을 결산할 수 있겠다.


 


중국은 강력한 군사력의 침범을 받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념의 도전을 받은 것이다. 이 새로운 이념에 이기는 길은 그보다도 더 큰 호소력을 지니고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이념으로 대항하는 것밖에 없다. 이 이념이란 정부가 정부와 사회의 모든 분야ㆍ계층에서 정치적ㆍ경제적 부패를 도려내고 무능과 안일을 제거하여, 민중에게 평등과 사회정의를 제공하고 개인의 모든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여 개인을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토대는 가난한 농민과 민중을 존중하는 것이다. 공산주의를 무력으로 이기려 한다면 중앙정부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그것은 오직 정치적ㆍ경제적 개혁으로 그들의 고통을 덜어줌으로써, 민중의 충성과 열성과 지지를 얻는 것으로만 가능하다(알버트 C. 웨드마이어 중장이 중국 행정원과 국민정부 각료 전원 합동회의에서 한 종합정세평가, 『중국백서』, 1947.8.22).


 



  • 『다리』, 1972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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