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건 물음을 반복하여 던지는,,,/ 이진경
리영희 평전 <진실에 복무하다>(권태선, 창비, 2020)를 읽고
1929년생 리영희 선생의 평전을 읽고 같은 해에 출생한 시인 김시종이 떠올랐다. 김시종 선생의 삶에 대해 쓰면서 '삶에 존재를 걸다'고 적은 바 있는데, 동년 출생의 리영희 선생이 또한 그랬기 때문이다. 정말 존재를 걸고, 혼신을 다해서 산 삶이 거기 있었다. 덧붙이자면, 이는 내가 모르던 것이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강한 의미에서 삶에 대한 충실성을 명확한 특이성으로 갖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목처럼 '진실'이란 말로 그의 삶을 요약하는 것은 충분히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는 생각이다. 진실을 사는 것, 진실을 살아내는 것, 진실이 요구하는 바에 충실하게 따르는 것.
그런데 존재를 건 삶이란 점에서 비슷했지만, 삶이 그린 궤적은 다른 유형이었던 것 같다. 김시종 선생의 삶이 일본과 재일조선인 모두로부터 벗어나는, 양자 모두의 거절에 대해 양자 어느 것도 아닌 '진실'을 살아내는 것이었다면, 리영희 선생은 권력과 대항하는 진실을 살아내고자 했고, 권력의 반대편, 권력과의 대립관계 속에 있는 진실을 살아내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점에서 그는 정말 평생을, 뇌일혈로 몸의 자유의 반을 잃은 후에도, 그 대립의 첨점에 서 있었다. 흔히 사용하는 '역사'란 말을 쓴다면, '역사의 첨점'을 살아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삶에는 대립과 대결의 역사가 고스란히, 아니 전적으로 접혀들어가 있다. 그의 삶에 대해 쓰는 것이 역사를 쓰는 것과 다른 것이 되기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누구의 삶이라고 역사가 스며들지 않을 수 있으랴 하겠지만, 역사가 스며들고 접혀드는 양상은 어느 지점에서 어떤 삶을 사는가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가령 김시종의 삶 역시 역사가 강하게 접혀들어가 있지만, 그의 삶이 이항적 대립이 아니라 그 이항적 대립의 틈새에서 펼쳐졌다는 이유로 인해 그것은 아주 다르게 접혀들어간다. 충돌하는 두 힘 사이에서 때론 이것과 때론 저것과 대결해야 했기에, 나아가 그 사이에 다시 끼어드는 다른 힘들 또한 있었기에 역사가 접혀들어가는 양상은 어느쪽의 역사와도 대칭적이지 않으며 스며드는 역사는 굴곡이 많다. 반면 리영희 선생은 대립과 충돌의 첨점에 있었기에, 그의 삶에는 대립의 역사 그 자체가 접혀들어가 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래서 김시종의 평전은 결코 역사책이 될 수 없는 거리를 갖지만, 리영희 선생의 평전은 역사책과 매우 인접해있다. 역사로서의 삶, 그것이 리영희 선생의 삶이었던 것이다.
이점에서 보면 역사와 맞붙은 듯 보이는 삶, 역사와 나란히 가는 삶이란 '인간적'이지 않은 듯 보이고, 개인적인 면이라고 없는 팍팍하고 정형화된 삶으로 보일 수도 있을 듯하다. 가정에서나 개인적인 생활에서 그 충실성은 다양하지 못하고 유연하지 못한 면모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평전에서의 리영희 선생은 정말 그랬던 것 같다. 그렇기에 역으로 이 책의 저자는 리영희 선생의 '인간적인' 면모, "천진난만하고 다정다감한 인간을 전해주고 싶다고 서문에서 썼겠지만, 그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의 삶 자체가 그런 충실성으로 더없이 일관된 것이었는데, 평전이 그의 삶을 등지지 않고서 어떻게 그런 삶을 '인간적'으로 그릴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서문과 달리 '인간적' 면모가 그다지, 아니 실은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외려 역사와 하나가 된 인간, 역사 속에서 진실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책무에 전적으로 충실한 모습으로 일관되어 있는 것은 저자의 능력이나 기자라는 직업, 혹은 삶을 보는 그의 태도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리영희 선생 자신, 대립과 대결의 첨점에서 역사를 살아냈던 그의 삶에 기인한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역사를 살아내고 진실에 복무하는 삶을 살면서도, 개인적인 고민과 갈등, 번민이 많은 사람이 있을 것이며, 실은 오히려 대부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리영희 선생은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의 간극이 지극히 작았던 사람, 바로 그 점에서 드물고도 어려운 사람이었다고 보인다.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의 간극이 클수록 고민과 번뇌는 많아지고 내면의 갈등은 심해진다. 반면 그 간극이 거의 없고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 자신의 삶이자 욕망인 사람에게는,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쓰고 행하는 것 말고는 다른 삶의 여지를 두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런 고민과 번뇌, 갈등은 결코 크지 않을 것이기에, 역사적 삶으로 회수되지 않는 내면이나 그로 인해 다른 출구를 찾는 면모를 찾는 것은 오히려 그의 삶을 그리는데 패착이 되기 쉽다. 그렇게 살지 않은 사람을 고뇌나 갈등의 내면을 찾아주는 것처럼 부당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
더구나 권력을 가진 자, 권력으로 역사를 써가는 이니셔티브를 가진 자라면, 자신이 써가는 역사로부터 선택의 여지가 크고 다른 삶, 다른 역사의 여지가 크기에 고민하고 고심하는 내면 같은 것이 생각보다 클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 없이 덮쳐오는 역사를 살아내야 하는 사람, 조여오는 권력에 대해 오직 충실성이란 대의에 따라 대결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여유와 여지가 대단히 작다. 그렇기에 역사의 이니셔티브를 쥔 자의 삶보다 그에 대결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의 삶이, 고난과 고통이 비교할 수 없이 심대하다 해도, 실은 훨씬 더 역사에 가까이 밀착되어 있다. 그 역사가 지금처럼 다양성을 갖고 분기하는 역사가 아니라, 빠져나갈 길 없는 대립의 이원성을 가진 역사라면 더욱더 그렇다.
이런 생각 자체가, 리영희 선생을 역사와 대칭적인 삶으로 그려낸 평전을 읽고 든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이다. 그렇게 쓰여지지 않은 책을 동시에 본 것도 아니니까. 리영희 선생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기에 그렇다고도 할 것이다. 그 역시 물론이다. 사실 그의 책이나 글도 많이 읽지 않은 편이니까(나는 리영희 선생과 달리 80년대, 이념 없는 운동을 넘어서려는 세대에 속하기에, 나의 독서는 현실에 대한 '평론'보다는 이론적인 것이었고, 나의 진실은 사실적인 진실보다는 이념적인 진실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가 살아낸 역사와 연속적인 시대를 살았기에 그 역사가 어떤 역사인지를 안다면, 그리고 삶이든 사실이든 혹은 역사든 '진실'에 전적으로 충실하려는 사람이라면 그런 역사를 어찌 살 것인지를 안다면, 평전에서 묘사된 리영희 선생의 삶은 한 개인의 인격적 특징이라기보다는 '이런 사람이라면 누구나'의 비인칭적 특이성에 속하는 것임을 안다. 그가 다섯번의 투옥을 견디어내며 오직 진실성이라는 '자신의' 대의에 일관될 수 있었던 것은, 의지의 강함이나 영웅적 능력 같은 개인적인 자질 때문이 아니라, 그와 같은 인물이 갖는 특이성이 그가 살아내야 했던 역사와 만날 때면 언제나 반복될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점에서 이 평전은 '리영희'라는 고유명사로 표시되는 어떤 인격, 어떤 개인의 전기라기보다는 전개인적이고 비인칭적인 특이성의 전기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리영희 선생에 대한 평전은, 혹은 그의 이름을 기리는 기념사업은 한 개인의 전기가 아니라 어떤 비인칭적 특이성에 대한 기념비가 되어야 한다. 유사한 조건이 반복된다면 동형적인 양상의 특이성을 반복해서 살 법한 삶, 아니 유사한 조건에서라면 누군가가 반복해서 살고자 할 만한 삶으로, 따라서 어떤 조건에서든 '리영희적인'이라는 말로 요약될 삶의 특이성을 향해 누군가 주사위를 던지도록 만드는 기념비가 되어야 한다. 반복적인 투옥에 비교될 수 있는 어려움 앞에서도, '패배'라는, 어쩌면 훨씬 더 기대값이 큰 예상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에 대한 충실성을 향해 삶을 건 물음을 반복하여 던지게 만드는 미래의 기념비가 되어야 한다.
이진경/ 수유너머 104 회원, 서울 과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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