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조건반사의 토끼」

냉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1-21 17:10
조회
971

3-2. 「조건반사의 토끼」(1971년, 『전논』)


 


우리나라의 지적 풍토를 생각할 때 언제나 연상되는 것이 미국의 미시시피 주다. 이 미시시피 주는 지금도 인간진화론을 주법(州法)으로 금지하고 있다.


인간은 신이 진흙을 비벼서 입김을 불어넣어 만든 것이지, 과학이 실증하고 있는 것처럼 보다 하등의 동물에서 상등의 동물로 진화해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타(佛陀)가 만들었든 ‘알라’신이 만들었든 또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만들었든 실제로 오늘날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불편도 없다. 원숭이가 조상이라고 해서 진흙에서 나왔다는 것보다 별로 권위가 떨어지거나 쑥스러울 것도 없다.


오히려 전능하신 신이 창조한 것이라면 어째서 이토록 불완전하고 제약 많고 약점투성이인가를 원망하게 되지만, 차라리 아메바에서 진화한 것이라면 용케도 이만큼이나 진화를 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 인간은 무한히 진화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문제는 이런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식ㆍ사상ㆍ이성의 발전을 법률이라는 인위적인 것으로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이다. 작년 봄, 미시시피 주의 한 젊은 초급중학 여교사가 인간진화론을 불법화하고 있는 주법에 도전하여 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얼마 후 주 대법원은 인간은 진흙과 하나님의 콧김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성경에 씌어 있는 이상, 인간진화론은 주법 규정대로 위법이라고 판시했다.


로마 교황청이나 신교의 신학과 교리에 의한 규정은 비신도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니 별로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다. 그러나 법률이 이것을 시민에게 강요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것은 주든 국가든 정치권력의 의사를 대변하는 것이고, 그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은 그 사회질서에 대한 도전이며 따라서 그 제도나 질서 또는 체제에서 이익을 보는 세력이 국가 또는 주라는 이름으로 제정한 법률의 형벌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가 해마다 발행하는 미국 연감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미시시피 주는 “풍부한 자연자원을 갖고 있으면서도 가장 고립된 주이고 미국 50개 주 가운데 가장 개인 평균소득이 낮으며…… 윌리엄 포크너, 테네시 윌리엄스, 유도라웰티, 리처드 라이트 등 훌륭한 인물을 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주의 교육수준은 전통적으로 미국에서 가장 낮다.”


이만하면 시민의 과학적인 사고, 지식의 습득, 환상이 아닌 이성의 추구,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통틀어 수백만 년을 두고 인간이 진보해온, 그리고 부단히 추구해온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미시시피 주의 법정신과, “미국에서 가장 덜 깨고, 미국에서 가장 낮은 교육수준”이라는 기술 사이의 부인할 수 없는 인과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한마디로 그것은 ‘언론의 자유’와 ‘사회의 발전’이 딴 차원의 것이 아니라 바로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낡은 관념과 새로운 관념의 투쟁의 역사라는 것은 이론으로는 상식이 되어 있다. 중세 유럽을 지배한 종교와 인간 이성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의 긴 암흑의 역사를 새삼스럽게 상기할 필요도 없다.


보수적 본능은 그 사회나 제도의 개혁이 사회의 기초를 위태롭게 한다는 보수적 교리를 낳게 했다. 이와 같은 보수적 사고는 미신으로 더욱 강화된다. 습관이나 사고방식의 전체를 대표하는 어떤 이념이 종교 신앙과 결부되고, 그것이 신의 보호와 축복하에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그런 사고나 사회질서에 대한 비판은 독신(瀆神)을 뜻하게 되어, 신에 대한 무엄한 도전이라는 낙인이 찍혀진다. 갈릴레이, 브루노…… 등 인간 이성을 대표하는 얼마나 많은 고귀한 사람들이 권위를 추어올리는 ‘미신’의 제단에 피를 바쳐야 했던가.


중세의 이 인간말살 역할을 담당했던 신학교리라는 미신은 오늘날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퇴색하고 있는 교리로 바뀌었다. 퇴색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아직도 많은 나라에서 중세기의 신학교리보다도 강력하고 완고한 ‘권위’를 휘두르고 있다. 정치화한 현대의 교리는 무엇이든 여태까지 지켜온 사고나 가치나 체제나 질서의 변화는 그 사회의 기틀을 위태롭게 한다는 보수적 정치교리로 경화되어 있다. 그것은 곧 국가의 안녕과 안정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국가이익’신학으로 정치화된다.


이와 같은 ‘신앙’이 이성의 도전을 받지 않고 횡행하는 곳에서는 이성과 진실은 정치화한 교리에 의해 위험시된다. 소크라테스조차 기성질서의 법률이라는 권위 앞에서 거적을 깔고 앉아 독배를 마셔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존재조차 없는 오늘날의 시민이 그 희생물이 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정치 이데올로기가 ‘국가 공인’의 원칙이 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그 ‘공리’에 대해서 ‘왜’니 ‘무엇 때문에’니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라느니 하는 의문을 던지는 사람은 위험하고 유해한 존재라고 인정된다.


그렇지만 인류라고 거창하게 예를 들 필요도 없이, 한 제도, 한 국가, 한 사회는 항상 이와 같이 ‘기성공리’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 의해 향상되고 발전되고 세련되어왔다.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그 낡은 공리가 깨어지면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인 지배세력은 그들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다.


최근『뉴욕 타임스』와 미국 정부 사이의 베트남전쟁에 관한 정부 비밀문서 폭로 보도사건을 둘러싼 소송은, 현대사회의 미신 대 과학, 권위 대 이성, 허위 대 진실, 공리 대 의문이 엮어 내려온 인류발전과 진보의 현대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미신과 권위와 공리를 고집하는 것이 결코 그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우리나라의 언론이나 지식인들은 이 사건에서 미국 대법원이 내린 판결에 감동한 나머지, 문제의 발단인 그 베트남전쟁에 관한 비밀문서가 내포하는 뜻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느낌이 있다.


미국 대법원과 미시시피 주 대법원의 두 판결은 너무도 대조적 이어서 흥미진진하다. 지적 수준, 이성적 격차, 정치의식의 성숙도 등에서 미시시피 주의 현실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재확인도 되어준다. 베트남전쟁에 관한 이 미국 정부의 비밀문서는 그동안 미국정부 발표가 모두 거짓이었다는 데서 문제가 된다. 국민에게 알린 것은 모두 허위이고, 그 비밀문서 속의 허위가 모두 사실이다. 모든 베트남정책이나 군사행동이 바로 그것을 꾸민 사람들이 대표하는 국가라는 권위의 명령에 따라 낯선 땅에서 쓰러져 죽은 국민을 속였다. 한마디로 가장 민주적이라는 국가의 권위를 대표하는 정부가 국민을 사기해온 것이다. 그것도 웬만한 문제에서의 사기가 아니라 바로 국민의 생명을 값으로 치르는 사기다.


책 한 권이 되는 그 정부 문서라는 것을 쭉 읽어 내려가노라면 미국 정부의 지도자들이 위는 대통령에서 밑으로는 하나의 조사원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도착된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들의 생각은 다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투쟁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절대적인 가치라는 관념에 지배당하고 있다. 그것이 하나의 종교적인 신앙처럼 되어 있고, 따라서 한 체제가 딴 체제를 파괴하는 것만이 신의 축복을 받는 일로 생각하고 있다. 베트남전쟁 정책을 꾸며내는 일의 모든 차원의 과정에 관계한 사람들이 마찬가지다. 다만 조지 볼이라는 한때의 국무차관만이 그 중세적 사상풍토 속에서 다소간이나마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결국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주장한 조지 볼은 그곳에 오래 있을 수가 없어서 관직을 떠나버렸다.


이쯤 되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법칙은 경제법칙만이 아니라, 정치에서 더욱 그 해독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미국 국민의 인간적 타락과 사회질서의 와해, 30만에 달하는 애꿎은 미국 젊은이들의 사상(死傷)과 몇천억 달러의 파괴적인 자원소모는 두말할 것도 없고, 수백만 명의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을 죽이고 죽게 하고 몇 나라의 국토를 황폐하게 만든 그 행위가 모두 한 가지 집념 때문이란 것을 그 비밀문서는 증언해준다. 그 한 가지의 신앙이란 소위 체제간의 ‘냉전’(冷戰)의식이다.


모든 사상(事象)을 흑과 백, 죽일 놈과 사랑할 놈, 천사와 악마,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미국 대 타국, 민주주의와 뭣, 자유주의와 뭣…… 이라는 식으로 그들은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종전 이후 오늘날까지 미국을 지배해온 사상이다. 50년대의 냉전 구조 속에서 활동하고 지적 형성을 하고, 그 속에서 출세하여 미국의 지배적 세력권에 들어올 수 있었던 그들은 이와 같은 이치관념(二値觀念), 즉 흑백사상의 포로들인 감이 있다.


그러기에 자기가 믿는 신앙과 대립하거나 그 신앙에 질문을 던지는 체제나 제도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모든 허위ㆍ사기ㆍ음모ㆍ부정ㆍ불의는 용서받는다는 식이다. 실제로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것이 이 비밀문서로 밝혀진 베트남전쟁이다.


그 결과는 이미 세상에 드러난 대로다. 그토록 한 국가와 국민이 치욕과 위기에 처한 예는 로마제국을 두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민주주의라는 창조적 에네르기에 넘치는 기본원리와 정신과 제도가 이토록 병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큰 원인인 냉전사상이라는 것을 다시금 꼼꼼히 음미하게 만든다.


모든 가치를 흑과 백으로만 가리려는 이 관념이나 사상은 결국 그것이 파괴하려 했던 대상에 끼친 피해의 몇십 배를 자기 자신에게 끼쳤다. 구체적으로 닉슨은 미국 정책과 냉전의식이 행동의 대상으로 삼았던 중공 방문을 간청함으로써 그 권위의 일부를 회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냉전의식에 바탕을 둔 허위의 정책은 남을 속이지는 못하고 자기 자신만을 속여온 결과가 되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역설인가.


비밀문서 사건이 났을 때, 오웬 라티모어라는 미국 출신의 석학은 그것이 냉전 십자군의 사상적 표현이었던 50년대와 60년대 초기의 매카시즘의 논리적인 결과라고 개탄했다. 매카시즘에 관한 설명을 새삼스럽게 할 필요는 없겠다. 요컨대 학문의 자유,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신앙의(종교적 신앙뿐 아니라 누구든지 자기가 옳다고 믿는 신념을 가질 수 있는)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근본적 가치들이 반공(反共)이라는 단 한 가지 가치 때문에 부정된 사상통제의 선풍이다. 매카시즘과 매카시즘적 사고방식은 미국 정부와 사회 전반에 걸쳐서 사실을 사실대로 진실을 진실대로 보고, 말하고, 주장할 수 있는 지적 정신을 뿌리째 뽑아버렸다. 50년 대의 유능하고 양심적인 관리ㆍ학자ㆍ전문가 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쫓겨나거나, 국외로 추방됐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침묵을 강요당했기 때문에 미국 정부와 사회 전반에 걸쳐서 허위만이 지배하게 되었다고 라티모어는 개탄한다. 매카시즘의 지적 풍토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목적하는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 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사실 아닌 환상의 최면술을 걸어버린다는 것이다. 미국의 통치세력이 발명한 이 매카시즘이라는 최면술의 주술(呪術)은 베트남전쟁의 파탄과 닉슨의 중공 방문 등의 형태로 겨우 풀리려 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적극적인 가치이고 원리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 속에 무한한 창조의 에네르기를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을 부인하기에 앞서 그것이 지니는 높은 이상과 능력을 긍정하는 사상이다.


매카시즘은 이토록 훌륭한 사상체계를 ‘무엇을 반대하는 것’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그토록 적극적ㆍ창조적이고 그것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자동적으로 엄청난 공격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무엇을 반대하기 위한’부정적ㆍ소극적ㆍ보수적 사상으로 타락시키고 말았다.


그것은 끝없이 발전ㆍ진보할 수 있는 인간, 특히 지성인을 위축시켜 그 사회에서 지성인의 공헌을 박탈한 셈이다. 이것은 매카시즘의 희생물인 국민 일반과 지식인만의 슬픔이 아니다. 국민과 지성인의 건전한 자유의 향유와 행사를 통해서만 발전되고 안정될 수 있는 사회에서 발전과 안정을 빼앗았다는 점에서 지배자 자신의 피해가 아닐 수 없다. 지배자도 궁긍적으로는 그 사회 속에 있고 그 사회의 성쇠는 바로 그 지배자의 성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냉전의식은 그 표현수단으로서 언어의 기능을 전제로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언어가 의식(인식ㆍ관념)의 그릇인 이상,의식이 일그러지면 그 언어라는 그릇은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


일그러진 언어로 전달되는 사상은 일그러진 사상을 그 커뮤니케이션 상대에게 재구성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사각형을 보고 삼각형이라는 표면의 언어로 전달된 사상이 상대방에게 삼각형의 형상을 재구성하게 하는 절차다. 사각형을 놓고 삼각형의, 또는 원을 놓고 직선의 관념을 국민에게 재구성하게 하려는 의도는 현대 국가사회에서는 주로 통치자들의 정치적 목적에 있다.


그 좋은 예가 어제는 베트남전쟁이고 내일은 중공의 관계다.


매카시즘의 정치적 카운터파트인 덜레스는 그만두고라도, 얼마 오래되지도 않은 과거의 국무장관 러스크도 “중국 대륙에는 정권이나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인식을 미국 국민과 이른바 자유세계의 기본관념으로 강요해왔다.


닉슨이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용어로 이 “어디까지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호칭하게 되고, 대통령 재선을 위해서 북경 방문을 간청하게 된 사태변화에 우리 국민은 당황하고 있는 듯하다. 어디까지나 ‘무’(無)인 것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나오고, 미국 대통령의 재선이 나오고, 극동의 평화니, 4대국 보장하의 평화니, 미ㆍ중의 한반도중립화안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중국인이 곰을 시켜서 하는 요술도 재주도 아니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사실이 사실 그대로 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제임스 레스톤이라는『뉴욕 타임스』의 저명한 기자(부사장)가 북경에서 바깥세계로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중공 하면 소련의 괴뢰이고 민중은 기아선상에서 피골이 상접해 있고, 인민은 금세라도 폭동과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타도하려 하고 있고, 농민은 모두 강제수용소에서 웃음을 잃은 동물이 되었고, 과학이니 문화는 모조리 파괴되어 야만상태가 되었고…… 이 모든, 여태까지 가르쳐지고 교육되고 선전되어온 것을 무엇으로 해명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레스톤의 기사를 읽을 때마다 이와 같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우리들의 인식론적 기능은 냉전사상과 체계 속에서 조건반사(條件反射)의 토끼가 되어버린 감이 있다. 예로 ‘중공’이라는 용어는 즉각적으로 ‘기아’‘괴뢰’‘피골상접’‘야만’‘무과학’‘반란’‘정권 타도’‘침략’‘호전’(好戰)…… 등 냉전용어와 그것이 담고 있는 그와 같은 관념을 우리에게 일으켜왔다. 우리는 강요된 조건반사의 토끼가 되어 있다. 예로 든 중공이 그런지 안 그런지는 알 길이 없다. 레스톤이라는 사람이 권위 있고 양심적인 기자이며 세계 최대 권위지인『뉴욕 타임스』의 부사장이라 하더라도 “그 친구는 빨갱이야”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객관적 사실이 교육되고 선전되고 세뇌된 대로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아니다. 진실로 문제인 것은 그렇게 말하면 그렇게 믿어야 했고, 어떤 사상(事象)에는 어떤 용어를 사용해야하고, 그 용어를 사용하면 반드시 일정한 스테레오 타입적 관념을 머릿속에 형성하게끔 우리들의 냉전용어의 조건반사 법칙에 충실한 토끼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다.


한반도를둘러싸고세계의정세는급변하고있다고들한다. ‘잠을 깨고 나면 세상이 변해 있다’고들 한다.


그 잠은 생리적인 잠이기도 할 것이고 어쩌면 사상적ㆍ지적ㆍ이성적 ‘잠’인지도 모른다. 이런 ‘잠’을 자게 하는 자가 누군가는 따지기가 어렵다. 어쨌든 잠을 자고 있었다는 사실은 잠을 깨고 나서 ‘세상이 변해 있다’는 진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므로 그것도 사실이다.


한반도 주변에는 와싱톤ㆍ북경ㆍ도쿄ㆍ사이공 또는 베를린에서 일어나는 진동(震動)의 파동이 밀어닥치고 있다. 벌써 지난 몇 개월 사이에만도 몇 파(波)의 진동이 한반도의 지각을 흔들었다. 저 멀리 수평선상에 아득히 주름살 같은 파도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주름살처럼 분간도 할 수 없는 작은 파도가 우리의 시야 속에 들어설 때에는, 그 하나하나가 해일과 같은 폭발력을 가진 파도인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발밑에 시선을 둘 것이 아니라 세계라는 넓은 수평선 위로 시선을 옮겨야 할 때가 왔다.


그리고 닥쳐오는 세계정세의 파도 속에서 굳건히, 현명하게 그리고 평화스럽게 우리의 생을 영위하기 위해서 해야 할 제1의 과 제는 사상의 조건반사적 토끼가 되지 말아야 하는 일이겠다.


 



  • 『한반도』, 197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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