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으로서의 리영희 선생 - 베트남 전쟁 보도를 중심으로 / 신홍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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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6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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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알려면 사건의 앞면만 보면 안 된다. 사건의 뒷면은 물론이고 옆도 보아야 하고 깊이까지 보아야 한다. 철저하게 전체를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은 앞만 보고 이를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부장은 사물을 올바로 보려면 의문을 갖고 보라고도 했다. 기자가 아주 경계해야 할 것은 '일차원적인 사고' 라고 했다. 즉흥적으로 사건을 보는 것, 사회통념이나 고정관념으로 보는 것, 상식적인 눈으로 보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조금 더 강조해서 말한다면 '모든 것을 의심하라' 는 것이었다. 한 발 물러서서  '비판적 이성 '의 눈으로 ,  '다시' ,  '더 깊이'  보라는 것이었다.....   



언론인으로서,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리영희 선생이 남긴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는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파헤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전쟁은 내가 리영희 선생과 함께 약 4년 동안 조선일보 외신부에서 일하면서 지켜본 전쟁이기도 하다. 내가 리 선생과 함께 일한 것은 1967년 초부터 1970년 까지였다. 그는 외신 부장이었고(39세), 나는 평 기자 (27세) 때였다. 당시는 한국이 베트남에 파병한(1965년) 지 얼마 안 되는 시기로, 베트남 전쟁이 날로 격렬해지고 있을 때였다. 미국이 1966년 한 해 동안만 63만 8천 톤의 폭탄과 50만 톤의 야포 탄을 퍼부어대고 있을 때였다. 그때까지 터뜨린 포탄은 미국이 태평양전쟁 때 쏟아 부은 65만 톤의 2배, 6.25 한국전쟁 때의 3배에 달하는 양이었으니 그 전쟁의 양상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알 만하다. 뿐만 아니라 미.소 간의 냉전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을 때여서 그야말로 세계의 긴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선 반反식민지 민족해방투쟁과 민중의 사회. 계급혁명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역사의 객체에 지나지 않았던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당당하게 등장하여 자신의 목소리로 권리를 주장하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제3세계의 비동맹운동, 중국공산당의 사회주의 건설 실험, 유엔에서의 중국 대표권 문제도 큰 관심을 끌고 있었다. 당시 조선일보 외신부는 이른바 4대 통신이라고 하는 AP, UPI. AFP, 로이터 통신을 받아보고 있었는데, 이 통신들이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는 뉴스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세계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얼마나 격동하고 있는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통신들이 ‘급전’(急電,급히 전해야 할 뉴스라는 뜻. 뉴스 앞에 주로 urgent란 표시를 달았다), 또는‘특전’(特電,‘급전’보다 더 급한 뉴스라는 뜻. 통신사에 따라 bulletin〔대자보 게시판으로 급히 알린다는 뜻에서 나온 것 같다〕이나 flash, snap으로 표시)이란 등급을 매겨 보내오는 큰 뉴스의 대부분은 베트남 전쟁과 미.소 간의 ‘차가운 전쟁’에 관한 것이었다.


이처럼 세계가 대전환시대를 맞고 있던 시기에, 당시 주목해야 할 국제적인 문제가 적지 않았는데도 ‘이영희 부장’(당시엔 이름을 ‘리영희’가 아니라 ‘이영희’로 썼다)은 왜 하필 베트남 전쟁에 그토록 많은 관심을 갖고 몰입했던 것일까? 그 가장 큰 이유는 베트남 전쟁이 당시 세계가 주목한 가장 큰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이 파병한 전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전쟁이야말로 그가 그때까지 고심하면서 모색해 왔던 세계관과 국제정치관 같은 것들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전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도저히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잘못된 전쟁’,‘나쁜 전쟁’, ‘정의롭지 못한’ 전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리영희 선생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세계관 때문에 1950년대 후반에 치열하게 전개됐던 베트남 민족의 반식민지 민족해방투쟁과 사회혁명의 몸부림, 중국 5억 민중의 인간다운 삶을 찾으려는 중국공산 당의 혁명전쟁에 열정적인 공감을 느꼈어요. 그리고 아프리카 가나공화국으로 독립을 이끈 엥크루마의 반백인식민지투쟁, 그것을 기점으로 한 아프리카 16개 피압박민족의 백인제국주의 식민지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쿠바의 승리로 각성한 라틴아메리카 민중 의 급격한 사회. 계급혁명의 격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 피압박 인민의 백인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들에 나는 열정적인 공감을 느꼈어요.” -『대화』리영희 대담 집,192 p


그리고 이런 세계관뿐만 아니라 이에 따른 양심의 괴로움도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국제정치에서의 정의의 문제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회고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베트남 사태에 대해 군사적으로 개입한 1960년부터 미국이 패망하고 베트남 에서 도망치다시피 철수한 1975년까지의 긴 세월 동안, 정말이지 나의 온 관심은 베 트남 전쟁에 쏠려 있었어요. 그동안 미국 군대의 포탄과 고엽제와 기총소사로 수없이 죽어간 베트남인들의 죽음과 고통과 눈물을 어느 하룻밤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대화』339 p


이런 세계관과 양심의 괴로움 때문에 이영희 부장은 베트남 전쟁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고 이 전쟁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 파병한 당사국인데다가 극우에 가까운 반공주의가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이 전쟁을 비판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때가 어느 때인가? 박정희가 위압적으로 칼을 휘두르며 대통령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닌가? 당시 조선일보 외신부에는 이부장과 뜻을 같이 하면서 베트남 전쟁을 다루어나갈 기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오직 이영희 부장 혼자뿐이었다. 편집국 간부들 가운데는 편집국장 한 분(김경환 국장, 나는 지금도 이 분을 존경하고 있다)이 뒤에서 버팀목이 되어 이 부장을 지원해줄 뿐, 뜻을 같이하여 그를 도와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평 기자들 가운데는 경제부의 임재경 선배만이 이영희 부장과 뜻을 같이 하여 자주 만나며 가까이 지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 외신부에는 부장 외에 6명의 기자가 있었는데 (많을 때는 7명) J차장도, 3-4년차 되는 L기자도 극우에 가까운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대적이었다. 차장은 6.25 때 가족과 함께 북에서 월남한 사람이었고, L 기자는 육군 정보기관에서 일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부장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어 마지못해 따라오긴 했지만, 뒤에서는 부장을 못마땅하게 여겨 투덜대며 비아냥거렸다. 다만 또 다른 L기자만이 불평 없이 부장을 따라가고 있었다. 기자들이 쓴 해설기사는 부장이 철저하게‘데스크’를 보아 고쳐서 내보냈는데, 그러다 보니 당연히 뉴스를 다루는 부장의 견해가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부장의 입장이 못마땅한데다 자신들의 기사를 마음대로 고치는 것도 불만스러웠을 것이다. 그들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은 바랄 수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영희 부장은 이른바 시니어 기자라는 사람들에게는 기대를 거두고 새내기 기자 두 사람에게 희망을 걸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입사한 지 일 년 남짓한 동기생 P기자(작고)와 나에게 기자다운 기자가 되는 법을 열심히 가르쳐주었다.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덜 사로잡힌 순결한 젊은이들이라 우리는 부장을 잘 따르며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받아들였다. 이 수련과정에서 나는 때때로 시련을 겪고 고달픔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게 된다. 만약 그 때 내가 그런 훈련과 지도를 받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하는 자문도 한다. 이 부장이 우리를 지도하는 방식은 주로 대화를 통해서였다. 당시 국제 뉴스에서 가장 큰 사건이 베트남 전쟁이었던 만큼 우리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자주 대화를 나눴다. 그때 내가 자주 들었던 말이 있는데, 그 말이 아직까지도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그것은 올바른 저널리스트가 되려면 결코 문제를 ‘단순하게 보아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을 단순한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진실을 밝히고 그것을 알리는 것은 기자의 사명이요 의무다. 그런데 이 진실을 밝힌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진 실을 알려면 사건의 앞면만 보면 안 된다. 사건의 뒷면은 물론이고 옆도 보아야 하고 깊이까지 보아야 한다. 철저하게 전체를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은 앞만 보고 이를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 부장이 말한 앞만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도그마를 믿지 말고, 고정관념을 믿지 말고, 그 시대를 지배하는 잘못된 상식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리영희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우상’을 믿지 말라는 것이었다. 당시의 우상은 무엇이었던가? 극우 냉전이데올로기였다. 베트남 전쟁은 인도차이나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반공 성전’이라는 것이었으며, 베트남이 무너지면 동남아가 잇따라 공산화된다는 ‘도미노 이론’이었고, 초강대국 미국의 힘 앞에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미국의 신화였으며, 자본주의 압도적인 힘에 대한 숭배...같은 것들이었다. 이 부장은 사물을 올바로 보려면 의문을 갖고 보라고도 했다. 기자가 아주 경계해야 할 것은‘일차원적인 사고’라고 했다. 즉흥적으로 사건을 보는 것, 사회 통념이나 고정관념으로 보는 것, 상식적인 눈으로 보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조금 더 강조해서 말한다면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것이었다. 한 발 물러서서 ‘비판적 이성’의 눈으로,‘다시’,‘더 깊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리영희 선생의 여러 저서를 통해 많은 깨우침을 받았고, 그 가운데 적지 않은 것들이 오늘의 현실을 보는데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어 놀라곤 한다. 많은 세월이 지나갔는데도 그의 관점이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리영희 선생이 살아 계신다면 지금의 사태나 사건을 어떻게 보고 발언할까? 하고 자문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바로 ‘생각하는 법’, 사물을 올바로 보는 법, 진실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 어부가 되려는 사람에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준 것과 같을 것이다. 내가 리영희 선생에게서 배운 가장 큰 가르침은 바로 이것이다. 다만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 할 뿐이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신문 르 몽드(Le Monde)지는 언젠가 리영희 선생을 가리켜 한국의 “사상의 은사”(le maître de pensée)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임재경 선배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르 몽드에 실린 기사엔 'le maître à penser'로 되어 있다고 했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것을 가르쳐준 은사’라는 뜻이다. 나에게는 그 두 가지가 다 맞아서 ‘사상의 은사’이면서 또한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준 은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둘 가운데 어느 말을 더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후자 쪽을 택하고 싶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그쪽이 더 지속적으로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을 ‘다차원적으로’보라는 이영희 부장의 말은 그의 역저인 『베트남 전쟁』에 그대로 실현돼 있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베트남 전쟁은 스페인 내전과 함께 현대사에서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두 전쟁으로 일 컬어져 왔다...베트남 전쟁은 단순한 공산주의 대 반공산주의의 대결이 아니었다. 민 족주의, 제국주의, 독립투쟁, 식민지주의, 혁명, 반혁명, 통일, 분열, 독립, 의존, 인 권, 자유, 억압, 백색인, 황색인, 아시아, 서양, 현대, 낙후, 공업, 농업, 초현대식 폭격기, 원시적 소총, 전자계산기, 주관, 선입관, 고정관념, 사랑, 증오..., 그리고 그밖에 상상할 수 있는 20세기의 모든 갈등의 요소들이 뒤범벅되어 전개된 전쟁이었다. 그것이 20세기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라고 일컬어진 전쟁이란 까닭이다. 이 책은 이 같은 전쟁에 대한 의문에 대해 무엇인가 답변해보려는 생각에서 씌어졌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답변이 되었다고 자부해서가 아니라, 그와 같은 의문조차 제기되 지 않고 있던 그 시기의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고 스스로 답변해보려고 몸부림친 흔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리영희 선생과 베트남 전쟁을 생각할 때 내가 큰 감동을 느끼는 것은 진실을 밝혀 세상에 알리려고 애쓰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용기이다. 베트남 전쟁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다룬다는 것은 당시 이 전쟁에 5만 명의 전투부대를 파병하고 있던 박정희 정권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유엔총회의 남.북한 동시 초청에 관한 기사로 필화사건을 겪고 (반공법 위반으로 1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출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그는 베트남 전쟁 비판이 자신에게 얼마나 불리하게, 위험하게 작용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것들에 개의치 않고 “한국의 극우 반공적 언론통제의 사슬을 뚫고 진실의 편린이나마 전달하고자 무진장 애를 썼다.”(『대화』357 p)


그는 베트남 전쟁을 긍정적으로 보도해달라고 정부가 각 신문 외신부장들에게 마련해준 두 차례에 걸친‘베트남 위문여행’을 거부했으며, 두 달 동안만 베트남 전쟁을 취재해 주면 특별한 대우를 해주겠다는 중앙정보부의 회유도 거절했다. 중앙정보부는‘한국군이 잘 하고 있다’는 활동상황을 적당히 써서 보내주면 외신부장 월급의 3배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베트남 인민의 입장에서 전쟁을 보고 기사를 썼다. 한국의 신문들이 파병 이후‘반공 성전’ 또는 ‘자유진영과 공산주의의 투쟁’으로 전쟁을 묘사하면서 전쟁열을 부추기고 있을 때 유독 그만이 지속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에서 기사를 썼다. 베트남 전쟁을 다루는 방법도 매우 다양해서 때로는 외국 신문이나 지식인들의 베트남 전쟁 비판을 끌어다 실었다. 버트란드 러셀이나 장 폴 사르트르, 노엄 촘스키 같은 저명한 베트남 전쟁 반대론자의 글과 발언을 옮겨 실었다. 스톡홀름에서 열리고 있던 베트남 전범재판을 잇따라 보도하기도 했다. 한번은 베트남 전쟁에 찬성하는 시드니 훅(Sidney Hook, 존 듀이로부터 출발하여 맑스주의자가 되었다가 나중엔 미국 보수우익의 대변자가 되었다)과 이 전쟁을 비판하는 사르트르의 글을 같은 분량으로 나란히 실었는데, 시드니 훅의 글은 논리 전개에서 사르트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진실이 드러나는 데는 때로 긴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이영희 부장이 그렇게 열심히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알리려고 노력했건만, 당시 그것은 외로운 목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 언론의 압도적인 견해는 베트남 전쟁이 여전히‘반공성전’이라는 것이었고, 전쟁이 ‘잘 수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특히 심했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미국 국민들도, 서방세계도 이 프레임(frame)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1년 6월 대니얼 엘스버그에 의해 미국에서 이른바‘펜타곤 페이퍼스’(Pentagon Papers, 미국방부 비밀문서)사건이 터지고 전쟁의 진실을 밝히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베트남 전쟁의 추악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국이 북베트남에 대한 전쟁의 구실로 삼았던 1964년 8월의 통킹만 사건도 조작된 것이 밝혀졌다. 1975년 미국이 도망치다시피 베트남에서 철수하면서 전쟁이 종결되자 미국 국민들도, 그리고 전 세계도 미국의 엄청난 기만과 사기, 허위, 날조, 선전에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리영희 선생은 훗날 이 전쟁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미국 내에서도 그 시기에 자기 국가의 소수 전쟁모험주의자들과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해 미국 역사상 최초로 반전운동이 일어났거든. 한 예로 미국 전체 대학생의 25퍼센트가 베트남 전쟁 소집장을 거부했어. 게다가 전쟁기간 중에 27만 명의 미국인 청년과 대학생들이 징집을 피해 국내에 잠적하거나 외국으로 일시 망명했어요. 이런 사실을 한국인들은 그 당시 전혀 몰랐어. 그 27만 명 가운데 훗날의 빌 클린턴 대 통령이 들어 있었어. 미국의 베트남 전쟁이 얼마나 추악하고 정의에 위배되는 침략전쟁 이었는가 하는 것은 미국 국민들의 태도에서 밝혀져요. 기록에 의하면 베트남 전쟁 기 간에 무단 탈영, 도주한 병사가 자그마치 8만 4천 명이오. 전쟁이 끝난 뒤에 그런 이유 로 군법재판에 회부된 수만도 3만 4천 명이나 되고 그 밖의 여러 군법 위반 행위로 불 명예제대한 수가 9만 7천 명이나 돼...” - 『대화』356 p


베트남 전쟁은 ‘성전’이었나? 성전이었다면 미국에서 왜 그토록 격렬하게 반전 시위가 벌어졌으며, 그 많은 전쟁 이탈자가 생겨났을까?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인도차이나가 잇따라 공산화된다는 도미노이론은 맞았는가? 그렇다면 물어야 할 것이다. 지금 인도차이나에 공산국가가 하나라도 있는가? 아니, 지금 베트남은 공산국가인가? 1961년 미국 케네디 정부의 국방장관으로 취임한 뒤 존슨 정부에 이르기까지 7년에 걸쳐 베트남 전쟁을 지휘한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뒤 21년이 지난 1996년에 간행된 회고록에서 이 전쟁을 “수치스런 전쟁. 패배한 전쟁”이라 규정하면서 자신의 과오를 솔직히 인정했다. 전쟁이 끝난 지 21년 뒤에야 잘못된 전쟁임을 깨달은 것을 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1960년대 중반의 조선일보 외신부장이, 그리고 70년대 초반의 한양대 교수가 일찍이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영희 부장’과 ‘리영희 교수’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 밝혀준 보도와 논문이야 말로 진실을 추구하는 언론인과 지식인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 탁월한 본보기라고 생각한다. 리영희 선생의 말대로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없이는 진실은 밝혀지지 않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를 가져야 하며 고통과 자기희생을 무릅써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당시의 가장 큰 우상은 무엇이었던가? 짧게 요약한다면 극우 냉전이데올로기와 ‘절대화된 미국’일 것이다. 그에게‘진실’은 왜 그토록 중요했던가? ‘진실’속엔 ‘미래’가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실은 거짓을 드러내 사건이나 현실의 진짜 모습을 밝혀준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서도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속엔 가야할 미래를 가리키는‘나침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실은‘가야할 미래’,‘지향해야할 미래’를 가리켜 주는 나침판이기도 하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진실을 비틀면(왜곡하면)’ 미래도 달라진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면 리영희 선생이 가고자 했던 미래는 무엇이었나? 맨 앞에 인용했듯이 ‘인간해방’과 ‘사회의 진보’라는 것이 리영희 선생의 말이다. 나는 리영희 선생에게서 저널리스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지식인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았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요한 사건들은 리영희 선생에게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나와 관계없는 일’이 아니었다. 크든 작든 자신과 연결돼 있으며, 따라서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정신적으로 ‘관여(engagement)’하고 참여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외신부 기자인 나의 관심의 초점은 국내의 각종 이데올로기투쟁이나 국내 권력정치 보다는 항상 세계정세의 변화에 집중되어 있었어요...세계의 각 대륙에서 일어나는 그 시대의 엄청난 인류사적 변혁의 역동성을 깊이 관찰. 연구하고 사태진전을 따라가기에 도 힘겨웠단 말이오...지구상의 도처에서 일어나는 세계인민의 현상타파투쟁이 나의 피를 끓게 할 만큼 그 쪽으로 전심 투구했거든...” -『대화』265 p


"나는 신문사 일에 몰두하고 술도 많이 마시는 생활을 할 때에도 아무리 바빠도, 그리 고 아무리 취했어도 고통 받는 베트남인들을 생각하면서 분노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 하지 않고 잠자리에 든 날이 단 하루도 없었어요....“ -『대화』339 p


언론인 리영희 선생을 회상하면서 나는 오늘의 언론과 언론인들을 다시 보게 된다. 오늘의 언론을 과연‘언론’이라 부를 수 있으며. 거기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을 ‘언론인’이라 말할 수 있을까? 리영희 선생이 살아계신다면 지금의 언론을 보고 뭐라고 할까? 아마 크게 탄식할 것이다. 언론이 너무나 타락했기 때문이다. 군사독재시대에는 권력의 탄압 때문에 그랬다고 핑계를 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어느 때보다 언론의 자유를 누리고 있으므로 그런 말은 통할 수 없다. 국민들이 피 흘려 쟁취한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를 공짜로 얻어다 마음껏 누리고 있으면서도 ‘쓰레기 언론’이란 말을 듣는다. 이른바 주류언론이라고 자처하는 보수 언론이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이들이 지켜야 할 언론의 ‘정도’(正道)를 일찌감치 팽개쳐 버렸기 때문이다. 사실과 진실을 ‘이성’으로써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불순한 동기’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특권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사실과 진실을 ‘비틀어’(왜곡하여)‘정치적’으로 다룸으로써 언론을‘프로파간다’수준으로 전락시켰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 신문을 가리켜 어떤 정치세력의‘전단지’(삐라) 같다고 말한다. 한국의 극우보수언론은 지금 가장 강력한 ‘권력’의 하나가 되어 있다.‘언론’이 아니라 ‘언론 권력’이다.‘특권세력’, 기득권 세력의 중심이 되어 그 이익을 지키고 확장시키면서 언제나 ‘더 큰 권력’을 추구해왔다. 그리하여 자신을‘정치권력을 만들어내는 권력’으로까지 여기고 있다.‘밤의 대통령’이란 말은 어쩌다 나온 말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정권이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너뜨릴 수 있으며, 얼마든지 새로운 정권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정치가 국민을 거슬러 해악을 끼칠 때 언론은 더 높은 위치에서, 더 높은 차원에서 그 정치를 감시하고 비판해야 하는데도, 지금의 언론사는 ‘언론’의 이름을 빌려 스스로‘정치’를 하고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저열한 정치다.‘언론’을 저열한‘정치’수준으로 전락시켜놓았다. 리영희 선생은 진실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에 의해 밝혀진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의 언론은 ‘우상에 도전’하기는커녕 우상을 ‘섬기고’ 있다. 그 가장 큰 우상은 여전히 반세기 전의 ‘냉전 이데올로기’이며, ‘극우’가치관이고‘돈’(자본)이다. 특히 거대 자본과 일체화 되어 있다.‘보수保守’를 하더라도 사회와 역사가 전진해 있으면 거기에 걸맞은, 그 단계에 맞는 ‘보수’를 해야 하는데, 이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50여 년 전의 낡은 냉전적 사고방식이다. 언론이 우리 사회와 역사의 전진을 가로막는 ‘수구 언론’이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그 옛날의 언론인 이영희 기자와 오늘의 기자들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영희 기자는 인간을 억압하며 고통을 주는 세계의 주요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끌어안고 고민하고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진실’을 밝히고 알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했다. 신문사에서 쫓겨나거나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기사를 썼다. 그런데 오늘의 기자들은 너무나 왜소하고 저열하고 비겁하다. 직장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그들에겐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위험이다. 언론사의 사주나 간부들이 내려 보내는‘사내(社內) 보도지침’을 충실하게 따를 뿐 저항정신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기사를 쓸 때 스스로‘자기 검열’을 하는 것이 체질화되어 있다.‘기자’가 아니라 그저 월급을 받는 언론사의‘종업원’이 되어 있을 뿐이다. 리영희 선생은 언론사에서 두 번 퇴직당하고, 교수직에서 두 번 해직되었으며, 아홉 번 연행당하고, 다섯 번 구치소에 갔으며, 세 번 징역형 선고를 받고 감옥살이를 했다. 이영희 부장은 그가 추구한 ‘진실’ 때문에 1970년 회사 측의 강요를 받고 조선일보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의 압력이 분명히 작용했을 것이다. 이영희 부장이 떠난 뒤 조선일보 외신부에는 짧은 기간에 두 사람의 부장이 새로 왔다. 새로 온 부장들은 달라도 너무 달라서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양심의 괴로움 때문에 견딜 수 없었다. 얼마 뒤 나 또한 조선일보 외신부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홍범 사진 신홍범. 언론인(조선일보 해직,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도서출판 두레 대표, 리영희재단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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